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로 손을 씻는 이 저녁에 (외 2편) 이기철 어디엔가는 아름다운 세상이 움 돋고 있을 것 같아 소낙비 트리트먼트로 머리 감은 나무 아래서 나도 비눗물을 풀어 세수를 한다 지우산을 펴는 것은 하늘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게 부끄럼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꽃씨 하나를 아기처럼 보듬는 저녁이 한 해를 반짇고리처럼 요약하는 날은 내 틀린 생각들을 불러내어 자주 회초리를 친다 수많은 책과 금언들을 지나왔지만 아무도 아름답게 세상 건너는 걸음걸이를 가르쳐준 사람 없다 위태로이 담을 건너면서도 하얗게 웃는 박꽃같이 사는 법을 말해준 사람 없다 내 무신론의 아름다움이여 길을 가다가 우물물이 흐려질까 나뭇잎을 건져내는 사람 만나면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이 시대를 건너갈 것이다 이슬로 손을 씻는 이 저녁에
영원 아래서 잠시
모든 명사들은 헛되다 제 이름을 불러도 시간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금세기의 막내딸이 오늘이여 네가 선 자리는 유구와 무한 사이의 어디쯤인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영원은 대답하지 않는다 어제는 늙고 내일이 소년인가 오늘의 낮과 밤은 어디서 헤어지는가 이파리들이 꾸는 꿈은 새파랗고 영원은 제 명찰을 달고 순간이 쌓아놓은 계단을 건너간다
행간
행간을 돌아 나오는 동안 가을이 저물었다 오후 6시의 행간은 정원보다 깊다 원시原始로 가려면 낙엽신발을 신어야 한다 한 번도 휴식해 본 적 없는 태양과 잠을 모르는 지구가 고대의 말소릴 잊지 앉고 여기까지 데려왔다 소리의 칸칸을 지나면 몸 안의 각지各地에 파도가 인다 그 지명들을 내 편애의 언어로 불러내면 불현 듯 고왕국으로 가는 차표를 사고 싶어진다 진번 임둔으로 가는 매표구는 어느 페이지에 있을까 바빌론 카르타고로 가는 선편船便은 어느 쪽에 있을까 목차를 매표하는 동안 참깨 씨가 재재발리 저녁 종을 친다 설화의 사랑에 열광했던 낙랑을 생각하며 나는 비로소 페이지를 닫고 바이칼로 가는 길을 묻는다 가위로 자른 저녁놀이 색실처럼 풀려 어깨에 걸린다 먼 곳은 멀어서 더욱 그립다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2021. 12 <2022 목월문학상 수상시집> ----------------------- 이기철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으로 시 등단. 시집 『청산행』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산산수수화화초초』 등 다수. 현재 〈여향예원, 시 가꾸는 마을〉운영. 영남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