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디
27.
[ 덜컹- ]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을 먹으려 일어나는 연이와 지안, 다미. 그 때, 강의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는 기후.
평상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거친 모습에 당황한 과 아이들은 슬금슬금 기후를 피해 뒷문으로 나간다.
뭐야? 같은 과도 아닌 사람한테 왜 쫄아? 그리고 다 끝난 마당에 오긴 뭐하러 온거지? 쪽팔릴텐데.
"연아."
"아."
"나와. 할말이 있어."
"난.. 없어."
"뭐?"
"난 없다고."
기후가 빠르게 다가와 연의 손목을 잡고 나가려하자, 그 손을 뿌리치며 말하는 연이.
그러자 당황한 기후가 연이를 바라본다. 어제 쓰러졌다고 들었던 기후는 차마 힘을 쓰지 못하고 바라만 본다.
박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구나. 거참. 남자가 여기까지 왔으면 힘있게 끌고가야하는 거 아냐?
"난... 난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연아. 이게... 이 상황이..."
"다 끝났어. 끝난 일로 우리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말자."
"강 연!"
"말했잖아. 다 내 잘못이야. 그래, 내가 잘못해서 이지경까지 왔어. 그러니까 그만하자."
"내가 지금 그것때문에 온 게 아니잖아! 누구 잘못이라고 따지려고 온것같아?"
"아니면 뭔데?"
전과는 다르게, 착하고 밝았던 연이가 아니다. 기후는 달라진 연의 눈빛을 보며 놀란 숨을 집어삼킨다.
뭐가 연이를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설마. 기후는 연이 옆에서 태평하게 구경하고 있는 지안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저 남자가 연이를 이토록 달라지게 만든 것일까? 어째서? 그렇게 착했던 연이가 어떻게?
"여,연아."
옆에서 지켜보던 다미가 안절부절해하며 연이의 손목을 잡는다.
아, 맞다. 다미를 내보내야하는데. 아직 다미는 이런 내 모습 보면 안되는데, 너무 들떠서 깜박했다.
이제부터 시작될 드라마에서 첫 스타트는 박기후다. 그러니 다미는 이쯤에서 퇴장시켜야겠네.
"다미야. 먼저가서 자리잡아줄래? 금방 따라갈게."
"응?"
"걱정하지말고 먼저가. 정리되면 다 말해줄게."
"아...알았어."
연이 조용히 말하자 지금은 자신이 끼어들어선 안되는 상황임을 파악한 다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히 연이가 다 말해준다고 했으니, 조만간 다 말해줄 것이다. 연이는 한입가지고 두말할 사람이 아니니.
다미가 강의실을 나가자 지안이 흥미롭다는 듯 뒷자리에 있는 긴 책상에 걸터앉아 대놓고 구경한다.
"너...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변해?"
"변하다니?"
"연아... 넌 이런 애가 아니잖아.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야?"
"아닌데? 나 원래 이런 애야. 그리고 이렇게 찾아와서 따지지마. 이젠 질렸어."
"뭐?"
다미가 나가자마자 달라지는 연이의 태도에 당황할 틈도 없이, 질렸다는 연이의 말이 비수가 되어 기후의 심장을 찌른다.
원래 이런 애였다니. 말도 안된다. 연이는 그런 애가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기후는 아직도 두달동안 함께했던 연이의 모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아,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어. 내가 이런 사람을 사귀었다니. 역시 돈보다는 사람인거였어.
"더이상 나랑 엮일 생각하지말고 꺼져. 반갑지 않으니까."
"내가... 내가 어디가 싫어? 고치면 되잖아, 연아. 다 말해. 다 고칠게."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고쳐? 난 그냥 당신같이 여자한테 한없이 착한 거 싫거든."
"좋다면서! 내가 좋다고 그랬잖아! 착해서 좋고 말썽 안피워서 좋다며!"
"그거야 당신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지."
뭐야, 숨은 야성미라던가 박력같은 거 없어? 왜 이렇게 미적대? 고치긴 뭘 고쳐, 타고난 것을.
연이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지안 옆으로 가 책상에 같이 앉는다.
저번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숨기려면 들키지나 말던가. 맞고 있기나 하고, 반항도 안하고. 참나.
그러면 누가 멋있다고 좋아해줄줄 알았나? 말 안하면 어떻게 알아줘? 맞춰주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똑똑히 들어. 두번은 말 안해. 나, 이 남자가 좋아. 그래서 당신 버리고 이 남자 선택했어."
"연아..."
"나는 착하고 내 말 잘 듣는 남자보다 나를 잘 알아주는 남자가 더 좋거든."
"나만큼... 널 잘 아는 사람이 어디있다고 그래?"
"아니, 당신만큼 날 모르는 사람도 없지. 그러니 그따위로 집착질이나 했던거 아냐? 날 못 믿어서."
아직도 내 거짓된 모습에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네. 그게 진짜 내 모습일거라 생각하고 있는거야?
바보 아냐? 내가 이렇게 나오는데도 이게 거짓이라고 생각해? 어쩜 저리 멍청할 수가 있지?
한심하다 못해, 어이가 없다. 그렇다면 나도 제대로 해야겠는데? 내가 어떤 여자인지 알려줘야겠어.
"하. 좋게 말할 때 좀 꺼져주지."
"연아?"
"내가 굳이 이렇게 입 밖으로 말을 해야겠어? 꺼져.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너... 정말...."
"응. 정말 이런 여자야. 당신이 그동안 속았던거야. 왜냐고? 당신 돈보고. 나, 당신 돈 때문에 사귄거였어."
"뭐? 내... 돈?"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사달라는 거 다 사주길래. 그런데 이제 질려. 돈따위 필요없으니까 꺼지라구요."
설마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 설마. 경영학과인데. 꽤 머리 잘 돌아갈텐데.
기후는 연이의 말이 충격인 듯 멍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껏 웃어준 게 다 돈 때문이라는 건가?
시사각각 변하는 기후의 표정을 보다 연이 지안을 쳐다본다. 기후의 표정을 보며 재밌다는 듯 웃고있는 지안.
"재밌어?"
"응."
"왜?"
"지금이 내가 가장 원했던 순간라서."
연이가 기후를 차는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었는지 연이는 모를 것이다. 연이 모르게 얼마나 많은 협박을 했었는지도.
하지만 번번히 연이는 자신을 사랑한다며 끝까지 헤어지지 않았던 기후이기에 미치는 줄 알았던 지안.
그랬기에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재밌고 행복하다. 연이가 직접 기후를 자신 앞에서 차고 있다. 그것도 참 매정하게.
"이제야 좀 상황파악이 되시나?"
"왜.... 그럼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던거야?"
"그렇지. 뭐, 거창하게 계획이랄것도 없어. 그냥 손 한번 내밀었더니 넘어온거잖아?"
"저 새끼는 너한테 뭘 주는데? 뭘 주길래 나를 차고 저런 새끼한테 가는거지?"
"글쎄. 딱히."
연이 지안을 보며 어깨를 으쓱한다. 주는 건 없다. 그저 이해하고 제대로 연이를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연이는 충분히 만족한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기에. 이제껏 사귀어온 사람들에게는 없었던.
그걸 모르는 기후는 그저 물질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자신을 돈 때문에 꼬셨다는 말에 손지안은 무엇을 줬나, 묻고 있다.
"찌질대지말고 이제 그만 나가."
"주는 거 없이 좋다고?"
"그게 당신과 이 사람의 차이야. 여기서 더 험한 말 듣기 싫으면 나가. 이제 참는 것도 한계야."
"하. 그런데, 강 연. 왜 나는 나한테 이러는 것마저 좋지? 싫어야 정상아닌가?"
"그만큼 당신이 비정상이라는 거지. 알았으면 나가줄래? 좀? 짜증나거든?"
이건 뭐, 찌질이도 이런 찌질이가 없다. 이도저도 아니잖아. 박력도 없고 그렇다고 화도 안내고.
뭐, 어쩌라는 건지. 나가라고 몇번을 말해도 들어먹질 않고. 짜증나, 이런 인간은.
연이는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기후를 노려보다가 지안의 손을 잡고 강의실을 나온다.
이런 내가 좋다고? 웃기고 있어. 그나마 사귄 정이 있어서 이정도였는 줄 알아.
"생각보다 약해. 이러면 세찬이에게 보여줄 수가 없잖아."
"서론이야. 본론은 아직 멀었어."
"서론? 와, 나 책읽는 중?"
"으이구. 지금 컨셉은 멍청이인가?"
지안이 연에게 끌려가면서 멍하니 말을 하자 한숨을 내쉬는 연이. 이건 또 뭔 컨셉인건지.
더 세게 가라며 옆구리를 자꾸만 찌르는 지안을 보며 픽- 웃어버리는 연이.
정말 알 수 없어서 더 매력적이다. 보통 이런 여자를 보면 욕을 하기 마련인데, 즐기다니.
"야!!!!! 너 거기서!!!!!"
멜로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 감사합니당ㅎㅎ
재밌습니다^^
ㅎㅎ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