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버스페이스(가상세계)로서의 수필
이동민
나는 요즘 하루의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보낸다. 컴 안으로 빨려들어 가서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는다.
옛날, 중국의 유명한 화가가 부잣집으로부터 그림을 주문받았다. 그림을 완성한 화가는 벽에다 걸어두고, 그 앞은 비단천으로 가렸다. 부자 영감은 그림을 자랑하려 많은 감상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화가는 그림을 가린 비단 장막을 걷었다. 산수화였다. 먼 곳의 산은 구름에 가려 흐릿하고, 눈앞에는 마치 우리집의 앞산처럼 바로 눈 앞에서 나무가 우거진 산마루며, 언덕이 선명하다. 그 뒤로는 숲에 가려 틈틈이 기와지붕만 보이는 건물이, 흐릿하여 사원인지 누각인지 분명치는 않았지만 또 다른 세상으로 보였다. 먼 산에서 흘러오는 계곡물이 눈앞에 이르러서 배를 뛰울 만큼 넓어진다. 개울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서 꾸불꾸불한 길이 저 멀리 숲속으로 사라진다.
감상객들은 그림 앞에서 선경에 취한 듯 감탄하였다. 감상자들은 모두가 머릿속으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었다. 화가는 뚜벅뚜벅 걸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개울따라 난 꾸불꾸불한 산길을 걸어서 숲속으로 사라졌다. 화가는 현실세계가 아닌 그림 속의 가상세계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내가 컴퓨터 속으로 들어간 것과 하나 다르지 않다. 컴퓨터 세계는 하이퍼텍스트로 촘촘하게 연결되어서 손가락만 까딱하면 무한 세계 속에서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 그림 속에도 컴처럼 우리가 돌아다닐 수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을까. 있다. 그러나 현실로서의 세계가 아니고 감상자가 상상으로 만든 가상세계가 펼쳐진다.
가상세계는 현실과는 다른 가상의 현실이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느끼는 세상이 가상세계이고, 가상현실이다. 이야기의 부잣집 주인처럼 그림을 감상할 때는 상상으로 상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상상으로 경험하는 세상이 바로 가상세계이고, 가상현실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상상을 통해 상상의 세계를 구경하였다면 바로 가상세계이다.
가상세계는 비현실적 세상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상상을 통해서 구경하는 세상은 자신이 경험하였던 현실의 세상을 재구성한 것이지 전혀 다른 세상은 아니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루 내내 컴퓨터 안의 세계로 여행하여 만나는 세상도 나의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실 세계에서는 만날 수 없는 세상이다. 컴퓨터를 통해서 만나는 수 많은 영상들이 사실은 ‘가상’이다.
현실은 내가 실재로 살아가는 공간 안의 세상이다. 공간이라면 입체적으로 나타나는 부피감이 있고, 그 부피 안에는 공기도, 나무도, 바위도, 집도, 움직이는 자동차도 있다. 내 삶이 만들어지는 장소이다.
가상세계도 현상이 일어나는 장소는 공간이다. 그러나 컴퓨터의 영상이 존재하는 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공간이 아니고, 반도체를 비롯하여 다양한 부속 기기들로 채워져 있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상 현실이고, 가상현실이 일어나는 이곳이 가상공간이 된다. 가상공간(사이버스페이스)은 어떤 물체가 자기의 용적만큼 자리를 차지하는 실재의 공간은 아니지만,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작동해서 마치 실재의 공간처럼 여겨지는 공간이다.
우리는 자연의 대상물을 알기 위해서 경험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사실이 된다. 또 사실에는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즉 사실은 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수필이론도 이러한 논리를 전제로 하여 만들었다. 사실을 다루자, 진실을 표현하자는 수필론이다. 철학자들은 경험을 의심했다. 우리가 경험한다고 하여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철학자들은 알수 없다고 하였다. 경험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면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수필이론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경험이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감각기관을 믿을 수 있느냐고 의심하면 경험도 가상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감각기관에서 지각한 것을 머릿 속의 신경기관이 조합하여 경험이라는 실체를 만들어 낸다. 과학에 근거룰 둔 설명이다. 지각하는 과정에서, 또 신경조직이 조합하는 과정에서 조작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경험도 가상이라는 주장을 쉽게 버릴 수 없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경험한 사실을 머릿속에서 다시 조합하여 만들어지는 영상세계는 처음과는 다른 영상이 된다. 육체적으로 경험하였던 사실을 넘어선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존재하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상상력을 동원하여 육체적으로 지각한 사실을 넘어선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을 우리는 육체적 존재를 넘어선다고(초월)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상상력을 이용하여 육체적 경험을 탈출하면, 우리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주장한다.
수필은 무엇을 쓰고 있는가. 육체적 경험을 그대로 옮겨 오는 것일까.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세상을 표현하는 것일까.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경험하여 만든 세계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경험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수필이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직물을 짜내는 현실의 공간은 세 가지 정도의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인생은 한정되어 있다.’는 거다. 한정된 인생을 다시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 하는 시기 구분을 한다. 우리는 인생의 시기를 벗어날 수 없다. 둘째는, 우리 인생은 현실이라는 시간 속에 담겨 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시간을 벗어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현실 세상에서는 생명을 가진 생명체라는 것이다. 생명의 한시성이(죽음) 우리를 옥죄고 있다. 생명이란 끝날 수 밖에 없다는 불안으로 긴장하게 한다. 인사말에 ‘몸조심 하라’는 것은 불안감이 나타나는 절박한 심정의 표현이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만나는 세계는, 즉 가상세계는 현실세계를 철학적으로 조명한 세계라고 한다. 현실세계와는 반대이고 대립하는 세계가 아니다. 둘 다 나에게서 파생되어 나온 세계이다. 나의 세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현실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로 존재한다. 요약하면 둘은 반대가 되는 세계가 아닌 나의 세계이지만 존재하는 방식이 달라서 두개의 세계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수필작가의 문제만이 아니고, 수필을 평하는 자도 유의해야 할 문제이다. 수필세계를 그 사람의 전부인양 부정적으로 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수필은 작가의 전부가 아니고 또 하나의 존재 방식일 뿐이다. 작가가 현실의 삶에서는 선택하지 않은, 상상력을 작용하여 만들어 낸 존재 방식일 뿐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로 이해하면 될까.
가상세계라고 하지 않고 ‘사이버스페이스’라고 하면 인터넷을 떠올린다. 우리는 내 눈으로, 내 귀로 보고, 듣는 시대에 살면서, 인터넷 또는 미디어라고 하는 매개체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을 직접 파악하기 보다는 매개체가 보여주는 대상을 가지고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 우리는 개개인이 자기의 눈을, 자기의 귀를 가지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물체를 경험한다. 사람마다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개성적이라고 한다.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이 사람도, 저 사람도 꼭 같은 경험을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사이버스페이스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는 SNS도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SNS로만 소통함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체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이다. 사회로부터 격리는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가상세계의 부정적인 일면이다. 적어도 가상세계가 현실세계에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된다. .
컴퓨터는 모두가 동일하다. 획일적이다. 인공제품인 인터넷 매체는 코드화(규칙화, 규범화)되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에서 지시하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표준적인 형태로 변환되어서 만들어지는 가상세계임으로, 인위적이다. 이런 형태로 우리의 감각기관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인위적으로 규범화한 세계 속으로 빠져버린다.
수필작가가 쓴 수필의 세계는 작가의 세계이다. 그러나 작가의 현실세계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은 아니다. 감각기관을 통하여 지각한 경험세계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편한 세계이다. 수필은 작가의 육체적 경험세계와 그 경험을 작가의 정신이 해석한 내용이 결합하여 만들어 낸 가상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계를 환상이라고도 부른다. 가상세계는 경험을 뿌리로 하여 만들어졌으므로 경험의 한 종류라고도 할 수 있다. 가상 세계라고 하여 현실과는 정 반대가 되는 세계는 아니다. 이런 이유로 가상세계는 현실세계와 서로 비교를 함으로서 존재한다.
우리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구분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의 지배를 받으면 현실이고,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가상이다. 시간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에는 ‘진리’가 았다. 진리만큼 엄중하지는 않지만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진실’이라는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철학이 진리를 탐구한다면 수필은 진실을 담아낸다고 한다. 진실을 담아내고,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상세계는 환상이 만들어 낸 세계이기도 하다. 이런 규정에서 보면 수필도 환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상 세계에서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상상력의 힘을 빌려 현실을 변형한다.
변형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면 먼저 몰입이 있다. 몰입이란 경험하는 사실을 현실감을 가지고 탐색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대상에 공감하는 환상을 가진다. 대상에 상상력을 작동하여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환상의 세계는 유토피아적 환상과 디스토피아적 환상이 있다. 우리 수필에서 흔히 만나는 가상의 세계는 고향, 유년시절 등의 유토피아적 환상세계이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듯이, 수필세계에 나타나는 즐거웠던 지난날의 이야기는 사실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인 수가 많다.
고향의 친구를 그리워하고, 그때의 유토피아적 세계를 그렸다고 하여 수필평에서 이것은 헌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환상일 뿐 거짓이다. 라고 평한다면, 좋은 평이라 할 수 없다. 가상세계라 하더라도 유토피아적 환상은 현대사회에서 점차 상실되어가는 인간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공감적 환상은 많은 사람이 함께 가지는 환상이다. 공감적 환상은 현대의 산업사회를 살면서 전통적인 삶에서 벗어남으로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집단 정체성을 되살려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감적 환상은 많은 사람이 옛날과는 바뀐 생활을 함으로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수필쓰기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이것도 있다. 소재에서 자기가 드러내고 싶은 의미를 좀 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구성하여 글을 쓴다. 내가 쓴 글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현실세계와 다르다면 구성에서 조작한 것이다. 구성에는 조작의 의미가 들어있다. 구성이란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세계를 작가의 의도에 맞도록 조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수필이 사실을 강조한다고 하여 현실을 사진처럼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구성 또는 조작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필을 내가 의도하는 고급 담론으로 이끌어 간다.
육체적인 요소(경험)를 정신적인 요소(담론으로)로 조작함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눈만 뜨면 하이퍼텍스트들(인터넷 매체에서 얻는 수많은 정보들)을 만나고, 기계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사이보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등등의 문제들이 우리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수필이 단순히 회고조의 타령에서 고급 문학으로 나아가도록 길을 닦아야 문학의 변두리에 머물고 있는 수필을 본류에 편입시킬 수 있다.
우리는 기술이 만든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술이 만든 인공 현실은 우리에게 편리함, 편안함, 쾌락을 선물하였다. 우리가 수필에서 회고담의 글을 쓰면서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져 탈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환상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허우적거리는 꼴이다. 현실과는 확연히 다른 가상세계에 빠져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혼돈이라고 철학자들이 경고한다. 내가 말하는 가상세계는 회고담을 말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수필형식이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이 거의 90%라고 하니, 지금의 우리 수필도 가상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라 하겠다. 다만 기술이 만든 가상이 아니고, 우리의 신경조직이, 기억-회상이라는 심리의 작동으로 만들어내는 가상세계라 하겠다. 회고담 형식의 가상세계는 우리에게 쾌락을 선사함으로 마약처럼 중독성을 가진다. 중독성에 빠져나오지 못하면 우리 수필은 문학의 변방에서 헤메야 하리라. 이것이 혼란이고, 혼돈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과거의 회상에 빠져서 감성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글을 뜻한다.
수필쓰기는 결국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가상세계를 그려내는 작업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나의 경험에서 만든 가상세계를 보다 넓게 확장하는 방법은 없을까. 아주 쉽다. 우리는 현대기기가 만들어 준 하이퍼링크를 이용하여 수많은 가상세계와 접속할 수 있다. 인터넷 접속으로 만나는 세계도 나의 경험이 된다. 하이퍼링크로 접속하면 눈깜작할 할 사이에 수많은 전설적, 역사적, 학문적 경험들이 내 앞에 나타난다. 이들을 이용하여 나의 수필세계를 만든다.
이것은 나의 경험을 확장하는 방법이다. 내가 ‘아주 쉽다’라고 한 말은 쉽지 않으니 노력하자는 말을 역설적으로 해 본 소리이다. 인터넷에서 만나는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 왜냐면 현대 과학기기는 학자들이 머리를 싸메고 연구한 결과물이다. 그것을 이용하려면 역시 공부해야 한다. 수필을 쓰는 작가는 노인세대가 많다. 그래서 아예 공부할 생각은 않는다. 옛날의 방식에 매몰되어서 옛날 방식대로만 글쓰기를 한다. 탈출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만큼 수필의 앞날도 암울할 수밖에 없다.
나는 문재인 정부 시절에 평범한 시민이라고 소개된 진인 조은산이라는 사람이 청와대 국민 청원 홈 페이지에 올린 ‘시무 7조 상소문’은 아주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시무 7조는 우리 시대 사람의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였던 조선시대의 역사적 사실일 뿐이다. 우리도 조은산처럼 하이퍼링크를 통하여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만날 수 있고, 조은산처럼 이들을 나의 경험 사실로 확장하여 수필 글을 쓸 수 있다. 이런 것이 사이버스페이스의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본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