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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천의회(天意會)의 혈풍(血風)
옛 사람은 이미 황학(黃鶴)을 타고 떠났고
이 곳에는 황학루만 남아 있네.
황학은 한 번 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고
하늘에는 백운(白雲)만이 천년이나 맴돌고 있네.
맑은 강 건너 한양의 나무숲이 역력히 바라보이고
향기로운 풀은 앵무주(鸚鵡洲)에 무성히 덮였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내 갈 고향은 어디인가
안개 낀 양자강(揚子江) 언덕에서 바라보니 근심만 더 하네.
(譯註: 최호(崔顥)가 지은 황학루.)
황학루에 얽힌 고사(古事)를 책으로 엮는다면 능히 수백 권은 될 것이다.
무창부(武昌府)의 서남(西南) 쪽, 양자강을 마주보고 있는 황학루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며 시인묵객들을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비록 엄동(嚴冬)이긴 해도 황학루의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누각에 오른 사람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강에 면한 난간에 자리잡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유난히 중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남자는 일신에 눈부시도록 깨끗한 백의단삼을 걸치고 있었다.
머리에는 영웅건(英雄巾)을 둘렀으며 어깨에서는 바람막이 피풍이 자연스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약관의 나이로 보였는데, 서늘한 눈과 우뚝한 콧날에서 절로 영웅의 기상이 느껴지는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반면 여인은 나긋한 몸매를 지닌 미인이었다.
얼굴이 다른 여인들에 비해 약간 가무잡잡하기는 했으나 큰 눈과 도톰한 입술은 그녀가 빼어난 미녀라는데 전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날씬한 허리를 조여맨 허리띠는 녹색이었고, 어깨 위에는 붉은 기가 도는 여우털이 얹혀져 있었다.
이런 색감의 대비는 다소 이질적인 그녀의 용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들 남녀는 누가 보더라도 부러움을 느낄 정도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서로 다정하게 어깨를 기댄 채 양자강의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녕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여인이 남자의 팔을 잡으며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 정말 아름다워요. 과연 황학루가 드넓은 중원에서 왜 그토록 이름을 떨쳤는지 알겠어요. 가가(哥哥)."
백의청년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사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오. 황학루의 경치는 봄에 더욱 절경을 이루지. 얼마 후면 그 아름다운 경치를 직접 볼 수 있게 될 것이오."
이들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다.
백의청년은 주로 황학루과 연관된 고사나 이 곳을 다녀간 뒤 주옥 같은 시(詩)를 남긴 대시인에 대해 얘기를 했다.
여인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하는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녀의 눈에는 상대를 향한 무한한 관심과 열정이 담겨져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안쪽으로 옮겨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 곳에서는 술과 간단한 안주 등을 팔고 있었다.
진일문과 흑수선,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낙양에서 다시 만나 이 곳 황학루까지 함께 오게 되었다.
그것은 흑수선이 왕중헌과 새로운 연락을 취해야했기 때문으로 그 안에는 진일문에 관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든 진일문은 그로 인해 졸지에 몇 달간을 그녀와 동고동락(?)했다.
그리고 흑수선은 그 동안 그를 잠시도 놓아주지 않았다.
측간에 가는 일 외에는 늘상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녔다.
태평도에서 중원과는 판이한 풍습을 익히며 자라난 그녀는 확실히 여느 여인들과는 달랐다.
지조가 굳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순간의 정열에 혼신을 불사르는 그런 여인이었다.
이 때문에 진일문은 곤욕을 치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밤이야 그렇다치고 그녀는 벌건 대낮에도 심심치 않게 무리한 요구(?)를 해와 그를 난감하게 만들곤 했다.
날씨가 추웠으므로 그들은 독한 백주(白酒)를 시켰다.
진일문은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시선을 양자강으로 돌렸다.
솜처럼 푸근한 눈이 혹한에 얼어버린 강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땅도 하늘도 온통 눈부신 백색이었다.
그는 다시 정면을 향하며 말했다.
"벌써 사흘째인데 어찌 된 일이지?"
흑수선은 그에게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연락이 있을 거예요. 아마도 오늘쯤은 틀림없이......."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그 위에는 매화가지 하나가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암호로 약정된 표식이었던 것이다.
그녀와 진일문이 황학루에서 머문지도 벌써 사흘, 그들은 줄곧 이런 식으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저녁이 될 때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답답해하는 진일문에 비해 흑수선은 굳게 믿는 바가 있는 듯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밤이 되자 두 사람은 객방에 들었다.
그들은 따로 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흑수선의 고집 때문이었지만 설사 두 개의 방을 얻는다 해도 별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보나마나 밤이면 진일문의 침상으로 기어들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진일문이 좌공(坐功)을 마치고 자리에 들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품으로 냉큼 파고들었다.
"또......."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흑수선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뜨거웠다.
마치 지칠 줄 모르는 하나의 거대한 불덩이와 같았다.
진일문도 그런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헐떡이며 감겨드는 흑수선을 안으면서도 가끔씩은 다른 여인을 떠올리곤 했다.
그 대상은 수시로 바뀌었다.
때로는 옥가려가 되기도 했다가, 또 때로는 자신을 위해 목숨마저 아끼지 않고 내놓았던 비취암의 백하련이 되기도 했다.
의외로 황룡보의 사영화도 그 중 하나였다.
진일문은 그럴 때마다 취화상이 말했던 여난(女難)이라는 어휘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학!"
흑수선이 그의 어깨를 물어 뜯으며 격한 신음을 발했다.
진일문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애무하며 뜨거운 여체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가 활처럼 뒤로 휘었다.
"아아......."
열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두 사람은 천정을 향해 반듯이 누워 있었다.
잠이 든 것일까? 진일문은 조용히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흑수선이 옆으로 누우며 그의 가슴에 손을 얹어왔다.
그리고는 달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최근 들어 저는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진일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무슨......?"
"태평도로 돌아가고 싶어요, 가가와 함께."
이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말이었다.
진일문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매달았다.
"그 곳은 물론 따뜻한 곳이겠지?"
"그럼요, 일년 내내 옷을 입을 필요가 없는 곳이에요. 더구나 먹을 것이 어디에나 널려 있을 뿐더러 속이 그대로 들여다 보이는 바닷물과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이......."
그는 흑수선의 말을 들으며 사뭇 나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으나 남국의 아름다운 섬이 절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 곳이라면 아무 것도 필요 없을 것이다. 복수니, 야망하니, 명예니 하는 것도 일체 요구되지 않는 곳....... 어차피 인간이란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원무림에서의 삶은 늘 피비린내 나는 혈전의 와중에서 상대를 죽이거나 스스로가 죽어가야만 한다.'
진일문은 깊은 탄식을 지나 남국의 푸르른 바다를 헤엄치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잠이 들었다.
그의 곁에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깔깔거리며 따르고 있었다.
그는 배가 고파 오자 야자를 따먹었다.
그리고 싱싱한 여인들의 체취에 파묻힌 채 오수(午睡)를 청했다.......
팍!
소리가 꿈을 깨웠다.
진일문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맞은 편 족자 위에 꽂혀 꼬리를 바르르 떨고 있는 화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왔어요!"
옆에 누워 있던 흑수선이 탄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알몸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 화살을 뽑았다.
화살 중간에는 종이가 묶여 있었는데, 그것을 끌러내는 그녀의 얼굴에는 희열이 번졌다.
진일문은 그녀의 벗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끈한 등과 잘록한 허리, 갑자기 굵어지는 엉덩이의 선 등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남국의 정열을 마음껏 발산해내고 있었다.
서신을 펼쳐 읽으며 돌아서는 그녀의 유방이 육감적으로 흔들렸다.
그는 문득 갈증을 느꼈다.
그녀의 유방 끝에 매달린 유실이 그의 체내에 새삼 불길을 당기고 있었다.
진일문은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당겼다.
"어머!"
그녀는 비명을 질렀으나 그리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이것 좀 읽고요."
진일문은 그런 그녀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들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녀를 정복하고 싶다는 느낌만이 이 순간 그의 뇌리를 가득 메운 것이었다.
흑수선은 편지를 허공으로 들어올리며 허우적거렸다.
진일문이 그녀의 몸을 안으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사나이의 거친 힘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어느 덧 편지는 침상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그의 목을 휘어감고 있었다.
곧 그녀의 손톱이 꼿꼿이 세워져 사내의 목으로부터 등을 따라 내려갔다.
"다섯째 사형 율가(栗可)예요. 호호... 잠시 후면 율사형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무창부에서 동쪽으로 가면 구릉이 나타난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었으나 안으로 들어가면 계곡이 깊어지고 숲이 울창해지는 그런 곳이다.
마침내 연락이 이루어졌고 진일문과 흑수선, 두 남녀는 그 장소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진일문은 웬지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것은 흑수선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이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딱히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는 흑수선이 전에 없이 어두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단지 그녀는 몹시 즐거워하며 달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화살에 매달린 서신에는 해뜨기 직전, 공소곡(空沼谷)이라는 곳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공소곡이 바로 그들이 지금 가고 있는 곳이었다.
서신의 말미에는 진일문으로서는 알아 볼 수 없는 기호가 씌여 있었고, 다시 천의(天意)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왕중헌이 회주 노릇을 하고 있다는 조직의 명칭인 것이다.
'천의회(天意會)라.......'
진일문은 왕중헌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보아 온 왕사부는 오만하고 냉소적이기는 해도 분명 고아들을 모아 은천서원을 만들었고, 학문을 가르쳤다.
그런 왕중헌이 언제 천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단 말인가?
당시 왕중헌은 이따금씩 출타를 하곤 했는데 어떤 때에는 한달 이상 외유하고 돌아올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도 여러 번 있다 보니 이상하게 보여진 적은 없었다.
'그 때 그것이 바로 천의회의 일 때문이었던가?'
진일문은 낮게 탄식을 불어냈다.
'신비에 가리워져 있는 문사, 그것이 바로 그 시절의 내가 보아왔던 왕사부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 분은 내 우상이었지. 어쩌면 나는 그 분께 부정(父情)을 갈구했는지도.......'
그의 눈에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는 것이 보였다.
어느 덧 동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공소곡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다.
'왕사부가 비밀리에 조직한 천의회, 그 곳은 과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집단일까? 삼성림의 화개악을 상대하기 위하여......? 그 분은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진일문은 이 점을 두고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름 아닌 이런 이유가 있었다.
'생전에 부친은 왕사부와 손을 잡고 화개악을 쳤다. 비록 역습을 당하기는 했지만 결국 두 분은 뜻을 같이 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애당초부터 왕사부는 내가 진가(眞家)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후로 그 분이 나를 어찌 대했어야 하는가?
누구든 이 정도의 연(緣)이라면 왕사부와 같은 태도는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서운함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상식으로는 달리 요구되는 것이 있었다.
'왕사부는 당연히 내게 부친의 일을 알리고 함께 복수를 도모하게 했어야 했다. 그 분은 당시에도 벌써 그 일을 추진하고 계셨으면서 내게 은연 중 거리감을 둠으로써 자신을 철저히 은폐하려고만 했다. 마치 그 모든 것이 나와는 무관한 현상인양....... 일편으로 나를 아껴주신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확실히 그 분에게는 모호한 점이 많다.'
요컨대 진일문에게 있어 왕중헌은 작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자세한 것은 그 분을 만나게 되면 알 수 있으리라.'
그는 흑수선과 더불어 걸음을 재촉했다.
공소곡.
이 곳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전설이 있었다.
즉 원래는 커다란 소(沼)였으나 만년 묵은 이무기가 승천하는 바람에 물이 말라버려 계곡으로 화했다는 것이다.
과연 계곡은 입구에서부터 움푹 꺼져 있어 소를 연상케 했다.
진일문과 흑수선은 그 안쪽을 향해 나란히 신형을 날렸다.
얼마쯤 들어가니 계곡은 차츰 좁아지고 있었다.
한 가닥 내(川)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자 종내에는 넓고 편편한 바위가 펼쳐져 있는 곳이 나타났다.
그런데 흑수선이 갑자기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발했다.
"피!"
"으음......."
진일문은 절로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냇물의 색이 붉다는 것, 그것은 더 말하지 않아도 피가 섞여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싸움이 벌어졌나 보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니.......'
그는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흑수선이 정신없이 달려가자 그도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악! 사형--!"
그에 앞서 바위 하나를 넘어갔던 흑수선이 또 비명을 질렀다.
진일문은 흠칫하여 급히 신형을 솟구쳤다.
바위의 아래 쪽.
물이 흘러내리는 개울에 반신이 물에 잠긴 시체가 있었다.
흑수선은 그 시체에 매달려 몸을 떨고 있었다.
"사형! 사형! 흐흐흑......! 대체 누가 사형을 죽였죠?"
그녀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온 계곡에 메아리 쳤다.
반면에 진일문은 시신을 살펴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신은 삼십대의 사나이로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키가 작았다.
일신에 흑에를 입고 있었는데 그의 죽은 모습은 실로 끔찍했다.
목이 반쯤 베어져 있는 데다가 복부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창자가 한 자도 넘게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른팔도 어깻죽지부터 뭉턱 잘려져 나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주위에는 온통 선혈이 낭자했으며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참경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시체가 네댓 구 쓰러져 있기도 했는데, 그들은 옷차림이 모두 달랐다.
진일문이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들을 알고 있소?"
흑수선은 시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천의회(天意會)의 사람들이에요."
진일문은 쓴 입맛을 다셨다.
"으음, 이 곳에서 천의회의 사람들이 모이기로 했던 모양이군. 그리고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해 이 지경이 된 것 같소."
그 말에 흑수선은 벌떡 일어나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용서할 수 없어요! 분명 그 놈들일 거예요."
"그 놈들이라니?"
"삼성림 말예요."
흑수선은 말을 마치자 비조처럼 신형을 날렸다.
'수선!'
진일문은 일순 가슴이 섬뜩해지고 말았다.
그녀의 미간에 언뜻 검은 그늘이 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어느 정도까지는 관상을 볼 줄 알았다.
그것은 지난 인고(忍苦)의 역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진 이력 중 하나였다.
물론 진일문도 그런 것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심중에서 일어나던 불길한 예감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실상 요 며칠 간 흑수선의 얼굴에는 좋지 않은 사조(死兆)가 계속 끼어 있었던 것이다.
'제발 내 예감이 틀리기를.......'
그는 곧 그녀의 뒤를 따라 신형을 뽑아 올렸다.
흑수선.
그녀는 넋을 잃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흑수선은 핏기 없는 얼굴로 눈앞의 참혹한 광경을 응시했다.
숲 속에 있는 하나의 공지였다.
그런데 지옥을 방불케 하는 참상은 그 곳에도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니, 방금 전에 보았던 것보다 그 충격이 오히려 수 배는 더 했다.
우선 쓰러져 있는 시체만도 삼십여 구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은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었으며 역시 의상도 다양했다.
하지만 한결 같은 것은 모두가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지를 검붉게 물들인 선혈이 인간 지옥도인 그들의 주검을 장식하고 있었다.
혈전은 대체 얼마나 격렬했던 것일까?
장풍에 의한 것인 듯 여기저기 깊은 웅덩이가 파여져 있었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허리가 부러져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팔다리가 잘려진 채 곳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장검에 베어진 시신은 뺄랫줄 같은 창자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셋째 사형, 넷째 사형, 여섯째 사형....... 모두 죽었군요? 아아! 어찌 이런 일이......."
흑수선이 망연히 선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흡사 백치와도 같았다.
아마도 너무도 충격이 커서 잠시 신지가 마비된 모양이었다.
진일문은 줄곧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장내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상황은 어느 정도 짐작할만 했다.
천의회의 인물들로 보이는 시신은 대략 열두어 명이었다.
나머지 시신들은 상대쪽이었는데, 처절한 전투로 인해 양측이 함께 뒤엉킨 채 죽어 있었을 따름이었다.
진일문의 눈에 기이한 광망이 일었다.
'천의회는 기습을 받고 손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당했다. 이것은 정녕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이들은 행동이 은밀해 무림에서 아직 잘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흑수선을 바라보았다.
이어 떨고 있는 흑수선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수선, 정신 차리시오. 싸움이 벌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오. 좀 더 둘러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소."
진일문은 시신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아직 굳지 않은 것을 눈으로 지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흑수선은 다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 선뜻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하긴, 동문의 사형들이 거의 몰살을 당했으니.......'
진일문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연후,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공소곡은 막다른 계곡이 아니라 계속해서 통해져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지세를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숲의 안쪽으로 이어진 핏자국이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 방향으로 나무와 풀이 함부로 누워있는 것도 보였다.
"그럼 수선, 당신은 이 곳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내 얼른 안 쪽을 살펴보고 오리다."
진일문은 흑수선의 어깨를 한 번 감싸안아 주고는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휘익--!
수림(樹林)이 우거진 곳.
진일문은 그 속에서 속속 시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소매에는 모두 한 겹의 검은 테가 둘러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그는 내심 침중한 신음을 발했다.
'으음, 이 표식은 삼성림의 현음궁(玄陰宮) 소속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소매에 테를 둘러 직급을 구분한다고 했다. 그런데
검은 색인데다가 한 겹밖에 되지 않으니 이 시체들은 개중에서도 하위인 자들이다.'
진일문은 전날에 옥가려로부터 구대천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바로 그 기억의 일부분을 더듬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튄 것도 역시 같은 순간의 일이었다.
'삼성림! 끝내 나와는 이런 식으로 부딪치는구나.'
그는 다시 안으로 진입해갔다.
깊숙히 들어갈수록 시체는 점차 보기가 드물어졌다.
그 대신 검은 테가 두 개, 혹은 세 개까지 둘러진 시체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이흑(二黑)은 향주급, 그러나 삼흑(三黑)이라면 현음궁 오대당주(五大堂主)의 다음 서열이다. 이른바 현음삼십육수(玄陰三十六手)라 불리우며 무공이 강호에서도 일류급에 해당되는 고수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죽음은 곧 천의회 측에서도 이들의 실력을 뛰어넘는 고수가 나왔었다는 말이 아닌가?'
진일문은 과연 천의회 소속인물 중 누가 그렇게 강할 것인지 몹시도 궁금해졌다.
물론 천의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그로서는 추정해 나갈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신형을 날리며 그는 벌써 한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인물, 그러면서도 기이한 예감으로 와 닿는 자였다.
'허무영(虛無影)! 바로 수선이 대사형이라고 부르던 자.......'
그러다 문득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다섯 구의 시체가 한꺼번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놀랍게도 현음삼십육수였기 때문이었다.
'대단하구나! 이 자들은 전부 한 사람에게 당했다.'
그들은 똑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것도 한결같이 목 한 가운데에 정확히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그 크기는 손가락보다 약간 굵을 정도였다.
아무튼 주변의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도 난전(亂戰)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진일문은 전장(戰場)의 바닥을 면밀히 살핀 후,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음, 이들을 죽인 사람도 역시 중상을 입었다."
핏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보기에도 흘린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휙--!
한 마장쯤 가자 숲은 끝났고 난석들이 널려 있는 곳이 나왔다.
그 곳에서 진일문은 다시 한 구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위 위.
한 명의 인물이 단정히 앉아 있는 자세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 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무릎에 한 자루의 단소(短簫)를 얹어 놓고 있었다.
노인의 가슴과 옆구리에는 각각 두 자루의 칼이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등에는 무려 다섯 종류의 암기가 깊숙히 파고 들어가 있었다.
진일문은 이 노인의 모습에서 대뜸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 노인은 강남사우 중의 한 명이다. 소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음우(音友)인 모양이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정녕 의외다. 음우가 천의회의 인물이었다니.......'
진일문은 강남사우를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다만 사우 중에서 두 사람을 먼발치로 보았을 뿐이었다.
북망산에서 신비의 귀왕등(鬼王燈) 앞에 모였던 복면인들이 서우(書友)와 화우(畵友)를 사로잡아 대령하지 않았던가?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나서지는 않았지만 심중에 차오르는 분노를 눌러 참아야 했던 그였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그만치 그들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었다는 얘기가 된다.
'으음, 중과부적으로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실로 당당한 모습이다. 당금 천하에서 현음궁의 협공을 받고도 이 지경이 되도록 맞서 싸울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진일문은 손을 뻗어 음우의 눈을 감겨 주었다.
아울러 이마를 만져보니 아직 미지근했다.
'죽은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휙--!
그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다시 한 마장쯤을 달리자 그의 귓전으로 은은하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존자가 있다!'
진일문은 내심 다급히 부르짖는 한편 더욱 속도를 가했다.
그의 신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 오십장을 날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산벽(山壁).
그 아래에서 혼전을 벌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현음궁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삼인(三人)을 포위한 채 협공을 가하고 있었다.
전세는 기울대로 기울어 일견하기에도 삼인이 쓰러지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들 삼인 중에서도 마의도포를 입고 있는 한 명의 백발노인이었다.
그는 도포를 시뻘겋게 피로 적신 채 분투하고 있었다.
삼흑을 두른 여섯 명의 고수와 금테를 두른 한 명의 중년인이 그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이 사용하는 무기는 매우 특이했다.
그것은 하나의 철판(鐵板)으로 가로세로 줄이 그어져 있어 언뜻 보아도 바둑판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천하에서 그런 것을 무기로 사용할 자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강남사우 중 기우( 友)였다.
그는 또한 사우 중 가장 무공이 강한 것으로도 공히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기우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특히 소매에 금테를 두른 중년인의 음양극(陰陽戟)은 그의 몸에 무수한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댄 채 분전하고 있었으나 이들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한 명은 이미 왼팔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고, 다른 한 명은 꼬챙이와 같은 묵봉(墨棒)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두 사람은 십여 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다만 묵봉을 쓰는 청년의 무공은 의외로 높아 등뒤의 얼굴이 검은 중년인을 오히려 위기에서 속속 구해 주고 있었다.
아무튼 그들에게는 전황을 역전시킬 희망이란 단 일 점도 없었다.
상대편에는 아직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십오륙 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이 이흑이나 삼흑의 고수들이었다.
현음궁의 우두머리는 소매에 금테를 두른 또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관전하고 있었다.
눈이 실처럼 가느다란 자로 등에 일월륜(日月輪)이라는 패도적인 외문병기를 메고 있었다.
"흐흐... 천당주(千堂主), 그만 끝내는 것이 어떻겠소?"
기우와 싸우고 있던 금테의 인물이 그 말을 받았다.
"좋소이다, 곡당주! 이 늙은이가 생각보다 끈질기구려. 하하... 이제는 목을 잘라버려야 될 것 같소."
아마도 두 사람은 직위가 동급인 모양이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천당주라 불리운 자는 번개 같이 음극을 찔러왔다.
동시에 양극은 아래서 위로 올려 뻗었다.
쉬쉭--!
때마침 여섯 명의 삼흑고수를 상대하고 있던 기우에게는 도저히 그것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강남일대에서 존경을 받아온 백전의 노장, 그는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노부 평생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오. 현음궁의 귀한 분들에게 어찌 보답이 없을 수 있겠소? 내 적어도 세 분 만은 저승으로 함께 모시고 가리다."
그는 천당주라는 자의 음양쌍극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중의 철판을 무시무시하게 휘둘렀다.
슈우우웅--!
"헛!"
그의 이런 대응은 현음궁의 천당주를 무척이나 놀라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철판이 휩쓸자 세 명의 삼흑고수가 허리가 동강나며 허공 중에 피보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에 기우는 가슴과 복부에 각기 하나씩의 쌍극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비명은커녕 눈썹 한 올 찌푸리지 않고 다시 철판을 앞으로 밀어냈다.
펑--!
"으윽!"
철판은 천당주의 가슴에 그대로 격중되었다.
기력이 소진되어 위력이 다소 떨어지기는 했으나 이로 인해 그는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나고 말았다.
"이, 이런!"
천당주는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부여안고는 만면에 살기를 띈 채 기우를 노려보았다.
"우우우--!"
기우의 입에서 처절한 장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한 모금의 피를 왈칵 토해내더니 흡사 고목처럼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강호 도의도 모르는 치사한 자들! 삼성림은 무슨 일이든 숫자로 해결하려 드는구나."
허공으로부터 분노에 찬 음성이 들려 왔다.
매우 낭랑한 음성이었으나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자 한결같이 안색이 대변했다.
"웬 놈이냐?"
천당주는 유독 머리 위에서 소리가 느껴지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허공에서 하나의 칼날이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헉!"
천당주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도법이었다.
섬전이 작렬하듯 무섭게 쏘아져 오는 한 줄기의 도광(刀光),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쌍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자신의 방어가 얼마나 무능하고 보잘 것 없는지를 그는 금새 알 수 있었다.
파파팟--!
과연 도광은 그의 방어벽을 뚫고 무자비하게 파고 들어왔다.
"으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이와 더불어 조각조각 분시된 인육(人肉)이 후두둑 피우박을 쏟아 냈다.
그 바람에 장내는 일시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싸움을 하던 인물들이 저마다 손을 멈추고는 넋을 잃은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당주라면 현음궁의 오대당주 중 한 명으로 강호에서도 손가락 꼽히는 고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것도 산산조각나 죽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장내 인물들의 시선은 당연히 한 곳으로 쏠렸다.
수중에 만도(蠻刀)를 들고 서 있는 인물.
그 자는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고요한 기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표정 또한 무심, 그 자체로써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땅을 향하고 있는 만도 끝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진일문이었다.
숲 속의 한 시체로부터 만도를 취한 그는 만박해초결에 따라 천당주를 가볍게 처치할 수 있었다.
만박기예는 일정한 초식이 없다.
상대방의 초식에 따라 즉석으로 변화하되 막바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무공이다.
마침내 진일문은 이 해초결을 실전에 이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연 만박어르신의 무공은 명불허전이로구나. 설마 하니 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줄이야.......'
그는 심중에서 감탄과 만족감이 어우러지자 입가에 묘한 미소를 매달았다.
그 미소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공포스럽게 비치는 지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진일문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의(殺意)가 발동된지 라 회의 따위는 염두에도 없었다.
말은 더더욱 필요치 않았다.
'먼저 저 쪽으로!'
그는 가까이 있는 삼흑고수 세 명에게 접근해갔다.
"으으......."
삼인의 고수는 대경하여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벌써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엇인가 번쩍 얼굴을 스쳤다고 느낀 순간, 그들은 구천으로 향하는 문턱을 넘어서야 했다.
단 한 명도 예외라고는 없었다.
모두 면상이 두 쪽으로 갈라져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필두로 하여 진일문은 계속 움직임을 진행했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고나 할까?
지극히 유연하되 그 위력에 있어서는 단지 작은 물줄기가 아니라 굉렬한 폭포수였다.
그의 도는 도광을 폭사해 내며 무리들 속으로 짓쳐 들고 있었다.
아울러 그것은 일직선으로 베었으며, 직각으로 꺾이며 또 무엇인가를 베었다.
이러기를 수십여 차례.......
그 때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감촉이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전율이 일 정도로 확실한 살인의 감촉이었다.
하지만 이에 병행되는 감흥이란 그 자신도 놀랄 만큼 전무했다.
움직임을 더해갈수록 그는 오히려 마음이 침착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는 베어져 나가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나무토막, 혹은 한 덩어리의 짚단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와중에서 진일문은 한 가닥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상하군? 왜 이들은 가만히 있는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정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작이 너무 빨라 응할 자가 없다는 것을.
실제로 그는 상대방이 미처 동작을 개시하기도 전에 만도를 긋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일으키는 이 회오리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크아아악--!"
연이어 터지는 비명, 또 비명.......
무리들 중 벌써 반 이상이 고혼(孤魂)이 되었다. 누구의 입에선가 저주의 찬 고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우... 저 자는 인간이 아니다. 도귀(刀鬼)다!"
그것은 그 자가 몰라서 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사실 진일문은 특정한 도법을 익힌 적이 없었다.
그라면 검을 들어도 똑같이 전개했을 것이며 하다 못해 막대기나 곡괭이를 들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왜냐하면 애당초 그는 어떤 초식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죽일 놈! 네 놈은 누구냐?"
등뒤로부터 분노한 외침이 들려 왔다.
진일문은 돌아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므로.
'곡당주라는 자!'
그는 두 갈래의 예리한 파공성이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마치 뒷덜미에도 촉각이 있거나 눈이 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후후... 그 자의 일월륜!'
쉬익--!
만도가 뒤로 돌아가더니 교묘하게 두 개의 륜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륜은 일종의 중병(重兵)으로써 빠르게 회전하며 막강한 위력을 발산해 내는 병기다.
일반 병기로 거기에 부딪친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행위였다.
진일문의 만도는 역시 륜과 부딪치지 않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약간의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을 보였을 따름이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도래했다.
윙! 카칵--!
놀랍게도 륜은 방향을 꺾더니 오던 방향으로 도로 날아갔다.
"허억!"
허파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기묘한 음향이 울렸다.
진일문은 그제서야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에 가슴 양쪽에 각각 한 개씩의 륜이 깊숙이 박힌 채 무너지듯 쓰러져 가는 곡당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 이럴 수가......!"
곡당주는 불신과 회의에 찬 눈빛으로 진일문을 응시했다.
아닌 게 아니라 천하의 누구라도 자신의 애병(愛兵)에 스스로 당한다면 그러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쿵--!
진일문은 곡당주의 육신이 지면과 맞닿는 것을 보고서야 도를 거두었다.
그는 무감한 눈길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현음궁 소속의 인물들 중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진일문은 그들 모두가 자신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한 차례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우우......."
하지만 늘상 가슴속에 뭔가 응어리진 한이 간직되어 있어서일까?
그는 일편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제껏 굴욕으로 점철되어 왔던 삶, 이런 식의 징계는 어쩌면 그에게 있어 응분의 보상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사람.
진일문의 곁으로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삼십 세 정도로 보였으며 안색이 유난히 희고 영준한 자였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데다가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진일문을 바라보는 눈동자만은 한성(寒星)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귀공께 감사하오."
그는 바로 방금 전에 묵봉을 쓰던 그 인물이었다.
진일문은 만도를 한 옆으로 내던지며 낮게 물었다.
"허무영(虛無影)......?"
그 말에 청년의 얼굴에는 언뜻 놀라는 빛이 스쳐갔고, 그것을 확인한 진일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맞는가 보구려."
청년 허무영은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다.
"그렇소이다만 귀하는 어떻게 나를 알고 있었소이까?"
진일문은 대답 대신 담담한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허무영은 눈에 이채를 떠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귀하가 막내 사매와 함께 왔다는......?"
진일문이 그 말을 잘랐다.
"아! 죄송하오. 나는 그녀에게 돌아가야겠소이다."
비로소 흑수선을 상기해 낸 그는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로 인해 심중에서 불안감이 치민 것이었다.
"누이는 어디 있소?"
허무영의 음성이 갑자기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에도 역시 불안해하는 빛이 스쳐갔다.
진일문은 더 말할 여유가 없는 듯 즉각 신형을 솟구쳤다.
휘익--!
허무영도 그와 함께 몸을 날리려다 그만 우뚝 멈추어 섰다.
"으음......."
뒤쪽에서 한 가닥 신음성이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아!"
허무영은 정신이 번쩍 든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죽은 줄 알았던 기우가 몸을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노선배!"
그는 반가움이 깃든 외침을 발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첫댓글 즐감 입니다 좋은날 되세요
즐겁게 감상하였습니다.....................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요!!!!1
감사
무조건적인 살인은 말랬거늘...
ㅈㄷㄱ~~~~~~````````````````````````♠
늘 감사합니다.
굿,,즐감,,,
감사~~~^^💝💝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 고맙습니다
즐감요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즐...........감...........요
감사합니다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우선 맛뵈기 한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