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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요한계시록 21:9-15
9 <새 예루살렘>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계 21:9-15 / [새 예루살렘] 마지막 일곱 재난이 담긴 대접을 쏟았던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였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보여주겠다.' 10) 그 천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이끌어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나는 아름다운 도시 거룩한 예루살렘이 하나님 계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11) 하나님의 영광에 싸여 보석처럼 빛나고 벽옥처럼 맑고 투명한 12) 그 도시에는 두꺼운 성벽이 높이 치솟아 있었고 열두 대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13) 그 문은 동쪽에 셋, 서쪽에 셋, 남쪽에 셋, 북쪽에 셋이 있었습니다. 14) 또 성벽 열두 주춧돌에는 어린양의 열두 시조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15) 그 천사는 성과 성문과 성벽을 재려고 금으로 만든 측량자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성령님이 사도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거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 줍니다.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9-11) 사도 요한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봅니다.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성의 빛이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다고 했습니다. 이는 새 예루살렘, 즉 완성된 천국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충만하여 빛으로 가득한 곳을 뜻합니다. 단순한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움, 능력, 그리고 생명이 넘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런 영광된 곳인 천국에 들어가길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이 영광을 지상의 성도들에게도 주셨습니다(사 60:1).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12) 열두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의 이름은 열두 지파 이름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2이라는 숫자입니다. 구약시대 야곱의 아들 열두 명이 열두 지파가 되었고, 구약성경에는 열두명의 소 예언자가 있고, 성전 제단의 놋대야 받침과 흉배의 보석도 열두 개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삼으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남은 떡이 열두 바구니입니다. 종합하면 12라는 숫자는 완전함과 동시에 축복을 상징합니다. 본 절의 열두 문은 구원받은 자들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문을 의미합니다. 또한 각 문마다 열두 천사가 지킨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13-15) 성의 성곽에 있는 열두 기초석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한다고 했습니다. 이 성의 열두 문들 위에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써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언약의 은혜를 힘입어 그들도 믿음으로 이 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열두 기초석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도 있습니다. 이는 열두 사도가 열두 지파와 연결된 것으로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금 갈대 자로 측량을 하는 것은, 정확한 측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 성의 완전함과 웅장함, 그리고 영원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이 구원을 받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메시야가 탄생했습니다. 그들 목자들은 여전히 가난한 목자였으며 멸시받는 나사렛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천국 복음을 듣기까지 무려 30여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 요셉은 죽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죽었습니다. 목자들 가운데도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가난했고 고통 중에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구원자가 오셨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샘가/심종훈 목사)
호크마 주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 본문에 나타난 천사는 17:1에서 나타난 천사와 동일한 듯하다(Mounce). 이 천사는 17:1에서 심판을 받을 큰 음녀를 소개한 것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소개하여 큰 음녀와 대조시키고 있다. 큰 음녀는 땅에 속하여 심판을 받을 대상인 반면에 어린양의 아내는 하늘에서 내려오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과 함께 거할 귀하고 정결한 존재이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여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19:6-8).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신부로서 표현하는 이러한 비유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며(사 54:6;호 1, 2절) 신약성경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나타낸다(마 25:1-12;막 2:19, 20;요 3:29;고후 11:2;엡 5:25-27). 신랑과 신부의 비유는 신부의 사랑이나 신부 자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되신 하나님의 신부에 대한 선택과 사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Beasley-Murray).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 본절 역시 17:1-5과 병행된다. 요한은 17장에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서 심판받을 큰 바벨론 성을 보나, 본절에서는 높은 산으로 이끌려 올라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게 된다. 이러한 병행은 의도적인 것으로 멸망당한 큰 바벨론 성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요한이 '높은 산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것은 에스겔이 높은 산에서 본 성전 환상을 반영한다(겔 40-48장). 여기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장차 영광을 받게 될 교회를 시사한다(Johnson, Hendriksen). 한편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은 2절과 병행을 이루는 표현으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Mounce).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 이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소유한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겔 43:5).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되었다가 돌아올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위에 있었던 것을 반영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빛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의 성취를 시사한다(사 60:1, 2, 19).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에서 '벽옥'은 불투명한 보석인 반면에 '수정같이 맑더라'는 투명한 것을 나타내 해석상의 어려움을 갖는다. 그래서 혹자는 벽옥이 다이아몬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nce, Morris, Johnson). 여하튼 본문의 촛점은 그 성이 보석과 같이 빛난다는 점에 있다. 한편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좌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며(4:3) 하나님의 본성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23절,Morris).
=====21:12,13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 이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성 전체의 범위를 한정할 뿐만 아니라 침략자로부터 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하심은 물론 성 밖에 있는 자들과 구분하고 계심을 시사한다(22:15;사 26:1;슥 2:5, Morris, Beasley-Murray).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 '열 두 문'에 있는 열 두 천사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문을 통제하여 출입을 제한하는 것을 나타낸다(사 62:6, Ladd, Mounce, Morris, Johnson)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 문들 위에 있는 열 두 지파의 이름은 겔 48장에 나타난 종말론적 예루살렘 성의 환상과 연결된다(겔 48:30-34). 에스겔서에 따르면 새 성전 문에는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 삼마'가 그 성읍의 호칭으로 부여된다. 이는 본서에 나타난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관련된 것으로(3절;22:3, 4)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거하실 것을 시사한다. 한편 '열 두 지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백성을 의미한다(Mounce, Johnson).
동편에 세 문, 불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사방에 각각 세 개의 문이 있다. 이것은 겔 48:16-19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단지 차이점은 본서와는 달리 북편이 동편 앞에 기술되어 있는 것 뿐이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 혹자는 당시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12궁도(宮圖)로 이루어진 '황도대'(黃道帶)와 동일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순서를 뒤바꾼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Caird, Mounce).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 앞절에서 거룩한 성 옐살렘에 있는 열두 문에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진술과 병행하여 본절에서는 성의 기초석 에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을 언급한다. '어린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은 문 위에 새겨진 열 두 지파의 이름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세워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의미한다(눅 9:12;요 20:24;엡 2;20, Morris, Johnson, Mounce, Ladd). 열 두 지파와 열 두 사도의 이름이 병행되어 나열된 것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과 신약시대의 교회의 통일성을 암시하며 동시에 거룩한성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신약 시대와 구약 시대를 총괄하는 보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Mounce).
=====21:15
본절에서 17절까지에 나타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척량은 겔 40:3 이후에 나타나는 새 성전 척량을 배경으로 한다.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 11장에 나타난 성전 척량은 요한이 하는 반면에 본절에 나타난 성전 척량은 천사가 직접한다. 본절의 성전 척량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보존됨을 나타낸다. 또한 에스겔서의 성전 척량이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겔 43:12)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거하는 성의 거룩함과 어린양의 신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완전한 성취를 시사한다(Mounce, Johnson, Hughes).
거룩한 성의 특징
김철한목사 / 요한계시록 21:9~22:5
우리는 지난 주일에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무엇인지 보았다. 예루살렘은 아버지의 집, 믿는 자가 바라보는 도성,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이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이 계21:2에서 이 성을 보았을 때도 “그 준비한 것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는데 계21:9에서 천사도 신부라고 말해준 것이다.
천사는 드디어 성령으로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는데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 같은 그 특징은 이렇다.
1. 도성의 빛이 찬란하고 맑다. (계21:11)
계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도성이 빛이 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다. 그 영광이 있는 곳이기에 성이 외부를 향해 빛을 찬란하게 비췬다. 그 도성의 빛나는 빛의 발함은 천하지 않고 귀하게 여기는 보석 같은 빛이다. 그러면서 수정 같이 맑다. 그래서 계21:23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기에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다. 얼마나 찬란한 빛의 도성인가?
그것은 아름다움의 빛이다. 신부의 얼굴에 빛이 나보라. 어떤 자연 세계의 빛을 무용하게 만드는 빛이 나보라. 기쁨의 빛, 환희의 빛, 감사의 빛, 소망을 이룰 빛, 그 빛이 얼굴에서 나면 그 아름다움은 지상의 어느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 예루살렘은 빛으로 충만한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2. 도성의 성곽 문이 동서남북으로 세 개씩 준비되어 있다. (계21:12)
계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라고 하였고 계21:13을 보면 그 문은 동쪽, 북쪽, 남쪽, 서쪽에 각 세 문이 있다. 그런데 그 문은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스라엘 자손인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써 있다. 문마다 서 있는 열두 천사는 문지기 천사다. 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와 들어올 수 없는 자를 허락하는 천사다.
계21:26을 보라. “사람들이 ... 그리로 들어가겠고”라고 하였다.
계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 문은 들어갈 자가 정해져 있다. 천사가 문마다 서 있는 이유는 문지기 사명이다. 문들 위에 이름을 써 놓았기에 들어갈 자, 못 들어갈 자의 확인이 가능하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열두 문들 위에 이름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이 중요하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동, 북, 남 서로 세 문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이 네 방향의 문은 다양한 사람들이 천국으로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동문은 아침 일찍, 인생의 어린 시절에 예수를 믿어 들어오는 사람을 위한 문이고 서문은 인생의 노년 시절에, 해가 지는 석양을 바라보는 때에 들어오는 사람, 모두 다 들어올 수 있는 문이다. 남문은 따뜻하고 온화한 지대에서 사는 사람, 마음이 감성적이며 뜨거운 사람도 들어올 수 있는 문이고 북문은 찬바람이 나고 쌀쌀한 지대에 사는 사람, 마음이 냉랭하고 이성적인 사람도 들어올 수 있는 문이라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의 성문은 누구에게든지 열려 있다.(계21:25) 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기록되기만 하면 동, 북, 남, 서문 어느 곳으로든지 들어올 자가 된다. 나이와 경력, 경험과 상관없이 들어오게 된다. 이름이 기록되는 자가 되자. (계20:12, 15, 17)
3. 도성의 성곽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다. (계21:14)
계21: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고 하였다. 열두 사도의 이름, 그들의 이름은 어린 양에 속한 이름이다. 열두 기초석에 그 사도의 이름들이 있다는 것은 이 성곽이 세워진 터와 기초를 말하는 것이다.
엡2;20~21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간다고 하였다.
새 예루살렘 도성은 바로 이렇게 지어져 완성된 성전이다. 이제는 이 새 예루살렘 성, 아버지의 집만 있으면 된다. 성전이 필요 없다.
계21:22을 보라.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는 예루살렘 성이 성전이다. 성전의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 것은 완성된 성전을 지어가기 위한 당연한 표현이다. 터는 예수님, 기초는 사도, 벽돌은 성도, 이렇게 지어지는 것이다.
4. 도성의 모양은 정육면체이다. (계21:16)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도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한다. 계21:16을 보면 그 측량된 성의 모양은 네모가 반듯한 정육면체이다. 그 길이와 너비와 높이는 같아서 12,000 스다디온이다. 1스다디온은 192m이다. 대충 2,400Km 다. 크기가 엄청나지만 12,000스다디온이란 완전을 뜻한다. 12×1,000이기 때문이다. 12, 그리고 1,000은 흠과 티와 문제를 가진 성이 아니란 의미이다. 그리고 도성에 비하여 성곽은 144규빗이다. 너무나도 낮고 작은 성곽이다. 144규빗은 70m 밖에 안되는 성곽이다. 이는 역시 군사적 의미의 성곽이 아니고 12×12로 이루어진 완전을 의미한다. 이는 모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셔서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완전한 천국으로서 새 예루살렘을 말해준다.
5. 도성의 건축 자재는 각색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21:18~21)
성곽의 기초석은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으로 구성되고 자수정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열두 문은 열두 진주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계21:21을 보면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다. 보석과 금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도성,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도성의 진가를 말한다. 어떤 것보다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 이 도성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자의 믿음이라는 것이 정금 믿음, 보석 같은 믿음, 벽옥 같은 믿음임을 말해준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집을 세워가는 자다. 새 예루살렘을 세워가는 자다.
그래서 고전3:9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하였다. 고전3:10을 보면 사도가 터를 닦아 둔 위에 우리는 세우는 자다. 고전3:11에서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전3:12~13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을 시험하기에 타버린다. 그러나 금과 보석은 그대로 있다. 타지 않기에 그대로 있어 상을 받는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의 건축 자재는 모두 다 금과 보석이다. 불이 공적에 타지 않는 자재로만 이루어져 있는 이 도성의 의미는 이 도성에 들어오는 자의 믿음의 삶이 보석처럼, 정금처럼 귀하고 보배롭고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이다. 보석의 특징은 흠이 없어야 한다. 옥의 특징은 결이 없어야 한다. 믿음의 순도를 의미하는 것이 정금의 상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믿음을 귀히 여기고 믿음의 삶을 바로 살아가면 나의 삶은 정금의 삶이 되고 보석의 삶이 되고 벽옥, 남보석, 녹보석의 각색 삶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그 삶에 합당한 순 정금 길을 걷게 된다. 그 삶에 합당한 찬란한 보석집에 하나님과 함께 머문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에서의 삶의 물질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이 도성을 안다면 세상의 삶, 물질의 삶을 동경하지 말라. 그것은 정말 하늘의 집에 비교하면 분토 같은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유혹당하지 말고 내 삶이 예루살렘 성을 이룬 자재가 되자. 예루살렘 성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6. 도성의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흐른다. (계22:1~5)
지금까지 예루살렘 성의 특징들이 대략 설명되었지만 계22:1~5까지가 예루살렘 도성의 묘사다.
계22:1을 보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흘러나온다.
생명수 강! 그것이 도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린 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
최정인목사 / 요한계시록 21:9~17
도입 Introduction: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Surrounding the throne were twenty-four other thrones, and seated on them were twenty-four elders. They were dressed in white and had crowns of gold on their heads” (요한계시록 Revelation 4:4).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가장 큰 복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시인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볼 수 없다면, 우리의 삶은 세상 사람의 삶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이 주어지던 당시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도와 많은 성도가 핍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세상에 증언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랑으로 세상을 섬겼습니다. 성도는 핍박을 받고 순교하였지만, 교회는 그 수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습니다. 우리 주님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핍박으로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을 통하여 당대의 성도와 오늘날까지의 성도에게 주신 계시가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성도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과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을 열면 하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늘의 모습은 이 땅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서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는 마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4:13에서 고백한 것처럼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았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4:4에 드러난 성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부 하나님의 보좌를 빙 둘러서 24개의 보좌가 있습니다. 제가 다시 강조하지만, 성부의 보좌와 24개의 보좌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24개의 보좌 위에 24명의 장로가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금으로 된 월계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성도가 앉는 의자는 보좌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성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가 왕이신 하나님이 앉으시는 보좌와 같은 보좌에 앉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전에 저는 “성도가 앉는 것은 의자, 하나님이 앉으시는 것은 보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보면 분명히 성도도 보좌에 앉고 하나님도 보좌에 앉으십니다.
성도와 하나님이 다른 것은 머리에 쓰는 관입니다. 성부와 성자는 왕관(diadem)을 쓰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월계관(laurel wreath)을 씁니다. 요한계시록 4:4에서 24명의 장로가 쓴 금관은 금으로 만든 월계관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이 세상에서는 비록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혐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이 우리의 복이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1~12에서 우리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지만 성도는 하늘에서 하나님 보좌를 둘러싼 보좌에 앉으며, 금으로 된 월계관으로 벗어 드리며 예배합니다.
주님은 요한을 통하여 하늘의 실상을 보여주심으로 이 땅의 제한된 핍박의 칼에 성도들이 담대히 죽음으로 맞설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의 이러한 체제가 영원히 가는 것은 아닙니다. 최후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 있고 하나님의 왕국이 온전히 드러날 때가 옵니다. 그때 성도는 우리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은 부활한 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히 삽니다. 이 성도를 오늘 본문에서는 “신부, 어린 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21:9~17에서 “새 예루살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1.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Come, I will show you the bride, the wife of the Lamb” (9~10).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9 One of the seven angels who had the seven bowls full of the seven last plagues came and said to me, “Come, I will show you the bride, the wife of the Lamb.”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 그러니까 이 천사는 재앙을 예고하고 재앙을 시행하는 천사처럼 생각되죠? 그렇지 않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는 존재입니다. 천사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전하라면 심판을, 구원을 전하라면 구원을 전합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왕국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과 사랑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습니다.
그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다가와서 말합니다. “이리로 오세요. 제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당신에게 보여줄게요.” 성도에 대한 가장 놀라운 유비(analogy) 중의 하나는 바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입니다. 주님은 머리이시고 성도는 몸을 이룬다는 유비도 놀랍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남편이시고, 모든 성도는 주님의 신부, 주님의 아내라는 유비도 놀랍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31~32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된 것처럼, 주님과 우리 각자는 남편과 아내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그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는 어린 양이 신부인 교회는 집합적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드러납니다. 10절을 봅시다.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이미 사도 요한은 21:2에서 같은 내용을 보았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그러니까 새 예루살렘은 도시이기 이전에 사람입니다. 사람이 없는 도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5세기 초 북아프리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가 이민족의 침입을 받을 때,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로마를 침공한 북방 민족은 로마 교회의 감독과 만나 로마에서 사람은 죽이지 않는 대신에 10일 동안 철저한 약탈을 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제국의 이교도 전통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로마제국이 이교도의 침입을 받고 수치를 당하는 이유는 그들의 전통적인 신들을 버린 것에 그 신들이 노여워하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을 저술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로마의 수치와 소돔의 멸망을 비교했습니다. 그는 소돔은 사람과 도시가 함께 멸망했지만, 로마는 도시는 약탈을 당했어도 사람은 살아남은 점을 대조했습니다. 사람이 살아남았다면 완전히 패망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세상의 도시와 하나님의 도시를 대조합니다. 이 세상의 도시는 자기 사랑 위에 건설됩니다. 하나님의 도시는 하나님 사랑 위에 건설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 도시는 결국은 패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시는 영원합니다. 세상의 왕국은 발생하여 흥하고 결국 패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시는 영원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 영원한 모습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도시가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2.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On them were the names of the twelve apostles of the Lamb” (11~14).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11 It shone with the glory of God, and its brilliance was like that of a very precious jewel, like a jasper, clear as crystal.
이제 11절부터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21:23의 말씀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지금의 세상은 태양의 에너지에 의지하여 생명체가 유지되고 어둠을 물리칩니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새 예루살렘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습니다. 벽옥과 수정같이 맑습니다. 이는 성도의 귀함과 순결함을 상징적으로 그리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귀하고 순결한 신부가 되었을까요?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세상과 하나도 차이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6:11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모든 은혜는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씻김을 받고, 거룩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귀하고 맑은 어린 양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귀하고 맑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가 누리는 복과 거룩함입니다.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2 It had a great, high wall with twelve gates, and with twelve angels at the gates. On the gates were written the names of the twelve tribes of Israel.
새 예루살렘 성은 가로, 세로,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 형태를 이룹니다. 동북남서에 각각 세 문씩 열두 문이 있습니다. 그 열두 문에 열두 천사가 수문장처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두 문의 이름은 야곱 즉 이스라엘의 자손인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성도도 신약의 성도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을 이룹니다.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3 There were three gates on the east, three on the north, three on the south and three on the west.
새 예루살렘이 성은 사방에 각 세 개씩 모두 열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문이 없고 벽으로만 둘려있는 성은 외부와의 소통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성입니다. 살아있는 성은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외부와 물질 교환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하며, 재생산합니다. 영적인 생명도 하나님 앞에 열려있어서 말씀과 성령으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흐름으로 힘을 얻고 자라고 재생산합니다. 닫힌 체계는 죽은 체계입니다. 열린 체계는 산 체계입니다.
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4 The wall of the city had twelve foundations, and on them were the names of the twelve apostles of the Lamb.
새 예루살렘은 열두 개의 기초석 위에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열두 개의 기초석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4의 24명 장로는 이렇게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어린 양의 열두 사도를 합한 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24명의 장로는 모든 시대의 성도를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또 사도 요한이 이 계시의 말씀을 듣는 시점에서 다른 열한 사도는 다 순교해서 이미 천국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새 예루살렘의 열두 개의 기초석 가운데 한 개의 위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복된 순간일까요?
새 예루살렘의 열두 개의 기초석이 곧 열두 명의 사도라는 사실은 교회가 바로 사도와 예언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에베소서 2:19~22을 봅시다. 19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20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교회가 성전이라는 건물로 묘사되는 이 말씀에서 우리 주님은 모퉁잇돌, 그리고 사도와 선지자는 기초석입니다. 이 사도가 열두 명이기에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이 기초석 위에 적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열두 사도에게 계시하신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앙을 세우며 교회를 세웁니다. 21절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주님 안에서 우리 각자가 연결되어 건물이 되고 성전이라는 복합 건물이 지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이 교회와 이 성전이 그리스도의 신부와 아내인 새 예루살렘으로 드러납니다. 22절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아직 새 예루살렘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시는 성전, 새 예루살렘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른 모든 성도와 함께 지어져 가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일인칭 복수인 우리가 현재 수동 진행형으로 지어져 가는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의 성도와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모습은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미래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현재를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도의 소망, 성도의 힘입니다.
3.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았더라” “As wide and high as it is long” (15~17).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5 The angel who talked with me had a measuring rod of gold to measure the city, its gates and its walls.
이제 사도 요한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 천사는 예루살렘 성, 그 성문, 성곽의 크기를 측량합니다.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았더라
16 The city was laid out like a square, as long as it was wide. He measured the city with the rod and found it to be 12,000 stadia in length, and as wide and high as it is long.
새 예루살렘은 가로, 세로,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 형태입니다. 그리고 각 변의 길이는 12,000 스타디온 즉 1,400 miles (2,200 km)입니다. 1,400마일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오지 않죠? 배톤루지에서 뉴욕까지의 거리가 1400마일이 조금 안 됩니다. 그러니까 새 예루살렘의 넓이는 만이천 스타디온 곱하기 만이천 스타디온이니 만이천 제곱 스타디온입니다. 또 이 성은 높이도 너비와 길이와 같습니다.
여기서 이러한 수는 12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 곱하기 천이 만이천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의 12지파에서 각 지파의 구원받은 수가 만이천 명에 열두 지파의 합은 144,000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수를 어떤 완전함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수, 완전한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17 He measured its wall and it was 144 cubits thick, by man’s measurement, which the angel was using.
이제 천사는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의 두께(thickness)를 측량합니다. 그 두께는 144 규빗이었습니다. 이 수도 12에 12를 곱해서 나온 합입니다. 피트로는 200, 미터로는 65 정도입니다. 성의 두께가 65 미터이면 왕복 10차선 도로 정도의 넓이죠.
결론 Conclusion: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Nothing impure will ever enter it, nor will anyone who does what is shameful or deceitful, but only those whose names are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요한계시록 Revelation 21:27).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그 새 예루살렘의 구성원인 것이 확실한가입니다. 제가 주보에 써드린 요한계시록 21:27을 봅시다. 새 예루살렘의 구성원, 즉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은 속되지 않습니다. 가증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새 예루살렘, 어린 양의 신부, 어린 양의 아내가 될까요? 오직 그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어린 양의 신부, 어린 양의 아내입니다. 이제 반주해 주시는 동안 이 한주도 어린 양의 신부, 어린 양의 아내로서 예수를 증언하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기를 결단하는 기도를 다 함께 드립시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저 사랑의 성 - 새 예루살렘
계 21장 9~11절 / 조남신목사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그러면 머지않아 새 정부가 들어설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고, 체제가 바뀌고 하면 기대가 있는 법인데, 오히려 불안한 기운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김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밤잠을 설친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다른건 몰라도 대북 사업과 경제회생만은 양보할 수 없는 업적으로 간직하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대북 뒷거래 의혹과 국가신용등급 하락전망으로 두 가지 모두 무너져 내릴 판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또 언젠가 신문에선 이렇게 비평하고 있더라구요. '카지노로 시작했다가 Lotto로 막을 내리는 정부'!!..... 그것이 국민의 정부였다는 거지요. 또 이제 그 다음 노무현정부가 들어설텐데, .... 부디 좋은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 사람이 바뀌고, 체제가 바뀔 때마다 우리들에게는 이상이 생기지요. 그래서 차기정부는 과거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고, 좀 더 온 국민이 공익을 누릴 수 있을만한 그런 통치를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 대통령인들 그걸 모르겠습니까마는, 그것이 그렇게 잘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꿈을 꾸는 거지요. 좀 더 나은 정부, 점 더 나은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 꿈은 계속 꾸어야 합니다. 비젼은 계속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절망이나 냉소주의는 별 가치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려울수록 꿈은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가 있지요. 그 꿈을 보아야 합니다. 이걸 참지 못하는 자들은 절망하거나, 흩어지거나, 와해되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거지요. 우리 인류 사회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궁극적으로 꿈꾸고, 지향해온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까? .... 우리는 그것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바로 오늘 본문말씀에서 입니다.
> 여기 요한 계시록은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이지요. 사도 요한의 묵시를 담고있는 책이에요. 이것은 성경의 마지막에서 아주 큰 묵시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어요. 그것은 어찌보면 우리 인류가 이루어 보고 싶은 꿈이 투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사도 요한이 이 묵시를 언제 보았느냐하면, 그때가 로마황제 도미티안이 통치하던 말년입니다. 서기(A.D) 95년경에 이 책이 쓰여졌다고 보는데.... 그때는 교회가 박해를 당하고 있었던 시기에요. 그래서 사도요한이 말씀을 증거하다가 잡혀 에게해의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합니다. 그래서 거기 있는데, 어느 날 성령의 감동을 받아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지요. 이것을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이에요. 그래서 지금의 터키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에 이 편지가 보내지게 되는데.... 외부의 박해를 받아 배교의 위험을 안고있는 그런 위태한 상황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런 비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요한의 묵시 중에 가장 찬란한 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인데, 거기에 바로 우리 인류의 열망이 담겨져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열망하고 있습니까?
> 사도 요한은 이 계시록을 쓰면서 신약성서에서 그 누구보다도 구약성서를 제일 많이 인용했는데, 창세기부터 이어져오는 인류문명의 역사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성을 쌓는 모습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인류는 처음부터 성을 쌓았지요. 맨 처음의 성이 에녹 성(창세기 4:16-17)이었습니다. 이 성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 앞을 멀리 떠나 에덴동쪽에 세운 성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바벨탑인데, 노아의 대홍수 후에 나온 인간의 구상이지요. 이 성을 쌓게된 의도와 목적은 "성을 쌓아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창세기 11:4)는 거였지요. ... 이렇게 시작되는 인류문명의 역사는 항상 "인간의 성"을 쌓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지적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 앞을 떠났다", 하나님 앞을 너무 멀리 떠났다, 아니면 인간이 쌓아올린 탑 꼭대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하여 인간의 이름을 내는데 급급했다.... 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행착오와 실패로부터 얻어진 결론인즉슨,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였습니다. .....
>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인간의 성의 한계를 뛰어 넘는 그 어떤 성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꿈꾸어 왔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이 환상은 "아름다운 도시 : 새 예루살렘"이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성"이었습니다. 인간의 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성!! 그것은 과연 어떠한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세 가지만 말씀 드려 보려고 합니다.
Ⅰ. 먼저 하나님의 성은 10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이라는 거지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겠다"는 오만이나 "우리의 이름을 내"려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도전이 아니라는 거지요. 하나님의 선물, 그리고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성"이라는 거예요.
>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성"에 거하려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충분히 개발, 발전시키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헌신이고 청지기직 이라는 거지요. 하늘을 향해 쌓아 올리려고 해선 안되고, - 하늘로부터 내려와야 그것이 하나님의 성이라는 것입니다.
> 지난 수요일인가 신천대로에 아침부터 길이 막혔지요. 왜? 화물트럭이 지하로를 지나가려고 하다가.... 걸리지요. ...존 템플턴의 이야기 속에서도 바로 이 이야기가 나오지요.(프린스톤대학의 이사장과 학장을 역임했는데, 이 존 템플턴상을 한경직 목사님이 수상한 바 있지요). 이 책에서도 대형트럭이 지하로 입구에 끼어서 난리 났을 때, 한 소년이 트럭운전사에게 다가오지요. "아저씨 제가 트럭을 빼날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 "됐다. 꼬마야. 어른들이 알아서 할테니, 저리 가라. 다친다!" - "타이어에서 공기만 빼면 돼요". 어떻게 되었어요? 어른들은 이 아이 말대로 공기를 빼고서야 드디어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 거예요. 어쩌면 하나님과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도 이런 것 같아요. 우리 자신이 조금만 바람을 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바람이 너무 빵빵하게 들어 있어서.... 그만 고생이 많지요. 하나님은 그것을 무너뜨리십니다. .... 그것이 하나님의 성이 추구하는 행복이요, 승리의 삶이라고 하십니다.
Ⅱ. 그 다음 하나님의 성과 인간의 성의 차이점은 모임과 흩어짐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24절에서 보면,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모이는 곳, 또 26절에 보면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모여드는 곳 - 이런 모여듦으로 하나님의 성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 그에 반해, 인간의 성은 흩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바벨탑도 결국 뿔뿔이 흩어졌어요. 현대 문명의 표상 "아파트"(APT)도 "떨어진다"는 뜻이지요. 서로 교통 없이 고독하게 혼자 떨어져 사는 것이 현대인간의 성임을 증명해주는 것 같아요.
> 또 현대사회 첨단정보 테크놀로지를 대표하는 두 가지가 휴대전화와 인터넷인데, 좀 더 현대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휴대폰이라고 해요. 휴대폰은 철저히 개인화 장비지요. 인터넷은 모르는 사람과도 관심사가 같으면 사해동포주의를 나눌 수 있는데, 휴대폰은 내가 원치 않으면 안 받아 드리지요. 이 휴대폰은 매력덩어리라 그 맛을 아는 젊은 세대들은 중독에 걸려있을 정도래요. 이 정도되면, 휴대전화가 애인보다 더 좋다고 그래요. 애인은 안 봐도 그만이지만, 폰 없이는 잠시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휴대전화가 애인보다 더 좋은 이유 다섯 가지....
① 손안에 쏙 들어와 어디든 갖고 다닐 수 있다.
② 싫어지면 쉽게 바꿀 수 있다. 업그레이드도 가능하다.
③ 게다가 점 점 똑똑해진다. 카메라와 캠코더. TV 역할까지 해서 심심할 틈을 안 준다. 아는 것도 많은데다 지갑대용으로도 쓸 수 있다.
④ 내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연락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하고, 싫으면 안 받으면 그만이다. 시끄럽게 굴면, 진동모드로 바꾸거나 꺼버린다.
⑤ 가장 중요한 건 다섯째다. 얼마든지 바람피울 수 있다는 점. 바로 앞에 사람을 앉혀놓고도 딴 사람과 내통하는 게 가능하다는 거예요.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새 휴대폰이 우리 삶에 가져온 문화변동은 웃어넘기기 힘들만큼 다양하고 심오하다는 거지요. ....
> 하나님의 성은 이게 아니지요.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은 모이는 성이지요. 새 예루살렘에 열 두 대문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종과 계급을 초월해서 사방팔방에서 모여드는 성을 의미하는 거지요. 초대교회가 아름다운 성일 수 있었던 것은 사도행전 2:46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해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모여서 기쁨으로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Ⅲ.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은 예수중심, 하나님 중심의 성이었습니다. 23절에 보면,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 예수가 그 등불이 되심이라."
> 인간의 성은 법이 다스리지만, 하나님의 성은 사랑으로 다스려집니다. 사람들은 모세이래 수 천년동안 열심히 법을 만들어왔지만, 인간의 성은 날로 악화되어 나갈 뿐입니다. 범죄율이,- 남성범죄율, 여성범죄율, 청소년 범죄율이 - 점 점 더 늘어나고, 악랄해지고... 해결책이 점 점 더 보이지가 않지요.
> 그래서 성경은 이런 인간의 성에 대한 대안사회로서 하나님의 성을 보여주지요.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것은 사랑이 충만해있는 성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떨어져 사는 세상 속에서 나와서, 인간의 욕심만을 불태우는 바벨의 탑 속에서 나와서, 저 사랑의 성, 아름다운 도시,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그와 같이 살도록,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살도록 우리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거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성에서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
계 21장 9~27절 / 이상호목사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가지고 있는 몇가지 소망과 바램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육간에 건강하고 물질과 자녀의 복을 받는 것, 그리고 마지막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현세의 복과 내세의 복,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복을 받고자 하는 바램입니다.
현대는 갈수록 과거와 미래를 포기하고 현세에만 만족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지만 인생의 마지막 때가 되면 누구든지 내세를 갈망하게 됩니다.
왜 인생의 마지막 때가 되면 내세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게 되는가?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절 읽고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은 결혼식장에 들어오는 신부와 같이 아름다워서 누구든지 본능적으로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현세와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질서가 전개된다.
3-5절 이렇게 우리의 내세 소망은 이 땅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내세는 현세와 궁극적으로 그 내용이 다릅니다. 거짓도 불의도 없고 욕심도 교만도 없고 갈등과 방황도 없고 외로움도 눈물도 없는 곳, 죄와 허물도 없고 슬픔도 상처도 없고 질병도 죽음도 없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신천신지에 대한 갈망이 갈수록 더해만 가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있어야 할 것은 많이 있게 해주시고 없어야 할 것은 하나도 없게 해 달라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가 아무리 새사람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오늘 은혜를 받고 마음이 즐거워도 언제 마음이 변하여 금방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될지 모릅니다. 오늘 사랑하고 나누고 베풀고 섬겨도 언제 돌아서서 미워하게 될런지 나 자신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동지가 내일 적이 될 수가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역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은 다릅니다. 거기는 거룩한 성이고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다 이룬 거룩한 성, 모든 부족이 채워졌고 모든 부정한 것이 씻어진 성이 거룩한 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그곳을 갈망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거기에 가야 할 사람들인데 거기에 좀 더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이다.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 "
하나님과 순전하고 완전한 교제를 나누는 교회를 말합니다.
거룩한 성, 신령한 교회는 하나님이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
11, 14, 18절
이렇게 거기는 성도들의 믿음을 통해 얻은 영화로움이 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명예 권세와 다른 전혀 새로운 것이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성전을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은 세상의 희희락락 쾌락이 있는 곳과 다릅니다.
생존 경쟁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살벌한 전쟁, 대립, 갈등과는 전혀 다른 은혜와 생명이 있는 곳입니다.
2.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거기 계시다.
(계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 "
거기에는 빛으로 생명으로 계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죄와 허물을 사하여 주시고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 하시고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에서 위로와 평강, 평안과 화평으로 안내해 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예수님은 성전의 머리시며 오늘 우리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구속 받은 사람, 구원 받은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거기에 들어가며 거기서 영광의 주님을 만납니다.
26, 27절
그리고 거룩한 성에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동일합니다.
(계 21:16)"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 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 보호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안전하고 완전한 곳이며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곳입니다.
(계 21:11)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계 21:12)" 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이렇게 예수님이 계신 그 곳은 가장 안전하고 완전한 곳입니다.
3. 거기는 밤이 없고 어두움이 없는 곳입니다.
(계 21: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어둠으로 깔려있습니다.
거짓, 불의, 교만과 욕심, 아집과 편견, 낙심과 낙망, 좌절 투성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열등감과 비관적 자아로 인한 자기 비하는 더욱 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는 전혀 상황이 다릅니다.
해나 달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밝음이 있는 곳, 성문을 낮에도 닫지 아니해도 되는 곳으로 거기에는 부정적인 것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우리는 거기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신부를 위하여 단장된 곳,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영광스러운 곳, 우리가 가야 할 곳이 거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삶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은 강하게 담대히 하고 모든 맡겨진 사명에는 최고의 관심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거기는 하나님이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어린양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거기는 밤이 없고 어두움이 없는 곳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그곳을 소망하며 하루를 열기 바랍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고 낙심하지 말고 내일의 영광을 보며 어깨를 펴십시다.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본문에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이 아닌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살렘- 거기에 물이 많기 때문에) - 살렘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해석은 평화의 도성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칭호
1) 아라엘---사29:1 2) 하나님의 성---시46:4 3) 다윗성---삼하5:74
4) 진리의 성읍---슥8;3 5) 거룩한 성---느11;1 6) 거룩한 산---단9;16
7) 여브스---수18;28 8) 살렘---창14;8 9) 여호와의 보좌---렘3;17
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적 의미
거룩한 성 예루살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성도들의 모임을 뜻
출15;17-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라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곳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2, 거룩한 성의 구성요소 (4가지) (창6:22-노아가 이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1) 말씀대로 지어진 성
계21;16-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측량하니 12,000스다디온이요 장과 고기가 같더라.
17-그 성곽을 측량하매 144규빗 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12,000스다디온 - 12지파를 의미하며 오늘날은 신앙의 영적 계열을 의미.
144규빗 : 계7;4절에 있는 십사만사천명을 말하며 구원받은 성도의 총수
교회란 어떤 인물이 또는 어떠한 조직과 어떠한 목적으로 구성되느냐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출15;26-라마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법을 세우셨으니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7-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여 내 계명에 귀를 기우리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사람에게 모든 질병의 하나라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
(2) 지파대로 열린 문
12-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마다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지파의 이름들이라.
열두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입니다.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몬, 레위, 잇사갈, 스블론, 요셉, 베냐민
구약에 있는 열두지파를 분석해 보면 - (진리를 팔아먹은 지파) (부모 속을 섞인 지파) (양심을 속인 지파) (끝까지 진리를 세운 지파)
14-그 성의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21-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나 문마다 한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열두 기초석 - 반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모신 종을 말하며
열두 문이 있고 문마다 한 진주로 되었다는 것은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말합니다.
(3) 은사대로 구성된 성
19-그 성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1.벽옥 2.남보석 3.옥수 4.녹보석 5.홍마뇨 6.홍보석 7.황옥 8.녹옥 9.담황옥 10.비취옥 11.청옥 12.자정
예) 중국은 옥돌이 유명하다 옥돌 자체는 외모로 보면 돌에 불과하나 세공업자가 이를 조각하고 연마할 때 아름다운 보석이 됩니다.
성도는 제각기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심을 다하여 갈고, 연마하여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어야 합니다.
(4) 아름다운 도성
11-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예) 중국 서안에 있는 진시황의 무덤을 가보면 무덤의 일부만이 발굴되었는데 대단하답니다. 진시황의 무덤에 대한 고문서에 보면 아름다운 아방궁이 지어져있는데 각종 보석으로 하늘에 은하계가 이루어졌다고 되어있습니다.
23-그 성은 해와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서 다니더라.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있으며 그 영광으로 박고 맑은 심령이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 불평, 시기, 질투, 분쟁이 없어 자기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는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3, 거룩한 성에 이르는 비결
(1)처음 것들이 지나가야 합니다.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4-하나님이 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지나 갔음이러라.
처음 것들 -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이루어진 새사람이 되기 이전의 옛사람
이러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5-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2)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니라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3)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새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새 예루살렘을 보면 - 세상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은 믿음의 조상들과 많은 성도들이 찾던 성입니다.
히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과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 하여 동일한 약속으로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제 마음대로 하면서 ‘이것이 성령의 인도다’ 하면 큰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 완성과 영원에서
계 21장 11절 / 김남준목사
I. 완성, 다시 머리되심
그리스도께서는 미래에 되어 질 위대한 일의 계시를 요한에게 보여주시는 가운데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후 영원 무궁히 빛날 하늘나라의 영광에 대해서 증거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 완성된 후 전개될 새 하늘과 새 땅의 그림입니다.
A. 두 세계를 통일하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된 모든 만물이 서로 질서 있게 어울리며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하고 아름답고 선하였지만, 이 세계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돌보고 가꾸고 정복함으로써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여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서 사물에 부여하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는 여지를 이미 처음 창조할 당신에 모든 피조물 속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1. 인간구속의 완성을 통해
그러나 죄가 들어왔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는 그 질서가 깨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 세계와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이루어진 이 세계의 파괴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망가진 세계 안에서 우리는 죄의 큰 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자체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모든 세계 속에 두셨던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거두시자 그 모든 피조세계들이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죄로 인해 깨어진 모든 관계, 이 어두운 배경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란한 빛처럼 그려내셨던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떠나서 죄를 지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창조의 질서를 깨뜨린 모든 고통 하는 창조세계를 회복하시는 길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이미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볼 수도 없고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이 세상에 내신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었으며 욕망을 따라 살려고 용솟음치는 자기 의지를 꺾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으니 이분이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
맨 처음 이 모든 세계가 창조 될 때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이 모든 세상이 망가지자 이번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이 모든 인간과 만물을 구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죄 때문에 캄캄하게 된 이 세상, 여기에 그리스도를 빛으로 보내시고 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서른 세 해 동안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인간과 똑같이 사셨습니다.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몸을 통해 직접 보여주셨고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그 모든 비참한 처지에서 자기를 철저히 버리고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당신이 온전히 자기를 버리므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죄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신 지를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의 큰 희생과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이라도 기꺼이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용서와 성령의 은혜로 회복하게 하시고 그들의 영혼 속에 생명과 사랑이 부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혼을 위한 모든 자원이 끊어진 가운데 이 세상에서 죽은 자처럼 살던 사람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이 세계를 구원해 가시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사람들에 대한 구원이 마치는 그날에 그분은 최종적으로 이 모든 세계를 심판하시고 끝까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친히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모든 불신자들을 멸하시고 구원 얻은 사람들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삶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본 이 전망은 바로 이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런 광경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십니다.
B. 창조의 영광을 회복함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당신과 직접적으로 영적인 관계를 맺으며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고, 자연 모든 만물들은 그분의 통치에 굴복함으로서 간접적으로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지체가 되게 하십니다. 머리가 온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그날에는 우리 모든 성도들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자연 만물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복종하여 모든 피조 세계는 질서를 회복할 것입니다.
1. 만물의 상호교통과 영광
그때는 모든 피조세계가 완전한 평화와 조화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연 만물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죽여야 하고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멸해야 하는 치열한 약육강식과 생존 경쟁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장 탁월한 존재가 거기 있게 하셨으니 그는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직도 구원이 이루어지는 이 세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만이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보았지만 완성되는 그 나라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영혼을 어루만져 그 눈을 뜨게 해주셨던 사람들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이고 하늘의 영광이 무엇이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낮아지심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은 사람들만이 감격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그때에는 모든 만민들이 눈의 비늘이 벗어져 명백히 볼 것이며 예전에는 희미했으나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치 찬란한 영광 가운데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그리스도를 뵙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가 얼마나 초라한 모습이었으며 사실은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전 그분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위대한 존재인지를 그때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지만 그때에는 모든 사람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사람의 몸 너머에 계신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잘 몰랐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 하나님이 닫힌 그 눈을 열어준 사람들만이 일부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하심을 보았지만 그것도 그들의 지성의 한계로 말미암아 보여주신 만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은 온 땅과 하늘 위에 탁월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이고 믿음은 모두 현실로 나타나고 소망은 성취되어도 사랑은 계속 될 것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목도하는 자마다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2. 타락과 파멸로부터 보호하심
이렇게 이루어진 완전한 하늘나라에서 일평생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이 땅에서는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한때 십자가의 사랑 앞에 깊이 감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자신이 여전히 그리스도 외에는 희망 없는 죄인이라는 본분을 잊어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진리는 드러났고, 자기가 살아왔던 죄악 된 삶,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불행했던 지난날의 모든 과거도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은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탁월한 은혜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누구입니까? 성도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구별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을 전부로 알고 일생을 살지만 성도는 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정신은 영원한 세계 속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잠시 있다 사라질 이 세상을 그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그분과 함께 안식을 누리게 될 그때를 그리워하며 이 세상에 진정한 안식이 없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II. 영원, 영광의 무한한 증진
A. 점증하는 영광
인간의 구원이 모두 완성될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처음에 그 아름다운 영광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영광을 회복한 후에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찬란한 영광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무한한 영광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의 만물들은 그분의 영광을 받아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고, 모든 인간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아름다움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의 그 큰 행복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바라보며 영혼이 만족을 얻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이 자신의 영혼 속에 부어지는 것을 통하여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의 나타남은 어느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게 끊임없이 비췰 것이며 그 찬란한 그리스도 예수의 빛 앞에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경험한 적이 없던 새로운 기쁨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고난과 결핍, 시련과 고난이 많은 이 땅에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성도들은 하늘나라의 기쁨을 당겨서 맛봅니다.
누구도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은 없습니다. 변함없이 사랑한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오고 고독과 고통이 찾아오게 되면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도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참회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만약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일은 있을지 모르지만 회개할 일이 없는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이 회복될 때마다 미끄러졌던 날들이 떠오르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날들이 생각나게 됩니다. 우리는 미끄러졌다가는 다시 회개하고 신앙의 길로 들어서고 예전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며 주님을 거슬렀지만 다시 십자가의 사랑을 안후에는 예전의 일을 버리고 주님을 붙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 모든 신자의 일생은 참회의 일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미래에 도달하게 될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가슴을 쥐어짜는 깊은 회개의 고통과 환경에 의해서 떠밀려 주님을 알기에 부적합하게 되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그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 곡하는 것이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뿐 아니라 다시는 죄와 파멸이 없도록 보호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탁월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것이며 들풀처럼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그 순례자의 길과 같은 신앙의 날들을 우리는 비로소 한 눈에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이 계속되는 날 동안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흔들리면서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셨고 쓰러지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게 하셨던 하나님의 큰 은혜를 인하여 감격하게 하실 것입니다.
III. 성도의 영원한 복락
그 날과 그 완전한 행복을 기다리는 성도의 일생은 어떠해야 합니까?
생명 있는 날 동안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 있도록 해드려야 할 것이며 내가 사람의 몸을 입고 여기에 있는 날 동안에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 동안에 주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유익을 얻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이바지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우리는 더 마음의 눈을 들어야 할 것이며 시간이 흘러갈수록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궁극적인 고향이 이 세상이 아니라 탁월하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나라임을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것입니다.
매순간 감사하며 주님을 섬기고 마음과 영혼의 무지를 깨고 날마다 주님을 알기 원하며, 매순간 발꿈치를 들고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을 소원하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은 하루하루 죽는 것이며 매일매일 죽는 것은 다시 만날 그리스도를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 동안에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큰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고 하늘나라의 전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행과 고통, 주를 위해 당해야 하는 모욕과 시간과 공간 속에 부패하며 살아야 할 육신을 지고 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매순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때에 주께서 부르시는 그날은 우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그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그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그날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