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로 -
김우현
바람이 살랑이는 게
목마른 가을이
깊이 멍들었다는 수화(手話)같다
오롯한 벽오동 목간통에
이슬 닷 말 닷 되
서 말 서 되 사랑에 섞어
목욕하고 싶다, 오늘은
그리하여
저기 저 안개바다
강물 숨어 흐르듯
그대의 이름 외우고 싶다
부풀었던 이기(利己)의 때꼽쟁이
면경처럼 벗겨내면
서도(西都)는 아예 가까워지리
지난 여름 사납게 더워
배암, 삼베 숲으로 사라진
뒤꼍 해바라기 얼굴 께로
맑은 것만 기억하며 가을로 가라
밤낮없이 울어쌌는
풀벌레, 곡절을 타는 거야
담벼락 부여잡고 다짐을 했지
비운만큼 채워진단 말의 의미
아직은 모르지만,
녹슨 담 헐어 새 집을 지어야지
텅 빈 꿈 지어야지
겨운 시름 이국의 칸나잎에
이슬이슬 이슬 맺히면
말간 칸나꽃으로
집을 지어야지.
*4356.9.8. 아침 6시33분.-9.12. 아침 6시54분.
*양평, 랑상재에서.
*바람이 살랑이는 게, 가을이 깊이 멍들었다는 수화(手話)같다. 붉어서 말간 칸나꽃에 이슬 얹는 산촌의 이 아침. 조금 더 두려워진다. 무엇이든 조금만 더 비워내자.
*백로(白露): 1)'이슬'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 2)이십사절기의 하나.
- 움직이는 화석 -
- 조성선 사진작가
김우현
인광(燐光)이 서린다 했다
번뜩이는 先史의 언덕 너머
섬광을 보았다는,
움집에 사르어진 불덩이에
서럽게 데이었다는
아무 날의 불의 꿈
잉걸 이지러져
고즈넉한, 하여 야료한
물비늘의 혀의 날(刃)
석공으로
五方의 시원을 흔든다
쉬이 사그라들지 않을
못다한 태고의 춤사위
피사체를 물들인다
암각으로 잦아든다
살아서 움직이는
선혈이 반짝이는.
*인(刃):칼날 인.
*4356.9.12. 밤10시27분.
*예당저수지, M펜션에서.(예산군청 로비에서의 조성선사진작가의 개인전 뒤풀이)
*화석은 무채색이거나 빛이 나거나 아예 무디어 무형에 가깝더라도, 그 자체로 무한 가치를 지닌다. 인고의 세월을 버틴 그만의 투혼이 살아있기 때문이며 시대적 삶의 영역을 증언해주기 때문이다. 예술혼을 사른 조성선 사진작가가 그렇다. 흡사 살아있는 화석을 닮고자 했던 그만의 움직이는 세계관. 그의 작품에는 무량한 무향의 선사 돌가루가 묻어있다.
- 아프지만 안아프다 -
김우현
계절풍이 내게로 왔을 때
그예 거대한 기운을
나는 몸소 받아내고 있었다
버팀목의 여름날의 집
잠시의 투정은 지나가고
구절초 꽃 멍 부풀어오르자
나의 아홉 마디는 흔들리는 것이다
나는 비어있는 것이냐
허무히 채워있는 것이냐
하루의 일과가 잦아드는 이 시간
아프지만 안아파야 하는
섬망*의 긴 터널
묻는다
가을이 가을에게 묻는다
감잎 붉기 전
숲속 배암처럼 사라지는
무언가는 잊어야할 것만 같은
너는, 의식의 흐름인가
흐린 날의 넝마*인가.
*섬망: 착각과 망상으로 흐릿해지는 의식의 상태.
*넝마: 낡고 해어져서 입지 못하게 된 옷이나 이불 따위.
*4356.9.18. 밤10시21분.
*양평, 랑상재에서
*감기에 몸살이 살갗을 파고든다. 외줄 드리운 가을이 선득한 게 아니다. 텅 빈 고동의 파열이 두려운 게 아니다. 섬망 같은 의식의 흐름, 그 끝의 무한성이 아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