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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9편 14절-50편 2절. (07. 02. 28. 삼일)
49편 14절-20절: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찌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찌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50편. 아삽의 시.
1절-2절: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49편.
14절: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직장되었으니 사망이 저희의 목자일 것이라.’ 죽는 데로 자꾸 인도가 된다는 말인데, 소원과 목적이 불타질 세상을 향해 있으면 사망이 자기의 목자로 되는 것이 이미 작정이 되어있다는 거다.
‘사망’이란 죽은 것, 죽는 것, 살아있어 봐야 계속 죽는 것을 의미하는데, 생명이 없는 자기를 사망이 다스리게 되면 자기가 산다고 하는 것은 전부가 사망이 되는 거다. 세상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하지만 인간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인간들의 삶이 사망에게 삼킨바 되어서 죽어나가는 삶이 있고, 진리로 살면서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 살아나가는 삶이 있다고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다. 사망에게 삼킨바 되는 사람은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거다.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정직한 자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시다. 왜 정직하시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100% 어김없이 사셨으니까 정직한 분이다. 따라서 정직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성도 역시 정직한 자들이다.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아침에 저희를 다스린다는 것은 아침은 그 날이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인데,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란 새로운 신령세계를 뜻한다. 그리고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주권을 말한다. 통치성을 말한다. 능력성을 말한다. 성도에게 있어서 각자가 이 면에 실력적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아침에 저희를 다스린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악한 너희들이 세상에서는 큰 소리를 쳤지만 신령천국에 들어가서는 주님을 많이 닮은 자들이 다스리는 곳이라서 이제는 너희들 세상이 아니라는 거다.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첫째는 신령천국에서는 그들의 물질적인 부요나 권세나 영광은 없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좋다고 하고 알아주던 모든 것은 신령천국에서는 없다.
두 번째는 세상을 심판할 때 세상의 것은 다 불사름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죽은 것은 무덤에 들어가는 것처럼 땅에 속한 것은 전부가 흔적도 없어진다는 말이다. 거처조차 없어진다는 것은 ‘언제 그 사람이 거기에 살았던가? 언제 거기에 있었던가?’ 할 정도로 흔적조차 없어진다는 거다. 그러니까 세상 목적적으로 사는 자들은 아예 사망이 그들의 목자라는 것이고, 산다고 하는 것도 전부가 죽음으로 인도가 된다는 거다. 즉 죽어나가는 것밖에 없다는 거다.
우리가 진리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면 세상을 따라가는 사람들보다 육신적으로 좀 못 살 수도 있고 잘 살 수도 있는 거다. 이 면은 하나님의 주권에 매인 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을 왜 잘 살게 허락하시는 거냐? 예수 믿는 사람을 약 올리려는 거다. ‘예수를 안 믿어도 저렇게 부자로 사는데 네가 그래도 예수를 믿겠느냐?’ 라는 거다.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바로 믿어나가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진리이치로써 사람이 바로 만들어져 나왔다면 지금은 굉장한 기독교 세력을 가지고 있을 거다. 무슨 세력이냐? 기독교인들이 정치계나 권력계에 나가서 꽉꽉 누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월등한 고차원적인 진리의 사람으로 배출함을 말한다. 이런 사람이 직장이던 학교던 리더역할을 한다면 나라가 부요해지고 잔잔해지는 거다. 이렇게 주님 오실 때까지 자자손손으로 내려가면 다 잘 살다가 주님을 맞게 되는 거다.
그런데 내려오면서 진리교훈이 자꾸 변질이 되다보니 교회가 온통 세상화가 되어서 지금은 교회에서 오히려 세상이 더 힘을 쓰고 있다. 하나의 증거가 교인들이 주일날 자격증 시험이나 직장시험을 치는 것이 예사가 돼버렸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예수 믿는 자녀들에게 엄청난 걸림돌이 되는 거다.
15절: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 성도의 중생된 영혼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본구원이 들어있다. 이 기본구원은 사망과 음부를 정복하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생명으로 된 거다. 이 기본구원을 받으면 천국 입국권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권세가 있다. 이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은 이차적으로는 이룰구원에 관한 성화구원의 구속이 있다. 사건과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 진리를 붙잡고 신앙정조를 지키며 이겨 나온 신앙의 결실이 있다. 한 번 이길 적마다 실력이 붙게 된다.
이룰구원에 있어서 신앙생명을 죽이고자 하는 세력에서 탈출하는 것도 구속이다.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찾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중복적으로 구속하여 주신다. 구속이 된다는 것은 구속이 된 부분 부분마다 실력적으로 자유가 된다 그 말이다. 이렇게 해서 자유자가 되면 되느니 만큼 영능의 실력자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사건 환경을 겪어오면서 이긴 것이 하나쯤은 있지 않느냐, 아니면 하나도 못 이겼느냐? 이겨서 열심히 믿는 것과, 아무 시험이 없어서 편해서 교회에 잘 나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신앙이 성장하려면 반드시 환난 시험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환난 시험을 거치게 되어있다. 그리고 환난 시험을 이기면 다음에 오는 시험은 다 이기는 거냐?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또 넘어진다. 그러니 항상 자기를 살피고 말씀을 좇아나가야 한다. 기본구원을 입은 자는 늘 중복적 구속을 입어나가야 한다.
16절-20절: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찌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찌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어떤 사람이 치부하는 것을 볼 때 가난한 사람은 ‘저 사람은 이기주의다. 욕심쟁이다. 돼지 같은 사람이다’ 라고 안 좋게 평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죽을 때 다 못 가지고 가는 것인데 나에게 좀 나눠주고 가지’ 이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죽을 때 죽더라도 나도 한 번 저렇게 살고 싶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면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 마음 속에서는 어떤 반응이 일어나느냐? 첫째, 나는 가난하니까 나눠주지 않아도 되고 부자는 깨달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나눠주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가야 한다? 이게 바로 된 생각이냐? 거지들도 얻어온 밥을 서로 나눠먹는 걸 봤느냐? 욕심 많은 거지는 얻어온 밥을 숨겨놨다가 저녁에 또 먹으려고 할 거다. 그러면 이 밥이 맛이 있겠느냐? 다른 거지들이 저녁 때 얻어온 밥을 바로 먹으면 밥맛이 좋을 거다. 일반 이치적으로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
두 번째,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벌을 안 받지 안 나눠주고 혼자 먹으면 벌을 받는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부자가 왜 불꽃 속에 들어간 거냐? 대부분 부자가 거지에게 안 나눠줘서 지옥에 간 것으로 말을 한다. 이 말이 맞는 이치인지 생각을 해 봐라. 거지에게 안 나눠줘서 지옥에 간 거라면 이 부자가 얼마만큼 나눠줘야 나사로처럼 되는 거냐? 나눠줘도 조금만 나눠주면 어느 정도 덜 뜨거운 불에 들어가게 되는 거냐?
세 번째, 나는 돈도 없고 가난해서 늘 세상에서 부자로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지만 실지로는 불타질 세상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심판을 받을 염려는 없다? 맞느냐, 틀리느냐? 마음이 문제냐?
네 번째, 세상에서 가난으로 살았던 명예 영광을 누리며 살았던 인간의 존귀성을 깨닫고 가야 한다? 맞느냐, 틀리느냐? 말은 맞는 말인데, 이게 남의 말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거냐? 그러니까 남이 부자라면 이 부자는 다른 사람에게 나눠줘야 하지만 자기의 재산이 수십 억대라면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안 나눠줘도 되는 거냐?
내가 집을 두 채 세 채 가지고 있다면 집 없는 교인들에게 하나를 주면 어디 덧나느냐? 그러면 집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 저 사람은 집이 대여섯 채가 있으니 한 채 뺏어서 나에게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래, 네 말이 옳다’ 하시겠느냐? 이것도 문제다. 세상 물질적인 것, 시간 속에 들어있는 것은 전부가 변질되고 불타진다. 물질적인 요소는 다 세상에 두고 간다. 세상의 모든 부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은 죽음 너 너머까지 따라오지 못한다. 우리는 기독교 정신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켜서 생각을 하면 마음 속에서 많이 걸릴 거다. 신앙은 말만이 아니다. 혹시 마음 속에 좋은 일을 하려고 했다가 그만 잊었거나 기회를 넘겼다가 했다가 나중에 그게 생각이 나서 ‘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 라고 한 적은 없느냐? 그래놓고서 또 다시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생겼는데도 지난번처럼 머뭇거리다가 또 기회를 놓친 채 그냥 넘어가고. 이렇게 넘어간 일이 몇 번이나 있느냐?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넘어가야 실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자기를 한 번 생각해 봐라. 이런 사람은 항상 그 모양으로 사는 수밖에 없는 거다. 이 모양으로 살아도 하루 세 끼 안 굶고 그저 그런대로 고만고만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되는 거냐? 스스로 속으면 안 된다. 예쁜 꽃이 확 피듯이 우리가 신앙정신 면에서 확 피면 얼마나 좋을까?
해가 떴다가 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냐? 해 아래의 것은 다 변질이 된다는 의미다. 아기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어서 죽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다가 아니라는 거다.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으로서 진리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만들어져서 하늘나라를 마음 것 다스리고 누릴 실력을 키우라는 거다.
우리 인격자에게 영원을 사모하게 한 것은 무슨 뜻이 있는 걸까? 사람마다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다. 영원히 좋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미래적으로 어떤 뜻이 있기에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런 생각들이 도는 걸까?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20절: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너는 존귀한 자로 만들어졌으니 가치판단 평가를 잘 해 보고 영원히 효력이 있는 것을 붙들라는 거다.
50편. 아삽의 시.
아삽은 다윗 왕의 지시 하에 법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도록 지명하여 세운 레위지파의 성가대 대장이다. 성가대 대장은 늘 성령에 감화 감동을 입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찬양은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는 거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고 은혜 받은 찬양을 하도록 되어있다. 계:에도 보면 신령세계에서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것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절: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심이 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말씀하심도 있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심은 주로 시내광야에서 많았다. 간접적으로 말씀하심은 전도를 위함이 많은데, 출생해서 죽음의 선을 넘어가기까지의 사이에 이 방편으로 부르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심은 인간이 출생에서부터 죽음의 선을 넘기 전까지 언젠가는 부르신다. 죽고 난 뒤에 불러봐야 소용이 없는 거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있을 때, 나그네 생활을 할 때 부르신다.
인간이 출생을 해서 죽음의 선을 넘어갈 때까지 가만히 있느냐? 아니다.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그래서 부르심에 있어서 생활의 가난을 통해서 불러주시고, 질병을 통해서 불러주시고, 일터에서 대화로, 친구들과 대화로, 길을 가다 만난 사람과 대화로 통해서 부르신다. 또한 죽은 시체를 보게 해서 불러주시고, 생활의 풍부함을 통해서도 부르심이 있는데, 보통은 이 부르심을 잘 깨닫지 못한다. 왜 그런가 하니 물질이 풍부하면 마음중심이 세상의 누림성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예수님을 믿게 하심은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신비스럽고 참 묘하다. 이런 건 다 간접적으로 부르심이다.
그리고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전체적 부르심이 있다. 이건 시골 촌 구석구석까지 전체적 부르심이다. 살아있는 자나 창세 이후 마지막까지 죽어서 무덤에서 잠자는 자까지 다 부르시는 거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부르심은 전도의 부르심이고, 여기서는 세상 마지막 때 심판이 전제되어 있는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도 아주 다양하다.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불렀다는 이게 무슨 말이냐? 해가 돋고 지는 밖에 또 뭐가 있느냐? 없다.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란 우주 전체를 말하는 거다.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세상을 부르셨도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람 외에 다른 것을 불렸다는 게 아니라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를 부르신 자가 누구냐? 어떤 분이시냐? 우리를 위해 신령계와 물질계를 창조하시고, 모든 우주만물이 돌아갈 수 있도록, 역사가 진행이 될 수 있도록 법칙과 이치를 넣어서 만드셨고, 또한 우주만물이 이 법칙에 따라 활동을 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 마지막 날까지 우주만물을 섭리하시고 보존하시고 역사를 진행하는 분이다.
특별히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격자로 지으셔서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성을 갖도록 하여 하나님을 온전하게 닮아지도록 역사를 하는 분이시다. 이렇게 역사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신령천국을 당신처럼 누리게 해 주시려는 거다. 우주만물 가운데 우리 인간처럼 특수하게 지은 피조물은 없다.
2절: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온전히 아름답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성품 혹은 인격을 말한다. 그러니까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신다는 것은 이런 온전한 신앙을 가진 자로 통해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신다는 거다.
빛 앞에서는 모든 것이 숨기지 못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빛 앞에서는 모양과 형체, 길이와 넓이와 깊이가 다 드러나듯이 영적인 진리의 빛, 이치 앞에서는 신앙지식이 어느 쪽에 붙어있는 건지 다 드러난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지식인지, 생명과를 따먹고 나온 지식인지 드러난다. 그리고 그 지식의 성격과 성질과 성분이 얼마만큼 감염이 되어 들어갔는지, 무엇으로 감염이 된 것인지, 무슨 감화성을 띠고 있는 건지 다 드러난다. 또한 성령의 감화성을 띠고 있는 건지, 악령의 감화성을 띠고 있는 건지, 또는 일반감화인지 특수감화인지 드러나고, 신앙상태가 식어지고 있는 건지, 뜨거워지고 있는 건지 하나님의 빛 앞에서는 다 드러나게 되어있다.
자기가 지금 신앙하는 것이 뜨거워지는 상태인지, 아니면 식어 들어가는 상태인지 웬만하면 느낄 수 있다. 렌지 위에서 물을 팔팔 끓이다가 불을 탁 끄면 뜨거운 물이 식어가는 거냐, 더 뜨거워지는 거냐? 식어가는 거다. 뭘 보면 아느냐? 불이 꺼진 것을 보면 안다. 그런 것처럼 자기의 신앙이 자기 속에서 ‘식어가는구나, 뜨거워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있는 거다. 여기에 와서 처음에 말씀을 들을 때는 뭔가 새롭기도 하고 ‘쨍’ 했는데 워낙 듣다 보니 시들시들해지는 건 없느냐? 이럴 때 ‘내가 이래서야 쓰겠느냐?’ 하면서 자기가 불을 당겨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빛은 모든 사물과, 사건의 판단의 지식과, 신앙 사상적인 영적 감화와 지식을 잘 판단 분별케 해서 나와 다른 사람이 구원을 잘 이루게 하는 복음의 빛이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이 구원의 빛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면 구원이 안 되는 거다. 그러면 구원이 된다는 게 뭐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다각적인 면으로 입어가는 걸 말한다. 하나하나 깨달아져 가면 이것저것이 착착 맞아 들어간다. 이러면 충만해진다.
에스겔이 골짜기에서 에스겔이 외치니까 말라빠진 뼈와 뼈들이 막 달라붙었는데, 팔다리는 남자 뼈인데 해골은 여자 뼈가 와서 붙었느냐? 각자 다 자기 뼈를 찾아간 거다. 이렇게 해서 큰 군대가 되더라. 이건 진리운동을 말하는 거다. 뼈와 뼈끼리 붙는다는 것은 신앙의 뼈대가 세워지는 걸 말한다.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이런 일이 에스겔 골짜기에서만 된 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되어지는 영적인 상태를 말해주는 거다.
그러면 그 때 살아난 사람들이 다 죽었을까, 아직까지 살아있을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 무덤에서 나온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안 죽었을까? 그리고 이 때 살아난 사람들이 부활을 한 거냐?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과는 성질이 다르다. 이것은 우리의 중생과 이룰구원을 보여주는 거다. 신앙 믿음이 죽었던 상태에 부활의 사상이 들어가면 신앙 믿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다시 살아났다고 증거를 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어? 저 사람 이 교회에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가더니 정말 믿음 있는 사람이 됐구나’ 이런 뜻도 있는 거다. 이런 신앙은 현실에서 되어지는 거다. 자기의 현실에서 이걸 봐야 자기 속에서 신앙 믿음이 활동을 하는 거지 ‘옛날에 그랬구나. 저랬구나.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겠구나’ 라고 하며 역사적으로만 아는 것은 나의 신앙과는 상관이 없다. 힘이 없다. 이건 예수 믿는 정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나오는 지성소에 법궤가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진리통치를 받는다. 이렇게 함으로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입어가는 거다. 이것은 지상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모형계시, 상징계시, 역사계시로서 지금도 신실한 종들로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택자들을 불러 구원시키고, 모이게 해서 말씀을 듣고 배워서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어 나가는 교회를 말하는 거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빛으로 분별케 하고 성장시켜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신적 도덕적 인격적 극치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단일 된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면 이게 하나님의 빛이라. 성도를 보고 하는 말이다. 자기보고 하는 말이다. 시온의 성도는 참과 거짓을, 생명과 사망을, 천국과 세상을, 진리와 비진리를,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분별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정직한 길로 가게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를 신앙정신 사상적으로 이렇게 만드는 거다.
우리는 시온에서 하나님의 빛이 나온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의 교회에서 사람을 구원하고 분별시키는 빛이 나온다는 거다. 어느 곳에서건 이런 교훈이 나온다면 그곳이 곧 시온성이다. 하나님이 계시고 통치하는 곳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빛이 있는 진리본질의 교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이걸 누누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고, 설교를 듣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