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 없는 입 / 안도현
뻬이징 공항에서 입국 수속 밟으려고 내 앞에 서 있던
그 남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권을 들고 있었다
갈색 썬글라스 속의 두 눈이 번득거렸고, 양복이 후줄근 했고,
대여섯 명 운동화 신은 노동자를 인솔하는 책임자인 듯했는데,
중동쪽에서 일하다가 와서 평양행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말을 좀 걸어보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하고 딱 한번 눈길이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내가 남조선놈이란 걸 눈치챘을까,
어째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남자의 어깨에 얹힌 비듬 몇낱이 내 어깨에도 앉아있을 것이며
내 어깨의 비듬을 또 누군가가 뒤에서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리고 그 남자의 여행가방 속에 어쩌면 많은 달러가 들어있어서
그의 처자식과 조국이 가방을 여는 순간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어떻게 단 한마디라도 말을 나누어야 할 것 같아서
혼자 조바심을 내었다
그의 까맣게 탄 목덜미에서 후끈 사막 냄새가 났고,
그때 나는 그의 흰 와이셔츠 깃에 촘촘하게 일어나 있는
보푸라기들을 보게 되었다 보푸라기,
실낱과 세상이 부딪치면서 일으켰을 잠깐의 스파크 흔적들,
그 남자 혼자 수없이 와이셔츠를 빨아 널고 말리고 다림질을 했을
사막의 밤이 불현듯 내 입속으로 밀려들어와 모래처럼
버석거렸다
나는 물기 없는 입으로 무슨 말을 걸려고 했나, 싶었다
[출처] 안도현 시인 34|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