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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건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기 바로 하루 전에 끝나버렸다. 사랑받아야 마땅할 나이에 모든걸 잃어버린 어린 소녀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주변 사람들은 염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금세 도움의 손길을 걷어버리고 나라는 아이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런 내 곁에는 자석같이 붙어 다니던 남자 아이가 있었다. 이웃집에서 살고있던 그 아이는 자신을 민호라고 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집에선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가 온 동네의 고요함을 깨웠고, 화분이며 그릇들이 깨지는 소리도 마치 박자를 맞춰주듯 동네를 시끄럽게 했다. 그럴 때 마다 민호 그 아이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내 손을 꼬옥 잡은채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다.
초등학생 이였던 그때의 나는 ‘연정’ 이라는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엄마가 전혀 나쁘다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연정으로 달려갔으며 숙제를 하거나 공부를 했다. 아직도 어렴풋이 아니 정확히 기억이 난다.
분홍빛의 전등과 빨간빛의 전등이 한때 섞여 '연정'의 내부는 상당히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고, 그럼으로서 충분히 남자손님들을 끌어당기기 충분했다. 손님이라고 해봤자 서울이 아닌 강원도 원주라는 위치 때문에 동네 아저씨들이 위주였다. 숙제를 하고 있다보면 엄마와 손님들은 자주 가게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한참 뒤에 나오곤 했다. 엄마는 자주 손님들과 대화할 때 그 방을 쪽방 이라고 부르는것 같았다.
착한 아이라는 소리를 듣고싶어 엄마와 손님이 쪽방을 자주 드나드는 장면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물론 아빠에게도.
난 그런 엄마가 전혀 창피하지 않았는데 시끄러운 동네 아줌마들은 그렇지 않은것 같았다. 동네 아줌마들은 항상 오줌이 마려운데 참고있는듯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것처럼 몸을 흔들며 여러 사람들의 험담을 했는데 자주 엄마의 이야기가 오르내렸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아줌마들은 나에게까지 손가락질을 하더니 하나둘씩 친구들도 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유일하게 민호만은 마지막까지 내곁에서 여자아이 같이 예쁜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두 손을 더욱 꼬옥 잡아주었다.
이렇게 민호만 곁에 있어준다면 부처님과 하나님이 노하셔서 세상이 반쪽으로 갈라진다 해도 무섭지 않을것만 같았다.
중학교 입학을 하루 앞둔 날. 아침부터 비가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그런 비를 보고 있자니 불안한 마음이 커졌고 그 마음이 맞았는지 내 생에 절대로 잊을수없는 일이 터져버렸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엄마가 몇 날 며칠을 시간을 들여 직접 코바늘로 뜬 분홍 돌고래의 마스코트를 만지작 거리며 ‘연정’ 문 밖에서 엄마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코바늘로 열심히 뜨개질을 하던 엄마가 내게 해준말이 문득 떠올랐다.
“분홍 돌고래처럼 사랑받는 여자가 되라고 만들어 주는거야. 알겠니?
분홍 돌고래는 아마존의 넓은 바다에 살면서 낮에는 자유로 운 바닷속을 헤엄치며 다니고, 밤이 되면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 사람 들의 이목을 끌고 사랑받는 동물이였어.”
“구미호 같이?”
“넌 절대로 엄마처럼 살면 안돼. 알겠니? 그리고 구미호가 아닌 꼭 분홍 돌고래 처럼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 행복하게 살아야만 해.”
구미호란 단어에 아주 잠깐 엄마의 손이 떨린것 같았지만 이내 다시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엄마는 입학전 만찬을 즐기자며 함껏 들떠있었는데 마치 엄마가 나 대신 입학하는것 같아 보일정도로 더 여중생 같았다.
아빠와 엄마가 언제부턴가 별거를 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혼을 했다라는건 알고있었지만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엄마를 마음아프게 하고싶진 않아서였다. 하지만 동네 아줌마들의 다과용 소잿거리로는 안성맞춤 이였는지 여기저기서 흉을 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혀 동요하진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약간 지루해져 하품까지 나왔다. 할수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안에서 엄마의 찢어질듯한 비명소리리가 들려왔다. 내 이름을 고통스럽게 부르는 저 목소리는 분명 엄마 목소리였다.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은 자주 방문하던 근처 동네 단골 아저씨였다. 나이는 아빠정도 되어보였고 초등학생교 저학생시절부터 자주 마주친 그 아저씨는 항상 엄마를 볼때는 두 눈이 풀려있었다. 마치 엄마에게 맛있는 냄새라도 난다는듯한 그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역겨울 정도였다.
문제는 그 눈빛이 엄마를 넘어 점차 나에게 까지 번져왔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능수능란하게 나를 감싸주었다.
가게 문을 힘차게 앞으로 밀었지만 무슨 일인지 내 몸은 누군가 잡아당기듯 뒤로 당겨졌다. 뒤를 돌아보니 무표정의 민호가 평소보다 무서운 눈을 한채 내 팔을 잡고 있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팔이 부러질것만 같았다.
민호도 내일이면 나와 같은 중학교에 입학을 한다. 그래 우린 이제 중학생이 될 예정이였다.
안그래도 창백하게 질려있는 민호의 얼굴이 점점더 창백해져 가는게 보였다. 잠시 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다시한번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는데 민호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아이에게 끌려가다 싶이 가게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민호 뒤를 따라 걸으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강원도의 저녁은 상상도 할수없을만큼 푸르렀다. 분홍 돌고래가 헤엄칠수 있을만큼의 넓이였고 푸르름이였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 이르러서야 민호는 내 팔을 놓아주었고 그제서야 피가 통하는지 왼팔에 징 하는 느낌이 돋았다. 얼른 돌아가야 겠단 생각은 하고있는데 차마 이 아이를 두고 갈수가 없었다.
"금방 다시 올게. 기다리고 있어. 어디 가지도 말고 그저 날 기다리고 있어. 그래달라고 하면 그래줄수 있니?"
민호가 무슨말을 하는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사뭇 진지한 그의 얼굴은 갓 중학생이 되려고 하는 남자아이의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는데 손에 있어야할 엄마의 분홍 돌고래가 없었다. 어딘가 흘리고 왔는지 민호의 얼굴을 한번 올려보곤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잠깐이였지만 어딘가 변한듯한 느낌에 다시 천천히 민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호의 두 눈동자가 바로 위에 걸려있는 보름달과 같은 색으로 변했다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왜 그때 물어보지 못했을까? 방금 네 눈동자 색이 보름달과 같은 색이였어. 라고...
하지만 머릿속엔 온통 분홍돌고래와 찢어질듯한 엄마의 비명소리밖에 차있지 않았다.
"가봐야 겠어. 엄마가 기다려."
그렇게 말하곤 민호의 왼쪽 뺨에 내 작은 입술을 대었다. 쪽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볼과 내 입술은 확실히 닿았다.
가지말라고 말하는듯한 그를 두고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이상하게 지금 엄마에게로 향하면 앞으로 민호를 볼수 없을것만 같은 생각에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발걸음을 좀더 재촉했다. 빠른 보폭으로 걷다가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이럴때 비가 내린담. '연정'으로 돌아가면서도 눈은 땅을 보고 있었다. 분홍 돌고래가 어딘가 떨어져 있을지도 몰랐다. 분홍 돌고래는 결국 찾지 못하고 앞으로 시선을 올리자 '연정'이 저 멀리 보였다. 아까보다 비가 많이 내려 시야가 흐려졌다. 흐린 시야 사이로 한 남자가 '연정' 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바늘처럼 온 몸을 내리 찌르는 빗속을 헤치며 가게안으로 곧바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의 비명소리가 멈춘듯 했지만 무언가 일이 잘못된게 틀림없다고 느겨져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붉은 피가 누구의 피인지 알것같아서 였다.
가게 안쪽에 있는 쪽방 문앞엔 보다 더 많은 피가 있었다. 마치 빨간색 물감으로 칠해놓은듯 했다. 방안에 엄마가 있다. 열어야만 했다. 손잡이를 잡고 방 문을 열려는 찰나 가게에 수많은 밝은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너무 부셔 몸을 움직일수가 없었다.
"가을아 괜찮니? 가을아!"
순경 아저씨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한참 맴돌다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사람들에게는 제각기 갖고있는 비밀들이 하나씩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비밀이란 알려지기 위한 수단이라고도 말한다. 어떤 말에 앞이나 뒤에 비밀이란 단어를 붙여놓으면 평소에는 관심도 없어하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궁금증을 눈밖으로 표출한다. 그때부터 비밀은 비밀이 아니고 소문이 되어버린다.
물론 나도 소문이 될만한 비밀을 몇개쯤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말할 생각도 없을 뿐더러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싶기는 커녕 지금은 그저 내 눈앞에 펼쳐져있는 하얀 눈의 세계에 감동하고 싶었다.
가장 추운 계절이 오면 강원도 원주는 하얀 눈이 모든걸 잠재운다. 기차의 창문을 열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할 무렵 길다란 기차가 원주역에 가까워지면서 속도를 느리게 낮추었다. 하얀 눈은 평소에 눈에 익은 풍경을 순식간에 낯선 풍경으로 바꿔준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기차 문이 열리자 아주 천천히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기차안으로 들어오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차가운 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휘감았고 눈송이들도 바람결을 따라 술렁이며 조용히 내렸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치 벚꽃 잎이 흩날리는 것 처럼 보였다.
열세살 이후의 원주는 처음이라 그저 낯설고 신기했다. 서울과는 전혀 다른 풍경과 공기에 감동해 가슴이 벅차 올랐다.
"가을아 여기다 여기~"
"할머니~!"
타지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 외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반년 전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외할머니는 그때보다 아주 조금 활기차 보여서 다행이였다. 혈색있어 보이는 이유가 주름 가득한 입술에 발려있는 핑크빛 립스틱 때문이리라. 나이가 들어서 아줌마가 되어도, 할머니가 되어도 누군가에게 예뻐보이고 싶거나 조금이라도 젊어보이고 싶은건 모든 여자들의 공통된 생각인가 보다. 아주 잠깐 외할머니가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작고 오래된 낡은 손거울을 한손에 들고 한손에는 핑크빛 립스틱을 주름 가득한 입술에 아주 조심스레 바르고는 흡족해 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외할머니가 어느때보다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역을 벗어나니 주차되있는 택시들 사이로 낡은 파란색 트럭 한대가 서 있었다.
중후한 느낌과 강한 인상을 동시에 품고있는 구월(九月)스님께서 트럭에서 내리며 나와 외할머니를 반겼주었다. 그제서야 외할머니가 바른 립스틱의 방향을 정확히 알수가 있었다. 연꽃같은 외할머니의 미소에 주위에 덮혀있던 하얀 눈들이 녹아내리는듯 했다.
난 무척이나 낡고 오래된것을 좋아한다. 그 많은 시간과 감정을 가득 안고있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좀처럼 구월스님의 이 낡은 트럭만큼은 좋아지지가 않았다. 주방에서 시끄럽게 설거지를 하는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고 금방이라도 동그란 타이어가 펑 하고 터질것만 같았다.
"가을이는 점점더 숙녀가 되어가고 있구나."
구월 스님의 목소리에서 미세하게 차가운 기운을 느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퍼져있었다.
"대학교는 언제부터 등교한다고 했지?"
"엄연히 말하자면 대학교 아니예요. 할머니, 그냥 전문 학교예요."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다니는 학교는 모두 대학교야. 그런 생각으로 다니려무나."
외할머니는 어쩜 저리 따갑고 쓰라린 말을 아무렇지 않은듯한 표정으로 말할수 있는지.. 학교 얘기는 그만해요! 라고는 말할수는 없었다. 어차피 대학교를 포기한건 나였으니까.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번갈아 달리는 트럭이 점점 더 위태위태 해보여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창문 너머로 치악산의 입구가 보였다.
기억속의 남아있는 치악산과 지금 눈앞에 서있는 치악산의 압도감과 웅장함은 전혀 변하지 않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저 높은 산을 언제 다 올라갈지가 깜깜했다. 구월 스님이 계신곳은 상원사.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높은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유명
한 꿩의 보은의 전설을 담고있는 곳이기도 했다.
"젊은 처자가 이리 다리힘이 없어서 쓰나"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구월스님은 약간 높은 바위를 잘 밝고 올라올수 있도록 외할머니에게 손을 내주며 내게 말씀하셨다.
금방이라도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버릴것만 같아서 입술을 앙 다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보은의 종이 희미하게 보이는것 같았다. 벚꽃잎처럼 흩날리던 눈은 어느샌가 그쳐있었다.
"밤에는 왠만하면 밖으로 나가지 않는게 현명할거야."
"왜요?"
"산짐승들이 기승을 부리거든. 특히 구렁이랑 여우한테 홀릴수도 있고."
"구.. 뭐요?"
"구렁이랑 여우."
상원사 앞에 도착해 숨을 헐떡이니 살짝 두통이 왔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땀이 흘러내리는 듯한 찜찜함에 얼른 샤워를 하고싶었지만 구월스님의 말에 굽혔던 허리를 다시 꼿꼿히 세웠다. 구렁이와 여우. 분명 스님은 구렁이와 여우라고 말씀하셨다.
"말 그대로 상원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구렁이와, 여우는 뭐 쉽게말해 구미호를 뜻한단다."
"구미호요?"
"아이고, 스님 그만하이소. 가을이는 요즘 아이들이랑 다르게 밤 이슬 맞고 다니지 않아요."
"그런거라면 안심이네요. 걱정마라 할머니 두고 밤에 유흥을 즐긴답시고 돌아다닐까봐 꾸며낸 이야기란다."
호탕하게 웃는 스님의 웃음소리가 상원사를 넘어 치악산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것 같았다.
평범한 사람이였다면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였지만, 민속학과를 전공으로 택하고 박물관 큐레이터를 지망하는 나로서는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더이상 샤워를 지체했다가는 서울에서 온 땀범벅 촌뜨기 신세가 될것만 같아 말을 아꼈다.
"금대리에서 지낼거라고 했나?"
"네."
금대리 라는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원주에서는 꽤나 유명한 마을이 내가 어릴적 태어나고 열세살때 까지 자라온 고향이였다. 외할머니는 손녀와의 생활이 기대되고 설레이고 있는지 연신 방긋방긋 웃고 계셨다. 사방이 하얀 눈으로 제법 두껍게 쌓여 마치 구름위에 사찰이 떠있는 느낌이였다.
찬바람을 막기위해 닫혀있는 대웅전의 문이 참으로 쌀쌀맞게 느껴졌다. 초등학생 이후 처음 와보는 상원사는 제법 작은 규모였다. 그 시절의 상원사는 공주님이 살고있는 궁궐같이 커 보였는데.
가만히 상원사를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가지 생각이 겹쳐졌다. 대학교를 포기하고 민속학과와 큐레이터의 길을 정했다.
대학교를 들어가 관심없는 분야에서 열심히 공부를 할수있다는 보장도 없었을 뿐더러 더이상 나를 아는 사람들 속에서 가면을 쓴채 생활을 하기가 거북해졌다.
색안경이란 참 여러가지의 색이여서 색 마다 보여지는 상대방이 불쌍한 사람도 되기도 하고 그럼 그렇지 당해도 싸다 라는 동정도 필요없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금대리 근처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진 않지만 민속학과가 잘 관리되고있는 2년제 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빠와는 엄마와 이혼후 딱 한번 만났다. 엄마의 장례식날 아빠는 다른 여자를 데리고와 외할머니에게 온갖 욕설을 듣고 빗자루로 맞고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결국 아빠까지도 잃었다.
그렇게 모든게 붕 떠버린 난 서울의 큰 이모댁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다시 강원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심우당 근처를 서성이던 신도들과 마주쳤다.
나를 보며 속닥거리는 신도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듣기 거북했다. 그렇게 남의 이야기를 속닥 거리지 말란 말이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메아리 때문에 내 이야기가 더 멀리 다른곳까지 퍼져갈까봐 차마 그러진 못했다.
"찾았다."
귓가 근처에서 흐릿하지만 정확하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미 신도들은 나에게 흥미가 없어졌는지 자기들끼리 김장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바람에 다시 한번 긴 머리카락이 귓가를 휘감았다. 환청 이였을까.
보은의 종이 있는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보은의 종 옆에 한 남자가 회색의 면의로 된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뒤로 멀리까지 치악산의 풍경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내쪽으로 돌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순간 몸에 소름이 돋는것만 같았다. 검은 흑발과 깨끗한 피부, 붉은 입술 그리고 잠시동안 이였지만 아주 잠깐 그의 눈동자가 붉게 반짝거림을 느꼈지만 눈을 질끈감고 다시 보니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였다. 몇분간 서로가 말도없이 서로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어릴적 헤어진 그 아이와 너무나도 닮은 분위기에 그 아이도 지금쯤 나와 같은 나이에 성인이 되어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을아 얼른 내려가자."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갈라놓듯 비집고 들어왔다. 뒤돌아 보니 외할머니가 큰 찬합을 들고 서 계셨다.
나에대한 안좋은 이야기를 그렇게 숙덕거리던 신도들이 이것저것 먹을것을 챙겨주었을게 틀림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보은의 종 앞에 서있던 남자가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근처에서 사는 사람인걸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분위기와 홀린듯한 느낌에 금대리로 내려가는 내내 그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을부터 시내까지 크고 작은 눈사람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마치 그들이 주민들인 것처럼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였다.
하지만 요 네스뵈의 '스노우 맨'이 떠올라 우스꽝 스러웠던 광경이 순식간에 소름끼치는 장면으로 바뀌어 보였다.
학교 입구에 멀뚱히 서서 잠시 학교 건물을 전체적으로 보았다. 원주 금대리 전문학교는 마치 고등학교의 연장선에 있는듯한 느낌과 교육 시스템이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게 한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볼것이라고는 넓은 잔디밭과 운동장, 색색깔의 컨테이너 박스와 작은 본관과 서관. 딱히 이렇다 할 인상은 남지 않았다.
안뜰과 뒷뜰엔 벤치도 많고 나무도 많았으며 심지어 닭장과 토끼우리도 있었다. 아까부터 따뜻한 바닐라 라떼가 마시고 싶었지만 닭장에서 새어나오는 말로 설명못할 그 어떤 냄새 때문에 커피 생각이 저절로 사라져 버렸다.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에서는 아까부터 이승열의 "Secret"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얘!"
누군가 등을 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질렀다.
이어폰 한쪽을 빼고 고개를 돌렸더니 단발머리의 여자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도 머쓱한듯 약간 볼이 붉어진것 같았다. 눈은 작은편이였지만 웃을때 참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네가 서울에서 왔다던 애구나?"
"응?"
"아 미안, 이렇게 학교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건 이곳에 처음와본 사람이고 서울에서 온다는 여자의 소문을 듣고
네가 서울에서 온 애 란걸 알았지. 나는 고금화. 다른 애들이 고구마 라고 부르는데 너도 고구마라고 불러도 괜찮아."
"아... 나는"
"넌 한가을이지?"
"아.. 내 이름은 어떻게..?"
"네 소문은 벌써 다 났다니까~ 서울에서 예쁜 여자가 온다더라~ 라고!"
조금은 시끄러운 성격이지만 사교성이 좋아보이는 금화 덕분에 이곳에서의 생활이 조금은 수월해질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어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이곳의 학생들은 전부 강원도 원주 출신이거나 근방 강원도 타 지역의 아이들이였다. 그래서 인지 서울에서부터 이곳으로 온 내가 궁금하고 신기했는지 가는 길마다 시선집중이였다. 이런 느낌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연신 떠드는 금화를 보고 아무렴 어떠냐 라고 신경을 끊어버렸다.
민속학과 강의실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걸음이 멋대로 멈춰버렸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보은의 종 앞에서 보았던 남자란걸 분명히 알수 있었다. 그때는 개량한복을 입고있었지만 지금은 평범한 캐쥬얼 스타일의 모습이였다. 하지만 검은 머리와 깨끗한 피부, 붉은 입술과 흑요석 같은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같은 학교 학생이였구나.'
시선한번 피하지 않는 그의 맹렬한 눈빛에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차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에라도 홀린듯 내 두 눈은 계속해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곁에 있던 남자 둘이 그의 시선을 따라 내 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지만 붉은 입술과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는 그와 똑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들 셋은 서로 닮은듯 다른 느낌을 풍겼다.
한명은 환한 갈색머리에 장난끼가 가득해 보였고, 또 다른 한명은 살짝 긴 머리에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자같은 요염함이 보였다. 그들 가운데에 서있는 보은의 종에서 보았던 그는 차분함과 난폭함이 이상하리 만치 어울려 풍겨왔다.
다정해 보이다가도 위태해 보이기도 하는 그의 눈빛때문에 또 한번 홀리듯 시선의 초점이 흐려졌다.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짓자 마치 벌거벗은채 그에게 농락당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어 눈을 여러번 깜빡인후 정신을 차렸다.
그제서야 윗층에서 내 이름을 악을 쓰며 부르는 금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속학과 제 1 강의실은 생각보다 제법 넓었다. 부채꼴 모양으로 뒷쪽에 앉아있어도 강단이 한눈에 보였다.
금화와 뒷쪽자리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자 대각선 방향으로 아까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같은 과 였구나.'
금화의 밝고 톤 높은 웃음소리가 강의실을 쩌렁쩌렁 울려서 인지 그들이 우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은의 종에서 만난 그 남자는 아까와는 다르게 한결 여유로워진 눈빛이였다. 자꾸만 그에게 시선이 가는 내 자신이 낯설었다.
"저 남자들은 누구야?"
내 질문에 곁에서 화장을 열심히 고치고 있던 금화가 남자들 쪽을 힐끔 한번 보고는 립스틱을 꺼내들며 말했다.
"검은색 단발머리에 여자애 같은 애는 구선호. 파마끼 있는 머리에 목에 헤드폰 끼고 까불거리고 있는 애는 구동호.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애는 구민호. 이 부근에선 소문난 아이들이야. 잘생겼다고 여자들이 얼마나 꺅꺅 거리고 노리고 있는지~
왜? 가을이 너도 저들중 누구 맘에 드는애 생겼니? 나도 중학교 시절부터 봐왔는데 눈을 못맞추겠더라구~~"
민호.. 한동안 울면서 그리워하던 그 아이의 이름.
역시 보은의 종 앞에서 낯이 익다고 느꼈던건 기억속 그 아이가 민호 였기 때문이였으리라.
바로 알아볼수가 없었던건 그만큼 서로에게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이겠지. 이런곳에서 이렇게 다시 재회할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다시 민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 아이도 내쪽을 보고있었다. 이제와서 뭘 어쩌고 싶은건 아니였다.
기다려 달라는 그 아이의 말에 이제와서 마음 아파할 이유는 없었다. 너무 어릴때의 약속이였고 우리에겐 그만큼 떨어져있던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그리고 내겐 이미 지울수 없는 수많은 상처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민호는 여전히 나를 보고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다들 같은 구씨 인거 보면.. 형제인거니?"
이번엔 갈색 아이라인을 그리고 있던 금화가 낑낑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저 셋은 같은 고아원 출신이야. 스님들이 관리하시는 고아원인데 거기 담당 스님이 구월 스님이라고 앞의 구를 따서 쓰더라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구월스님과 민호의 얼굴이 어지럽게 스쳐지나갔다. 민호에게 부모님이 안계시다니..
정말 모르고 있던 사실이였다. 어릴적 나는 내 불행만 커보였기 때문에 남의 불행따윈 신경써 본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깝게 지냈는데 아무것도 몰랐다니.. 가만 생각해보면 민호에 대해 모르는게 너무나 많았다. 반대로 민호는 나에 대한 모든걸 알고 있었다라는걸 생각하니 너무나 그때의 민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요란스럽게 화장을 고치는 금화에게 기름종이 한장을 빌려주며 다시한번 민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민호는 선호와 웃으며 대화중이였다. 어째서 바로 저 아이를 알아보지 못한걸까. 마치 어릴적 민호가 지금 내 옆에서 서서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강의시간 내내 민호의 옆모습을 관찰하듯 보았더니 이제는 눈감고도 그의 옆모습을 그릴수 있을것 같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그와 재회를 한다한들 달라지는건 없었다. 하지만 어릴적의 내 모습을 유일하게 알고있는, 그리고 내 첫사랑의 상대로서 소중하게 여기고 싶었다. 조금만 용기를 내보자며 펜을 쥐고있던 손에 힘을 넣어보았다.
강의가 끝나자 민호는 동료들과 자리에 일어나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들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겨우 따라잡았을때는 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저기.."
랩을 흥얼거리던 동호가 제일먼저 나를 발견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할지 몰라 스스로도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동호와 선호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와 민호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역시 나를 기억 못하는걸까? 아무말 없이 날 내려다 보고있는 민호의 눈빛이 너무나 날카로워 온 몸이 바늘로 찔리는듯 했다.
"가을아! 여기서 뭐해! 갑자기 뛰쳐 나가길래 놀랬잖아~"
뒤따라온 금화가 민호 일행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머리 손질을 한다. 별로 달라진것 없어보이지만 금화는 수줍게 웃으며 계속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댔다.
그 행동때문인건지 아님 다른 이유 때문에서인지 민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지며 찡그러졌다.
"냄새나."
뒤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던 선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한마디에 방금전 까지 머리를 쓸어내리던 금화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민망함 가득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금방이라도 울것같은 금화가 그 순간은 어린 강아지 같아 보였다.
"내가 향수를 너무 과하게 뿌렸나? 미안미안."
머리빗는걸 멈추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하는 금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호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향수냄새 말고, 포도 냄새같은데?"
선호도 동호만큼은 아니지만 손을 콧가에 갖다대며 인상을 찡그렸다.
포도냄새? 금화의 몸에서 나는 향수냄새는 과일향이 아닌 파우더 향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팔과 손, 옷등을 맡아보았지만 역시나 나에게서도 나는 냄새가 아니였다.
몇초씩 지남에 따라 선호의 표정도 동호와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들다는 안색으로 변해갔다. 무언가 모를 공포감에 한발짝 뒷걸음치다 민호의 크고 단단한 몸과 부딪혔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내 등과 민호의 가슴이 부딪히자 그 마저도 냄새의 근원지가 마치 나라는듯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장난끼 가득했던 동호의 눈동자에는 살기 가득한 눈빛이 서려있었다.
"너희들 얼른 가."
내 등을 제법 힘을주며 밀친 민호가 나와 금화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건지 알수가 없어서 그저 놀란 두 눈동자를 깜빡거릴수 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것 같은 동호는 민호와 선호에게 제지 당하며 벌써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동호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고말았고, 괜찮냐는 금화의 목소리는 귓속까지 들어왔다 다시 흘러 나가버렸다.
동호가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나서 며칠이나 지났을까, 한동안 학교 어디에서도 동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선호와 같이 있는 민호를 볼때면 그는 무언가 알아내야한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왠지 그와 시선을 맞추는게 조금은 두려워져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서로 대화를 걸어오지도 그렇다고 내가 먼저 걸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부지런히 내려 이젠 제법 많이 쌓여있었다.
내 방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곳은 당연히 큰 창문이였다. 방 창문에서 초승달이 바로 보였다.
이상하게 이렇게 깨끗한 밤은 평소보다 훨씬 더 머리아픈 생각들이 밀려온다.
동호는 이제 괜찮은건지, 그때 선호가 언급한 포도냄새는 무엇인지, 민호는 왜 날 알아보곤 아는체 하지 않는지, 아빠는 지금쯤 어디서 살고 있을런지, 현준은 지금도 날 찾아다니고 있을런지..
생각이 현준에게까지 미치자 속이 답답해져 왔다. 그와의 관계를 정확히 말하자면 매듭을 확실히 맺은 사이는 아니였다. 그래서인지 자주 불안하고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아빠도 내 곁을 떠나고, 엄마도 내 곁을 떠나고, 민호도 내 곁을 떠나고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은채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를 다니며 여러 친구들을 만나게 된게 화근이였다.
그러고 현준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난 딱히 비행소녀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아니였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당시의 현준은 말끔하고 호감형 인상에 좋은 대학교를 다니던 대학생이였다. 점점 그와 연락하는 횟수와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내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하면서 위로도 받고 많이 의지할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난 두번째 사랑에 빠져버렸다.
너무 이른감은 없지 않지만 그가 원하는건 모든지 들어주고 싶은 어린 마음에 내 순결도 함께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그 후로 태도가 조금씩 변해가고 소홀해져 가는 그의 모습을 볼때마다 또 다시 그마저 잃을까봐 너무나 겁이 났었다.
하지만 그도 나와의 관계를 확실히 끝내지는 않고 본인이 필요할때만 나에게 연락을 취해왔고 그때마다 우린 관계만 맺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텅 빈 방에서 알몸으로 수십번은 울었다. 하지만 그가 너무나 좋아서 헤어지자는 말은 절대로 꺼내지 못했다. 이대로 있을수만은 없어서 어느날은 그의 뒤를 미행도 했다. 그게 잘못이였다. 지금와서 생각해봐도 내 인생에서 그때의 일은 영원히 삭제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술집을 드나들던 현준을 뒤따라 지하에 있는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고막이 터져버릴듯 굉장한 볼륨소리에 음악이 쾅쾅하고 흘러나왔다.
야하게 차려입은 여자들과 그런 여자들의 허리를 감싸며 춤을 추고있는 남자들은 음악 소리 때문인지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며 대화를 하고있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어느 커플은 진한 키스를 하고있었고 그 순간 아차싶었다.
이곳에 있으면 안될것같은 느낌에 돌아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
"이게 누구야. 가을이 아냐? 가려고?"
첫만남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현준이 서있었다. 비아냥 거리는 미소를 입게 걸고 술때문인지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눈이 한껏 풀려있었다. 제법 어른스럽게 보이기 위해 입었던 미니 스커트 아래로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다리에 소름이 돋았다.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힘껏 자기쪽으로 끌어당기곤 내 귀와 목선을 코로 쓸면서 냄새를 맡는 그의 행동이 처음이 아니라 낯설진 않았다. 힘이 없고 기운이 없다 할땐 종종 내 귀와 목선에 코를 갖다대며 피부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나만의 향 덕분에 안심이 된다고 했다. 그때 그 말이 얼마나 고맙고 기뻤던지..
"처음 만났을때보단 향이 아주 조금 강해졌네. 하지만 아직 약해. 좀더 향이 강해져야해. 그니까 그때까진 내 옆에있어.
도망가도 지구 끝까지 쫓아갈테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쁘지만 마냥 기뻐할수가 없었다.
"도망을 못가게 하기 위해선 따끔한 조치를 취해야겠지."
그가 고갯짓을 하자 어디에 있었는지 무섭게 생긴 남자 두명이 다가왔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눈이 풀려있었다. 처음 본 남자들이 내 허리를 두르고, 팔을 쓰다듬고, 다리를 쓰다듬고 키스까지 하려들었다.
토할것만 같았다. 울고만 싶었다. 계속해서 현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미소를 지은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여자로서의 모든걸 현준에게 허락했던 과거의 날들이 너무나 후회 스러웠고 비참해져왔다. 빠져나가고 싶어도 남자들의 힘은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나 강했다. 억지로 벗기려든 블라우스 단추가 톡 하고 끊어져버렸다.
눈물이 한방울 흘러나오려던 찰나 스테이지 쪽에서 병이 깨지는 소리와 물건과 물건이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이 모두 동요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한가을!"
현준의 목소리가 아닌,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른듯해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과 사람들은 서로 엉켜있었고 병이 깨지고 의자들이 날아다니는 광경속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를 찾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이상 지체할수는 없었다. 소란스러워진 그 틈을 타 죽을힘을 다해 술집에서 빠져나왔다. 어른스럽게 보이기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화장이 눈물로 지워져 얼굴이 꼴사납게 변해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사람 취급한채 날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현준이 쫓아올것 같은 불안감에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주위를 살펴보며 구두도 벗어버리고 맨발로 도망쳤다.
찬공기가 코에 닿으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제서야 눈 앞에 아까 보았던 초승달이 다시 보였다. 눈은 아직 내리고 있었고, 하얀 페인트를 뿌려놓은듯한 치악산이 저 멀리 보였다. 현준은 내 고향이 강원도 라는건 모른다.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쳐 온것이다. 불안함은 아직 남아있지만 이곳이라면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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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밋습니다아 !!
재밌게 보고가요~~^^
재밌게 보고갑니다~~
재밌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