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욥기 28:1-14
1 은이 나는 곳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으며
2 철은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3 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
4 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갱도를 깊이 뚫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이 없는 곳에 매달려 흔들리느니라
5 음식은 땅으로부터 나오나 그 밑은 불처럼 변하였도다
6 그 돌에는 청옥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7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8 용맹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9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뒤엎으며
10 반석에 수로를 터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11 누수를 막아 스며 나가지 않게 하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밝은 데로 끌어내느니라
12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13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14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욥 28::1-14 / [지혜는 어디서 오나] 은을 캐내는 광산이 있지. 또 금을 제련하는 곳도 있지. 2) 사람들은 쇠를 땅에서 캐내고 놋쇠를 돌에서 녹여 내지. 3) 어둠조차도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고 땅속 깊은 곳까지 이리저리 살펴 그 캄캄한 곳에서 바위를 캐내지 않던가? 4)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인적이 드문 그곳에서 갱도를 뚫어 외로이 일을 하지. 그 깊은 구멍에서 구명줄에 매달려 일을 하지 않던가? 5) 땅거죽은 먹을 곡식을 내지만 같은 땅이라도 깊은 땅속은 그렇게 마구 뒤집혀져 있으니 불에 의해 그렇게 헤집어진 것 아닌가? 6) 땅의 돌 속에는 사파이어가 들어 있고 그 먼지에는 금도 들어 있다네. 7) 매라 할지라도 광산 속 이리저리 나 있는 그 길을 알지 못하고 독수리라도 그 위를 날아다니지 못하지. 8) 그 어떤 맹수, 사자까지라도 그 갱도로 다니지 못한다네. 9) 사람들은 가장 단단하다는 바위까지도 파내지 않던가! 이 산 저 산을 그 바닥까지 마구 파내지 않던가? 10) 바위까지라도 뚫어 내어 갱도를 만들고는 보석들을 찾아내지 않던가? 11) 흘러가는 강물까지도 막아 놓아 그 속에 숨겨진 것까지 찾아내지 않던가? 12) 지혜는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어디서 깨달음을 배울 수 있느냔 말일세. 13) 지혜가 있는 곳, 깨달음이 사는 곳,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 사람 사는 이 땅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지 않은가. 14) 내 안에는 없어! 이렇게 깊은 물이 말하지 않는가? 내 속에도 없어! 이렇게 바다가 말하지 않는가?
여기서 욥은 사람의 지혜를 칭송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의 지혜라도 하나님의 지혜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지혜(1-11) 사람은 지혜를 발휘하여 땅 속에서 유용한 광물들을 캐냅니다. 땅 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뛰어난 탐지능력으로 은맥과 금맥과 광맥을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내 원석을 캐내며, 그 원석을 제련하여 보석과 각종 광물들을 추출해냅니다. 이런 광물들을 얻기 위해 갱도를 파고 아무도 살지 않는 오지를 탐험하는 사람의 수고와 노력은 실로 엄청납니다. 곡물을 배출하는 땅 표면과 달리 땅 속 깊은 곳에는 각종 보석들이 묻혀 있으며, 사람은 그 보석을 얻기 위해 땅속을 불로 뒤집습니다. 눈이 좋기로 정평이 난 솔개와 매도 그 보석을 캐내는 길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놀라운 기술과 많은 경험으로 보석이 숨어있는 반석을 찾아내며 마침내 산 뿌리에 박혀있는 보석들을 시장에 내어놓습니다.
땅에서 찾을 수 없는 지혜(12-14) 여기서 욥은 보석을 캐내는 사람의 지혜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지혜로 그 주제를 전환합니다. 보석을 캐내기 위해 온갖 노력과 기술과 경험을 총동원하는 사람들이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땅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영적인 지혜를 세상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마치 보석을 캐내듯이 지혜를 캐낼 수는 없습니다. 땅은 물론이요 깊은 바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보석을 캐내는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욥이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욥은 세 친구들이 사람의 지혜로 자신을 경솔하게 정죄하였던 것을 알려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욥은 사람의 지혜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적 용 : 당신은 보석, 곧 돈을 버는 지혜 외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영적인 지혜가 당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무엇이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고통의 비극이 닥쳐올 때, 욥과 같은 의문을 끊임없이 갖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 등을 돌리신 것일까? 나를 버리신 것일까?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성경은 “왜 하필 나죠?”라고 묻는 이들에게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는 듯 보입니다. 다만 욥의 예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으며, 때때로 우리는 그저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누구나 믿을 수 있는 사실을 믿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중에 그래도 믿겠는가? 하는 믿음의 도전 앞에 서는 것입니다.(이계연)
< 설 교 >
하나님께만 있는 지혜
욥기 28:1-28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네 자신의 무지를 알라는 외침이었다. 오늘 욥기 28장 본문의 결론 구절인 v28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죄를 떠남이 명철이다.”라고 말씀한다. 사람이 안다고 하면 모르는 것이고 지혜 없는 것이다. 오히려 모른다고 하면 알 수 있게 될 가능성이 있고, 지혜로운 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여러분은 어떤 자인가?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는 자들은 교만해져서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저와 여러분 모두 겸손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죄를 멀리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길 소원한다.
오늘 본문 욥기 28장은 좀 앞뒤 본문과 어울리지도 않고 독특하다. 다른 장들과는 달리, 누가 누구에게 얘기한다고 하는 언급도 없고, 계속 하던 참소도 없고 불평도 없으며, 앞서 한 어느 말에 대한 대답도 없다. 그저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비평적인 학자들이 욥 28장을 욥이 한 말이 아니고, 욥기의 편집자가 나중에 삽입한 부분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은 27장으로 시작된 욥의 연설이 28장에도 계속된다고 본다. 28장이 욥이 27장에서 시작한 연설의 후반부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의 오만함을 꾸짖고 있다는 것이다. 선생 욥이 친구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친구들과 욥의 세 번의 반복된 논쟁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공전이 계속됐다. 친구들은 그저 인과응보 원리에만 집착한 채 욥이 죄가 지은 악인이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니, 빨리 회개하라며 비난하고 공격했다. 이런 인과론에 의한 친구들의 조언은 욥이 왜 이 부당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납득하도록 설명해주지 못했다. 욥은 분명히 자신의 고난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욥 자신도 아직 확실한 답을 모른다. 그래서 욥은 계속해서 “어찌하여?”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욥의 궁금함과 계속된 질문에도 하나님은 계속 침묵하고 계셨다. 욥 자신도 갈수록 의문만 쌓이고 갑갑해져 갔다. 더 이상의 친구들과의 논쟁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욥은 지금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 지혜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치열한 논쟁이 한계에 부닥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지혜의 부재’에서 온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욥은 친구들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완전히 포기하고 그들과의 논쟁을 접었다. 그래서 욥 28장 이후에는 친구들의 논쟁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한다. 지금 자신의 문제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으면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도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다. 지혜가 있으면 잘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지혜가 없기 때문에 갈등하고 번민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힘들어한다. 이 본문은 지혜에 관해 어떤 말씀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혜에 대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1. 지혜는 광산에서 보석을 캐듯 수고해도 얻을 수 없다.
석탄을 캐는 데도 힘들고 목숨도 잃기도 하는데, 그보다 더 가치가 있는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보석들을 캐려면 얼마나 더 깊이 파들어 가야하고 얼마나 더 힘들어야 될까?(1-6절)
그렇게 깊은 땅속에서 보화를 캐내는 길은 눈이 제일 좋은 동물인 솔개도 알 수 없고, 매의 눈으로도 보지 못한다(v7). 용맹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동물들이 하지 못하는 광물 탐사의 일을 땅속까지 파헤쳐 용암까지라도 찾아간다(vv9-11). 그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땅속을 파헤치는 것은 그 보석이 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욥이 이렇게 광부와 광산과 채광 기술을 통하여 그 힘든 광물 찾기의 과정을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vv12-13,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그것은 바로 이런 땅의 보화를 캐내려고 사람들이 땅을 파고 뒤엎고 갱도를 깊이 뚫고 매달려 위험을 무릅쓰고 보물을 발견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질문하기 위해서다. 욥은 이렇게 지혜가 땅 속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노력이나 기술로 발견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땅이 "지혜와 명철이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그것이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라고 말한다.(v14) 이건 의인화법이다. 땅과 바다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데도 현인이라 하는 자들이 땅과 바다 앞에 굽신거리며 “여기에 지혜가 있다.”하고 “명철이 있다.”하며 땅과 바다를 신으로 삼고 섬긴다. 친구들은 이런 자들과 같다는 얘기이다.
2. 지혜는 그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
지혜의 값어치가 얼마나 귀한지, 어떤 값진 것으로도 바꿀 수 없다. vv12-19, “15 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 16 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 17 황금이나 수정이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품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18 진주와 벽옥으로도 비길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구나. 19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헤아리지 못하리라.”
여기 그 당시로서는 구하기 어렵고 엄청나게 비싼 귀금속이 총망라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른바 그 당시 통용되던 최고의 보석 카탈로그인 셈이다. 금, 은, 오빌의 금, 루비(청옥수), 사파이어(남보석), 금잔, 유리잔, 산호, 수정, 진주, 에티오피아의 토파즈(황옥), 정금 등이다. 그런데 이런 보물들은 서로 비교해서 값을 계산하고 사고 팔 수 있겠지만, 지혜는 값을 따질 수 없고 그 어떤 보물로도 사고 팔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최고의 가치를 지녔던 보물들과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최고의 보배가 지혜라는 것이다! 최고의 과학 기술과 최대의 장삿술로도 도무지 그 값을 매길 수 없어서 아예 사고파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지혜, 그것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욥은 보석보다 귀한 지혜를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묘사한다!
욥의 이러한 주장은 잠언서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한다.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잠 16:16)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보배니라.”(잠 20:15) 사실 친구들과 욥이 지금까지 벌여온 논쟁도 말로 지혜를 장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아직 진정한 지혜를 발견하지 못해 소강상태에 빠진 것 아니겠는가? 친구들이 자기에게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지혜는 욥이 정말로 얻기 원하는 지혜에 훨씬 못 미쳤다.
욥은 정말 이 세상이 어떻게 맞아 들어가고, 어떻게 작동하며, 세상의 근본 구조(물질적 구조뿐만 아니라 도덕적 구조까지)는 어떤 지를 파악하는 지혜야말로 무한히 값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 받고 있는 욥처럼 이 지혜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욥처럼 현재 고난당하는 성도가 창조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이 지혜에 이를 수만 있다면 “어찌하여?”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마침내 아무 것도 모른 채 고난을 당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지혜는 인간에 의해서 발견될 수 없고 그 가치도 인간의 계산으로 따질 수 없다면, 이제 또 다시 제기되는 질문은 지혜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이다. vv20-22, “20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21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22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이 말은 지혜의 출처가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우주 그 어느 곳, 피조세계 그 어떤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단 말이다. 우주의 맨 끝자락을 지키는 멸망과 사망에게 물어보면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하기를 “지혜가 있다고 소문은 들었지만, 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대답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3. 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v23이하에서 욥은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단언하고 있다. “23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24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vv23-24) 하나님이 땅 끝까지 감찰하시고 온 천하를 살피신다는 말은 온 우주 전체를 통 털어 지혜로 꿰뚫고 계신다는 뜻이다. 지혜의 장소, 그 지혜 있는 장소에 이르는 길, 그 장소와 길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이나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채광과 제련 등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과학 기술로서는 참된 지혜에 이를 수 없고, 오직 만물을 두루 다 통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에게 참된 지혜가 있다.
욥은 vv25-26에서 창조질서에서 가장 통제하기 어렵고 제멋대로인 듯이 보이는 날씨에 관하여 다룸으로 지혜의 핵심을 강조하고 있다. “25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26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새 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바람’, ‘비’, ‘천둥’, ‘번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네 가지는 우리 인간이 포착하기 어렵고 손에 잡히지 않을뿐더러 양면적이어서 자연재해재난의 파괴와 더불어 때로 곡식을 자라게 하는 복된 비를 내리기도 한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슈퍼컴퓨터와 인공위성과 무수한 기상관측장비가 있는데도 세계 기후체계를 이해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여기 질서 잡힌 세계의 가장자리에 거칠고 예측이 안 되며 통제가 불가능하고 제멋대로인 힘이 존재한다. 태풍, 토네이도, 홍수, 가뭄이 닥쳐봐라. 아무리 똑똑하다는 인간도 재간이 없다. 이것 것들이 질서 잡힌 우리 삶에 하루하루 침입하며 혼란을 일으키고 우리를 위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와중에도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다.” 모든 것을 주관하고 운행하고 계시다. 그분이 지혜이시다.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뿐만 아니라 v27, “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이 부분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바로 그 때에 그분께서, 지혜를 보시고, 지혜를 칭찬하시고, 지혜를 튼튼하게 세우시고, 지혜를 시험해 보셨다.”라고 번역했다. 보시고 선포하시고 굳게 세우시고 탐구하셨다. 이것은 보석을 보고 점검하며 그것을 준비하여 세우고, 흠을 찾아내도록 탐구하는 능숙한 보석상의 이미지이다. 지혜는 하나님의 왕관 보석들 가운데 중심이며, 전혀 흠이 없고 가치가 무한하다. 하나님만이 지혜가 어디 있는지 아신다.
그러면서 결론짓는다. v28에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서워 벌벌 떤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순위에 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엎드려 복종하고 하나님을 일상에서 예배하는 삶이다.
우리는 지혜를 찾을 거라고, 우리의 모든 질문의 해답을 알게 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혜를 아시는 분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악에서 떠나야 한다. 그것이 지혜요 명철이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란 말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 사랑이다. “죄를 떠남이 명철이라.”는 말은 수평적 관계이다 이웃 사랑을 말한다.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이 노년에 쓴 전도서의 결론도 이와 같다.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이 구절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 마음을 재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우리가 잠언서를 하루에 한 장 아이에게 읽히고 찬송을 부르게 한다고 그 아이가 지혜로운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을 일독하고 삶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지혜를 탐구하는 것은 망하는 짓이다. 그것은 세상지혜요, 처세술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날마다 붙잡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축물을 탐구하는 데서 건축자로 눈을 옮기라고 하신다. 지혜를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구하라고 말씀해주시고 있는 셈이다.
친구들도 욥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경외와 지금 욥이 말하고 있는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 경외는 그 차원이 다르다.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경외란 하나님이 다 감찰하고 계시니 지은 죄를 회개할 때 고난이 멈추게 되고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어쩌면 그것은 사단이 하나님께 참소한 내용, “욥에게 고난을 주시면 하나님을 떠날 것입니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세상의 권선징악적인 일반적 지혜와 같다.
그러나 욥이 말하고 있는 이 하나님 경외의 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복종하는 삶이다. 욥이 자신이 겪는 당혹한 일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마음과 목소리로 하나님을 뜨겁게 갈망하고 그렇게 하는 중에 계속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사는 것이 곧 지혜요 명철이라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고난 가운데 머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고 사는 것이 지혜요 명철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오, 지혜자이시기 때문이다. 고난과 함께 영광도 책임져주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신앙과 기도가 이 세상에서 복 받기 위한 주문이 되기 쉽다. ‘남녀호란케교’를 3,000번 외우면 소원성취 한다고 주문 외우듯이 외우는 종교인들이 있다. ‘주기도문’을 100번 외우면 소원성취한다고 주문 외우듯이 외우는 교인들도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마치 주문처럼 되어버린 분들을 본다. 주문이란 누가 이루어주는지, 왜 그것을 들어주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외우기만 하면 초월적인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주문은 들어줄 때까지 큰소리로 외칠 수 있다. 주문을 들어주는 자와 주문을 하는 자 사이에는 어떠한 인격적인 교류나 사랑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는 다르다. 관계가 우선이고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인 나의 요구와 날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응답이 다를 때에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그 깊은 차이를 발견하고서 하나님께 나를 복종시키고 조정하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고집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나를 꺾는 것이 바른 신앙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다. 이것이 지혜요, 그렇게 살기 위해서 악과 죄를 떠나는 것이 명철이다. 지혜와 명철은 그런 면에서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보다 크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계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분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힘들면 그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환경과 상황만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포기하고 도피해버린다.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까지 붙잡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욥처럼 마침내 금생과 내생에서 복 받게 되지 않겠는가!
욥기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우리 자신을 맡길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인정했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길이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주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며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함이요 참 지혜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땅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나를 내어 맡기는 것이 믿음이요 지혜다.
우리는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이미 우리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 속에 감춰져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지혜자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또한 이웃사랑을 위해 힘쓰며 산다. 말씀과 기도로 늘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붙잡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의 소욕도 있지만, 우리 안에 여전히 옛 사람의 속성인 육신의 소욕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되겠지만,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되면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몰라서 못 사는 게 아니라, 나쁜 습관이 문제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살자! 주님의 새 속성으로 옛 속성을 누르고 살아야 한다. 매 순간 하나님의 뜻에 나를 복종시키는 결단의 삶이 지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지혜요, 죄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