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 외 1편
이기현
어떤 마음은 쉽게 품을 수 있어 열망이 되었지
나는 밤의 도로 위에 토사물처럼 엎질러져 있다가도
저 멀리 어느 행성의 해변 위에
너의 이름을 적어두고 싶은 마음으로 일어나서
그 자리에 구조물이 되었지
모종의 별빛들이 모여드는 중에
철골 같은 양각 문자를 문지르며
몇 번이고 만져지는 사랑의 언어를
외면할 수가 없었지만
사랑은 대상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그 열망 때문에 늘 실패했지
이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빛도 눈치를 보며 진입하는 곳에서
슬픔을 벗어나 무너져 내린 슬픔이 되어
등유를 붓고 점화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그러지는 두 불꽃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지
열기가 닿을 때마다
슬픔이 한때 기쁨이었다는 통각까지도
슬픔의 소관이었는데
다 불타버리고 남은 잿더미 위에
이름을 적는 손가락이 있었지
우리가 다른 행성에서 하는 사랑이었거나
사랑을 했기 때문에
다른 행성에 잠시 살고 있었다고
오래전 사랑을 마친 행성의 빛들이
이곳에서 다시 만나고 있다고
그런 이름은 사랑을 내포한 채
끝없이 불타고 있었지
슬픈 토우는 고래만큼
우리 놀이터 가서 놀자 손잡고 두꺼비집을 짓자 누가 손 빼면 무너지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그러나 우리 적요를 발설하진 말자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우리는 침묵에 대해 잘 아니까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빛을 모조리 소모하자 서로 구겨진 얼굴 사이사이에 낀 모래를 훔쳐 주자 샌드 아트처럼 훔친 모래만큼 표정이 생겨나도
슬프니? 묻진 말자 슬픔을 더 이상 기억으로 만들지 말자 우리 뭍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는 향유고래의 등 위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자 석고를 뜨는 기분으로 우리 절대 손 놓지 말자 우리 약속들이 기항지에 정박한 선박들처럼 목적지가 모두 다르더라도
혼자 흔들리고 있는 그네의 등을 조용히 밀어 주자 얼굴부터 입수하기 시작하는 고래만큼 부서지자 우리 잉여의 빛이 머무는 해변이 되어 온종일 섞여 있자 우리 그러고 있자
이기현
1992년 인천 출생. 2019년 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