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처녀
박 광 택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춘천에는 영원한 처녀가 살고 있다. '소양강처녀' 노래비(2004,10,8.) 와 처녀동상(2005,11,8.)이 소양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소양2교 인근에 건립되어있다.
1969년에 취입되어 애창 되면서 모르는 이 없는 국민가요 '소양강처녀'는 춘천의 이미지 향상에 크게 기여하는 가요이다. 모든 이의 가슴에 애잔한 사랑의 물결이 일게 하는 매력 넘치는 가요, 국내외 방문객들을 불러 들이며 최상의 인기곡으로 자리매김 한지 40여 년이 흘렀다. 지금도 노래방 선곡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 노랬말 속 주인공을 찾았다.
계곡물이 흐르는 개울가, 벽 없는 객실 탁자에 자리하고 한방 닭요리와 소주를 주문 하면서 주인공 뵙기를 청했다. 잠시후 요리를 직접 챙겨들고 나온 주인공과 자리를 같이했다.(2013,6,21)
이야기는 그녀 아버지이야기로부터 시작 된다. 북 강원도 회양(지금의 철원 김화 북쪽 민통선지역)이 고향인 그녀의 아버지(고 윤장원)는 6.25사변 당시 월남했고, 미군부대 근로자로 일하던 중 미군 하사관들이 파주의 어느 계곡으로 가는데 3명의 한국인 근로자가 종행 했다가 지뢰 폭발로 동료 2명이 사망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머리에 큰 부상을 입으면서 한쪽 다리를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일을 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된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춘천으로 이거(移居)하여 상중도와 위도가 보이는 호숫가(사우동, 소양중학교 부근)에서 살게 되었다. 그곳에는 군납을 주로 하는 두부공장이 있었고 가족들이 일을 하며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으로 중학교 졸업 후 배움의 길을 계속 갈수 없었고 아버지는 쪽배를 타고 의암호의 여러 섬을 오가며 방울낚시를 주로 했다고 한다.
어려운 살림에 왜 그리 동생들은 많이 태어나는지, 7남매 중 맏딸인 윤기순씨는 돈을 벌기위해 1968년 서울로 갔다. 을지로에 있는 <한국가요반세기작가동지회>를 찾았다. 당시나이 17세, 활달한 성격의 용띠처녀는 '왈가닥'이란 애칭으로 노래를 배우며 심부름을 했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당시 회장이었고 회원 중에는 2012년 3월에 타계하신 작사가 반야월(본명 박창오, 또 다른예명 진방남, 추미림, 박남포)선생과 작곡가 이 호, 김종한 선생도 소속 되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잘 돌봐주는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하기위해 춘천으로 초청했고 상중도에서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여 대접했다. 이때 왈가닥처녀 나이 18세, 쪽배를 타고 섬을 오가는 과정에서 반야월 선생이 소양강처녀 노랫말 시상(詩想)을 메모했던 것이다. 이 가사는 작곡가 이 호 선생에게 넘겨졌고 가수 김태희가 트로트로 노래해 1970년 가요신인상을 받았다. 그후 편곡 된 노래를 부른 가수는 한서경 이라고 말했다.
1971년 그녀는 평소 아껴주던 작곡가 김종한 선생으로부터 가요 몇곡을 받게 된다. '이토록', '나도 모르게', '눈물이 없었더라면' 등 가요와 함께 '윤미라'라는 예명을 받아 취입하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일본까지 오가며 야간업소 출연으로 일하게 되었다.
소양강처녀 노랫말속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그녀는 1997년 어느날, 우연히 TV를 시청하고 있던중 반야월 선생이 전국노래자랑 방송에서 소양강처녀 시상을 준 처녀가 윤기순이라고 밝힘으로서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극장식 나이트클럽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아버지가 2001년 74세로 돌아가신 후 2006년, 55세가 된 그녀가 춘천으로 돌아왔다. 밤무대 가수로 버는 돈 춘천 집으로 송금하는 생활 35년이다.
오가는 대화 속에
"소양강처녀동상 건립에 대하여...?"
"예쁘게 생긴 건 좋지만 신어 본 적 없는 버선을 신었고, 가난에 빼빼 말랐던 다리가 무 다리인데 치마는 왜 들어 올리고 있으며 갈대는 왜 들고 섰는지? 갈대만 쥐고있지 않아도 내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보아주겠는데...ㅎㅎㅎ"
"떠나고 안 오시는 연인은...?"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연인은 무슨 얼어죽을 연인입니까? 글을 쓰시는 선생님은 사실만의 글만 쓰시나요?"
유모어가 넘치고 왈가닥 성품이 살아있는 반문이었다.
"자신이 '내가 진짜 소양강처녀 주인공'이라고 하는 여인이 있다는데...?"
"아무런 혜택도 없는 소양강처녀, 하고싶으면 하라지."
부연(敷衍) 없이 단호하게 답하는 그녀는 손수 농작물 가꾸느라 그을린 피부에 풀독마저 눈가를 부어 오르게 했다며 안대를 착용 한 사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5자매가 태어난 후로 남동생 형제가 태어났는데 그중 막내 남동생은 미국으로 이민 가고, 모두 출가해서 잘 살고 있지만 그녀만은 결혼을 포기한 채 큰 남동생 가족과 함께 사북면 지암리 계곡에서 민박집을 겸한 음식점 '풍전가든'을 경영하며 노모(78)를 봉양하고 있었다.
손님에게 제공되는 식재료는 대부분 자신과 남동생이 직접 경작한 것이라며 힘든 내색을 하지않고 쾌활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환갑을 넘긴 노랫말 속 처녀주인공, 왈가닥 용띠처녀 윤기순(예명 윤미라)씨는 '춘천의 영원한 처녀'로 사랑 받으며 살아가리라. (수필가, 춘천시보 '봄내' 명예시민기자)
첫댓글 좋은 발굴에 박수를 보냅니다. 어휴-.ㅎㅎ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휴-'의 의미가 알송달송합니다.ㅎㅎ
미지의 소양강 처녀를 찾아주신 선생님의 노고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ㅎㅎㅎㅎ
'소양강 처녀' 주인공께서 구(舊) 사농동2구 아랫 동네 '두부공장' 근처에 사셨더랬군요.
군납품 '콩나물공장'이 '두부공장'으로 바뀐 때가 1960년대초가 아니었던가 합니다만 . . .
이 글로 미루어보아 '소양강처녀'는 이제 환갑진갑이 다 지나신 초로의 할머니시겠네요.
언제 한 번 지암리를 가게 되면 '풍전가든'을 찾아 '소양강할머니'를 찾아보고싶어집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환영합니다.
윤기순씨가 봉양하던 노모께서 2013년 겨울 타계하심에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