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간추린 용정촌 약사
1931년, 2월 9일 길림성 민정처에서 조선족이주민 취체에 관한 훈령을 발표하였다.
3월 안동조선인민회에서❰안동보육원❱을 설립하였다.
5월 29일 동3성 정무위원회에서 조선족 이주민에 대한 대책을 제정하였다.
9월 18일 일제가 ❰9.18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에 침략전쟁을 시작하였다.
대련에 거주하고 있는 관동군이 만주를 병참기지로 만들고 식민화시킬 목적으로 본국의 승인도 없이 류타오후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장학량 지휘하의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만주를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동북군을 기습했으나 동북군 7여단은 무방비상태였고 사령관 장학량은 휘하 부대에게 일본군의 확전 의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도발에 응하지 마라 고 명령을 내려 제 7여단의 3개 연대 중 2개는 지시대로 철수하였고 620연대는 철수명령을 받지 못하고 대응 사격하였으나 최후에는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였다. 동북군 북부 사령부는 무대응 명령 때문에1만 명이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500명의 일본에게 격퇴를 당하였다. 이후 봉천과 동부사령부지역을 무혈로 접수한 관동군은 북만주 공격을 시작하였고 11월에 동북삼성을 장악하였고 다음해 3월 1일에 만주국 설립을 선포하였다.
9월 로투구 대기동, 관도구, 대교동의 1천여 명의 농민들이 ❰3.7제❱,❰4.6제❱의 감조감식을 쟁취하는 투쟁과 일본 침략자를 반대하는❰추수투쟁❱을 단행하였다.
❰9.18❱사변 후 일제는 강압적으로 ❰민성보❱를 취체하고 민중교육관을 취소하였다.
12월 중공동만구역위원회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할 것을 호소하였다.
일제가 만주에 대한 대규모의 무력침공을 하였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부저항’정책을 취하였으나 대규모의 반일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공산당은 일제의 무력 침공을 규탄하며 전 민족적인 항일운동을 주창하였다. ❰9.18❱이후 만주를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파쇼통치가 가혹해짐에 따라 은진중학교에 대한 일본의 통제도 심해졌다. 선교부의 학교들은 만주국 교육부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10월 12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항일유격대와 항일유격근거지의 창설을 지시하였다. 다음 해 반석, 해룡, 연길, 훈춘, 왕청, 안도, 화룡, 주하, 밀산, 영안, 탕원 등에서는 여러 유격대와 항일구국유격군, 수년반일동맹군 등이 창설되어 항일유격전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 세워진 학교는 돈화의 ❰북성수어강습소❱,용정의❰로투구보통소학교❱, 용정의❰삼합진 공립학교❱등으로 3곳이다.
1931년에 북간도, 용정 인근에 세워진 교회는 없고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의하면 같은 동만노회에 속하는 돈화에 세워진❰돈화중앙교회❱,❰마호교회❱가 있다.
2026년 5월 12일 화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