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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1 주일낮설교 / 충만교회 민창근 목사
막 6:45-52 /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3
(♡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 지난주 말씀
1.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 타고 가게 하셨을까요?
2.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예수님
3. 바다 가운데 있는 제자들
4. 위기에 빠진 제자들을 보시고 찾아오시는 예수님
① 바람이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② 더군다나 심각한 것은 배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③ 밤새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희망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지만, 감사한 것은 예수님은 알고 계시고 보고 계셨습니다.
* 오늘 말씀
5. 위기가 좋은 점
예수님이 먼저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라 하신 명령을 따라 제자들은 건너가는데 바람이 거슬렸습니다.
바람이 거슬리는 것이 그날에 일어난 자연적인 현상이든, 아니면 제자들의 훈련을 위해 주님께서 조성하시거나 허락하신 것이든 제자들은 거슬리는 바람 때문에 바다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밤 사경이 될 때까지 죽자 사자 많은 시간동안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해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바람이 거스르면 출발지로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께 “도저히 못가겠으니 낼 바람이 잔잔해지면 가겠습니다.”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불고, 물결이 얼마나 세어질지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어날 때 제자들은 일어나는 물결을 보고 바로 “돌아가자!” 결정하지 않게 되고, 당연히 물결에 맞서 노를 좀 더 힘차게 저으며 가자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순간 바람이 더 거세지고 파도가 더 심하게 일어날 때 제자들은 뱃사람이기 때문에 밀려오는 파도에 계속 맞서려 하게 됩니다.
배를 탈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람이 일어나 파도가 생기고 이것이 밀려오면 뱃머리를 빨리 밀려오는 파도에 직각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동치는 물결 따라 배가 흔들리고 결국 전복되는 위기를 겪게 됩니다.
(예) 내 경험 - 독도 가는데 속초에서 배를 타고, 앞부분에 앉았는데, 파도가 치는 바다를 나갔는데, 10여분 동안 파도에 앞부분이 최소 10미터, 느낌으로는 2-30미터를 날았다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데, 무시무시했습니다.
흰 파도가 보이니까 선장이 전복의 위험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돌아와 포항으로 가서 큰배로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예) 내 경험 - 대학생 때 MT를 갔다가 저 혼자 더 있다가려고 남았고, 시내를 다녀온 후에 소양강 댐에서 마지막 배를 놓친 상태에서 주인아저씨에게 적은 돈으로 간신히 부탁을 하여, 나무배를 빌려 타고 혼자 저녁에 안쪽의 청평사 섬으로 건너가게 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배를 저어 호수 중간 정도 왔을 때 멀리 옆으로 그날의 마지막 큰 유람선이 청평사로 들어갔다가 돌아 나오고 있었고, 유람선에 의해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파도 높이가 30cm 정도였는데, 나무배의 높이는 약 60cm 정도로 판단되어 저는 그 정도의 파도는 그냥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를 혼자 보내고 염려가 된 주인아저씨가 모터보트를 타고 달려오면서 막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배를 파도에 수직으로 만들어!!”
처음엔 뭔 말인지 모르다가 곧 알아듣고 배를 옆으로 돌리려 하는데 배에 이미 첫 번째 파도가 와서 먼저 부딪쳤습니다.
30cm 높이의 파도가 오면 그것의 높이가 30cm이고 거기서 떨어지는 높이는 30cm가 아니라 60cm가 됩니다. 출렁이기에 위험한 것입니다. 그걸 몰랐죠.
그렇기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는데 작은 나무배는 물결이 배 안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두 번째 파도를 맞으면 더 큰 작용으로 연결되면서 배가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다행히 첫 번째 파도를 만나고 빨리 배를 옆으로 돌려 파도와 직각으로 맞서니 두 번째 파도부터는 흔들림에 맞설 수 있었고, 파도가 지난 후에 결국은 모터보트에 끌려 건너갔습니다.
-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물결을 먼저 만났을 때 제자들은 처음에 당연히 맞서려고 했을테고,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과 물결이 계속되면서 배를 다시 돌려올 수 없을 만큼 여유가 없고, 위기 속에서 계속 힘을 소진하면서 전복의 위험과 맞서 싸우는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먼저 건너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를 수도 없고, 다시 돌아올 수도 없는 막막한 그 시간 속에 던져져 그저 바람과 물결이 잦아지길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심각한 위기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는 예수님이 가지신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을 리얼하게 볼 수 있는 점에서 똑같이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한 것과 이것을 거절하는 예수님 사이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제자들의 반응과 행동이 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배를 타고 먼저 건너가라 해서 배를 타고 가긴 하지만 배 위에서 난상토론을 벌이며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나누게 될 때 제자들은 서로 분명 많은 시각차를 드러냈을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혁명적인 메시아, 칼을 들고 승리하는 그리스도, 정치적인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제자도 있고, 하나님의 대언자인 모세나 사무엘 같은 예언자 같은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제자도 있고, 목자 같이 부드러우면서 희생적인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제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외의 생각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출신 배경이 다르고, 과거에 속했던 집단이 다르고, 학문의 수준이 다르고, 종교적인 열정과 충성심이 다르고, 예수님을 따르는 마음과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다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로 생각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제자들 속에 숨겨진 다양한 생각의 차이로 심하면 거친 말로 충돌 직전까지 가는 난상토론의 순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 안에 감춰진 서로 다른 생각과 우열 경쟁이 거칠어질 때 바람의 위기가 발생하고 물결과 함께 제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 그런데 위기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서로의 입장과 생각이 달라 갈등하는 집단이 위기 속으로 들어가면 오직 하나만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힘을 합쳐 이 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입니다.
뱃사람 출신이었던 제자들의 경험조차도 무용지물이 되는 심각한 위기는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서로의 입장과 생각, 갈등, 기대하던 욕망 등도 모두 내려놓게 합니다.
(예) 두 마리의 개가 서로 심히 경쟁하며 싸웁니다. 온갖 방법을 써도 주인은 해결을 못합니다. 해결 방법이 무엇일까요? 비법을 가진 이가 옵니다. (도그 위스퍼러 시저, 이웅종 소장이나 수의사님들)
외딴 곳에 같이 묶어놓고 주인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멋쩍어 하는데, 함께 느끼는 위기감이 있습니다.
(때론 감옥에 유리로 가운데를 막아놓은 곳에 놓고 주인은 사라짐)
뭐지? 주인은 어디로 가셨지? 그리고 서로 싸워야하는데, 새로운 장소에서 느끼는 위기감이 생기니까 싸우기가 멋쩍어집니다.
더군다나 조금 있으니까 무서운 것(예, 무서운 호랑이, 곰의 탈을 쓴 사람 등)이 나타나면 공포가 찾아오고 살려고 함께 소리치고, 가지고 있던 서로에 대한 경쟁과 갈등을 잊어버리고, 공동의 적과 싸우며 이겨내야 한다는 것 때문에 화해가 이뤄지게 됩니다.
(영화에서도 형사와 적이 전략적 화해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 저는 최근에 6.25가 우리 민족에게 준 좋은 점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역사적으로 노비(종)이 있어 왔습니다.
① 많은 전쟁으로 인한 전쟁포로들이 종이 되고, ② 종이 애를 낳은 세습적인 종이 생겨지고, ③ 범죄로 인해 종이 생겨지고, ④ 부채(빚)를 갚지 못해 종이 생겨지고, ⑤ 가난 때문에 자녀를 팔아 종이 생겨지고(自賣, 자매), ⑥ 스스로 종이 되고(投託, 투탁), ⑦ 가난 때문에 자녀를 대가 집 앞에 버리는 유기아 등으로 인해 종이 생겨났습니다.
문제는 이런 종과 양반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양극체제가 계속 되고, 조선시대에는 약 500만 명의 종으로 인구의 60%까지 종이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말기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일어났습니다. 1894(고종 31)년 7월부터 1896(고종 33)년 2월 사이에 개화파 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 개혁 운동을 이르던 말입니다.
이 갑오개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며 잘못된 정치를 바꾸라는 요구가 일어났는데,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의 화해가 일어났는데, 민씨 정권에서 6월 초에 청나라에 군대를 파병해달라 요구하자, 일본도 군대를 들여오고,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세웁니다. 그러면서 3차례에 걸쳐 개혁들이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갑오개혁으로 신분을 철폐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일본은 우리나라를 장악하고 우리의 신분제도를 무시하고, 신작로를 닦는데 양반 자제들도 동원하면서 양반과 상놈이 똑같이 취급되기 시작되었고, 그럼에도 바뀌지 않던 신분 문제가 6.25를 지나며 양반이나 상놈이 함께 가난해지며 똑같아지고 결국 없어졌습니다.
- 바람과 물결의 위기 앞에 이제 다양한 배경과 생각을 가진 제자들은 오직 하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위기에서 누가 우리를 건져줄 것인가?
우리의 경험, 우리의 지식과 지혜, 우리의 가진 것들, 우리의 열정과 충성,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이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는데, 우리를 구해줄 분은 누구인가?
재산, 젊음, 능력, 학식, 지혜....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도 이기지 못하는 죽음의 힘이 판을 치고 있고, 사망의 위기가 턱에 차오를 때, 힘은 다 빠지고 끝이 다가오는 그 절망의 순간에 우리를 구해줄 분은 누구인가?
6. 큰 믿음을 보여라! 큰 믿음을 가져라!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 중에 아무도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으로 말씀을 가르치시며, 모든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구해주세요.
예수님, 이 위기에서 살려주세요,
예수님, 너무 무서워요, 힘이 다 빠졌어요,
어둠의 공포와 바람과 물결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우리를 구해주세요.”
아무도 외쳐보지 못했습니다!!
답답하게도 아무도 주님을 찾지 않을 때 주님이 그 곁을 지나가시려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부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유령으로 보였습니다. 사람이 물위를 걸어서 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령이다!”라고 소리 지르지 말고, “예수님이다!, 주님이시다!” 하였다면 더 좋았을텐데....
그들의 마음과 눈에는 예수님을 감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안심하거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런데 마태복음 14:28에 보면, 생각지 않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순간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람과 물결이 그대로인데,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것이 마가복음에서 빠진 이유는 저자인 마가 요한이 베드로를 수행하면서 그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이유에서였을 수도 있었고, 베드로가 자기의 자랑 문제가 아니기에 그것을 적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물 위를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이라면 능히 지난번에(6:7-13)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을 가지게 하여 똑같이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시던 것과 같이 이 순간에도 나를 물위로 걷게 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순간 생겨진 것입니다.
- 주님은 이 순간, “나는 걷지만 너를 걷게 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하지 않았습니다. “오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나는 이 험한 물과 바람을 이기고 밤바다를 걸을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너도 걷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나의 말을 믿음으로 이 공포와 위기와 절망을 능히 극복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이 공포와 위기와 절망이 너를 새롭게 세우고, 너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 “오라.”
“어둠과 바람과 물결을 이기고 믿음으로 걸어보라!”
“공포와 위기와 절망을 디디고 믿음으로 일어서라!”
come on!! 너도 믿으면 능히 할 수 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렸습니다. 오~ 놀라운 첫발자국을 떼고 주님께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갔습니다.
이것이 베드로 자신의 믿음이고, 제자들의 믿음이고,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본문 6:52절 다 같이 읽어보십시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이미 오병이어 사건을 통하여 주의 권위와 권능이 다시 충분히 보여졌습니다.
하지만 ① 공포와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주님의 이름 한번 부르지 못했습니다.
② 다가오는 주님을 유령이라고 잘못 판단하였습니다.
③ 물 위로 너도 걸어보라는 믿음의 행동 요구를 받았음에도 다시 다른 것을 보면서 공포보다 크신 주님, 위기보다 크신 주님, 절망보다 크신 주님, 물위를 걷게 하시는 주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 ① 우리는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을 알고 깨닫고 있지만 공포와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② 우리는 제자들처럼 우리를 구하시러 오시는 주님을 꿈에도 생각 못하고 유령이라고 상황을 잘못 판단합니다.
③ 우리는 베드로처럼 잠깐 믿음을 보이다가도 아직 멈추지 않은 공포와 위기와 절망 앞에 무너지고 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④ 우리는 베드로처럼 잠깐 일어서다가 깊이 무너지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⑤ 우리는 베드로처럼 무서워 빠져가는 의심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도 그 순간에 다시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 ① 큰 믿음을 가지고 주께서 나의 상황과 공포와 위기와 절망을 아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②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③ 큰 믿음을 가지고 주께서 찾아오심을 믿어야 합니다.
④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처럼 공포와 위기와 절망을 이길 수 있으며, 그 주님을 따라서 우리도 이길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⑤ 큰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⑥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요란과 난리와 전쟁과 각종 시험 앞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⑦ 큰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보고 큰 믿음을 가지고 걸어봐야 합니다. 큰 믿음으로 해낼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 큰 믿음을 보이고, 갖게 되길 바랍니다.
주여,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
찬송가 373장 고요한 바다로 3/4 박자
3. 내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하-소서
4. 이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때 큰 믿음- 주-소서
첫댓글 2015년 3월 1일부터 마가복음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번 설교가 75번째 설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