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거 말고)
'노예'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노예, 혹은 조선 시대의 노비들이다.
그러나 유색인종 못지 않게 고대 시대 때부터 백인 노예도 매우 많았다.
특히 그 중에서 중세부터 근현대까지의 백인 노예들을 살펴보자

아랍인들이 백인(유럽인)들을 노예로 부린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다.
서기 8세기 이슬람의 우마이야(옴미아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맞붙는 과정에서 많은 백인 노예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백인 노예가 본격적으로 급증한 것은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 때문이다.
바르바리 해적은 현재 북아프리카의 알제리를 중심으로 튀니지, 리비아 등지에서 활동한 아랍 해적들로서,
그들의 배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출동해 파괴, 약탈과 노예무역을 일삼았다.
서구 문명에서는 그들을 '튀르크 코르세어(터키의 사략 해적)'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많이들 알겠지만 스타크래프트의 유닛 '커세어(해적선)'의 어원이 바로 코르세어이다)

(알제리 지방에서 묘사된 백인 기독교도 노예들)
아랍인이면서도 '터키의 사략해적'이 된 이유는 그들을 후원해준 오스만 튀르크 덕분이었다.
강력한 제국인 오스만 튀르크가 그들을 해군으로 하청해 서유럽을 견제했기에 그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16~19세기에 바르바리 해적들은 약 150~200만 명의 유럽 백인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겼다.
(주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의 남유럽이 대상이었으나, 영국, 노르웨이, 아이슬란드까지도 진출)
물론 나중에는 영국, 프랑스 등이 매우 강해져 만만한 미국과 러시아를 털었다.

(프랑스 수도사들이 백인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몸값을 치루는 모습)
바리바리 해적들에게 백인 노예 무역은 매우 짭짤한 장사였다.
일단 납치한 다음에 가족 친척들을 협박해 몸값을 받고 해방시켜줘도 되고,
그게 아니라면 아랍 세계에 돈 받고 팔아넘기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예들은 멀리 페르시아, 인도, 심지어는 중국까지 팔려 가는 경우도 있었다.

소설 <돈키호테>의 작가로 유명한 미겔 데 세르반테스도 1575년 바르바리 해적에 붙잡혀 5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으며,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인 로빈슨 크루소도 얘네한테 잡혀 한 동안 노예생활을 겪는다

(정식 복장을 한 예니체리 장교)
물론 노예 무역은 오스만 튀르크 역시 바르바리 해적 못지 않았다.
발칸 반도 대부분을 점령한 오스만 튀르크는 '데브시르메'라는 제도를 통해 기독교도 어린이들을 예니체리로 징집했는데,
이는 완전히 강제는 아니었으나, 가족과 떨어져서 강제로 이슬람교 개종을 당한다는 점에서 반발이 상당했다.
또한 전쟁 등의 상황으로 발생한 250만 명 이상의 남유럽, 동유럽 노예들을 각지의 노예 시장으로 공급했다.

또한 유럽의 젊은 부녀자들 역시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일단 남자들에 비해 훨씬 납치하기 쉬울 뿐더러, 백인 첩을 원하는 아랍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유럽인 여자 노예들은 대부분 캅카스, 그리고 중유럽 및 동유럽 지역에서 데리고 왔다.

(자체심의)
참고로 남자와 여자 노예의 비율이 2:1 또는 3:1이었던 대서양의 흑인 노예 매매와는 달리,
아랍의 노예 매매는 일반적으로 여자가 더 높은 비율을 보였다.
물론 집안일을 시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번식을 위해 첩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노예제와 일부다처제가 있던 이슬람 사회에서 이는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체심의)
노예 시장에서 백인 여자 노예를 흥정하는 아랍인들.
미모가 뛰어난 노예의 경우 이슬람의 세력가들에게 매우 비싼 가격에 넘겨졌다.

(아일랜드 노예들)
물론 백인이 백인을 노예로 판매한 경우도 있었다.
17세기(1641-1652)부터 영국의 지배자들은 50만 명의 아일랜드인을 학살하고 30만 명을 노예로 팔았다.
영국인들은 아일랜드 남자들로부터 아내와 아이들을 빼앗아 북중미 서인도제도에 노예로 보냈다.
(아이티, 바베이도스, 마르티니크, 쿠바 등지)
이로 인해 아일랜드의 인구는 150만명에서 60만명으로 감소하였다.

(미국에서 학대당하는 아일랜드 노예)
1650년부터 10만명의 아일랜드 아이들이 서인도제도 및 미국의 버지니아, 뉴잉글랜드에 노예로 팔렸다.
특히 여인과 아이들 5만 2천명이 바베이도스와 버지니아 지역에 팔려나갔다.
영국의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은 2,000명의 아일랜드 아이들을 자메이카와 뉴 잉글랜드에 노예로 팔도록 명령했다.
(영국 주류 역사학에서는 이들을 노예로 칭하지 않고 '계약하인[indentured servants]'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소유권의 객체이자 매매의 대상으로, 가축과 같이 취급 받은 점에서 사실상의 노예라고 볼 수 있다.)

(미국으로 팔려가는 아일랜드 노예들)
재미있는 것은 아일랜드인 노예의 가격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보다 훨씬 저렴했다는 사실.
1600년대 후반, 아프리카인 노예는 두당 50스털링인 반면, 아일랜드인 노예의 가격은 5스털링에 불과하였다.
이 때문에 시간이 흘러 영국인들은 매우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일랜드 여자 노예를 건장한 흑인 남자 노예와.....ㄷㄷㄷ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물라토는 백인노예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팔릴 수 있었다.
오늘날 바베이도스나 아이티, 몽세라트, 마르티니크의 많은 물라토는 이런 과정으로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ps
아무튼 노예 얘기로 시작했지만, 아일랜드의 역사는 언제 봐도 슬프다.
Johnny, I hardly knew ye는 19세기 초 영국에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에 한 아일랜드인이,
동인도회사 소속 병사로 스리랑카에 끌려가 팔다리를 잃고 상이용사가 된 내용을 묘사한 민요다.
일단 들어보면 '헉! 이 노래가... !' 하면서, 놀람과 함께 알 수 있는 노래니까 검색해서 한 번 들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