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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19:11-16
11 <백마를 탄 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 19:11-16 / 나는 다시 하늘이 열리고 거기에 흰말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 위에는 '신실하고 참된 이'라고 불리는 분이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정의로 싸우시는 분입니다. 12)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을 쓰고 계셨습니다. 몸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그 이름의 뜻은 그분 한 분밖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3) 그분이 입고 있는 옷은 피에 젖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분 뒤에는 회고 깨끗한 옷을 입은 하늘의 군대가 흰말을 타고 행진해 갔습니다. 15) 그분은 입에 문 날카로운 칼로 모든 나라를 쳐부술 것입니다. 그분은 쇠몽둥이로 모든 나라를 다스릴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두 발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술틀을 밟으실 것입니다. 16)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왕의 왕, 주의 주'라는 칭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백마를 타고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십니다. 본문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입니다(계 1:1).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승리의 길입니다.
충신과 진실(11-12) 열린 하늘로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은 믿음과 신실로도 번역되는 충신과 진실이십니다. 거짓과 악이 가득한 세상 한가운데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자연히 충성과 진실의 길을 걷게 됩니다. 또한 자기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이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알려주시지 않으면, 그 이름을 알 자가 없습니다. 머리에 많은 왕관을 쓰셨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완전한 통치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알게 된 자들은 그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13-14) 예수님은 피 뿌린 옷을 입고 계십니다. 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드러냅니다(요 1장).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깨끗한 세마포, 곧 성도의 거룩한 행실(19:8)로 단장하여, 동일하게 권위와 승리의 상징인 백마를 타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은 때로 초라해 보일 때가 있지만, 교회는 궁극적으로 승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긴 자들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15-16) 교회가 혹독한 환란 가운데서도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킨 이유는, 성도의 참된 왕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만국을 통치하시며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만 충성을 다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이란 예수님을 더욱 알기를 소망하는 삶입니다. 당신이 오늘 예수님을 알기 위해 순종해야 할 영역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람을 바꿀 수는 없지만, 돛을 다르게 펼 수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방식에 대하여 얘기합니다. 인간이 어리석은 것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자극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바꾸는 것이 지혜입니다.
호크마 주석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하늘이 열린 것'은 본서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모든 것을 요한에게 계시하시는 장면을 나타낸다(11:19). 본절에서 영광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와 그의 승리를 계시하고 있다(Ladd, Beasley-Murray). 본문에서 '백마와 탄 자'는 첫째 인을 뗄때 나타난 말과 기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6:1, 2) 그리스도를 가리킨다(Ladd, Johnson, Mounce). 왜냐하면 이어서 언급되는 그의 이름들과 모습은 본서 내에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Morris). 또한 그리스도께서 타신 말의 색깔인 흰색은 승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며 승리하실 것을 암시한다.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 본문은 백마를 탄 자 즉 그리스도의 칭호이다. 이것은 3:14에서 언급된 '아멘이시요'의 해석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적용된 칭호 즉 '이름이 아멘이신 하나님'(사 65:16, 'the God whose name is Amen', NEB)이 3:14과 본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모든 것을 신실하고 진실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하심을 시사한다. 그리스도 께서는 지상에서의 삶과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온전히 성취하실 것이다.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 '공의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 대적한자들에 대한 심판의 기준을 의미한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 11:3-5에 나타난 메시야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고 진실됨을 시사한다(2절;15:3;16:5, Beasley-Murray). 한편 '심판하며 싸우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네이 카이 폴레메이'(* )는 모두 현재 시상으로 그리스도의 심판의 사역이 영원한 것이며 대적자 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전투와 심판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Ladd).
=====19: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유관이 있고 - '그 눈이 불꽃 같고'는 1:14;2:18과 병행을 이루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내면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의 심판의 공정함을 암시한다. 사람의 경우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판단이 잘못될 수 있으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의 판단과 그에 따른 심판은 공의로울 수 밖에 없다. 한편 '면류관'의 헬라어 '디아데마타'(* )는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월계관을 의미하는 '스테파노스'(* ,'면류관')와는 달리(2:10;3:11;4:4, 10;6:2;9:7;12:1) 왕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왕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용의 머리에 일곱개의 면류관이 있고(12:3) 짐승의 머리에 열개의 면류관이 있는 것과는 대조되는 것으로(13:1)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왕으로서 온전한 주권과 왕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 고대 신화에서 이름을 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나 신의 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는 본서에 계시된 여러 가지 이름 외에도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이름을 갖고 계신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능력과 권세를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Johnson, Morris).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 그리스도께서 입고 계시는 '피 뿌린 옷'에 묻은 '피'에 대해서는 네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순교의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aird). (2) 혹자는 그리스도와 대적자들의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wete). (3)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으로서 흘리신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Johnson). (4) 혹자는 대적자와의 싸움에서 대적자들이 흘린 피가 그리스도의 옷에 묻은 것이라고 주장한다(Ladd, Mounce, Beasley-Murray).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세번째 견해의 경우 본서에서 그리스도와 관련되 피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가리키고 있으며(1:5;5:9;7:14;12:11)'입었는데'(* ,페리베블레메노스)가 완료 시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온전히 이루신 승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19, 20절). 그리고 네번째 견해의 경우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15절)가 나타내듯이 그리스도께서 대적자들을 마치 포도주틀에 넣어 짜듯이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서 또다시 그리스도의 이름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라는 칭호는 요한복음과 연결된 것으로 중재자 되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셔서 세상에 거하신 중재자이시며(요 1:1, 14;요일 1:1) 본절에 진술된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과정인 재림을 통해 대적자들을 멸망시키시고 그 백성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우주적인 중재자이시다(Beasley-Murray, Mounce).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 '하늘에 있는 군대들'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천사들과 함께 오는 것으로 보아 천사들이라고 주장한다(시 103:21;148:2;마 13:41;24:30, 31;눅 2:13, Ladd, Rist, Barclay, Swete, Beasley-Murray). (2) 혹자는 본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대적자들과 전투하는 것으로 보아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15:1, 2;17:14, Johnson, Barker). (3) 혹자는 천사와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lford, Mounce, Plummer).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피 묻은 옷을 입고 계신(13절) 반면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짐승을 비롯한 대적자들과의 싸움에 참가하며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권능을 목격하며 그 승리에 참여할 뿐임을 암시한다. (Beasley-Murry, Ladd, Morris, Mounce). 그러기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갖고 있을 무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나타나지 않는다.
=====19:15
본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대적자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이 세 가지로 진술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심판의 모습 역시 오직 그리스도만이 대적자들과의 전투에 참여함을 암시한다.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 본문은 사 11:3-5 을 반영하는 것으로 1:16과 병행된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 즉 말씀에 대해서 혹자는 구원과 평강을 가져다 주는 복음으로 이해하여 복음이 전파되어 대적자들이 회개함으로써 그들이 정복되는 것으로 이해하나(Swete) 본장 어디에서도 대적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타당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인 말씀은 대적자들을 심판하시는 도구이다. 더욱이 말씀을 통한 심판은 교회를 향한 메시지에서도 나타난 것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니골라당이 회개치 않을 경우 반드시 말씀으로 심판하실 것을 약속하신 바 있다(2:12, 16).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 본문은 시 2:9의 반영으로 본서 2:27;12:5에서 병행되고 있다. '철장으로 다스리심'은 그리스도의 강력한 능력과 확고한 심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께서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은 물론 온 세상을 지배하시는 절대적 권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 본문은 사 63:1-6을 반영한다. 본문에 나타난 포도수확의 모습은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을 나타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짐승을 비롯한 모든 대적자를 완전히 파멸시키심을 시사한다.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이름이 넓적다리에 쓰여 있다고 주장한다(Charles). (2) 혹자는 말을 탄 자의 다리까지 내려오는 웃옷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Mounce). (3) 혹자는 웃옷과 다리에 다 쓰여있다고 주장한다(Morris). (4) 혹자는 다리까지 내려온 웃옷에 의해서 가려지기 쉬운 허벅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Beasley-Murray, Lohmeyer, Swete).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이것은 17:3절의 짐승의 몸에 기록된 참람된 이름들과 대조를 이우는 것으로 짐승의 몸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대적하는 이름이 기록된 반면에 그리스도의 몸에는 하나님의 칭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칭호가 기록되어 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칭호로 진술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칭호로 나타난 것으로(신 10:17;에녹 1서 9:4) 종말에 대적자들을 파멸시키고 온 세상을 지배하시며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이 권력을 시사한다.
주의 이름과 피해야 할 새의 잔치
계 19장 11~21절 / 김철한목사(오목천교회)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성도들이다. 신랑되신 주님의 신부로 서게 되었으니 복 받은 일이다. 그런데 계19:14을 보면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 그를 따르더라.”고 하였다. 그 분은 누구이고 군대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그 분은 신랑 주님이시고 군대들은 신부 성도들이다. 지난 시간에 간단히 보았던 주님의 모습을 다시 보자. 계19:11~16을 보면 그 분은 백마와 백마를 탄 자이다. ‘백마를 탄 자’란 여기서 백마가 계6:2에 나오는 전쟁을 가져오는 활을 가진 자가 타고 있는 백마가 아니고 정결과 승리를 가져오는 주님이 타고 있는 백마로서 당당하게 오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 시 백마는 눈에 잘 띄게 된다. 공격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타지 않는 것이 백마인데 이기고 나면 백마를 탄다. 그 타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은 종료된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기신 그 분이 우리의 신랑이시다.
그 분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이 예수,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복음서를 통해 알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름이 네 가지로 나오고 있다.
1. 주님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계19:11에서 그 이름을 왜 충신과 진실이라고 했는가? 물론 하늘이 열린 것을 볼 때 요한이 본 내용이기에 따질 이유가 없지만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신부와 맺은 관계를 어떻게 여기는가 하는 주님의 마음을 담아낸 이름이다. 예수님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황과 시대에 따라 언약을 바꾸고 무효화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변함없으시다. 즉 충신이란 말은 ‘신실하다’는 것으로 언약을 결코 깨지 않는 분임을 말한다. 주님을 믿어도 된다는 말이다. 믿을만한 분이고 믿어야 되고 믿음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충신과 진실의 이름을 지닌 주님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2. 주님의 이름은 자기 만이 아는 이름이다.
계19:12에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라고 하였다. 어디에 이름을 쓴 것일까?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는데 거기에 이름이 써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많은 관들’ 즉 많은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란 말이고 이 권세는 알 자가 없는 권세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을 머리 둘 곳 없는 약자, 아무런 권세도 없는 업신여김을 받은 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실패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이 알 수 없는 이름, 그것은 주님의 권세, 구원과 능력, 심판의 권세자란 이름인데 알 자가 없는 이름의 권세이다.
암행어사 마패를 지니고 나타난 이도령, 세상은 그를 모른다. 거지로 안다. 나그네로 안다. 허나 이도령은 자기만이 안다. 마패를 들고 호령하는 날에 되어질 권세를 자기만이 안다. 우리 주님의 권세는 놀라운 권세이다.
3. 주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름이다.
계19:13 주님은 또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라고 했는데, 피 뿌린 옷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는 말씀으로서의 예수는 성육하셔서 그 몸으로 피를 흘리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계시자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는 대언자요, 죄 지은 인생들에 대한 대속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이신 로고스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것이 계시된 말씀이므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에 주의하라. 예수님은 옷을 빼앗기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옷에 피가 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심판의 주님, 적그리스도와 그 군대에 대한 용서없는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사63:6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심판의 피 뿌린 옷, 그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심판이 이루어지고 진행된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는 심판자이시다.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심판의 날이겠는가?
4. 주님의 이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다.
계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주님은 초림 시에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빌2:7~10을 보면 가장 낮은 자로 오셨다. 그러나 복종과 순종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 예수는 우주 만물을 그 손에 장악하고 계신 왕의 왕, 주의 주이시다. 이 예수님이 나의 예수님, 나의 신랑이시다.
그러므로 신부된 우리는 오직 그를 따르고 그 분만이 내 삶의 전부이시다. 신랑 주님이 백마를 타고 오시니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계19:8)는 이제 그를 따르는 군대가 된다. 사랑의 예수가 적그리스도를 심판하는 분으로 오시니 우리는 당연히 그 분을 따라가는 군대가 된다. 계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신부는 신랑을 따른다. 신랑이 주방장이 되면 신부는 식순이가 된다. 신랑이 호아제가 되면 신부는 황후가 된다. 신부는 신랑이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 내가 동행자가 된다. 공중의 혼인 잔치에 서게 된 성도들이 하늘 군대가 된다.
① 계16:16에서 처음으로 아마겟돈 전쟁이 나왔다.
② 계17:14에서 이 전쟁은 어린 양과 그를 따르는 성도가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열왕과의 싸움이라고 하였다.
③ 그 마지막 전쟁이 묘사되는 계19:15을 보면 예리한 검으로 만국을 친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린다.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다.
왕 중 왕이시고 만 주되신 주가 가진 검과 철장과 진노의 포도주 틀을 피할 자 누구인가? 그리하여 적그리스도의 세력, 그리스도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새의 잔치에 먹잇감이 되고 만다.
새의 잔치란 무엇인가? 죽음의 잔치, 참여해서는 안되는 잔치를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군대가 되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는 복된 잔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적하고 예수를 대적하는 짐승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새의 잔치에 들어간다. 잔치는 잔치인데 축제의 잔치가 아닌 저주의 잔치이다. 계19:17~21의 새의 잔치는 하나님의 잔치에 모여 새들이 배불림을 얻는 잔치이다. 새의 먹잇감이 되는 죽음의 잔치를 보라.
1) 계19:18 - 적그리스도를 따른 모든 사람들, 왕들, 장군들, 장사들, 말들, 말을 탄 자들, 자유인들, 종들, 작은 자, 큰 자, 모든 자의 살을 새가 먹는다.
2) 계19:20 -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두 짐승이 모두 잡힌다. 이들은 미혹자로서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게 하였는데 이 두 짐승은 산 체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진다.
3) 계19:19 -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백마를 타고 오시는 그 분과 그의 군대와 대항하는 전쟁을 일으킨다.
재림의 예수를 향해 덤벼드는 이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 지상 최후의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전쟁이다. 스가랴 서를 보면 이때 세계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집결한다. 여기서 온 땅의 2/3는 멸절하고 1/3은 거기 남는다.(슥13:8) 정말 이때 주님이 그 환난의 때를 감하여 주지 아니하면 구원 받을 자가 없다.(마24:22) 주님이 그래도 감해주신다. 슥14:3~4에 의하면 감람 산에서 승천하신 주님이 그 감람 산으로 지상 재림하신다. 주님이 적대자도 멸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세워질 때(슥14:1) 적그리스도는 세계의 모든 군대를 므깃도 골짜기에 모으고 아마겟돈 전쟁을 시도할 것이다. 그래서 새들의 잔치에 그 살덩어리가 먹잇감이 되고 멸망 받을 두 짐승은 유황불 붙는 못으로 던져진다.
이 최후의 전쟁은 말 탄 자의 입, 주님이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는다. 새들은 그 사망에 이른 살로 배불림을 얻는다.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혼인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에 있는 성도들과 비교하여 새들이 배불림을 얻는 새들의 잔치의 심판의 먹이가 된 무서움, 우리는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즐거움의 잔치와 무서움의 잔치를 보며 신앙의 삶에 대해 주저만하고 있는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심판하고 죽는 새들의 잔치를 보면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검으로 신앙 생활을 똑바로 해 나가는 결심을 하자. 예수가 재림하면 심판과 상급의 기준의 말씀이다. 여기 들고 다니는 성경 말씀이 모든 것을 구별하는 척도요, 의의 심판의 잣대가 된다. 그러므로 게1:3에서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 있는 자가 된다고 하였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르고 말씀을 실천하자. 세상 그 어느 달콤한 말보다도 예리한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과 영과 육체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가 되자. 주님을 믿고 미래의 천국을 믿고 심판을 믿고 종말의 환난을 믿자.
파스칼은 “믿지 않고 살다가 천국이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라고 말하며 그래서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종말에 관해서도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이 있다면 믿지 않는 자는 준비되지 못했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믿지 않는 자는 잘못 사는 것이다. 믿고 살아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 믿고 살아야 준비된 삶을 사는 것이다. 혼인 잔치, 그것만이 내가 들어갈 잔치다. 새의 잔치, 거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는 분명하게 세상 끝을 보고 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 돌아올 마지막은 아무 것도 없다. 죽음뿐이다. 그러나 지금 고통을 당하는 핍박이 있어도 주님을 사모하는 자, 주님을 기다리는 자, 주님의 오시는 날을 대망하는 자는 주님의 신부가 되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잔치에 참여해야 하는가?
계 19장 11~21절 / 조영식목사
들어가는 글
오늘은 오월 둘째 주일이며, 부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또한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최고의 효도는 우리의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4월 첫 주에 계시록 19장 전반부를 통하여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누가 청함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1-10절). 오늘은 계시록 19장 후반부를 통하여 어린 양 되신 주님이 어떻게 심판하는지가 나오고 있습니다(11-21절).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께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아서 어떤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세상의 심판자가 누구인가?
오늘 계시록 19장 후반부에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주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을 심판하는 주님의 이름을 충신과 진실이라고 합니다(11절). 주님이 백마를 타고 세상을 심판하는 이유는 모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상을 심판하는 주님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충신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고, 진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없이 정당하게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신의 신실함과 진실의 정당함이 함께하여 공의로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부당하게 일하면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정당하게 일하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모든 사역을 부당함 없이 정당하게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이름처럼 충신의 신실함과 진실의 정당함으로 살아서 멸망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세상을 심판하는 주님의 눈은 불꽃 같다고 합니다(12절). 주님의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사람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능력을 소유했기 때문에 심판의 공정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잘못될 수 있으나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의 판단이 공의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은 세상의 누구도 알 수 없는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신 주님이 되십니다(12절). 그러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한 치 앞도 모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의 찬양 가사처럼 모든 것을 불꽃 같은 주님의 눈에 맡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13절). 먼저 주님이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의미합니다(13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했습니다. 또한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과 연결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입니다(요1:14). 그러므로 예수님이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결국은 성부 하나님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동등되다는 것입니다(빌2: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이 동일하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주님이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이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주님의 심판하실 때에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들이 따르고 있습니다(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피 뿌린 옷을 입고 있는데(13절), 구원받은 성도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14절). 예수님이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심으로 성도들이 구원받은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주님이 백마를 타신 것처럼(11절), 구원받은 성도들도 백마를 타고 있습니다(14절). 예수님의 승리하심에 구원받은 성도들도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님과 성도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14절).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와서 심판하고 있습니다(15절).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기준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대적자들에게는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또한 주님이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린다”고 합니다(15절). 여기서 철장은 쇠로 만든 지팡이로 절대적인 권세와 능력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면 심판을 피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도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15절).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대적하여 파멸의 심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생의 구원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주님의 옷과 다리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쓴 것이 있습니다(16절). 예수님이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이 되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17:3). 그러므로 우리의 몸에 무엇을 새기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합니다(갈6:17). 저도 바울처럼 내 몸에 어떤 흔적을 지니고 있는지를 돌아보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흔적을 지니고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창립 20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도 어떤 흔적을 지니고 있는지를 돌아보면서,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는 선교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바울처럼 자신의 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흔적을 지니고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3.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해야 하는가?
첫째로 오늘 본문에서 아마겟돈 전쟁의 결과가 나옵니다. 계시록 16장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아마겟돈 전쟁을 준비했습니다(16:16). 아마겟돈 전쟁이 오늘 본문 연결되어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19절). 그리고 아마겟돈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혀서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있습니다(20절).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는 큰 이적을 행하였습니다(13:13). 마지막 때에는 성도들이 이적을 보면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어느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진짜인지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큰 잔치에 참여하느냐는 것입니다. 계시록 19장 전반부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나왔습니다(9절). 그런데 19장 후반부에도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는데 “하나님의 큰 잔치”가 나옵니다(17절). 그리고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세상에서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를 멸망시켰습니다(18절). 그러므로 우리가 멸망받는 ‘하나님의 큰 잔치’가 아니라 구원받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의 모든 것에는 사이가 존재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섬과 섬 사이, 별과 별 사이, 마음과 마음에도 사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물과 물고기에는 사이가 없습니다. 물과 물고기처럼 어떤 사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진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과 우리도 전혀 사이가 존재하지 않는 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오월 가정의 달에 최고의 사랑도 서로 사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적하여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져서 멸망받는 하나님의 큰 잔치가 아니고, 하나님과 사이가 없는 사랑으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을 수 있길 소망합니다.
백마를 탄 자의 재림
계 19장 11~21절 / 이상호목사
어떤 분이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살아서 나를 사랑하시고, 죽어서 나를 구하시며, 묻혀서 나의 죄를 멀리 옮기시며, 부활하여 영원히 나를 자유케 하시는 의로우신 주님, 그분은 어느 날 갑자기 영광스럽게 오시리라.
아주 재미난 표현입니다. 그러면 그는 어느 날 영광스럽게 오실 터인데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백마는 왕이나 장이 탑니다.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입니다(11절). 공의로 심판하며 악과 싸워 이기십니다.
그는 피뿌린 못을 입었습니다. 즉 보혈을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하기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16절). 그가 오시면 악의 세력을 파멸시키십니다. 악의 세력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그대로 존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어 마지막 추수를 하시면 악의 세력은 최후를 맞게 됩니다.
악의 세력이 물러가면 평화가 오는데 이것이 천년왕국에서 이루어 질 평화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천년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잠시 더 역사는 진행되어야 합니다.
첫째, 의인(성도)의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의인과 악인이 모두 부활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이 말씀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물론 성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선한 일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요 6:29).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요 16:9).
물론 신자와 불신자의 부활의 시기는 성경 상으로 보아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려는 것은 신자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영원히 잠든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부활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부활과 불신자의 부활이 구분되는 것은 부활의 시기만이 아니라, 성격상으로 완전한 차이가 있습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부활은 하되 영원한 심판을 받고 지옥의 고통을 받습니다.
둘째,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거행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란 풍악을 잡히고 먹고 마시며 파티를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성도의 만남이요 저들의 완전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그와 교제하며 기쁨을 나누게 되는 것이며, 신령적인 믿음을 가진 영광스런 교회가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와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주님도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2).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마 25:1).
이 때 성도들은 주님과만 만나는 것이 아니고 앞서간 성도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통하심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가 하면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중 혼인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긴 세월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후 곧 지상에 함께 내려와 천년 왕국이 건설되기 때문에 세대론자들이 말하듯이 7년간이나 70년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성도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신자가 죽으면 통상적으로 그의 상을 받으려고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통속적인 개념에 불과합니다. 엄격히 말씀드리면 성도가 그의 행한 일에 상을 받는 것은 운명 즉시 천국에서 받는 것이 아니고 재림 시에 받는 것입니다. 앞서간 성도들은 생명의 면류관이나 의의 면류관 등 상을 받고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성도가 휴거되어 공중에서 7년간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행할 때, 상도 아울러 준다고 하나 그것이 아니고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주십니다. 그때까지는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이렇게 하여 지상에 천년왕국을 건설할 모든 준비는 완료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준비
이런 주님을 기다리고 우리 모두 그 나라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으로 준비해야 합니까?
첫째, 경성하는 것이고 둘째,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경성과 봉사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 봉사는 소홀히 하면서도 경성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봉사는 열심히 하면서도 재림에 대한 대망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두 가지는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경성을 강조한 나머지 여러 가지 재림 직전의 일들을 강조하면서 재림이 임박했다고 흥분하여도 안되고, 주님의 재림이 아직 멀었다고 안심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은 징조들도 순식간에 이루어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이 재림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그래서 사도들은 주님께서 당장 임하시는 것으로 믿으면서도 해야 할 일까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 오히려 더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 하여 전도하며 오늘 할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지금 임박하였다고 믿으면서도 결코 오늘 우리가 하여야 할 의무를 소홀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열심히 주를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오시면 언제 어느 장소에서도 주님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계 19:11-21).
A. 성경말씀을 이루기 위해 오십니다.
1. 성경의 수 없이 많은 부분이 이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 예언된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B. 주님의 그의 왕국이 시작되기 전 인류를 심판하기 위해 오십니다.
C. 예수님은 사단을 묶어서 천년왕국 동안 성도들이 괴롭힘 당하지 않도록 하시려고 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준비된 성도가 되어 그 날에 빠짐없이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계시록 19:11-16 / 행복한 제자교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많지만,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까지 바꾸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이 땅에서의 삶뿐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까지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1.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던진 질문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를 찾으셨을 때,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16:13-14).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 문명의 영향을 받은 도시로, 이방 신들을 숭배하는 중심지였습니다. 판 신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신전, 제우스 신전이 있었고, 그 안에서는 우상 숭배와 음란한 행위가 만연했습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현장 속에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심으로써, 그들이 몸으로 느끼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가이사랴 빌립보와 닮았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당시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이 땅에서의 삶뿐 아니라 영원한 삶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2. 신실(Faithful)하고 참되신(True) 분
본문 요한계시록 19장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네 가지로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11절에 나오는 ‘신실하신 분’과 ‘참되신 분’입니다. ‘신실하다’는 말에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에서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참되다’는 말은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의 그 ‘진리’와 같은 단어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진리도, 윤리도 바뀐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변하지 않는 참된 진리이시며, 하나님 본체의 모습(히 1:3)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은, 우리 삶의 모든 판단 기준이 그분으로부터 나와야 함을 의미합니다.
3. 왕들의 왕 군주들의 군주
본문 16절에서는 예수님을 ‘왕들의 왕’, ‘주들의 주’라고 소개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 황제 도미티안은 자신을 ‘주 하나님’으로 부르게 했고, 황제의 신상에 절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다가 고난과 순교를 당했습니다. 고난이 힘든 이유는 끝이 언제인지,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왕 중의 왕’이시며 ‘모든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은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분은 모든 역사의 주인이시며, 결국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승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훌륭한 고백이지만, 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그보다 더욱 온전한 이해를 제공합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이 아니라 심판자이시며, 어린 양이 아니라 유다의 사자이십니다. 사탄과 모든 악을 무너뜨리시는 최종 승리자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흰말 위에 앉은 이
요한계시록 19:11-16 / 불편한 진리((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사도신경에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는 고백이 있다. 단순히 미래에 심판하러 오시면 그때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로서 언제나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 놓으신다. 목숨이 유지되고 있기에 산 자이고,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죽은 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선악의 나무는 아담과 하와만 취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취한 것이고 그것이 죽은 상태라고 성경은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 죽음의 증거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 산 자가 오셨다는 뜻이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고 부활하심으로 산 자이심을 증명하셨다. 죽음뿐인 이 땅에 하늘에서 생명이 주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는 상태가 죽음이고 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합류되는 것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시는 것이 최종적인 심판으로 드러난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만 심판주의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1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다’라는 말이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본다는 표현은 요한 사도가 하늘의 환상을 볼 때마다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표현을 쓴 다음 하늘의 현상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늘이 열려 보게 되는 환상은 이 땅의 실체와 하늘의 상태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주신다.
우리는 4:1에서 이미 하늘이 열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의 몸을 찢어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 양식을 먹는 상태로 만들었음을 의미한다(시 78:23-25, 히 10:19-20). “보좌 위에 앉으신 이”(4:2)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나타내고, “흰말 위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그리고 보라! 흰말과 그 위에 앉으신 이, 그는 믿음과 진리라고 불린다’라는 말이다. 짐승을 탄 음녀와 대조한 표현이다. “충신”은 ‘믿을만한, 신실한, 신뢰하는, 믿는, 충실한, 충성’이라는 뜻을 지닌 ‘피스토스’이고, “진실”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알레디노스’로 ‘진짜의, 실제의, 진실된, 참된, 정당한 신뢰할 수 있는’이라는 뜻이다.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3-5)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성된(피스토스) 증인”(1:5), “아멘이시요 충성되고(피스토스) 참된(알레디노스) 증인”(3:14), “거룩하고 진실하사(일레디노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3:7)라고 하였고,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거룩하고 참되신(알레디노스) 대주재여”(6:10),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알레디노스)”(15:3),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알레디노스) 의로우시도다”(16:7), “그의 심판은 참되고(알레디노스) 의로운지라”(19:2)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흰말 위에 앉으신 이를 하나님과 동일시 한 표현이다(21:5, 22:6).
구약에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아멘”을 붙였다. “진리(아멘)의 하나님”(사 65:16)이신 여호와께서 자기 언약대로 신실하게 진리로 완성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 의미를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그리고 진리로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백마”라는 ‘흰말’은 정결하신 분의 승리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흰말 위에 앉으신 분은 구약에서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다.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라는 말씀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대적하고 핍박했던 용과 바다와 땅에서 나온 짐승, 그리고 그들의 추종 세력들, 거짓 선지자들을 반드시 심판하며 승리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그래서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12절)라고 말씀한다. “그 눈은 불꽃 같고”라는 묘사는 ‘그 눈은 불의 화염 같다’라는 말인데 누구도 그분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라는 말의 헬라어 ‘디아데마’는 6:2에서 흰말을 탄 자가 쓴 월계관을 의미하는 “면류관”(헬, ‘스테파노스’)과는 다른 ‘왕관’을 의미한다. “많은”이라는 말의 헬라어 ‘폴뤼스’는 ‘많은, 큰’이라는 뜻이다. 짐승의 “열 왕관”(13:1)과 대조된 표현으로 절대 주권을 상징한다. 즉 싸워 심판하심으로 왕으로서 위대한 다스림을 행하시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은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라는 말씀으로 더욱 강조하였다. 그 이름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라는 말씀에서 분명한 것이었고 “임마누엘”(마 1:23)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분해 내어 함께 하시는 이름이다. 실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이다. 세상에 속한 이름이 아니기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참고 2:17, 3:12).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13절). 여기서 “뿌린”의 헬라어 ‘밥토’는 ‘담그다, 물들이다’라는 뜻으로 어느 한 부분만 피에 묻은 것이 아니라 옷 전체가 피에 흠뻑 적셔진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피에 적신 옷을 입었다는 것은 구약에서 말씀한 것을 배경으로 한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사야 선지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3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사 63:2-3)
포도주를 만들 때 틀에 넣어서 짓밟는 비유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신 것이다. 포도주 틀에서 포도를 밟으면 입고 있던 옷이 붉게 물든다. 예수님께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아서 옷이 온통 피로 물든 것과 같이 심판하심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단함으로 심판하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피에 적셔진 옷을 입었다는 의미는 죄인들이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였던 죄악을 폭로하심과 동시에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왕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라고 하였는데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밝혔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3, 14)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천지 창조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이며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언약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나 죄인들은 자기 행위로 말씀을 이루기 위해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살해하였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인간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는 죄를 폭로하신 것이며 동시에 말씀으로 심판하신 것이다.
그래서 15절에서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15절)라고 말씀하였는데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말씀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이사야서와 시편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3-5)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8-9)
메시아가 오시면 그분이 하실 일을 이렇게 예언한 것이다. “철장”이란 ‘철로 된 왕의 지팡이, 막대기’를 의미한다. “다스리며”라는 말의 ‘포이마이노’는 ‘목자로서 돌보다, 양을 치다, 통치하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철장과 같아서 질그릇 같이 다 깨어지나 자기 백성은 목자가 양을 치듯이 구해내신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로 드러내신다.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6절). “다리”라고 번역된 헬라어 ‘메로스’는 ‘넓적다리, 허벅지’를 의미하여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옷의 부분’에 이름을 쓴 것이 있다는 뜻이다. 흰말 위에 앉으신 분의 이름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17:3에서 음녀가 탄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한 것과 대조된다. 그러기에 그 이름을 아는 자는 없다.
이스라엘이 예외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 십자가를 대적하는 원수라면 철저히 심판하신다. 그 속에서 자기 교회를 남기신다. 단순히 미래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에 의해 벌거벗은 상태가 되는 것이 심판이며 구원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견주어 말씀 아닌 것이 드러나야 한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그런데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14절). 흰 말 위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하늘에 있는 군대”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12:41에 보면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 하늘의 군대는 죄에서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이다. 그래서 그 군대가 입고 있는 옷을 “희고 깨끗한 세마포”라고 말씀한 것이다.
8절에서 말씀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의)”이 바로 이 세마포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홀로 십자가 죽음의 은혜를 입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하늘의 군대가 따르는 분은 오직 흰말을 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같은 흰말을 타고 있지만 입고 있는 옷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군대가 비견된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된 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요 성도는 날마다 죽는 죽음으로 자기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드러날 뿐이다. 그것이 “그를 따르더라”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9:11-16 / by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본문에 대한 설교 제목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을 ‘알파요 오메가이시다’라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알파는 희랍어 알파벹의 첫 자요, 오메가는 마지막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과 나중이란 말이 되겠습니다. 처음과 나중이란 의미는 폭넓게 해석되고 적용되리라 봅니다. 저는 처음과 나중을 주님께서 어린아이로 말구유에 오심과 세상 끝에 다시 오실 재림으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약성경의 맨 앞에 있는 책이 뭐지요? 마태복음. 이 책 맨 앞에 있는 장은 1장의 골자는 예수의 초림, 즉 처음오심에 대해서입니다. 1:25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또 신약 마지막 책이 뭐지요? 계시록. 계시록 마지막 장이 22장. 22장의 결론과 끝인 20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신약성경의 골자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이며. 이 골자의 교훈은 육체로 오신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며 다시 오실 재림, 즉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놓고, 아무리 좋은 교훈을 받아 생활에 많이 적용했다 하더라도, 신약성경의 핵심인 초림과 재림에 대한 확신이 빠진다면 그 많은 훌륭한 설교는 알맹이 빠진 껍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재림의 약속이 몇 번쯤 나올 것 같아요? 318번 나온답니다. 매 25구절마다 한번씩 나온 셈이 된답니다. 이미 요한 계시록에서 만도 여러 번 강조되었는데, 특히 오늘 본문은 다시 오실 주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계시록 마지막 부분이기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오늘 본문 19:11에서 20:15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즉 주님의 최후의 승리를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여섯 절에서 각 절마다 재림의 주님의 모습을 어떻게 소개해 주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설교 끝난 다음에 종이에다 재림의 주님의 모습을 그대로 잘 그릴 수 있도록 잘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1] 11절은 재림,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보게 되는데 하늘이 열리더니 백마와 그 탄 자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로마 나라에서 전쟁에서 이긴 개선 장군은 흰말을 타고 왔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승리자, 사단을 정복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충신과 진실인데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소개됩니다. 충신이란 그가 다시 오시겠다고 여러 번 약속하셨는데 그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한 것이면, 진실이라고 표현된 것은 약속대로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을 강조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가 공의로 심판하여 싸운다 했는데, 공의란 말씀을 선포했는데 그 말씀에 따라 법에 따라 심판하므로 공정 하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구원 얻고 불신자는 공의로운 심판을 받는다고 이미 여러 번 예고되었으므로 그의 심판은 공의롭다는 것입니다.
[2] 11절에서 백마를 탄 승리자 예수로 소개됐는데, 12절에서는 눈이 불꽃같고 많은 면류관을 쓴 재림주의 모습입니다. 이미 계시록 처음에서 주님의 모습이 소개될 때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분으로 소개되었는데 불꽃 같은 눈이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눈, 그 앞에서도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그런 눈입니다. 그러므로 잘못 보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실수란 전연 없는 분이며, 많은 면류관이란 여기서는 왕관으로 만 왕의 왕이신 모든 나라의 왕이신 재림 주라는 의미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3] 13절에서는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통 피, 붉은색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속죄 그런 뜻으로 풀려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두 피가 있습니다. 주님의 속죄의 피, 또 하나는 복수의 피입니다.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오셨다는 말은 원수들을 다 잡아죽이고 승리했기 때문에 원수들의 피가 옷에 묻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 뿌린 옷이란 심판의 피인데 심판의 기준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설교 시작 부분에서 처음과 나중이야기를 했는데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여 주님이 태초에부터 계셨고 주님은 말씀, 즉 Logos라고 하여 말씀으로, Logos로 초림하셨던 주님이 Logos로 재림하신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오셔서 이미 전했으므로 이제 그 말씀을 가지고 심판하시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4] 14절에서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 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했는데, 그가 누구일까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도 승리자로 백마를 타고 흰 세마포 옷을 입으셨는데, 그를 힘입어 승리한 성도들도 그와 같이 흰말을 타고 흰 세 마포 옷을 입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승리한 성도들의 안내자, 지도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흰 세마포 옷을 뭐라고 했지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했지요?
[5] 15절에서는 “그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라”고 합니다. 이한 검이 무엇입니까? 날카로운 검, 양쪽에 날이 선 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권세로 사단의 세력을 쳐부수되, 하나님의 참아오신 모든 화를 무섭게 퍼부어 철장으로 그릇을 부수듯 전멸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6] 마지막 16절은 “그 옷과 다리에 이름이 쓴 것이 있는데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고 쓰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이시요, 주님이시며, 그 사실을 믿고 그를 예배하여 그를 왕으로 믿었던 모든 자는 그의 백성들이 되어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이뤄지리라는 것입니다. 세상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들이 이뤄보려고 한 Utopia가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서 이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11절- 16절까지에서 얻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 신앙 생활에 적용할 것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재림의 예수, Logos로 오실 재림의 예수를 소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작년에 기독교 역사상 참 잘한 Campaign이 있었는데, ‘예수님 오신다’는 캠페인이었습니다. 다만 어느 날 오신다고 날짜를 못 박고 그날 예배당 앞에 주님 어서 오십시요라고 아치를 세워 놓고 여자는 햐얀옷들을 지어 입고 신랑 예수 맞겠다고 기다렸던 것이 문제였지요. 햐얀옷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인데, 진짜 하얀옷을 지어 입었으니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재림 예수를 잘못 안 결과이지요. 그러나 그날 오신다고 떠들어 댔으나 결과적으로 그날 오시지 않았는데, 그 결과로 주님이 결국 재림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으로 변했다면 신앙에서 암이 걸린 것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요사이 동부에 금세기에 가장 험악한 폭등이 불고 눈이 많이 쌓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요? 눈이 녹으면 홍수가 나서 오히려 지금 받은 피해보다 더 큰 피해가 예상된다고 하지요.
마지막 때인 것은 신자나 불신자가 느끼고 있습니다. 신앙인 우리들은 아니 말씀을 분간하는 우리로서는 날마다 재림 예수를 연상하며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강조된 아기로 오신 예수로, 아니 병든 자들 낳게한 오 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베푸신 주님만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유치원에서 가르쳐져야 할 것이며, 기독교의 대학교에서는 부활의 주님 재림의 주님이 강조되어 이 세상은 끝나고 우리의 모든 원수도 갚아주시고 억울한 것 갚아 주시며 우리의 육체를 벗어나 영적 부활의 상태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두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부활절이 돌아오겠는데 주님의 부활만 강조되지 말고 그들 믿는 우리도 부활하게 되리라는 소망을 심어주어 육의 몸을 벗어 육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살게될 산 소망을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 잘 만나, 남편 아내 잘 만나, 운이 좋아 날마다 행복하다고 느끼며 우리 각자도 흰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주님이 인도대로 따라 살게될 포부를 갖고 어려운 이 세상 살림을 충분히 이겨나가야 합니다. 종말론이란 예수의 재림을 꼭 비관론이요, 부정적인 사고로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재림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요, 내게 주는 능력이요, 기쁨입니다. 슬픔의 선포가 아니라 기쁨의 선포입니다. 말씀으로 다시 오실 로고스로 재림하실 주님을 소망하며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하며, 말씀 따라 살아가서 주님 오실 때 백마를 타고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