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을 말려 얇게 눌러 박편으로 만든 다음에 살짝 튀기거나 볶은 겁니다. 그걸
발효시키면 바삭바삭하고 물에 잘 녹는 과자같은 조각이 되는 데 그걸 우유나
크림과 같이 먹죠. 이름은 시리얼이라고 하고 가라드의 가장 대표적인 서민들의
아침식사랍니다. 바삭바삭하지만 물에 잘 녹아서 부담없이 드실 수 있으실
겁니다."
칼대제는 더 묻지 않고 수저를 들어 우유에 담긴 옥수수를 가지고 만들었다는
시리얼을 드기 시작했다. 물론 옆에서 시독이 어쩌고 저쩌고 그러고 있는
스틸하트 경과 황제께서 드실 음식이라고 지겹게 토로하고 있는 쟈넬을
무시하고선 말이다.
사자의 방에 아이린이 처음 방문한 이래 칼대제의 생활패턴은 상당히 바뀌었다.
아이린이 그때 끓여온 가벼운 죽에 맛을 들인 칼대제는 다름 사람도 아닌
아이린에게 계속 먹을 것을 부탁했고 덕분에 아이린은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사자의 방에 칼대제를 간호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만남속에서 칼대제는 점차 아이린에 대해 상당한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아이린의 요리는 맛이나 먹기 용이한 점뿐만 아니라 센스와 독특함이 있었다.
얼마전에 아이린이 가져온 푸딩처럼 생긴 하얀 동방제국의 음식이라는 것에 단것을
싫어하는 칼대제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래도 아이린을 빋고 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결론은 상당히 좋았다.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양념과 어울어져 의외로
소박한 식성을 가진 대제의 입맛에 딱이었던 것이다.
"이게 무엇이냐?"
"동방제국에서 주로 먹는 요리랍니다. 그들은 이걸 두부라고 부르더군요. 원래 이
재료는 요리법이 다양한데 폐하의 용태를 생각해 간단히 양념장만 쳐서
올렸습니다."
"호오... 그래? 근데 동방제국의 말을 아느냐? 어떻게 이런 걸..."
"사이럽스의 속기사들이 사용하는 약식대조표를 가지고 공부했죠. 그래도 이
요리가 나온 약선(藥仙)이라는 동방제국 책을 번역하는데 꼬박 4달이
걸렸습니다."
"흐음... 재주가 훌룡하구나. 덕분에 입맛에 맛는 음식을 먹게 되는구나. 고맙다."
"근데... 사실은 그 요리 동방에서는 죄수가 석방되면 기념으로 먹는 거라더군요."
물론 쟈넬과 스틸하트가 광분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대제는 그런
그녀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황비가 죽은 이래 그가 언제 이렇게 솔직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가... 무뚝뚝한 아들을 스스로 봉인한 뒤 그는 늘 극도의
겸양과 아부섞인 말에 익숙해 졌던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솔직한 그녀의
한마디는 신선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런데..."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시리얼을 들던 황제는 문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그가 있었다. 공녀의
호위기사로 따라온 가라드의 젊은 기사가 늘 문밖에서 시립한채로 공녀가
병문안을 마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몇달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기 그대로 서있는 모습을 보자 황제는 관심이
일었다.
"저 젊은 기사는 항상 저곳에 있는데 아직 이름조차 잘 모르는 구나. 소개해
주지 않겠느냐?"
"네... 저 쪽은 조반니 게하르트. 저의 호위기사인거야 잘 아실테고 가라드의
프리미엄스콰이어출신입니다. 게하르트! 폐하께 인사드리세요."
"제국의 퍼스트나이트(First Knight)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게하르트의 인사가 끝나자 칼대제의 표정이 재밌게 변했다.
'호오... 이것봐라.'
공식적으로 스타이너 가문의 기원은 암흑신의 흑기사, 나이트 오브 다크니스
(Knight of Darkness)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스타이너 가의 가주는 데블족의
가장 첫번째 기사라는 의미로 퍼스트나이트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제국이 성립되고 권력의 구도가 정해지자 점차 다른 가문과 유사한 반열에 느낌을
주는 퍼스트나이트라는 칭호는 사라지고 제국황제라는 칭호만이 가장 우선시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전통을 깨고 스스로를 퍼스트나이트라 칭한 것이 바로 칼대제였다. 그는
기사단의 신임을 얻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무위에 대한 강한 자부심으로
스스로를 퍼스트나이트라 칭했던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든 이후 그 칭호도
함께 묻혀지고 황제라는 칭호에 익숙해 지기는 했지만...
그런데 저 앞에 젊은이는 그 칭호로 자신을 부르고 있다. 그것은 최고권력의
상징인 황제보다도 최고무위의 상징인 퍼스트나이트로서의 존의를 표하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권력보다 무위를 존경하는 태도를 증명한 것이다.
대제의 경험상 이런 자들은 대개 강했다. 대제는 그 젊은 기사에게 호감이
일었다.
"그리운 호칭이군... 젊고 용맹했던 시절의 자취지... 이리 가까이 오게나
무위를 존하는 젊은 기사여. 황제가 아닌 퍼스트나이트로서 자네를 만나고
싶네."
"죄송하지만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순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이게 대체 무슨 베짱이란 말인가?
그러나 황제는 차분히 물었다.
"거절의 이유를 듣고 싶네만."
그러나 게하르트는 말없이 자신의 왼쪽에 찬 검을 한번 쳐보였을 뿐이다.
칼대제는 그제서야 이유를 알수 있었다. 사자의 방은 무기를 가지고 들어오지
못한다. 사자의 방에서 무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건 황제 자신과 근위기사인
나이트 오브 캐슬(Knight of Castle)뿐이었다. 그는 호위로서 무기를 휴대하지
않은채 호위에 임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자네 말대로라면 그 거리에서 무기를 차고 있다면 40걸음도
넘게 떨어진 공녀의 안전을 자신있게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인가?"
게하르트는 말없이 목례만을 해보였다. 칼대제는 안면의 근육이 실룩이기 시작하는
근위기사 스틸하트를 보며 조용히 쓴웃음 지었다.
"하하하... 마음에 드는 친구로군... 좋아. 그럼 내 특별히 허락하지. 사자의 방에
게하르트 경 자네는 무기를 들고 출입해도 좋아."
그 말에는 어지간한 아이린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사자의 방에 쳐진 보이지 않는 마법의 장벽이 게하르트 경에게 개방되었다.
게하르트는 별로 꺼리낄것 없듯이 방에 들어왔다. 뭔가 항의하려다 버벅대고 있는
쟈넬을 거쳐 아이린의 뒤에 시립했다. 그리고 곧 벨트의 롱소드의 힐트에 걸린
고리를 들어 패링에 걸었다. 이어서 왼쪽에 찬 칼을 오른쪽으로 바꿔 찼다.
이것은 호스트의 예의에 대해 감사하며 그 예의에 보답하기 위해 먼저 칼을
뽑지는 않겠다는 고대 기사들의 관례였다. 대제는 그런 그의 행동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도 보통내기는 아니군 그래... 음... 그러고 보니 여기 소개할 사람이 또
있군. 스틸하트, 피차 호위같은 한직이나 맡는 처지지만 자네와 좋은 친구가
될만하다고 생각치 않나?"
그러나 그런 대제의 말은 게하르트가 먼저 받았다.
"실례지만 호위에 신경을 모으고 있는 터라 벗을 둘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남아 도는 이들이나 소개시켜 주시지요."
스틸하트와 게하르트의 말에 대제는 웃음이 나왔다. 둘다 어지간히 꽉막힌
고집불통이다. 하지만 싫지 않다. 마치 30년전 기사단의 수장으로서 적진을
향해 돌격하기전 마지막 작전 조율에 나섰던 기억이 재현되는 느낌이었다.
만약 이런 친구 둘이 양쪽에서 자신을 보좌한다면 그 어떤 적의 방어진도
돌파할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데제의 상념에 스틸하트에게 관심을 가진건
되려 아이린이었다.
"아... 역시 갑주의 성문장에서 짐작은 했습니다만... 암흑기사단 12좌 중에
한분인 나이트 오브 캐슬(Knight of Castle) 라젠더 스틸하트 경이였군요."
"허허허... 내가 몸져 눕는 바람에 침대나 지키게 된 불쌍한 친구지... 내가
어서 죽어줘야 이 친구도 전장에서 활약할 기회를 얻을 텐데..."
그 말에 경악한 건 역시 스틸하트 경이었다.
"폐... 폐하!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현재 병중이시지만 곧 완치되실 겁니다.
나이트 오브 캐슬이 활약하는 곳은 오직 주군의 곁이고 저는 폐하의 곁에서만
활약할 것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가지십시오."
그런 스틸하트의 격양된 말에 아이린은 궁금증이 일었다.
"그런데 스틸하트 경 묻고 싶은게 있는데요. 12좌의 기사들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상징좌의 권능을 소유한다던데요. 스틸하트 경의 권능은 뭐지요?"
"공녀! 말을 가려서 해주시오. 12좌의 기사들의 권능은 오직 주군을 위해서
사용되기를 허락받은 암흑신의 은총, 태자마마의 약혼녀라 할지라도 함부로
논할 도리가 아니외다!"
스틸하트가 분노하고 게하르트가 그것에 무언의 제지를 보내고 그런 긴장속에
쟈넬이 땀을 뻘뻘흘리며 폐하의 앞이니 정숙하라고 말리고 그런 상황을 즐기듯
흐믓하게 바라보는 아이린을 보며 대제는 다시 침대에 몸을 기댔다. 처음 먹은
시리얼이었지만 맛은 좋았다. 그리고 기분도 즐거웠다. 젊은이들과의 대화를
하면 노인의 마음도 활기가 넘치는 기분이 되버린다. 그는 오랜만에 느낀 과거의
기분을 몸에 새기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폐하께서 상세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들었소."
"6개월만에 다시 본 약혼녀에게 처음 꺼내는 말이 고작 그건가요?"
"그렇다면 전과의 결과를... 아스톤 전투의 결과 6개 사이럽스의 군사 요충지를
함락하고 적 사망자 16,237명 부상자 3,467명에..."
"그만! 그만! 정말 이래서 게이시르 황궁엔 훌룡한 궁중문학이 없는 거군요. 고작
할말이 그거예요? 이렇게 예쁜 약혼녀를 방에 꼬옥 처박아 두고선 6개월만에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시집살이 잘했다' 랑 '시체수가 5자리다' 라니... 대체 나
없었으면 대체 어떤 오지게 눈나쁜 여자가 게거품을 물었을지..."
게이시르 후원의 한편에서 아이린과 흑태자는 약혼 후 6개월만의 해후를 하고
있었다. 트리시스와 사이럽스의 국경지역인 아스톤 함락작전을 위해 약혼 후
바로 다음 날 떠난 흑태자는 6개월이 지나서야 게이시르로 귀환한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번쉬타인은 눈물을 머금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얼마나 이혼하고 싶으셨으면... 가라드의 지원필요성을 제로로 만들려고 지금
저렇게 열심이시잖아... 태자전하, 제가 죽일 놈입니다!"
솔직히 번쉬타인의 그런 생각이 지나친건 아니었다. 실제로 흑태자는 가라드
방문 후 기존에 군부에 밝힌 바 있는 대륙통일30년계획의 전면적인 수정을
명멸하였다. 그말을 들은 제국군 참모들은 드디어 태자가 30년은 무리라는
사실을 깨닭았구나 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결과는 젠장! 30년을
10년으로 줄이라는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번쉬타인이 눈물을 흘리며 묘한 납득을 하는 가운데 참모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고 나자빠졌다. 그러나 다른 이도 아닌 흑태자의 철권명령에 이의란 있을 수
없었고, 베라딘의 '할만하네!'라는 말에 다들 이를 갈며 전면적인 계획재수정에
들어갔던 것이다.
결국 사이럽스에 제국의 발판을 만들자는 계획은 예상밖의 대 성공을 거두었고
당초 예상보다 3개월이나 일찍 귀환이 가능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귀환한 흑태자가
황궁에서 처음 들은 것은 쟈넬의 끝없는 불평불만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밝은
칼대제의 용안을 보며 그제서야 흑태자는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후원에 있다던
아이린을 만나러 서둘러 온 것이었다.
긴 이야기를 나눌 형편은 아니었다. 곧 아스톤지역 방어진 구축에 관련된
전술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흑태자는 이것저것 6개월간 있었던 전장의 상세랑
아버지를 간호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하자 시간은 거의 다 흘러 간 것이었다.
조용히 흑태자의 말을 듣고 있던 아이린과는 달리 흑태자의 마음은 아쉽고
조급함만이 남았다. 6개월 만에 보는 얼굴인데... 그리고...
"그... 그럼 이만 회의가 있어 가겠소. 계속 수고해주기를 바라오."
"갈때 가더라도 등 뒤에 숨긴건 내 선물 아니예요? 안주고 갈꺼예요?"
순간 흑태자는 눈에 꼴불견으로 보일 만큼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아이린은 멈칫하는 흑태자의 등뒤에 손을 뻗어 한손으로 계속 불편하게
들고 있던 상자를 뺐었다. 그리고 뭔가 말할려고 손을 뻗는 흑태자보다 빨리
상자를 열었다.
"어머나! 이건 대륙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목걸이, 아스톤 공작부인의
티어스 오브 엔젤(Tears of angel)!!!"
"아! 그... 그렇소! 바로..."
"...의 이미테이션이네요."
"...그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소. 분명히 공작부인의 목에 걸린걸..."
"가짜라니깐요. 진짜는 제가 가라드의 한 장물아비 마누라의 목에 걸린 걸 개값에
사서 데리고 있던 애들 밥먹이는데 썼다니깐요."
"그... 그런... 이리 주시오. 싫다면 억지로 권하지는 않겠소."
"됐네요~ 차고 있을 거랍니다. 그리고 사교계의 부인들에게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거랍니다. '태자마마의 눈은 개눈이라더라~' 후흣! 재밌겠죠?"
"좋을대로 하시오."
"아직 삐지신게 아니면 손수 걸어주시겠어요?"
흑태자는 눈앞에 등을 보인 아이린의 가녀린 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양손에
든 목걸이를 천천히 목에 채워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설사 이미테이션일지라도 가릴 수 없는 내면의 깊은 아름다움이
목걸이를 통해 더욱 더 빛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지난 6개월의 전장의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흑태자는 흡족하게 떠날수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 구나."
"설마요? 포로들에게 사기나 당하고 오는 한심한 약혼자 덕에 속이 몹시
상하답니다."
"그런데 그 이유없는 흥얼거림은 무엇이냐? 갑자기 깊은 음악에 조예라도? 그리고
오늘따라 음식맛이 더 좋은 것 같구나. 이게 동방에서 칼국수라고 부른다 그랬나?
무인들을 위한 음식인가 보구나... 뭐 하여간 평소보다 더 밝아보여서 좋구나."
칼대제의 상세는 확실히 매우 좋아졌다. 전에 약을 거부하고 음식도 폐한 상태에서
독한 와인만을 벗삼아 삶을 자학하며 보냈던 일상은 병을 악화시키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아이린이 들어온 이후 와인은 금지되고 포도쥬스로 대체 되었다.
약은 안먹으면 밥도 없다는 아이린의 반협박에 억지로라도 꾸준히 먹어야 했고
특히나 아이린이 열심히 차려오는 환자에게 좋은 음식과 지루하지 않은 아이린의
병문안은 칼대제의 병을 낫게 하는데 큰 영향이었다. 처음에는 투덜대던 쟈넬경
마저도 이제는 조리장을 빌려주는데 군소리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행여나 아이린이
오지 않는 날은 스틸하트 경이 가장 불안해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하는 것이었다.
"녀석도 고생이 많군...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아스톤 섬터요새를 함락시키다니...
꽤 분발하고 있어."
"흐음... 글쎄요. 발탄족을 과감히 기용해 고공침투를 한건 인정해주겠지만
해전대와의 연계가 조금 늦어진건 감점입니다. 초계정찰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증거예요."
"뭐... 그래도 그정도가 어디냐. 제국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 아니겠냐. 거기다가
적들에게 확실히 공포를 심었다는 결과도 낳았잖느냐. 제국의 무신이라...
녀석의 투구가 공포조성에 한몫했군."
아이린은 조용히 그렇게 말하는 칼대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놓아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이제 약하지 않아요."
칼대제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무신의 투구... 자신이 준 태자의 봉인...
"나는 이미 붙잡고 있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난 그 녀석을 단 한번도 잡은
적이 없었다."
"그럼 그의 투구는..."
"내가 태자에게 준 것은 단순히 봉인구일 뿐이다. 그 봉인을 한 것은 태자
스스로의 일이다. 나는 단순히 전달자였을 뿐이다."
"...그의 눈을 보면 슬퍼보여요. 공포속에 가려진 그의 모습은 두렵기 보다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어 애처로워 보여요. 그의 봉인을 풀어 줄수 없을까요?"
"네가 풀어주거라. 태자에게 더 이상 그것이 필요없어지면 너는 그 봉인을 네
손으로 벗겨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대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언제부터 그 봉인을 하게 되었죠?"
"...언제부터였던가? 그래 아마도 10년 정도 전의 일이었을꺼야... 그때 태자는
처음으로 전장에 나서는 경험을 가지게 되었지. 태자가 그때 처음으로 맡은
임무는 보병대의 한 분대를 이끌고 종심돌파한 기사단에 보급을 호위하는
임무였지. 트리시스의 뜨거운 사막지대에서 부대는 사막게릴라들의 포위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런 상황을 미리 예상했던 태자는 일선 부대에게 정렬을 명했으나 신병부대에
위기상황에서 태자의 입지는 너무 약해보였지. 일부 선임하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부대는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했고 그걸 제지하기 위해 태자는 막아
섰지만 지휘관들이 태자에게 취한 행동은 공격이었다.
태자는 그런 그들을 그자리에서 베어버렸고 잇달아 도주하던 병력들은 악귀처럼
아군을 베어넘기는 태자에게 경악을 하고 방향을 바꿔 적에게 돌진했지. 그러나
결롸는 좋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에 패배가 박혀버린 그들에게 체계적인 전투는
불가능 했고 병사들은 가로 막는 것은 아군이며 적군이며 가리지 않고 베며
매복진을 돌파했고 결국 승리는 거뒀으나 아군은 적에게 죽은 자보다 아군끼리
죽이거나 태자에게 베인 자가 더 많은 최악의 결과를 낳았지. 생존병들은 징벌을
각오하고 태자를 고발하기까지 했어.
결국 태자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 자진근신을 청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옛 스승들을 만나기 위한 수행을 떠나겠다고 하였다. 과거의 스승들을 만나는
일은 그리 수월하지 않았나 보다만 그래도 뭔가 인생의 계기 같은것이 생겨서
왔더구나. 강한 결심을 한듯이 돌아와 자신을 봉인하기 위한 봉인구를 달라고
하기에 그때 무신의 투구를 주었단다.
그리고 그 이후로 검은 옷만을 두르고 다녀 흑태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지. 뭐
솔직히 조금 이상한것도 사실이었다. 수행을 다녀 온 후 자신을 봉인하며 가진
마음이 이상하게 강한 다짐이라기 보다는 심한 가슴앓이같다는 느낌이 들더구나..
그래서 언젠가... 아이린?"
대제는 어느새 침대에 엎드려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 아이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제는 고개를 돌려 서로 누가 더 뻣뻣하게 서 있는지 내기라도 하듯이
꼿꼿하게 서있는 게하르트에게 물었다.
"어제 아이린이 숙면을 취하지 못했었나?"
"잘은 모르겠읍니다만... 오늘 태자께서 방문하신다는 소식에 조금 침소에 드신
시간이 늦어지신걸로 기억합니다만... 곧 방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대제는 아이린을 들쳐 안으려던 게하르트에게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점시 머뭇거리던 게하르트가 다시 뒤에 자세를
갖추고 서자 대제는 가만히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자던 아이린을 바라보며
살며시 그녀의 붉은 머리결을 쓰다듬었다.
"잘자거라... 아이린."
"이게 그 유명한 제국옥새(Jade Seal of Empire)이로군요."
"그렇단다. 오직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암흑혈의 정당한 계승자인 황제에게만
마나의 인을 찍을 수 있게 반응하도록 허락되는 물건이란다."
"흐음... 그래서 후계자 분쟁이 적은 거군요. 선대의 의지를 정당한 계승식을 통해
이어받지 못한 자는 마나의 인을 찍을수 없고 황제도 될수 없으니 말이죠."
"그래도 권리를 가진 자는 많다. 일단 규칙 1번이 암흑혈의 소유자니깐 16클랜이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거지. 물론 규칙 2번이 선대 주인의 계승의 의지지만 어차피
선대가 의지 없이 죽으면 먼저 집는 자가 주인이 되는 거니깐..."
칼대제는 오랜만에 활력을 되찾은 듯 옥새로 황실의 인가장에 도장을 결재하고
있었다. 트리시스의 오랜 내전을 끝내고 카심 일족을 왕으로 봉하는 칙령인 것이다
흑태자의 군사적 업적 중 최고라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로서 트리시스는
안정적인 동맹군으로 대 실버애로우 전의 전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대제의 결재를 받은 서류를 국무대신이 공손히 받아 방에서 나서자 오랜만의
국정이 종료되었다.
"오늘은 몸이 매우 가볍구나.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하고 싶구나. 같이 가겠느냐?
아이린?"
"네... 기꺼이..."
스틸하트가 인솔하는 캐슬스쿼드가 철저하게 사주경계를 서서 조금 삭막해 보이는
일행이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침대에서 일어서 자기 발로 걷는 칼대제의 감회는
새로웠다. 그리고 그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간호를 하느라 황궁을 제대로
둘러볼 기회도 없었던 아이린에게 황제는 직접 걸어다니며 황궁의 이곳 저곳을
설명해주었다.
"흐음... 네 말도 일리는 있다. 확실히 전쟁보다는 교역이 싸게 먹히는 국력부강의
길이지. 하지만 당장에 우리 게이시르에는 이렇다 할 특산품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 않느냐. 게다가 교역로에 있어서도 육로외에 해상교역이 한정되어 있어
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렇다면 한과의 교역은 어떨까요? 어떤 지리학자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둥글어서 계속 같은 방향으로 나가면 다시 제자리에 온다고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아직 미 개척지인 제국의 서쪽으로 가면 신대륙인 한과 투르와의
교역로의 개설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음... 투자비용은 확실히 적게 먹혀서 좋다만... 일단 검토는 해봐야 겠구나.
해로도 없는 서쪽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갈 강심장이 있을지도 의문이고...
...응? 아이린?"
아이린은 한 방에 앞에 서서 멈춰 있었다.
"폐하 여기는 문이 잠겨 있는 것 같네요... 무슨 연유라도..."
칼대제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그런 그를 대신해 옆에서 따르던 쟈넬이 답해
주었다.
"이곳은 돌아가신 황후마마의 옛 침소입니다. 돌아가신 이후 마마의 물건들을 모두
모아놓고 봉인하였습니다."
아이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방을 바라보고 있는 칼대제를 바라보며 알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추억이 두려우셨나요?"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약하다는 소리를 듣기는 죽기보다 싫은 시절이 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유지만 그때는 내 삶의 신념처럼 가슴에
새기고 살았었었다."
"그럼 지금은요?"
"글쎄... 너라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봉인된 것은 덮어두는 것일 뿐이예요. 없애버리든지 아니면 받아들이세요. 둘중에
하나를 고르는 데 대한 조언이 필요하시다면 제게 주세요. 그게 나을거예요."
칼대제는 잠시 서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절대불가라는 표정으로 통통한
얼굴에 잔뜩 찌푸리고 있는 시종장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결국 이를 가느듯한
소리와 함께 황후전의 열쇠꾸러미가 아이린에게 넘겨졌다. 아이린은 고개를 숙여
대제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며 물었다.
"후회하시나요?"
"후련하다 그러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너를 믿는다. 네게 요긴하게 쓰였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하는걸 황비도 찬성할꺼야..."
두 사람은 다시 황궁의 긴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몇곳을 더 돌아 본뒤 다시
아이린을 멈추게 한 곳은 방의 한쪽 벽이 완전히 창문으로 세팅된 부채꼴형의
2층방이었다.
"와아... 멋지네요..."
그 화려하게 조각된 유리창에 다가간 아이린은 잠시 후 조금 실망어린 표정으로
변했다. 아름다운 유리창에 비해 밖에는 살풍경한 후원의 검은 흙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황제가 다가왔다.
"크리스탈 뮤직홀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전망좋은 방이라고 불렀지. 봄이 되면
창 밖으로 보이는 후원의 아름다운 꽃밭이 사람들의 발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곳이었거든..."
"근데 지금은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잡풀조차 보이지 않네요."
"황비가 죽은 이후 저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 눈치를 살핀 거겠지.
황비는 여기보다 비교적 따뜻한 로우엔 출신이라 그런지 꽃을 좋아했어. 그래서
특히 봄꽃을 많이 심었지. 그녀가 로우엔의 봄이라고 불리게 된건 그런 이유도
있었단다... 태자가 어렸을때 봄이 되면 어린 태자와 내가 이곳에 앉아 황비를
기다렸지. 그러면 언제나 하얀 드레스를 걸친 황비는 나타나 창의 블라인더를
걷고 봄꽃이 보이는 광경을 배경으로 홀의 가운데 있는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곤 했지. 내 생애를 통틀어 몇안되는 따뜻한 기억들었다..."
그말을 들은 아이린은 홀의 가운데에 있는 그랜드피아노에 시선을 돌렸다.
피아노에 다가간 그녀는 곧 건반을 하나 건드렸다. '땡!'하는 맑은 선율이
크리스탈홀의 벽을 타고 반사되며 아름답게 울려퍼졌다. 곧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칼대제는 아이린의 의도를 알아채고 자리에 앉았다. 말없는 허락의
표시였다. 아이린은 빙긋이 웃었다.
"자! 스틸하트 경도 거기 앉아요. 잠시 호위는 쉬고요. 쟈넬경 조율이 조금 무리가
있어도 되요. 격식차릴꺼 없잖아요. 게하르트 경도 거기 앉아요. 옆에서 나 노려
보면 겁나서 제대로 못친다고요.
자! 그런 모든 관객... 그래봤자 딱 네분이지만
모두 모이셨으니 연주를 시작해 볼까요? 신사 숙녀... 아! 숙녀는 없으니
생략하고 신사 여러분, 미흡한 연주지만 부디 괴롭다고 비명지르지 마시고
끝까지 감상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4인을 위한 리사이틀... 그 첫번째 곡은
로우엔의 축제곡, Singing for Tomorrow입니다!"
건반위에 그녀의 손가락이 화려하게 움직였다. 아직 봄이 오지는 않았지만 봄이
올것을 믿기에 겨울이 두렵지 않다는 희망을 담은 노래 Singing for Tomorrow...
황비가 자주 부르거나 연주하던 음악이었다. 조금 방식이나 기법이 틀리기는
했지만 대제는 만족했다. 처음 황비를 만났을때도 결혼식 축가로도, 로우엔
공성전의 병사들의 흔들리는 사기속에서도 어김없이 불러졌던 그 노래...
그 노래가 조용히 크리스탈홀을 흐르고 있었고 그 음악을 감상하던 4명의
남자들은 잠시나마 깊은 감상에 젖을 수 있었다.
에스겔력 1201년
칼대제의 생일은 봄이 시작되는 무렵에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최근 10여년간 생일
이라고 뭔가 치뤄진 것이 없었다. 적어도 대제 본인에게는 그랬다. 늘 전장속에
열심히 싸우고 있거나 기근이 들거나 황비가 죽는 등의 나쁜 일이 겹쳐 사실상
황비가 죽은 이래 제대로 된 생일을 치뤄본 적이 없엇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은 올해가 정말 최악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우선 가장 기대를 했던 아이린은 늦겨울추위로 갑자기 감기에 걸려 간호를 못온지
벌써 3일째였다. 그리고 태자는 사이럽스의 항해조령에 항의하는 랄록상회의
제국 연안기습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뻤다. 게다가 정말 최악인건 그나마
시종장이라고 하나 있던 쟈넬마저도 아이린에게 감기가 옮는 바람에 시종장 재직
20여년만에 처음으로 병가를 신청한 것이다.
대제는 옆에서 말없이 서있는 스틸하트를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를
할게 따로 있지... 잠시 체념하며 대제는 몸을 침상에 파묻었다. 어차피 지난
10여년, 아니 자신의 일생을 통틀어 별로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최근 부상으로
마음이 너무 약해진 탓이다. 그는 그렇게 애써 자위하며 그래도 못내 아쉬움이
드는 것을 섭섭해하며 잠이 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둠속에서 대제는 눈을 떴다. 그리고 대제는 일어나며 의아함을
느꼈다. 꽤 오래 잔것 같은데 아직 어두웠다. 아니, 이건 정상이 아니다. 이렇게
어두울수는 없었다. 최소한 잠이 들면 작은 촛불이라도 켜놓는 것이 정상이었다.
순간 그는 잠이 확깨는 것을 느끼며 베게뒤에 놓인 검을 살며시 잡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그는 놀라운 사실을 깨닭았다. 이곳은 자신의
침소인 사자의 방이 아니다.
"일어나셨습니까?"
순간 대제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둠속에
자신의 충직한 기사 라젠더 스틸하트 경이 있었다. 대제는 순간 식은 땀이 흘렀다
스틸하트는 대제의 침상을 지나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커튼을 한번에 걷자
눈부신 빛이 창을 통해 갑자기 쏟아졌다. 대제는 강한 빛에 눈을 감으며 최후의
격전을 준비했다. 비굴하게 죽을 순 없다. 그 누가 됐던 황제로서의 최후를
맞이하... 려는 순간 대제는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눈이 빛에 적응되고
나서 창에 펼쳐진 광경때문이었다.
대제가 있는 곳은 바로 크리스탈홀이었다. 그리고 그 크리스탈홀의 창을 통해
보이는 후원의 광경은 마치 세상을 다 덮은 것 같이 만발한 봄꽃들의 향연이었던
것이다. 그때 대제의 머리속에 추억이 스치웠다.
'꽃을 심는 거야. 검은 성은 싫어... 화사한 봄의 블라우스를 입히자...'
그 화원의 한가운데에서는 낯익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과거
황후가 입었던 보기만 해도 화사한 기분이 들던 그 드레스...
'겨울의 묵은 고목은 싫어... 분홍빛과 상아빛이 어울어진 봄의 꽃을 심자...'
그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의 소녀는 그 꽃들속에서 너무나 잘 어울리게 서서
모습을 드러낸 대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우리 같이 꽃을 심자... 겨울의 슬픔과 작별하고 봄의 미소를 맞이하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녀가 두팔 가득히 뻗어 든 메세지를 담은 현수막이 펼쳐졌다.
Happy Birthday, My Father! We are love you, my lord!
아이린은 이 것을 대제의 생일선물로 주기 위해 꾀병을 부려야 했고 싫다고 발악을
하는 쟈넬과 스틸하트를 몰래 이 계획에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황궁의
많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모여 여기저기서 모여진 꽃들로 후원을 장식하느라
꼬박 3일이 걸린 대공사를 해야만 했다. 비밀유지를 위해 스틸하트 경을
제외하고는 아이린마저도 직접 꽃삽을 들어야 했던 대규모 생일축하 이벤트였다.
그리고 그런 아이린의 모습에 대제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천천히 손을 들어
화단에서 환하게 웃는 아이린과 다른 황궁의 사람들에게 답례를 해주면서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자신의 생을 통틀어 그 누군가에게 이토록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닭게 해준 생일축하였다.
'이젠 죽어도...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어느덧 세월의 흐름은 가을의 문턱을 닿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사람과 세상의
모든것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사이럽스의 일부 반군자치구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병탄한 제국에 대해 드디어 실버애로우가 대적하기 시작했다.
실버애로우는 그 해 여름 안전보장회의에서 전면적인 다크아머에 대한
사이럽스에서 완전철수와 전쟁보상을 요구했고 그에 대해 다크아머의 연합사령부는
'웃기지 마셔!'라고 간단히 요약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문서를 보내고 되려
팬드래건의 국경에 병력배치를 증강하였다.
이에 대해 실버애로우의 인내심은 드디어 폭팔하였고 연합총사령관인 팬드래건의
아크론국왕의 원로원연설과 아이젠버그 교황의 이노켄티우스 칙령에 따라 오랜
냉전상태를 깨고 실버애로우와 다크아머의 군대가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공격의 첫 시발점은 다크아머의 썬더돔에 대한 기습 공격이었다. 흑태자는
칼스가 이끄는 암흑기사단(Knight of Order)에 명하여 정면에서 무리하지 않은
공세로 실버애로우의 초전을 장식하라 명했고 칼스는 성실히 썬더돔 본 요새를
제외한 12곳의 보급기지와 7곳의 지역방어구를 불태우는 데 성공하였다.
분노한 썬더돔의 병력이 후퇴하는 제국 기사단을 추격하기 시작하였으나
칼스는 되려 코웃음만 쳤고 꽁지가 빠지게 도주하는 기사단의 뒤를 쫓는 썬더돔의
병력은 숨어있던 발탄족의 매복에 걸려 호되게 쓴맛을 보고 후퇴하는 치욕을
맞았다. 일명 썬더돔기습이라 불리는 이 전투를 많은 사가들이 그라테스전투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 어이없는 기습에 분노한 실버애로우는 즉각 4국의 병력을 모두 썬더돔에
집결하게 했다. 그 병력수는 거의 50만에 육박하는 대륙 역사상 유래가 없는
규모였다. 곧 이에 질세라 다크아머에서도 각 국마다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실버애로우보다는 훨씬 적은 수였지만 그래도 약 25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해서 실버애로우와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 시간 게이시르 황성에는 이제 가을빛으로 물든 후원을 걷는 한 노인과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소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엄청난 결전이 될 것 같더구나. 참모본부도 많이 고생했어... 확실히 끌어들인 후
소모시킨다는 계획이 맞아들어가는 것인가?"
"그렇다 해도 단번에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은 아니라도 봐요. 실버애로우에도
분명이 우리의 장기적인 전략을 눈치채는 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되려 그들이 버티면서 우리에게 소모전을 강요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긴... 나도 확실히 단판에 끝날 승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식으로
대여섯번 정도 병력을 끌어내고 끌어내면서 적의 헛점을 노리는게 유리한
방법이겠지. 너는 이번 대치가 어떻게 끝날 것으로 생각되느냐?"
"생각보다 싱거울 것 같아요. 아무리 병력차가 2배가 된다지만 각기 6자리수를
넘어 합쳐서 7자리 수에 육박하는 병력이 모여 있어요. 팬드래건의 아크론 국왕은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더군요. 확실한 승세가 점쳐지지 않으면 먼저 공격할
가능성은 적어요. 우리야 원래 전면대치는 절대 피하자는 주의니깐 먼저 도발할
일이 없을 것이고... 결론적으로 양군이 서로 노려보며 대치를 하다 적당히
월동준비할 때쯤 해서 싱겁게 퇴각할겁니다."
칼대제는 아이린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월동준비라... 그렇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온다. 그러나 그는 그 겨울이 다가옴이 하루하루 두려워 지기 시작했다
마음의 병이나 육체적인 상처는 이제 거의 완연한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낫지 않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마의 사이클이었다.
사이럽스 지역에서 팬드래건의 별동대의 소년검사에게 작렬하는 검기를 얻어 맞은
이래 그의 그리마의 사이클은 현저하게 불규칙해졌다. 그것은 황족들에게 있어서
피의 흐름이 점차 붕괴되어 간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였다. 칼대제는 억지로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고통을 참으며 견뎌왔다. 그러나...
과연 겨울까지 자신이 버틸수 있을지 그는 깊은 회의에 빠져들곤 하는 것이다.
그는 죽어서는 안되었다. 전장에서 제국의 오랜 숙적 실버애로우의 팬드래건과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은 그의 죽음에 크게 동요할 것이고 그 동요는
적에게 이로운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은 현재 제국의 앞날에 있어서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악몽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는 보고 싶었다. 자신이 거칠게 내몰았던
자신의 아들과 이제 없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 자신의
며느리가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손주도
보고 싶었다. 아들에게는 미처 쏟아주지 못했던 애정을 손주들에게는 마음껏
쏟아줄 자신도 있었다. 이제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몸은 그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자꾸만 붕괴되어 가는 그의
몸의 그리마의 흐름에 그는 나날이 절망에 쌓여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미 예전에 죽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삶에 대한 애절한 집착이
그를 지금껏 살아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여기서 쉬었다 가자구나."
산책을 하던 도중 대제는 후원의 한 작은 나무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따르듯 아이린도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대제는 망연히 떨어지는
낙옆들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던 삶의 반추를 정리하듯 떨어지는 구나..."
"찾아올 봄의 부활을 위해 더 빛나기 위한 은퇴랍니다."
"그런가... 하지만 모든 것이 다시 빛날수는 없지. 영원히 사라지는 빛도
있는 거란다. 그것은 그 무엇도 피할수 세상의 진리지..."
"아버님..."
어느새 아버님이라는 말에 익숙해진 아이린이었다. 그런 아이린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대제는 말했다.
"님같은건 붙이지 말거라. 넌 이미 며느리라기 보다는 내 딸이다... 가능하다면
조금만 더 너를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그럼 이리 지는 삶의 끝자락이
서글프지는 않았을지도 몰랐을 거늘..."
"힘을 내세요... 이제 곧 태자도 돌아올 겁니다. 그러면 잠시 전장은 미뤄두고
황궁에 머물게 하면서 같이 지내세요. 그러면 기분도 마음도 훨씬 좋아지실겁니다
아! 차라리 아버님 기쁘시게 저희 둘이 일찍 결혼하는 건 어떨까요? 그럼
손주보시는 것도 훨씬 빠르실거고 그이도 지금처럼 전장에서 하염없이 머무르지는
않을텐데요..."
칼대제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이 아이도 뭔가 눈치채고 있었군.' 그러나 삶의
큰 미련은 없다. 그는 아이린을 보며 말했다.
"아이린..."
"네 아버님..."
"부탁이 한가지 있다."
"무엇이든지... 제가 할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아니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나를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아빠라고 불러다오."
순간 아이린은 목이 매이는 것을 느꼈다. 가라드 대공에게 조차 단 한번도 불러
보지 못한 그 말... 어린 시절 그토록 마음껏 불러보고 싶었던 아빠라는 말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불러달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녀는 감격에
목이 매여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그래... 그렇게..."
"아빠... 아빠!"
그녀는 천천히 책을 읽듯이 말하다 결국 큰 소시로 아빠라고 외친 뒤 칼대제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눈에선 감격과 슬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아이린을
대제는 조용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 고맙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맙다........"
소리가 점차 작아들며 등을 토닥이던 손동작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끝내
칼대제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숨을 거두었음을 고요해진 숨결을 듣고
알게도니 아이린의 서글픈 곡소리와 황급히 달려오는 게하르트와 스틸하트의
장면위로 제국의 앞날을 예견하듯 피빛으로 새빨갛게 물든 낙옆이 떨어져 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