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계시록 18:4-8
제목: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 기독교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성도들의 믿음입니다.
| 계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
요한계시록 18장 4절에서 8절에 이르는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핵심적인 교훈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결코 세상에 속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확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세상에 속한다는 것이 과연 어떠한 의미인지를 깊이 있게 통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때에 우리가 누리게 될 신령한 몫과 영원한 가치를 희생시키는 행위입니다. 즉, 세상이 제공하는 현재의 부와 물질적 풍요, 그리고 각종 세속적인 혜택을 당장 누리기 위하여, 성도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거룩한 가치관과 영적 정체성을 타협하거나 양보해 버렸음을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교회 안팎의 현실을 돌아보면, 세속화라는 영적 질병이 얼마나 심각하게 기승을 부리고 있는지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화는 경건하고 거룩한 성화를 마치 시대착오적이거나 현실과 떨어진 이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처럼 치부해 버립니다. 나아가 악하고 이기적인 가치관을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포장하여 보게 만드는 왜곡된 시각을 제공합니다. 그리하여 현대의 연약한 명목상 신자들은 세상이 정상이라고 규정하고 합리화하는 온갖 세속적 기준과 삶의 방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상 속에서 이러한 세속적 유혹을 경험하게 됩니까?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직장에서의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고, 가족이 거주할 보금자리인 집을 마련하거나 이동 수단인 차량을 구매하기도 하며, 머지않은 미래의 은퇴 이후를 대비하여 신중하게 경제적인 계획을 수립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지극히 당연하고 필수적인 삶의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도들은 이러한 지극히 일상적이고 경제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은밀하게 침투하는 세속화의 유혹을 어떻게 지혜롭게 피하고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핵심적인 답은 바로 “우리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모든 재정과 삶의 자원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방법에 따라 관리되고 지배받아야 한다!”는 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물질과 시간, 그리고 모든 기회는 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위탁된 것입니다.
| 마6: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현대인: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이러한 신앙적 가르침과 제자도의 본질을 오늘날 우리가 속한 지역 교회 내부에서 어떻게 실체적으로 적용하고 구체화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성도로서의 청지기 직분과 관련된 다양한 현실적 문제들과 깊이 씨름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제자의 길을 걷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해야 합니다.
●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돈과 물질, 그리고 소유에 대하여 매우 많은 말씀과 경고를 남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의 물질관과 청지기직의 실천). 예수님께서 물질의 위험성과 올바른 재정관에 대해 이처럼 반복하여 강조하신 데에는 아주 충분하고도 명확한 근거가 존재합니다.
| 마6: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 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But store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물질은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빠르게 떼어놓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이러한 재정에 대한 말씀들을 깊이 있게 검토하고 탐구하며,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고 계시는지 참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결국 바벨론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물질주의적 구조와 결탁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는 자들은, 머지않아 도래할 바벨론의 심판과 함께 자신들도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될 것임을 성경은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 계18:7.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여황女皇)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0.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
이 세상의 부귀와 권력은 영원치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허무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세속적 가치관에 미혹되어 영원한 소망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합니다(딤전6:9~10; 요일2:15~17). 매일 주님의 말씀 위에 스스로를 바르게 세우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대행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세상에게 물들지 않는 거룩한 독특성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참된 신앙의 자세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열매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며 말씀의 기준을 붙잡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진정한 청지기의 삶을 실천해 나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수많은 물질적 유혹과 세속적인 가치체계로 촘촘히 짜여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벨론’은 단순한 역사 속의 한 도시나 국가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욕망과 물질적 풍요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모든 세속적 구조와 문화 전체를 상징합니다(바벨론적 구조에 대한 해석과 경고). 이러한 바벨론적 세상 구조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소유가 곧 너의 존재 가치’라고 속삭입니다.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사회적 지위, 더 넓은 평수의 집과 고급스러운 차가 인생의 성공 기준이라고 교묘하게 설득합니다. 그러나 심판이 현실화되면 거짓은 폭로됩니다.
| 계18:2.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악마들)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악령)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14.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
그래서 성경은 이 모든 바벨론적 체계가 반드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 무너질 것임을 밝히 알려줍니다. 바벨론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세상 구조와 타협하고 결탁하는 삶은, 결국 그 구조가 무너질 때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요구되는 청지기직은 단순히 돈을 아껴 쓰고 조심스럽게 관리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영적 투쟁의 문제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믿음과 성화로 고백하는 거룩한 결단입니다(눅16:13).
|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No one can serve two masters)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교회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바벨론의 방식에 안주하고 있는가?’ 영적 질문을 함께 나누며, 서로가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격려, 지탱해 주는 안전망이 되어야 합니다. 소유자가 아닌 청지기로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때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참 성도의 삶이 됩니다.
첫댓글 초신자와 바쁜 분들은 묵상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여력이 되는 분만 아래 추가 설명을 읽으세요
<호크마 주석: 계시록>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 '하늘로서 다른 음성'은 '내 백성 아'라는 진술로 보아 하나님의 음성인듯 하나 사실상 하나님의 음성으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다른 음성'의 주체에 대한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나(Charles) 천사의 음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unce).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 본절은 바벨론을 향해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메시지를 반영한다(렘 50:8;51:6-9). '나와'이 헬라어 '여셀다테'(* )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을 통하여 자신의 백성을 구별하시는 것을 나타낸다(창 12:1;렘 51:45, Mounce). 하나님은 구속받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큰 성 바벨론의 죄악인 음행과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어들지 말고 빠져 나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도록 명령하신다(Kiddle). 이러한 명령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는 짐승에 의해서(13:7, 8) 모든 백성들이다 순교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함은 물론(Ladd) 이러한 짐승의 핍박과 유혹에 넘어가 큰 성 바벨론에 참여하는 백성들은 큰 성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는 것이 되며 그로 인해 큰 성 바벨론 이 당할 멸망에 동참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큰 성 바벨론에서 나와 구별될 것을 명령하시며 경고하신다. 이 경고에 대해 혹자는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을 향한 마지막 회개에의 촉구라고 해석하나(Caird) 그렇게 볼 이유는 없다. 도리어 그것은 큰 성 바벨론의 유혹을 당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명령과 경고이다(Johnson).
=====18: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 본문은 렘 51:9을 반영한다. 큰 성 바벨론의 죄는 하늘에 미칠 정도로 극에 달하였다. 그의 죄는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관영하고 팽배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 즉 죄를 기억하셔서 진노의 포도주를 부어 심판하실 것이다(2, 6절;16:19).
=====18: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 본절은 하나님의 보응의 심판에 대한 진술이다.
여기서 '갑절을 갚아주고'의 해석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큰 성 바벨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최대한의 형벌이나 심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2) 혹자는 '갑절을 갑아주고'가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 합당한 징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렘 16:18;17:18, Beckwith, Ladd).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음녀의 큰 성 바벨론은(17:18) 하나님을 대적한 죄는 말할 것도 없고, 만국을 미혹하여 사람들로 하나님과 어린양을 대항하게 하고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며 분에 넘치는 사치에 빠져 교만에 이르게 한 죄에 대해 응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한편 앞절과 본절에서는 성경의 복수에 대한 진술을 엿볼 수 있다.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약성경에 나타난 복수법을 시행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 축복을 기원해야 하며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롬 12:14, 17).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복수의 심판까지도 백지화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큰 성 바벨론의 죄악을 기억하시고 공정히 판단하셔서
마지막 날에 심판으로 보응하실 것이다(신 32:35;렘 51:24, 36;롬 12:19;벧전 3:9).
=====18: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어주라. -본문은 큰 성 바벨론의 죄에 대한 진술이다. 바벨론의 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를 영화롭게 한것', 즉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는 '교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치'이다. '사치하였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트르레니아센'(* )은 극에 달한 방탕한 생활을 가리킨다. 바벨론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피조물에 불과하면서도 창조주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렸으며 방탕한 생활로 악의 선봉자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은 그러한 바벨론의 교만과 사치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고난과 애통으로 갚으신다.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 본문은 바벨론의 교만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사 47:7-9을 반영한다(겔 28:2;습 2:15). 바벨론은 스스로 왕임을 자처하며,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풍요로운 물질을 의지하여 절대로 애통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벨론의 교만과 물질은 '하루 동안'에 패망할 만큼 하찮은 것이다. 교만과 사치에 빠진 바벨론은 철저하게 파괴되며 멸망당하게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
=====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 '하루 동안'은 아주 짧은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벨론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을 시사한다. 바벨론에게 순식간에 임할 재앙은 네 가지이다. 네 가지 재앙은 바벨론의 교만과 사치에 대한 보응이다.
(1) 사망 - 이것은 바벨론이 스스로 '과부가 아니다'라는 자랑에 대한 보응이다.
(2) 애통 - 이것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풍부한 물질만을 의지하며 즐긴 것에 대한 심판이다.
(3) 흉년 - 이것은 12, 13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바벨론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징계이다.
(4) 불에 살라지리니 - 이것은 성경에서 자주 진술되는 바와 같이 성의 멸망을 나타낸다(9, 18절). 바벨론은 하나님의 네 가지 재앙을 통해서 완전한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 이것은 바벨론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바벨론은 스스로 가장 강력한 왕임을 자처했으며 절대로 자신에게 애통할 일이 없다고 주장하여 자기 도취에 빠졌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숭배하도록 하였다. 스스로 가장 강한 자임을 자처한 바벨론의 자랑은 자신을 속이는 행위였다. 왜냐하면 바벨론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한 바벨론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신하나님께 심판을 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벨론을 심판하신 하나님만이 전능하신 분이며 온 세상의 주가 되신다.
네, 읽고 참고합니다.
<매튜 헨리 주석>
바벨론의 멸망(3) (요한 계시록 18:1-8).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바벨론의 몰락과 멸망의 사건. 그 사건의 결과가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을 이룩하게 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환상과 예언이 반복되고 있다.
1. 큰 권세와 광채를 지니고 하늘로부터 임한 또 다른 천사가 있다(1절). 그는 자신의 예언에 대한 진실성을 밝혀 줄 뿐 아니라 그 놀라운 사건을 세상에 알려 주기 위한 빛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 사건을 식별할 만한 빛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도 소유하고 있다.
2. 이 천사는 이미 이루어진 사건으로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소리를 듣고 이러한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임을 알 수 있도록 천사는 큰 음성으로 외쳤다. 이것은 바벨론의 멸망이 예언했던 것(사 21:9)과 비교가 되는데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고 반복하고 있었다. 혹자는 이로써 바벨론의 이중적인 멸망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2절).
그러나 이 말씀도 이사야서 21장 9절에서 역시 인용된 말씀이며(귀신이라 불리우는 바) 우상을 즐기는 바벨론의 죄보다도 오히려 그들이 받을 심판을 묘사하는 것 같다. 더럽고 가증한 새들과 마찬가지로 더러운 영이 파멸에 이른 도성이나 자정들을 괴롭히는데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3. 멸망의 이유를 말하고 있다(3절). 하나님은 그의 이루시는 일에 대해 이유 대실 필요는 없으시나 특별히 가장 두렵고 무서운 섭리를 시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이유를 기꺼이 밝히신다. 바벨론의 죄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즉 바벨론은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인 음행을 저지르도록 묘책과 힘을 기울였고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재물과 사치품으로 매수하였다.
4.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바라는 자들에게 내리는 경고. "그곳에서 나올" 뿐 아니라 그곳을 멸망시키는 일에 함께 힘쓰라고 분부하신다(4,5절). 여기에서 아래의 몇 가지 점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은혜로 선택함을 받는 자들을 바벨론 내에도 보유하고 계신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 밖으로 무사히 부르심을 입게 될 것이다.
(3) 사악한 무리들의 죄에 참여한 자들은 재앙을 받을 수밖에 없다.
(4) 사람들의 죄가 하늘에 사무치게 될 때 하나님의 진노가 땅에 임하게 된다.
(5) 개인적인 복수는 허용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필요시에 그와 그들의 고질적이고도 달래기 힘든 원수들을 멸하는 일에 있어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수하에서 한 몫을 행하도록 하실 것이다(6절).
(6) 하나님은 그들의 죄와 교만 그리고 방심의 분량에 따라 죄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7절).
(7) 멸망이 급작히 사람들에게 이르게 될 때 그들의 비참함은 더욱 형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8절).
다른 구절보다 매튜 헨리치고는 양이 적은 것 같습니다.
<박윤선 주석>
계 18:4,5
바벨론에서 택한 백성을 불러내심.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과 악도를 함께 멸하시지 않는다. 택한 백성도 악한 무리와 함께 환난에 동참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악도만을 목표한 것이 아닌 일반적 환난이었기 때문이겠다. 일반적 환난에는 성도도 참가하므로 연단도 받으며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여기 바벨론이 받는 화(禍)에서는 택한 백성들은 제외되기 때문에 그들은 거기서 불러내어져 구원된다.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 이것은, 죄가 너무 많으므로 그 분량이 하늘에까지 닿았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것은 비유의 말이다. 하나님께서 홍수로써 땅을 멸하실 때에는 죄가 땅에 가득하였던 정도이지만 (창 6:11), 이때에는 하늘에까지 닿는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이런 표현들에 대하여 너무 글자대로인 대조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계 18:6,7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 옛날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나라들을 벌하실 때에 강국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신 일이 있었다. 그 때에 바벨론은 분정(分定)에 넘치게 잔인과 포학을 행하였다(사 10:5-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벨론 나라를 벌하셨다.
그 나라는 열국(列國)에 포학을 행한 대로 갚음을 받았다. 그처럼 우리 본문에 바벨론으로 상징된 이 세상도 천벌을 받아서 멸망한다. 이 세상은, 옛날 바벨론처럼 하나님 앞에 교만해져서 성도들을 살해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 그 죄 값으로 이 세상은 아주 멸망을 받게 된다.
그의 행위 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 "갑절을 갚아" 준다함은 심한 보응을 의미한다. 왜 이렇게 심한 보응이 그에게 미치는가? 그 이유는, 그가 한 일이 너무도 악하였기 때문이다(사 40:2; 렘 16:18 참조). 루트겔(Rutger)은 "갑절"
이란 말을 "그 만큼"이라고 번역하였으나(De Echtheid van het Tweede Gedeelte Van Jesaija, p. 167), 이것은 신용되기 어려운 번역이다.
섞은 잔에도 -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쫓아오는 세상 죄악(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는 죄)의 잔이란 말과 같다. 이 세상은 모든 나라들에게 이런 무서운 죄악의 잔을 부어 먹여 준 것이다. 위의 3절에,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라는 것이 곧 그것이다. 이 세상주의를 받는 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영적 음행에 빠지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 이것은 바벨론이 벌 받게 되는 죄를 다시 말한다. "자기를 영화롭게" 한 죄는, 곧, 3절의 "사치"란 죄에 포함된다. 그는 "여왕" - 처럼 자만하여 자기 영광을 구하므로 그렇게 사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비례식 심판(比例式審判)에 의하여 그만한 애통에 떨어진다.
계 18:8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 이것은 갑자기 멸망이 이를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물론 죄인의 멸망이 날마다 나타나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한 날 한 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죄인들은 자기의 멸망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방심(放心)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멸망의 한 때가 반드시 있음을 내어다 볼 줄 알아야 된다.
사망과 애통과 흉년...불에 살라지리니 - 이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재앙들이다.
국내파 학자의 혹시 한계일까요? 내용과 양이 적습니다.
이 도시의 번영과 범세계적인 분위기는, 이 도시의 사치 풍조나 부도덕성과 함께,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참조. 사 13 : 2-22; 램 25 :12). 신약에서 바벨론은 로마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벧전 5 : 13; 계 1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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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영> Babylon; <히> 바벨 <헬> 바뷜론 - 신들의 문>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 80km쯤 떨어진 유브라데 강변에 위치했던 바벨론 제국의 수도.
성경은 이 도시가 ´니므롯´에 의하여 건설되었다고 말한다(창 10 : 10). 수메르인들의 기록에도 (B.C. 2250년경의 자료), 아카드의 사르곤 왕에 의하여 파괴된 이 도시의 신전을 니므롯이 복구하였다고 나타나 있다. 우르 제3왕조 때에는 (B.C. 2150-2050년경) 이 도시가 셈 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그 후 이 도시는 바벨론 제 1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바벨론 제1 왕조의 함무라비 왕은(B.C. 1750년경) 이 도시를 복구시키고 그 영향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B.C 1600년경에는 이 도시가 헷 족속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그 후에는 카시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계속하여 앗수르와 엘람의 침범을 당한 이 도시는, B.C. 1124년경 느부갓네살 1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B.C. 8세기경 신앗수르 제국이 여러 차례 침범해오자 이 도시의 주민들은 맹렬히 항거하였다.
그러나 결국 B.C. 689년 산헤립 왕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고 말았다. 산헤립왕의 아들인 엘살하돈 왕은 이 도시를 다시 복구시킨 후에 자기의 유력한 종주도시로 만들었다. 신앗수르 제국이 B.C. 698년에 멸망 당하자, 이 도시는 친바벨론 제국의 수도가 되어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 때 나보폴라살 왕과 느부갓네살 2세는 이 도시 안에 거대한 건물들을 많이 지었으며,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로서 이 도시에 머물도록 하였다(왕하 24 ,25장; 마 1 : 11-12, 17).
B.C. 539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이 도시에 입성하자, 이 도시는 자연적으로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단 5 : 30). 이 도시는 그 후에도 B.C. 478년 크세르크세스(참조. 스 4 : 6의 아하수에로)에 의해 침공당하였다. 그 후 알렉산더 대제가 이 도시를 크게 재건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후계자 셀류쿠스 1세 니카터가(Seleucus I Nicator) 바벨론 대신 티그리스 강변에 새 수도인 셀류키아(Seleucia)를 건설하여 이 도시는 점차로 약화되고 말았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이 도시에 대한 탐험과 발굴이 매우 활발해졌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이 도시는 요새화된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넓이는 약 8.4 ㎢ 쯤 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성문은 8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문은 느부갓네살 왕의 여름 별궁 근처에 있던 ´이쉬타 문´이었다.
유브라데 강과 평행을 이루며 길이 914m의 중심로가 있었는데, 이 중심로가 이쉬타 문에서부터 에터메나키 신전과 에사길라 신전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신전들은 마르둑 신에게 바쳐진 것들이며 탑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이 곳에서는 왕궁과 여러 신전들(고대 문서에는 이 도시 안에 50여 개의 신전이 있었다고 기록됨), 전설의 ´교수형 광장´ 등이 발굴되었다. 이 도시의 번영과 범세계적인 분위기는, 이 도시의 사치 풍조나 부도덕성과 함께,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참조. 사 13 : 2-22; 램 25 :12). 신약에서 바벨론은 로마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벧전 5 : 13; 계 14 :8).
※ 참고 문헌
A.Parrot Babylon and the Old Testament(New Tork : 1958)
출처: <GODpia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현대판 바벨론은 어느 나라일까요?
저보다도 더 초신인 분들을 위하여 포스팅 전문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결코 세속적인 가치관과 타협하여 세상에 속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당장의 부와 편안함을 위해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가치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우리가 구직과 집 마련, 은퇴 준비 등 일상적인 경제 활동을 할 때도 세속화의 유혹은 은밀하게 침투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정과 시간, 삶의 모든 자원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위탁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이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빠르게 떼어놓는 위험 요소임을 거듭 경고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벨론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물질과 욕망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세속적 구조와 문화를 상징합니다.
바벨론적 세상은 소유와 지위가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고 속이지만, 이러한 체계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집니다.
참된 청지기직은 단순히 돈을 아껴 쓰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 재물 중 누구를 섬길지 결정하는 영적 투쟁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속적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지탱해 주는 영적 안전망이 되어야 합니다.
소유자가 아닌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세상에 흘려보낼 때 참된 성도의 삶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큰 도움이 돼서 감사합니다.^^
작성하신 글 내용처럼 세상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고 날마다 주님의 청지기로 살아가고자 다짐하게 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소유나 세상적 성공이 아닌, 내 삶의 참주인이 누구신지 늘 기억하며 영원한 하늘 가치를 바라보겠습니다.
세속화의 유혹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고 지탱해 주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소망을 잃지 않고 굳건히 서 나가길 응원합니다.
주님,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소유가 아닌 청지기로서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매일 고백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맘몬주의가 만연한 세상과 교회 세태에서 교회가 영적 안식처로서 타락을 방지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적극 공감합니다.
목회자, 교인들마저 이 세대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집니다.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바벨론의 풍습을 따라가지 않고 청지기로서의 선한 소명을 따라가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아멘!
세상의 성공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참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시금 깊이 결단하게 됩니다.
매일의 경제 활동과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주님이 삶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며 영원한 하늘 소망을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세속화라는 은밀한 유혹 앞에서 서로를 따뜻하게 격려하고 지켜주는 거룩한 교회 공동체로 함께 서 나가길 마음 모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