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리조나 주의 피닉스에 살고 있던 사람이 얼마 동안 징역을 살고 출감하였다. 이 사람은 자기가 형무소에서 나가는 날에는 반드시 자기를 그곳에 보낸 사람을 쏘아 죽이기로 작정하고 하루하루 출감되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드디어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오는 날, 집에 가보니 어린 아들 둘만이 있었다. 두아들을 바라보는 이 사람의 마음에는 이제 자기가 한 사람을 쏘아 죽이면 아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찌할 줄 모르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어린 두 아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거리에 나섰던 그는, 우연히 길가의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뒷 좌석에서 그는 이제 끝나가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설교자는 강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설교하고 있었다. 이제 말씀을 끝낸 후 목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여 두 아들 손목을 양손에 잡은 채로 중앙 통로를 걸어서 강단 앞으로 나갔다. 눈물을 하염없이 줄줄 흘리며 이 사람은 품에 품고 온 권총을 꺼내서 목사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나는 오늘 밤에 한 사람을 쏘아 죽이려고 총을 품고 나온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 이제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새롭게 살렵니다. 오늘 이후로 나는 권총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들고 나를 감옥에 보냈던 사람을 계속 찾아 다니겠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은 후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1.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역을 위한 필요한 것들이 채워질 수 있도록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 성경 : 눅 19 : 1-10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1997년전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열흘 전에 여리고라는 이스라엘의 한 동네를 지나가시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동남쪽으로 29km, 그러니까 약 70리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70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의 겨울 날씨가 아주 찬데 비해서 여리고의 날씨는 아주 온화했습니다. 그래서 이 곳은 헤롯왕이 겨울이면 수도로 사용했던 이스라엘의 제2의 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해서 요단강 건너편 동쪽에 있는 베뢰아와 길르앗 지방에서 나오는 향유 등 모든 것들이 이 여리고를 통과해야만 예루살렘이나 다른 도시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세금이 걷히는 곳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여리고에는 많은 세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삭개오라는 세리장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세리장은 오늘날처럼 공무원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정부로부터 일정한 지역에 대한 세금 수납권을 위임 맡은 사람으로 세금의 액수를 임의로 부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또 거두어 드린 세금 중에서 일정한 금액을 로마 정부에 상납한 다음 그 나머지는 착복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리장 삭개오는 막강한 권력를 가진 사람이었고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살펴 보겠습니다.
1.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1-3절)
첫째,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또 천국에 들어갈 권리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롬 3:23)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죄인인데, 두 부류의 죄인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죄인이 있고, 죄인이면서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어떤 죄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 때 자기들은 죄가 없고 의인이라고 착각하면서 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누가복음 5:30절과 같이 물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러자 예수님은 누가복음 5:31,3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는 것처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여기서 '의인' 이라고 하신 것은 이 세상에 진짜 죄 없는 의인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인이면서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죄인이면서도 자기는 죄가 전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시킬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먼저는 성경이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둘째는 그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살펴 보아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며 사는 것 보다는 악을 행하며 사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볼 때 자신이 구제 불능인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 안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말이나 행동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생각하는 것이 늘 추하고 더럽고 악할 뿐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여러 가지 죄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했습니다.
어려운 가정이었지만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부모님들은 루터가 법관이 되기를 원해서 다시 법과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루터는 법과에 다니면서 자기의 죄의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님께서 자기가 법관이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자기의 죄 문제가 너무나 괴로워서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자기의 죄 문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루터는 아버지가 너무너무 실망하셔서 끝까지 루터를 만나지 않고 돌아가실 정도로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렸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루터는 얼마나 철저하게 죄 없이 살려고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죄 없이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자기 속에서 솟아 오르는 죄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높은 돌계단을 맨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무릎이 다 까지고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데도 그 고행을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제해보겠다고 그렇게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일어나서 자기 손에 채찍을 들고 자기속에 끓어 오르는 정욕을 억제하기 위해서 얼마나 자기몸을 쳤던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정신을 잃을 때도 있었습니다.그래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의 문제는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자녀 교육을 위해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성공과 교육을 위해서 간 이민이 잘 된 경우도 많지만 오히려 더 잘못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 하나가 얼굴색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산다고 하더라도 얼굴색 때문에 받는 여러 가지 불이익이 많다고 합니다. 분명히 알 수 있는 어떤 불이익뿐 아니라 뭐라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이익이 있고 그런 것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는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황색인이면 그 자녀는 반드시 황색인입니다.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술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러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원죄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누구든지 날마다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이 세상에는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뇌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죄를 짓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기는 죄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동족들의 세금을 착취해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만 죄인이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린대로 사람에게는 드러난 죄가 있느냐, 드러나지 않은 죄가 있느냐의 차이 뿐이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전혀 죄가 없는 것처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든가 돈이 많다든가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그런 사람이 더 많습니다.
한편 삭개오는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영접해 주신다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관심이 많았다는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자기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죄 때문에 홀로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삭개오는 순수하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은 삭개오라는 말 자체가 그 나라말의 뜻으로 '순수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자녀들을 낳으면 그 자녀가 이름 뜻대로 살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삭개오의 부모님도 삭개오를 낳았을 때 그랬습니다. '이 아이가 순수하게, 무엇보다도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삭개오라 지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어떤 환경과 성장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포탈하는 그런 죄를 짓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곳에 들어가면 삭개오에게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으며 살면서도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삭개오는 죄된 생활에 대해서 괴로워하며 사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죄에 대해서 괴로워 하는 사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2. 주신 기회를 잡은 사람(4-5절)
삭개오는 죄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때 마침 예수님께서 자기가 살고 있는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길가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길에는 벌써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자기의 키는 너무 작았고 예수님 주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어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해진 삭개오는 그 길가에 있는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뽕나무로 올라 간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삭개오는 큰 도시의 세무서장입니다. 그런데 그 세무서장이 아이들처럼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나이든 사람이 급하게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그것도 세무서장이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보통 용기를 갖지 않고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또 나이도 있었기 때문에 잘못했다가는 다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죄인도 다 용서해 주시고 영접해 주셨다는 예수님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위험도, 체면도 다 무시하고 뽕나무로 기어올라 갔던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통계적으로 보면 도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보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체면에 신경 쓸것이 없는데 시골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체면에 신경을 쓰느라고 마음은 있으면서도 못 믿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삭개오는 순수한 마음, 열린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그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쳐다보시며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삭개오에게만 특별히 그랬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삭개오의 그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괴로워 했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그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 열정 때문에 나이가 든 사람이 세무서장이라는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뽕나무를 올라갔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삭개오를 불러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어떻게 이 말씀을 접하게 되셨든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만난 주님을 모신 사람(6-10절)
예수님이 '내려 오라' 했을 때 삭개오는 얼마나 좋았던지 6절 말씀을 보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했습니다.
집으로 손님을 모신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만일 자기가 누구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다면, 다시 말하면 억지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토색한 것이 있을 때 4배를 갚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정해주신 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경 말씀을 지키며 살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삭개오는 더 나아가서 자기의 재산중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네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가 먼저 말을 꺼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기쁨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것이 너무 좋아서, 자기의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예수님께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셨지만 자기의 재산 중 절반을 나누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삭개오는 돈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돈을 위해서 동족들에게 매국노라는 이야기를 들어가면서도 악착같이 모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돈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삭개오의 재산은 좀 줄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생을 얼마나 밝고 빛나게 살았겠습니까? 만족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많은 기쁨을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6:10절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자기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지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삭개오도 좀 가난해졌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는 자기가 좀 더 잘 살기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전에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중학교 선생님이신데 결혼을 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자기 집을 갖기 위해서 부부가 맞벌이를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도 계속 맞벌이를 해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아서 이제 아파트 하나를 청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기를 당했습니다. 결혼해서 정말 어려운 중에서도 부부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그렇게 어렵게 모은 돈을 하루 아침에 다 날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해 동안 사람이 싫었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었답니다. 여러해가 지난 지금에 와서야 조금 마음이 안정이 되고 어느 정도 이제 회복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기가 좀 더 큰 집에 살고, 잘 누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삭개오도 가난해진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넉넉한 사람으로 살다가 천국에 갔을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구원이 이르렀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천국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며칠 전에 집사람의 초등학교 때 남자 친구가 부산에 살고 있다고해서 수소문해서 연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만났습니다.
한 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주님을 소개하고 교회에 나오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부산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 때까지는 교회에 다녔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않는데 그 이유는 교회에 다니면 구속을 받는 것 같아서 교회에 가기 싫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집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구속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느냐' 라고 말했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보세요. 아주 멋있는 남자가 있습니다. 똑똑한 남자가 있습니다. 마음씨가 착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할려니까 그 남자에게 내가 구속 당하는 것 같아서 싫다 하는 여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음씨가 좋고 지혜롭고, 예쁜 아가씨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저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내가 그 여자한테 구속을 당해야 하니 싫다는 남자가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겠습니까? 사랑으로 당하는 구속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만약에 그 구속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평생 다른 구속, 더 어려운 구속에 시달리며 살게 됩니다. 구속이 싫어서 결혼을 안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결혼을 할 것을 그랬나 하는 후회와 갈등에 계속 구속을 당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하면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어서 당하지 않아도 될 유혹의 구속을 평생을 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마지막에는 허무의 구속을 당하게 됩니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고, 자녀들이 있다면 일을 하는 보람을 느끼고, 자기가 돈을 버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가정이 없어 열심히 돈을 벌지만 그런 의미가 없으면 허무의 구속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크게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창공을 높이 뜬 연은 밑에서 당기는 실만 없으면 바람을 맞아서 하늘 높이, 창공 높이 날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이 그렇게 날 수 있는 것은 밑에서 당겨주는 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줄을 끊어주면 잠시는 더 높이 날수 있을지 모르지만 곧 땅으로 곤두박질 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세계안에서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가 없습니다. 제한적인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범위안에서만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구속 가운데서 희열을 느끼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법칙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급할 때는 차선이 없었으면, 신호등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빨리 갈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차선이 없고 신호등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잠시는 더 빨리 갈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방 살 수 없는 세계가 되고 말것입니다.
정말 사랑으로 당하는 구속은 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니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로 찬송하리로다.' (찬송가 204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95장)
삭개오는 뽕나무에서 만난 주님을 자기의 인생과 삶의 주인으로 모셨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습관을 따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을 교회에서만 만나보시고 그냥 가시면 안됩니다. 꼭 집으로, 학교로, 직장으로 모시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영으로 오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을 꼭 모실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