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재색
구름으로 덮혀 심상치 않다. 오늘은 신바람 나게 눈이 내리려나 보다. 철원에 있는 금학산을 가려고 산울림 가족이 한 달 동안 준비하며 기다린
날이다. 어제는 신께서 산울림 가족에게 멋진 눈 산행을 하라고 온 천지에 눈을 선물로 내려 주셨다. 그것도 함박눈을 퍼부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눈 산행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행복한 생각에 빠졌다. 눈이 내리는 덕분에 필자는 갑자기 동심으로 돌아간다. 까마득하게 흘러간 초등학교 코흘리개가
되는 순간이다. 동심으로 돌아간 나는 마을 한 모퉁이에서 동무들과 놀고 있다. 그 시절엔 잘 먹지를 못해 영양 부족으로 모든 어린이가 코를
흘리고 살았다. 지금은 충분한 영양 섭취로 코 흘리는 아이들을 볼 수가 없다. 코를 흘리며 눈사람도 만들고 눈뭉치로 상대방을 때리며 깔깔대고
웃어댄다. 그 동심의 세계가 얼마나 달콤한지 잠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함박눈이 펑펑 퍼부어대면 얼마나 행복할까? 겨울에만
피는 눈꽃도 볼 수 있고 하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행복이 넘쳐날 것 같다. 신께서 산울림 가족에게 오늘도 축복을 내려 주실까? 하고
기대를 해본다. 눈 산행을 한다는 기쁨을 싣고 버스는 달리기 시작한다. 얼마나 기다렸던 눈 산행이던가, 일 년이란 긴 시간을 겨울 오기를
기다렸다. 백설로 뒤덮인 하얀 세상에서 마음껏 뒹굴어 보겠다고 마음먹고 기다렸다. 그래서 오늘도 눈이 내리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린다. 어제 내린
눈이 산에는 얼마나 쌓였는지 알 수 없지만, 생각엔 많이 녹아서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눈이 내리기를 오늘도 기다리는 것이다.
달리던 버스는 회원들을 배려해 잠시 멈춘다. 바람도 쐬고 몸무게를 줄이라고 멈춘 것이다. 내려서 보니 이곳이 38선 만남의
광장이다. 삼팔선(三八線)이란 표석을 덩그러니 세워 놓았다. 8.15해방을 기쁘게 맞이했지만, 비극의 선(線)이 그어 젓다. 오키나와까지
진격했던 미군은 일본의 항복선언이 확실해지자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군사점령하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 38선 분할안을 제기했다. 미국 육군 작전국
정책과의 C.H.본스틸 3세와 D.러스크 대령이 기안하고, 국무·육군·해군 등 3부 조정위원회 안으로 제기된 38선 분할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표석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면서 과연 그 시절의 국민들은 어떠했나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하나뿐인 분단국가다.
반세기가 훌쩍 넘도록 통일은 고사하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언제라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다. 두뇌가 세계에서 가장 명석한 국민이 모여 사는
우리나라인데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표석에 쓰여있는 이 38선을 긋고 남과 북(南과 北)으로 나뉘어 무려 70여 년을 살고 있다.
38선으로 인한 분단의 아픔을 잠시 생각하며 쉬었다가 버스에 올랐다. 옆자리엔 송광 김문환 선생이 함께했다. 송광 선생과 나는
매스컴에서 내깔겼던 시국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이북 김정은은 인민들 생활은 어떠하든 핵 개발을 완수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정세가 불안한
한반도다. 미국에 의존해 성장하고 튼튼한 국방을 유지해 왔는데 갑자기 정부는 미국을 등한시하고 친 중국으로 방향 전환을 하는 느낌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강대국 간의 신경전은 대단하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금자탑이 하루아침에 허물어질 형국이 될지도 모른다.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와
국방이다. 만약 우리나라의 경제가 무너지고 국방이 무너져 내린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도 무서운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산행하러 가는 내가 왜
쓸데없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불안하다. 오늘은 금학산에서 즐거운 눈 산행을 하며 불안한 마음을 씻어낼 것이다.
산에 올라가기 전에 금학산의 역사와 전설을 알고 싶다
금학산의 정상은 947m이며, 산 전체가 철원군에 속해있다. 금학산은 서기
901년 후삼국 때 궁예가 송악(개성)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길 당시 도선국사가 '궁전을 짓되 반드시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앞으로 나라를 300년 동안 통치할 것이요, 만일 금학산이 아닌 산으로 정하면 국운이 30년밖에 못 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는 도선국사의 예언을 무시하고 금학산에다 짓지 않고 고암산(高巖山)을 진산으로 정했다. 그 후 금학산의 수목들은 죽지 않았음에도 3년 동안
나무에 잎이 나지 않았고, 곰취는 써서 못 먹었다고 한다. 국운은 겨우 18년 통치 끝에 멸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고암산(高巖山)은 강원도
철원군 북면과 평강군 서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가 780m이다. 901년 궁예(弓裔)가 후고구려를 세운 뒤 904년에 이 산을
진산(鎭山)으로 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하였다. 금학산의 내려오는 전설 및 역사를 여기서 마무리하고 산을 오를 것이다.
버스는 금학산 입구 정류장에 멈췄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산행할 곳을 바라보니 어제 내린 눈이 산을 하얗게 덮어 놓았다. 나무들을
추운지 웅크리고 있다. 산을 하얀 카펫을 깔아놓은 듯하다. 어찌 보면 손님을 맞이하려고 깔끔하고 청아하게 흰옷으로 갈아입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백설이 덮인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눈을 밟으며 걷노라니 뽀도득 뽀도득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어찌 들으면 당신 발길이 좋아 행복하다는
소리로도 들린다. 이 소리는 겨울에 눈이 내려야 만 들을 수 있는 정겨운 소리다. 애인 입에서 튀어나오는 예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어 아이젠 착용을 하지 않았다. 눈이 내린 지 2~3일이란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뽀도득
소리를 내는 흰 눈은 쿠션이 있어 미끄럽지가 않다. 다만 행복해지라고 부드러운 촉감을 안겨 줄 뿐이다. 눈을 밟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그러곤 기쁨을 만들어 놓는다. 모처럼 눈을 밟고 산행할 기회를 만들어 준 신께 감사를 드린다.
눈꽃을 피운 나무는 없지만, 간혹 몸체에 흰옷을 두르고 있는 나무들이 있다. 이것 또한 겨울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아마도
이산의 절반쯤 올라왔을 때였다. 이곳엔 매바위가 늠름하게 금학산을 지키고 있다. 기념사진을 찍고 뒤를 돌아 아래를 내려다 보니 이게 웬일일까?
안개가 천지를 개벽해 놓았다. 인간이 살아 숨 쉬는 평야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안개가 대신하여 평야를 만들어 놓았다. 멀리 있는 산까지 안개의
세상이다. 보이는 산들은 안개 위로 머리를 내밀고 나 여기 있지롱 하고 행복한 미소로 짖는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자연을 이곳에 와서 맛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안개의 나라를 감상하고 있자니 사랑하는 집사람이 생각이 난다. 집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을텐데 나만 자연의 신비롭고 오묘한
광경을 감상하며 즐거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죄스러운 마음이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생각도 접고 정상을 향해 걸어야 한다.
오솔길은 꾸불꾸불하게 이어졌다. 우리가 걷는 고즈넉한 산행길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참 즐겁고 재미있는 산행이다.
폭신폭신한 눈을 밟으며 걸으니 감미로운 촉감까지 느낄 수 있어 더욱 행복하다. 초이대장을 비롯한 4명이 한 조가 되어 제일 후미에 올라간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올라가면서 계속 토해낸다. 때론 재미있는 이야기가 터져 나올 땐 깔깔 웃는 웃음소리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와 웃음소리에 나도 힘든지 모르고 걷는다. 일행중 초이대장 후배인 김우중 이란 젊은 미남이 있다. 이 미남은 내가 힘들어할 때는 쉬어
가자고도 한다. 조금 난코스엔 뒤에서 나를 위험하지 않게 잡아주기도 한다. 너무도 고마운 젊은 분이다. 재미있는 대화가 오갈 때 웃는 웃음꽃은
금학산에 메아리 꽃을 피운다.
웃으며 올라가는 우리는 신께서 만들어 놓은 대자연의 품에 안겨 오묘한 풍광을 만끽해 본다. 정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여기서 약 550m만 더 올라가면 능선길이란다. 부지런히 걷다 보니 땀이 흐른다. 겨울에 흐르는 땀은 보약이라 했다. 보약을
뚝뚝 떨어트리며 능선까지 올라왔다. 능선에서 철원 시내를 내려다보니 시내는 보이지 않고 안개가 그곳에서 춤을 추고 있다. 자욱이 깔린 안개가 또
하나의 자연이 준 예술이다. 그 안개는 아름다운 별천지를 만들어 놓았다. 바라보는 그 세계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필자는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등산로 곳곳엔 벙커가 눈에 들어오고 전선 등 군사시설이 보인다. 이 모두 전쟁의 아픈 흔적들이다. 이젠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다. 기쁨에 찬 만면의 미소를 띠며 정상을 향해 걷는다.
바라고 바라던 정상까지 올라왔다. 정상엔 헬기장이 있고 옆엔 군인들이
기거하는 집이 있다. 사방이 확 트인 정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먼저 올라온 회원들은 대자연을 즐겁게 감상했으리라 본다. 둘러앉아 점심을 즐기고
있다. 눈길이 가는 곳마다 안개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저곳에 무엇이 있는지 안개에 싸여 알 길이 없다. 정상의
표석엔 금학산 947m라고 쓰여있다. 단숨에 달려가 애인 입술에 입맞춤하듯 정상 석에 입맞춤했다. 여기에 입맞춤하려고 필자는 힘들여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이렇게 상쾌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다. 좀처럼 맛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간식을 즐기는 회원들과
합세하여 맛있는 과일과 빵을 먹었다. 이젠 하산할 일만 남았다. 하산길은 어떠할는지 안전하게 내려가야 한다. 산은 올라갈 때보다 하산할 때가
더욱 위험하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착용한 아이젠을 점검하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내린눈이 바닦에 깔려 미끄럽다. 자연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안전하게 내려가야 한다. 산행은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끝까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안전을 생각하며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손과 볼은 시려도 등에선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속옷이 땀에 젖어오기 시작한다. 잘못하면 감기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회원들과 함께한 하산길은 서로 위로하며 대화하는 장면이 향기롭다. 새들은 우리가 힘들어하는 지을 아는 듯 신비로움이 깃든
청량한 소리를 들려준다. 신께서는 인간을 만들 때 상대와 함께 즐기라고 했나 보다. 그렇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혼자는 살 수 없다.
저녁노을도 파트너가 있어야 노을이 된다. 해님이 제아무리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싶다 해도 구름이 없다면 할 수가 없다. 하늘을 화려하게 물들일
땐 구름이란 파트너가 반듯이 있어야 한다. 구름이 벗이 되어 있기에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 저편에 황홀하게
물든 노을을 감상하며 감동 한다. 우리가 지금 산행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너와 내가 있기에 외롭지 않고 즐겁게 하산하는 것이다. 혼자
아무리 아름다운 산을 누빈다 해도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옆에 동행하는 말벗이 있어야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또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 소리를
들으며 겨울이라 흰 눈을 보면서 자연을 즐길 것이다.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은 상대가 있기 때문이란 것을 깊게 깨달으며 하산을 한다.
오늘 하루도 무려 5섯 시간의 눈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뒤풀이를 하기위해 식당으로 향한다. 솔향기란 식당이다. 신인희리더 조진순
총무와 장미정 총무가 반가워한다. 이 세분은 오늘도 산행을 하지 못하고 식당에서 우리의 먹을 거리를 준비했던 것이다. 감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산울림 회원들을 위해 봉사한 세분께 큰 박수를 보낸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손만두 칼국수 탕이 나온다. 어찌나 맛이 있던지 홀딱 반하고
말았다. 이렇게 맛있는 별미의 탕을 철원에 와서 즐긴다. 이것 역시 하늘이 준 복이다. 맛있는 탕이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준다. 오늘은
즐거운 눈 산행이었다. 회원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