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춘회관 1 층 '사랑방'에서 동창회 임원회의가 끝나고
오늘 저녁은 서울의대에 다녔다면 추억이 남아있는 중국집 '진아춘'에서 하기로.
안내 받아간 방에 좌석배치가 회장님을 중심으로 좌우로 아예 주류와 비주류가 나누어 앉았다.
술은 8대 중국 8대 명주인 53%짜리 노주를 시킨다.
메뉴판도 구식이다.
제일 먼저 나오는 군 만두는 진총무가 이 집은 만두를 여덟개가 한접시인데 하고 운을 떼자 마자
등장하는 열개짜리 한접시. 물론 나중 추가 서비스까지 받았다.
가난하였던 학창시절과 전공의 시절은 고량주 안주로 이걸시키고
짜장면으로 끝내었다.
군대 훈련시절에도 동기들끼리 이 집 짜장면을 말하곤 했는데.
이 안의 고추는 정말 매우므로 골라내고 먹는다.
앞자리에서 잘 못먹고 '호호'한다.
실내는 이런 중국식 벽장식도 해놓고.
바깥에 전시한 여러 종류의 중국술들.
자리를 뜰때 세병을 시킨 술 중 1/3을 남겨 싸인을 하고 다음을 기약.
틀림없이 다음 번에 가면 누가 마시고 없을거야.
진아춘의 역사는 길고,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고, 자리도 여기저기로 옮겨다니다가
오늘보니까 대로를 벗어나 골목 안에 근사하게 새로 태어났다.
현재의 주인은 60년대의 그 눈이 튀어 나온 주인의 손자뻘이 하고 있다.
참고로 서울에서 대를 물려가며 오래된 중국집은 을지로의 '안동장'
내가 근무하는 중앙대입구의 '안동장'도 역사가 좀 된 편이고
두산타워 옆골목의 '동화반점'도 바뀐 주인으로 오래하는 집.
내 블로그에 진아춘에 대한 이야기를 전재한다.
예과 2학년, 그러니까 1967년 11월.
동숭동 문리대 교정이 온통 샛노란 은행나무 단풍잎으로 쌓여 있을 때
재경 경북고등 문리대 동문들 모임, 모임이라 해 봤자 은행단풍 잎 위에서
책을 자리삼아 새우깡에 소주나 한잔 하자고, 이 오후 늦은 시간에 있었다.
나도 분명히 문리대 의예과이니까 참석을 하였는데.
거나하게 취한 김에 이차를 가자고 해서 간 곳이 그 유명한 중국집 進雅春.
지금은 혜화동 쪽으로 자리를 옮겨 2세가 영업을 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왜 음식 먹고 맡기고 안 찾아간 시계들로 한번 신문에 크게 난적이 있었지요.
고량주에 탕수육 등을 기분 좋게 먹고 마시고
일어날 때 돈을 아무리 모아보아도 몇 백 원이 되지 않는다.
계산은 1,800원. 당시 이 돈의 기치는 변두리에서 하숙비 한달분이고
학생 버스표 42장에 100원 하던 때이니 적지 않은 돈이 틀림없었지요.
할 수 없이 반짝 반짝 빛나는 내 시계를 풀었지요.
집에 연락을 하여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해서 일주일 후
전신환(무엇인가 아시지요, 요즈음의 온라인 송금 같은 것)으로
특별용돈 2,500원을 송금 받고 시계를 찾으러 갔더니
누가 내 시계에 자장면 2그릇을 시켜 먹어 1,860원이 되었더라고요.
하도 억울해서 40년도 지난 얼마 전 후배들과 저녁을 먹을 때 이야기하였더니
“흠 누구 겠구나.”하며 지금은 지방 모국립대학교수를 하고 있다고.
우리 회장님이 기증한 사진으로 예전의 진아춘 모습.
물론 우리가 다닐 때는 옆의 붉은 벽돌건물은 없었지만.
박부회장님이 '우리 여기까지와서 낭만을 안 들릴수는 없잖아.'
진총무가 골라 온 아르헨티나 산 말벡을 마시며
내가 좋아하는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니
마치 학창시절로 돌아온 듯하다.
성능 좋치않는 휴대폰 카메라로 창밖의 길건너 동숭동 캠퍼스자리를 찍어 본다.
젊은이들끼리 마주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잠시나마 예전 시절, 그러니까 40여년 전으로 돌아갔다 왔다.
오늘은 '진아춘'에서 저녁과 '학림'에서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셨으니
부족함이 없는 하루 저녁이었다.
첫댓글 사진중 난줄 착각할만한 사람이 있는데 나는 아니겠지..??
우리 3년 선배로 안과하시는 박상홍입니다.
백근수처럼 보이긴 하는데, 조금 다른 것 같네요....
진총무라는 분은 군만두 8개라고 했다가 10개 나오는 바람에 머쓱했겠고.... 진아춘이 회화동으로 자리를 옮겼나 봅니다.
음식은 평범한 것 처럼 보이고...., 학림에서는 포도주까지 써빙할수 있나 봅니다. 술인데.....
3년 선배가 아니고 2년 선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