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익 / 비오는 날
이헌 조미경
최명익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독자로, 작가가 작품을 쓴 시기를 미리 짐작 하지 않아도, 그가 살았던 시대의 소시민이
격는 소소한 일상이 눈이 보이는듯 했다. 평범한 소시민이 살아가는 방식은 시간과 국경을 넘나들어도
비슷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일의 일상을 보면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려 본다.
카프카속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간은 어쩔수 없이 의식주를 위해, 공장에서 돈을 받고 일을 하고 식당에서
사람들의 비난과 멸시를 받으면서 일한다.
그런 면에서 최명익 소설은 근대 리얼리즘을 후대의 우리들에게 보여 준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소설속 병일은 아마 현재는 자신의 꿈과 이상은 잠시 벗어 두고 공장에서 소사로 일하면서
사장에게 작은 급료를 받으면서, 그의 신원을 보장 할 새로운 누군가를
찾으면서 하루하루 사장의 감시를 받으며 일을 한다. 나중에는 병일은 사장이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치밀만큼
분노가 치밀지만, 꾸역 꾸역 출근을 하고 하숙집으로 퇴근을 한다.
장마비가 내리는저녁, 우연히 방문한 사진관에서
사진관 주인과 술한잔을 나누며, 사진관 주인의 자기의 자랑과
같은 13세에 일을 배우기 시작해서 10년후 지금의 사진관을 열었다는
말에 병일은 속으로는 불쾌감이 올라온다.
그는 칠성의 말에 반박 대신 다른 생각에 빠지고, 사진관에서 얻어쓴 우산을 가지고
하숙집으로 향하다, 인력거에 탄 어린기생과 인력거 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을 내려다 본다.
어린기생은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 이미 세상의 쓴맛과 단 맛을 모두
아는 듯 자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 져야 하는 부분에서, 가난이라는 어떤 굴레는 사람을 성장 시킨다.
단적으로 말하면 영악 하게 실리를 추구하는, 인간미가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보여 주는듯 했다.
반대로 내용은 다르지만 병일은, 자기 자신 만의 시간을 가지는 방법으로
급여를 받으면, 하숙비를 지불 하고, 저축 대신에 많은 책을 사는데 소비를 한다.
이 부분에서 지적 욕구를 추구 하는, 병일이 사장과 반대로 신문을 읽고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은, 칠성 사진과 칠성의 신분 상승의 욕구인
번화가에서 큰 사진관을 여는, 꿈과는 벗어났지만,
반대로 병일에게는 저축해서 돈을 벌어서 신분 상승을 할 수 없으나 정신적인
일반 소시민이 갖지 못하는 지적인 욕구로 나름의 욕망을 실현 한다 하겠다.
병일의 독서에 가치를 윤흥길 소설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잠시 그려 본다.
인력거꾼의 큰집을 사서 이사 하라는 글에서처럼 시대는 변했지만
신분 상승에 한 발 다가서는 것으로, 대문이 큰 집이 추구 하는 것은 무엇일까
병일이 퇴근길에 칠성과 술잔을 기울이고 퇴근후 잠 못이루는 장면에서
신 지식인의 고뇌를 읽었다.
병일은 칠성이 장질부사로 죽은 것을 신문을 통해서 확인 하고,
퇴근길에 칠성 사진관 앞에 짐실은 달구지가 서 있고, 가장을 보낸후 가난한 동네로
이사가는 장면에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중년 가장의 어깨를 본다.
소설의 반전은 이쯤이 아닐까, 고생해서 살만 한데 욕심이 생겨서 번화한 곳에서
사진관을 확장 하고 싶은, 칠성의 욕망을 평양에 창궐한 장질부사로 죽게 하고
병일은 칠성의 죽음으로, 그동안 번민 했던 지난날을 잊고, 평상시처럼 사색과 독서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근대의 신지식층인 식자층의 모습을 통해서 작가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진실을 이야기 하는 걸까.
박태원 소설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에서 보여 주듯이 글을 쓰는 작가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을 통해서
정신 노동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 하는 계기가 된다.
서사를 이어 가는데 있어 시를 풀어 쓴 듯이 고운 글에서 멈춰서 되돌아 본다.
내게는 청개구리의 뱃가족만한 탄력도 없고 풀잎 같은 청기도 날카로움도 없지 않은가
문구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