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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장 만박노개(萬博老 )의 후인(後人)
"와아--!"
분지가 온통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렸다.
팔대장로가 누대 위로 올라온 것이다.
개방의 팔대장로라면 개방 내에서 뿐만 아니라 무림에서의 명성도 지대하다.
그들의 영향력이 방주 다음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때로는 장로회의의 의결을 거쳐 방주의 행동에 대한 구속력까지도 발휘할 수 있다.
더구나 개방이천하제일의 조직력을 지닌 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어느 누구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대에 오른 사람은 하나같이 늙은 거지들이었다.
매듭을 여덟 개씩이나 메고 있는 인물들로 눈에서 뿜어지는 안광이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이로 미루어 공력이 심후한 내가 고수들이라는 점은 굳이 부언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만 했다.
그들은 엄숙한눈빛으로 누대 아래의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나서며 낭랑하게 외쳤다.
"여기까지 오신 제자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요."
장미신개(長眉神 ).
그는 개방의 장로들 중에서도 수석장로였다.
인망이 높아 방중의 제자들로부터 유독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방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년의 기업을 이어 내려왔소. 그러나 여러 형제들의 피와 땀이 없었던들 작금과 같은 성세는 이룰 수 없었을 것이외다. 돌이켜 보면 숱한 영욕과 그 뒤안길에는 많은 동도들의 희생이 뒤따랐었소."
그 말에 장내는 더할 나위 없이 숙연해졌다.
그러나 그러한분위기는 얼마가지 않았다.
불현듯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던 것이다.
소요가 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팔대장로들 중 곽, 서, 기 세 장로가 보이지 않고 예고도 없이 다른 세 명의 인물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으니 왜 안그렇겠는가?
장미신개가 손을 내젓자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오늘 이 자리의 모임을 갖고자 한 것은 중대한 안건이 있기 때문이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십여 년 전, 전대 방주의 독살 사건에는 의혹의 여지가 다분히 있었소. 그런데 최근에야 그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소."
"아!"
"범인은 대체 누구요?"
장내는 금새 충격의 파장을 일으킨듯 술렁였다.
사실 그 건이라면 이미 첩지를 통해 전 개방도들에게 익히 알려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의 중요성으로 보건대 단지 첩지 한 장만으로는 믿기 어려워 재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장미신개의 음성은 비록 크지는 않았으나 정순한 공력으로 인해 분지 내에 모여있는 전 개방도들의 귀에 들어갔다.
또한 그 말이 불러 일으키는 반향은 점입가경이었다.
"우리 모두가 십년 동안 기만을 당하고 있었소. 범인은 미리 공고했다시피 바로 주휘경이었소."
장내는 찬물을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전해들은 바는 있었지만 장미신개의 입을 통해 직접 그 말을 듣게 되자 더 이상은 사실여부를 회의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 한 인물이 일어서며 외쳤다.
"소생은 상산분타(湘山分陀)의 구지철개(九指鐵 ) 허환(虛環)이오."
그는 초봉에 자리 잡고 있던 인물로서 상산분타의 분타주였다.
평소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개방 내에서 신임이 두터운 핵심인물 중 하나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치 그의 한 마디는 방 내에서 비중이 높다고도 할 수 있었다.
과연 중인들의시선이 일제히 허환에게로 쏠렸다.
그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웅후한 음성을 토해냈다.
"대체 장로들께서는 어떻게 그 일을 규명지으셨단 말이오? 경위를 말씀해 주시지 않는 한 정확한 판단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드오이다. 이 일에는 필히 방주의 해명이 따라야 할 것이외다."
이 말은 곧 공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현 방주의 죽음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므로 허환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팔대장로에 대한 불신과 일맥상통한다고 봐야 했다.
장미신개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스쳤다.
그러나 정황이 정황인지라 그는 금새 표정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형의 말이 옳소. 하지만 이 일을 가볍게 처리한 것은 절대 아니오. 장로희의를 거친 것은 물론 그 전에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소이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전대 방주는 칠일단장산(七日斷腸散)에 중독되어 살해당했소. 칠일단장산의 제조자라면 누구겠소? 본방의 오독신타(五毒神陀)를 빼놓고 천하에서 그런 극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는 없소."
장내에는 무거운 침음성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인들은 장미신개의 음성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오독신타는 사건 직후 실종되어 그 동안 본방에 여러 가지 억측이 나돌게 했었소. 그런데 이번에 그 자가 잡혀와 음모의 전말을 고스란히 알게 되었소."
장미신타는 자신의 누대의 뒤쪽을 향해 명을 내렸다.
"죄인을 대령시켜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장년의 두 거지가 한 명의 늙은 거지를 끼고 나왔다.
그를 보자 장내에는 또 다시 소요가 일었다.
"오독신타다!"
누군가의 외침이 가리키는 인물, 그는 얼굴이 검고 등이 낙타의 혹처럼 불룩하게 튀어나온 꼽추였다.
용모와 신체적 특징상 그는 십여 년 전에 실종되었던 오독신타가 틀림없었다.
장미신개가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봉노삼(峯老三), 이 곳에 모인 동도들에게 사실을 밝힘으로써 조사의 영전에 나아가 참회를 할 기회를 주겠다. 어서 바른대로 실토를 해라."
오독신타 봉노삼은 시야가 흐린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눈은 겉으로 보기에도 뽀얀 기운이 어려 있어 시선이 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호했다.
"나는... 쿨룩, 쿨룩......!"
오독신타는 입을 열기가 무섭게 기침을 해댔다. 뿐만 아니라 기침이 튀어나올 때마다 그는 몹시도 괴로와했다.
기침이 진정되고도 한참 후에야 그는 말문을 열었다.
"그렇소이다. 나는 당시 주휘경의 청부를 받고 그 짓을 했소. 이는 일점도 거짓이 없는 사실이오."
"우우--!"
일순 군호들의입에서 분노에 찬 야유가 터져 나왔다.
일찍이 개방에 이처럼 크나큰 오욕은 없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분노는 삽시에 거세게 번져갔다.
장미신개가 그들을 대신하듯 다시 오독신타를 추궁했다.
"그대는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벌였는가?"
봉노삼은 더듬더듬 대꾸했다.
"당시 주휘경은 방주님께 한 가지 비리를 들켰는데... 그로 인해 본방에서 축출 당할 위험에 처했기 때문... 나는... 주휘경의 감언이설에 속아... 그가 장로로 승격시켜 주겠다고 하기에 그만... 쿨룩! 쿨룩......!"
장미신개는 역시 뒤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두 명의 장년거지가 즉시 봉노삼을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장미신개는 군호들을 한 차례 쓸어보며 말했다.
"여러분도 이제 들으셨으니......."
구지철개가 장미신개의 말을 끊고 나섰다.
"잠깐!"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장미신개와 맞섰다.
"죄를 확정하기 전에 이 사람이 한 가지 더 여쭙겠소이다. 주방주는 그 뒤 어떻게 되셨소이까?"
구지철개 허환.
그의 태도에는조금도 굴하는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 낙척서생 주휘경이라면 추후로 개방의 역사를 논한다 해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교분은 따로 없었지만 그는 주휘경을 지극히 흠모해오던 터였다.
방주의 위(位)에 오른 것만 해도 본인이 탐내서가 아니라 주위의 추대였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되자 장미신개도 분노보다는 탄식을 보였다.
"불행한 일이오만 주휘경은 본방의 삼십육천강수(三十六天 手)와 칠십이지살(七十二地煞)의 추적을 받자 그들 태반을 죽이고 그 자신도 죽었소."
"아!"
허환의 눈썹이불끈 치켜 올라감과 동시에 장내에는 장탄식이 울렸다.
그들은 애도와 더불어 개방의 어이없는 처사에 노골적으로 반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적어도 방중의대사(大事)가 이런 식으로 처리된 적은 없었다.
의당 공개적인 문초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방도들로 하여금 본인의 진술은 들을 수 있게 했어야 했다.
팔대 장로의 권위가 높다 한들 방주를 능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설혹 방주가 흉사의 진범이라 한들 어찌 그들이 감히 임의로 방주를 추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내세운증거라는 것도 그렇다.
죄인과 대질을 시켜 자인(自認)을 받아 내기 전에는 어쩌면 혐의를 덮어씌우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오독신타 정도를 협박하여 위증을 하게 하는 일이란 팔대장로의 위치로 보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더욱이 그는 언뜻 보기에도 그런 냄새를 역력히 풍겼었다.
군호들의 기색은 점차 그 흐름을 달리 했다.
누구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마다 석연치 않아 하는 눈치와 더불어 은연중 분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누대 위의 팔대장로들은 군호들의 심중을 모르지 않았다.
그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와 똑같은 심적 갈등을 겪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미신개는 내심 통탄을 금치 못했다.
'만일 이들에게서 이 의혹을 지우지 못한다면 향후 개방은 크고 작은 숱한 문제를 안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주휘경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염려하는것은 이 일로 인한 개방의 분열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후 군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시 정세가 워낙 급박하다 보니 일처리에 다소간의 무리가 있었소이다. 본인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여러 동도들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소. 그 점에 관해서는 본방의 조사어른께서 직접 존체를 나타내시어 말씀이 계실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소리가 연달아 세 번 울렸다.
둥둥둥--!
누대의 뒤에서한 인물이 서서히 걸어 나왔다.
그 자는 일신에 마의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가 출현과 동시에 장내에는 갑자기 큰 소란이 일어났다.
"삼목신개시다!"
"삼목노조께서 돌아오시다니--!"
장내는 순식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화했다.
삼목신개가 누구인가?
그로 말하자면 만박노개와 함께 개방을 부흥시킨 인물로써 절대적인 위명을 구축하고 있는 기인이다.
"이번 일은 전부 이 늙은이가 지시했네."
삼목신개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미간에 있는 또 하나의 눈(目)이 유독 신광을 발했다.
그로 인해 나직한 그의 음성은 중인들의 가슴에 더욱 더 기이한 공명을 울렸다.
실상 그의 음성은 일종의 사자후로써 음공을 발휘하고 있었 다.
때문에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중인들의 귀에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것이기도 했다.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이 정도의 내공을 가진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오오! 삼목노조시여--!"
"천세노조(千歲老祖)!"
바야흐로 장내에는 감격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중인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힘과 덕을 겸비한 지도자다.
그들이 주휘경을 잃고 분개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때문이었다.
무림에 개방의위세를 떨쳐 무당이나 소림에 느꼈던 열세를 만회했던 것도 그였고, 사대신가, 혹은 무림의 정국을 가늠하는 당금
의 삼개 단체와 어깨 겨루기를 시도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무림 최고의 원로이면서 절정고수의 서열에 올라서 있는 삼목노조가 활동을 재개한다면 상황은 다르다.
개방은 더 이상 주휘경의 산화를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삼목신개는 환영하는 개방도들을 향해 담담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오십여 년만에 이렇게 형제들과 재회하게 되니 이 늙은이도 기쁘기 한량없으이."
그의 미간에 있는 또 하나의 눈도 더불어 웃었다.
그는 중인들을 지그시 응시하며 품속에서 하나의 깃발을 꺼냈다.
삼각형의 소기(小旗).
전체가 누런빛을 띈 그 깃발은 길이라야 겨우 한 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분명히 한 쪽 면에는 조(祖), 다른 한쪽 면에는 사(師)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을 대하자분지 안의 군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그 자리에 엎드렸다.
"조사령(祖師令)을 알현하나이다!"
정녕 일대 장관이었다.
천여 명이 훨씬 넘은 거지들이 동시에 오체복지하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피가 끓어오르게 하는 광경이었다.
한편.
진일문과 주서혜도 군호들 사이에 섞여 이 광경을 낱낱이 보고 있었다.
주서혜가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저 자가 조사령을 지니고 있는 한, 일은 틀렸어요. 저들은 설사 아버님이 살아 돌아오신다 해도 등을 돌릴 거예요."
진일문은 빙긋웃었다.
"실망할 것 없소. 저 자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니까. 나도 개방을 위해서라면 저 자가 진면목이기를 바라지만. 만일 그랬다면 주
방주를 모해하는 일 따위는 절대 벌이지 않았을 것이오."
"어떻게 그렇게 단정짓죠?"
주서혜의 물음에 진일문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삼목노조는 벌써 오십 년 전에 이승을 하직했소. 내 눈으로 직접 그의 시신을 확인한 바 있소."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감히 노조를 사칭하는 자가 눈앞에 뻔뻔하게 나타나다니......."
주서혜는 놀라는 한편 치를 떨었다.
상황이 그렇다면 이는 비단 억울하게 죽어간 부친의 명예 회복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개방 전체의 안위가 걸려 있은 즉 목숨을 내걸고라도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 대사건이었다.
진일문은 내심의문이 솟구쳤다.
'변장은 그렇다치고 저 자는 어떻게 조사령을 손에 넣었을까? 설마하니 그 고분 안으로 들어가서 빼내온 것은 아닌지......?'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둥둥둥--!
다시 북소리가세 번 울렸다.
그러자 삼목신개는 뒤로 물러서더니 미리 준비된 태사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를 대신해 장미신개가 앞으로 나섰다.
"이제부터 본인은 사숙 어르신의 명을 받고 한 인물을 선출해 신임방주로 임명하고자 하오."
"잠깐! 멈추시오."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 음성은 장미신개의 외침을 누르며 넓은 분지에 또 다른 파문을 일으켰다.
"이의가 있소이다."
갑작스런 반전에 중인들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일제히 시선을 던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곧 어리둥절한 기색이 떠올랐다.
왜 아니겠는가?
상대는 뜻밖에도 방갓을 써 용모를 감추고 있을 뿐 아니라 허리에 두르고 있는 새끼줄도 불과 네 겹밖에 되지 않는 하급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이 의외의 인물이란 두 말할 것도 없이 진일문이었다.
그를 보자 누대 위에 서 있던 팔대장로들도 한결같이 미간을 모았다.
그것은 네 따위가 무엇 때문에 나섰느냐는 뜻이었다.
그에 반해 진일문의 태도는 필요 이상으로 당당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비굴해 보이지도 않는 담담한 것이었다.
그는 대체로 편안함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생이 알기로 방주의 직위를 이어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신물이 있어야 하오. 그런데 방주께서 지니고 계셨던 신타령과 타구령은 지금 어디에 있소이까? 그 두 가지 신물이 없는 이상 방주로 뽑힌 자라 해도 대권을 행사할 수 없지 않소이까?"
그 말에 군호들은 하나같이 호응을 보였다.
"옳소! 그 말이 맞소--!"
군중심리란 선동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조종이 가능하다.
진일문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기 위해 오히려 공격적인 자세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의도가 적중하자 당황한 것은 팔대장로들이었다.
아무리 지고한 신분이라해도 공개석상에서는 옳건 그르건 중론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목신개가 불쑥 나서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누가 타구령과 신타령이 없다고 하던가?"
진일문은 일순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저 자가 그 두 가지 물건까지도 지니고 있단 말인가?'
때마침 주서혜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안심하세요. 저 자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그 두 가지 물건은 아버님이 넘겨주셔서 제 수중에 있어요."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누대를 향해 말했다.
"신물이 있다면 속히 형제들에게 보여 주시기 바라오."
"그대는 누구인가? 누구의 제자냐?"
삼목신개도 보통의 인물은 아닌 듯 했다.
경황 중에도 그의 어조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진일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조소가 스쳤다.
"심히 죄송한 말씀이오나 본인은 무명소졸인지라 이런 자리에서 이름을 밝힐 수 없소이다. 자칫 이름을 댔다가 귀한 분들의 웃음을 사게 될까 두렵소이다."
삼목신개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본방의 서열이 추상같거늘 그대는 이 사조의 말조차 거스리려 하는가? 어서 신분을 밝혀라."
군호들은 숨을죽이는 일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새롭게 등장한 인물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개방의 유사이래 이렇듯 연속적으로 기괴한 현상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방주의 폐위나수십 년 전에 실종되었던 사조의 재출현도 그렇지만 특히 새까맣게 서열이 낮은 자가 조사뻘의 인물을 상대로 따지고 드는 것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진일문.
일단 장내를 크게 경동시켜 놓은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주서혜의 손을 이끌고 천천히 누대를 향해 나아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미적거리지도 않았다.
그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에 중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 남녀에게 길을 터주고 있었다.
원래 개방에는무수한 기인들이 존재한다.
일신에 기학을지니고 있으면서도 거지라는 신분을 자처하듯 그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때로 사태를 기이하게 변화시켜 나가는 재주도 가지고 있다.
개방의 방도들은 진일문에게서 바로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최소한 개방의 최고 배분인 사조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단단히 믿는 바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느 새 삼목신개에 대한 열광을 접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진일문에 대해 흥미를 보였다.
누대에 오른 진일문은 팔대장로들에게 포권을 했다.
중인들 사이에서 침음성이 터졌다.
그의 이런 태도는 실로 뜻밖이었다.
예를 올려야할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실 삼목신개라면 서열상 대례를 올려야 마땅했다.
그런데 세 개의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는 그에게는 일별도 하지 않고, 단지 팔대장로에게 포권을 하는 것으로써 인사를 끝내 버렸으니.......
분개한 것은 오히려 장로들이었다.
그들의 눈썹이 일제히 곤두섰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 진일문이 삼목신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정녕 타구령과 신타령을 가지고 있단 말씀이오?"
삼목신개가 진일문을 노려 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쇠라도 녹일 듯한 신광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보통 사람이라면 그 눈빛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고 말리라.
하지만 진일문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넘기는 그를 보며 삼목신개는 무겁게 말했다.
"물론 노부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삼목신개는 소매 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한 자 길이의 봉과 가로 세로의 길이가 반 자 가량 되는 목갑이었다.
군호들은 모두숨을 죽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틀림없이 타구령과 신타령이 들어있는 목갑이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의 냉소가 그 뒤를 이었다.
"후후... 그것은 모조품이오."
별로 크지도 않은 그 한 마디는 그야말로 폭탄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삼목신개의 안색이 홱 변했다.
"뭣이?"
진일문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여기에 진품이 있기 때문이오. 본방에서는 사조를 지극히 모시지만 그렇다고 그 분을 위해 진산지보를 둘씩이나 마련한 적이 없소."
"흥! 맞아요.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요."
곁에서 주서혜가 앙칼진 음성과 함께 품속에서 타구령과 신타령을 꺼냈다.
그녀의 손에 들려져 있는 물건을 보게 되자 군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우--!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인가?"
일순 삼목신개의 눈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특히 미간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눈에서는 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장로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단 철검귀옹(鐵劍鬼翁) 송시열을 제외하고는.
송시열이 탄식과도 같은 침음성을 내뱉았다.
"결국 저 아이가......."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곁에 있던 장미신개가 그 음성을 듣고 시선을 돌렸다.
"무슨 소리요? 송장로."
송시열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저 아이를 잘 보시오. 서혜가 아니오?"
"흐음?"
장미신개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도 역시 주서혜를 알아 보고는 흡사 충격과도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팔대 장로들 치고 어렸을 적부터 그녀를 귀여워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를 직접 대하게 되자 가슴이 쓰려 왔다.
송시열은 이미그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연민을 가지고 주서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서혜가 이끌어 갈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송시열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에 의해 구해졌고,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는지를............
그의 심중에서는 소리없이 부르짖음이 일고 있었다.
'만박(萬博)노조가 뒷일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어쩌면 서혜와 같이 온 자는 그 분이 보내신 자인지도 모른다.'
그는 장미신개에게 한 마디를 더 건넸을 뿐이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 그대로 참고 있어 주시오."
어느 결에 그 말을 들었는지 유장로가 거들었다.
"내 생각도 송장로와 같소이다. 우리 기다려 봅시다. 주방주가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이 있소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속고 있는지도 모르오."
"속다니......?"
장미신개의 노안이 충격을 거듭 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의 전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도 어느 덧 현재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었다.
눈이 꿈틀거린다.
그것은 소름이끼치도록 섬뜩한 광경이었다.
삼목신개의 미간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불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는 신체의 기형(奇形)으로 중인들을 압도하기도 했지만 작금에는 하나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분노를 어찌 표현한들 그다지도 무시무시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그는 눈을 통해 상대의 심기를 제압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일문은 이에 개의치 않고 여전히 낭랑하게 말했다.
"신물은 오직 하나뿐이오. 그리고 진가를 구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오. 두 개의 신타령을 부딪쳐 보면 되니까. 후후... 삼목노개, 당신에게 과연 그럴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소."
그것은 두 번째 폭탄선언이었다.
그는 신물의 진위를 분간하는 방법을 제기했다기 보다는 사결의 제자로써 하늘같이 높은(?) 삼목노조를 비웃고 있었다.
덕분에 장내는온통 경악에 휩싸이고 말았다.
중인들은 놀란 나머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때였다.
"발칙한 놈 같으니! 감히 노조께 그 무슨 무례한 언동이냐? 네놈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오분시해 주겠다."
휙휙--!
외침이 울리더니 동시에 삼인이 진일문을 덮쳤다.
아울러 그들은 말 그대로 살수를 펼쳐왔다.
진일문은 가소롭다는듯 혀를 끌끌 찼다.
"쯧! 주방주를 몰아 세우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군. 살인멸구(殺人滅口) 따위의 유치한 수단은 한 번은 어찌 통했을지 몰라도 두 번은 안되오."
무겁게 느껴질정도로 나직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음성은 진동이 커 누구든지 똑똑히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덮쳐온 자들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새로 장로에 임명된 세 사람이었다.
진일문은 몸을 날려 그들의 공세를 피하며 시라도 읊듯 중얼거렸다.
"동쪽을 치고 서쪽을 향해 손을 흔드니 한 쪽이 비었더라. 왼발로 황하를 건너고 오른발로 동정호의 물을 막으니 어찌 교묘하다 하지 않으리?"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말은 중인들로 하여금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천하를 주유하며 비무하기를 일상처럼 즐기던 인물, 그것은 바로 당년의 만박노개(萬博老 )였다.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등장한 것이 주서혜였다.
그녀가 왜소한 신형을 날려 세 장로를 맞이했다.
바람만 불어도날려가 버릴듯 가냘픈 주서혜가 한 손으로는 동쪽으로 공격해 오는 장로를 밀어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반대쪽의 장로를 잡아채 갔다.
이어 두 발을 번갈아 내딛는가 싶더니 왼쪽으로 나갈듯 하다가 방향을 급선회해 오른쪽으로 발길을 날렸다.
펑! 퍼퍽--!
"흑!"
"커억!"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세 장로들이 안색이 변한 채 일제히 뒤로 주르르 밀려나고 있었다.
놀랍게도 주서혜의 쌍장과 두 번의 발길질이 그들을 퇴치해 버린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주서혜의 내력이 세 방향으로 힘을 쪼개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간신히 큰 부상만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망신살만은 어떻게도 모면할 길이 없었다.
연약해 보이는 인물에게 당하고 보니 그들로서는 방도들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와아아--!"
중인들은 이 격돌에 환성을 올렸다.
무릇 인간의 마음은 은연중 약자에게 쏠리게 마련이다.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앞서 있었던 청년의 읊조림이 그들의 사고 방향을 뒤바꾸어 놓았다.
주서혜의 승리는 누가 보아도 진일문의 도움 때문이었다.
그는 만박해초결로 세 사람의 무공에서 보이는 헛점을 재빨리 간파해 내고는 그녀에게 파해법을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세 장로를 물리치는 것은 약간의 무공만 소지하고 있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당사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장로들의 얼굴에도 스르르 기쁨이 번졌다.
송시열의 노안에는 어느 덧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오오! 개방의 충혼은 아직 죽지 않았구나."
한편.
주서혜에게 패한 세 장로들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군호들이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우우우--! 집어 치워라! 적어도 도의가 살아 있는 한 방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비겁한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 장로들이 된 세 사람에 대해 한결같이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런 데다가 체면도 잊은 듯 다시 덤벼들려 하자 이를 가만히 보아 넘기지 못했다.
진일문이 이 때를 이용해 크게 외쳤다.
"동도들이여!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행위요? 개방은 유사 이래 광명정대함을 근간으로 삼아 왔거늘, 장로란 자들이 일개 제자를 상대로 연합 공격을 펴다니! 대체 개방의 명예와 도의는 어디 가서 찾아야 한단 말이오?"
"우우우--!"
누구라서 동조하지 않겠는가?
세 장로를 향한 군호들의 야유는 거의 함성으로 화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진일문은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주서혜의 앞을 가로막으며 손가락으로 삼목신개를 가리켰다.
"여러분! 사실 조사령이 가짜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저 삼목노개가 가지고 있는 신타령이 가짜라면 조사령 또한 가짜일 수도 있지 않겠소?"
그는 자못 엄숙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감히 목숨을 내놓고 천명하겠소. 가짜인 것은 무엇보다 삼목노조를 사칭하고 있는 저 자요."
"맙소사! 그, 그럴 수가......!"
장내는 삽시에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의 세 번째 폭탄선언은 실로 전 개방을 발칵 뒤집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개방은 정체불명인 한 인물의 농간에 의해 철저히 놀아난 셈이다.
과연 방주인 주휘경의 죽음과 그에 따른 엄청난 희생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군호들의 시선은 일제히 삼목신개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악은 물론 당혹과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삼목신개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자신도 진일문이 이런 말까지 할 줄은 예상을 못했던 모양이었다.
"네 놈은 누구냐?"
"그러는 당신부터 정체를 밝히시오."
진일문의 담담한 응수였다.
그는 삼목신개의 분기탱천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추호도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대치한 채 서로를 직시했다.
삼목신개가 가진 세 개의 눈에서는 각기 으스스한 살광이 폭사되었다.
반면에 진일문은 방갓을 쓰고 있어 누구도 그의 눈빛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주하고 있는 삼목노개만은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방갓의 틈 사이로 유현한 빛을 흘려 내는 한 쌍의 눈을.
삼목신개는 일순 가슴이 섬뜩해졌다.
'대체 누구길래 저런 눈빛을 가졌단 말인가? 음성으로 미루어 나이도 젊은 것 같은데, 설마하니 저 정도 나이에 화후가 등봉조극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윽고 삼목신개는 내심 이빨을 갈았다.
상대가 누구이던 분명한 것은 대세가 이미 틀어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죄다 공염불로 화할 공산이 컸다.
삼목신개는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감히 노부에게 되지도 않는 소리를 갖다 붙이다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미루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틀림없다. 내 너를 제압한 뒤에 어떤 자의 조종을 받고 있는지 단단히 문초를 하겠다."
그의 옷이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은은히 진동음이 울리며 무형의 기류가 무섭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이쯤 되자 진일문으로서도 결코 태만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단 주서혜를 뒤로 물러나게 한 다음, 전권으로 나섰다.
군호들의 시선은 삼목신개와 진일문, 두 사람에게 못박혀 있었다.
한 명은 개방의 조사인 삼목신개이며 다른 한 명은 신분조차 밝히지 않은 무명의 사내일 뿐이다.
그런데 기이한것은 의당 삼목신개에게 던져져야 할 성원이 예의 무명인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심중에 던져진 한 가닥의 거대한 의혹 때문이었다.
삼목신개는 왼쪽으로 원을 그리듯 느릿하게 돌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은 여전히 바람을 잔뜩 머금은 듯 부풀어올라 있었다.
진일문.
그의 신형은 제 자리에 우뚝 고정되어 있었다.
방갓에 가리워져 표정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에게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 일전은 양자가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최후의 고비였다.
무릇 승부의 세계란 패자(敗者)의 말을 신임하지 않는다.
진일문은 지금 외견상 만박노개의 후인으로써 전대의 인물인 삼목신개를 꺾어야하는 입장이므로 무조건 이겨야 했다.
삼목신개의 입장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가 누구이든 승리를 쟁취하고 나면 상황은 다시 뒤집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도 역시 전력을 다해 자웅을 겨루어야만 했다.
삼목신개의 눈동자에서 문득 한 가닥 자광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를 본 진일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것은 무슨 무공인지는 모르나 절대로 개방 전래의 무학이 아니다.
사이한 냄새를 풍기는 것으로 보아 필경 상상도 못할 마공(魔功)인 것 같구나.'
진일문은 이를지그시 물며 기다렸다.
어차피 상대의 무공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해 내지 못했던 터라 이정제동(以靜璪)으로 제압하고자 결정을 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흐를수록 삼목신개의 눈에서 뿜어지는 자광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러던 한 순간이었다.
슷--!
삼목신개의 헐렁한 소맷자락 속에서 불쑥 장(掌)이 뻗어 나왔다. 물론 그것은 본능적인 감각을 통해서 느낌으로 전달 받았을 뿐이지, 육안으로 직접 목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삼목신개의 공세는 빨랐다.
한 줄기 칼날 같은 강기가 심장을 향해 쇄도해 올 때에야 비로소 진일문도 그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키며 마주 장력을 날렸다.
콰쾅--!
굉렬한 폭음이일었다.
그 바람에 누대가 흔들리자 절정의 고수들인 팔대장로들마저 어이없도록 휘청거렸다.
당사자인 두 사람은 똑같이 두 걸음씩 물러났다.
이들의 수장 교환이라야 엄청난 속도로 인해 겨우 장로급만이 알아 보았을 뿐, 중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떴다.
도무지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변화가 있기는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자리가 애초에 서 있던 위치와 정반대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한편.
진일문은 크게놀라고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되 그는 심장이 짓눌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놀라기는 삼목신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비공(秘功)을 막아낼 수 있는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이를 거뜬히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뒤로 밀려나게까지 했던 것이다.
두 번째의 접전에는 상황이 거꾸로 되었다.
이번에는 삼목신개가 굳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진일문이 그를 축으로 하여 원을 그리듯 맴돌기 시작했다.
진일문은 상대의 공력 수준을 알아 보고 모험을 감행했다.
즉,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시도해간 것이었다.
하지만 진일문은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천하의 어떤 무공이라도 마음 먹은대로 전개할 수가 있을 뿐더러 손만 뻗으면 여하한 초식도 자유자재로 구사해낼 수가 있었다.
파파팍--!
예리한 경풍이일었다.
진일문이 연달아 십오장을 시전하고 있었다.
삼목신개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십오장의 무시무시한 공세를 놀랍게도 하나하나 정확히 막아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의 신형은 한데 어울려 풍차처럼 돌아갔다.
실로 숨막히는 접전이었다.
두 사람 모두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물고 물리는 공방수세의 형국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무수히 자리가뒤바뀌고 누대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진동을 일으켰다.
그 여파를 두려워한 나머지 중인들은 제각기 아무렇게나 흩어져 잔뜩 몸을 사린 채 관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수가더해질수록 진일문은 점차로 신명이 올랐다.
사실상 고수다운 고수를 만나 공방전을 치뤄본 적이 없는 그는 이 싸움에서의 긴박감을 통해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만박해초결이란 본시 총 육천여자에 이르는 방대한 무학비결로써 자구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오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실전에의 응용이 그 첩경이었다.
아울러 취화상이 전수한 천하제일의 기공, 즉 돼지신공 역시 그에게 더 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 자신도 모르게 격발되어 상대의 진기를 속속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목신개는 시간이 흐를수록 곤혹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상대가 지치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져 가는데 몹시도 놀랐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체내에서 전에 없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진기가 급속도로 소모되며 단전이 텅 빈 듯 허해져 가는 괴현상이었다.
'이 때다!'
진일문은 마침내 그의 정신이 흐트러진 것을 알고는 전력을 다해 공세를 펼쳤다.
파파파팟--!
순식간에 누대는 장영과 권각의 그림자로 뒤덮혔다.
그것은 마치 수려한 무(武)의 제전이 벌어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퍼퍼펑--!
삼목신개의 즉각적인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 바람에 굉음은 연속적으로 분지를 뒤흔들어 놓았다.
"으음......."
삼목신개의 안색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날아오는 권장을 다 막아내지 못하고 십오지 가운데 삼지에 적중 당했다.
그의 소맷자락에는 소리없이 구멍이 뚫렸다.
고수들의 대결에 있어 이것은 곧 패배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삼목신개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기세를 조금도 꺾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괴소를 터뜨리며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흐흐흐... 이 찢어죽일 놈!"
그의 어투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본색을 드러 내려는 것이었을까?
그의 음성은 이제 근엄한 개방 노조의 그것이 아니라 희대의 마두와도 같이 돌변해 있었다.
충격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우두둑--!
삼목신개의 팔이 뽑히듯이 앞으로 튀어 나왔다.
그의 쌍수는 완전히 자흑색으로 변해 있었다.
'사공(邪功)을 발휘하기 시작했군.'
진일문은 내심경각심을 다졌으나 간발의 차이로 그만 어깨에 일격을 맞고 말았다.
펑--!
"윽!"
신음과 함께 그는 휘청 하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삼목신개는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진일문을 덮쳤다.
이 때, 중인들 중 누군가가 공포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아! 마교의 자하공령수(紫霞恐靈手)다."
진일문도 그 외침을 들었다.
그러나 피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후두두둑--!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이 이는 보랏빛의 강기가 뇌전처럼 쏘아져 왔다.
이에 진일문은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며 쌍장을 앞으로 뻗어냈다.
쉬이이잉--!
담담한 운무를품은 잠경이 그의 장심에서 폭출되었다.
그것은 현고자가 전수해 준 태극환허심법을 운용하여 태극십삼세라는 무림 최고의 절초비예(絶招秘藝)를 시전한 것이었다.
쩡--!
뜻밖에도 뒤를이은 것은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성이었다.
"으악--!"
비명이 터지는순간, 시뻘건 선혈이 뿜어져 진일문을 뒤덮었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핏물을 뒤집어쓰게 된 그는 역한 피비린내를 의식하며 재빨리 방갓을 집어 던졌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삼목신개.
그는 손바닥이갈라진 채 안색이 백지장처럼 되어 비칠거렸다.
손바닥은 물론 팔목까지 쪼개져 너덜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전의를 상실한 듯 신형을 돌렸다.
"크아악--!"
연달아 비명이세 차례나 울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놀랍게도 삼목신개가 부상을 입지 않은 좌장을 휘둘러 새로 임명된 세 명의 장로들을 척살한 것이었다.
"저럴 수가!"
진일문은 기가막힌 나머지 입을 딱 벌렸다.
너무도 창졸지간의 일인지라 그 해괴한 사태를 어찌 막아야 할지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여타의 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일문을 위시하여 군호들 모두가 넋을 잃고 있을 때, 삼목신개는 그들의 머리를 타넘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우우우우--!"
긴 장소성만을남긴 채 그는 삽시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깝군."
진일문은 누대위에 선 채 고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끝까지 추적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입장이 못되었다.
삼목신개에게 그 정도의 부상을 입히기까지 그 역시 무사하지만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방갓을 벗음으로 해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여전히 준수했으나 핏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진력 소모도 그렇거니와 적지아니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또 다시 누군가의 외침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것은 일월맹(日月盟)의 영패(令牌)다!"
장내 군호들의시선이 삼목신개가 사라진 곳으로부터 일제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해졌다.
외친 자는 누대 위에서 하나의 금패를 집어 들고 있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금광이 번쩍였다.
그런 그 금패의 앞뒷면에는 각기 일월(日月)과 위진(威震)이라는 글들이 새겨져 있었다.
장미신개가 그것을 보고는 참담한 부르짖음을 토했다.
"그렇다면 삼목노조, 아니 그 간특한 자는 결국 마교(魔敎)의 인물이었단 말인가?"
마교라는 이름이 거론 되자 군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침중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른바 공포의 대상으로써 악의 상징성을 내포한 이름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사대전 이래무림인 치고 그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마교로 지목 받는 일월맹의 영패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첫댓글 즐감요!!!!
지켜 보죠.. 어젛게 되는지...
즐독 하구갑니다
음모를 밝혔으나,,왜 사로 잡지 못했을꼬,,,
``@-@``
감사
늘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굿,,즐감,,,
감사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요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