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올라가
지난 이월에 정년을 맞아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도 가족 앞에서는 여전히 기죽어 사는 처지를 면치 못한다. 퇴직 후 집에서 눈칫밥을 벗어나 아예 내가 어찌어찌 상을 차려 끼니를 해결한 날이 많다. 두 아들은 세월 따라 독립해 나가 멀리 떨어져 나름대로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살붙이 두 녀석에게 남들처럼 든든한 후방 지원군이 못되고 아비는 마음으로만 성원을 보내는 정도다.
십일월 넷째 주말은 큰 녀석이 부모를 서울로 불러올려 걸음을 나서야 했다. 서너 달 전부터 녀석이 다니는 회사 이름으로 받는 혜택인지 부양가족에게 건강 검진을 받는 일정이 잡혀 날짜를 비워 두었다. 의료보험 공단에서 해를 걸러 요식행위로 끝내는 검진과는 수준을 달리하는 듯했다. 아내와는 함께 길을 나서는 기회가 드문데 자식이 불러올리기에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요일 오후 아내와 창원중앙역으로 나가 서울행 KTX를 탔다. 진영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봉하마을과 봉화산 사자바위가 드러나고 삼랑진을 돌아 밀양으로 올라가니 영남루와 남천이 비켜 보였다. 청도와 경산까지는 내게 익숙한 차창 밖 풍경이었다. 까치밥으로 달린 홍시와 수확이 끝난 사과나무도 낯이 익었다. 동대구부터 국토 내륙을 관통한 고속철도를 달려 서울역에 내렸다.
마중 나온 큰 녀석과 용산을 지나니 터를 옮겨온 대통령실과 이태원 거리를 관통했다. 올해 들어 급변한 정치 중심지고 안타까운 사고 현장이었다. 한강 다리를 건너니 석양이 강물에 비치었다. 큰아들네와는 반가운 해후였지만 녀석 집에서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인근에다 정해준 숙소로 갔다. 이튿날 이른 아침 건강 검진을 대비해 장 정결제를 복용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에서 검진을 앞두고 배송되어 온 장 정결제를 복용했더니 점심부터 거른 상태였지만 속이 울렁거려왔다. 위내시경은 공복 상태면 되지만 대장내시경은 소장 대장까지 숙변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간 위내시경 검사는 받아 본 적이 있어도 대장내시경은 처음이었다. 잠을 뒤척이다 새벽을 맞아 날이 밝아오지 않아 큰 녀석과 같이 병원으로 갔다.
주말 새벽 강남 빌딩 사이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우리 내외는 검진을 의뢰한 병원에 일찍 닿은 편이었는데 연이어 접수처는 대기 순번의 줄이 이어졌다.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검진복으로 갈아입고 여러 실을 순회하며 복잡한 단계의 검진을 받았다. 그 가운데 내시경검사가 요체였는데 수면으로 시행해 잠시 잠든 사이 마쳤으나 나는 위벽 헌 상태가 심한 정도라는 판정이었다.
다른 사람은 검사 후 회복실에서 죽을 들었으나 나는 궤양을 다스리는 약을 처방받고 귀가 후 안정을 취하며 하루 정도 부드러운 식사를 권했다. 아내에게도 조직 검사를 한 부분이 있었다. 헬리코박터균 감염 여부가 확인되는 한 달 뒤 내원해 후속 조치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며느리가 죽을 끓여 와 속을 채우고 안정을 취하니 강북에 사는 작은 녀석이 나타났다.
일가족은 완전체가 되어 큰 녀석이 주선한 복요리집에서 저녁 식사를 들었다. 이후 숙소로 복귀해 부모는 작은 녀석과 로비에서 근황이 궁금해 몇 가지 안부를 나누고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강을 건너갔다. 일요일은 큰 녀석이 가족사진을 찍는 일정을 잡아 놓아 다시 만나야 했다. 낯선 숙소에서 이틀째 밤을 보내고 날이 밝아와 큰 녀석 집으로 옮겨가 작은 녀석이 합류했다.
창원으로 돌아갈 시간에 앞서 근교 과천으로 내려갔다. 경마장이 보이던 어디쯤 미리 연락이 닿은 사진사 작업실에서 손주를 포함한 가족 여섯은 사진사의 연출로 밝은 조명 아래 여러 장 사진을 남겼다. 작업실을 나와 점심을 들고 남태령을 넘어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역으로 갔다. 큰 녀석네는 먼저 보내고 작은 녀석과는 얼굴을 더 대면하고는 열차를 타고 어둠을 뚫고 왔다. 22.11.27
첫댓글 아들 둘 영재로
키우느라 수고 많았네
지난날
지리산 가까운
시골 운동장 텐트 속에서
아들 두 놈에게 쥐포 구어 먹이던 생각이 나누나...
참 시간도 빠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