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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보좌 심판
요한계시록 20:7-15
7 <사탄의 패망>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11 <크고 흰 보좌에서 심판을 내리시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 20:7-15 / [사단의 패망] 천년이 끝나면 사단은 갇혀 있던 감옥에서 풀려 나와 8 세계에 퍼져 있는 이방나라와 그 나라의 우두머리들, 곧 곡과 마곡을 현혹시키려고 돌아다니며 함께 전쟁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들은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대군이 될 것입니다. 9) 그들이 넓은 땅을 차지하고 성도들의 군대와 예루살렘을 포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사단의 군대를 태워 없앨 것입니다. 10) 그러면 사람들을 현혹시키던 악마는 다시 그 악한 짐승이나 거짓 예언자와 같이 유황이 타오르는 불못에 던져져 거기서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당할 것입니다. 11) [흰 보좌에서 하시는 심판] 또 나는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분 앞에서 자취를 감추어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12) 나는 또 죽은 자들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책과 더불어 생명책도 펼쳐져 있었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 책들 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각각 자기가 행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3) 바다가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토해 냈고 죽음과 하데스라고 하는 지옥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지들을 다 토해냈습니다. 그들 역시 자기가 행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4) 그 죽음과 지옥이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못이 두번째 사망입니다. 15)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다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본문은 천년왕국이 끝난 후 사탄의 마지막 발악과 그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을 묘사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천국왕국 전에 있었던 구원받은 자들의 첫째 부활과 천년왕국 후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심판의 부활 사이에 있는 명확한 구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건을 얼마나 의롭고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사탄의 마지막 발악과 멸망(7-10) 본 단락에 의하면, 천년왕국이 끝난 후 사탄이 잠시 놓여납니다. 그리고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성을 둘러쌉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늘에서 내린 불로 완전히 소멸되고 사탄은 영원히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집니다. 곡과 마곡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 세력의 상징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궁극적인 세력을 의미합니다(겔 38, 39장). 사탄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인류를 미혹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완전히 패배하고 영원한 심판에 처해집니다.
크고 흰 보좌 심판(11-12) 죽은 자들도 부활하여 보좌 앞에 섭니다. 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부활이며 믿는 자들의 첫째 부활과는 구별됩니다. 두 종류의 책이 펼쳐집니다. 하나는 행위의 기록을 담고 있는 책들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심판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에 근거하여 내려집니다. 이 심판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정죄를 위한 이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망(13-15) 사망과 음부는 그곳에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줍니다. 이는 모든 죽은 자의 완전한 부활과 그들이 심판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사망과 음부 자체도 불못에 던져집니다. 불못은 영원한 형벌과 최종적인 멸망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불못의 심판은 둘째 사망입니다. 둘째 사망은 육체적 죽음 이후에 경험하는 영원한 영적 죽음이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뜻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모든 자는 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생명책의 기록 여부가 영원한 운명을 가릅니다. 현재의 삶이 영원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족과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더욱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것과 노래를 잘 하는 것, 운동을 잘 하는 것의 공통점은 개념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연습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프로야구 선수들도 가장 연습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톱(Top) 클래스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선수시절 김연아 전 국가대표 선수의 하루 연습량이 12시간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루 종일 연습하는 이유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계속 연습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몸이 반응하도록, 몸이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 가운데 거해야 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호크마 주석
=====20: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 본절은 3절의 반복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다스리는 정해진 기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다가 그 기간이 지난 후 잠깐 풀려나게 된다. '차매'로 번역된 헬라어 '텔레스데'(* )는 어떤 목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정기간에 도달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옥'은 무저갱을 의미한다.
=====20:8
나와 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곧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봐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니라 - 본절에서 땅의 사방 백성과 동일시 되고 있는 '곡과 마곡'은 겔 38, 39장에 나타난다. 에스겔서에 따르면 곡은 회복한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하여 부쪽 지방인 마곡에서 오는 메섹과 두발의 왕을 의미한다(겔 38:2, 6). 그러나 이것은 시편에서 하나님과 메시야를 대적하는 열방들로 나타난다(시 2편). 시편과 마찬가지로 본절의 '곡과 마곡'은 에스겔과 같이 어떤 특정한 왕이나 지역을 의미하기 보다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기 위하여 일어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Johnson, Mounce, Beasley-Murray). 왜냐하면 본절에서 곡과 마곡을 말할 때 특정 지역과 특정 사람을 가리키는 '땅의 사방 백성'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아마도 천년왕국 기간 동안 마음 속으로 메시야를 떠난 사람들일 수도 있다(Johnson, Ladd). 만약 그들이 천년왕국 기간 동안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죄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Ladd). 단지 사단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교만하고 범죄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발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Beasley-Murray). 한편 '미혹하고'는 사단이 무저갱에서 천년만에 풀려나와 행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사단이 '속이는 자'임을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표현이다(3절;12:9;13:14;19:20). 사단은 무저갱에서 천년동안 갇혀있으면서도 속이는 자로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고 무저갱에서 풀려나자 마자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여 세사의 종말을 초래하게 한다.
=====20: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 사단과 대적자들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에워싼 곳에 대해서 요한 두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1) 성도들의 진 - '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렘볼렌'(* )은 군사 용어로 군대의 영문 안이나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진영을 의미한다(출 14:19;민 2:2;신 23:14;행 21:34, 37;22:24;히 11:34;13:11, 13). 이것은 사단의 활동이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순례자의 삶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Mounce, Johnson, Morris, Beasley-Murray).
(2) 사랑하시는 성 - 이것은 어떤 장소적인 의미를 지녀서 유대교 종말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성이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시 78:6-8;87:2, Backwith) 다음장에서 언급될 거룩한성 예루살렘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21:10).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을 받고 사랑함을 받는 백성들을 가리킨다(Bruce, Morris, Beasley-Murray). 한편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는 에스겔의 환상을 반영하는 것으로(겔 38:22;39:6)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신속한 심판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심판자는 쿰란 문서나 유대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쿰란 종파에 속한 사람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사단과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전쟁을 일의키기도 전에 멸망을 당하게 된다(Ladd, Morris).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의해서 소멸되나, 사단은 본절에서와 같이 다른 방식으로 심판을 받는다. 사단은 대적자들과는 달리 '불과 유황 못', 즉 '불못'에 던져겨 영원한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 '불과 유황 못'에는 사단이 던져지기 이전에 이미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19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재림 때에 사단의 조종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키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패망하여 '유황 불붙는 못'에 던져졌다(19:19, 20). 한편 '세세토록 밤낮 되로움을 받으리라'는 사단의 멸망이 단순히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영원한 멸망을 시사하는 표현이다(Morris, Ladd, Mounce).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않으신 자를 보니 - '크고 흰'은 보좌에 않으신 이의 권능과 영광, 거룩, 그리고 위엄을 나타낸다. 한편 '그 위에 않으신 자'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 가능성을 지닌다. (1) 심판하시기 위해서 보좌에 않으신 이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심판의 권한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위임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5:22;고후 5:10;딤후 4:1). 또한 에녹서에서도 메시야께서 심판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위경 에녹 1서 45:3;51:3;55:4;61:8). (2) 보좌에 앉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이셨으며(4:2, 9;5:1, 7, 13;6:16;7:10, 15;19:4;21:5) 존절에 반영되고 있는 단 7:9, 10에서도 역시 하나님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자주 심판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둘 다에게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그 위에 앉으신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체성과 단일성을 나타내는 듯하다(Mounce). 즉 본절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보다는 심판자의 심판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하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 본문은 '여섯째 인'을 떼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인 '해가 검어지고 별이 떨어지며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말리는 것'을 상기시킨다(6:12-14). 이것은 타락하고 썩어진 피조물의 종말에 당할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모두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을 암시한다(Mounce, Ladd, Morris). 타락한 첫 창조의 피조물들은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해방되고 새롭게 창조될 것을 고대하고 있다(롬 8:19-23). 이러한 사실은 본문이 단순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내로운 창조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나타내고 있음을 시사한다(21:1;사 11:6-9;65:17;벧후 3:13).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 '죽은 자'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2) 혹자는 첫째 부활을 오직 순교자에게만 제한함으로 본절에서 나타난 죽은 자는 불신자들과 순교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주장한다(Mounce). (3) 혹자는 첫째 부활을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본절에 나타난 죽은 자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심판을 받기 위해 보좌앞에 선 자들에게는 두 종류의 책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의 두 책 중에서 첫번째 책인 행위를 기록한 책이 믿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신자들의 해위만을 기록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Johnson).
(1) 책들이 펴 있고...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첫번째 책은 단 7:10을 반영한 것으로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
(2)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의 책이라 - '생명책'은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출 32:32, 33;단 12:1;눅 10:20;빌 4:3). 이 책은 오직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만이 열수 있는 책이다(3:5;13:8;21:27).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충성한 자들 만이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암시한다(Ladd). 두 책, 즉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함으로 구속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 사이에는 인간의 행위와 믿음이라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발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Johnson).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 '바다'는 매장되지 않은 시체가 있던 곳을 가리킨다. 당시에 시신이 매장되지 않았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왕상 13:21, 22;14:11;렘 8:1, 2). 반대로 버려져 있는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가장 친절한 행위이며 신앙의 행위로 인정되었다(Beasley-Murray). 이런 상황에서 바다에서 죽은 시체의 부활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부활하며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한편 '사망과 음부'는 죽음의 영역을 묘사하는 것으로 죽은 자들의 실재와 사람들이 죽음 후에 맞이하게 되는 상태를 나타낸다(Johnson). '사망'은 전쟁, 기근, 역병 그리고 야생 짐승에 의해서 당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악을 상징한다(Beasley-Murray). 또한 '음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하데스'(* )는 중간 상태에 있는 영혼들이 거하는 장소로 나타내기도 하며(행 2:27, 31) 의롭지 못한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나타내기도 하고(눅 16:23) 무덤과 동일시 되기도 한다(6:8). 이러한 음부에 대해서 혹자는 단순히 죽은 자들이 거하는 처소라고 주장하나(Kiddle) 불의한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의인화된 사망과 음부가 영원한 형벌을 받아 불못에 던져지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시며 통치하신다(1:17, 18, Beasley-Murray). 본문에서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들을 내어 준다는 것은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심판하실때에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이 육체로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을 시사한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 본문은 앞절의 반복이다. 흰 보좌 앞에 펼쳐진 책, 즉 모든 사람들이 행한 행위에 대해 기록한 책대로 보좌에 않으신 이는 그들의 행위를 심판하신다.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본절의 '사망과 음부'는 의인화된 표현이다(6:8). 이 '사망과 음부'는 사단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유황 불못에 전지워져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같이 동일하게 유황 불못에 던지워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신 후에는 더이상 사망이 필요없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21:4. Johnson). 즉 이것은 사망이나 애통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암시한다(21:4;고전 15:16). 한편 '둘째 사망'은 하나님의 백성이나 불신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첫째 사망과는 달리 오직 불신자들만이 겪는 죽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둘째 사망이 주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6절). 본절에서 이러한 둘째 사망은 불못과 동일시되고 있다. '불못'은 일반적으로 지옥을 의미하는 '게헨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게헨나'는 '흰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게 힌놈'(* )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 흰놈'은 예루살렘 성 밖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예루살렘 성의 쓰레기를 태우기 위해 늘 불이 붙고 있었다. 또한 몰렉 우상을 숭배하면서 인간을 희생 재물로 드릴 때 불로 태운 곳이기도 하다(왕하 16;3;21:6).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골짜기를 살육의 골짜기로 불렀다(렘 7:31-32).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Beasley-Murray). 이러한 불과 하나님의 심판이 연결되어서 '게 힌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불의 심판으로 인식되었다(사 66:24). '게 흰놈'과 같은 의미를 지닌 불못은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그들의 최후의 패배를 시사한다(Mounce).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 - 본절은 앞절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첫째 부활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둘째 사망인 불못이 전혀 주관할 수 없다. 단지 둘째 사망이 주관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 보다는 짐승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 뿐이다. 그러한 불신자들은 사단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겪는 영원한 멸망의 길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
계 20장 10절 / 김남수목사
인류의 역사에 수많은 사건이 일어 났습니다. 인간이 달에 착륙하고,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 되었고,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2001년 9월11일에 Word Trade Center 가 테러 공격으로 무너졌고, 지난 8월14일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정전 사건으로 온 세상이 흑암에 덮이고, 혼란과 두려움에 빠졌었습니다. 역사상 이런 정전 사고는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 났지만, 가장 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속히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류 역사의 최대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처음 오실 때에 조용히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의 찬송과 함께 베들레헴에서 주님은 조용히 탄생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만인이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온 세상이 알 수 있도록 큰 충격과 대혼란과 파괴와 엄청난 충격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구름 타시고, 나팔 소리와 함께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는 심판하러 오시게 됩니다.
하와이의 진주만에 폭탄이 떨어 지고,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 되고, 1차, 2차 세계 대전이 일어 났었고, 9.11사태와 지난 번 정전 사건을 모두 합하여도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오시면 의인은 영광스럽게 주님께 들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함께 천국으로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모르거나,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 들과 술객과 우상 숭배자들, 마귀를 좇아 사는 사람들은 마귀와 함께 유황불에 타는 못에 참여하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는데 거기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나뉘게 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도 나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산과 바다야 나를 가리어 다오. 죽음이 피해가게 해달라고 할 것이고, 대 혼란과 큰 재앙이 땅에 임하고, 온 세상이 불로 사른바 되는 이런 시간이 바로 주님의 재림시간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밝히 말씀 하면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함이라.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 그런 즉 너희는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Be very careful, then, how you live- not as unwise but as wise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를 대단히 조심하여, 미련한 자가 아니고 지혜 있는 사람같이 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오고, 그 약속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있는 자 같이 하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무엇입니까? 지혜 없는 자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약국을 하는데, 좋은 약을 두고 약을 먹지 않아서 죽게 되었다. 이것은 미련한 자 입니다. 음식을 잔뜩 두고 배가 고파서 죽었다면 이처럼 미련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참 미련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해 본 결과 생각 잘 못하는 것이 미련한 것입니다. 올바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미련한 것입니다. 볼 것을 보지 못하는 것,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주의 없이 덤벙거리고 살다가 쓰러지는 것이 미련하다고 성경에서 말씀하셨는데,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 Therefore do not be foolish, but understand what the Lord's will is.
모든 기회를 좋은 기회로 만들어서 그것을 잘 사용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좋은 기회를 사용해서 좋은 일들을 만들어 가고 그 시간들을 잘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금년 시작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조금 있으면 낙엽이 지고, 추수감사절이 가까이 오고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빠르고 악하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잘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것은 주님의 뜻 대로가 아니고, 내 뜻대로 사는 것이고, 지혜로운 것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7절에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고, 그 뜻을 위해서 시간을 지혜롭게 잘 사용하고 낭비하지 않고,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 취하여 방탕하면 결국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엡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섭섭함이 들어 가서 원망,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노래를 만들고, 감사를 만들고 찬양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이고, 성령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엡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렇게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이 시간입니다. 시간을 아끼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이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세월이 빨리 지나가고 있는데, 주님이 부르시는 시간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서야 될 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가진 것이 중요하지 않고,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시간이 있다고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잘 활용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데 시간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아름다운가가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 참된 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셨습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입니다.
여러분! 이 단어들을 연결 해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 같아서 바람 불고 창수가 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고, 그 집에 모래 위에 지어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집에 창수가 나니까 집이 심하게 무너 졌다는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고,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주께서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 해 보십시오.
평생 교회 다니고, 평생 주의 일을 했다고 하는데,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전혀 모른다고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위 때문에 구원이 없어 지지 않습니다. 성경의 진리 인 것입니다. 성경에 그러므로, 너희가 지혜롭게 두려움을 가지고 조심해서 주님의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을 평소에 조심해서 살라, 그런 날을 기억하고 살라고 이 말씀을 주셨는데 방심하고,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 가다 가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내 멋대로 살고, 주님 뜻대로 살지 않았으니까 주님께서 모르신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 드리고, 부족하지만 늘 주님 뜻대로 살려도 애를 쓰고 할 때에 주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도움을 주십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 관계없이 자기 뜻대로 살고, 시간의 개념이 없고, 지금 어느 때 인지, 지금 무엇을 할 때인지, 어떻게 살아 가야 할 때인지 관심 없이 상관 없이 살아 가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이고, 미련한 사람은 창수를 만나면 집이 무너 진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장이 되려면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정중하게 들여야 합니다. 남이 이야기 할 때에는 자기 이야기만 하면 안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 정직한 이야기를 듣도록 애써야 합니다. 정중하게 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지혜롭게 대답하는 사람, 세 번째는 냉정하게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공평하게 판단하고, 결정할 사람이 판사가 되어야 된다고 네 가지 조건을 제시 했습니다. 만 왕의 왕이시고, 의로우신 재판장, 심판할 날에 심판대에 우리를 재판 하시고, 모든 사람을 재판 하실 우리 주님은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공평하신 분 이십니다. 물론, 재판장에 오는 사람마다 자기는 죄 없다고 변호사를 세우기 때문에 죄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의인이지, 죄인이라고 나오는 사람은 어려운 일입니다. 죄인을 가려 내는 것이 재판이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판사입니다.
증인, 증거를 내 놓은 다음에 배심원들이 만장 일치가 되면 헌법에 의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가면 증거도 증인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을 받고, 은혜를 입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피로 덮어 주셨으니까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 받고 죄 사함을 입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지혜롭게 살라는 말씀을 생각하고 살아야 된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마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 말씀은 친히 예수님이 성경에 말씀하신 설교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금 받는 것입니다. 곡식 걷을 때에 알곡과 쭉정이로 나뉘게 됩니다. 알곡은 정미소에 가서 쌀로 만들어 식탁에 올려 지게 되는데, 쭉정이는 걸러 내어 불로 태워 버립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어떻게 된다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니까, 가치 있지만, 그 날 그 시간에 바람이 불 때에 주님 오실 때에 알곡은 떨어 지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 진다는 것입니다. 알곡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때를 따라서 영양분을 받고, 때를 따라서 신앙이 자라고, 말씀으로 성장해서 성숙하게 익어, 좋은 열매를 맺고 그 성숙에서 알곡이 되어야 하나님의 창고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녔는데도 변화는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 대로가 아닌 자기 멋대로 산다면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알곡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간을 주셨을 때, 그 시간을 잘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재물도 잘 관리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돈을 쓸 때에 세 가지를 생각하고 사용했다고 합니다. 돈을 쓸 때에 청지기의 입장에서 맡긴 분에게 맞게 쓰는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돈을 맡기실 때에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청지기로 우리에게 주셨는데, 맡긴 분에게 맞게 쓰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의 돈 사용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는 가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돈을 씀으로써 의인이 부활 할 때에 상 받을 것을 준비하고 쓰는 가 입니다. 후일에 의인이 부활 할 때에 이것이 상이 되어서 그 상을 받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돈을 쓰는데, 내가 벌어 내가 쓰는 것은 자유 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시간과 건강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 진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돈이 생겼다고 해서 내 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관리자로 맡기셨다는 것을 알고,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이고, 나머지는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쓰고 지혜롭게 그 물질을 관리 할 수 있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지출을 억제하고 수입이 늘어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십의 일, 십의 이로 십의 구까지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자기는 십의 일로 쓸 수 있다면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영원한 가치를 위해 쓰여 지고 있느냐, 아니냐를 검토하고 써야 지혜로운 것입니다. 지혜롭지 않고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다 지나고 후회해도 늦었을 때에 그 때 하는 이야기 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집이 있는 사람은 땅에 있을 때 지혜롭게 물질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대로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칩니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But they paid no attention and went off- one to his field, another to his business.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돌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주인이 청하고,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주인의 청함에는 무관심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원하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저들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나의 현재의 삶이 주님께서 오실 때에 잘했다고 칭찬 하실 수 있는 길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지혜로운 것입니다. 마태 복음 25장에는 또 다른 잔치가 나오는데,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왜 미련하냐 하면, 슬기 있는 자는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졌는데, 졸며 자다 소리가 나서 깨어, 기름을 가지러 간 사이에 문이 닫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준비 했느냐는 것입니다. 준비가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말씀의 핵심이 준비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전이 있던 다음 날에 맨하탄에 일이 생겨 차를 빌려 갔는데 가솔린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주유소에도 정전이 되어 기름을 안 팔고,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차가 멈춰 밀고 가야 할 상황이 되기 직전에 다행히 전기가 다시 공급이 되어 무사히 도착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지금은 차를 그냥 두고 가도 되지만, 그 때 문이 닫히고, 주님의 음성이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한다면 슬피 울며 간다는 이야기가 떠 올랐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언제 주님 오실런지 아는 이가 없으니 등 밝히고 너는 깨어 있어 주를 반겨 맞아라.”
기도: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도 아시고, 그 피를 통해 우리를 구속 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 그 날이 가까이 다가 올수록 깨어 기도하게 하시고, 허리띠를 돌려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 다시 한 번 저희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 드릴 수 있도록 축복 해 주옵소서!
주님! 거룩하신 보혈로 씻어 주시고 예수의 피로 덮어 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삼아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이제 거룩한 약속이 있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어 경건함과 거룩함에 이르도록 성령님 한 사람 한 사람 도우시고, 지혜를 주셔서 시간과 물질과 생애를 낭비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백보좌 최후 심판
계 20장 11~15절 / 김철한목사(오목천교회)
천 년 왕국이 시작되어 천 년이 찰 때까지는 죽은 자들은 살지 못한다. 천 년 왕국이 시작되기 전 살아나온 자들은 공중 혼인에 이끌림을 받은 자들과 천 년 왕국에서 왕 노릇하며 다스리는 자들이다. 이들은 모든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다. 이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신부가 되었고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망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상급과도 같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격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를 믿고 이긴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 년 왕국이 끝나고 기다리고 있는 백보좌 심판은 무엇인가? 상급 부활이 아니라 심판을 받기 위해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일이다. 지금까지 모든 죽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든지 이 백보좌 앞에 서야 한다.
백(白)보좌, 즉 흰 보좌란 뜻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 심판의 거룩성, 정결성, 흠 없는 심판, 오류 없는 심판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크고 흰 보좌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의미한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갈 데가 없다는 것은 그 만큼 이 백보좌 심판이 두렵고 무서운 심판임을 의인화 한 것이다. 감히 누가 설 수 있는가의 심판이다. 하늘과 땅이 자취를 감추어야 할 백보좌 심판은 이렇게 진행된다.
1. 어떤 사람이든지 보좌 앞에 서 있어야 한다. (계20:12上)
계20:12上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사는 날 동안 사람들은 계급이 주어진다. 사람의 사는 모습을 따라 큰 사람, 작은 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주인과 종으로 구별된다. 하지만 백보좌 심판 때에는 죽은 자들이 심판을 위해 다 일어나 보좌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죽으면 그만이 아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어떤 사람이든지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 죽은 자들은 천 년 왕국에 들어가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과 대조를 이룬다. 이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에 대해 부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들은 죽은 자들로서 다시 일어났으나 둘째 사망에 던져지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다. 일어났다기 보다 사망, 음부, 바다에서 있다가 죽은 자를 내어주며 보좌 앞에 서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상류층으로 살았던, 하류층으로 살았던, 유명인으로 살았던, 무명인으로 살았던 오직 보좌 앞에 서야 한다. 땅과 하늘이 간데 없는 무서운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다.
2. 어디서 죽어서 묻혀 있든지 보좌 앞에 서야 한다. (계20:13)
계20: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도 심판대에선 아무 소용없다면 그 사람이 어디서 죽었느냐, 어디에 묻혔느냐도 심판대 앞에 서는 데는 아무 차별이 없다. 죽은 자가 명당에 묻혔다고 심판이 달라지고 죽은 자가 화장하여 바다에 던져졌다고 심판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서 묻히든지 심판이 가벼워지는 등 심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단으로 싸서 묻히든, 황금으로 싸서 묻히든 심판에 가감이 되지 않는다. 오직 모두 다 죽은 자를 내어놓는다. 바다도, 사망도, 음부도 그 가운데 있던 죽은 자들을 내어놓고 심판 보좌 앞에 서야 한다.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두 번째 사망을 결정짓는 보좌 심판 앞에 서야 한다.
여기서 죽은 자의 심판은 이미 용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불못에 던짐을 받은 자 이외의 모든 죽은 자들이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런데 인생이 태어나 살다가 죄를 지어도, 예수를 믿지 않아도 그냥 죽는 것으로, 첫째 사망으로 막을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내 생각일 뿐이다. 성경은 오늘 잘 믿는 사람은 첫째 부활로 일어나고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둘째 사망으로 가기 위해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내어준다고 말한다. 이 두 그림의 대조는 잘 믿는 자는 확실하게 보상을 받고 잘 믿지 못하여 세상에 속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 길로 가기 위해 서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시켜 준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의 마무리를 하는 우리에게 이 그림이 보여야 한다. 두 가지 분명한 내용이 보여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요일3:14),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고 하였다. 이것이 보여야 한다.
3. 행위 책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기 위해 보좌 앞에 서야 한다. (계20:12中)
계20:12中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딤후4:1에는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고 하였다. 여기서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심판은 환난 시대에 살아남은 1/3의 사람들(슥13:8) 중 목자가 분별할 때 양으로 되어 천 년 시대에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천 년 왕국의 기한이 차서 시험을 당할 사람들, 또 마귀에게 공격을 받는 사람들, 그 때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심판이다. 이 산 자의 심판과 달리 죽은 자들의 심판이란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은 자들 모두다. 이들의 심판은 책들에 의한다. 즉, 자기 행위를 기록한 책대로 심판을 받는다. 그래서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는 생명책이란 말이 6번이나 나온다. (계3:5, 13:8, 17:8, 20:12~15, 21:27) 여기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천 년 왕국이 찬 후 마지막 사탄의 미혹에서 믿음을 지켜내고 이겨낸 자들이다. 사탄은 에덴 동산의 아담을 미혹하였듯이 지면에 퍼진 자들을 미혹하여 자기 편을 만든다. 허나 이긴 자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둘째 사망의 불못에 던져지지 않는다. 그러나 행위를 따라 기록된 행위 책에 이름이 기록되면 어찌할 수 없다. 혹시 여러분들은 수많은 사람들, 바다의 모래 같은 사람들을 어찌 다 그 행위를 기록하겠는가 하고 의심하는가?
계5:11을 보면 하나님의 사자들의 수는 천천 만만이다. 마18:10을 보면 어린 아이들도 다 저희 천사들이 있어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면담한다. 하나님의 네트워크는 컴퓨터나 소셜 네트워크 보다도 뛰어나다. 사실 컴퓨터는 대단하다. 근래에 미국 비자를 내어 미국을 가는데 대사관을 가지 않고도 내 신원이 다 확인되어 미국 출입국심사를 통과했다. 이처럼 나 한 사람은 다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행위 책에 기록된다는 것에 대해 의심할 것 없다. 다만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그들이 들어가는 곳은 불못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둘째 사망이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 영원히 부활로부터 배제되는 종국적 멸망이다. 게다가 사망과 음부가 불못에 던져져 확실하게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가 준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백보좌 앞에 서는 날, 핑계도 댈 수 없다. 변명도 할 수 없다. 더 이상 피할 길도 없고 해명을 할 탈출구도 없다. 이미 예수님이 마16:27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였다. 바울도 고후5:10에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장래 심판의 둘째 사망을 알고 우리가 어떻게 백보좌의 마지막 심판을 대비해야 하는가가 남은 일이다. 그냥 죽은 자가 되면 안된다. 육체가 죽는 첫째 사망에서 첫째 부활에 이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육체가 죽는 첫째 사망에서 천 년 왕국이 끝나도록 살아나지 못하고 백보좌 심판 시에 바다, 음부, 사망에서 나와 둘째 사망에 이르면 안된다. 환난이 와도 예수를 믿고 이긴 자가 되자. 미혹이 와도 예수를 믿고 이긴 자가 되어 생명책에 기록되는 자가 되라. 모든 것이 다 망가져도 신앙인으로 파선당하는 자가 되지 말라. 믿음을 위해 살고 믿음을 지키며 살고 도전하는 모든 세력을 무조건 싸워 이겨야 한다.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주를 믿는 믿음이다.(요20:31) 그 믿음의 결국이 구원인데(벧전1:9) 믿음을 빼앗으려는 것을 이겨내야 한다. 불같은 시련도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 금보다 귀한 믿음으로 서기 위해(벧전1:7) 이겨야 한다.
일곱 교회에 주신 약속을 보라.
계2:7 (에베소 교회) - 이기는 그에게는 생명 나무 열매를 주리라.
계2:11 (서머나 교회) -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2:17 (버가모 교회) - 이기는 그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흰 돌을 줄 것이니라.
계2:25 (두아디라 교회) - 이기는 자는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줄 것이니라.
계3:5 (사데 교회) -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니라.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니라.
계3:12 (빌라델비아 교회) - 이기는 자는 내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나가지 아니하리라.
계3:21 (라오디게아 교회)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리라.
얼마나 분명한 약속들인가? 짐승을 이기자. 그의 우상을 이기자.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자.
생명책과 불못
계 20장 11~15절 / 노경모목사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에 포함된 유일한 묵시(黙 잠잠할 묵, 示 보일 시) 기록입니다. ‘묵시’는 한자로 풀이하면 잠잠히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의 묵시 문헌들은 위기의 때에 기록되었습니다. 묵시라는 말은 ‘계시(啓 열 계, 示 보일 시)’란 말과 같으며,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나 진리를 하나님이 가르쳐 알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전하다가 밧모섬에 유배(流配)되어 죄수로서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을 기록한 내용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중에서 오늘의 본문이 있는 20장은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심판이 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천국에 가고,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가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요한복음 3:16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아시지요?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가 갈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오늘 본문 14절에는 ‘불못’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못은 불구덩이를 말합니다. 끄지지 않고 영원히 불타는 불못, 불구덩이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영원히 불타는 그곳에 영원토록 말할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을 당합니다. 지옥에 던져지면 나올 수도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47-4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영원토록 불탄다고 지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에 간 사람들은 불로써 소슴 치듯 함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장을 하기 위해서 배추에 소금을 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배추는 숨이 죽으면서 물기가 빠져 나갑니다. 소금기가 그 배추의 속까지 침투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한다는 말은 불의 고통이 지옥에 간 사람의 몸 깊숙이 퍼져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깊고 끔찍한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 대형교회 목회자가 ‘지옥은 없다’는 내용의 책을 발간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신학계에서도 이같은 주장에 관한 토론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로 알려져 있던 롭 벨 목사(미시건 주 마스힐바이블처치 담임)는 얼마 전 출간된 자신의 책 ‘사랑이 이긴다: 천국, 지옥,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책(A Book About Heaven, Hell, and the Fate of Every Person Who Ever Lived)’에서 ‘지옥은 없으며 인간은 죽어서 모두 천국으로 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의 요점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전제에 있으며, 따라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해서 이 땅에 살아간, 그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서 고통받게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책은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복음주의 목회자가 ‘지옥이 없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출간 즉시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 2위에 오르는 등 적잖은 파장을 낳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지옥이 정말로 없습니까? 아니면 지옥이 정말로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고 성경은 천국에 대한 말씀보다 지옥에 관해서 더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 절만 기록되었어도 꼭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성경에 많이 기록된 지옥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 마라. 영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고 마태복음 10:28에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지요? ‘지옥에 던져’라는 말은 지옥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지옥은 사람들에게 죄짓지 말라고 겁주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실제로 고통을 느끼며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장소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거부하고 지옥 간 사람은 타오른 지옥불 속에서 영원히 "그 때 믿을 걸 그 떄 믿을 걸" 하며 후회하며 탄식하며 고통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 이외에 지옥을 피할 수 있은 길은 없습니다.
사도요한이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봅니다. 사도요한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봅니다. 누구겠습니까? 바로 천지의 대주재시오 최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조성되기 때문에 옛 땅과 옛 하늘이 없어집니다. 요한계시록 21:1에 이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사도요한이 또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왜 서있습니까? 심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인 생명책이 펴져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지옥불에 던져집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어야만 그 사람은 구원받고 천국가게 됩니다. 우리의 이름은 반드시 기필코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될까요?
첫째,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요즈음 이단에서 자기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미혹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생명책은 그들이 만든 생명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책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요한계시록 21:26-27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생명책을 일컬어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가 기록한 생명책이 아닙니다. 어린 양을 알고, 어린 양을 믿고,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 바로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어느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어린 양은 분명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구원 주시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른 채, 또는 믿지도 않은 채, 더욱이 따르지도 않으면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길 바란다면 그건 어린아이의 생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믿되 형식적으로 믿으면 안됩니다. 믿는다고 하면 죄악과 친구하고 탐욕을 따라 살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입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 삶이 예수님을 믿는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아닌 것이 됩니다.
믿음과 행함 즉 삶은 분리 될 수가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서 2:17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기는 자입니다.
요한계시록 3:5을 읽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서 사데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겨야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채로 보전이 됩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어떤 유혹과 시험, 환란과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중간에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떠나게 된 채로 그 사람의 인생이 끝나면 그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남아있을까요? 그 사람은 지옥불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세에 진정으로 믿는 자들이 적어집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심히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견디고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마태복음 24:13의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7:21을 읽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가 천국에 들어가고 지옥불에 던져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고린도전서 10:31 말씀처럼 사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넷째, 죄를 짓지 않은 자입니다.
마태복음 18:8-10,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네 손과 네 발이나 네 눈이 범죄하면 찍어버리고 뽑아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지옥불에 던져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 손과 네 발이나 네 눈이 범죄하면 찍어버리고 뽑아버리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죽을 힘을 다해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라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게속해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철저하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시편 7: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오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 때문에 크리스천들이 죄를 짓고서도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른다는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시다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돌아가시게 함으로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구원주로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심판의 때가 다가 오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영적으로 깨어 준비하면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지고 갈 수는 없어도 미리 보낼 수는 있다
계 20:11-15 / 김상수목사
추석 연휴가 끝이 났다. 연휴 기간동안 홀로 방콕에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나름대로 바쁘게 지내셨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추석 하루 전날 외숙모님이 소천 하셔서 연휴기간동안 장례식에 참석했다. 외숙모님과 외삼촌 내외분은 두 분 모두 감리교회 권사님이셨는데, 지금부터 34년 전에 우리 어머님이 소천하시고 장례식을 치르면서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셨다. 외숙모님은 소천하시는 그날 새벽까지도 예배를 드렸고 기도를 많이 하셨다고 한다. 입관하기 전에 염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관뚜껑을 닫는 그 순간을 영안실에서 입회해서 지켜보았다. 말년에 피킨스병으로 힘들어 하셨기는 하지만, 입관 전에 평안한 얼굴로 누워계신 그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죽음은 최고의 치유라는 말이 생각났다. 정말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죽음은 영원이 보장된 최고의 치유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스도 밖에서의 죽음은 영원한의 고통의 시작이다.
장례식장에서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만, 먼저 소천한 성도의 모습은 곧 얼마가지 않아서 만날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간다. 어제 막내아들과 차들 타고 어디를 다녀오는데, 유치원생인 아들이 차안에서 하품을 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빠른 것이 잠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이유인 즉슨 차 속에서 눈을 감았다 뜨면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말이지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들도 천국에 도착한다. 먼저 간 성도들을 속히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살같이 빠른 광음을 주 위해 아끼세”라는 찬송 가사처럼 이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이 이 세상의 삶을 다 살고, 마지막때 모든 환란도 다 지나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대심판을 하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11절 말씀에 기록된 “크고 흰 보좌”라는 말씀을 빗대어서 장면을 보통 백보좌 심판이라고 말한다(계 20:11-15).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 앞에 두 종류의 책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생명책이고, 또 하나는 죽은 자들의 행위를 기록한 책들이다. 보통 이것을 행위록 또는 행위책이라고 한다. 이 말씀처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불못에 던지워지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요1;12).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가족들에대한 영적인 족보와도 같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별스러운 것을 소유하고 별스러운 삶을 살았다해도 이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으면, 그 모든 삶을 헛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시간에 좀 더 나누고 싶은 것은 이 책들 중에서도 ‘행위를 기록한 책들’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상급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들어 한 사람의 성도로서 구원받은 것은 생명책에 관계된 문제이지만, 직분자로서 충성 했는지 안했는지는 행위의 책에 관련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착한 일을 했으면 누구나 다 상급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착하고 충성된 일을 했다고 해서 다 상급 받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상급을 주시는 중요한 기준은 어떤 일을 얼마만큼 했느냐 이전에 일차적으로 ‘무엇을 위하여 했는가’라는 문제다. 오직 주님을 위하여(for Lord) 했는가, 아니면 나를 위하여(for me) 일했는지가 중요하다. 로마서 14장 8절의 말씀처럼 우리 성도들은 사나 죽으나 모든 일을 오직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롬 14:8).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의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의 보물을 쌓는 삶은 마치 천국은행에 부지런히 입금시키는 것과도 같다. 우리들이 잘아는 마태복음 6장 19-20절을 보라.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이 말씀을 보면 우리들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했다. 그대신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다. 여기에서 “너희를 위하여”라고 하신 것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한 삶이 곧 나를 위한 삶이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천국에 보물을 쌓는 것은 죽은 다음이 아니고, 이 땅에 살아있을 때다. 그래서 ‘가지고 갈 수는 없지만 미리 보낼 수는 있다’는 역설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들이 분명히 이 땅에 주님을 위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하겠는데, 또한 그것이 미리 천국에 보물을 쌓는 것이고, 미리 보내는 삶을 사는 것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미리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시간에는 그 모든 것들 중에서도 성경에서 강조하는 대표적인 세 가지를 함께 나누기 원한다.
첫째로 우리들이 미리 보내고, 천국창고에 쌓아야할 보물은 기도와 전도의 보물이다. 물론 기도라는 항목 따로, 전도라는 항목을 따라 분류할 수도 있지만 굳이 기도와 전도를 하나로 묶은 것은 이 두 가지 요소는 성도의 사역에 있어서 마치 수레의 양바퀴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일해야한다. 주님께서도 주기도문을 통해서 이 점을 강조하셨다. 생각해 보면 기도와 전도 이 두 요소는 생명(生命)과 관계된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자기의 생명이 먼저 살아나고, 전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
우리들이 잘아는 디모데후서 4장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2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2:19-20)
정말 그렇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간구했던 그 간절한 기도와 금식이요, 우리들이 전도한 그 영혼들인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면류관이다.
다니엘 12장 3절을 보면,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라고 했다. 누가복음 12장 8절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하셨다.
다른 목회자들도 동일하겠지만 나 역시도 내가 목회자가 된 것이 너무나 좋다. 왜냐하면 전도를 위해서 목회자라는 신분이 유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때는 내가 평신도였다면 전도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역을 하면서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신분을 소개하면, 당연히 그 분들은 목사님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전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교회에서도 많은 경우에 ‘준비를 다 해 놓았으니 목사님께서 오셔서 영접시켜 주십시요’라는 부탁받는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전도한 사람들이 몇 명쯤 되는지 잘 모른다. 신학생 때부터 많은 사람을 전도했는데 그 숫자가 얼마쯤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훗날 천국에서 나는 기억도 못하지만, 나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천국에 온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날 것이고 확신한다. 그때 ‘저는 목사님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을 생각해보면 상상만 해도 너무나 기쁘고 행복하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이 어찌 몇몇 사람에게 국한 된 것이겠는가? 모든 성도들이 누려야할 특권이고, 상급이고, 이 땅에서 쌓아야할 하늘의 보물들이다. 기억하라. 이 땅에서의 주님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와 전도는 하늘의 창고를 채우는 첫 번째 보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둘째로 우리들이 미리 보내고, 천국창고에 쌓아야할 보물은 구제의 보물이다. 이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기고, 또한 물질에 관계된 것이기도 한다. 마태복음 6장 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3-4)
주님은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는 중에 ‘하늘에 쌓는 보물’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전에 그 보물이 뭔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것들이 바로 기도와 금식과 구제다. 이처럼 구제가 중요하다.
또한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다. 사도행전 10장 4절에 보면 백부장인 고낼료는 그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서 상달하여 기억하신바 되었다고 했다. 마태복음 10장 41-42절에서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고,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결단코 상을 잃지 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씀을 지금의 버전으로 표현하면, 목회자를 잘 섬기는 자는 목회자의 상을 받고, 선교사님을 잘 섬기는 자는 선교사의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을 주님을 위하여 써야 한다. 주님이 주신 재물을 내 것인양 내 맘대로 움켜쥐고 베풀지 않으면, 재물의 영 맘몬에게 휘둘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주님을 위하여 쓸 때, 그 재물은 하늘의 보물로 변한다. 이것이 미리보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미리 보내고, 천국창고에 쌓아야할 보물은 봉사의 보물이다. 이것은 몸이나 시간을 주님께 드려서 섬기는 것을 말한다. 혹자는 재물이 없어서 봉사를 못한다고 생각하지 모른다. 그러나 재물이 없어도 섬길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에게 한 가지 이상의 재능과 은사들을 주셨다. 그렇기에 누구나 자신이 가진 강점(强點)이 있기 마련이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이런 것들을 주신 이유는 ‘더 약한 사람들을 섬기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시간도 내야한다. 어떤 사람은 시간 없어서 봉사를 못한다고 말한다. 먹고 사는 것만해도 바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어찌 금보다 귀한 시간을 이 땅의 것만을 추구하는 일에 전부 투자하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시간이 없으니까 그 시간이 더 귀한 것이고, 그 귀한 시간을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에 드렸으니까 주님께서 그 시간을 더 귀하게 받으시는 것이다.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 중에 군산에서 사역하시는 김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시다. 그 목사님과 대화하던 중에 성도들이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소속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 모든 교회의 구석구석에 관리 담당자를 정했다는 것을 들었다. 예를 들어 본당 올라가는 계단담당은 ‘아무개 집사’, 화장실 창문은 ‘아무개 성도’라는 식으로 말이다. 심지어 처음교회에서 등록하는 사람도 다 이렇게 정해주는데, 이것을 통해서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소속감을 갖고, 교회도 엄청 깨끗하다는 것이다. 물론 장단점이 있기는 하겠지만, 대화를 나누던 그 시간에도 교회에 찾아와서 자기 맡은 곳을 기쁨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여러분들도 스스로 결심해 보기 바란다. 나는 ‘거미줄 제거 담당’, ‘나는 신발장 담당’, ‘나는 남자화장실 오른쪽 변기 담당’ 등... 그래서 교회 구석구석에 거미줄만 보면 다 제거하고, 신발장이란 신발장은 늘 검점하고 쓸고 닦고 해보시기 바란다.
단 우리들이 이 모든 일들을 함에 있어서 주의할 것은, 마태복음 6장 3-4절의 말씀처럼 은밀히 하는 것이다. 나는 뭘 했고, 뭘 얼마를 바쳤고, 나는 얼마나 많이 봉사했다는 식으로 나팔불며 자랑하면 안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 하늘의 보물이 쌓인다. 내가 뭘했다고 공개하면서 자랑하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 되고 만다. 주변에서 이 부분에서 무너지는 것을 종종 보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 그 이름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늘 주 안에서 믿음으로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오늘 선포한 말씀처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충성해야 한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손에 가진 것들을 가지고 갈 수는 없어도 미리 보낼 수는 있다. 기도와 전도의 열매를 미리 보내자. 구제와 봉사의 열매를 미리 보내자. 우리들의 생명을 부름받는 그 최후의 순간까지도 더욱더 주님을 위해 충성하자. 그래서 주님께는 잘했다 칭찬받는 성도가 되고, 후손들에게는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 살아있는 전도지가 되게 하자.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이 시간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
계 20장 11~15절 / 노경모목사(함께하는교회)
미국의 어느 대형교회 목회자가 ‘지옥은 없다’는 내용의 책을 발간해서 기독계에 충격을 주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복음주의자로 알려져 있던 미시건 주 마스힐바이블처치 담임인 롭 벨 목사는 자신의 책 ‘사랑이 이긴다’에서 ‘지옥은 없으며 인간은 죽어서 모두 천국으로 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전제에 있으며, 따라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해서 이 땅에 살아간, 그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서 고통받게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 분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주장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천국만 있고 지옥은 없었으면 좋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의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있던 한 부인이 목사님에게 자녀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있다고 대답하자 그 부인은 "그렇다면 질문할 것이 있는데요. 자녀가 고통 가운데 빠져 있어도 구해주지 않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야 물론 그런 아버지는 폭군이나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목사님의 대답에 부인은 "목사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권능을 가지시고 그 자녀들을 구원치 않고 지옥에 떨어뜨린다면 폭군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부인께서는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옥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명도 없답니다. 지옥에 있는 자녀들은 모두 마귀의 자녀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있거나 천국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이 목사님의 대답에 질문을 한 부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지옥은 없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을까요? 지옥이 무섭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죄짓고 나쁜 짓을 하면서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지옥이 있다는 것이 걱정이 되고 두렵고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참 좋을텐데 하는 생각으로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여튼 지옥이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다 죽게 되어있는데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고, 믿는 자는 천국으로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 성경해서 강조하고 있는 복음이 핵심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을 봅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오늘 본문 13절-15절의 말씀도 같은 내용입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자기의 행위 즉 예수 믿은 행위와 예수 믿지 않은 행위에 따라서 천국(영생, 생명)으로 가기도 하고 지옥(사망, 불못)에 가기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입으로 믿고 마음으로 믿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믿는 것입니다. 즉 믿은 자의 행함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로의 삶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려면 핍박을 받습니다. 남에게 비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손해를 볼 수 수 있습니다.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적당히 사는 것입니다. 나쁜 짓도 하고,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도 탐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기가 힘들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귀찮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나 천국은 가고 싶고 지옥은 가지 싫지요. 그러니깐 ‘지옥은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드디어는 ‘지옥은 없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지옥은 없었으면 참 좋겠다는 비성경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지옥은 없다라는 주장을 하는 이단에 속 빠지는 사람들이 참 많이 생깁니다. 교회 나가는 사람들 중에 이런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대표적인 이단이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지옥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영원한 고통을 주는 지옥으로 사람들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소수의 예수 믿는 사람들만 천국에 보내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는 그러한 잔인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에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랑의 하나님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불의에 속합니다.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사야 30장 1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사랑과 공의는 마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의 양면입니다. 둘 중에 하나가 없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의 국왕이 그 나라에 아주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에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나쁜 젓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두 눈을 뽑아 버리겠다고. 아주 무섭고 엄격한 왕의 명령 때문에 그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하가 아주 왕 앞에서 찾아서 말을 못하고 쩔쩔 맵니다.
왕이 왜 그러냐고 말해보라고 하니 신하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잡았습니다. 왕이 화를 내면서 그 놈이 누구냐 당장 두 눈을 뽑아 버려지. 신하가 대답을 못하자 왕이 신하에게 말하라고 다그칩니다. 이 때 신하가 할 수 없이 말합니다. 바로 왕의 아들이라고. 왕은 깜짝 놀랍니다. 신하는 왕에게 왕자가 그랬으니 한 번만 봐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합니다. 왕은 고민을 합니다.
왕자라고 살려 주자니 법은 만민에게 평등한데 아들이니깐 봐주고 이렇게 하면 공의가 무너지는 것이고, 그렇다고 아들의 두 눈을 뽑자니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나 아프고..
한 참이나 고민한 왕은 드디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이 되어 하니 아들의 눈을 뽑는 것은 당연하니 눈을 뽑도록 해라. 그러나 아버지인 나는 아들을 사랑하니 아들이 두 눈이 없으면 살아가기가 너무 힘드니 한 눈을 아들에게서 뽑고 한 눈은 내 눈을 뽑도록 해라.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왕의 사랑과 공의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지옥에 갈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죄인인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무조건 죄를 없이 해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대신 죄 값을 아들 예수님이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를 드려내신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이렇게 유혹하고 미혹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하나님인데 뭘, 지옥에 보내겠느냐? 아니야 지옥은 없어. 그러니 죄지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어, 내 다음대로 살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지옥은 상상의 곳이 아닙니다. 비유적인 곳이 아닙니다. 지옥은 실재적인 장소입니다. 예수님도 지옥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실재적인 장소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서 예비된 곳이 저주를 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실재적인 곳임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지옥은 영원히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에서 구더기고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으로, 마가복음 9장 49절에는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을 치듯함을 받는 곳으로, 누가복음 16장 24절에는 목이 말라 물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읽어 보겠습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는,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곳으로, 마태복음 26장 41절에는 영원한 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옥과 천국은 존재합니다. 지옥이 없다는 말은 천국이 없다는 말이요, 지옥이 있다는 말은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행한대로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냐 예수님을 믿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반드시 심판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천국에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읍시다.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의 삶의 열매가 나타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천국의 기업을 받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 얻는 믿음(12)-죽음 그 이후
계 20장 11~15절 / 최승윤목사
오늘 설교 제목은 “죽음 그 이후”입니다. 죽음이 주제입니다. 무더운 날씨에 다룰 수 있는 내용은 아닐 수 있겠지만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저런 사건들이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습니다. 이번 주에는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안타까움을 주는 것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그와 관련된 몇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생명을 갖고 태어나서 어떤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뿐 아니라 죽어서까지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끌고 칭송을 듣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경우 뉴욕 타임즈는 기사에서 미국 팝 음악 가수들을 마이클 잭슨가 나머지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그리고 마이클 잭슨은 팝 뮤직의 세개의 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마이클 잭슨의 음반을 산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7억 5000만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바꾼 것이 마이클 잭슨입니다. 수많은 후배 가수들, 댄스 가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가 벌어들인 돈도 어마어마합니다. 그가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그가 진 빚도 엄청나다고 하지만 그가 죽기 전에 살았던 임대주택은 한 달 렌트가 10만 불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는 이 땅에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도 각 방송사에서 그의 관한 특집 방송을 하고, 인터넷을 비롯한 수많은 방송 매체에서는 그에 대한 추모의 글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남들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쓸쓸하게 죽은 사람과 마이클 잭슨과 같이 전 세계사람들로부터 칭송과 안타까움을 한 몸에 받고 죽은 사람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땅에 살면서 큰 일을 하고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 마틴 루터 킹 목사나 간디와 같은 사람들, 아니면 히틀러나 연쇄 살인범과 같이 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칭송과 비난, 역사적 심판이라는 거창한 단어 조차도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해서 마이클 잭슨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는 것을 마이클 잭슨은 알고 있을까요? 그가 살았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과연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죽음 너머의 세계로 간 마이클 잭슨의 영혼과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내가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내용과 목표가 결정됩니다.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의 첫 머리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이 말이 옳으나 그르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알베르 까뮈의 문제의식은 과연 우리들이 지금 사는 삶이 의미가 있는 삶이냐? 이 땅에서의 삶이 가장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은 이 세상이 모순되고 부조리한 세상이라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에 10만 불씩 지불하며서 살고 있고, 어떤 사람은 평생 뼈빠지게 고생해 보아야 자기 집 하나도 제대로 장만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교 다닐 때 빈둥빈둥거리면서 공부도 못했던 친구가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어떤 친구는 밤잠 못자고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강사자리 하나 못얻고, 간신히 얻었다고 하더라도 온갖 멸시를 받아가면서 경제적으로는 제대로 생활할 수 없는 돈을 받아가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무능력하다고 무시를 당하고, 잔머리를 굴려가면서 이렇게 저렇게 아부도 하고, 배신도 하고, 남을 짓밟기도 하면서 자기 자리와 이익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능력있는 사람들이라고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과연 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만약 이 세상의 삶이 부조리하고 모순되었다면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없다면 참으로 허무한 것입니다. 살만한 가치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 바로 자살입니다. 부조리하고 모순 투성이인 세상, 그 부조리와 모순과 악과 부도덕함을 치고 나갈 능력도 없고,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자살입니다.
그렇다면 자살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일종의 도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피가 아니라면 자기를 압박해오는 세상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한 가지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역사 가운데 불의를 향해서 자기 생명을 던져서 저항했던 사람들, 복음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던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흘림으로 세상이 달라지고, 교회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를 죽은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사람의 죽음이 그대로 죽음 너머의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안락하게 사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즐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돌아보는 것은 사치요 낭비입니다. 한 푼이라도 긁어모아서 나를 위해서, 내 자식들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갖고 있는 재화를 최대한 이용해서 즐겨야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쾌락과 마음의 평안을 주는 일이라면 거기에도 돈을 써야지요. 어쨋든 나의 평안과 만족과 쾌락을 주는 것이라면 거기에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것을 바꾸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몸을 던져야 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김훈이 쓴 <<칼의 노래>>라는 책에 보면, 조정에서 전쟁의 성과에 대한 증거물로 외적들의 머리를 잘라서 바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정에 바쳐지는 적병의 머리가 사실은 조선 수군들의 머리입니다. 나라가 지켜줘야 할 자기 백성들의 머리를 오히려 그 나라에게 바쳐야 하는 그 부조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조정에서 요구하니 적병인지 자기 백성인지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머리를 잘라서 바치면 된다는 사람도 있겠고, 이순신처럼 그러한 부조리를 몸으로 저항하면서 그 저항으로 인해서 자기 앞에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몸을 던진다고 하더라도 죽음 너머의 세계가 없다면 과연 이 땅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그렇게 살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또한 그렇게 산다는 것도 너무 힘들고 어렵고 무겁습니다. 만약 죽음 너머에 세계에서는 이 땅에서 사는 삶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다른 기준을 갖고 한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참으로 허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십니까? 쾌락을 위해서?, 만족을 위해서?, 아니면 여러분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삶과 죽음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죽음과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과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오늘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과 믿음은 미래 어느 시점에 정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확실하게 붙잡고 있어야만 합니다.
죽음은 예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사(死)자라는 것도 저녁 석자에 비수할 때 비자가 합성된 자라고 합니다. 저녁에 갑작스럽게 칼처럼 떨어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는 죽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 죽음 너머의 세계를 믿는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고 악행했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책에 기록한 내용은 이 땅에 살면서 행했던 모든 행위입니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큰 것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저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과 저 세상은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완전한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저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받을 날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평가는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저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이 저 세상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저 세상에 대해서 모호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확연하게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저 세상에서 하나님께 올바른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내 중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이목과 칭찬과 비난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내 만족과 평안과 내 쾌락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마음을 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요 책임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각성하고 깨닫고 그 뜻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 뜻에 반대되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 저항을 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이라면 나를 부인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요, 집단이라면 이해하고, 용서하고, 용납합니다. 그것의 불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묵인하지 않고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말도 하고, 행동으로도 움직입니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있다는 것은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경거망동하지 않게 만듭니다. 동시에 소망을 갖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시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면서 흘렸던 수많은 눈물들, 가슴 아픈 기억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요구하는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립니다. 때로는 타협이요, 비굴이요, 굴복이라고 평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비난과 모욕을 달게 받겠다는 자세로 인내하고 견딥니다. 내가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충부하게 알기에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바라고 회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재림과 공의로운 심판을 믿는 사람의 삶의 과정이요, 목표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갈등하고, 흔들리고, 허우적거리면서도 삶과 죽음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하게 붙잡고, 그 예수만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 삶만이 영원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절 말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는 다른 문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음 저 너머의 세계를 본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완전하신 공의로운 판단을 받을 그 날이 있음을 믿는다면, 내가 사는 동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맛본 자로 사는 것입니다. 느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의 충동적인 감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내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신념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을 사실로 인정하고 지금 이곳에서 몸을 움직여서 사는 것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책임있게 사는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죄악과 부조리와 무의미하고 타락한 삶은 거부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는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쓰러지고 무너진다고 하여도, 그 삶만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것이며, 그 삶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삶이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요,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최후심판과 영원한 형벌
>성경본문|
계20장 11절 ~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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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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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홍도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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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0장 11~15절, 21장 8절
엊그제 헌법재판소에서 국민투표 없이 수도이전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났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최고의 법정입니다. 지방법원(1심), 고등법원(2심), 대법원(3심)이 있고 그래도 판단이 안 될 때는 “헌법재판소”에 올라가서 최종판결을 내립니다. 최고의 법정입니다. 그 이상 높은 법정은 없습니다. 헌재의 결정에는 가타부타 불평할 수가 없고 여기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는 최고의 법정이 또 하나 있는데 본문 말씀대로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의 심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상의 백보좌 심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최고의 법정을 모르고 있고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이 심판과 형벌을 면하는 법을 가르쳐드리려고 합니다.
1. 백보좌 심판과 영원한 형벌
이 세상의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이 최후가 아니라, 죄사함 받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다 평생 지은 죄를 낱낱이 드러내놓고 심판을 받아야 하고 그 형벌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그들이 형벌 받을 장소는 “불못” 혹은 “지옥”이라는 곳입니다. 오늘 그 광경을 기록한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20장 11~12절에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그 다음 14~15절을 보면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설명 드리면 사람의 무덤이 종착지가 아니라, 곡식을 심으면 죽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 수십 배, 수백 배 열매 맺는 것같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다시 사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두 가지 부활이 있다고 했는데 하나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생명의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심판의 부활입니다. 요한복음 5장 28~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두 가지 부활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본문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얻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선한 일은 구제사업이나 좀 하고 착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가장 큰 선행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죽은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생명의 부활을 얻고 새로워진 세상, 천년왕국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다가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즉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심판의 부활을 얻어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대에서 행위의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 즉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됩니다.
2. 지옥이 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모든 문학과 예술이 지옥의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걸작 “최후의 심판”과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의 명작 “신곡”에서 ‘지옥편’이 지옥의 끔찍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며 고민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이면서도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데 과연 그 사람들이 구원받았을까 의문이고 또 지옥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옥을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은 무서운 독약병에 해골 표시나 뼈의 ×표(crossbones)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같고, 바다에 암초가 있는데 등대를 헐어버리자는 것과 같고, 천연두나 독감 백신을 없애야 된다는 것과 같고, 방울뱀을 장님이 밟으려고 하는데 가만두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들은 친절이 아니라 잔인한 행동입니다.
A.C. Dixon 박사는 “만일 우리가 강단에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더 많이 했더라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지옥과 같은 현실이 더 적어졌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많고 교인도 많은데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끔찍한 죄가 날로 더해 가는 것은 지옥의 의미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옥은커녕 천국 설교하는 교회가 몇이나 됩니까? 사실 지옥이 없 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며 지옥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된 소식”이란 뜻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 예수님만 믿으면 값없이 구원받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무디(D.L. Moody)는 “만일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고 성경은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없다. 기존 예배당도 오락 장소로 바꾸어 써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주일날 지옥에 관한 설교를 했더니 공부나 좀 했다는 한 여자가 들어와서 항의하더랍니다. “목사님, 20세기에 무슨 지옥 설교를 합니까. 그런 구닥다리 설교는 듣기 싫습니다. 집어치우세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때 목사님은 웃으면서 “자매님, 사람들이 형무소를 싫어하고 사형받는 것을 싫어하지만 형무소를 없애야 합니까? 나라의 질서와 공의의 실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형무소도 만들고 사형집행도 하는 것입니다. 국민을 괴롭히고 겁주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알면 잘못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도 되시고 심판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는 해도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 심판 후에는 영원한 지옥과 영원한 천국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① 무신론자들의 증언
영국의 무신론자협회 회장으로 있던 Francis Newport는 죽어가면서 말하기를 “내게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집어치우라.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의 심판대 앞에 서 있다. 나에게 지옥이 없다는 말은 필요 없다. 나의 영혼은 이미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이여 나에게 소망이 있다는 부질없는 말은 집어치우라.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자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불란서의 무신론자이며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기독교가 건설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지만 불란서의 한 사람이 50년 안에 기독교를 다 파괴해버리는 것을 보여 주겠다”라고 하나님을 조롱하며 무신론 책자를 많이 썼습니다. 그는 또 “100년 안에 성경책은 다 없어진다”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그에게도 죽음이 다가오자 벌벌 떨면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였구나. 의사여, 나를 6개월만 더 살게 해주시오. 그러면 내 재산의 절반을 주겠소”라고 할 때 의사는 “6주간도 못 삽니다”라고 했더니 “그러면 나는 지옥으로 가는데 당신도 좀 같이 갑시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성서공회에서 그의 집을 사서 성서공회 창고로 삼았는데 성경책이 천장까지 차고 넘쳤고 성경은 지금까지 베스트셀러입니다.
Thomas Scott경이란 무신론자는 임종시에 말하기를 “나는 이제까지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 둘이 다 있는 것을 안다. 나는 전능자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하여 멸망으로 들어간다”라고 탄식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② 성경 말씀의 증언
예수님은 모세나 다윗에 대한 말씀보다 지옥에 대한 말씀을 더 많이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사람을 집어넣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만,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지옥은 애초에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범죄케 하 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한 것인데 사람들은 마귀의 거짓말을 믿고 따르다가 마귀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지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7~9절에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지옥을 말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하였고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했습니다(그 외에도 마25:30, 마13:40-42, 마25:41, 막9:43-44, 계1:7-9, 계14:10-11등).
3. 지옥은 어떤 곳인가
흔히 지옥은 사람들이 죄 짓지 말라고 겁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실재합니다. 실제로 고통을 느끼며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장소입니다. 강도는 그가 죽인 사람을 바라보며 양심의 고통과 불의 뜨거움을 느끼는 곳이며, 도박꾼은 많은 사람을 속이며 가산을 탕진한 것을 기억하며 고통을 느끼는 곳이며,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고집을 부리며 거절한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서 그때 예수님 믿어둘걸, 껄껄 하며 영원히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곳입니다.
①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입니다
“영원히 꺼지지도 않으며 벌레 한 마리도 죽지 않는 곳”(막9:48, 마5:22, 계20:10, 계14:15, 계21:8)이라고 했습니다. 하와이의 빅아일랜드에 가보면 땅속에서 용암이 조금씩 흘러나와 누런 유황이 올라와 쌓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옥불을 만들지 못하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집에 연탄불이나 가스불보다 더 뜨거운 불이 있는 곳입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은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셨는데, “여러분의 손가락을 불에다 대고 있어보라. 잠시 동안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온몸이 불에 들어가 죽지도 않고 영원히 있을 것을 생각해 보라”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나이다”라고 부르짖으며 “물 한방울만 손가락 끝에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하고 애원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내 집에 형제가 셋이 있는데 그들도 나처럼 지옥이 있음을 모르고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어 그 형제들이 여기에 오지 않도록 전도해달라”라고 애원했습니다만 세상의 목사와 전도자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은 사람은 죽은 자들이 벌떡 일어나 지옥을 말해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설교하다가 “육과 영의 모든 괴로움은 중단이 없다. 그들의 고난이 극에 달하고 그들의 고통이 극심하다 할지라도 단 한순간이라도 감소될 가능성이 없다”라고 했으며, 또 그는 “늘 천당과 지옥, 이 두 가지를 날마다 보기를 원하며 이성적이고 종교적인 모든 사람들이 천당과 지옥을 날마다 깊이 생각하기를 원한다”라고 했습니다.
② 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그 고통의 장소에서 다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영원히 나올 수 없습니다. 비상구도 없고 나가는 문도 없습니다.
③ 끝이 없는 곳입니다 천 년, 만 년 후에라도 끝나는 날이 있다면 소망을 가질 수 있으나 지옥은 영원히 계속되는 곳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퇴원할 날을 기다리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도 출옥할 날을 기다리지만 지옥은 영원히 고통이 계속되는 곳입니다. 지옥은 무시간상태(timelessness)가 아니라 끝없는 시간이 계속되는(endless time) 곳입니다.
④ 모든 종류의 사람이 섞여 지내는 곳입니다
예수님 안 믿은 사람은 다 지옥에 가는데 백인이나 흑인이나 대통령이나 노동자나 다 뒤섞여 고통받는 곳입니다. 귀족이나 천민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 해 전에 원자탄이 투하되었던 일본 히로시마에 가보고 새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원자탄 투하하기 전에 여러 가지 경고문을 투하해서 피난가라고 했습니다.
“광도 시민 여러분, 1945년 8월 6일 이전까지 50Km 밖으로 피난가십시오. 그날 원자탄이 투하될 터인데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그러나 그 경고문을 받아본 사람들은 대개 코웃음치고 비웃었습니다. “전쟁에 패하게 됐으니까 공갈친다”, “30만 명이나 죽는 폭탄이 어디 있어”, “피난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두고 보지 뭐” 하고 주저앉았고 극소수의 사람만 피난 가서 살았습니다. 거의 다 타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참된 경고를 믿지 않고 비웃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코웃음 치지 마십시오. 아무리 죄 많은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천국 생명책에 기록되었으니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따라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이 죄인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영원한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최후 심판과 불신자
계 20장 11~15절 / 김홍도목사
1976. 4. 4. 3,000명 돌파 기념보고 저는 오늘 아침 이 세상에서 오늘 하루만 살고 죽을 사람들을 위하여 마지막 설교를 하라고 한다면 이 내용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치 못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내일 일 일년 후의 일이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우리는 모두 다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라 고 하셨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 놓을 때가 있고 면양과 산양을 갈라 놓을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에 보면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2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심판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기를 거부한 모든 죄인들에게 행하여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서 거행되는 것입니다. 이 최후의 대심판은 언제 행하여지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천년왕국 통치가 끝나고 영원무궁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에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은 천년왕국 시작 직전에 부활과 더불어 상급받는 심판이 행하여집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천년왕국 끝에 행하여집니다.
사도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밧모섬'에 귀양가서 외롭게 지낼 때에 깊이 기도하던 중 장차 될 일에 대해서 계시를 받고 이 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천국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지옥과 불쌍한 죄인들에게 나타나게 될 최후의 심판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심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심판할 때에는 반드시 심판자가 있는 법입니다. 성경에는 이 심판이 너무 크고 엄숙한 사실이어서 하늘과 땅도 그 앞에서 간 데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 심판주는 한 분이신데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은 우리의 구주가 되시지만 그 때에는 심판자가 되십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부르고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지만 그 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한 모든 사람들을 엄하게 심판하시게 되십니다. 여러분,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도 있고 여러분의 생활에서 내어 쫓을 수도 있지만 최후의 심판 때는 당신의 심판자로 오시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지만 그 때에는 오직 공의로 심판만을 단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온무리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실 때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가 그로다(I am He)라는 한 마디만 하셨는데 그 권능이 너무 커서 그들이 뒤로 나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벗어 놓고 오셨는데도 그렇게 능력이 많거늘 만일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심판하실 때에는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 때에 그를 배척하고 죄만 짓고 제멋대로 살던 모든 사람들은 슬피 울며 탄식하여 그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1절에 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 가는 것이 무서울진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잃어버린 죄인들에게만 행해지는 심판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 앞에 나오기를 거절한 사람에게만 행해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마음대로 죄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흰 보좌 앞에서 권세와 능력으로 나타나시는 예수님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예수를 배척한 죄가 얼마나 무섭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죄를 짊어지시고 갈보리 산상에서 죽임을 당하신 다시 말한다면 당신이 거절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가 되실 것입니다.
<2. 심판받을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계시록 20장 12-13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어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아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심판받기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 행위대로 보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을 불문하고 예수를 거절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끔 출석하고 헌금도 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지 않은 사람은 다 잃어버린 죄인이라고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백보좌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최후 심판대는 큰 자나 작은 자나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다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나는 별로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았으니 나 같은 사람쯤이야 빼놓겠지 할지 모르나 결코 그 심판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을 것입니다.
바다도 죽은 자를 내어 주고 음부도 죽은 자를 다 내어 놓아서 부활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영혼은 낙원에 있다가 주님 재림시에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의 영혼은 음부에 있다가 천년왕국 끝에 부활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추수날에 쭉정이는 불구덩이에 던지고 알곡은 창고에 들이는 것처럼 이렇게 영원히 갈라지는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조롱할 수도, 멸시할 수도 있고 또 예수님을 배척할 수도 있으나 그날에는 백보좌 앞에서 떨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그날에는 그들이 어린양의 얼굴을 피하여 숨으려고, 바위야 나를 가려라, 산아 날 가려라 하고 부르짖게 된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 곳에도 숨을 곳이 없고 아무도 구해 주는 이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당신의 생활에서 예수님을 저버릴 수 있으나 어느 날엔가는 당신을 심판대 앞으로 끌고 갈 때가 틀림없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빌라도도 거기 있을 것이며 예수님을 판,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한 가룟 유다도 거기 나타날 것입니다. 히틀러도 뭇솔리니도 스탈린도 김일성도 모두 피로 기록된 사실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배척한 모든 사람들은 그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과 만나기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약속은 어길 수 있으나 그 약속만은 어길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시간에 늦을 수도 있으나 그 때에는 시간을 어김없이 지키게 됩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범죄하고도 법관을 피할 수 있고 잡히지 않고 일생을 지낼 수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들은 한 사람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안 믿을 수도 있고 교회에 안 나올 수도 있으나 그 때에는 심판대 앞에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일지라도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은 그곳에 서게 될 것입니다. 흉악한 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이 다 회개치 않았으므 로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모든 믿지 않은 사람들은 다 그곳에 서야만 되는 것입니다.
<3. 심판받을 기록은 무엇이겠습니까?>
죄인들이 그 때에 가서 천국이냐, 지옥이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사실을 판정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거부했을 때 이미 지옥의 판결로 결정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예수님을 보내서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예수)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 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이란 자기가 행한 업적에 따라 되는 줄 압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이 일생동안 행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서로 대조해서 만일 선행이 악행보다 믿으면 구원받고 악행 이 선행을 능가하면 멸망받는 줄 압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구원받느냐, 또는 멸망의 처지에 떨어지느냐 하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였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하고 신앙 생활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책들을 펴 놓고 그 책의 기록에 의해서 죄인들을 심판한다고 하셨습니다.
멸망받을 사람들이 지옥에서 받을 고통의 돗수는그 행위에 따라 정하여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고통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옆에 생명책이 있다고 했는데 거기에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들도 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지만 천국에서 받을 상급은 역시 그가 행한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의 일을, 봉사를, 전도를, 구제를 많이 했느냐에 따라 상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도 등급이 있고 지옥에도 등급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갈라지는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 여부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 좌우간 모든 사람은 다 책을 한 권씩 쓰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그 책이 열려질 때는 그가 말한 것, 생각한 것, 마음먹은 것, 행동한 것, 시기한 것, 음란한 마음 가졌던 것까지 모두 기록되어 나타납니다. 아내 모르게 은밀하게 행한 것, 남편 모르게, 부모 모르게, 아무 사람 모르게 행한 은밀한 것이 다 기록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행한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TV에 보면 수사관이나 간첩들이 그 사람이 한 말 한 마디까지 녹음해서 틀어 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워터 게이트(Water gate) 사건도 비밀로 녹음장치를 했다가 그것이 만인 앞에 밝혀져 대통령까지 물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것보다도 더 완전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최후심판대 앞에서 사람들이 나는 이런 짓 안 했어요, 나는 그런 말 안 했어요 하겠지만 여기 그 기록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책을 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책을 계속 기록하고 계시며 또 보존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모든 죄가 흰 보좌 앞에 나타나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웹스터(Daniel Webster)란 사람이 말하길 "나에게 제일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하는 모든 일을 이 다음에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책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4. 심판의 결과는 어떤 것인가?>
본문 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이 끝나게 되면 그 죄의 정도에 따라 지옥에서 형벌이 가해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거절한 모든 사람들은 불못이라고 불리워지는 고통의 장소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이 받을 고통을 가히 상상도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떨어지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영원히 이별하고 세상에서 즐기던 모든 좋은 것들과도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그는 고통을 받으면서 계속 부르짖기를 소망이 없구나 소망이 없구나 할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10절에 보면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마귀와 함께 그곳에 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대신 마귀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마귀와 더불어 고통을 받으며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곳에 들어가 살 사람들은 누군가 하면 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 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 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고 한 것과 같은 사람입니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가장 흉악한 자들과 함께 지내는 장소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지옥에 갑니까, 술취한 것, 간음한 것, 도둑질한 것, 살인한 것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믿기를 거부한 것 때문에 지옥에 보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죄는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들입니다.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모든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옥이란 어떤 장소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이요, 영원한 형벌만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잠도 못자는 곳이며 쉬지도 못하고 소망도 없고 목이 타서 물 한 방울만 달라고 울부짖어도 거절되는 장소입니다.
여러분, 이곳을 면키 위하여 왜 지금 주 예수께로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 때에 주님과 함께 심판을 돕기 위해 그곳에 서게 됩니다. 심판이 끝나면 어디로 가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운 천국으로 옮겨져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우리는 거기서 영원히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善)해서도 세례를 받았기 때문도 십일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로 나갔기 때문에 우리를 받아주셔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냉장고, 자가용, TV, 피아노를 놓고 정다운 처자식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겠습니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했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삶이겠습니까? 노아를 비웃던 사람들 롯을 비웃던 사람들이 불에 타 죽듯이 최후의 대심판을 비웃던 무리들은 다 이와 같이 될 것입니다.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닥쳐오고 있으니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고 예수께로 빨리 나오라고 하면 비웃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모든 생각을 멈추고 조용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결말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종말은 우리의 생각보다 빨리 옵니다. 최후의 대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서 구원받고 영원한 기쁨의 삶을 향해 새 출발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두 가지 최후심판
계 20장 11~15절 / 김홍도목사
오늘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무척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써가면서 점쟁이나 예언가들을 찾아 다닙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예언가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인간들에게 말씀으로 깨우쳐 주고 경고해 주고 책망을 해 줄지언정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점쟁이들처럼 예언해 준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일 없었고,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어느 누구도 예언 은사를 받아서 궁금증을 가지고 찾아 온 사람들에게 점치듯 그들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예언해 준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악령에 의해서 한 일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성경을 찾아 보고 성경에 비추어 보며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죽음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27에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심판의 확실성>
사람들은 인생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지 죽은 후에 무슨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9:27 말씀과 같이 사람이 한 번 죽는 것과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여러분, 농사를 지으면 논과 밭에 심은대로 가만 내버려 둡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거둬들여서,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 놓는 타작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20:11-15에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곳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들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매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또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죽은 후에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일제히 다 불러다가 어떤 사람은 오른쪽에, 어떤 사람은 왼쪽에 즉 어떤 이는 천국에 어떤 이는 지옥에 보내는 줄로 알고 있으나 이것은 진정한 성경적인 심판의 개념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 심판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멸망은 여기 세상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죄인은 동시에 심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었던 사람들은 부활하여 맞이하고, 살아 남았던 성도들은 번데기가 나비로 변화되듯이 홀연히 변화되어 다 함께 들림받아 상급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행한 일에 따라서 상급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림후(혹은 천년왕국 시대 후) 최후에 다 부활해서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 서서 그 행한 죄악의 정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심판에 이르기 전에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면 멸망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는 것이요 도리어 그 전에 구원받아 상급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 불못에 던지우게 됩니다.
최후심판 전에 이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의 심판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자연법칙을 어기면 고통을 받게 되고, 손가락을 불에 대면 데게 되고 거짓말하면 거짓말쟁이가 되고, 도적일하면 도적놈이 됩니다. 그리고 양심의 심판도 받고, 질병을 통해서도 받고, 자식을 통해서도 받고, 물질을 통해서도 받습니다. 죄의 씨앗을 뿌리면 어느 정도 이 세상에서도 그 열매를 거두는 때가 옵니다. 모든 문명한 나라는 어느 정도의 공의도 가지고 있고, 법정과 재판소를 가지고 있어서 법을 어긴 자를 심판하고 형벌을 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공의와 심판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공의와 심판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공의와 심판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완전한 공의와 심판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어떤 사람은 양조장을 해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하고 더 가련하게 만들었습니다. 직업을 잃고, 가정을 잃고, 영혼을 잃게 만듭니다. 아내들은 술 때문에 울어야 하고 아이들은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헐벗어야 하고 가정이 파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술을 만들어 판 사람에게 심판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케네디(Kenedy) 대통령의 아버지가 양조장으로 술을 팔아 거부가 되었지만 자식들이 중풍으로 누워 있고 비행기 추락으로 죽고 아들 둘이 다 젊은 나이에 암살 당해 죽는 것을 보고 뉘우치기를 내가 평생 술로서 많은 가정을 파괴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의 가정을 파괴하신다고 했답니다.
포주 노릇하면서 많은 여자들의 정욕의 희생물이 되게 한 사람들, 고리대금업으로 많은 사람들의 고혈을 짜 먹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없겠습니까?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도 진정한 신앙은 없이 마귀편에 서서 교회를 파괴하는 가룟 유다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어떤 신학 교수들은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믿음을 무너뜨리고, 성경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아담(Adam)과 이브(Eve)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에덴(Eden)동산에서 쫓아 냈습니다. 아벨(Abel)을 죽인 카인(Cain)을 저주했습니다. 죄악이 관영했을 때 홍수로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죄 때문에 많은 도시와 국가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말라기 3:6에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신대로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전도서 11:9에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 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쫓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 12:14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엉터리 신자가 죽어가면서 "내가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믿었더라면 나는 평안히 죽을 수 있었을텐데…" 하면서 괴로워 하며 죽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은 있습니다.
<2. 불신자의 심판>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습니다. 심판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만 심판을 받습니다. 악한 자들만이 아니라 믿음과 생활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다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8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아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기에 흉악한 죄인들 뿐만이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교회 명부에는 올랐어도 참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선악의 문제나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중생했느냐 못했느냐의 문제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믿고 구원을 받든지, 아니면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예수를 대면하여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못에 던지우든지, 둘 중에 하나로 선택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37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지옥의 공포와 영원의 길을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 심판의 성질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① 그날이 확정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7:31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카렌다(Carendar)에는 표시되어 있습니다.
② 많은 무리가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남녀노소, 부한 자, 가난한 자, 선한 자, 악한 자 등 많은 사람들이 내어주고 이 세상 왕들이나 장군들도 모두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자면 아무리 훌륭해도 상관없이 거기 서야만 합니다.
③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6:15-17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에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산과 바위도 모든 것을 보시는 주님으로부터 숨겨 주지 못합니다. 숨겨 준다면 산과 바위도 다 둘러엎어 버릴 것입니다. 일본에 원자탄이 떨어졌을 때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래도 그 중에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날 백 보좌의 심판을 피할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④ 그 심판주는 이미 지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여자가 남편을 끔찍이 사랑하고 위해 줬지만 결국 그 남편이 등을 돌리고 다른 여자에게 갔습니다. 이 여자는 너무 분해서 두 주먹을 쥐면서 지금도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고 말하더랍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십니다. 당신 대신 죽어 주시고 생명을 주시면서 구원받기 위해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사랑을 거절하고, 배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심판의 날에 무서운 진노로 바뀌어 집니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브라질(Brazil)에서 한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영국에 가서 큰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두 나라 대사들이 그의 생명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브라질에서는 그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려고 했습니다. 사형 집행하는 날 아침 갑자기 영국 대사가 나오더니 그 사람 몸에 영국 국기를 둘둘 감아줬습니다. 조금 있더니 미국 대사가 나와서 미국 성조기를 몸에 둘러줬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돌아서서 "자, 쏠테면 쏘시오. 이 국기의 배후에는 이 세상 최대의 육군과 세상 최대의 해군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할 수 없이 브라질은 총 뿌리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으면 심판 날에 마귀가 여러분을 지옥으로 끌고 가지 못합니다.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최후 심판 때에 구원받은 성도는 나타나질 않게 됩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둘째 부활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첫째 사망은(육신의 죽음)은 당했으나 둘째 사망, 즉 영혼의 죽음은 당하지 않게 됩니다.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3. 신자의 심판은>
①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이미 정죄가 지나갔습니다. 로마서 8:1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정죄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대가를 피로써 지불하셨습니다.
② 상급받는 심판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심판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주를 위해 수고하고 봉사한 모든 행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면류관과 상급으로 보상받는 때입니다.
지금은 교회를 위해서 주의 사업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쓴 일에 대해서 완전한 축복과 상급이 안 나타나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완전히 나타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대체로 축복과 보상을 체험하지만…… 옛날 어떤 부자가 외출하면서 까다로운 일을 시켰습니다. 자기가 들어올 때까지 가는 새끼를 곱게 꼬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하인들 중에는 투덜투덜 불평하면서 아무렇게나 새끼를 꼰 사람도 있고 주인의 명령대로 정성을 다해서 새끼를 가늘고 길게 꼬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하인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하는 말이 "사실은 너희들이 그동안 우리 집에서 수고를 많이 했기 때문에 오늘은 각각 상을 줘서 평안히 나가 살도록 하기 위해서 새끼를 꼬라고 하였다. 이제 너희들이 꼬은 새끼줄을 가지고 광에 들어가서 엽전을 마음껏 꿰어 가지고 나오너라" 했습니다. 물론 굵게 꼬거나 조금 꼬은 하인들은 돈을 많이 꿰어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해서 상급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심판에서 생명으로
계 20장 11~15절 / 서금석목사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마음 편하게 웃어가며 듣기에는 너무 무겁습니다. 하지만 듣고 나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그림을 봐주세요? 한 남자가 턱에 손을 괴고있는 모습. 유명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지옥문 앞에'라는 부제가 달린 작품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 편에 나오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만들어진 조각상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제목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지옥문 앞에'라는 제목은 별로 타당한 제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옥문 앞에까지 갔다면 이미 그것으로 끝입니다.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지옥문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그래서 약간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름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멀리서 지옥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직 그 문 앞에 다가가기 전까지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은가? 예수님을 믿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나 또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모두가 우리 앞에 있는 최후의 심판, 지옥, 영원한 불 못, 분명 최후의 종점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턱을 괴면서 '생각하는 사람'처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그만큼 심각한 과제요, 엄숙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나 심판을 우습게, 또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조시대 때 한 선비가 죽게되자 옆에 있는 한 사람이 "죽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하고 물었더니, 선비가 대답하기를 "나도 처음 겪는 일이라 잘 모르겠오"그랬다고 합니다. 참 익살스럽기도 하지만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죽음에 대해 "내가 언제 죽어봤냐? 죽어보면 알겠지"하며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죽음 그 이후에 대해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문제는 세상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미지의 세계가 아닙니다.
히 9:27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20:11-15을 보면 죽음 후에 우리 앞에 나타날 심판, 예수님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나타날 심판, 재림 전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육체가 땅에 묻힘과 동시에 이미 그 첫 맛을 보아야 할 심판, 그 심판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심판은 엄연한 사실이며, 누구도 이 진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심판과 영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1. 심판은 행위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12절 후반절에 보면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들이 세상에서 했던 자신의 행위를 따라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대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 중요한지 13절 후반절에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구원은 무엇으로 받습니까? 믿음으로 받습니다. 믿고 나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조건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지혜로우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아주 우습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믿음보다 무언가 선행을 하고, 남 앞에 두드러지는 착한 일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하면 굉장히 심각하게 듣고 고개를 끄덕끄덕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기만 하라고 하면 씩 웃고 쳐다보기만 합니다.
사람들이 선행은 굉장히 좋게 평가하면서 믿음은 아주 우습게 평가해 버립니다. 그래서 선행을 따르는 사람들의 그 선행이 얼마나 멋있는 선행인가를 하나님이 테스트하기 위해서 심판하는 자에게는 믿음을 묻지 않고 자기가 자랑하고 높이 평가하는 선행을 내놓도록 합니다.
여러분! 솔직히 하나님 앞에 선한 일한 것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하면 자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22이하에 보면 , 교회에 다니면서도 엉터리로 믿는 사람을 심판할 때도 하나님께서 행위를 가지고 심판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믿음 없이 교회만 다녔다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까? 아니 언제 우리가 선행을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행위가 이렇습니다"하고 항변합니다.
심판대 앞에서 이들은 조그마한 것이라도 내보이려고 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참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닙니까? 사실 양심적으로 돌이켜보면 선한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고 선한 일을 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자기 내면에 보이지 않는 이익이 있으니까 한 것일 뿐입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잘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저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구원은 믿기만 하면 은혜로, 값없이 받을 수 있지만 믿음 없이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의 행위로 인해 심판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진정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사셨습니까? 대부분 '아니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심판은 몸과 영혼이 함께 받습니다.
심판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몸과 영혼이 함께 심판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전부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0:28에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심판은 영혼만 받는 심판이 아닙니다. 몸과 함께 받는 심판입니다. 완전한 인격체로 받는 심판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어떤 사람이 죽는다면 그 영혼은 지옥에 갑니다. 그러나 아마 그 지옥의 형벌은 마지막 심판을 받고 다시 들어가는 지옥의 형벌에 비하면 좀 덜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영혼만이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육체가 모두 다시 부활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을 신령한 몸, 또는 지옥에 들어가도 불에 타지 않는 어떤 영적인 몸을 입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그 무서운 지옥에는 영혼만이 아니고 몸도 함께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옥은 소망이 전혀 없는 절망의 자리입니다.
단테가 말하기를 "지옥의 문에 붙어 있는 팻말에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절망입니다.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후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바로 믿는다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면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옷을 벗고 그 날 밤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밤중에 자다가도 기회를 놓치고 영원히 가버릴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안심하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3.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이 세상에 어차피 의인은 없으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 다음에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느니라.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나는 의사야, 나는 병자를 위해서 왔다.
여러분 병자의 치유의 희망, 병자가 고침을 받고 건강을 향해서 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은 뭘까요? 그것은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의사 앞에 나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아파요. 제 여기 아파요 막 쑤시고요, 결리고요, 괴로워요, 아파요. 이것이 정확한 진단의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치료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건강의 시작인 것입니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날, 이 세상에서 내 삶이 끝나는 그 순간용서 받은 자로 하나님나라 천국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지난날을 돌이키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지난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십니다. 흠 많고, 연약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 여러분들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시편139편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나의 앉고 일으서심을 보셨나이다. 나의 생각을 통촉하십니다. 주께서 나의 행동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내가 하늘 저 높은 곳에 가서 거할지라도 내가 저 음부의 깊은 곳에 가서 눕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저 바다 끝으로 새벽날개를 치면서 가서 거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보시고 나를 아시나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인생을 지어 만드신 창조주, 우리의 낱낱이 모든 행동과 생각을 살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이것을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죄 범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무슨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까? 아무도 안 보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데, 아니요! 불꽃같은 안목으로, 그렇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불꽃같은 안목으로 나를 꿰뚫어 보시고 내 깊은 패부를 살피시며 내 생각의 밑바닥을 살펴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내가 그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한다면 죄를 범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이것은 회개의 시작이에요. 회개의 시작. 벌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시작이에요. 내가 범한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내가 주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 두렵습니다. 떨립니다. 내가 이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을 것인가?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시고, 구원자이십니다.
어떤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에 밀림을, 정글을 마을 마을을 찾아다니다가 길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 토인 아프리카 정글지대에 살고있는 토인 하나를 길잡이로 자기 가이드로 고용을 했습니다. 내가 어느 마을에 가기를 원하는데 나를 거기까지 데려다 달라고, 자, 그런데 이 청년 가이드가 그래요? 저를 따라오세요. 돈을 주기로 하고 가이드를 고용하고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전혀 길 같지 않는 길로 계속 그냥 가는 거에요. 이게 어디? 정말 그 마을이 나올까? 그래서 가다말고 선교사님이 정색을 하고 말했답니다. 그 청년에게 당신 길을 아시오? 이때 토인청년은 빙그레 웃으면서 선교사를 바라보면서 이 선교사의 평생 잊지 못할 대답을 하더래요. 선교사님, 제가 길이에요. 내가 길이에요. 아임 더 웨이(I am the way)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길이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순종한다면 죽음 너머에 있는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중의 세 가지 책
계 20장 12~13절 / 최건호목사
인생은 한권의 책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초판 밖에 낼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이 대신 써 줄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 책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 모두 끝나며 오래 남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책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이 세 책들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책은 행위의 책입니다. (계 20:12)
성경은 모든 인생의 기록이 하나님 앞에 남겨져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우리의 행동과 결과들이 모두 잊혀지고 지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 때 모든 사람들이 그의 행위대로 심판 받게 될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책들이 있는데 그 책들 가운데에는 우리의 행위들을 모두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이 행위의 책에는 각 사람의 말과 생각을 포함해서 그들이 행동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스스로 속지 말라. 너희가 무엇을 행하든지 너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심은 대로 거두리라. 너희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심판 받는 것을 기억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절대 후회할 일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책은 생명의 책입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기록들은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국가 기관이나, 군부대, 주민등록번호, 학적부 같은 많은 기록들이 우리의 신분을 보장해주며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켜줍니다. 요한복은 3장 16절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 자들은 천국의 시민으로 새롭게 등록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리라. 이 약속을 믿은 사람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책은 기념의 책입니다. (말 3:16)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여호와를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의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이 기념의 책에는 천국의 선한 일군들의 이름과 수고가 기록되어진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역사 속에서 충성과 헌신을 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는 책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에만 기록되어도 영광스러운데 하물며 종말의 날에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이름이 이 기념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서 하나님 앞에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님의 선한 일과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을 때 시간과 기회와 능력을 주실 때 최선을 다해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들이 되라. 그러면 너희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을 알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의롭고 선한 행위로 열매 맺도록 값있는 땀, 값있는 눈물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 책에 우리의 이름과 행위들이 모두 기록되어짐을 잊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도록 힘쓰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