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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1-25 요절/ 마태복음 1:23 | 2021. 12. 12 | |
성 탄 제 1 강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018년쯤 영국에 외로움담당 장관이 임명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외로움은 매일 담배 15개피씩 피우는 것 보다 건강에 해롭다고 합니다. 카톡, 인스타, 줌등 정보통신의 발달로 소통할 수 있는 도구는 많아 졌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외로움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은 많아졌습니다. 코로나는 이를 더욱 가중 시켰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연말이 되고 성탄이 다가오면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부쩍 증가합니다. 앞에서 보니 우리 중에도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외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시요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올해도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이 시간 마태가 전해준 성탄의 메시지를 듣고 임마누엘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넘치길 기도합니다.
마태복음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복음서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 선거에 의해 최다득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되는 가장 중요한 정통성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어야 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인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촌구석 목수 출신으로 알았던 예수님이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를 그리스도의 계보 곧 족보를 통해 보여줌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태가 전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말이 무려 40회나 반복됩니다. 그래서 모처럼 마음먹고 성경을 읽는 이에게 초장부터 수면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이 족보는 14대씩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는 아브라함부터 다윗 왕까지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로 이어지는 초기 조상들입니다. 이들은 허물과 연약함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포악한 자들을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 속였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 형의 장자권을 취하였고, 유다는 동생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러나 진실 되게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메시야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들 중에 장자가 아닌 경우가 많은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7-11절까지는 다윗 이후부터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기까지 왕들이 나옵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고 말씀을 떠나 하나님께 반역한 때입니다. 나라는 둘로 나뉘고 온갖 음모와 배반, 암살과 쿠데타와 같은 정변으로 역사는 얼룩졌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이 돌아오도록 말씀하셨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였습니다. 남유다도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성전이 불타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남은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12-17절까지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후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로 이스라엘 역사의 암흑기입니다. 족보에 오른 사람들은 다윗의 혈통이지만 왕들이 아닙니다. 이 시기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점령되어 주권을 잃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말라기 이후 400년간 선지자가 없어 하나님의 말씀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은 폐하여지고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구원 역사는 계속 되듯이 하나님은 이 시기에도 열심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낳고 낳는’ 생명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세계를 정복한 그리스와 로마를 통해 언어와 문화가 통일되고 복음이 세계로 전파될 길이 닦이게 되었습니다. 흩어진 유대인들로 인해 여호와 신앙이 주변에 많이 퍼졌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되었고 선지자들이 그토록 예언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천사들도 너무나 흥분되어 한밤에 긴급 뉴스로 타전합니다. “오늘날 다윗에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하나님은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때 희망의 빛을 비추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이십니다.
마태가 전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나는 특징 중에 하나는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역사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는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마태는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하지 않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합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 라고 하지 않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합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한 여인이요, 라합은 멸망 받을 여리고성의 기생이었으며, 룻은 이방 여인이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왕이 간음한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믿고 산 믿음의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여인들을 넣으려면 사라나 리브가를 넣어야지 굳이 이런 여인들을 넣을까요? 심지어 마태는 우리로 치면 세종대왕처럼 존경하는 다윗왕의 치부도 드러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도 다윗이 간음죄를 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생각하기도 싫은 수치의 역사인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간 역사’를 4번이나 강조하여 쓰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족보연구가가 남의 집안의 족보를 이렇게 기록한다면 당장 소송에 걸리지 않겠습니까? 제가 위키드 백과에 김해 김씨의 족보에 대해서 찾아보니 대략 가라국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있고 고려시대에도 정승, 명신, 공신, 장군을 숱하게 배출하였다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옛날 멸망한 나라의 족보도 이렇게 기록하는데 그리스도의 족보를 그의 제자가 왜 이렇게 기록하는 것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의 헛된 자기 의와 교만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날 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할례 받은 자들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인간의 의를 내려놓게 하기 위함입니다. 선민으로 알지만 잘 보면 기생의 자손이요,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족이요, 간음한 왕의 자손이요, 나라도 빼앗기고 포로되었던 자손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죄인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뼈 속까지 배어 있는 특권 의식과 인간의 의를 내려놓고 겸손히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넓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상 만민의 구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이나 개인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역사가 있습니다. 내 삶을 돌아볼 때 자랑스러운 순간도 있지만 부끄러운 역사도 있습니다. 이런 역사는 가능하면 숨기고 싶습니다. 나의 연약함과 실패와 죄와 허물이 드러나고 고통의 순간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숨기고 싶은 그 역사 때문에 나는 겸손히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얼굴이 붉혀지는 그 일 때문에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순간 때문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세금을 착취하여 로마에게 바치던 어두운 과거 때문에 마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겉만 보면 성골족 목자처럼 보입니다. 크리스찬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고 대학 때 UBF목자로 부름 받아 캠퍼스 목자요 선교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보면 죄와 허물과 연약함과 실패가 많습니다. 실력이 부족하여 야간학부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UBF목자가 되었지만 인본주의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고 정욕과 이기심 등 죄의 습관이 끊어지지 않아 쓰임 받을 수 없던 자였습니다. 선교사로 나갔는데 영어실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역사 때문에 겸손히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으로 깊이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나와 다른 세대 다른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분들도 존귀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도 쓰셔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지금으로부터 약 2천 여 년 전 뻐꾸기 소리가 ‘뻐꾹 뻐꾹’ 울리고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아름다운 갈릴리 산골 나사렛 동네에 요셉과 마리아라는 두 선남선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사랑을 했더랍니다. 그들은 약혼을 하여 법적으로는 부부가 되었지만 유대의 결혼풍습을 따라 결혼식을 올리는 그날까지 1년 동안 순결을 지키며 지냈습니다. 요셉은 비록 가난한 목수였지만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서 왕손다운 품위를 지닌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순결한 시골처녀로서 아름다운 내면성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힘든 대패질을 할 때도 ‘마리아’가 들어간 노래를 부르면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마리아~ 나의 마리아~’ 무엇보다 요셉은 가진 것은 없어도 그들의 가정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는 믿음의 가정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마리아의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날씨가 쌀쌀해져 옷을 두껍게 입어 배가 나왔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임신을 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받았을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요? 중국의 어떤 신랑은 신부의 부정을 알고 결혼식장에서 신부의 부도덕을 알리는 동영상을 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 요셉은 이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감정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나의 의를 내세우고자 상대의 불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알기에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감싸 줍니다. 하지만 의로운 사람은 죄를 합리화 하지 않고 죄 짓기를 두려워합니다.
요셉은 생각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을 때 천사가 그의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천사는 처녀 마리아의 임신이 외간 남자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는 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임을 말해 줍니다. 아담의 원죄를 이어받지 않아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중보자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헬라어 이름인 예수스는 히브리어 여호수아로 이는 ‘구원하는 여호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 그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 실제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고대하는 구원자는 로마 식민통치로부터 구원할 자였습니다. 배고픔과 질병으로부터 구원할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죄로부터 구원보다 당면한 현실 문제로부터 구원할 자를 찾습니다. 대선시즌인 요즘은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으로부터 구원할 자, 코로나 위기와 청년실업에서 구원할 자를 찾고 있습니다. MZ세대는 불공정으로부터 구원할 자를 찾고 있습니다. 부모세대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 때문에 내 삶이 차별 받지 않을 공정을 그들은 원합니다. 이런 그들에게 죄로부터의 구원은 너무 추상적이고 종교적이어서 실제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죄 문제처럼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문제가 없습니다.
저의 직장인 한의원에는 5년 전 개업 때, 2년 전 이전 할 때 들어온 화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때마다 물만 주었는데도 잘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화분 하나가 들어온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았는데 계속 시들고 벌레가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정성이 부족했나 싶어서 영양제도 2개나 꽂아 주고 햇빛 잘 드는 곳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상태가 갈수록 심해져 흙을 파 보았습니다. 큰 화분 안에 있던 작은 플라스틱 모종 화분에 뿌리가 꽉 갇혀서 썩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바로 플라스틱을 벗겨내고 잘 심어 주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하게 살아났습니다. 죄도 이와 같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뿌리가 플라스틱에 갇혀 버린 식물처럼 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에서 우리를 분리시킵니다. 정욕과 운명주의와 교만과 이기심의 죄는 그냥 둔 채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지고 차별이 없어져도 결국 영적으로 썩고 죽어 심판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실제적이고 근본적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구원의 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죄의 플라스틱이 벗겨져 생명력이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저자 마태는 예수님의 성령 잉태와 탄생의 의미를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으로 그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령 잉태와 탄생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먼저 예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시고 악한 영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며 한 영혼, 한 영혼을 낮아져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대선후보와 악수만 해도 얼마나 영광스러워합니까?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은혜입니까? 사도요한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압도되어 이렇게 증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사람들은 죄로 인해 함께 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을 분리시키지만 사람과 사람도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과 함께 하면 짜증이 납니다. 연약하고 무책임한 사람과 함께 하다보면 분통이 터집니다. 이기적인 사람과 함께 하면 심히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분은 “어쩔 때는 남편 밥 먹는 모습도 꼴 보기 싫다”고 합니다. 가족끼리도 관심사가 달라 집에서도 스마트폰만 보기를 잘 합니다. 그래서 요즘 혼자 밥 먹고 혼자 여행 가고 혼자 원룸에서 사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코로나 상황은 이를 더 심화시켰습니다. 처음에는 편하고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외롭고 삭막하다고 합니다. 함께 하는 것이 참 부담스럽지만 함께 하지 못할 때 괴로운 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탄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현재적으로 이 예수님을 모셔 들일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모든 죄와 외로움과 절망에서 구원해 주시고 생명과 사랑과 희망을 주십니다. 이때 우리도 부담스러운 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고 그들의 친구요 부모요 목자가 되어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올해도 하나님은 요한복음, 민수기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해 주셨습니다. 여름수양회와 요회별 수양회로 함께해 주셨고 온오프라인으로 진행된 수요소감모임을 통해 함께해 주셨습니다. 선교사수양회와 세계선교보고대회를 통해 선교사님들과 함께 하시며 온 세계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생사를 위협하는 질병과 사고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 지켜 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어쩔 수 없는 미움으로 고통 할 때 함께해 주시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힘든 직장의 스트레스 속에서 함께 하시고 감당할 힘을 주셨습니다. 올해도 우리 공동체와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신 임마누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올해도 주님은 부족한 죄인인 저와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 속에서 함께해 주시고 기도할 때 지혜와 힘을 주셨습니다. 직장과 가정과 요회와 양들과 음악역사를 섬길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연말에 직장일로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니 사람도 사명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준비하며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쳐있을 때 제가 사고를 당하였을 때 제가 실패하였을 때 제가 홀로 있을 때 주님은 늘 함께해 주셨습니다. 제가 임마누엘의 은혜를 깊이 덧입어 2022년에도 함께하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죄인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