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북망산(北邙山)에서 벌어진 일
'허전하다.'
진일문은 눈을 뜬 순간 유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쌍기는 그가 운공을 하는 사이에 떠나 버린 것이었다.
그의 앞, 바닥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운명(運命)을 정(定)한 것이 하늘(天)이라면 인간의 도리는 최선을다 하는 것.......'
'무운(武運)을 빈다'
단 두 줄뿐이었다.
그것도 지력(指力)을 이용해 땅바닥에 휘갈기듯 새겨 놓은.......
그러나 진일문은 서명이 없어도 그것이 각각 취화상과 만박노개가 남긴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나는 두 분께 정녕 두터운 은전을 입었구나. 평생을 갚은들 그 천만분지 일이나 갚을 수 있을지.......'
취화상은 과연 그답게 심상치 않은 잠언을 남기고 갔다.
진일문은 그 뜻을 헤아려 보며 새삼 깊은 감회에 빠져들었다. 왜 모르겠는가? 과거에는 운명을 한탄했으되 언제부터인가 전심전력을 다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그가 아닌가?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내심 부르짖었다.
'후배, 반드시 어르신의 뜻에 부응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만박노개는 단지 짧고 소탈한 글을 남겼을 따름이나 거기에는 실상 일세를 풍미한 노기인의 뜨거운 관심과 격려가 담겨 있었다. 이 또한 모르지 않는 진일문이었다.
'두 분의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훗날 반드시 재회하게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는 급기야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두 기인을 향해 구배(九拜)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비록 사도의 연이 없다 하여 거부당하기는 했으나 그로서는 현고자와 더불어 두 기인을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적막한 유실.
혼자 남게 된 진일문은 공허감에서 일탈하여 여러 가지 생각들을 떠올렸다. 개중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해 낸 것은 이 고분으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숱한 주검들이었다.
이것에 관해서는 벌써부터 만박노개에게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빌자면 고분의 참극은 오십여 년 전 마교(魔敎)와 중원동맹(中原同盟)의 대혈전이 빚어놓은 결과라고 했다.
지난 날 마교의 교주인 동방절호가 중도에서 변심한 나머지 원(元)의 황실과 손을 잡고 중원을 정복하려 흑심을 품었던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마교의 위세만도 천하를 뒤엎을 정도였는데 이역의 고수들까지 끌어들이는 바람에 중원무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것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동방절호는 야망을 채 펴기도 전 무극단(無極斷)에서 비명횡사했다. 그것도 그 자신이 흡사 분신인양 신뢰했던 삼인의 수하에게 배신을 당한 나머지 그렇게 죽어 갔던 것이다.
이른바 십대천왕(十代天王).
그들은 마교의 조직 내에서 교주 한 사람을 제외한 서열 제 이위의 인물들이었다. 일신의 무공도 교주인 동방절호와 경미한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들 십대천왕 가운데 삼인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동방절호를 제거했다. 그들이 훗날 삼천공(三天公)으로 불리우게 된 삼성림의 세 기인이었다.
천하도인(天下道人), 천검불패(天劍不敗), 만상군자(萬象君子).
이들 삼인은 먼저 동방절호를 천산의 무극단으로 유인해 추락시켰다. 그리고 마교의 세력을 이 고분에 몰아넣은 후, 중원무림동맹을 구성해 이 곳에서 마교의 최후를 장식하게 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공전절후의 대혈전이었다.
원래 이 곳은 송대(宋代) 한 제왕의 무덤으로써 갖가지 기관장치가 매복되어 있었다. 바로 그러한 조건하에서 마교와 중원동맹이 환우대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양측 모두가 거의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손실을 입었다. 마교를 몰살 시켰다고는 하나 그만큼 중원동맹의 피해도 지대한 것이었다.
각파의 장교는 물론이거니와 무수한 무림의 최정예 고수들이 모두 이 곳에서 뼈를 묻었다. 이후로 각파의 최고 절기들이 실전되는 불상사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싸움에서 가장 난적(亂賊)은 역시 십대천왕 중 삼인을 제외한 칠대천왕이었다. 동방절호가 제거되었다고는 하나 그 때까지도 그들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요행이랄까? 칠대천왕은 삼천공의 배신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고, 덕분에 그들은 삼천공의 계획된 암습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일전에 진일문이 고분의 대청에서 보았던 일곱 명의 노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 고분은 마교가 삼천공의 권유에 따라 한 때 그들의 본궁(本宮)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싸움이 끝난 후 고분은 자연스럽게 폐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내삼기가 하필 이 곳을 비무장소로 선택한 데에는 한 가지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현고자를 포함한 그들 우내삼기는 당년에 고분 내에서 벌어졌던 대혈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 때에 그들은 일만 리나 떨어진 곤륜산(崑崙山)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이 벌어지기 직전 곤륜산의 한 기인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었다. 그리하여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갔는데, 막상 그 곳에서 그들이 본 것은 그 기인의 싸늘한 시체가 전부였다.
의혹을 품고 그들이 다시 중원으로 되돌아왔을 때는 이미 고분의 혈전은 막을 내린 뒤였다. 살아남은 자라야 극소수.......
우내삼기는 통탄을 금치 못하는 한편, 고분을 둘러보고는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치를 떨어야 했다.
그들은 마교 비전 무공의 무서움을 비로소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고분에서 광화비전(光化秘傳)에 대한 기록을 발견한 그들은 실로 경악해마지 않았다.
광화비전상의 무학은 가히 인간의 무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 아니 악마(惡魔)의 무공이었다. 인세를 모조리 멸절시키는.
우내삼기는 한 가지 묵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즉 광화비전을 상대하기 위해 여생을 바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이 십 년에 한 번씩 비무를 하게 된 것도 나중에는 이 때문이 되어 버렸다. 그 간의 성취를 비교하며 서로를 고무시키는데 그 본연의 뜻을 두게 된 것이다.
우내삼기가 광화비전을 그토록 의식하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광화비전이 마교의 멸망과 함께 제 삼의 인물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광화비전은 원본(原本)과 필사본(筆寫本), 두 권이 있었다. 그 중 필사본은 삼천공이 회수했으나 원본이 싸움의 와중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마교의 부교주(副敎主)였던 동방불후가 그 장본인이었다. 그는 광화비전과 함께 격전장에서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고, 그 사실은 대단한 우려를 자아냈다.
이 때문에 삼천공은 삼성림에 들어간 이후로 강호에 발을 끊게 되었다. 광화비전의 신비를 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뒤로 동방불후가 행적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이십 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는 무당파 내에서 현진자라는 신분으로 숨어 있었다. 그것이 알려지자 또 한 번의 무시무시한 격돌이 있었다.
천하에서 단 육인(六人)만이 아는 비밀은 이 때 파생되었다.
동방불후.
그가 현진자라는 이름으로 감히 대무당파의 대통을 이어받으려고 한 음모는 뜻밖에도 한 여인의 입을 통해 알려졌다.
그는 사공(邪功)을 연마하기 위해 여인의 순음지체를 이용하다 실수로 그 여인을 놓치게 되었고, 여인으로부터 그의 정체를 알게 된 현고자는 곧바로 취화상과 만박노개에게 연락을 취했다.
두 사람은 다시 삼천공과의 은밀한 상의를 거친 끝에 마교의 잔재를 근절시켜 버리기로 중지를 모았다.
결국 동방불후는 천의봉(天衣峯)에서 우내삼기와 삼천공이라는 육인의 개세 고수들에게 합공을 받게 되었다.
실로 의외인 것은 그 싸움의 결말이었다.
천하에서 그들 육인의 합공을 당해낼 자란 있을 리 만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방불후는 무려 천여 초를 버텨냈다.
그도 시간이 흐르자 어쩔 수 없이 수세에 몰려 천의봉 아래로 떨어지긴 했으나 그 시체가 종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육인, 즉 우내삼기와 삼천공은 더욱 더 광화비전 상의 무공에 대해 경각심을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육인의 합격이 단 일인을 제압하지 못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들은 모두 참담한 심경과 더불어 맡은 바 각자의 임무에 박차를 가하기로 맹약하고 서로 헤어졌다.
우내삼기가 무림의 일에 거의 등을 진 것은 사실상 이 천의봉 대전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삼천공은 광화비전을 연구하기 위해 그로부터 십 년 뒤에는 아예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문제의 광화비전.
이는 본시 중원무학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멀리 파사국에서 발원한 그들 정교(正敎)의 무학이었다. 또 이 무학을 사용하는 마교 역시도 파사국에서 전래된 지파였다.
진일문은 쓴웃음을 지었다.
'쌍기 두 어르신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 두려 했는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다시금 취화상과 만박노개로 되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관념상의 회귀현상은 다름 아닌 그들에 대한 염려 탓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그들 두 기인은 현재 노구를 이끌고 일로 파사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당금 무림의 정황도 그렇거니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그들로서는 정기적인 비무 외에 뭔가 색다른 방안을 모색해야 했고, 그 일환으로 광화비전의 원류를 직접 찾아 나선 것이었다.
두 기인은 또한 어쩌면 이번 길이 마지막 길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진일문이라는 젊은 기재로 하여금 자신들의 대신해 후사를 도모하게 했던 것이다.
진일문의 미간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설마 그 분들께 무슨 변고가 생기지는 않겠지?'
그는 곧 불안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당면해 있는 문제들로 생각을 전환시켰다.
'구대성군, 그들은 공히 삼천공의 제자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천하를 쟁패하려는 야심 아래 각기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 만일 이 일을 폐관 중인 삼천공이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진일문.
확실히 그는 변해 있었다. 어느 덧 그는 개인적인 복수의 차원을 벗어나 중원 무림의 안위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만박노개와 취화상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었다.
광화비전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무서운 덫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도 이상을 익히게 되면 심성이 변해 마성(魔性)에 빠져든다는 점이었다.
삼천공을 떠올리던 그는 흠칫 굳어지고 말았다.
'혹 그 분들께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광화비전을 연마하다 마성에 빠졌다거나 주화입마 하여 무천비동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그리고 또... 아! 그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무서운 일이다.'
진일문은 생각의 연결 고리를 따라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돼!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이제 이 곳을 떠야겠군.'
진일문은 길게 심호흡을 한 뒤,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이 황금관에 가서 뚝 멎은 것은 그 때였다.
그는 격해져 있는 와중에서도 한 가닥 의혹을 느꼈다.
'저 관에는 누가 들어 있을까? 이 고분의 주인인 송대 제왕의 시신? 아니면.......'
어떤 상황이건 호기심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만치 진일문이 젊고 열정적이라는 증거다. 과연 그는 어느 결인지 벌써 황금관으로 다가가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관이라?'
진일문은 그 엄청난 사치의 주인공이 더욱 궁금해졌다.
'어디 과연 누가 들어 있는지 한 번 볼까?'
그 때까지도 관은 철저하리만큼 밀폐되어 있었다. 어디에도 손을 댄 흔적은 없었다.
'두 분께선 아마도 재물에 담백한 분들이라 이 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셨겠지?'
진일문은 고소를 지었다.
'후후... 누가 보면 내가 마치 황금관 자체가 탐이 나서 이러는 줄 알겠군.'
곧 그의 눈에 쏘아져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아니, 이건 열쇠구멍이 아닌가?'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황금관은 정중앙 부분에 꼭 열쇠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녕 상식 밖의 일이었다.
시신을 보관하는데 무슨 열쇠가 필요하단 말인가? 한 번 닫았으면 되었지, 다시 열어볼 일이라곤 도통 없을 것 같았다.
아무튼 이 새로운 발견은 진일문으로 하여금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연이라는 것을 믿게 만들었다.
그는 마치 이끌리듯 품속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혹시?'
내심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했으나 그의 손은 이미 하나의 열쇠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안남국의 공주인 여취벽이 그에게 정표로 준 신물이었다.
진일문은 약간은 바보가 된 듯한 심정이 되어 그 열쇠를 황금관의 구멍에 밀어 넣어 보았다.
'아! 이럴 수가.......'
그는 절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뜻밖에도 열쇠는 구멍에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는 들어간 열쇠를 돌려 보았다.
왼쪽으로는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고,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리자 열쇠는 세 바퀴나 돌아갔다.
철컥!
금속성이 들렸다.
'놀랍구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열쇠가 마침내 황금관을 열었던 것이다. 진일문은 관의 틈이 크게 벌어져 있는 것을 보며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안남국의 공주인 여취벽이 이 고분의 황금관을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니, 아무리 꿰어 맞추려 해도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황금관은 의외로 가볍게 열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전혀 상상치도 않았던 것이 들어 있었다. 썩어가는 시신을 연상하고 있던 진일문은 다소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후후... 내가 쓸데없이 긴장을 했었군.'
관 속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개중 가장 먼저 그의눈에 들어온 것은 한 자 높이의 백옥미인상(白玉美人像)이었다.
두번째로는 다섯 조각의 검은 철권(鐵拳), 마지막 것은 별 특징이 없어 보이는 하나의 목갑이었다.
백옥미인상에 눈길을 던지던 진일문은 언뜻 얼굴을 붉혔다.
그것은 깎아놓은 솜씨가 매우 정교했는데,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비록 생명을 지니지 않았다고는 하나 적나라한 여체가 주는 묘한 충격은 실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곧게 뻗은 사지에서는 마치 피가 통하고 있는듯 온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유방은 알맞게 부풀어 복숭아를 연상시켰으며 두 개의 유실은 만지면 금방이라도 일어설 것 같았다.
어디 그 뿐인가? 미끈하게 다듬어진 허벅지 사이에는 비지(秘地)가 수줍고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누구인지 이것을 조각한 자는 꽤 짓궂군.'
진일문은 실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백옥미인상은 오관이 아주 뚜렷했고 반쯤 내리 감은 눈으로는 사람을 매료시킬 듯한 신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더 보았다가는 빨려들 것 같아 외면해 버렸다. 더구나 재질이 백옥이다 보니 투명하다 못해 뼈까지 드러낼 듯한, 이른바 빙기옥골의 여인으로 보였지 않은가?
다섯 개의 철권.
거기에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다섯 권에 가득히 새겨져 있는 그 문자들을 보며 진일문은 무척이나 의아해졌다.
'이것은 갑골문(甲骨文)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두문( ?文)도 아니다. 변방의 돌궐이나 그 밖의 이족들이 사용하는 문자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런 형태의 문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어느 나라의 문자일까?'
모르는 것이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 해서 알아지지는 않는다. 진일문은 이내 철권으로부터 목갑으로 시선을 옮겼다.
목갑은 크기가 작아 겨우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였다. 관심을 갖게 되어서일까? 그것은 가까이 놓고 보니 전체적으로 은은한 품위가 느껴지기도 했다.
진일문은 목갑의 재질이 혹 보리수(菩提樹)가 아닐까고 생각했다. 목갑을 열자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한 개의 반지였다.
그것은 검은 빛을 띈 가운데 팔각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며 정중앙에는 큼직한 흑석이 박혀 있었다.
'묵지환(默指環)!'
진일문은 내심 읊조리며 그 반지를 무명지에 끼워 보았다. 신기하게도 묵지환은 맞춤인 듯 그의 손가락에 꼭 들어맞았다.
그는 그것을 낀 순간 은연 중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웬지 다시 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일지 않았다.
'이것이 전대의 보물이라면 통상 그렇듯 인연이 있어 이 관을 여는 사람이 곧 여기에 담겨 있는 물건들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열쇠의 본래 임자가 여취벽이었으니 후일 그녀를 만나면 이 사실을 알려 주어야겠구나.'
진일문은 철권이나 백옥미인상은 부피가 있어 지닐 수가 없으므로 반지만을 일단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는 관 뚜껑을 닫으려다 말고 문득 백옥미인상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백옥으로 구성된 피부 속으로 가느다란 혈선이 비치는 기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백옥미인상을 만져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따뜻한 기운이 손을 통해 혈관으로 흘러들었다.
진일문은 아연했으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으음, 이것은......."
백옥미인상.
그것은 전설의 만년온옥(萬年溫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온옥이란 본시 지정(地精)의 온기를 흡수하여 늘상 따스한 기운을 포함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진일문은 백옥미인상이 살아있는 듯 생생한 모습인 데다가 인체와 마찬가지로 온기마저 품고 있자 일면 야릇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미인상의 몸에서 혈선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이것은 인체의 경락(經絡)이 아닌가?'
아무리 만년온옥이라 해도 돌은 돌이었다. 그런데 그 돌 속에 이처럼 경락이 형성되어 있다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진일문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수중에서 백옥미인상은 점점 뜨거워지더니 종내에는 불처럼 달구어졌다.
'웃!'
그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로 인해 하마터면 그것을 떨어뜨릴 뻔했다. 재빨리 공력을 일으켜 손이 데이는 것을 방지하기까지, 짧은 찰나에 그는 무척이나 당황해야 했다.
이윽고 진일문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혈선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혈선은 어떤 경락의 흐름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인체의 각 혈도와 경맥의 위치가 일목요연하게 표시된 가운데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확연히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한 개의 검은 점(點)이었다. 바로 그 점이 경락을 따라 움직이며 운행의 과정을 낱낱이 제시해 주고 있었다.
'아! 이것은.......'
진일문은 비로소 그것이 모종의 내공운기법을 가르쳐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구결을 알지 못하니 이렇다할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는 검은 점이 백옥미인의 경락을 연달아 세 바퀴 돌았을 때, 마침내 그 운기요령을 기억 속에 담아 놓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운기법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그 자신이 익히고 있는 것과도 크게 틀렸다.
진일문은 자신의 내공을 가지고 백옥미인상이 나신을 통해 보여주는 요령대로 운행해 보면 어떨까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맙소사! 이것은 곧 자살 행위나 다를 바가 없다. 만일 이대로 행한다면 전신의 경혈이 상궤를 벗어나 모조리 뒤틀리거나 파열되고 말 것이다.'
진일문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공연한 일로 시간을 낭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인상을 도로 황금관 속에 집어 넣어 버렸다.
쿵!
관이 닫히자 열쇠는 저절로 튀어 나왔다.
'후후... 아무튼 귀여운 공주님께 감사해야겠군. 여취벽, 그녀와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나는 황금관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끝내 알 수 없었을 테니까.'
진일문.
그는 미처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 황금관이 품고 있는 엄청난 신비에 대해서....... 그것은 무림인들이 듣는다면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마교 최대의 비밀이기도 했다.
그는 다만 연원도 모르는 묵지환 하나를 취한 것으로 몹시 만족해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침내 진일문은 유실을 향해 일별을 고했다.
'언제고 이 곳을 다시 찾으리라. 후후후... 백옥미인상과 다섯 개의 철권이 내 안부를 궁금해 할 것이므로. 여취벽도 역시 마찬가지이겠고.'
스스스--!
어깨를 가볍게 흔들자 그의 신형은 흡사 안개가 흩어지듯 소리 없이 유실에서 사라졌다.
가히 환상적인 신법이었다. 이 고분에 들어오기 전과 비한다면 진일문은 무공도 그렇지만 신법에서도 실로 괄목할만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달빛도 어스름한 시각.
음산한 어둠이 천지를 휘감고 있었다. 바야흐로 삼경(三更)을 넘긴 사위에는 줄곧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사자의 원혼인양 무덤 속으로부터 간간이 튀어 오르는 푸르스름한 인광(燐光)은 이 곳 북망산의 풍경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곳에는 귀화보다도 더 으스스한 한 개의 불빛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등(燈)이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흡사 춤을 추듯 전진해 오던 그 등은 어느 한 곳에 이르자 뚝 멈추었다.
'무엇일까? 저것은.'
진일문은 예의 등을 주시하며 미간을 좁혔다. 유혼들만의 세계인 이 북망산에 갑자기 등이 출현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쉽게 납득할 일은 아니리라.
그가 막 고분으로부터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이 바로 멀리서부터 다가오던 이 등이었다. 그는 이로 인해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써늘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등롱은 인광과 마찬가지로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등을 씌운 누런 종이에는 귀두왕상(鬼頭王像)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푸른 빛에 휩싸인 채 무서운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귀두왕상.
그것은 확실히 이러한 장소에서, 그것도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마주칠 만한 것은 못되었다. 진일문은 놀랐던 자신을 떠올리며 새삼 실소를 금치 못했다.
'대체 놀랄 게 무언가? 설사 귀신이 나타난들, 후후후.......'
지금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직 호기심뿐이었다. 그는 간혹 강호상에서 습관처럼 벌어지던 괴사건들을 부단히 접해온 덕분에 이내 충격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진일문은 고분의 비석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제단도 그렇지만 그 비석 또한 거대한 크기여서 능히 두 사람도 은신할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은 그 상태에서 날카롭게 전면을 주시했다.
어느 이름 모를 봉분의 비석.
비바람에 마모되고 금이 간 그 비석 위에 예의 귀왕등이 놓여 있었다. 주위에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귀왕등은 줄곧 비석 위에서 칙칙한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이다경 쯤 지났을까?
휙! 휘휙!
옷자락이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비석 앞에 한 무리의 인영들이 속속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모두 다섯 명으로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일제히 등을 향해 부복했다.
그들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빼꼼히 드러난 눈에서는 한결같이 예리한 안광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그들이 내력이 강한 고수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 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각기 등에 하나씩 자루를 메고 있었다. 그런데 자루가 보여주는 형상인즉 그 속에는 아마도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숨막히는 침묵이 그들 위로 무겁게 내려 앉았다. 하지만 복면인들 중 누구도 입을 열려 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는 그들이 왔던 반대방향으로부터 다시 두 개의 자루를 멘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나타났다.
휙--!
그들 역시 당도하자마자 등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로부터 대략 향 한 자루 탈 시간이 흐른 뒤.
이들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네 명의 복면인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앞서의 인물들과는 달리 작은 보따리를 두 개 들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의 복면인, 그가 출현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그만은 예외적으로 빈손이었다. 그는 먼저 도착한 복면인들을 돌아보고는 자신이 빈손이라는 것을 의식한 듯 손을 내려보며 공포의 빛을 떠올렸다.
이들 복면인들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부터 나타났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복면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귀왕등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복면인들은 귀왕등의 주인을 기다리는 듯 계속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들로 인해 반쯤 허물어진 무덤 앞은 정적과 더불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현장으로 일변되었다.
문득 귀왕등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러자 복면인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가(四家)는 임무를 이행했소?"
홀연히 들려온 그 음성은 마치 밤부엉이의 울음 소리처럼 귀를 거슬리게 했다. 어디서 들려 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 말에 복면인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유독 마지막으로 이 곳에 날아내린 한 사람, 즉 남쪽에서 온 복면인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어느 덧 전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다시 예의 거슬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럼 접수하겠소."
마치 유부에서 흘러나온 듯한 그 음성이 끝나는 순간, 무덤 뒤로부터 한 대의 마차가 굴러 나왔다.
마차는 온통 검은 색 일색이었다. 마차 자체도 그랬지만 말도 흑마였고, 마차의 휘장도 전부 검은 천으로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마부석에 앉아있는 마부들 역시도 전신에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괴이한 것은 그들의 얼굴에 귀왕탈이 씌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덤이 밀집되어 있는 북망산 묘역에 나타난 이 행차는 마치 지옥에서 죽음을 접수하러 온 사자(使者)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마부는 두 명이었다.
똑같은 차림새에 두 명이 다 귀왕탈을 쓰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복면인들은 일제히 굳어졌다.
이윽고 오른쪽의 마부가 입을 열었다.
"먼저 물건을 확인해야겠소."
바로 방금 전에 들려왔던 음성이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맨 처음 당도한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재빨리 자신들이 메고 온 자루를 열었다.
과연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전부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의식을 잃고 있었으되 일견하기에도 무공을 모르는 서생들 같았다.
그들은 혼절한 가운데서도 공포의 기색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모두 나이가 약관을 넘지 않았고 얼굴이 영준했다.
복면인들이 무엇 때문에 닭 잡을 힘도 없는 백면서생들을 잡아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가지고 온 물건(?)들을 내놓은 후, 마부의 입에서 뭐라고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음, 당신네 사가(査家)는 과연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했소. 가도 좋소."
그 말이 떨어지자 복면인 중 한 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사자(使者), 사매는......?"
마부가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안심하시오, 잘 있으니까. 앞으로 두 가지 일만 마치면 당신들에게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오."
마부는 자못 위협적인 분위기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귀왕의 총애를 받고 있소. 당신네 사가에서보다 훨씬 편하게 지내고 있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그럼......."
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신형을 날렸다.
스슷--!
이번에는 두 번째로 등장한 다섯 복면인들이 자루를 끌렀다.
자루 속에서 나온 것은 역시 사람이었다. 두 명의 노인으로 그 중 한 사람은 흰 수염이 가슴까지 드리워진 칠순의 인물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눈썹이 어찌나 두터운지 마치 헝겊이라도 오려 붙여 놓은 것 같은 특이한 인상이었다.
이들도 서생들처럼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꽤나 중상을 입은 듯 옷자락에는 피가 군데군데 배어 있었다.
"우리도 사자의 명을 헛되게 하지는 않았소이다."
나이가 많은 듯 복면인의 음성은 탁하고 힘이 없었다. 마부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당신네 팽가(彭家)의 도법(刀法)은 천하제일이라고 뽐내지 않았었소? 그러더니 어째서 강남사우(江南四友)를 다 잡아오지 못하고 저들 두 명 뿐이오?"
예의 복면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답했다.
"강남사우는 환우오사, 신주팔괴(神州八怪), 동해쌍선(東海雙仙)과 함께 무림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들이오. 우리 팽가도 이번 일에 희생이 적지 않았소이다. 비록 사우 중 두 사람밖에 잡아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서화음기(書畵音 ) 중 서우와 화우를 인계하니 사자는 살펴주기 바라오."
놀라운 일이었다.
강남사우라면 무림 내에서도 극히 신비한 고인들이다.
그들은 각각 서화음기로 불리우며 한 방면의 대가(大家)였다. 뿐만 아니라 인품이 고매하고 대쪽 같이 곧아 무림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들이다.
무공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납치되어 오다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었다.
마부는 차갑게 잘라 말했다.
"어쨌든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약속대로 한 사람을 남겨 두시오."
그 말에 복면인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기어이 그럴 셈이오?"
그러나 마부의 기세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귀왕께서는 한 번 내놓은 말은 절대 철회하지 않는 분이오."
"으음......."
복면인은 몹시 분노한듯 했으나 반면에 억지로 이를 눌러 삼키고 있었다. 이 때, 그의 뒤에 엎드려 있던 한 명의 복면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비분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숙부님! 조카가 남겠습니다."
먼저의 복면인은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아아! 어쩌다 본가가 이 꼴이 되었단 말인가? 우(雨)야, 다 이 숙부가 무능한 탓이로구나."
그는 앞으로 나선 복면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눈빛이 감정의 동요로 인해 눈에 띌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나머지 세 명의 복면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자!"
그들은 왔던 곳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갔다.
그 직후, 그들의 일행이었다가 혼자 남게 된 복면인은 하늘을 우러러보더니 자신의 천령개를 힘껏 내리쳤다.
퍽!
섬뜩한 소리와 더불어 그는 머리가 으깨어진 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볼모역을 자청했으나 막상 끌려가기는 싫었는지 스스로 머리를 쳐 자결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끔찍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검은 마차 위에 앉아있는 마부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그들은 무감동한 시선을 다시 네 명의 복면인들에게 돌렸다.
네 복면인은 자루 아닌, 두 개의 작은 보따리를 풀었다.
그 속에서는 놀랍게도 수급이 나왔다. 그것은 중년의 나이쯤에 이른 두 남녀의 수급으로 죽은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몰라도 아직껏 한과 증오의 빛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행히 명을 완수했소이다."
개중 한 복면인이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마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산동악가(山東岳家)의 삼십육식 전광검법(電光劍法)은 명불허전이오. 화산파의 음양쌍검(陰陽雙劍)을 처리한 것만 보아도 능히 알 수 있겠구려."
그러나 복면인은 그 말이 조금도 기쁘지 않은 듯 역시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로써 본가는 화산파와 불공대천지수가 되었소이다. 본가의 소가주를 언제 풀어줄 것인지나 말씀해 주시오."
"귀왕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오. 돌아가 기다리시오. 차후로 연락이 갈 것이오."
네 명의 복면인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아무 말도 못한 채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휙--!
그들마저 몸을 날려 사라져 버리자 마지막 남은 사람은 이제 빈손으로 왔던 한 명의 복면인 뿐이었다. 그는 몹시 불안한 듯 벌써부터 계속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마부의 시선이 닿아오자 그는 스스로 입을 열었다.
"본인이 명을 수행하지 못한 것은 뜻밖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러나 조금만 더 시간을 준다면......."
마부는 스산한 음성으로 그 말을 받았다.
"당신에 관한 일은 벌써 알고 있소. 지금 당신의 말은 대흥루에서 일어났던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오?"
"그... 그렇소. 그 일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로써......."
"후후... 당선(唐扇), 착각하지 마시오. 귀왕께서 그런 구구한 변명을 들어주실 것 같소?"
그 말에 당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그의 눈이 급하게 움직이더니 자살을 한 복면인의 시신에 가 멎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이 번뜩 움직였다. 당가의 인물답게 암기를 쏘아내려는 것이었다.
"흐흐흐... 당선, 늦다!"
이제껏 잠자코 있던 또 한 명의 마부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당선보다 먼저 무엇인가를 던졌다.
휙--!
"헉! 아... 안돼--!"
당선은 공포에 질린 외침과 더불어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마부의 말대로 때는 늦어 있었다. 무언가 그의 발치께에 떨어졌고, 그것은 그가 막 공중에 떠오르려는 순간에 터졌다.
콰쾅--!
"크아아악!"
폭음이 일자 당선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대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실로 전율스러운 광경이었다. 폭음이 가라앉고 주위가 잠잠해졌으나 그가 뿌려낸 피와 살점들은 여기저기 분산된 채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을 듯 역한 피비린내를 풍겼다.
당선으로 말하자면 암기의 명가인 사천의 당가에서도 당당히 세번째 서열에 올라있는 고수였다. 그런 그가 이렇듯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두 명의 마부는 그의 죽음에도 역시 무심했다.
그들은 마차 위에서 내려와 다섯 명의 서생과 강남이우, 두 덩이의 수급 등을 마차 안에 실었다. 이어 마차의 검은 휘장을 내린 그들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비석 위에 놓여 있던 귀왕등도 어느 결엔가 마차 안으로 옮겨진 후였다.
이윽고 잠시 전에 일어났던 괴사건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검은 마차는 무덤들이 밀집해 있는 북망산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한편.
진일문은 내심 탄식해마지 않았다.
'아! 사대신가가 이처럼 전락해 있을 줄이야.......'
비석 뒤로부터 나오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까지 지켜보았던 광경이 도시 현실의 일 같이 여겨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당선의 죽음은 그에게 적지않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마차를 뒤쫓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이내 포기했다.
사실 진일문이 이처럼 빨리 유실 안으로부터 나온 것은 달리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북망산(北邙山).
이른바 사자들의 귀역(鬼域), 이 곳에서 일어난 일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귀왕등과 사대신가의 역학적인 관계는?
마침내 잔잔하던 무림에 서서히 피바람이 불어 오려는지.......<
카페 게시글
▣-무협 소설방
검궁인의 영웅 호가행~ 25장 북망산(北邙山)에서 벌어진 일
모네타
추천 4
조회 686
16.11.03 07:51
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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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했습니다.
즐감요!!!!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든가...일문 이제 서서히 ..
ㅈㄷㄱ~~~~~~~~~~``````````````````
늘 감사합니다.
굿..즐감,,,
감사~~^^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 고맙습니다.
즐감요.
쟴납니다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즐.......감..........요.
감사합니다
즐독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즐감요.
즐감하고 갑니다
준비 되었으니 이제 일을해야 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