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통도사를 둘러보다
나는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나만의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둘러본다. 우리의 절은 불교가 이 땅에 자리 잡기 이전의 토속신앙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신라의 중심 사찰이라는 황룡사 건립에도 용과 관련 있는 전설이 있다. 용은 토속신앙의 수신으로 우리에게는 전지전능하신 신으로 신앙의 대상이다. 용이 나타나서 절을 짓도록 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고 하였다는 전설이다.
1911년에 쓴 ‘통도사 창창 유서’에 나오는 글을 옮겨보면, 통도사의 창건설화에도 용이 나온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보탑 앞에, 그러니까 영산전의 바로 옆에 구룡지라는 연못이 있었다. 용이 9마리 산다고 붙은 이름이다. 자장율사는 이곳에 사는 용을 설법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라고 했다. 8마리는 순순히 옮겨 갔으나, 한 마리는 이사를 가지 않겠다고 뻣대어서 그냥 살기로 했다. 지금의 구룡지는 한 마리 용이 산다고 했다.
익산 미륵사 창건 설화에도 저수지에 사는 용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은, 이곳이 토속신을 모신 곳이었고, 그 자리에 불교 사찰을 지었다고 본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백성에게는 어느 종교이든 이곳은 성스러운 땅이다. 용이 산다든지, 신성한 성물이 사는 성지이다. 지역민에게 신성한 땅은 어느 종교가 차지하더로 바뀌지 않으므로, 불교가 그 자리를 자기의 성지로 만든 것이 전설이 되었다. 통도사도 그렇다고 본다. 영취산은 산악신앙이 강한 신라민에게 신성한 장소이다. 그 장소에 통도사가 터를 잡았다고 본다.
나는 통도사에 또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10년도 훨신 더 전에 김두희 교수님을 모시고 불교문학에 관여했다. 그때 교수님이 통도사의 행사에서 탑의 특강을 부탁하여 하룻밤을 머문 일이 있었다. 그때는 절의 뒤로 돌아가서 조용한 곳이었다. 절밥을 먹은 기억이 새삼스러워서 그곳을 방문하고 싶었다. 또 바위 틈에 관음보살이 계시는데, 그 안을 들여다 보면 개구리가 한 마리 있다고 하였다. 그 개구리는 틈틈이 바위 구멍의 입구까지 나와서 두리번거린다면서 --- 많은 참배객이 찾는다고 하여, 그때 나도 찾아가서 합장하고 절을 한 일이 있다. 그곳에도 가 보고 싶었다.
절 마당은 꽃으로 장식하여 아름답다. 그 보다는 가을날의 일요일이라선지 와글와글하는 사람들로 산사라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절을 찾아오는 사람을 보니, 법당에서 경배를 올리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절 마당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를 기웃기웃 하면서 구경만 하였다. 절집이라고 하여 그냥 놀이삼아 구경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렇더래도 나만큼의 노인네를 모시고 오는 가족들은 보기가 좋았다. 자박자박 걷는 아이를 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젊은 부부도 보기가 좋다. 손을 꼬옥 잡고 걸어가는 젊은이들도 보기가 좋다.
일주문은 흥선대원군이 쓴 ‘靈鷲山通度寺’를 현판으로 달고 있다. 여기서부터도 정말 멀리 걸어들어가야 한다. 조사당에는 자장조사의 화상(1804년 제작)이 걸려 있다. 일반적으로 조사당은 선불교 양식이라는데, 통도사는 선불교 사찰이 아니잖아? 신라 말에 많은 사찰이 선 사찰로 되었다니, 내가 시비를 걸 일은 아닌 듯하다.
통도사에는 65동의 건물이 있다고 하였으니, 절에 무슨무슨 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전각은 모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65동의 건물에 붙어 있는 이름을 훑어보니 법당 이름을 위시하여 온갖 이름들이다.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의 이름에도 한국 불교 사찰의 모든 부처님을 모셔 둔 듯하다. 13개의 말사를 거느린 조계종 15 본사 사찰이다.
나는 예전에 일박하였던 곳에 가 보고 싶었다. 그 보다도 바위굴에 개구리가 나오는 형상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소원을 비는 기도처가 된 곳에도 가 보고 싶었다. 왜냐면 바위굴은 전형적인 우리 토속 신앙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절에는 그곳을 소개하고, 안내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아내더러 그 이야기를 하면서 절의 뒤로 돌아가보자고 했다. 열린 사랍문에 스님의 수도도장이니 출입 금지라는 안내판이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들어가 보자. 사람을 만나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며 아, 예, 몰랐습니다. 하고 나오면 손해 볼 것 없잖아.‘
우리 부부는 요사채 안으로 눈치껏 슬금슬금 들어갔다. 요사채 안에는 골짜기로 열린 문이 있어서 집 밖으로 나왔다. 개울에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이 흐른다, 길은 차가 다닐 만큼 너르다, 길에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개울 옆의 길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가 보았다. 집도, 사람도 보이지 않고 나무만 울울하다. ’개구리가 있는 바위굴이 여기가 아닌가 보다.‘ 우리는 땅에 퍼질고 앉아서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내려왔다. 절 가까이에 오니 검은 옷을 입은 아저씨가 떠억 버티고 서서 우리를 부른다. ’여긴 출입 금지 구역인데 어디로 들어갔어요. 왜 들어갔어요.‘라면 따진다. 이럴 때는 ’몰랐다‘ ’잘못했다.‘가 최고의 해결책이다. 가까이서 우리를 보더니, 늙은 할배-할매라서인지, 말씨도 순해지고, 절로 나가는 길까지 안내해주었다.
절 마당에 들어서니 영취산 골짜기의 고요는 어디론가 도망을 가버리고 시끌벅적하다.
통도사는 큰 절이다. 멀지 않는 곳에 대도시 부산과 울산이 있으니 사찰을 찾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신앙으로서라기 보다는 관광이나, 휴양지의 장소인 듯하다.
절 밖으로 나와서 주차장까지 걷는 걸도 가깝지 않으나 내리막 길이니 걷기가 훨신 수월하다. 절의 입구쯤에 ‘성보 박물관’이 있다.
이때 쯤이면 다리도 뻐근하고, 몸도 무거워서 박물관에 들어가는 것을 귀찮아진다. 그러나 우리는 박물관은 뻬먹지 말자고, 우리 나름의 규칙을 세워두고, 웬간하면 지키려 노력한다. 몸이 무거웠지만 들어갔다.
전시실의 탱화가 제일 볼 만하다. 조선 후기의 불화 화가들이 그린 진적이다. 색감도 화려하고, 전문화가답게 형상 표현도 능숙하다. 그러나 예전에 이미 몇 번 보았고, 집에는 통도사에서 발행한 불화 책도 있어서 나에게 새로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리도 아프고------, 먼저 밖에 나와서 기댜리니 집사람도 나왔다. 집사람은 특히 박물관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그런 관심이 있기 때문에 40년 너머 서예를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통도사 주차장에 오니 울산의 고속 전철 역으로 가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양산으로 가는 길보다 훨씬 가깝다. 역에 닿으니 기차가 금방 온다고 하였다. 동대구까지의 차비가 아침에 탔던 고속버스비보다 더 싸다.
집 사람이 신기한 듯이 말한다.
“고속 전철 차비가 버스비 보다 싸다.”
나도 기차비가 버스비보다 싸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세상은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런데도 내가 모든 것을 아는 듯이 살아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