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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공작소[오륙도.이기대
스토리텔링]-동화-오륙도 저 넘어
부산 앞바다에 보석처럼 떠 있는 오륙도. 한정기 작가는 "오륙도는 부산항의 수호신, 상징적 자연물을 넘어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
- 집 나간 엄마 대신 나를 키운 할머니는
- 아빠가 돌아가신 후
- 용식이 아저씨를 아들처럼 여기셨다
- 등대지기 아저씨와 꼭대기에 올랐다
- "우와!" 절로 탄성이 나왔다
- "오륙도는 바다로 가는 출발점 아이가
- 니도 곧 날개 펴고 훨훨 날끼다"
- 다음 날 아침 해는 구름을 헤치고
- 새빨간 빛을 토했다
- 세상이 환해졌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새로운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속이 상한다고 할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데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나보다 어려보이는 남자아이 한 명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나오는 게 보였다. 내 발걸음은 저절로 그 아이를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그 아이한테서 뺏은 아이스크림과 돈 천 원을 들고 마을버스를 탔다. 제일 뒷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핥아 먹었다. 세상에서 제일 씁쓸한 맛없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삼월은 정말 싫다.
"이거는 학생 기초 조사 설문지예요. 여러분의 가족 사항과 연락처, 부모님이 담임한테 부탁할 게 있으면 다 적어서 내일까지 가져오세요. 그리고 다음 주 수요일은 공개수업일입니다. 부모님께서 여러분이 공부하는 것도 보고 담임선생님도 만나보시는 날이니 미리 말씀 드려서 꼭 참석하시라고 하세요."
담임 선생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우울해진다.
사진은 오륙도 해안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 박수현 기자 parksh@ |
이내 백운포 체육공원 위의 언덕으로 올라섰다.
눈앞이 탁 트이며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시원해진다.
마을버스는 시원하게 뻗은 길을 달려 금방
오륙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오륙도가 손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깝게 보인다.
낚시꾼들이 나오는 걸보니 오륙도와 외항 방파제를 다녀오는 유람선이 방금 도착한 모양이다.
나는 해녀들이 해산물을 파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이, 민성이 왔구나. 벌써 학교 마쳤냐?"
우리할머니 바로 옆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다른 해녀 할머니가 먼저 나를 보고는
반갑게 말을 건네신다.
우리할머니는 해파랑길을 걸으러 온 아저씨와
아주머니한테 멍게와 해삼을 팔고 있다.
환하게 웃는 할머니 얼굴을 보니 오늘은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다.
"여기는 와 오노? 집에서 공부나 하지 않고!"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하신다.
공부? 그까짓 거. 마음만 먹으면 반에서 일 등은 자신 있다.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것만 정확하게 가르쳐 주면 말이다.
일 등 하면 할머니가 기뻐하시겠지만 그것 말고 좀 더 특별한 이유! 나는 그게 필요하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마디를 보면 마음이 찌르르 저린다.
하지만 집 나간 엄마 대신 나를 키워주는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게 공부만 잘하는
거라는 건 좀 유치한 이야기 같다.
공부는 왜 해야 하는데?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만 잘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나?
할머니는 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좋은 직장에 취직도 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지만 그것도 나는 시시한 일 같다.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이 그런 꿈을 가지고 공부하는 걸 보면 우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렇다고 나보다 어린 아이한테 돈이나 뺏는 내가 잘났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런 내가 더 한심스럽고 짜증나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짓을 하게 된다.
나는 다음 주 수요일 공개수업이라 할머니가 학교에 오셔야 한다는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대신 고집스럽게 할머니 앞에 서서 대야에 담긴 멍게와 해삼을 바라봤다.
"와? 무슨 일이고? 내한테 할 말이 있는 거 같구마는?"
"아무것도 아입니더. 그냥 나와 봤어예."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고 할머니가 장사하고 있는
바로 앞의 해맞이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민성아, 어디 가노! 집에 가서 공부 안 하고!"
할머니는 나만 보면 공부하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모양이다.
내가 고집스러운 건 아마 할머니의 저 고집을 닮은 것 같다.
승두말 쪽으로 올라가는데 앞에 오던 아저씨가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른다.
"니, 민성이 아니가? 오랜만이네!"
"어? 용식이 아저씨!"
용식이 아저씨는 우리 아빠와 한동네서 자란 친구다.
아저씨를 본 순간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았다.
나는 용식이 아저씨를 만나고 싶었던 거다.
아저씨는 오륙도 등대지기다.
지난 겨울방학 때였다.
놀이터 구석에서 나보다 어린 아이를 겁주고 나오다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아마 내가 하는 짓을 처음부터 지켜보신 것 같았다.
용식이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며 슬쩍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했다.
"짜식! 힘자랑 하고 싶으면 자기보다 강한 상대하고 붙어야지!"
용식이 아저씨는 그 말만 하고 말았지만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움보다 더 강한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상하게도 아저씨가 나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믿음이 얼핏 들었다.
"오늘 쉬는 날입니까?"
"아이다. 근무하는 날인데, 이 치료하는 게 있어서 잠깐 병원에 갔다 온다고. 빨리 들어가야지."
용식이 아저씨는 주의 깊게 내 표정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민성아, 내하고 등대 안에 들어갈래? 내일 토요일이니까 하루 자고 가도 된다 아니가. 내가 할머니한테 잘 말씀 드릴게."
역시 아저씨는 내 마음을 환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아저씨를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무이요, 민성이 내가 하룻밤 델꼬 자고 보낼 게요. 걱정 마이소."
고집쟁이 우리 할머니도 용식이 아저씨 말이라면 꼼짝 못하신다.
할머니는 돌아가신 아빠대신 용식이 아저씨를 아들처럼 여기시니까.
"이거, 이거 가지고 가서 근무하는 사람하고 같이 묵어라."
할머니는 팔던 해삼을 봉지에 담아주시고 용식이 아저씨는 안 받겠다는 할머니한테
억지로 해삼 값을 쥐어준 뒤 나를 데리고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은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갈매기들이 하얗게 날며 유람선 뒤를 따라왔다.
방패섬과 소나무가 자라는 솔섬을 지나고 아이를 업고 있는 엄마처럼 보이는 바위가
우뚝 서 있는 수리섬과 송곳섬, 커다란 동굴이 있는 굴섬을 지나면 바로 등대섬이다.
유람선은 우리를 등대섬에 내려주고 등대섬에서 낚시하던 아저씨 세 명을 태우고
다시 외항 방파제를 향해 출발했다.
등대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계단 위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 내려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어? 등대에서 강아지도 키웁니까?"
"그래. 우리랑 같이 사는 강아지 다롱이다. 이 녀석이 있어서 조금 덜 심심하지. 우리가 남긴 음식찌꺼기를 먹어치워 주니 환경에도 도움이 되고. 다롱이는 여기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밖에 나간 적이 없다. 여기 계단 아래까지는 따라와 배웅을 하지만 배에 태우려고 하면 발버둥 치면서 절대 안 타는 녀석이지."
"햐! 정말 신기한 강아지네요."
다롱이는 우리보다 앞장서 가파른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마치 우리를 안내하는 것처럼 말이다.
함께 근무하는 다른 아저씨에게 인사를 시킨 뒤 용식이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등대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우아!"
나도 모르게 저절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앞에 아무 것도 막힘없는 탁 트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검푸르게 넘실대는 바다.
그 바다와 맞닿은 파란 하늘.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우울하고 짜증스럽던 가슴이 '와드득' 얼음을 깨 먹은 것처럼 시원해졌다.
나는 한참동안 눈앞에 펼쳐진 바다와 수평선을 바라봤다.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용식이 아저씨의 눈길이 느껴졌다.
아저씨는 내가 먼저 말을 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등대섬 바로 옆의 굴섬에 새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가만히 보니 갈매기와는 다른 새 같았다.
"아저씨, 저 새는 이름이 뭔데요? 갈매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가마우지 아니가. 절마들은 철샌데, 11월 중순쯤이면 오륙도로 날아와서 4월 중순쯤이면 다시 떠나는데 그 동안은 우리하고 이 섬에서 같이 산다 아니가. 저 봐라. 섬에 바위들이 하얗제? 저게 전부다 절마들이 싸놓은 똥이다. 비가 내리면 저 똥이 씻기서 바다로 들어가고 그걸 먹을 라고 고기들이 엄청 몰리 오는 기라. 절마들은 많을 때는 천 마리도 넘는데 아침이면 몇 팀씩 무리를 지어서 먹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저녁때가 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하찮아 보이는 저 새들도 나름대로 다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거라."
아저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가 보니까 민성이 니도 인자 사춘긴 거 같은데?"
아저씨의 눈빛은 마치 내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위로받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느그 아버지랑 내도 사춘기 때 치솟는 불덩어리를 어쩌지 못해서 그냥 좌충우돌 그랬다 아니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렵고 힘든 환경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기라. 육지에서 보면 여기 오륙도는 땅이 끝나는 지점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넓은 바다로 나가는 출발점 아이가. 봐라! 저 넓은 바다! 저 바다 너머에는 더 크고 넓은 세상이 있는 기라. 지금 니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게 맘에 안 들고 속상할 끼다. 하지만, 니는 나중에 저 바다 너머 더 넓고, 더 큰 세상에서 마음껏 날개를 펴고 훨훨 날끼다. 그러니까 니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된다. 어두울수록 더 환한 빛을 내는 등댓불처럼 사람은 스스로를 비추는 마음의 불빛을 꺼트리면 안 되는 기라."
용식이 아저씨는 웃으며 내 등을 다독여줬다.
따뜻한 아저씨의 손길에 화나고 부글거리던 마음이 나도 모르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옛날에는 여기 오륙도에 고기도 엄청 많았다. 느그 아버지하고 밤에 장어를 잡으러 갔는데 그 때는 장어가 보통 어른 팔뚝만한 게 잡히고 했다 아니가. 장어가 올라오면 글마들이 사람을 공격 할라고 덤비드는 거를 몽둥이로 때리서 기절시킨 뒤에 끌어올리고 그랬지. 멸치 떼가 몰리 오면 여기 섬에서 소쿠리로 멸치를 퍼 올리고 그랬는데."
아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동화 속의 이야기 같았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물가물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침 해가 뜨는 걸 보고 싶었다.
해는 아직 뜨지 않고 멀리 수평선을 덮고 있는 두터운 구름 위로 붉은 기운만 감돌고
있었다.
조금 추웠지만 참고 기다렸다.
한참 뒤 해는 구름의 얇은 부분을 헤치고 새빨간 금이 되어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손톱으로 찍어놓은 것 같던 새빨간 금은 차츰 둥근 모양을 만들며 솟아올랐다.
처음엔 한 줄 금이었다가 초승달만큼, 반달만큼 이다 드디어 완전한 동그라미가 되어
구름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다.
바다는 붉은 물결로 일렁였고 부산항을 나온 배들이 긴 뱃고동을 울리며 먼 바다로
나아갔다.
그 뒤로 끼룩거리는 갈매기들이 긴 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구름이 아무리 두터워도 해는 솟아올랐다.
나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셔 내 가슴에 붉은 아침 해를 가득 담았다.
■ 동화작가 한정기
필자 약력
-199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화 등단.
-2005년 '플루토 비밀결사대 1. 다섯 아이들이 모이다'로 황금도깨비상 수상
-5·18 문학상, 부산아동문학상 등 수상
-쓴 책으로는 추리동화 시리즈 '플루토 비밀결사대 1~5', 장편동화 '큰아버지의 봄' 등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