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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6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예레 17,5-10
복 음 : 루카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국민연금, 의료보험, 자동차 보험에 가입해서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정해진 때가 되면 일정한 금액을 매달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의료보험은 아플 때 병원비에 대한 부담을 가볍게 해 주고 있습니다.
자동차 보험은 소멸성이지만 사고가 났을 때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이런 연금과 보험은 ‘한 사람은 만인을 위해서, 만인은 한 사람을 위해서’
서로 도움을 주려는 정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족과 정부가 다 할 수 없는 도움을 개인이 서로 연대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입니다.
최근에 많은 분들이 가입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장례가 났을 때 도움을 주는 상조입니다.
저도 평화상조에 가입을 했고, 아버님께서 하느님 품으로 가셨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사순시기 담화문에서 ‘부자와 라자로’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연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료보험료를 지급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런 분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준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듯이,
우리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로 알고 잘 도와 드리고,
그분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몇 년째 아파서 누워계시는 가족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직장을 얻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자녀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3수를 하는 아들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원망하고, 무시하고, 짐으로 여기면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서 무척 서운해 하실 것입니다.
감싸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면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를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오늘의 복음 환호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자로는 현실의 삶에서는 병들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부자는 현실의 삶에서는 부유하게, 편안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부자이면서 가난한 라자로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두려워 마시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근심과 걱정을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주님! 이 사람이 이렇게 장애인이 된 것은 그 사람의 죄입니까? 아니면 조상의 죄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장애인이 된 것은 본인의 죄도 아니고, 조상의 죄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술과 담배로 찌들어가던 한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 가니, 간경화라고 하였습니다.
의사는 아내에게 6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은 아내와 본당의 구역에서 함께 기도하였고,
어느 날 하느님을 믿으면 나을 것이라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지내게 되었고, 그의 간경화는 기적처럼 치유되었습니다.
고난과 고통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고난과 고통 중에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모두 고난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얼마 전에 신부님들과 만나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소화를 시킬 겸해서 당구 한 게임을 하자고 하더군요.
솔직히 저는 일찍부터 당구를 쳤었기 때문에
소위 ‘고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높은 점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당구 자체에 재미를 잃었고
그러다보니 당구를 쳐도 이기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기겠다는 생각보다는 상대방이 빨리 이겨서 얼른 끝내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당구를 치는 저는 재미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 순간이 즐겁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때에 분명히 기쁨과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지금에 충실하기보다는 과거에 대해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 정작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어떤 시인이 자신의 시를 여러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지요.
“귀하의 감동적인 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 지면에는 어울리지 않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쉰(50)이었습니다.
이제는 틀렸다고 나이가 너무 많다고, 나의 재능을 더 키우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다면서 포기하기 쉬운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시를 계속해서 수정해나갔고, 계속해서 시를 써서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로부터 19년 뒤에,
거의 일흔의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르만 헤세’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데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두었고 행복을 찾았던 그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유명한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던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반대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 힘들게 살아왔던 라자로는
죽어서 아브라함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부자가 죽어서 고통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이 세상에서 온갖 나쁜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면 불쌍한 라자로를 외면했다는 것이지요.
그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은 호화로운 삶이 아니라,
가난하고 불쌍한 이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나중에 기회 될 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 그래서 내 자신을 드러내는 호화로운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알아주는 삶인 사랑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지금 행하는 이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를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인디언의 포틀래치 풍습
윤경재 요셉 신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16,31)
북미 인디언인 치누크 족에는 특이한 풍습이 전해져 옵니다.
족장이나 지배층 계급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 부족에게 선물로 나누어주는 행사입니다.
그들은 이런 행동을 ‘포틀래치(potlach)’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먹여주다’ ‘소비하다’를 뜻하는데
자신의 부와 재산을 최대한 선물하고 파괴하는 자가 최고의 명예를 얻습니다.
이런 이가 대개 부족의 추장이 됩니다.
잘못 이해하면 포틀래치를 명예나 권위를 얻어 추장이 되기 위한 책략이나 투자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여 추장이 되었을 땐,
정치적 권위를 얻는 대신 경제적 부를 모두 상실한 상태가 됩니다.
반대로 경제적 부를 모으고 아끼려는 자는 절대로 정치적 리더가 되지 못합니다.
그는 ‘인색한 자’라는 가장 모욕적인 평판을 얻고 이웃으로부터 비난받고 소외됩니다.
인디언들처럼 정치적 지위를 얻으려면 경제적 부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고,
경제적 부에 애착이 있으면 정치적 지위에 접근할 수 없게 하면
지도자의 지위는 부족민의 신뢰를 잃는 순간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정치적 지위를 이용해 부를 모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포틀래치는 부가 정치적 지위를 보호하고 정치적 지위가 부를 확대하는 악순환을 끊어줍니다.
포틀래치는 선물을 통해 각자의 능력과 관대함을 시험하고
경제적 부와 정치적 지위가 결합되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입니다.
포틀래치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부의 축적 자체를 막고
정기적으로 재산을 소모해버리는 ‘순수소모’ 자체에 있습니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부가 축적되면 그 부는 무엇에 사용하게 될까요?
남에게 빌려주어 이자를 얻거나 남을 고용하여 자기에게 필요한 일을 시키는 데 사용될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축적된 부의 격차는 점점 커질 것이고,
결국 부자와 가난한자의 격차가 커지며 계급대립이 생겨납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정기적으로 필요 이상의 부를 소모해서 ‘죽여 버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축적’이 당연시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이해하기 힘듭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 나오는 부자는 늘 ‘나는 부자이다.’라는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생각을 상상해보면 이랬을 겁니다.
“내가 부자가 된 이유는 결국 내가 부지런히 일해서 얻은 결과이다.
부유하셨던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재산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물려받은 재산을 불리려고 머리를 써가며 갖은 고생을 다했다.
여러 번 고비가 찾아왔지만, 나는 그때마다 유혹에서 견뎌내었다.
그러니 하느님께 축복을 받아서 이렇게 부자가 된 것이다.”
“지금 헐벗고 가난한 자들은 모두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리된 것이다.
게을렀다든가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인생을 낭비한 결과이다.
그들이 가난하고 불행하게 된 데는 모두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모두 ‘나는 어떠한 ~ 나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것을 철학에서는 ‘인칭적 자아인식’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사람은 어떤 때는 한 가정의 부모로, 또 자식으로, 학생으로, 직장의 일원으로,
한 국가의 국민으로, 여성과 남성으로 주위 관계성에 따라 자의식이 바뀝니다.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은 ‘인칭적 자아’의 틀에 갇혀 자신을 개방하지 못합니다.
소수의 깨어난 사람들과 성자들만 ‘인칭적 자아’에서 벗어나 타자를 맞아들입니다.
이 부자는 처음부터 영원히 자기는 부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가 아닐 가능성’을 완벽히 배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는 현세에서 건널 수 없는 장벽이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라자로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영원한 타자였습니다.
더 나쁜 것은 심리학에서 ‘수퍼 에고’라고 부르는 억압된 도덕관념과 ‘인칭적 자아’가 결합될 때입니다.
수퍼 에고는 우리 안에서 감시자 역할을 합니다.
“~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인정받으려면 ~해야 한다. ~한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마라.” 등등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따져 묻지 않고,
자동인형처럼 처신하기를 바라는 심리적 감시자 역할을 우리 스스로 세우면서 살아갑니다.
수퍼 에고가 공동체 질서를 지키고 개인의 안정을 이룩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해로운 점은 우리에게 이유도 없는 죄의식을 심어준다는데 있습니다.
게다가 남에게까지 자신의 수퍼 에고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라고 강요합니다.
수퍼 에고와 인칭적 자아가 결합하면 ‘나는 ~한 나이다.’라는 관념이 고착되어
자신을 벽에 가두게 하고 남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남의 얘기를 잘 듣지 않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실패나 불화에서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아는 것으로 세상 모든 일을 분별하고 판단합니다.
거기에 안 맞는 것에 대해선 싫어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세상이 모두 자기 생각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셈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지탄하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행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의 근원은 ‘구별된 자’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켜 죄로부터 구별된 자라는 자의식이 강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그럴만한 이유 여하를 떠나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그들 생각에 죄인들은 현세에서 그리고 죽어서도 갖은 불행과 고난, 가난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죄인들 태도와 삶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죄인들과는 교류해서도 안 되고 구별하여 마땅한 것입니다.
현세에서 구별된 삶을 당연하게 여기고 산 사람들은 죽어서도 구별된 삶을 살아야 공평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라고 아브라함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심리학을 잘못 이해한 학자들이나 과학자들, 사람들은 ‘수퍼 에고’를 하느님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퍼 에고’는 인간이 만든 신입니다. 가짜이며 우상입니다.
아빠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지, 징벌하고 억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편 가르기를 하시지 않습니다.
치누크 인디언은 인간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인간에게는 각자 능력과 힘, 지력에 차이가 생겨날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고나 병으로 불행을 겪을 수 있음을 수긍했습니다.
그래서 그 차이를 공평하게 나누어 해소할 방법을 모색한 것입니다.
광활한 지역에 비해 거주민이 적었던 인디언 공동체는 열등한 부족민을 소외시키면 죽음만 가져오고,
그 결과 공동체가 와해될 것임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걸 공동체 무의식 층에 각인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기죽이지 않고, 또 명예로운 방법인 ‘선물’이라는 관습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각자 생명을 아빠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니 큰 선물을 받은 아버지의 자녀들도 본받아 무엇인 자기 것을 선물로 나누어 주어야 마땅합니다.
강제로 빼앗기고 잃는 것과 스스로 선물로 나누어 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쉬움이라는 찌꺼기가 끼지 못합니다.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 투성이 몸으로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여기에서,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즐기는 어떤 부자는 이름이 제시하지 않으나,
거지는 ‘라자로’라는 곧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의 이름을 밝힘으로써,
하느님이 그를 인정하고 도우신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자기 자신에 빠져 타인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첫째 의미>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부유함(부자)=멸망, 가난함(빈자)=구원이라는 등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덧붙여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사실, 기적이 사람들을 회개시키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은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도 받아들이지를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비를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완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이것이 오늘 이 비유의 <두 번째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이 비유가 전하는 <세 번째 의미>는 어떤 부자의 이름은 제시되지 않으나,
거지의 이름을 ‘라자로’라고 밝히고 있음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곧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은
그가 남에게 특별한 선을 베풀었거나 해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혹은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죽은 이들 가운데 누가 다시 살아나도 ~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주님!
당신을 믿지 못함은
보지 못해서 아니라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신비를 체험하고도 체험하지 못함은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완고함과
제 자신을
내려놓게 하소서
자애심을 내려놓고
당신이
주님임을 믿게 하소서! 아멘.
천국을 생각하면
반영억 라파엘 신부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으로 살지 말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름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 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