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거지수(函車之獸)
수레를 삼켜버릴 정도로 큰 짐승이라는 뜻으로, 이런 큰 짐승도 홀로 산을 떠나게 되면 자신의 안위가 위태롭다는 의미로 인위적인 일이나 작은 이익을 추구하지 말라는 말이다.
函 : 함 함(凵/6)
車 : 수레 거(車/0)
之 : 갈 지(丿/3)
獸 : 짐승 수(犬/15)
출전 : 장자(莊子) 경상초편(庚桑楚篇)
노자(老子)의 제자 인 경상초(庚桑楚)가 북방의 외루산 근처에 살았는데, 그가 산 지 삼년이 되자 그 지방이 매우 풍성하게 되었다. 이에 그 지방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 하며 신처럼 높여 왕으로 모시려 하자 그가 언짢어 하자 그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 이야기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제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 조그만한 개울에서는 큰 고기는 그 몸도 놀릴 수 없지만 작은 고기들은 제 마음대로 뛰놀고 있으며, 나직한 언덕에서는, 큰 짐승은 그 몸을 숨길 수 없지만 작은 여우들은 거기에서 요괴를 부리는 것입니다.
弟子曰: 不然. 夫尋常之溝, 巨魚无所還其體, 而鯢鰌為之制; 步仞之丘陵, 巨獸无所隱其軀, 而㜸狐為之祥.
또 어진 이를 높이고 능한 이에게 지위를 주어서 사회의 선과 이익을 먼저 하는 것은 옛날 요순(堯舜) 임금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루의 백성들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은 저들의 청을 들어주소서.'
且夫尊賢授能, 先善與利, 自古堯舜以然, 而況畏壘之民乎. 夫子亦聽矣.
경상초가 말했다. '너희들은 가까이 오라. 수레를 먹을 만한 짐승도 혼자서 산을 떠나면 그물에 걸릴 근심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배를 먹을 만한 큰 고기도 뛰어서 물 밖에 나오면 개미들까지도 그 고기를 괴롭힐 수 있을 것이다.
庚桑子曰: 小子來. 夫函車之獸, 介而離山, 則不免於罔罟之患; 吞舟之魚, 碭而失水, 則蟻能苦之.
그러므로 새나 짐승은 높은 산을 싫어하지 않고, 고기들은 깊은 물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故鳥獸不厭高, 魚鼈不厭深.
대개 그 몸이나 목숨을 온전히 하는 사람은 그 몸을 간직하기를 깊고 먼 곳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하거늘 저 두 사람(요순)이야 무엇으로 칭찬할 만하다 하겠는가?
夫全其形生之人, 藏其身也, 不厭深眇而已矣. 且夫二子者, 又何足以稱揚哉.
(...)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게 되면 백성들이 다투게 되고, 지혜로운 사람에게 벼슬을 주면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게 된다. 이런 몇 가지 일로는 백성에게 인정을 두텁게 해 줄 수 없는 것이다.
是其於辯也, 將妄鑿垣牆而殖蓬蒿也, 簡髮而櫛, 數米而炊, 竊竊乎又何足以濟世哉. 舉賢則民相軋, 任知則民相盜. 之數物者, 不足以厚民.
그런 방법들은 백성들에게 열심히 이익을 추구하여, 자식 중에서 애비를 죽이는 자가 생겨나고, 신하 중에서는 군주를 죽이는 자가 생겨 날 것이며, 대낮에 도둑질을 하고, 한낮에 남의 담을 뚫고 들어가는 일이 생길 것이다.
民之於利甚勤, 子有殺父, 臣有殺君, 正晝為盜, 日中穴阫.
큰 혼란의 근본은 틀림없이 저 요순 시대에서 생긴 것으로서, 그 끝은 천년 뒤에까지 미칠 것이다. 그래서 천년 뒤에는 반드시 사람이 사람을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이다.'
吾語女, 大亂之本, 必生於堯舜之間, 其末存乎千世之後. 千世之後, 其必有人與人相食者也.
(莊子/庚桑楚 第23)
곧 대도(大道; 無爲自然)는 생을 보호하고 몸을 숨기는 근본이 된다. 밖으로 인물이나 이해에 끌리지 않고, 안으로 생사. 출입의 소유가 되지 않는 이른바 무위를 본지로 삼는다는 뜻이다.
함거지수(函車之獸)
수레를 삼켜버릴 정도로 큰 짐승이라도 홀로 산을 떠나게 되면 그물에 걸리는 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장자(莊子)에 노자(老子)의 제자 경상초(庚桑楚)가 이르기를, "무릇 수레를 삼켜버릴 정도로 큰 짐승이라도 홀로 산을 떠나게 되면 그물에 걸리는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되고(夫函車之獸 介而離山 則不免於罔罟之患), 배를 삼킬 만큼 큰 물고기도 휩쓸려 물을 잃으면 개미도 괴롭힐 수 있다(呑舟之魚 碭而失水 則蟻能苦之)고 하면서, 그 때문에 새나 짐승은 높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물고기나 자라가 깊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타고난 모습을 온전하게 지키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감출 때 깊고 어두운 것을, 싫어하지 않을 따름이다(故 鳥獸不厭高 魚鼈 不厭深, 夫全其形生之人 藏其身也 不厭深眇而已矣)" 라고 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옳은 말이 아닌가. 커다란 짐승도 물고기도 자신을 지켜내지 못할 곳에 이르면, 온갖 수모와 고통과 타격을 입을 것은 분명한 것이었다. 천하대의(天下大義)를 생각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잡스런 사람들과 어울린다면 그것은 어떠하겠는가? 잡스런 놈들의 무덤에 묻혀서 자신의 올곧은 의지 한 조각 올곧게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매장(埋葬) 당하고 마는 것 아니겠는가.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한신(韓信)이 마을의 깡패를 만났다. 깡패는 한신을 조롱하며 가랑이 사이를 끼어가도록 했다. 한신은 기꺼이 두 무릎을 꿇고 가랑이 사이를 엎드려 기어서 끼어갔다. 한신은 천하대장군의 기백(氣魄)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찮은 마을 깡패의 가랑이를 끼어가는 수모를 받아들이고 견딜 줄 알았던 것이었다.
큰 꿈을 꾸는 사람이여. 절대로 하찮은 인종을 만나지도 말고, 절대로 그 말을 귀담아 듣지 마라. 그것이 바로 자신을 올곧게 보존할 일이다. 그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었다.
경상초(庚桑楚)라는 사람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 편에 보면, 노담(老聃)의 제자인 '경상초'가 나옵니다. 그는 노담의 도(道)를 상당히 터득하고는 외루산(畏壘山) 외진 곳으로 들어가서 숨어 삽니다. 그의 하인 가운데 지혜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를 떠나게 하고, 그의 첩들 가운데 잘난 척하며 인(仁)을 드러내는 여자들은 그를 멀리하게 하고는, 못난 사람들하고만 함께 살고, 멍청한 사람들만 일꾼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삼 년을 지냈는데, 외루산 지역에 크게 풍년이 들자, 외루산 지역 사람들이 서로 모여 얘기했습니다. "경상초가 처음 왔을 때, 우리는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놀랐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한 일을 하루하루 헤아려보면 별것 아닌데, 일 년을 두고 따져보니 정말 큰일을 해 놓았다. 아마도 그는 성인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를 우리 마을의 지도자로 모시자."
경상초는 외루산에 숨어 살면서 꾀가 있고 머리가 좋은 하인들은 떠나보내고, 총명하고 어진(仁) 척하는 여자들은 멀리하면서, 못나고 바보 같은 사람들하고만 함께 지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는데, 그가 외루산에 거주한 지 삼 년 만에 엄청난 풍년이 들자, 그제야 사람들은 경상초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자신들의 지도자로 모시자는 겁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훌륭한 사람을 지도자로 모시는 일만큼 중요하고 좋은 건 없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경상초는 기뻐하기는커녕 근심하고 걱정하는 겁니다. 제자들은 도대체 왜 그러시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경상초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듣기로 지인(至人)은 작은 방안에서 죽은 듯이 살고, 백성들은 미쳐 날뛰면서 자기들이 갈 곳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외루산 사람들이 나 몰래 나를 현명한 사람들 사이에 올려놓고 떠받들려 하는데, 내가 그렇게 표적이 되는 사람이란 말이냐? 그래서 나는 노담 말씀에 비추어 기쁘지 않다."
사람들이 자신을 지도자로 떠받드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떠받든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들의 평가 대상이 되었다는 말 아닙니까? 사람들의 평가 대상이 된다는 건 저들 마음대로 내팽개칠 수도 있다는 말이고요. 그런 일이야말로 노자 가르침을 어기는 꼴이어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겁니다.
상당히 멋진 말이지요? 모두가 떠받들어지기를 바라는데 싫다고 하는 게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도대체 노자가 무슨 말을 했기에 경상초는 이렇게 멋진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혹시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 아닐까요?
발돋움하면 오래 설 수가 없고, 가랑이를 벌리고 걸으면 오래 갈 수가 없다.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은 존중받지 못하고, 자기가 옳다 하는 사람은 빛을 보지 못한다. 자기 공(功)을 뽐내는 사람은 공적이 없어지고,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런 짓을 도(道)에서는 찌꺼기 음식이고 군더더기 행위라 한다. 그런 짓은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를 터득한 사람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는 겁니다. 남들보다 앞서려고 자신을 드러내는 건 쓸데없는 짓이니까요. 남들보다 잘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똑똑함을 드러내는 자견(自見)과 자신의 옳음을 내세우는 자시(自是),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는 자벌(自伐),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자긍(自矜)은 모두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겁니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이루었다
옛날 중국 요(堯)임금 시절에 활을 잘 쏘는 예(羿)라는 사람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하늘에 열 개의 태양이 생겨서 대지가 타들어가자 그는 요임금의 명령으로 활을 쏘아 아홉 개의 태양을 땅에 떨어뜨렸다 한다. 대단한 실력을 갖춘 명궁(名弓)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자랑 또한 심하여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서툴렀기 때문에 결국 미움을 받아 살해 당하게 된다.
장자(莊子)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인간사회에 경쟁은 필수다. 타인의 칭찬과 인정은 분명 질투(嫉妬)로 바뀐다. 예(羿)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허영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관심은 언제나 타자의 칭찬과 인정이었다. 이에 대해 장자는 경상초(庚桑楚) 벌레 이야기에서 작은 벌레로 살아야 된다고 말한다.
벌레는 어떤가. 먹이를 찾아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가지만 너무나 작아 타인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타인의 칭찬과 인정에는 관심도 없다. 그러므로 벌레는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예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人)의 세계를 산다면 벌레는 자신의 욕망에 따르는 천(天)의 세계를 사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해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자유인(自由人)이다. 그러면서도 찬양의 표적이나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
방법은 작은 벌레처럼 사는 것이다. 칭찬을 받던, 비난을 받던 아무런 관심이 없다. 칭찬을 받아도 기뻐하지 않고 비난을 받아도 슬프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자연의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이다. 어차피 칭찬과 비난은 다른 사람의 평가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내 삶의 최종 평가는 자신이 하는 것이다. 장자의 결론은 인의 세계를 벗어나 천의 세계를 살면서 벌레처럼 드러나지 않게 사는 것이다. 찬양을 못하게 하는 노자(老子)의 제자 경상초 선비 이야기도 있다.
경상초가 외루산에 자리 잡은지 3년이 지날 때 마을에 큰 풍년이 들었다. 여태 별 일 없었는데 경상초가 외루산에 온 이후로 자신들이 잘 살게 되었다고 근처 사람들은 모두 경상초 덕택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경상초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우고 존경했다.
이런 사실을 안 경상초는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스승이 존경받아서 기분이 좋았던 제자들은 스승이 떨떠럼한 표정을 짓자 이유를 묻는다. 그러자 경상초가 제자들에게 이야기 한다. "내가 보기에 너희들이 참으로 이상하구나. 내가 도대체 무얼 했다는 말이냐. 봄이면 싹이 트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자연이 이룬 일이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을 두고 누구 때문이라고 공을 내세우다니 말이 안 된다. 나는 내가 이루지도 않은 공을 이루었다면서 칭송을 받으니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나를 내세우는 사람이 되었고, 이는 스승인 노자(老子)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이 미움을 받는줄 모르고 자신의 공을 내세우기 바쁘다. 명궁(名弓)인 예(羿)라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다 미움을 받아 죽게 되고 경상초는 칭찬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타인의 미움을 받지 않게 되고 오히려 존경이 더 높아졌다.
莊子 雜篇 第23篇 庚桑楚
이 편의 대지는 경상초(庚桑楚)와 그의 제자 남영주(南榮趎), 그리고 남영주(南榮趎)와 경상초(庚桑楚)의 스승 노담(老聃)과의 문답을 통해 생명을 지키는 도리(衛生之經)를 이야기하고 있는 제1장에 있다 할 것이다.
나머지 12개 장은 제1장의 취지를 구체화한 내용이다. 다만 후반부에서 송견(宋銒), 윤문(尹文) 일파의 저작이나 신도(愼到)의 사상과 유사한 부분이 보이고 있는 점은 천도(天道) 편이나 각의(刻意) 편과 유사한데, 이는 이 편의 성립이 상당히 뒤늦은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第1章 생명을 지키는 도리
01. 지극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老聃之役, 有庚桑楚者, 偏得老聃之道, 以北居畏壘之山.
노담(老聃)의 제자 중에 경상초(庚桑楚)라는 이가 있었는데, 노담의 도를 일부 얻어서 북쪽으로 가서 외루산(畏壘山)에서 살고 있었다.
其臣之畫然知者去之, 其妾之挈然仁者遠之, 擁腫之與居, 鞅掌之為使. 居三年, 畏壘大壤.
그 신하 중에서 분명한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는 자를 내보내고, 첩 중에서 인자하게 이끌어 주는 것을 어진 것으로 여기는 자를 멀리하고, 우둔한 이와 함께 하고 용모를 꾸미지 않는 이를 부려서, 삼 년 동안 머물러 외루(畏壘)가 크게 번성하였다.
畏壘之民相與言曰: 庚桑子之始來, 吾洒然異之. 今吾日計之而不足, 歲計之而有餘. 庶幾其聖人乎. 子胡不相與尸而祝之, 社而稷之乎.
외루의 백성들이 서로 이렇게 말했다. '경상자(庚桑子)가 처음 왔을 때에 우리가 놀랍도록 기이하다 여겼더니만, 지금 하루하루 헤아려 보면 부족하고 일 년 동안 헤아려 보면 넉넉하니, 아마도 성인인가 보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함께 그를 시축(尸祝)으로 받들고 사직(社稷)을 세워 모시지 않는가?'
庚桑子聞之, 南面而不釋然.
경상자(庚桑子)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남쪽을 바라보며 기뻐하지 않았다.
弟子異之, 庚桑子曰: 弟子何異於予. 夫春氣發而百草生, 正得秋而萬寶成. 夫春與秋, 豈無得而然哉. 天道已行矣. 吾聞至人尸居環堵之室, 而百姓猖狂不知所如往. 今以畏壘之細民而竊竊欲俎豆予于賢人之閒, 我其杓之人邪. 吾是以不釋於老聃之言.
제자가 이상하게 여기자 경상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는 무엇 때문에 나를 기이하게 여기는가? 무릇 봄기운이 움직이면 백 가지 초목이 자라나며, 가을이 되면 만 가지 보배가 이루어진다. 저 봄과 가을이 어찌 아무 것도 얻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천도(天道)가 이미 운행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들으니 '지인(至人)은 담으로 빙 둘러쳐진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백성들은 마음대로 행동하여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자유롭다'고 했다. 지금 외루(畏壘)에 사는 어린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논의하면서, 나를 현인 사이에 두고 제사 지내고자 하게 했으니, 나는 남의 본보기가 되려는 사람인가? 내 이 때문에 노담(老聃)의 말에 비추어 보아 기뻐하지 않는 것이다.'
02. 인위적인 일이나 작은 이익을 추구하지 말라
弟子曰: 不然. 夫尋常之溝, 巨魚無所還其體, 而鯢鰌為之制; 步仞之丘陵, 巨獸無所隱其軀, 而㜸狐為之祥. 且夫尊賢授能, 先善與利, 自古堯舜以然, 而況畏壘之民乎. 夫子亦聽矣.
경상초의 제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작은 도랑에는 큰 물고기가 몸뚱이를 돌릴 곳이 없지만, 미꾸라지 따위의 작은 물고기는 몸을 돌리기에 적당하다 여기고, 몇 걸음에 오를 수 있는 작은 언덕에는 큰 짐승이 몸뚱이를 숨길 곳이 없는데, 작은 여우는 그것을 좋게 여깁니다. 하물며 어진 사람을 높이고 능력 있는 자에게 일을 시키며, 훌륭한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옛날 요순(堯舜)시절부터 그렇게 해 온 것인데, 하물며 외루(畏壘)의 백성들이야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선생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십시오!'
庚桑子曰: 小子來. 夫��️函車之獸, 介而離山, 則不免於罔罟之患. 吞舟之魚, 碭而失水, 則蟻能苦之.
경상자(庚桑子)가 말했다. '어린 제자야 이리 오너라! 무릇 수레를 삼켜버릴 정도로 큰 짐승이라도 홀로 산을 떠나게 되면, 그물에 걸리는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배를 삼킬 만한 큰 물고기라도 퉁겨나가 물을 잃어버리게 되면, 땅강아지나 개미 따위가 괴롭힐 수 있게 된다.
故鳥獸不厭高, 魚鱉不厭深. 夫全其形生之人, 藏其身也, 不厭深眇而已矣.
그 때문에 새나 짐승은 높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물고기나 자라가 깊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타고난 모습을 온전하게 지키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감출 때, 깊고 어두운 것을 싫어하지 않을 따름이다.
且夫二子者, 又何足以稱揚哉.
뿐만 아니라 저 요순 같은 두 사람이야 어찌 칭찬하기에 족하겠는가!
是其於辯也, 將妄鑿垣牆而殖蓬蒿也.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으로써 장차 함부로 담장을 파고 쑥대를 무성하게 할 것이다.
簡髮而櫛, 數米而炊, 竊竊乎又何足以濟世哉.
머리카락을 가려서 빗질하며 쌀알을 헤아리면서 밥을 지을 것이니, 그렇게 비교하고 따지면서 또 어찌 세상을 다스리기에 충분하겠는가!
舉賢則民相軋, 任知則民相盜. 之數物者, 不足以厚民.
어진 사람을 등용하면 백성들이 서로 다투고, 지혜로운 이에게 맡기면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할 것이니, 이 몇 가지 일은 백성들을 풍요롭게 하기에 부족하다.
民之於利甚勤, 子有殺父, 臣有殺君, 正晝為盜, 日中穴杯.
백성들은 이익이라면 심하게 추구하여 자식으로 어버이를 죽이는 이가 있고,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이가 있으며 한낮에 도둑질을 하며,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담에 구멍을 뚫을 것이다.
吾語女. 大亂之本, 必生於堯舜之間, 其末存乎千世之後. 千世之後, 其必有人與人相食者也.
내 너에게 일러 주겠다. 큰 어지러움의 근본은, 반드시 요순(堯舜)의 시대에 생겨서 그 말폐(末弊)가 천 년 뒤에도 남아 있게 될 것이니 천 년이 지난 뒤에는 반드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있을 것이다.'
03. 마음을 번거롭게 쓰지 말아라
南榮趎蹴然正坐曰: 若趎之年者已長矣, 將惡乎託業以及此言邪.
경상초의 제자 남영주(南榮趎)가 깜짝 놀라 자리를 바로 하고 이렇게 말했다. '저 만큼 나이를 먹은 자는 이미 성장했으니,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만 말씀하신 것처럼 될 수 있을까요?'
庚桑子曰: 全汝形, 抱汝生, 無使汝思慮營營. 若此三年, 則可以及此言矣.
경상자(庚桑子)가 말했다. '너의 몸을 온전히 지키고 너의 삶을 끌어 안아서, 너의 생각이 움직이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이 하기를 삼 년 동안 하면 내가 말한 것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南榮趎曰: 目之與形, 吾不知其異也, 而盲者不能自見.
남영주(南榮趎)가 말했다. '눈의 모양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저는 알지 못하겠는데, 장님은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耳之與形, 吾不知其異也, 而聾者不能自聞.
귀의 형체가 다른 사람과 다른 줄 저는 모르겠는데, 귀머거리는 스스로 듣지 못합니다.
心之與形, 吾不知其異也, 而狂者不能自得.
마음의 모양이 다른 사람과 다른 줄 저는 알지 못하겠는데, 미친 자는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形之與形亦辟矣, 而物或閒之邪, 欲相求而不能相得.
형체가 다른 형체와 또한 같을 뿐인데 사물이 간혹 끼어들면, 서로 구하더라도 얻지 못하지 않습니까?
今謂趎曰, 全汝形, 抱汝生, 勿使汝思慮營營. 趎勉聞道達耳矣.
지금 저에게 이르시길, '너의 몸을 온전히 지키고 너의 삶을 끌어 안아서, 너의 생각이 움직이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하시니, 제가 힘써 도를 들어도 귀에만 도달할 뿐입니다.'
庚桑子曰: 辭盡矣. 曰, 奔蜂不能化藿蠋, 越雞不能伏鵠卵, 魯雞固能矣.
경상자가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 전했다. '재빨리 날아다니는 작은 벌은 커다란 콩 벌레를 부화시키지 못하고
작은 닭은 큰 고니의 알을 품지 못하지만,
큰 닭은 본디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雞之與雞, 其德非不同也, 有能有不能者, 其才固有巨小也.
닭이란 점에서 비교하자면 그 덕이 같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닭은 할 수 있고 어떤 닭은 할 수 없는 것은, 그 재능에 본디 대소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今吾才小, 不足以化子, 子胡不南見老子.
지금 나는 재능이 작은지라 그대를 교화시킬 수 없으니, 그대는 어찌하여 남쪽으로 가서 노자를 만나 뵙지 않는가?'
04. 지혜나 어짊과 의로움은 자신을 괴롭힌다
(知/不知, 仁/不仁, 義/不義)
南榮趎贏糧, 七日七夜至老子之所.
남영주(南榮趎)가 양식을 짊어지고 일곱 날 일곱 밤을 걸어 노자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老子曰: 子自楚之所來乎.
노자(老子)가 말했다. '그대는 경상초(庚桑楚)가 있는 곳에서 왔는가?'
南榮趎曰: 唯.
남영주가 말했다. '예!'
老子曰: 子何與人偕來之眾也.
노자가 말했다. '그대는 어찌 여러 사람과 함께 왔는가?'
南榮趎懼然顧其後.
남영주(南榮趎)는 두려워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老子曰: 子不知吾所謂乎.
노자(老子)가 말했다. '그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구먼.'
南榮趎俯而慚, 仰而歎曰: 今者吾忘吾答, 因失吾問.
남영주(南榮趎)는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 하다가 우러러 탄식하면서 말했다. '저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잊어버려서 다시 뭐라고 물어야 할지도 잃어 버렸습니다.'
老子曰: 何謂也.
노자(老子)가 말했다. '무슨 말인가?'
南榮趎曰: 不知乎. 人謂我朱愚. 知乎. 反愁我軀. 不仁則害人, 仁則反愁我身. 不義則傷彼, 義則反愁我已. 我安逃此而可. 此三言者, 趎之所患也, 願因楚而問之.
남영주가 말했다. '제가 지혜롭지 못하면 사람들은 제가 어리석다고 할 것이고, 지혜로우면 도리어 제 몸을 괴롭힐 것입니다. 어질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해칠 것이고 어질면 도리어 제 몸을 괴롭힐 것이며, 의롭지 못하면 저들을 해칠 것이고 의로우면 도리어 제 자신을 괴롭힐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이런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세 가지 이야기가 제가 걱정하는 것이니, 그 때문에 경상초(庚桑楚)를 통해 선생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老子曰: 向吾見若眉睫之間, 吾因以得汝矣, 今汝又言而信之. 若規規然若喪父母, 揭竿而求諸海也. 女亡人哉. 惘惘乎汝欲反汝情性而無由入, 可憐哉.
노자가 말했다. '아까 나는 그대의 두 눈썹 사이를 보고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보았는데, 지금 다시 그대가 하는 말을 듣고 보니 그것을 확신할 수 있겠다. 자네는 허둥지둥 정신없는 모습이 마치 부모를 여읜 듯하고, 장대를 들고 바다의 깊이를 재려는 듯하니, 그대는 본성을 잃어버린 사람이로다. 멍하니 그대의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나 어떻게 할지를 모르고 있으니 가련한 일이로군!'
05. 자아를 버리고 어린 아이처럼 되어라
南榮趎請入就舍, 召其所好, 去其所惡, 十日自愁, 復見老子.
남영주(南榮趎)는 간청하여 학사에 들어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밝히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버려서 열흘 동안 혼자서 근심하다가 다시 노자를 뵈었다.
老子曰: 汝自洒濯, 熟哉鬱鬱乎. 然而其中津津乎猶有惡也.
노자가 말했다. '자네는 스스로 깨끗이 씻어내서 무엇인가 빛나는 듯하구나! 마음에서 스며 나오는 것은 아직도 나쁜 것이 남아 있다.
夫外韄者不可繁而捉, 將內揵.
무릇 바깥의 사물에 얽매인 자는 마음이 번거로워 붙잡을 수가 없는지라.
內韄者不可繆而捉, 將外揵.
안에서 닫아걸 것이고, 안에서 닫아걸게 되면 이리저리 얽혀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는지라. 밖에서 잠그게 될 것이다.
外內韄者, 道德不能持, 而況放道而行者乎.
안팎에서 잠그게 되면 도덕을 지닌 사람도 지킬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도덕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어찌 하겠는가!'
南榮趎曰: 里人有病, 里人問之, 病者能言其病, 然其病病者猶未病也.
남영주가 말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이 병들었을 때 동네 사람이 병의 차도를 물었는데, 병든 사람이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병을 병으로 여기는 그 사람은 아직 병든 것이 아닙니다.
若趎之聞大道, 譬猶飲藥以加病也, 趎願聞衛生之經而已矣.
그런데 제가 선생님에게 대도(大道)에 관해 들은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약을 먹고 병이 더 심해진 것과 같습니다. 저는 생명을 보위(保衛)하는 법칙을 듣고 싶을 따름입니다.'
老子曰: 衛生之經, 能抱一乎. 能勿失乎.
노자가 말했다. '생명을 보위하는 법칙이란, 하나를 끌어 안을 수 있는가?
또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能無卜筮而知吉凶乎. 能止乎. 能已乎.
점을 쳐보지도 아니하고 길흉을 알 수 있는가? 멈출 줄 아는가? 그만둘 줄 아는가?
能舍諸人而求諸己乎. 能翛然乎. 能侗然乎. 能兒子乎.
다른 사람은 놔두고 자기에게서 찾을 줄 아는가? 홀가분하게 떠나갈 줄 아는가? 멍한 모습으로 찾아올 줄 아는가? 어린아이처럼 행동할 줄 아는가?를 말함이다.
兒子終日嗥而嗌不嗄, 和之至也.
어린아이가 종일토록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가 지극하기 때문이다.
終日握而手不掜, 共其德也.
終日視而目不瞚, 偏不在外也.
종일토록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저리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본성과 합치되기 때문이고, 종일토록 눈을 뜨고 보아도 깜빡이지 않는 것은 집착하는 대상이 밖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行不知所之, 居不知所為, 與物委蛇, 而同其波. 是衛生之經已.
길을 떠나도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머물러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며, 다른 사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물결치는 대로 함께 흘러가는 것이, 생명을 보위하는 법칙이다.'
南榮趎曰: 然則是至人之德已乎.
남영주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지인(至人)의 덕이라는 말씀입니까?'
曰: 非也. 是乃所謂冰解凍釋者能乎. 夫至人者, 相與交食乎地而交樂乎天, 不以人物利害相攖, 不相與為怪, 不相與為謀, 不相與為事, 翛然而往, 侗然而來. 是謂衛生之經已.
노자가 말했다. '아니다. 이것을 바로 얼음을 녹이고 언 것을 풀 줄 아는 자는 할 수 있겠느냐? 무릇 지인(至人)은 사람들과 함께 땅에서 나는 것을 먹기를 바라고 하늘의 운행을 즐기기를 바랄 뿐이다. 인간이나 사물과의 관계나 이익, 손해 따위로 사람들과 서로 다투지 아니하며, 서로 괴이한 행동을 하지 않으며 서로 모략을 일삼지 않으며, 서로 일을 꾸미지 않으며 다만 홀가분하게 떠나가고 멍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보위(保衛)하는 법칙이다.'
曰: 然則是至乎.
남영주(南榮趎)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지극한 덕입니까?'
曰: 未也. 吾固告汝曰, 能兒子乎. 兒子動不知所為, 行不知所之, 身若槁木之枝而心若死灰. 若是者, 禍亦不至, 福亦不來. 禍福無有, 惡有人災也.
노자(老子)가 말했다. '아직 아니다. 내가 본디 그대에게 일러 주기를, '어린 아이처럼 행동할 수 있느냐?'고 했으니, 어린아이는 움직일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며, 길을 갈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해서, 몸뚱이는 시든 나뭇가지와 같고 마음은 불 꺼진 재와 같다.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면 화(禍)도 이르지 않고 복(福)도 이르지 않는다. 화와 복조차 없는데 어찌 인간의 재앙이 있을 것인가?'
06. 태연하고 안정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
宇泰定者, 發乎天光. 發乎天光者, 人見其人.
마음이 태연히 안정되어 있는 이는 안에서부터 자연의 빛 천광(天光)이 나온다. 천광이 빛나는 사람은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낸다.
人有修者, 乃今有恆, 有恆者, 人舍之, 天助之.
도덕을 닦은 사람은 마침내 일정함을 갖추게 되니, 일정함을 갖춘 사람은 사람들이 귀의하고 자연이 도와준다.
人之所舍, 謂之天民,
天之所助, 謂之天子.
사람들이 귀의하는 사람을 자연의 백성이라 일컫고, 자연이 도와주는 사람을 자연의 자식이라 한다.
學者, 學其所不能學也.
세상에서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行者, 行其所不能行也.
세상에서 실천이라고 하는 것은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辯者, 辯其所不能辯也.
세상에서 변론이라고 하는 것은 변론할 수 없는 것을 변론하려는 것이다.
知止乎其所不能知, 至矣.
若有不即是者, 天鈞敗之.
인간의 앎이 알지 못하는 것에서 멈출 수 있다면 지극한 앎인 것이니, 만약 이런 경지에 나아가지 않으면 자연의 균형 천균(天鈞)이 무너질 것이다.
7. 외물에 의해 마음이 어지럽지 않아야 한다.
備物以將形, 藏不虞以生心, 敬中以達彼.
필요한 물자를 갖추어 육체를 기르고, 헤아리지 않는 무심(無心)의 지혜를 몸에 지녀 마음을 생육하고, 자신을 잘 닦아서 외물을 감화시킨다.
若是而萬惡至者, 皆天也, 而非人也.
이와 같이 하고서도 오히려 여러 가지 재난이 닥치는 것은 모두 자연(天)에 의한 것이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다.
不足以滑成, 不可內於靈臺.
따라서 그것으로 마음의 안정(成)을 어지럽히기에는 부족하고 또 신성한 영역인 마음에 들여서도 안 된다.
靈臺者有持, 而不知其所持, 而不可持者也.
신성한 영역인 마음은 지키는 것이 있지만 무엇을 지키는지 알 수 없는지라 억지로 지킬 수 없는 것이다.
不見其誠己而發, 每發而不當, 業入而不舍, 每更為失.
자신의 마음의 진실함을 확인하지 않고 움직이면, 움직일 때마다 사리에 어긋나게 되니, 걱정거리들이 침입해 그만두지 않게 되어 일이 바뀔 적마다 모두 실패한다.
為不善乎顯明之中者, 人得而誅之.
為不善乎幽閒之中者, 鬼得而誅之.
사람들이 보고 있는 데서 불선을 저지르는 자는 사람들이 그를 잡아서 처벌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 악을 행한 자는 귀신이 잡아서 처벌한다.
明乎人明乎鬼者, 然後能獨行.
그러므로 사람에게도 밝고 귀신에게도 밝은 뒤에야 홀로 걸어가도 두려움이 없다.
券內者行乎無名, 券外者志乎期費.
내면을 충실하게 하려는 사람은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행동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중시하는 사람은 재물을 끌어 모으는 데 뜻을 둔다.
行乎無名者, 唯庸有光; 志乎期費者, 唯賈人也, 人見其跂, 猶之魁然.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행동하는 사람은 평범하게 행동해도 빛이 나지만, 재물을 끌어 모으는 데 뜻을 둔 사람은 장사치에 지나지 않는데 사람들은 그가 억지로 발돋움한 것을 보고 오히려 우뚝하다고 여긴다.
與物窮者, 物入焉; 與物且者, 其身之不能容, 焉能容人.
사물과 함께 할 때 극진히 하는 자는 사물도 받아 들여지고, 사물과 상대하는 자는 자신조차도 용납되지 못하니 어찌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不能容人者無親, 無親者盡人.
다른 사람을 용인하지 못하는 자는 친함이 없을 것이니 친함이 없으면 남을 지극히 괴롭힌다.
兵莫憯於志, 鏌鋣為下.
무기 중에는 사람의 마음보다 더 참혹한 것이 없으니 막야(鏌鎁) 같은 명검도 그보다 아래이다.
寇莫大於陰陽, 無所逃於天地之間.
해침은 음양의 부조화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천지 사이에 도망할 곳이 없다.
非陰陽賊之, 心則使之也.
그러나 사실은 음양이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08. 도에 어긋나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다
道通, 其分也, 其成也毀也.
도(道)는 만물을 구분하지 않고 통틀어 하나로 만드니 이루기도 하고 훼손하기도 한다.
所惡乎分者, 其分也以備; 所以惡乎備者, 其有以備.
구분하는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구분할 때마다 갖추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갖춤을 미워하는 까닭은 갖춤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故出而不反, 見其鬼; 出而得, 是謂得死.
그 때문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귀신을 보게 될 것이니, 나가서 얻게 되는 것을 죽음을 얻었다고 한다.
滅而有實, 鬼之一也.
본질은 소멸되었음에도 여전히 껍데기가 남아 있는 것은 귀신 중의 하나이다.
以有形者象無形者而定矣.
형체가 있는 존재로서 형체가 없는 도를 본떠 행동하면 안정될 것이다.
出無本, 入無竅。有實而無乎處, 有長而無乎本剽.
생겨남에 근본이 없으면 돌아갈 구멍이 없는 것처럼, 그런데 도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머무는 곳이 없고, 자라남이 있지만 근본과 끝이 없다.
有所出而無竅者有實.
생겨남은 있지만 돌아갈 구멍이 없는 것이야말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有實而無乎處者, 宇也.
有長而無本剽者, 宙也.
실제로 존재하지만 머무는 곳이 없는 것은 우(宇)이고, 자라남이 있지만 근본과 끝이 없는 것은 주(宙)이다.
有乎生, 有乎死; 有乎出, 有乎入; 入出而無見其形, 是謂天門.
생성과 사멸이 있고, 나오고 들어감이 있으니, 들어가고 나옴에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을 천문(天門)이라 한다.
天門者, 無有也, 萬物出乎無有.
천문이란 있음이 없는 무유(無有)이니, 만물은 무유(無有)에서 나온다.
有不能以有為有, 必出乎無有, 而無有一無有, 聖人藏乎是.
있는 것은 있는 것에서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없는지라, 반드시 무유(無有)에서 나온 것이니, 무유(無有)는 일체가 없는 것이니, 성인은 이것을 간직한다.
09. 마음이 쉽게 옮겨 다녀서는 안된다
-옳음의 기준이 바뀌는 것-
古之人, 其知有所至矣. 惡乎至.
옛사람들은 그 지혜가 지극한 곳까지 이르렀다. 어디에까지 이르렀는가?
有以為未始有物者, 至矣盡矣, 弗可以加矣.
처음에 사물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니 지극하고 극진하여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其次以為有物矣, 將以生為喪也, 以死為反也, 是以分已.
그 다음은 사물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데 태어나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여기고 죽는 것을 돌아가는 것으로 여겼으니 이것은 아직 삶과 죽음을 구분한 것이다.
其次曰始無有, 既而有生, 生俄而死.
그 다음은 처음에는 있는 것이 없다(無有)고 여겼는데 얼마 있다가 삶이 있게 되고 삶이 이윽고 죽게 된다는 것이다.
以無有為首, 以生為體, 以死為尻.
있는 것이 없다는 것(無有)을 머리로 삼고 삶을 몸체로 삼고 죽음을 꽁무니로 삼았다.
孰知有無死生之一守者, 吾與之為友.
누가 죽음과 삶이 한 가지임을 아는가, 나는 그와 벗이 될 것이다.
是三者雖異, 公族也.
이 세 가지 입장은 비록 생각이 다르지만 같은 혈통에서 나온 왕이나 공(公)의 동족(同族)이다.
昭景也, 著戴也.
甲氏也, 著封也. 非一也.
같은 공족(公族)이지만 소씨(昭氏)와 경씨(景氏)는 사람들이 떠받드는 직책으로 드러낸 성(姓)이고, 갑씨(甲氏)는 그가 소유한 영지(領地)를 기준으로 성(姓)을 드러낸 것인지라 (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한 가지가 아니다.
有生, 黬也, 披然曰移是.
삶이란 마치 가마솥 밑의 검댕처럼 생기는 것인데 잠깐 사이에 흩어져 옳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바뀐다.
嘗言移是, 非所言也.
시험 삼아 옳음의 기준이 바뀌는 것을 말해보자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雖然, 不可知者也.
비록 그러하나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그것을 알 수 없다.
臘者之有膍胲, 可散而不可散也.
섣달 납제사를 지낼 때 소를 희생으로 바치는데 소의 내장과 굽은 따로 나누어야 하지만 (제사를 지낼 때는 한 마리 온전한 소를 바쳐야 하기 때문에) 나누어서는 안 되며,
觀室者周於寢廟, 又適其偃焉, 為是舉移是.
또 집을 둘러볼 때 침전(寢殿)과 사당(祠堂)을 두루 살펴보고 나서는 뒷간을 살펴보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바뀌는 일에 해당한다.
請嘗言移是.
시험 삼아 옳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바뀌는 것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是以生為本, 以知為師, 因以乘是非.
이것은 삶을 근본으로 여기고 지혜를 스승으로 받들고서 이것에 따라 시비를 가르는 입장에 서게 된다.
果有名實, 因以己為質, 使人以己為節, 因以死償節.
그 결과 명목과 실질의 분리가 생겨나고 이어서 자기의 기준을 바탕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명예(名節)를 인정하게 하여 그 때문에 죽음으로 그 명예에 보상하게 된다.
若然者, 以用為知, 以不用為愚, 以徹為名, 以窮為辱.
이 같은 자는 세상에 쓰이는 사람을 지혜롭다 여기고 쓰이지 못하는 사람을 어리석다 여기며 세상에 뜻이 통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고 궁지에 몰리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移是, 今之人也, 是蜩與學鳩同於同也.
이처럼 옳고 그름을 바꾸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다. 이는 (대붕大鵬을 비웃는) 매미나 작은 새들이 함께 하는 짓을 같이하는 것이다.
10. 지극한 도리는 구별을 초월한다
蹍市人之足, 則辭以放驁, 兄則以嫗, 大親則已矣.
시장에서 모르는 사람의 발을 밟으면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형의 발을 밟았을 경우에는 어루만져주는 정도로 끝내고 부모의 발을 밟았을 경우에는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故曰: 至禮有不人, 至義不物, 至知不謀, 至仁無親, 至信辟金.
그 때문에 지극한 예(禮)는 상대를 남으로 대하지 않고, 지극한 의(義)는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지극한 지혜(知慧)는 지모(智謀)를 부리지 않고, 지극한 인(仁)은 누구를 따로 친애함이 없고, 지극한 믿음은 금옥(金玉)을 담보로 하는 일을 물리친다.
11. 마음의 혼란을 버리고 도를 터득하는 법
徹志之勃, 解心之繆,
去德之累, 達道之塞.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을 제거하며, 마음을 묶는 속박을 풀며, 타고난 德에 달라붙는 장애를 버리며, 道를 막는 방해물을 소통시켜야 할 것이니,
富貴顯嚴名利六者, 勃志也.
신분의 높음, 재부, 출세, 권세, 명성, 이익의 여섯 가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고,
容動色理氣意六者, 繆心也.
용모, 동작, 표정, 피부, 생기, 의욕의 여섯 가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속박하는 것이고,
惡欲喜怒哀樂六者, 累德也.
증오, 욕망, 환희, 분노, 비애, 열락의 여섯 가지는 타고난 德에 장애가 되는 것이고,
去就取與知能六者, 塞道也.
사직, 취임, 착취, 은혜, 지혜, 능력의 여섯 가지는 근원의 도를 막는 것이다.
此四六者不盪胸中則正, 正則靜,靜則明, 明則虛, 虛則無為而無不為也.
이 네 가지에 해당하는 여섯 가지 종류가 흉중에서 요동치지 않으면 올바르게 되고, 올바르면 고요함을 지키게 되고, 고요함을 지키면 앎이 분명해 지고 앎이 분명하면 마음이 텅 비게 되고 마음이 비는 경지에 도달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 일이 없게 된다.
12. 도와 덕과 본성의 관계
道者, 德之欽也.
生者, 德之光也.
性者, 生之質也.
도(道)란 덕(德)이 공경하는 것이고, 삶이란 덕이 빛나는 모습이다. 본성이란 삶의 바탕이다.
性之動謂之為, 為之偽謂之失.
본성의 활동을 행위라 하고, 행위가 거짓되면 그것을 상실이라고 일컫는다.
知者, 接也; 知者, 謨也.
知者之所不知, 猶睨也.
안다는 것은 (본성이) 외물과 접촉하는 것이며 안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안다는 것으로써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은 곁눈질로서는 물건의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動以不得已之謂德, 動無非我之謂治, 名相反而實相順也.
부득이하게 움직이는 것을 덕이라 하고, 움직임에 자기의 본성을 잃는 일이 없는 것을 다스림이라 하니, 이름은 상반되지만 실제로는 서로 일치하는 것이다.
13. 벌레들은 벌레 노릇을 하기에 자연스럽다
羿工乎中微而拙於使人無己譽, 聖人工乎天而拙乎人.
예(羿)는 작은 표적을 맞추는 데는 아주 뛰어났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칭찬하지 않게 하는 데에는 졸렬하였다. 성인은 天(자연)에 대하여는 뛰어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졸렬하였다.
夫工乎天而俍乎人者, 唯全人能之.
대저 자연에 뛰어나면서 사람의 일도 잘하는 것은 오직 완전한 사람이라야만 할 수 있다.
唯蟲能蟲, 唯蟲能天.
오직 벌레만이 온전하게 벌레일 수 있으며 오직 벌레만이 자연 그대로일 수 있다.
全人惡天, 惡人之天, 而況吾天乎人乎.
한편 완전한 사람은 자연을 싫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위적인 자연을 싫어하는 것이니 하물며 내 스스로 인위를 자연(天)이라 할 수 있겠는가!
14. 천하로 새장을 삼으면 도망칠 곳이 없다
一雀適羿, 羿必得之, 威也.
以天下為之籠, 則雀無所逃.
참새 한 마리가 명궁인 예(羿)에게 다가갔을 때 예(羿)가 반드시 그것을 쏘아 맞춰 잡는다는 것은 미혹된 생각이다. 하지만 천하를 가지고 새장으로 삼으면 새가 도망칠 곳이 없게 된다.
是故湯以胞人籠伊尹, 秦穆公以五羊之皮籠百里奚.
이 때문에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은 요리사의 직책으로 이윤(伊尹)을 새장에 넣었으며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다섯 마리 양의 가죽을 대가로 백리해(百里奚)를 새장에 넣었다.
是故非以其所好籠之而可得者, 無有也.
그러므로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새장으로 삼지 아니하고서 그를 손에 넣는 경우는 없는 법이다.
15.고요하고자 하면 마음을 평온히 지녀야 한다
介者拸畫, 外非譽也; 胥靡登高而不懼, 遺死生也.
형벌로 다리를 잘린 사람이 화장도구를 버리는 것은 (용모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이나 헐뜯음을 도외시하기 때문이고 형벌을 받은 죄수의 무리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생사를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夫復謵不餽而忘人, 忘人, 因以為天人矣.
남에게 굴복하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잊게 되니 사람의 감정이 없게 되면 그로 인해 자연의 사람이 된다.
故敬之而不喜, 侮之而不怒者, 唯同乎天和者為然.
그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공경해도 기뻐하지 않고 멸시해도 성내지 않는 것은 오직 자연의 조화와 일체가 된 사람이라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
出怒不怒, 則怒出於不怒矣.
노여운 경우더라도 인위적으로 노여워하지 않으면 노여워하지 않는 데서 노여움이 나오게 될 것이다.
出為無為, 則為出於無為矣.
행위를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행위하지 않으면 행위가 무위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欲靜則平氣, 欲神則順心, 有為也.
고요하기를 바라면 기(氣)를 평화롭게 해야 하고 신묘하기를 바라면 자연스러운 마음을 따라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
欲當則緣於不得已, 不得已之類, 聖人之道.
행동이 마땅하기를 바란다면 어쩔 수 없게 됨을 따라야 할 것이니 어쩔 수 없게 된 뒤에 움직이는 부류는 성인(聖人)의 도이다.
▶️ 函(함 함)은 상형문자로 凾(함)과 통자(通字), 圅(함)은 본자(本字)이다. 函(함)은 활시위를 넣어 두는 용기(容器)를 본뜬 글자이다. 전(轉)하여 '상자', 또는 '집어 넣다'의 뜻에 쓰인다. 그래서 函(함)은 (1)일부 명사(名詞) 다음에 쓰이어 그것을 넣는 상자(箱子)임을 나타내는 말 (2)혼례(婚禮) 때에 신랑 측에서 채단과 혼서지를 넣어서 신부(新婦) 측에 보내는 나무 궤짝 (3)옷을 넣어 두는 나무로 된 상자(箱子). 아래 짝은 깊고 위의 뚜껑은 작고 얕음 등의 뜻으로 ①함(나무로 짠 궤) ②상자(箱子), 갑 ③갑옷 ④글월 ⑤혀 ⑥잔(盞), 술잔(-盞) ⑦함곡관(函谷關)의 약칭(略稱) ⑧큰소리의 형용(形容) ⑨편지(便紙), 서간(書簡) ⑩싸다, 속에 넣고 씌워 가리다 ⑪넣다, 사이에 끼다 ⑫휩싸다 ⑬너그럽다, 관대하다(寬大--) ⑭품다, 머금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스승을 달리 이르는 말을 함장(函丈), 한 변수의 값에 따라 결정되는 다른 변수를 앞의 것에 대해 일컫는 말을 함수(函數), 함처럼 생긴 작은 관을 함관(函棺), 함을 올려 놓는 상을 함상(函床), 부뚜막이나 부넘기가 없이 불길이 곧바로 고래로 들어가게 된 아궁이를 함실(函室), 함과 같이 생긴 모양을 함형(函形), 함의 뚜껑을 함개(函蓋), 옷을 넣어 두는 함같이 된 농을 함롱(函籠), 함을 싸는 보자기를 함보(函褓), 책을 넣는 상자 또는 편지를 넣는 통을 서함(書函), 상대자를 높이어 그의 편지를 이르는 말을 귀함(貴函), 서류 상자 또는 남을 높이어 그의 편지를 이르는 말을 낭함(琅函), 돌로 만든 함을 석함(石函), 상어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교함(鮫函), 책문을 담은 상자를 책함(册函), 혼례 때 신랑집에서 채단과 혼서지를 담아 신부집에 보내는 궤를 혼함(婚函), 사서함이나 투표함 따위의 함을 엶을 개함(開函), 공무에 관하여 주고받는 문서를 공함(公函), 옷가지를 넣는 함을 의함(衣函), 두꺼운 마분지로 만든 함을 지함(紙函), 함곡관의 닭 울음 소리라는 뜻으로 점잖은 사람이 배울 것이 못되는 천한 기능 또는 그런 기능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을 함곡계명(函谷鷄鳴), 상자와 그 뚜껑이 잘 맞는다는 뜻으로 양자가 잘 맞아서 동일체가 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함개상응(函蓋相應) 등에 쓰인다.
▶️ 車(수레 거, 수레 차)는 ❶상형문자로 수레의 모양을 본떴다. 车(거/차)는 간자(簡字)이다. 부수로서는 수레에 관한 글자의 의미로 쓴다. 수레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서, 임금이 타는 수레를 의미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임금의 거동을 뜻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車자는 '수레'나 '수레바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참고로 車자에는 '차'와 '거'라는 두 가지 발음이 있다. 車자는 물건이나 사람을 싣고 다니던 '수레'를 그린 것이다. 수레는 무거운 짐이나 사람을 쉽게 이동하게끔 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갑골문에 나온 車자를 보면 당시의 수레가 잘 묘사되어 있었다. 갑골문에서는 양쪽에 큰 바퀴와 상단에는 차양막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후에 한자가 세로로 쓰이게 되면서 양쪽에 있던 수레바퀴는 단순하게 획으로 그어졌고 짐이나 사람을 싣던 곳은 田자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車자는 수레를 세로로 그린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처럼 車자는 수레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수레'나 '전차'와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車(거/차)는 (1)바퀴를 굴려서 나아가게 만든 운수 수단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기차(汽車), 자동차(自動車), 전차(電車) 등을 말함 (2)장기짝의 하나로 車자를 새긴 것으로, 한 편에 둘씩 네 개가 있다. 차 치교 포 친다. 제 마음대로 이리저리 마구 휘두름을 이르는 말.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수레 ②수레바퀴 ③수레를 모는 사람 ④이틀(이가 박혀 있는 위턱 아래턱의 구멍이 뚫린 뼈) ⑤치은(齒齦; 잇몸) ⑥장기(將棋)의 말 그리고 ⓐ수레(거) ⓑ수레바퀴(거) ⓒ수레를 모는 사람(거) ⓓ이틀(이가 박혀 있는 위턱 아래턱의 구멍이 뚫린 뼈)(거) ⓔ치은(齒齦; 잇몸)(거)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수레 가(軻), 수레 로/노(輅), 수레 량/양(輛), 가마 련/연(輦), 수레 여(轝)이다. 용례로는 임금이 타는 수레를 거가(車駕), 수레와 말을 거마(車馬), 물품 따위를 수레에 실음을 거재(車載), 수레 바퀴를 거륜(車輪), 비나 볕을 가리기 위해 수레 위에 친 우산 같은 덮개를 거개(車蓋),여러 가지 수레의 총칭을 차량(車輛), 차가 다니도록 마련한 길을 차도(車道), 차량의 사람이 타게 된 칸을 차간(車間), 도로를 주행 방향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 놓은 선을 차선(車線), 승객이나 화물을 싣는 부분을 차체(車體), 차량을 넣어두는 곳을 차고(車庫), 수레는 흐르는 물과 같고 말의 움직임은 하늘을 오르는 용과 같다는 뜻으로 수레와 말의 왕래가 많아 매우 떠들석한 상황 즉 행렬이 성대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거수마룡(車水馬龍), 차윤이 개똥벌레를 모았다는 뜻으로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공부함을 이르는 말을 차윤취형(車胤聚螢), 차윤의 반딧불과 손강의 눈이라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서의 면학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차형손설(車螢孫雪), 수레에 싣고 말斗로 될 수 있을 정도라는 뜻으로 인재나 물건이 아주 많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거재두량(車載斗量), 수레와 고기가 없음을 탄식한다는 뜻으로 사람의 욕심에는 한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거어지탄(車魚之歎), 수레의 말은 살찌고 몸의 의복은 가볍게 차려져 있음을 이르는 말을 거가비경(車駕肥輕), 경험이 없는 말로 수레를 끌게 하려면, 먼저 다른 말이 끄는 수레 뒤에 매어 따라다니게 하여 길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작은 일에서부터 훈련을 거듭한 뒤 본업에 종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거재마전(車在馬前),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라는 뜻으로 수레나 말을 타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거철마적(車轍馬跡)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남지북(之南之北),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의 말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둘이 다투는 틈을 타서 엉뚱한 제3자가 이익을 가로챔을 이르는 말을 어부지리(漁夫之利),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격세지감(隔世之感),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이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창상지변(滄桑之變),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등에 쓰인다.
▶️ 獸(짐승 수)는 ❶회의문자로 兽(수), 獣(수)의 본자(本字), 兽(수)는 간자(簡字), 嘼(수)는 동자(同字)이다. 嘼(축; 짐승을 잡는 도구; 사냥)와 犬(견; 개)의 합자(合字)이다. 사냥에서 잡힌 것, 짐승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獸자는 '짐승'이나 '가축'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獸자는 嘼(짐승 수)자와 犬(개 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嘼자는 사냥도구를 그린 것으로 '짐승'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獸자의 갑골문을 보면 單(홀 단)자와 犬자가 그려져 있었다. 單자가 사냥도구의 일종을 그린 것이니 이것은 사냥도구로 짐승을 잡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獸자는 '수렵'이나 '사냥'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사냥의 대상이 된 동물을 일컫게 되면서 지금은 '짐승'이나 '가축'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獸(수)는 ①짐승 ②가축(家畜) ③야만(野蠻) ④하류(下流) ⑤포(脯), 포육(脯肉: 얇게 저미어서 양념을 하여 말린 고기) ⑥짐승같은, 야만스러운 ⑦사냥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짐승 축(畜),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사람 인(人)이다. 용례로는 짐승의 돌림병을 수역(獸疫), 짐승의 모양을 새기어 꾸민 문을 수달(獸闥), 짐승의 형상으로 꾸며 차린 무대를 수대(獸臺), 짐승의 형상과 같이 만든 항로를 수로(獸爐), 짐승의 얼굴 또는 그와 같이 험상궂게 생긴 사람의 얼굴을 수면(獸面), 짐승처럼 사납고 야만적인 마음을 수심(獸心),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짐승의 고기를 수육(獸肉), 가축에게 생기는 여러 가지 질병의 진찰 또는 치료를 맡아보는 의사를 수의(獸醫), 짐승의 가죽을 수피(獸皮), 짐승의 털을 수모(獸毛), 짐승의 성질을 수성(獸性), 맹수의 피해로 인한 근심을 수환(獸患), 짐승을 넣어 기르는 우리를 수함(獸檻), 육식을 주로 하는 매우 사나운 짐승을 맹수(猛獸), 흉악한 짐승을 악수(惡獸), 괴상한 짐승을 괴수(怪獸), 새와 짐승을 조수(鳥獸), 온갖 짐승을 백수(百獸), 들짐승으로 하는 짓이나 성질이 몹시 포악하고 잔인한 사람을 야수(野獸), 짐을 실려서 운반시키는 짐승을 담수(擔獸),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짐승의 형상을 석수(石獸), 겨울철에 활동하지 않고 가만히 엎드려 있는 짐승을 칩수(蟄獸), 상서로운 징조로 나타나는 짐승을 서수(瑞獸), 짐승이 고통이 극도에 달하면 사람을 문다는 뜻으로 사람도 썩 곤궁해지면 나쁜 짓을 하게 된다는 말을 수궁즉설(獸窮則齧), 새나 짐승의 발자취가 천하에 가득하다는 말을 수제조적(獸蹄鳥跡), 돼지처럼 대하고 짐승처럼 기른다는 뜻으로 사람을 예로써 대우하지 않고 짐승같이 대한다는 말을 시교수축(豕交獸畜), 얼굴은 사람의 모습을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뜻으로 남의 은혜를 모름 또는 마음이 몹시 흉악함을 이르는 말을 인면수심(人面獸心), 짐승을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수지세(騎獸之勢)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