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로 통일하는 힘
로마서 연구. 信天함석헌
1.어떻게 읽을까
“글을 그대로 다 믿는다면 차라리 글 없는 것만 못하다” 한 맹자의 말을 성경을 읽을 때에도 들어맞는 진리다. 성경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만 또 사람의 심정과 경험을 통해서 온 사람의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 말씀인 평으로 하면 한 긋[劃] 한 점도 잘못이 없고 길이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의 말인 편으로 하면 시대가 나감을 따라 낡는 것이요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는 글자에 붙잡히지 말고 그 산 속뜻을 읽어내도록 끊임없는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이 낡는다 잘못이 있다. 하면 큰일이라도 난 듯이, 하나님의 일은 혼자 도맡아나 보는 듯이, 성을 내는 이가 있지만 그렇게 좁게 성급히 굴 것이 아니다. 내 아는 것만 옳은 줄 알지 말고 좀 천천히 널리 보면 진리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보통 상식으로 하면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는 것, 지구는 해마다 일정한 궤도를 도는 것이지만, 천문학의 조금만 자세한 것을 보아도 곧 그렇지 않음을 안다. 지축도 늘 흔들리는 것이요, 지구의 도는 길도 늘 변한다. 다만 눈에 뵈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기계를 쓰면 곧 알 수 있다. 그럼 거의 영원으로써 헤아리는 천체(天體)에서 이미 그런데, 물질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이 가만 있지 않는, 물결처럼이 아니라, 물결보다도 더 쉬지 않고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으로 되는 일에서일까? 눈으로 본 것을 가지고 천문학자와 싸우자면 어리석은 줄을 알면서, 왜 인생의 일에서는 나보다 더 널리 보고 깊이 생각하는 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몇 백년 전 옛소리 그래도를 고집하려 하나? 진리란, 지축이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물결은 늘 뛰놀면서 바다는 언제나 평한 것처럼,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물결이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리는 바로 그것 때문에 언제나 변함없는 수평을 가질 수 있듯이, 진리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있다. 나무는 흔들리기 때문에 높이 설 수 있다. 만일 흔들리는 성질이 없다면 조그마한 바람에도 곧 꺾어지고 말 것이다. 몇 백 자 되는 공장의 굴뚝이 좌우 앞뒤로 흔들거리는 것이라 하면 믿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굴뚝을 세운 건축가가 그 말을 한대도 그럴 수가 없다고 싸우자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는 그래서는 꼭 아니 될 것 같아서 그런다. 그러나 가엾이도 사실은 꼭 그래야 굴뚝은 설 수 있다. 흔들리지 않게 쌓는 것이 어려운 것 아니라, 흔들리면 무너지지 않게 쌓기가 어렵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마음을 불을 살라 열과 빛을 내잔 하늘 닿는 굴뚝이다. 올라갈수록 그 흔들리는 도는 놀랍게 늘어간다. 겁쟁이는 땅에서 바라만 보고 있으라!
성경은 변치 않는 영원 절대의 것이 변하는 일시적 상대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영원 절대인데 대하여는 이러구 저러구 없이 믿고 받아들일 것이지만, 그 일시적 상대인 데 대하여는 들을 줄을 알고 들어야 한다. 글은 굳어졌는데 뜻은 자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에 끊임없는 새 해석, 곤쳐 씹음이 필요한 까닭이다. 덮어놓고 믿는 믿음에 이르기 위하여 덮어놓고 읽기만 하지 않는 읽음이 필요하다. 세상 모든 것을 덮어놓고 믿는 믿음은, 열어 제친 마음의 칼로 성경을 사정없이 두려움 없이 쪼개고 열어 제처서만 얻을 수 있다. 성경은 덮어놓고 읽을 글이 아니요 열어놓고 읽을 글이다. 성경만일까? 모든 것이 다 그렇다. 덮어둘 것, 은밀하게 둘 것, 신비대로 둘 것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 그 밖엣 것은 다 열어 제처야 한다. 연구해야 한다. 성경은 연구해야 하는 책이다. 연구하지 않고 믿으면 미신이다.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은 될 수 없고, 그 밖엣 것은 다 연구해서 밝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만물을 다 아들께 주셨다는 뜻이다. 만물은 그저 진탕 치듯 먹고 쓰라고만 주신 것 아니다. 등기소에 소유권만 내어두라고 주신 것 아니다. 연구하라고, 그 속을 밝혀내라고, 그 뜻을 들어내라고 주신 것이다. 성경은 먹어 없앨 양식이다. 밥은 없어지고 생명이 길어야 한다. 산 맛 난다. 산 맛 나기 때문에 커져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양식이라기보다 산 씨알이다. 씨알이기 때문에 그 첨 형상이 없어지도록 키워내야 한다. 성경을 누가 건드리지 못하게 수건에 싸서 묻어두는 자는 도둑놈이다.
열린 마음은 어떤 마음이고 닫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먼저 먹은 술이 좋다해서 새 술은 입에 대지도 않으려는 것이 닫긴 마음이요, 진리에다 무한성(無限性)을 허락해서, 내 아는 것은 요것이지만 그밖에도 얼마든지 넓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하여, 새로 더 배울 생각을 하는 것이 열린 마음이다. 하나는 종의 마음이요, 또 하나는 아들의 마음이다. 하늘나라를 지키잔 것은 종이요, 하늘나라를 내 집으로 내 마음대로 쓰잔 것은 아들이다. 종놈들은 문간에서 지켜라, 우리는 마음대로 뒤져 그 속을 알고 불편이 있으면 고치고 부족하면 더 지으면서 살리라!
「로마서」는 덮어놓고 읽어서는 아니 되는 글이다. 많은 열심 있는 사람들이「로마서」는 성경 중에서도 가장 복음적인 글이라 하여, 이것은 건드릴 수가 없는, 건드리면 죄가 되는 것처럼 알도록 만들어, 덮어놓고 읽은 글로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외울지언정 감히 그것을 씹어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알고도 모른다. 이것이 속죄 소리 모르는 신자 없으면서도 사실 속죄경험을 별로 없는 까닭이다. 그렇게 속죄는 다 된 듯 말하는 수많은 천주교도 신교도가 다 정말 속죄를 받을 사람이라면, 일반 신도는 내놓고, 신부 목사만이라고만 해도 우리나라에 큰일났을 것이다. 여전히 그 꼴인 것은 다 거짓말인 증거다. 모른다. 그 아는 줄 알면서도 모르는 까닭은 덮어놓고 읽기 때문이다.「로마서」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다 덮어놓고 읽기 때문이다. 바울같이 율법은 소학교 선생이다 하는 정신으로 묵은 것을 제쳐가며 읽는다면 어려울 것이 없다. 본래 지혜의 고운 말을 쓰지 않는 바울이, 철학을 반대하는 바울이, 어려운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쳐다만 보는 산은 다 험한 산이요, 올라만 가면 못 올라갈 산이 없다.「로마서」를 열어 제쳐라!
열어 제치고 보면「로마서」는 낡은 글이다. 오늘 우리와는 상당한 떨어짐이 있는 책이다. 바울과 우리 사이에 2천 년이 흘렀다. 인류는 가만있지 않았다. 진보냐 퇴보냐는 딴 문제로 하고 그 동안 여러 가지 경험을 해온 것만은 사실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인 이상, 그만한 역사를 짓는 동안에 그 자신에게 변화가 아니 생겼을 리 없다. 사상(思想)은 변하는 것, 인간의 사상은 바울 그때보다는 훨씬 달라졌다.
바울의 산 세계는 우리 세계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은 것이었다. 로마제국이라 하지만 그것은 지중해를 중심한 조그마한 지방이다. 그른 히브리에 나서 헬라, 로마, 애굽, 바빌론, 페르시아, 스쿠디아, 그리고 서바나를 알았으나, 그밖에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남양과 아메리카와 북극의 에스키모, 아프리카의 부시맨, 포텐토트 같은 여러 민족 여러 나라가 도 있는 줄을 알지도 못하였다. 그는 바빌론, 애굽, 헬라, 페르시아의 옛날 종교에 관하여는 들은 것이 있었으나,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정신을 가지는 인도의 베다경과 브라만 종교가 이미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몰랐으며, 그때 낡아빠진 인도 사회에 새 생기를 주고 장차 파미르 고원을 넘어 동양 천지에 굽이쳐 들어가려는 불교의 커다란 움직임에 대하여도 도무지 몰랐다. 노자(老子), 공자(孔子), 요(堯), 순(舜) 하는 동양의 빛이었던 성현과, 히브리인의 하나님과 거의 같은 하늘을 그들이 믿은 줄도 몰랐다. 아레오바고에 서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하여 뜨거운 말을 뿜던 바울이 만일 이 모든 종교, 윤리, 사상에 대해 알았더라면 어떠했을까? 그 어떠했을 것을 자세히는 말할 수 없으나, 어쨌거나, 바울이 지금 우리 아는 바울만은 아니었을 것만은 사실이다. 따라서「로마서」도「로마서」와는 달랐을 것이다. 그보다도「로마서」를 아니 쓰고 인도서나 중국서를 썼을는지 누가 아나?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동양 서양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알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섞여들어 굽이를 치고 소용돌이를 도는 가운데 살고 있다.
종교는 종교요 과학은 과학이라 하지만, 믿음 뒤에는 언제나 세계관(世界觀)이 서는데, 각 시대 사람의 가지는 세계관은 그때의 과학이 보여주는 세계틀거리(世界構造)의 영향을 아니 받을 수 없다. 태양계와 은하계 우주(銀河系 宇宙)와 억억 광년의 대우주와 성운(星雲) 우주선(宇宙線)이 상식이 된 오늘 우리의 세계관은, 지구가 도는지 하늘이 도는지도 분명히 모르고, 땅 속에는 불이 이글이글하는 지옥이 정말 있고, 하늘 위엔 낙원이 있다 믿었던 바울 당시의 그것과는 같을 수가 없다. 땅 속에 지옥이 있다는 것은 오늘의 중학생도 믿지 않는다. 믿으려 해도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정말 이 땅 밑에 있다는 것과 그것을 정신적인 뜻으로 취하는 것은 결코 같은 믿음이 아니다. 바울이 삼층 하늘에 올라갔었다는 것을 우리도 신용하지만 그 삼층 하늘의 그림은 그와 우리가 서로 같을 수 없다.
또 바울은 요새 사람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준 생물진화의 사실을 몰랐다. 진화론이 반드시 옳으나 그르냐는 딴 문제로 하고, 생물의 시작과 그 생활에 대하여 그러한 말썽이 있다는 그것만 해도 정신생활에서 큰일이요, 또 대체로 생물은 복잡한 변천의 길을 걸어서 온 것이요 따라서 창세기 첨을 과학적인 기록으로 믿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인가. 그는 오늘의 과학을 도무지 몰랐다. 박테리아가 있는지 없는지, 어떤 병이 전염이 되며 어떤 성질이 유전이 되는지, 생리(生理) 심리(心理)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사회생활에 어떤 법칙이 들어 있는지, 만유인력이 있는지 없는지, 지중해에서 그가 만나 죽을 뻔한 유라굴로 폭풍이 어떤 물리적 원인으로 왔는지, 이런 것을 하나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초등학교 학생도 그것을 다 알고 있다. 오리 새끼를 깐 암탉 모양으로 정통주의 신앙이 아무리 그런 소리 듣지 말라 하여도 그것은 우리 집에 온 신문을 찢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천하의 눈은 못 가리는 법이요 세계의 귀는 못 막는 법이다. 역사는 절대로 되돌아 서지는 않는다. 잘 잘못이 뉘게 있는 것은 딴 문제로 하고 적어도 오늘날 인류를 구원하자는 정성이 있다면 이천년 전 사람과는 다른 줄을 알고 성경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바울이 살던 로마 시대의 살림과 지금의 살림과를 크게 다르게 구별하는 또 하나는 지금의 기계공업이다. 지금 우리는 정도의 다름은 있어도 전체로 기계로 살고 있는 점에서는 한가지다. 우리는 기계 위에 섰고, 기계 밑에 들었고, 기계 속에 들었고, 기계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자거나 깨거나 기계다. 이것은 바울이 모른 것이다. 기계라야 간단한 농사 잡은 것, 배, 수레, 목수의 연장, 전쟁의 칼, 활, 살창, 그런 것밖에 몰랐다. 바울은 오늘 우리 심리를 헤아리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아덴에서 적은 수의 사람밖엔 아주 냉랭한 대우를 받았던 그가 만일 뉴욕에나 모스크바에라도 온다면 어떨까? 거기까지 갈 것 없고 우리 서울엘 온다 해도 아마 그때보다 더한 냉랭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두 사이가 그렇게 떨어져 있다. 그는 완전히 옛 사람이요 우리는 완전히 오늘 사람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이 합하여 작용하여서) 더 다른 것은 인격에 대한 생각이다. 그때도 어진 사람 있었고 지금도 악한 사람 있지만, 악한 사람은 지금이 더 많은지도 모르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사람이 제 인격을 생각하는 데서는 그때 사람과 크게 다르다. 바울의 편지에도 나타나 있지만 그때는 크리스찬도 종을 두는 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세계 어디를 가도 그 제도는 볼 수 없다. 인격의 자유의 정신이 물론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지만 초대교회는 아무래도 계급적인 사회 공기 속에 살았는데 지금은 “나다 나다” 하는 정신은 어떻게 떨어진 사회 속에 가도 환하게 드러나 있다. 바울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한 뜻을 지금 사람은 암만해도 그대로 느낄 수는 없어졌다. 지금 사람은 모질고 인정이 엷기는 하더라도 저라는 깬 생각(自我自覺)은 있다. 예수가 그 피로 우리를 샀다는 말은 날마다 장터에 나가면 종을 팔고 사고하는 그때 사람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으나, 지금 사람에겐 별로 신통하게 들리지 않는 말이다. 사실 살림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적으로 하면 지금도 종도 있고 사람을 사고 팔고 함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눈에 뵈는 사실과 정신적인 사실과의 사이는 그 거리가 여간이 아니다.
그렇듯이「로마서」는 낡은 책이다. 낡았다는 것은 반드시 소용이 없단 말은 아니다. 그만큼 두 사이에 떨어짐이 있단 말이다. 평면적인 사진으로는 참 모양을 알 수 없듯이 말에서 시대를 빼버리면 그 산 뜻을 알 수 없다. 낡았다 함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이 이천년을 거슬러 올라가기를 힘써 보는 것이다. 혹은 바울을 지금 사람으로 만들어보려 애쓰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만 입체적(立體的)인 이해에 들어갈 수 있다. 종교경전은 영원한 진리라 하지만 그것처럼 평면 사진의 대접을 받는 것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상이다. 존경은 받으면서 실력은 없다. 그렇게 시키는 것은, 그렇게 민중을 만들어놓고 중간에서 제물을 취해 먹자는 직업 종교가의 일이다.「로마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영원의 테두리 밑에서 보아야 알게 된다. 영원의 테두리는 시간차원(時間次元)에 서지 않고는 보이지 않는다.「로마서」를 낡은 책이라 함은 그것을 시간차원에 서서 보자는 말이다. 영원의 내다뵘(通經) 속에 놓을 때 거기서는 모든 시간의 제약(制約) 아래서 된 것은 다 뒤로 물러간다. 바울의 인간성이 분명해져야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드러난다. 바울을 영원화하면 발 앞에 섰는 나무로 저 앞에 경치를 가리는 것 같아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 뵈고 만다. 나무는 뒤로 물러나게 되어야 나는 영원을 본다.「로마서」가 낡았다 함은 바울을 시간 안에서 죽임으로 영원 속에 살리잔 말이다.
2.「로마서」의 값
「로마서」는 낡은 책이다. 가다리 많은 오늘날 사람의 문제에 도저히 만족한 대답을 해줄 수 없는 맛 적은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도 오늘날도 읽지 않으면 안되는 값을 가진 글이다.「로마서」를,「로마서」만 아니라 도무지 성경 전체를, 맛 없다 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 제 잘못이지 글의 잘못이 아니다. 저들이 속 깊은 것보다는 겉의 옅은 맛을 따르는, 옅고 바쁜 인생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본래 성경 같은 글은 맛으로 읽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맛으로도 없는 것 아니다. 다만 맛이 한 가지가 아니어서 어떤 맛이냐 하는 것이 문제다. 성경은 흥미, 취미, 풍미(風味), 정미(情味) 하는 옅은 맛과는 관계가 없는 글이다. 그러나 깊은 뜻의 맛(意味)은 얼마든지 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난다. 늙었을수록 더 많이 씹어야 하고 많이 씹을수록 깊은 속뜻의 맛이 나온다.
「로마서」는 살아서 영원히 읽히울 책이다. 어떻게 살았나? 두 가지 뜻에서다. 하나는 이것이 인생의 글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역사적 글이다. 세계 역사가 이루어져 나가는데 몇 번씩 그 방향을 돌려놓는 힘이 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그랬고, 중세 교회에서 그랬고, 근세 종교개혁에서 그랬으며, 또 현대 무교회주의와 변증사상에서 그렇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흔히 로마를 호수에다 비하여, 옛날 모든 문명이 그리 흘러들었고 금세의 모든 문명이 또 거기서 흘러나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위대한 로마는「로마서」가 아니고는 될 수 없었다. 동양은 내놓고 서양만을 말한다면 문명의 시작은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는데 그것이 크레테 섬을 거쳐 그리스 반도에 들어가 헬라 문명을 일으켰고, 그것이 다시 서편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가 로마 문명이 되었다. 예수가 나시던 때쯤 해서는 로마는 지중해 주위, 곧 그때에 아는 세계는 거의 다 하나로 집어넣어 그 세력이 끝에 올랐다. 본래 지식과 예술을 통해 맛을 즐기잔 것이 헬라주의의 알속이요, 힘을 높이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버릇인지라 그 둘이 합하여서 된 로마제국의 문화는 마침내 극도로 향락주의 권력주의로 돼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은 저릴 대로 저리워저, 대낮에 연극장에서 사람과 사람을 혹은 사람과 사나운 짐승을 쌈을 부쳐, 그 물고 찢고 피를 흘리고 응얼거리다 죽는 것을 보지 않고는 시원하고 재미있음을 느끼지 못하게끔 되었다. 오늘 미국사람이나 프랑스 사람들이 여자를 발가벗겨 떼춤을 추워 놓고 무한한 쾌락을 느끼는 모양으로 그들 로마 사람은 그런 끔찍하고 모진 꼴을 보고 손뼉을 치며 즐겼다. 그러기 그 로마가 그대로 나갔다면 어찌 됐을까? 그대로 오래 갔을 리도 없었겠지만 만일 오래 갔다 한다면 그 어떠했을 것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치가 떨리는 일이다. 그러기 로마가 그 로마대로 끝이 나지 않고 유럽문명의 뿌리가 된 것은 다른 건져주는 힘이 있어서 그 가는 길을 바른 데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그 건진 힘이 무어냐? 기독교다. 로마의 귀족들이 호화한 살림에 취할 때에 사람으로는 알지도 않던 저 유대 사람으로 하여 언젠지 모르게 들어와, 땅 밑의 무덤, 카다콤부에서 자라난 그 종교가 아니었더라면 유럽 천지는 다시 사나운 짐승 씨글거리는 숲으로 되고 말았을 것이었다. 이 땅 밑에서 이루어진 새 믿음의 나라가 자라서 땅 위로 쑥 올라오는 날 로마 제국은 무너졌고, 그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유럽의 역사는 구원이 됐다. 그런데 그 교회가 이루어지고 자라는 데 이「로마서」없이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하는 말에 로마 교회는 베드로가 세웠다 하나 그 자라나는데 바울의 힘없이 될 수는 없었다. 유대교에 높은 도덕과 밝은 지혜가 없는 것 아니었지만 그 좁은 종파주의에 갇혀 있어 가지고는 이방 사람의 가슴 속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기독교가 이방의 눌림당한 정신적 물질적 프롤레타리아에게 불이 섶에 다리듯이 환영을 받은 것은 완전히 민족적 교파적 깍지를 벗고 순전히 인류적인 진리를 드러냈기 때문인데, 그 시대의 말씀을 가장 분명히 가장 힘있게 외친 것이 누구 아닌 바울이요, 그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이「로마서」다.
그다음 중세기에 들어오면 그 교회에 다시 세속주의가 들어와 여러 가지 잘못이 많이 생기지만 그래도 역사의 고갱이가 이 교회인 것만은 아니라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헬라 철학이니 플라톤이니 예술이니 과학이니 하지만 오늘까지 유럽문명에서 만일 중세적인 것을 뺀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역사상에서 흔히 어둠의 시대(暗黑時代)라 하지만 그것은 근세 사람이 자기변명을 하기 위해 치우치게 붙인 이름이요 공정하게 생각한다면 결코 어둠이라 할 수 없다. 물론 잘못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그 중세적인 것 때문에 서양 역사가 이만큼이나마 비틀거리면서라도 올 수 있었지 그 등더리뼈가 아니라면 진보는 그만두고 일어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유럽 사람의 양심을 붙들어온 것은 플라톤도 아니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니요,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천 년 동안 째워 내려오는 기독교적인 것인데, 그것이 이루어지는데「로마서」없이는 됐을 수 없다. 나는 가톨릭을 싫어하지만, 아무리 싫어해도, 이 앞으론 있는 힘을 다해 가톨릭주의와 싸울 것이라 하더라도, 그 한 바 역사적 일은 알지 않아서는 안된다. 가톨릭은 곰배다. 권력주의의 병균 때문에 꾸부러진 신앙의 등떠리뼈다. 곰배지만 등더리뼈는 뼈였다. 그것을 꼬부라지면서나마 등더리뼈 노릇을 하게 한 것은「로마서」에 나타나 있는 신앙이다. 로마서 는 중세기를 건지는 데도 한몫을 했다.
그 다음 종교개혁이 로마서에 있는 신앙으로 된 것은 너무도 환한 사실이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나왔다. 교회에 먹어 들어온 병균을 제하고 꼬부라진 등뼈를 펴보자던 것이 종교개혁가들의 일이었는데 그들의 쓴 약과 침은 주로 로마서적인 것이었다. 굳어진 가톨릭 제도의 압박에서 사람의 양심을 건져 자유 하는 인격을 만들기 위하여 한 그들의 싸움의 구호는「행함으로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였는데 그것은 로마서의 요지다.
현대에 내려와서도 사람들의 정신에 새 방향을 준 것은 또 이「로마서」다. 악어처럼 석탄기 시대의 갑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가톨릭은 말 할 것 없고, 민중 속에 뛰어들자던 개신교도 이십 세기까지 오는 동안 세속주의 물질주의의 종이 되어버렸다. 가톨릭의 전통을 벗은 것은 좋았으나, 해방 싸움 때에 대적이 서로 같다 해서 한 때 손을 잡았던 민족주의 국가주의와 깨끗이 손을 끊지 못한 탓으로, 그만 그 독한 손에 빠져들어 교회는 신ㆍ구를 가릴 것 없이 다 다퉈가며 제국주의의 계집종노릇을 하게 됐다. 그런데다가 한편으로 새로 열리게 시작한 과학의 광산은 한때 쏟아져 나오는 발명 발견의 노다지에 사람의 양심을 아주 헐가로 사버렸기 때문에 이십 세기에 들어오며 유럽 문명의 인생관을 참으로 옅고 엷은 금불림의 것이었다. 그들은 인류가 여러 천년 동안 눈물과 탄식으로 닦아온 정신적 진주의 유산을 합리주의라는 유리로 만든 값싼 인조진주와 쉽사리 바꿔버리고 크게 부자가 된 줄로 알았다. 그리하여 그 금광꾼의 행색이 드러나서 서로 맞드리를 하게 된 것이 세계 첫 번 대전쟁이었다. 그렇게 될 때 기독교는 남김 없는 더러운 꼴을 드러냈다. 이때껏 하나님이라고 절하던 우상의 얼굴에서 도금이 떨어지고 보면 무서운 싸움의 신이요, 이제까지 호호탕탕히 큰 길을 달리는 줄 알았던 역사의 수리가 막다른 벽에 다들기고 보면 다 깨진 조박뿐인데, 소위 사람의 마음을 지도하고 영혼을 건진다는 기독교는 아무 소리를 못했다. 세계를 왼통 들어 불구덩이에 넣는데 어느 교회 하나도 그것을 막아보려 애써본 것은 없었고, 전쟁을 지나고 나서 기 빠지고 맥 빠져 꺼꾸러졌는데 어느 한 종파도 그 터진 것을 싸매고 좋은 말로 위로하고 일으켜주려는 용기를 낸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래도 진리가 아주 죽을 리 없어서, 거기서 간신히 부르짖고 나온 것이 서양에서는 이른바 위기 신학 변증신학이요, 동양에서는 우찌무라가 외친 무교회 신앙이다. 그 후 둘째번 세계대전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토론도 많고 아직 인류가 이 시대에 주시는 말씀을 분명히 꽉 붙잡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두 사상이 대체로 오늘날 역사가 나가는 길 위에 한줄기 빛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찌무라의 무교회 신앙은 루터ㆍ바울의 신앙이요, 위기신학을 처음 부르짖고 나온 칼 바르트도 그 말을「로마서」의 해석으로 시작됐다.「로마서」는 또 한 번 역사를 건졌다.
그 다음,「로마서」는 또 인생의 글이다.「로마서」가 역사를 두고두고 건져오는 이유는 그것이 인생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글이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가 잘못 든 사람이 다시 바로잡으려면 언제든지 그 떠나던 맨 첨과 나중 가닿을 끝점을 다시 보아야 하는 것같이, 역사를 건지려는 자는 인생의 근본에 돌아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문제의 시작은 어디 있으며 그 가닿는 곳은 어디인가.「로마서」는 인생의 처음과 나중을 들여다보는 글이다. 바울은 인생을 꿰뚫은 사람이다. 그는 영원한 그리스도에 부대껴서, 그 안에서 인생의 맨 처음 인생의 나중을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그 뚫으고 내다뵈는 데서 얻은 빛을 던져, 그때에 전체적으로 해매임에 빠진 인류를 건지려 한 큰 외침을 외친 것이다.
그럼 인생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 맨 처음의 문제는 무엇이요 그 나중 문제는 무엇인가. 죄와 구원이다. 여기 관하여는 본문에서 읽어갈 것이니 지금 길게 말할 것 없지만 한마디로「로마서」는 죄문제를 해결하는 글이다.「로마서」가 가다리 많은 현대의 문제에 하나도 대답을 해주는 것이 없으면서도 오히려 읽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여기 있다. 문제의 문제는 죄다. 아무도 죄를 이야기하지 않고 인생을 말할 수는 없고, 인생을 밝히지 않고 역사를 밝힐 수는 없다. 이 뜻에서「로마서」는 영원할 글이다. 과학이 이렇게 발달하고 철학이 이렇게 넓어지고 깊어지며 문명이 이렇게 나간다 하더라도, 도덕적인 것이 인생의 근본이라면 죄의 문제는 없어질 날이 없을 것이요, 죄가 깉어 있는 한「로마서」도 깉어 애쓰는 인간에게 읽히고 읽힐 것이다.
「로마서」가 위대한 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통일의 책, 하나됨을 가르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건진 것도 인생을 건진 곳도 이 통일하는 힘에 있다.「로마서」는 육(肉)과 영의 통일, 율법과 복음의 통일, 유대와 이방의 통일, 예와 이제의 통일, 인간과 우주의 통일을 가르치는 글이다.
죄는 다른 것 아니요 갈라짐이다. 부모와 자식이 갈라짐, 집과 집이 갈라짐, 계급과 계급,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갈라짐, 몸과 마음의 갈라짐, 사람과 하나님의 갈라짐이다. 갈라지면 어지럽고, 어지러우면 죽는다. 거기서 건지는 것은 다시 하나됨을 얻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됨은 서로 맞서 싸우는 데서는 나오지 못한다. 제삼자 곧 보다 높은 새것이 나타나지 않고는 아니된다. 「로마서」는 그 인생을 죄에서 건지고 역사를 어지러움에서 건져내는 새 종교를 말하는 글이다.
그때의 세계의 중심이라 하던 로마를 보면 종교의 판가리 쌈터였다. 로마가 칼을 가지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세계통일은 해놨건만, 한때 헬라주의의 등잔 밑에 통일이 됐다가 그것이 꺼짐을 당한 인간은 갈 바를 알지 못해 헤매이는데 로마 시에는 대낮에 가지가지의 신이 서로 단장을 하고 밤 거리에 나와 “내게로 내게로” 하는 갈보모양으로 씨글거렸다. 올림포스에서 떨어져 내려온 헬라의 신들이 있지, 빛깔 멀어진 애급, 바빌론의 옛 신들이 있지, 단술에 눈시울이 붉은 땅의 어머니가 있지, 송아지 모가지에 칼을 꽂고 서서 이상한 손짓을 하는 미스라가 있지, 피비린내를 피우는 게르만의 신들이 있지, 승냥이의 자손이로라는 로마황제가 있지. 이중 어떤 하나가 세계 종교가 됐다 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찌 됐을까? 소름끼치는 일이다.「로마서」는 그때는 아직 풀 속에 양을 치는 소년 따위 모양으로 아무도 있는 줄 알지도 못하는, 장차 오는 세계 정신사의 선수가 될 적은 무리의 크리스찬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들은 카타콤부에 나와서 골리앗의 무리 같은 이들 종교를 하나씩 하나씩 때려 부수고 세계를 다시 하나님의 이름 밑에 바치게 되는데 그 손에 오직 하나인 무기는 다른 것 아닌 냇가의 조약돌 같은 사랑의 진리요, 그 돌을 던진 물매가 이「로마서」라는 글이다.
바울이「로마서」에 싸서 보낸 새 종교는 한마디로 하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또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는 것이다. 곧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 하나로 통일하자는 강한 윤리적 종교다. 이 하나되는 굳센 힘 때문에 겉모양은 어마어마하면서도 속알머리 없는 가짜 종교들을 이길 수 있었다. 뭐니뭐니 하여도 세계 역사는, 동양적인 것을 따로 내놓고 말하면, 세 가다리로 이루어졌다 할 것이다. 하나는 로마적인 것, 또 하나는 헬라적인 것 그리고 히브리적인 것. 정치 경제로 대표되는 로마를 몸이란다면, 학문 예술로 대표되는 헬라는 마음이라 할 것이고, 종교 도덕으로 대표되는 히브리는 얼이라 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을 통일해 똑똑한 인격을 만드는 것은 얼이다. 얼이 빠지면 튼튼한 몸이 있고 이성이 있고 감정이 있어도 뜻이 있어도 사람은 아니다. 기독교를 가지고야 기원 처음의 세계를 건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적인 것은 헬라적인 것 로마적인 것과 한 줄로 나란히 서는 것이 아니고 제삼자로 보다 높은 자리에 서서 셋을 하나로 만드는 원리라 하여야 옳다. 어지럽고 헤매이는 것은 실리적(實利的)이냐? 심미적(審美的)이냐? 도덕적이냐? 하는 것이 서로 고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 서로 다른 요구를 다 살리면서도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 하나로 보는 굳센 믿음이란 말이다. 그러나 좋은 씨가 있고도 농사 기술이 있어야 곡식을 낼 수 있듯이 참 종교가 있어도 그것을 전해주는 바른 방법이 있어야 한다.「로마서」를 통일의 글이라 하는 것은 이 뜻이다. 바울이「로마서」로써 한 일을 비유해 말하면 이방주의에다가 복음을 접붙였다 할 수 있다. 바울 자신이 이 접붙임의 비유를 쓰지만, 바울은 참을 뿌리로 표시하려 하여 이스라엘의 뿌리에 이방 가지를 접붙였다 했으나, 우리는 참을 열매로 표시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위치를 서로 바꾸어 이방을 대목(台木)으로 하고 히브리를 가지로 한다. 로마 사람은 생활 힘이 강한 민족이요, 헬라 사람은 아는 힘 느끼는 힘이 강한 민족이므로 이 둘이 합한 헬라ㆍ로마 문화는 강한 생활력을 가지는 현세주의다. 이것은 퍼지기는 힘있게 하나 종류가 나쁘다. 열매가 없다. 반대로 히브리는 바탕은 참 가람이나 그때는 늙고 병들어 생활력이 쇠하므로 종류는 좋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다가 이상하게 돌변화의 법칙으로 그 늙어버린 이새의 줄기에 한 새 싹이 났다.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바울은 그 현세주의의 헬라ㆍ로마사상을 밑동에서 짤라 버리고 거기다 히브리 종교에서 짜라온 새 싹을 접을 붙여 한 새 종류의 과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셋은 다 살아서 한 새 종교를 이루었다. 다시 말하면「로마서」의 값은 복음으로써 현세주의와 율법주의를 지양(止揚)하여 인생과 역사에 새로운 올라감을 할 수 있게 한 데 있다는 말이다.
이제 역사는 그때보다 더한 어지러운 돌아설목에 이르렀다. 인생은 바쁜 문명의 장터에서 잊어버림을 당하고 고아처럼 뒷골목, 시궁구멍에 헤매인다. 참 감람나무의 가지는 또 쇠하고 대목에서 도장지(徒長枝)가 나와서 그 세력을 다 빼앗아 버렸다. 또다시 그 도장지와 그 노쇠한 가지를 사정없이 두려움 없이 짜를 전정사(剪定師)가 나와서 돌변화의 새싹을 찾아내고 새로운 접붙임을 해야 하는 때가 왔다.「로마서」를 한 번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말씀 1957. 1 5,6호
저작집30; 20-211
전집20;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