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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상대경(行常帶經)
외출 할 때 항상 경서를 가지고 다닌다는 뜻으로, 학문에 열심히 노력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行 : 다닐 행(行/0)
常 : 항상 상(巾/8)
帶 : 두를 대(巾/8)
經 : 경서 경(糹/7)
출전 : 사기(史記) 유림전(儒林傳)
이 성어는 한(漢)나라 초기에 상서(尚書; 書經)에 능통했던 예관(兒寬)이라는 학자가 행위를 표현한 말이다. 사기(史記) 유림전(儒林傳) 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본 편은 전한(前漢) 때 유학(儒學)의 발전과정과 다수의 유학자들에 대한 전기이다. 유림(儒林)은 '공자(孔子)를 숭상하고 유교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한 무제(漢 武帝)가 유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오경박사(五經博士)‧박사제주(博士祭酒)를 신설하여 유학자들을 우대함으로써 유학이 융성하기 시작했다.
이 편에서는 유학의 발전과정을 설명하고, 유학을 발전시킨 인물들에 대한 전기로 사마천이 기술한 주요 인물로는 신공(申公), 왕장(王臧), 조관(趙綰), 원고생(轅固生), 한영(韓嬰), 복생(伏生), 동중서(董仲舒), 호무생(胡毋生) 등이다.
이 장은 상서(尙書)에 능통한 복생(伏生)과 예관(兒寬), 예경(禮經)에 능통한 사람들로 고당생高堂生), 서생(徐生) 등과 역경(易經)에 능통한 사람들인 상구(商瞿) 등의 단편적인 일들을 기록한 내용이다.
15. 兒寬(예관)
伏生教濟南張生及歐陽生, 歐陽生教千乘兒寬.
복생(伏生)은 제남의 장생(張生)과 구양생(歐陽生)을 가르쳤고, 구양생은 천승 사람 예관(兒寬)을 가르쳤다.
兒寬既通尚書, 以文學應郡舉, 詣博士受業, 受業孔安國.
예관이 '상서'를 통달한 후 문학으로서 군의 천거에 응대하여 박사 학문을 배우러 나아가 공안국에게 학문을 배웠다.
兒寬貧無資用, 常為弟子都養, 及時時閒行傭賃, 以給衣食.
예관은 가난하여 쓸 재물이 없어 항상 제자(함께 공부하는 동료)들의 밥을 지었고, 때때로 한가할 때 품을 팔아 의식을 공급하였다.
行常帶經, 止息則誦習之. 以試第次, 補廷尉史.
항상 경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머물러 쉴 때는 곧 외우고 익혔다. 시험 석차로 정위사(廷尉史)에 보임되었다.
是時張湯方鄉學, 以為奏讞掾, 以古法議決疑大獄, 而愛幸寬.
이때 장탕(張湯)이 향학을 방문하여 주얼연(奏讞掾; 정위에 속하여 죄인에 대한 형사 소송 판결을 돕던 벼슬)을 삼아 옛 법으로 의심나는 큰 옥사를 평의하여 결단하게 하였는데 예관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寬為人溫良, 有廉智, 自持, 而善著書書奏, 敏於文, 口不能發明也. 湯以為長者, 數稱譽之.
예관은 사람됨이 온화하고 선량하며 첨렴하고 지혜로웠는데 글을 짓는 것과 천자에게 글로 아뢰는 것을 잘하며 문장에 민첩하였으나 입으로는 잘 말하지 못하였다. 장탕이 훌륭하다 여겨 여러 번 칭찬하였다.
及湯為御史大夫, 以兒寬為掾, 薦之天子. 天子見問, 說之.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자 예관을 하급관리로 삼고 천자에게 추천하였다. 천자가 만나 물어 보고는 기뻐하였다.
張湯死後六年, 兒寬位至御史大夫. 九年而以官卒.
장탕이 죽고 나서 6년 후 예관의 지위가 어사대부에 이르렀다. 9년으로 관직에 있으면서 죽었다.
寬在三公位, 以和良承意從容得久, 然無有所匡諫.
예관은 삼공의 지위에 있었으나 온화하고 선량하며 남의 뜻을 공경하고 따르고 용납하여 오래할 수 있었으나 바로잡고 간쟁하는 바가 없었다.
於官, 官屬易之, 不為盡力. 張生亦為博士.
관직에 있을 때 관속들이 그를 쉽게 여겨 힘을 다하지 않았다. 장생(張生) 또한 박사가 되었다.
而伏生孫以治尚書徵, 不能明也.
복생(伏生)의 손자가 '상서(尚書)'를 다루는 것으로 불려 왔으나 밝히지는 못하였다.
예관(兒寬)은 전한 중기의 관료로, 천승군 천승현(千乘縣) 사람이다. 생애 구양생의 밑에서 '서경'을 배웠고, 이후 공안국의 가르침을 받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른 제자들의 밥을 짓는 일을 맡았고, 때로는 날품을 팔기도 하였다.
예관은 온후하고 청렴하며 또 지혜로웠고, 글짓기를 잘하였으나 말솜씨는 좋지 않았다. 정위 장탕은 법률에 밝은 자를 속관으로 두었었는데, 예관은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위에 딸린 가축을 치는 일을 맡았다.
한편 정위의 안건 중 두 번이나 물리쳐진 상주문이 있었는데, 예관이 이를 훌륭히 고쳐 관원들은 이를 장탕에게 알렸다. 장탕은 예관을 연(掾)으로 삼았고, 그의 상주문은 모두 재가하였다. 무제 또한 이를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에 장탕은 예관을 무제에게 소개하였고, 또 그를 중용하였다.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었을 때 예관은 그의 연이 되었으며, 시어사(侍御史)로 추천되었다. 이후 중대부(中大夫)로 발탁되었고, 원정 4년(기원전 113년) 좌내사로 승진하였다.
예관은 농업을 장려하고 형벌을 가볍게 하여 민심을 얻었고, 이때문에 관원과 백성들은 그를 크게 신뢰하였다. 세금을 거둘 때에는 농번기를 피하였고 또 가난한 집의 경우에는 징수를 유예하였기 때문에, 수입이 적었다.
이후 군무로 인하여 황실에서 조세 수입을 살폈을 때 적다는 이유로 파면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백성들이 예관을 위하여 앞다투어 세금을 냈기 때문에 좌내사는 도리어 가장 세금이 많이 거두어진 곳이 되었다. 무제는 더욱 예관을 중하게 여겼다.
훗날 무제는 봉선 의식을 거행하려 하였는데, 유학자들에게 제도에 대해 자문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예관은 이에 대하여 봉선 제도는 군신이 정할 바가 아니라고 설파하였고,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원봉 원년(기원전 110년), 예관은 어사대부로서 태산에서 무제의 봉선 의식을 수행하였다. 예관은 어사대부로 있는 동안 온화한 성품으로 무제의 총애를 받아 자리를 오래 보전하였지만, 일을 바로잡기 위해 간언하는 일이 없어 부하들은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태초 3년(기원전 102년), 재임 중 죽었다. 예관은 예전에 중죄를 지어 죽게 된 적이 있었는데, 한열은 무제가 예전에 오구수왕을 죽이고 후회한 것을 이야기하며 그를 변호였다. 무제는 한열의 말을 듣고 형벌을 감면해 주었고, 예관은 훗날 어사대부가 되었다.
나만 열심히 한다고 안 되는 인생, 공자를 보라
공자(孔子)의 오십 대는 신산스러웠다. 그의 벼슬길은 번번이 막혔다. 주변의 경계와 시기 탓이었다. 나이 오십 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조국 노(魯)나라 도읍의 장관 자리에 올랐다. 공자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임용된 지 1년 만에 주변 나라들이 모두 그의 다스림을 본받을 정도였다. 고속 승진을 거듭한 그는 사공(司空)이 됐다가, 다시 대사구(大司寇)로, 마침내 노나라 재상의 자리까지 거머쥐었다. 공자의 나이 56살 때 일이다.
뒤늦게 오른 벼슬길, 짧았던 관직 생활
그가 다스린 지 3개월 만에 노나라에서는 바가지를 씌우던 상인이 사라졌다. 치안도 안정됐고 관리들이 나라 밖으로 나가는 물자를 허가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만큼 노나라의 형편이 좋아졌다. 하지만 공자 인생의 꽃길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웃 나라에서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정치공작을 펼친 탓이었다. 공자는 허망하게 관직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무려 14년 동안 자기의 뜻을 펼칠 만한 나라를 찾아 천하를 떠돌기만 했다. 어떤 곳에서도 그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위(衛)나라에서 내뱉은 공자의 한탄이다. "어떤 곳이라도 좋다. 내게 정치를 맡겨준다면 1년 동안 나라의 기초를 놓고, 3년 만에 국가를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 자신을 몰라주는 세상에 조급해하는 장년 남자의 조급함이 느껴진다. 68살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그는 마음을 내려놓고 고향 노나라로 돌아온다. 남은 생애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보냈다.
경력으로만 보자면, 공자는 성공보다 실패한 삶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志于學). 서른에 삶을 오롯이 세웠으며(而立), 마흔 살에 이르러 미혹됨이 없어졌다(不惑). 쉰에 천명을 깨달았고(知天命), 예순에는 무슨 말을 들어도 화가 나지 않게 되었으며(耳順), 일흔에 이르자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경우에서 벗어나는 일이 사라졌다(從心所欲不踰矩)."
칠십에 이른 공자가 스스로 정리한 자신의 한평생이다. 여기서 실패자의 후회나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부단히 성장하며 무르익은 '좋은 삶'으로 다가올 뿐이다. 일단 인생 전반부는 우리가 잘 살았다고 여기는 표준 인생 진도표 그 자체다. 십 대 때 열심히 공부했고, 서른 살에 삶의 터전을 닦았으며 자기 분야에서 우뚝 서기 위해 잘 버텨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오십 이후에는 당연히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경지에 다다라야 하지 않을까?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것
그러나 오십 줄에 접어든 이들은 안다. 세상사는 나만 열심히 한다고 잘되지 않는다. 아무리 아득바득해도 스러져버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런 현실에 좌절해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가버리는 이가 한둘이던가. 승진에서 밀려서, 정리해고를 당해서, 사업이 실패해서 주눅 들고 움츠러든 중년이 얼마나 많은지 떠올려 보라.
공자는 달랐다. 그는 뜻이 꺾이는 과정 또한 ‘하늘의 뜻’이라며 곱씹었을 뿐이다. 사람은 성공을 통해서 배우지 않는다. 패배의 고통을 통해 겸손을 익히고 부족한 점을 다듬으며 좋은 사람으로 거듭난다. 시련을 겪은 뒤 어떤 이는 깊은 이해심과 포용력을 갖춘 인격으로 나아간다.
반면, 어떤 자들은 상처를 곱씹으며 성품이 더욱 강퍅하고 거칠게 굳어질 뿐이다. 삶에서 꺾임과 좌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를 트라우마로 아파하기만 하느냐, 성장통으로 여기며 삶을 아름답게 가꾸느냐는 인생 후반부를 가르는 변곡점이다.
이 점에서 공자는 우리에게 훌륭한 롤모델이 될 만하다. 한계에 부딪힌 공자는 하늘이 허락한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마침내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떤 일에도 좀처럼 화가 나지 않는 경지로, 마침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까지 나아갔다.
세상사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노력하면 좋은 인품을 갖출 수 있다. 공자는 이를 자기 삶으로 보여줬다. 공자의 삶이 최상이라는 설명에 이렇게 묻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거 그냥 인생 패배자의 ‘정신 승리’ 아니에요?" 그렇지 않다. 공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서른 다섯에 그는 마침내 제(齊)나라 군주의 눈에 들었다. 면담 자리에서 군주가 물었다.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오?" 공자가 당당하게 답한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고, 자식은 자식다우면 됩니다(君君臣臣父父子子)."
당연한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시대에는 이 지당한 말이 특별했다. 온갖 꼼수와 편법이 판을 치던 혼란기 아니었던가. 공자는 예법 전문가답게 예의를 갖추며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맺고, 여기에 맞추어 모두가 마땅하고 정당하게 처신한다면 천하가 조화롭게 굴러가리라 믿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세상을 바로잡았다. "자네가 파견되는 지방은 거친 사람이 많아 다스리기 쉽지 않아. 내 말을 명심하게. 늘 공경하는 태도로 대하시게나. 그러면 난폭한 이들도 반드시 따라올걸세. 너그럽고 공정한 자세를 지키면 백성도 당연히 그대를 따를 테고. 이 두 가지로 민심을 다독인다면 자네는 우러름을 받게 될 거야." 관리가 되어 떠나는 제자 자로(子路)에게 공자가 해준 충고다. 공자의 처세술도 이와 같았다.
최선을 다하며 남을 배려하는 삶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도 말한다. "나의 길은 하나로 꿰어져 있다(一以貫之).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야 할 그 길을 일관되게 걸어왔다. 그 길을 두 글자로 간추리자면 충(忠)과 서(恕)다." '충(忠)'은 무엇을 하건 오롯이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 '서(恕)'란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이다.
공자는 평생 '서'를 실천하려 노력했다고 거듭 강조하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그는 '성실하고 경우 바른 사람'이었다. 이런 태도로 사는 이들은 윗사람의 눈에 들기 마련이다. 너무나 존경스럽기에 아랫사람들도 저절로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겠다. 이렇듯 공자에게는 출세하기 위한 처세술과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는 방법이 똑같았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너무나 잘 통하는 곳이다. 맑고 고운 이와 경쟁하는 자들은 그를 질투하고 시기한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이 그이에게 쏠리는 탓이다. 그래서 온갖 뒷말과 험담으로 그를 깎아내린다. 심지어 공자를 쓰고 싶은 군주들까지 그를 경계했다.
다른 신하들의 반발이 저어됐을 뿐더러, 공자가 자신보다 더 인정받고 주목받는 현실 또한 마음 편치 않았다. 공자가 오십이 되도록 주요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이유, 절정의 행정 능력을 보이고도 이내 밀려나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아야 했던 까닭이다.
공자는 번번이 기회를 놓쳤고 애써 얻은 자리에서도 밀려났다. 어떨 때는 올곧지 못한 자리 제안에 마음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모두를 겪으며 하늘의 뜻을 깨달아갔다. 진정한 지혜는 느낄 것 다 느끼고, 겪어야 할 것을 다 겪으며 자라나는 법이다. 공자도 그랬다.
공자와 제자들, 특히 애제자 안회(顔回)와 나눈 대화다. "훌륭한 농부가 씨를 잘 뿌렸어도 반드시 좋은 수확을 얻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군자가 마음을 잘 닦아 세상을 다스릴 규범을 만든다 해도, 세상이 꼭 받아주지는 않는다." "스승님은 스승님의 길을 가셔야 합니다. 우리가 게을러 길을 닦지 않았다면 창피한 일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노력했는데도 등용되지 않는다면 되레 권력자들이 수치스러워해야 합니다. 지금의 현실에서는 외면 받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군자에게는 자랑스러워할 일입니다."
공자는 오십에 크게 꺾였지만, 이는 오히려 존경받는 성인(聖人)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그러니 치열하게 살았음에도 세상에서 밀려난 중년이여, 슬퍼할 이유가 없다. 그대는 이제 진정 내면을 닦아 좋은 사람이 될 또 다른 기회를 얻었을 따름이다.
오십은 군자가 되기 위해 시작하는 나이
공자의 말씀을 정리한 '논어'의 유명한 첫 구절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세상이 나를 몰라주어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라 할 만하지 않은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중년인 그대는 어떠한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공부하며 마음을 닦고 있는가? 오십은 인문학이 다가오는 나이다. 온화한 인품을 갖춰서 친구들이 절로 자신을 찾아오는가? 세상이 나를 몰라줘도, 이미 훌륭한 사람이 돼가기에 세상 평판에 신경 쓰지 않게 됐는가?
이 물음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면 그대의 인생은 희망적이다. 하늘의 뜻을 깨닫는 오십은 내면에 눈을 돌려 군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시작할 나이다. 이순(耳順)을 향해 나아가는 그대에게 응원을 보낸다.
史記列傳 儒林列傳
14. 복생(伏生) : 복승(伏勝)
伏生者, 濟南人也. 故為秦博士. 孝文帝時, 欲求能治尚書者, 天下無有, 乃聞伏生能治, 欲召之. 是時伏生年九十餘, 老, 不能行, 於是乃詔太常使掌故晁錯往受之. 秦時焚書, 伏生壁藏之. 其後兵大起, 流亡, 漢定, 伏生求其書, 亡數十篇, 獨得二十九篇, 即以教于齊魯之閒. 學者由是頗能言尚書, 諸山東大師無不涉尚書以教矣.
복생(伏生)은 제남(濟南) 사람이다. 예전에 진(秦)나라에서 박사를 지냈다. 문제 때 '상서(尙書)'에 능한 자를 구하고자 했으나 천하에 아무도 없었으며, 복생이 '상서'를 연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서 등용하고자 했다. 당시 복생의 나이는 구십여 세에 달할 정도로 늙어서 걸어 다닐 수가 없을 지경이었으므로, 이에 문제는 태상에게 조서를 내려 장고(掌故)인 조조(晁错)를 복생에게 보내 그의 학문을 전수받도록 했다. 진나라의 분서갱유 때 복생은 벽속에 '상서'를 감추었다. 그 후 전란이 크게 일어나자 복생은 떠돌아다니다가 한(漢)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자 복생은 감추었던 '상서'를 찾았으나, 몇 십 편이 분실되고 단지 29편만을 찾아내어, 이것으로 제와 노나라 일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자들은 이로 말미암아 자못 '상서'를 강론할 수 있었고, 산동(山東)의 저명한 학자들은 '상서'를 섭렵하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다.
15. 예관(兒寬)
伏生教濟南張生及歐陽生, 歐陽生教千乘兒寬. 兒寬既通尚書, 以文學應郡舉, 詣博士受業, 受業孔安國. 兒寬貧無資用, 常為弟子都養, 及時時閒行傭賃, 以給衣食. 行常帶經, 止息則誦習之. 以試第次, 補廷尉史. 是時張湯方鄉學, 以為奏讞掾, 以古法議決疑大獄, 而愛幸寬. 寬為人溫良, 有廉智, 自持, 而善著書 書奏, 敏於文, 口不能發明也. 湯以為長者, 數稱譽之. 及湯為御史大夫, 以兒寬為掾, 薦之天子. 天子見問, 說之. 張湯死后六年, 兒寬位至御史大夫. 九年而以官卒. 寬在三公位, 以和良承意從容得久, 然無有所匡諫; 於官, 官屬易之, 不為盡力. 張生亦為博士。而伏生孫以治尚書徵, 不能明也.
복생은 제남 사람인 장생(張生)과 구양생(歐陽生)을 가르쳤고, 구양생은 천승(千乘) 사람인 예관(兒寬)을 가르쳤다. 예관은 '상서'에 정통한 뒤 문학(文學)으로 군(郡)의 천거를 받아 박사에게 가서 수업을 받았는데, 공안국(孔安國)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예관은 집안이 가난해 학비를 댈 돈이 없어서 항상 제자들 모두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고, 이따금 남몰래 밖에 나가 허드렛일을 해서 돈을 벌어 입을 옷과 먹을 것을 충당했다. 그는 일을 나갈 때에도 항상 경서를 지니고 있다가 휴식 때가 되면 책을 암송하여 익혔다. 그 후 시험 성적의 석차에 의해서 정위(廷尉)의 사관(史官)으로 보충 되었다. 이때 장탕(張湯)은 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예관을 자신의 주언연(奏讞椽)으로 삼았는데, 그로 인하여 옛날 법으로써 의심스럽고 해결하기 어려운 큰 송사(訟事)를 판결할 수 있게 되자 예관을 총애했다. 예관은 사람됨이 온화하고 선량하며 청렴결백하고 지혜가 있으며 자기의 분수를 알았으며, 글 짓는 능력이 좋아 상주문을 작성할 때에 영민한 문장력이 지니고 있었으나 말주변이 없어 자기 생각을 명백하게 표명하지 못했다. 장탕은 그를 덕망이 있는 인물로 생각하고 자주 그를 칭찬했다.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자 예관을 그의 속관(屬官)으로 삼으려고 천자에게 천거했다. 천자는 예관을 만나 질문해 보고 기뻐했다. 장탕이 죽은 뒤 6년 만에 예관은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9년 동안 재직하다가 죽었다. 예관은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온화하고 어진 성품으로 천자의 뜻을 받들어 분규를 침착하게 해결하여 오랫동안 그 자리를 유지했으나 황제에게 올바른 간언을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재직 기간 중에 부하 관원들은 그를 얕잡아 보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일하지 않았다. 장생 또한 박사가 되었다. 복생의 손자도 <상서>를 잘 안다고 해서 초빙했으나 그는 '상서'의 취지를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다.
16. 공안국(孔安國)
自此之後, 魯周霸 孔安國, 雒陽賈嘉, 頗能言尚書事. 孔氏有古文尚書, 而安國以今文讀之, 因以起其家. 逸書得十餘篇, 蓋尚書滋多於是矣.
그 이후에 노나라의 주패(周霸)와 공안국(孔安國)과 낙양(雒陽)의 가가(賈嘉)등이 자못 '상서'에 능통하였다고 언급되었다. 공안국의 집안에는 고문(古文) '상서(尙書)'가 있었는데, 그는 이를 가지고 금문(今文)으로 풀어서 읽었는데, 이로 인하여 그의 학파가 생길 정도였다. 그는 유실되었던 '상서'의 10여 편을 추가하였는데, 아마도 이 때부터 '상서'의 편목이 많아지게 되었다.
17. 고당생(高堂生)
諸學者多言禮, 而魯高堂生最本. 禮固自孔子時而其經不具, 及至秦焚書, 書散亡益多, 於今獨有士禮, 高堂生能言之.
여러 학자들이 많이 '예경(禮經)'을 해설하였으나 노나라의 고당생(高堂生)의 견해가 가장 본의에 가까웠다. '예경'은 본래 공자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경전이 갖추어지지 못했고, 진나라의 분서갱유 이후에 책이 흩어져 없어진 내용이 더욱 많아졌다. 지금에는 오직 <사례(士禮)>만이 남아있지만, 고당생이 이에 능통하다고 일컬어졌다.
18. 서생(徐生)
而魯徐生善為容. 孝文帝時, 徐生以容為禮官大夫. 傳子至孫延 徐襄. 襄, 其天姿善為容, 不能通禮經; 延頗能, 未善也. 襄以容為漢禮官大夫, 至廣陵內史. 延及徐氏弟子公戶滿意 桓生 單次, 皆嘗為漢禮官大夫. 而瑕丘蕭奮以禮為淮陽太守. 是後能言禮為容者, 由徐氏焉.
그리고 노나라의 서생(徐生)은 예절의식에 대해서 해박했다. 문제 때 서생은 예관대부(禮官大夫)를 담당했다. 그는 예절의식을 아들인 서연(徐延)과 손자인 서양(徐蘘)에게 전수했다. 서양(徐蘘)은 천성적으로 예절의식에는 재간이 있었으나 '예경(禮經)'에 대해서는 능통하지 못하였고, 서연(徐延)은 자못 '예경'에 대해서 능통했으나 예절의식을 잘 알지 못했다. 서양은 예절의식으로써 한나라의 예관대부가 되었고, 광릉내사(廣陵內史)의 관직에 이르렀다. 서연과 서씨의 제자인 공호만의(公戶滿意), 환생(桓生), 선차(單次)는 모두 일찍이 한나라 예관대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하구(瑕丘)의 소분(蕭奮)은 <예경>에 능통하여 회양태수(淮陽太守)가 되었다. 이후로 <예경>과 예절의식을 강론할 수 있는 자들은 서씨 일가로부터 나왔다.
19. 상구(商瞿)
自魯商瞿受易孔子, 孔子卒, 商瞿傳易, 六世至齊人田何, 字子莊, 而漢興. 田何傳東武人王同子仲, 子仲傳菑川人楊何. 何以易, 元光元年徵, 官至中大夫. 齊人即墨成以易至城陽相. 廣川人孟但以易為太子門大夫. 魯人周霸, 莒人衡胡, 臨菑人主父偃, 皆以易至二千石. 然要言易者本於楊何之家.
노나라 상구(商瞿)가 공자에게 '역경(易經)'을 전수받았고,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상구는 '역경'을 여섯 세대까지 전수하여 제나라의 전하(田何)에게 이르렀고, 전하의 자(字)는 자장(子莊)이었으며 그후 한(漢)나라가 건립되었다. 전하는 동무(東武) 사람인 자(字)가 자중(子仲)인 왕동(王同)에게 전수하였으며, 자중은 치천(菑川)사람인 양하(楊何)에게 전수하였다. 양하는 '역경'에 능통하여 원광(元光) 원년(기원전 134년)에 조정으로 초빙되어 관직이 중대부(中大夫)에 이르렀다. 제나라 사람인 즉묵성(卽墨成)은 '역경'에 능통하여 성양(城陽)의 국상(國相)이 되었고, 광천(廣川) 사람인 맹단(孟但)도 <역경>에 능통하여 태자문대부(太子門大夫)가 되었다. 노나라 출신인 주패(周霸), 거(莒) 출신의 형호(衡胡), 임치(臨菑) 출신의 주보언(主父偃) 등은 모두 '역경'에 능통하여 녹봉 2천석을 받는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역경'의 중요한 내용을 강론하는 자는 모두 양하 일가의 학설에 바탕을 두었다.
▶️ 行(행할 행, 항렬 항)은 ❶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彳(척; 왼발의 걷는 모양)과亍(촉; 오른발의 걷는 모양)의 합자(合字)이다. 좌우의 발을 차례로 옮겨 걷는다의 뜻을 나타낸다. 또는 네거리, 굽지 않고 바로 가는 일, 나중에 가다, 하다란 뜻과 항렬(行列), 같은 또래란 뜻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❷상형문자로 行자는 '다니다'나 '가다', '돌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行자는 네 방향으로 갈라진 사거리를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行자를 보면 네 갈래로 뻗어있는 사거리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나 마차가 다니던 사거리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行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길'이나 '도로', '가다'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行자는 한쪽 부분이 생략된 彳(조금 걸을 척)자가 쓰일 때가 있는데, 이는 彳자 자체가 별도의 부수 역할을 하는 경우로 역시 '가다'라는 뜻을 전달한다. 참고로 行자가 '항렬'이나 '줄'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항'으로 발음을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行(행, 항)은 (1)글의 세로 또는 가로의 줄 (2)길을 감. 군자(君子)는 대로(大路) (3)행동(行動) (4)한시(漢詩)의 한 체 (5)당(唐)나라에서는 한 곳에 집중되어 있던 동업 상점의 조합, 또는 도매상, 중간 업자 혹은 단순히 상점을 가리킴. 은행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음 (6)어떤 지명(地名)이나 시간 아래에 붙이어 그리로 감, 어떤 곳으로 감의 뜻을 나타내는 말 (7)일체의 유동(流動), 제행(諸行)하며 변화하는 존재. 현상 (8)십이 인연(因緣)의 하나. 과거세(過去世)에서 신(身), 구(口), 의(意) 세 업(業)으로 지은 선악 일체의 본원적 생명 활동. 십이 인연(因緣) (9)수행(修行) (10)실천. 행위. 인간적인 행동(知, 智) (11)칠사(七祀)의 하나. 도로와 행작(行作)을 주장하는 궁중의 작은 신(神) (12)조선시대 때 관계(官階)가 높고 관직(官職)이 낮은 경우에 벼슬 이름 위에 붙여 일컫던 말. 가령 종1품(從一品) 숭정 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정2품(正二品)의 관직인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면,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崇政大夫行李曹判書)라 했음 등의 뜻으로 ①다니다, 가다 ②행하다, 하다 ③행하여지다, 쓰이다 ④보다, 관찰하다 ⑤유행하다 ⑥돌다, 순시하다 ⑦늘다, 뻗다 ⑧장사(葬事)지내다 ⑨시집가다 ⑩길, 도로, 통로 ⑪길, 도로를 맡은 신(神) ⑫고행(苦行), 계행(戒行) ⑬행실(行實), 행위(行爲) ⑭여행(旅行), 여장(旅裝: 여행할 때의 차림) ⑮행직(行職: 품계는 높으나 직위는 낮은 벼슬을 통틀어 이르는 말) ⑯일 ⑰행서(行書), 서체(書體)의 하나 ⑱시체(詩體)의 이름 ⑲장차, 바야흐로 ⑳먼저, 무엇보다도 그리고 항렬 항의 경우는 ⓐ항렬(行列)(항) ⓑ줄, 대열(隊列)(항) ⓒ열위(列位), 제위(諸位)(항) ⓓ항오(行伍), 군대의 대열(隊列)(항) ⓔ순서(順序), 차례(次例)(항) ⓕ같은 또래(항) ⓖ직업(職業)(항) ⓗ점포(店鋪), 가게(항) ⓘ깃촉(항) ⓙ의지(意志)가 굳센 모양(항) ⓚ늘어서다(항) ⓛ조잡하다(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할 위(爲), 옮길 이(移),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지(知), 말씀 언(言), 말씀 어(語)이다. 용례로는 길 가는 사람을 행인(行人), 동작을 하여 행하는 일을 행동(行動), 여럿이 벌이어 줄서서 감을 행렬(行列), 가는 곳을 행선(行先), 물건을 가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파는 일을 행상(行商), 실지로 드러난 행동을 행실(行實), 정치나 사무를 행함을 행정(行政), 체면에 어그러지도록 버릇 없는 짓을 함을 행패(行悖), 법령의 효력을 실제로 발생 시킴을 시행(施行), 관례대로 행함을 관행(慣行), 앞으로 나아감 또는 일을 처리해 나감을 진행(進行), 계획한 대로 해 냄을 수행(遂行), 일을 잡아 행함을 집행(執行), 약속이나 계약 등을 실제로 행하는 것을 이행(履行), 절뚝거리며 걸어감이나 균형이 잡히지 않음을 파행(跛行), 자기의 거주지를 떠나 객지에 나다니는 일을 여행(旅行), 방자하게 제 멋대로 행함 자행(恣行),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아울러 행함을 병행(竝行), 차량 등이 정해진 노선에 따라 운전하여 나감을 운행(運行), 출판물이나 돈이나 증권 채권 따위를 만들어 사회에 널리 쓰이도록 내어놓음을 발행(發行), 강제로 행함을 강행(强行), 몸으로 움직이는 모든 것을 이르는 말을 행동거지(行動擧止), 지식인이 시세에 응하여 벼슬에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설 줄도 아는 처신의 신중함을 일컫는 말을 행장진퇴(行藏進退), 길을 가는 데 지름길을 취하지 아니하고 큰길로 간다는 뜻으로 행동을 공명정대하게 함을 비유하는 말을 행불유경(行不由徑),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이라는 뜻으로 다른 힘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 그대로 유유히 움직이는 모양 곧 자연에 맡기어 행동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행운유수(行雲流水), 타향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병들어 죽음을 일컫는 말을 행려병사(行旅病死), 길에서 만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행로지인(行路之人), 걸어가는 송장과 달리는 고깃덩이라는 뜻으로 배운 것이 없어서 쓸모가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행시주육(行尸走肉), 그 해의 좋고 언짢은 신수를 일컫는 말을 행년신수(行年身數), 간 곳을 모름을 일컫는 말을 행방불명(行方不明), 일을 다하고도 오히려 남는 힘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행유여력(行有餘力),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남쪽으로 날아감을 일컫는 말을 행안남비(行雁南飛) 등에 쓰인다.
▶️ 常(떳떳할 상/항상 상)은 ❶형성문자로 㦂(상)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수건 건(巾; 옷감, 헝겊)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尙(상; 더하다)으로 이루어졌다. 아랫도리에 입는 속바지 위에 받쳐 입는 긴 치마라는 뜻에서 길다, 전(轉)하여 오래 계속하다, 항상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常자는 '항상'이나 '일정하다', '변함없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常자는 尙(오히려 상)자와 巾(수건 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常자는 본래는 '치마'를 뜻했던 글자였다. 그래서 常자는 집을 그린 尙자에 '천'이라는 뜻을 가진 巾자를 결합해 집에서 항시 두르고 있던 옷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집에서 항시 편하게 입는 옷이라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후에 '항상'이나 '변함없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은 尙자에 衣(옷 의)자가 더해진 裳(치마 상)자가 '치마'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常(상)은 ①떳떳하다 ②항구(恒久)하다, 영원(永遠)하다 ③일정하다 ④범상하다, 예사롭다, 평범하다 ⑤숭상(崇尙)하다 ⑥(변함없이)행하다 ⑦항상(恒常), 늘, 언제나 ⑧늘 ⑨일찍이(=嘗), 애초에 ⑩도리(道理) ⑪법도(法道), 규율(規律), 통례(通例) ⑫평소(平素), 평상시(平常時) ⑬범상(凡常) ⑭길이의 단위(單位) ⑮천자(天子)의 기(旗) ⑯나무의 이름 ⑰땅의 이름 ⑱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떳떳할 용(庸), 떳떳할 이(彛),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나눌 반(班)이다. 용례로는 일정한 직무를 늘 계속하여 맡음을 상임(常任), 항상 살고 있음을 상주(常住), 두루 많이 있는 일을 상례(常例), 늘 준비하여 둠을 상비(常備), 늘 고용하고 있음을 상용(常傭), 매일 일정한 시간에 근무함을 상근(常勤), 보통 때의 모양이나 형편을 상태(常態), 임시가 아닌 관례대로의 보통 때를 상시(常時), 일반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보통의 지식을 상식(常識), 날마다 보는 업무나 보통 업무를 상무(常務), 떳떳하고 바른 길을 상궤(常軌),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설비나 시설을 갖춤을 상설(常設), 늘 하는 버릇을 상습(常習), 일정한 직무를 늘 계속하여 맡음 또는 맡은 사람을 상임(常任),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을 심상(尋常), 내내 변함없이나 언제나 또는 자주나 늘을 항상(恒常), 날마다 또는 늘이나 항상을 일상(日常), 예사롭지 않고 특별함을 비상(非常), 정상이 아닌 상태나 현상을 이상(異常), 특별한 변동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정상(正常), 특별하지 않고 예사임을 통상(通常), 계속하여 그치거나 변하지 않음을 경상(經常),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을 범상(凡常), 괴이하고 이상함을 괴상(怪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인정 또는 생각을 이르는 말을 인지상정(人之常情), 인생이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무상(人生無常), 집에서 먹는 평소의 식사라는 뜻으로 일상사나 당연지사를 이르는 말을 가상다반(家常茶飯), 만년이나 오래도록 항상 푸르다는 뜻으로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말을 만고상청(萬古常靑), 덕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으로 마주치는 환경이나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수행에 도움이 됨을 이르는 말을 덕무상사(德無常師),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일정하지 않거나 일정한 주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반복무상(反覆無常), 열에 아홉이란 뜻으로 열 가운데 여덟이나 아홉이 된다는 뜻으로 거의 다 됨을 가리키는 말을 십상팔구(十常八九) 등에 쓰인다.
▶️ 帶(띠 대)는 ❶상형문자로 带(대), 帯(대)의 본자(本字), 带(대)는 간자(簡字)이다. 옛날 지위 높은 사람은 허리에 띠를 매고 그 전체를 帶(대)라 일컫고 늘어뜨린 부분(部分)만은 紳(신)이라 하였다. ❷회의문자로 帶자는 '띠를 두르다'나 '데리고 있다', '장식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帶자는 허리띠를 차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帶자에 쓰인 巾자는 몸에 두른 옷을 뜻하고 상단은 장식이 들어간 허리띠를 표현한 것이다. 장식이 들어간 허리띠는 옷고름을 정리하는 역할도 했지만,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래서 帶자는 '띠를 두르다'는 뜻 외에도 '장식하다'나 '꾸미다'는 뜻도 함께 갖게 되었다. 또 허리띠는 항시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데리고 있다'나 '붙어 다니다'와 같은 뜻도 파생되었다. 그래서 帶(대)는 (1)일부 명사(名詞) 뒤에 붙어 띠 모양의 부분이나 지역(地域), 지대(地帶)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일부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에 대항하는의 뜻을 나타내는 말 (3)어떤 화석(化石)이나 또는 화석군(化石群)에 의하여 특징 지어지는 지층(地層) 등의 뜻으로 ①띠(너비가 좁고 기다랗게 생긴 물건. 둘러매는 끈) ②뱀 ③근처(近處) ④지구 표면을 구분(區分)한 이름 ⑤띠를 두르다 ⑥장식(裝飾)하다 ⑦꾸미다 ⑧두르다 ⑨차다 ⑩데리고 있다 ⑪데리고 다니다 ⑫붙어 다니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함께 데리고 감을 대동(帶同), 어떤 폭幅으로써 정해진 범위를 대역(帶域), 좁고 길게 되어 띠와 같이 생긴 모양을 대상(帶狀), 부하나 식구나 제자 등을 거느림을 대솔(帶率), 다리에 동여매는 띠를 각대(脚帶), 물건을 손에 들거나 몸에 지님을 휴대(携帶), 어느 지역의 전부나 일원을 일대(一帶), 두 사람 이상이 같이 관계를 가짐을 연대(聯帶), 어떠한 행위의 이행에 있어서 두 사람 이상이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것을 연대(連帶), 끈이나 띠의 뜻에서 두 개의 것을 묶어서 연결을 맺게 하는 중요한 조건을 유대(紐帶), 어떤 한정된 땅의 구역의 안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지대(地帶), 주가 되는 것에 곁달아서 덧붙임을 부대(附帶), 허리띠로 바지 따위가 흘러내리지 아니하게 옷의 허리 부분에 둘러매는 띠를 요대(腰帶), 바지 따위가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의 옷 부분에 둘러매는 띠를 혁대(革帶), 두 가지 이상의 직무를 겸하여 봄을 겸대(兼帶), 열대와 온대의 사이에 걸쳐 있는 기후대를 난대(暖帶), 상처나 헌데 따위에 감는 소독한 얇은 헝겊 띠를 붕대(繃帶), 관절의 뼈 사이와 관절 주위에 있는 노끈이나 띠 모양의 결합 조직을 인대(靭帶), 허리띠를 느슨히 맨다는 뜻으로 긴장했던 마음을 풂의 비유를 완대(緩帶), 고귀한 사람을 모시고 다니는 하인을 이르는 말을 대솔하인(帶率下人), 옷의 띠와 같은 물이라는 뜻으로 좁은 강이나 해협 또는 그와 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접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일의대수(一衣帶水), 의복에 주의하여 단정히 함으로써 긍지를 갖는다는 말을 속대긍장(束帶矜莊), 높은 갓과 넓은 띠라는 뜻으로 신분에 걸맞지 아니한 의관 차림을 이르는 말을 고관광대(高冠廣帶) 등에 쓰인다.
▶️ 經(날 경)은 ❶형성문자로 経(경)의 본자(本字), 经(경)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실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巠(경; 세로로 곧게 뻗은 줄)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옷감 짜는 날실, 씨실인 緯(위)에 대하여 일컬음이다. ❷회의문자로 經자는 ‘'지나다'나 '다스리다', '날실'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經자는 糸(가는 실 사)자와 巠(물줄기 경)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巠자는 '물줄기'라는 뜻이 있지만, 본래는 베틀 사이로 날실이 지나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래서 '(날실이)지나다'는 뜻은 巠자가 먼저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巠자가 '물줄기'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여기에 糸자를 더한 經자가 '지나다'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經자는 후에 비단 실을 엮어 베를 짜듯이 기초를 닦고 일을 해나간다는 의미에서 '다스리다'나 '경영하다'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經(경)은 (1)경서(經書) (2)불경(佛經) (3)주기도문(主祈禱文) (4)판수가 외는 기도문(祈禱文)과 주문(呪文) (5)피륙에 세로 방향으로 놓여 있는 실인 날실 (6)경도(經度) (7)경선(經線) 등의 뜻으로 ①지나다 ②목매다 ③다스리다 ④글 ⑤경서(經書) ⑥날 ⑦날실 ⑧불경(佛經) ⑨길 ⑩법(法) ⑪도리(道理) ⑫지경(地境: 땅의 가장자리, 경계) ⑬경계(境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스릴 리/이(厘), 다스릴 발(撥), 다스릴 섭(攝), 다스릴 치(治), 지날 력/역(曆), 경영할 영(營), 다스릴 리/이(理), 지날 과(過),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씨 위(緯)이다. 용례로는 액운이 지나감을 경겁(經劫), 약이나 세균 따위가 입을 통하여 몸 안으로 들어감을 경구(經口), 종교의 교리를 적은 글 또는 성인의 말이나 행실을 적은 글을 경전(經典), 경전과 그것의 해석서를 경전(經傳), 나라를 다스림을 경국(經國), 계속하여 그치거나 변하지 않음을 경상(經常), 두 지점의 정도의 차이를 경차(經差), 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을 경학(經學), 현재까지 직업 상의 어떤 일을 해 오거나 어떤 직위나 직책을 맡아 온 경험을 경력(經歷), 경전을 실은 문장을 경문(經文), 인류가 재화를 획득하여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활동을 경제(經濟), 계획을 세워 사업을 해 나감을 경영(經營), 주로 회계 및 급여에 관한 사무의 처리를 경리(經理), 시비나 선악이 분간되는 한계를 경계(經界), 거치어 지나감을 경유(經由), 오장 육부에 생긴 병이 몸 거죽에 나타나는 자리를 경락(經絡), 경락에 있어서 침을 놓거나 뜸을 뜨기에 알맞은 곳을 경혈(經穴), 세사를 잘 다스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함을 일컫는 말을 경세제민(經世濟民), 나라 일을 경륜하고 세상을 구제함을 일컫는 말을 경국제세(經國濟世), 세상을 다스려 나갈 만한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을 경세지재(經世之才), 온 세상을 다스림 또는 일을 계획적으로 준비하고 다스림을 일컫는 말을 경천위지(經天緯地), 학문은 실제 사회에 이바지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유학의 한 주장을 일컫는 말을 경세치용(經世致用), 국사를 경륜할 만한 능력 또는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을 경국지재(經國之才), 그때 그때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알맞은 수단을 취함을 이르는 말을 경달권변(經達權變), 세상을 다스려 나갈 만한 품성을 일컫는 말을 경세도량(經世度量), 스스로 목매어 도랑에 익사한다는 뜻으로 개죽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경어구독(經於溝瀆), 나라를 다스리는 큰 사업을 일컫는 말을 경국대업(經國大業),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함을 일컫는 말을 경명행수(經明行修), 자식을 위하여 황금을 남기느니보다 경서 한 권을 가르치는 것이 나음을 이르는 말을 일경지훈(一經之訓), 쇠귀에 경 읽기란 뜻으로 우둔한 사람은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우이독경(牛耳讀經)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