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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9 / 울지라도 뿌려야 할 씨 (시126:1-6)
우리에게 익숙한 팝송 중에 자메이카의 더 멜로디언즈라는 그룹이 불렀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보니 엠이라는 그룹이 리메이크하면서 전세계적으로 히트했던 ‘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에는 ‘바빌론 강가에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기억하면서. 사악한 자들이 나타나 우리를 포로로 잡아갔지. 우리에게 노래를 시켰지. 지금 이국의 땅에서 어떻게 찬송가를 부를 수 있겠는가? 입에서 나오는 기도와 마음속 바램을 오늘밤 당신에게 기도 할 뿐.’이라는 가사가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의 내용을 주제로 한 것으로, 나라의 패망과 함께 바벨론으로 유배된 유대인들이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 즉 하나님이 계신 고향을 떠올리며 울고 있는데 이를 본 바벨론의 군인들이 너희가 고향에서 부르던 노래나 불러보라며 조롱을 하자 하나님께 불렀던 찬송을 어찌 이방인을 위해 노래할 수 있겠냐며 참담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향해 탄식의 기도를 드리는 유대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배 생활 70년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바벨론이 한순간에 바사, 곧 페르시아에 의해서 패망해 버렸고 바사의 왕 고레스가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유대인들 중에선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었다는 것을.
이사야 40:1~3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미 바사가 흥왕하여 바벨론을 망하게 할 것을 예언하셨으며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그때가 되면 너희는 이렇게 하라는 말씀도 미리 하셨었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 노역의 때가 끝났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갈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렇듯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는데도 이미 바벨론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유대인들의 심중에는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이 당연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현실의 벽으로 인해 저들 마음속에는 바람보다는 체념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앞서 인용했던 ‘Rivers of Babylon’의 가사 마지막 부분에서 유대인들이 ‘입에서 나오는 기도와 마음속 바람을 오늘밤 하나님께 기도 할 뿐’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려 보세요.
그들은 분명 ‘바람을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의 바람이라면 무엇이었겠습니까?
당연히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바람과는 달리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바람’은 있었을지언정 ‘믿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후 여러분은 분명히 구분하여 아시기를 바랍니다.
‘바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린 매사에 하나님을 향해 이러이러하면 ‘좋겠다.’가 아니라 이러이러할 줄 ‘믿는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겠다’는 나의 만족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믿는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우리가 ‘좋은 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여러분이라면 이제부터는 ‘나의 바람’이 믿음인 양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바라는 것’이야 말로 믿음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바람이 바라는 것만으로 끝나지 말고 그 바라는 것을 ‘하나님이 해주실 것이다’까지로 연결되게 하는 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믿었으면 해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 여기까지가 돼야 믿음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사야 40장에서 유대 백성들의 귀환을 예언했던 때가 아직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기도 전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에서 지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유배되었다가 70여 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바벨론이 망하고 바사 제국이 들어섭니다.
이게 단지 정치적인 일뿐일까요? 다른 나라들끼리의 전쟁이기만 할까요? 아닙니다. 만약 유대인 중 누구 하나라도 하나님이 70년 그 이전에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겁니다.
하나님이 해주시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믿지는 못하는 현상. 이게 그때나 지금이나, 또한 유대인에게나 우리에게나 있는 믿음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성경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하신 수많은 말씀들과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리도 많은 말씀과 약속들을 우리에게 남기신 걸까요?
말씀하신 대로 되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리해 줄 것이니 우리에게는 바라는 게 있다면 믿으라는 겁니다.
오늘부터는 ‘하나님이 해주시면 좋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바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구한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믿고 구했으면 끝까지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약속하시기를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또 이런 의구심을 가집니다. ‘도대체 언제 받게 되며, 어느 때나 응하게 된다는 말인가요?’라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언제까지라든가 어느 때라고 하는 걸 대략이라도 알고 믿거나 참는다면 당장엔 응답이 없어도 속이라도 좀 편하지 않겠는지요?
그렇다면 언제 까질까요? 받으리라는 그때가.
어느 때 까질까요? 응하시리라는 그때가.
그러나 여러분!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언제인지’라든가, ‘어느 때까지’ 등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더 좋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시한부 종말론이 왜 이단입니까? 몰라야 하는 그 ‘때’를 알려 했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했기에 이단인 겁니다.
사실 ‘때’를 알고 뭔가를 한다는 건 ‘대비하는 건’ 될 수 있어도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 대로 역사하시겠다는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대비하는 모습’이 아니라 ‘믿는 모습’을 기대하시기에 때와 기한을 알려주지는 않으시는 겁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구한 것은 반드시 받게 하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바라는 것이 뭐든 그 바람들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실제적인 예가 오늘 기록된 본문의 내용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 땅을 밟게 되리라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았더랬습니다.
물론 그리되기를 소망하는 바람은 있었지요. 그러나 늘 ‘어떻게?’가 한계였고, ‘어떻게’에서 막혀버리곤 했습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원하는 건 있는데 ‘어떻게?’, 바라는 건 있는데 ‘어떻게?’
우리 역시도 늘 ‘어떻게’에서 부딪혀 왔고 그로 인해 바람이 늘 바람으로만 끝나곤 하지 않았던가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그런데 꿈에도 생각 못 한 그런 날이 온 겁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 왕 고레스가 유대인의 해방은 물론 고향으로의 귀환과 더하여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전까지도 재건할 것을 조서로 내린 것입니다.
이에 대해 본문은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날이 있게 된 것이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했지만 믿지는 못했던 ‘꿈만 같은 그 일!’, 그걸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위해 그리하셨다면 하나님은 하나님만 믿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도 그간 바라고 원해서 기도했던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꿈꾸는 것 같은 날들을 보게 해주실 줄로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궁금한 것이, 이방 나라 왕인 고레스는 왜 이방 신인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 만국을 자신에게 주었다고 했으며,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걸까요?
게다가 성전 건축을 하라고까지 명령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고레스가 성경의 예언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고레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이름과 그가 할 일에 대한 예언을 기록해 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5장 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소 긴 내용이기에 정리를 해보자면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레스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바벨론을 정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의 예언을 확인하고 나선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셨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놀란 고레스는 그 후 자신의 할 일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이사야 49: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택한 자를 구원하시려는데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하니 이방인을 들어 믿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믿는 자들의 바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믿어야 하고 또한 믿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담이지만 누군가에게 꾸준히 돈을 적립해 온 저금통장이 있다면 당장에 급한 일이 있을지라도 통장의 돈을 인출해 사용함으로써 위기를 넘길 수가 있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는 우리 각 사람의 명의로 된 ‘믿음 통장’과 ‘기도 통장’이 있다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난 믿음이 그리 좋지 않다고요? 기도를 많이 하지 못했다고요?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응답을 받지 못할 거라고 미리부터 체념하거나, 기죽고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나에게 믿음 통장이라든가 기도 통장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믿음 통장과 기도 통장에 적립된 믿음과 기도가 있다는 것을.
필요하면 하나님은 그걸 찾아 쓰시되, 필요하면 우리의 원수며 실패까지도 이용하여 우리를 위한 믿음대로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괜찮다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역사하실 때면 믿음의 양이 아니라 진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간절히 바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휩쓸려 살다 보니 자신조차도 자신이 바랐던 것을 잊은 채 살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바랐던 일들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다면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꿈같이 역사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사야 49:15절에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나는 믿다가도 낙심할 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십니다.
나는 기도하다가도 실망할 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십니다.
나는 바라고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픈 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한시도 나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서 우리 역시도 매 순간 하나님을 잊지 말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 이걸 기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시기에 본문 5절에서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눈물을 흘리며’라는 말씀으로 보건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고난과 괴롬의 때가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의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눈물을 흘리게 되는 때를 당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씨를 뿌리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씨를 뿌리는 자가 되라고 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주시는 여러 원칙들 중에 ‘심은 대로’에 해당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경구중에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지금 내가 시작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지금 내가 시작해야 한다면, 여러분이라면 무엇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보다 앞서 여러분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우린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만큼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지금 내가 시작해야 한다면 하나님이 복 주시는 세상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부터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니 이제부터는 어떤 일에서든, 무엇을 바라든 가장 먼저 믿음의 씨부터 뿌리며 시작하려 해야 합니다.
물론 그때의 믿음은 ‘하나님이 해주신다.’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리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믿음을 보셨기에 믿음대로 되게 해주실 것이고, 우리가 심은 믿음의 씨가 있기에 심은 대로도 되게 해주셔서 결국엔 말씀하신 대로 나에게서도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는 말씀대로 되게 해 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주의하실 것은 간혹 어떤 분들은 본문 5절과 6절에서 의도적으로 ‘눈물’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눈물’은 단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말하는 것일 뿐 핵심은 ‘씨를 뿌리는 자’에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괴테가 말하기를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틈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믿음에 적용해 보면 ‘믿음이 있는 성도는 슬퍼할 틈도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항해를 하는데 순풍이 불어주면 쉬엄쉬엄 갈 수도 있겠지만 역풍이 불 때면 더욱 힘써 노를 저어야 하는 것처럼 눈물을 흘릴 정도로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믿음의 씨를 심기에 힘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간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으로나 땀흘리고 수고하는 것은 생략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씨들을 심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살아갑니다.
‘한숨, 낙심, 체념, 분노와 원망,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서운함’의 씨’들 역시도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그러니 이왕에 씨를 뿌릴 거라면 의도적으로라도 ‘믿음의 씨’ ‘기도의 씨’ ‘감사의 씨’ ‘소망의 씨’ 들을 심으려고 노력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씨 뿌림의 결과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것이라고 했는데 행여라도 잘못된 씨들을 심어 실패와 실망의 단만 거두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형편에서든 하나님을 향해서는 우선은 이리되면 좋겠다는 ‘바람의 씨’를 심으시고, 그다음엔 하나님이 그리되게 해주신다는 ‘믿음의 씨’를 뿌리시고, 그다음엔 하나님을 향해 이리되게 해달라는 ‘기도의 씨’를 심으신 후에, 하나님이 그리되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씨’를 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믿음을 잊고 살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약속을 잊지 않으셨고 끝내는 약속하신 대로 시행하셨습니다.
‘꿈꾸는 것 같다!’ 이런 복된 날이 바벨론 강가의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셔서 믿음 안에서 어떤 씨를 뿌리든 심은 대로 거두되 기쁨으로 단을 거두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