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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혼자서는 이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11,4ㄴ-15
그 무렵 이스라엘 자손들이 4 말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5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6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
7 만나는 고수 씨앗과 비슷하고 그 빛깔은 브델리움 같았다.
8 백성은 돌아다니며 그것을 거두어서,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빻아
냄비에다 구워 과자를 만들었다.
그 맛은 기름과자 맛과 같았다.
9 밤에 이슬이 진영 위로 내리면, 만나도 함께 내리곤 하였다.
10 모세는 백성이 씨족끼리 저마다 제 천막 어귀에 앉아 우는 소리를 들었다.
주님께서 대단히 진노하셨다. 모세에게도 그것이 언짢았다.
11 그래서 모세가 주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12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13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14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15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말씀의 초대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고기를 달라고 하자 주님께 하소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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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에 싫증을 낸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를 달라고 하자 모세는, 어찌하여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시냐며 주님께 하소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평과 모세가 취한 태도를 들려줍니다. 주님께서는 약속된 땅을 향한 여정에 있는 당신 백성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십니다.그들은 날마다 주님께서 주신 만나에 의지해야 하지만 이 만나는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울부짖는 백성의 불평은 현재의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 대한 한탄과 더 안전한 상태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입니다.“너무나 무거운 짐”이 된 이런 상황에 부담과 위기를 느낀 모세도 주님께 불평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여 달라고 주님께 청할 만큼 실의에 차 있습니다. 이런 부담은 때때로 우리의 의욕까지 잃게 하기에 충분합니다.복음은 예수님께서 가엾은 군중을 보시고 빵을 늘리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군중은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모세가 취한 태도를 보여 줍니다. 사실 처음에 그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예수님께 제안하면서 모든 책임을 면하려고 애씁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해결을 거부하십니다. 상황에 대한 책임을 맡으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없고 실제로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라도 군중과 함께 나누려는 뜻을 드러내십니다.예수님께서는 모세를 본받지 않으시고, 불평하지도 않으시며, 다만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불평은 모든 해결 가능성을 막고 상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갑니다. 반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는, 온갖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기쁘게 극복하게 해 줍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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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물러가 쉬고자 하셨습니다. 가까운 친척이자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더 깊이 준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한적한 곳에서 침잠하고자 하신 예수님의 의도와는 달리 군중은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몰려드는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며 군중이 먹을 빵을 걱정하셨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백성에게 먹일 빵과 고기 걱정으로 짓눌린 나머지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였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며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육신을 살리는 빵을 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으시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고자 준비하셨습니다.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누리게 될 성찬을 ‘빵의 기적’을 통해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구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준비할 작은 정성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의 작은 정성으로 커다란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우리의 봉헌을 구원 사업의 큰 도구로 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미약한 우리의 선행과 기도도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질 때 세상을 구원할 양식이 됩니다.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도 주님의 은총으로 나날이 성장하며 구원의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마음가짐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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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이 없다고 우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시고 대단히 진노하셨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만나와 메추라기에 관하여 전하는 또 다른 성경 본문인 어제 제1독서인 탈출기 16장에는 하느님께서 진노하셨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탈출기와 민수기 사이에는 시나이 계약이 있습니다. 탈출기의 광야는 이집트를 떠나 시나이에 이르기까지 여정이고, 민수기의 광야는 시나이에서 출발하여 모압 평야까지 여정입니다. 그 두 여정 사이에 시나이 산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십계명과 법전도 받았습니다. 애인 관계와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가 차이가 있다면, 민수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미 부부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탈출기에서 백성의 불평이 단순한 배고픔의 호소였다면, 민수기에서 불평은 하느님에 대한 불신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와 징벌을 가져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게서 구할 수 있었는데 모세도 잊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명하실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을 믿었어야 했지요. 주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망설임 없이 빵 다섯 개를 들고 나가야 합니다. 주님을 철석같이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이미 우리 손을 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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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보잘것없는 것도 유용하게 쓰시는 분이시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맥가이버」라는 외국 드라마를 기억하십니까? 그 드라마의 주인공인 맥가이버는 풍선껌, 나뭇가지, 껌 종이, 담배 가루, 안경알 등 일상의 하찮은 것들을 이용해 화학 무기, 운송 수단, 관측 도구 등 요긴한 장치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해서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러한 맥가이버와 같으신 분이 아닐는지요?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그야말로 하찮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그 보잘것없는 것도 예수님을 통하면 오천 명 모두에게 유용한 식량이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도구로 삼으시어 구원 사업을 이끄십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저 보잘것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니, 부족한 우리이지만 다른 이에게 도움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술과 경제적 능력, 사회적 여건 등이 보잘것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맙시다. 예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며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양식, 곧 빵과 물고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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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외딴곳이라 먹을 곳이 없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을 보내야겠습니다.” 제자들은 걱정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배고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시장기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화들짝 놀랍니다. ‘저희가 무엇을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씀입니까?’ 자신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적의 스승님을 곁에 두고도 그런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제자들도 ‘있어야’ 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겨우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구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바꾸어 주십니다. 하찮은 것도 당신께는 기적의 음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마음도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제자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사람들보다 제자들이 더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리 ‘적어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의 ‘무엇’은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 드리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감사히 받아들이면’ 됩니다. 결과는 서서히 나타날 것입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복음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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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고행하실 때,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유혹의 하나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물질 만능주의를 경계하고자 한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배고픈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 때문에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빵의 기적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데도 먹고 살아갑니다. 한 번도 공장에서 일한 적이 없는데도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조그만 씨앗 하나에서 30배, 60배, 100배, 아니 수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늘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혹시 ‘인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즘 젊은 학생들의 언어입니다. 인사이더(insider)의 줄임말로, 아웃사이더와는 다르게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싸’는 무엇일까요? 신났을 때 외치는 추임새가 아니라, 아웃사이더(outsider)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요즘 학생들이 좋아하는 단어는 ‘인싸’일까요? 아니면 ‘아싸’일까요?
‘인싸’라고 합니다. 무리에 잘 섞여서 노는 인기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싸’가 되기 위해서 인싸템을 구입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인싸가 되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관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싸’가 되어 사람들과 함께 잘 어울리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을 통해 진정한 ‘인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만을 쫓으면서 겉으로만 ‘인싸’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남이 ‘인싸’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예외가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는데 죄 지은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제외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모두가 예외 없이 ‘인싸’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신 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시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외딴 곳까지 쫓아옵니다. 한 두 명이 쫓아온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자그마치 5,000명이 넘는 사람이 쫓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쫓아 이 외딴 곳까지 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병자들은 병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진리에 목말라 하는 이들은 참 진리를 보기 위해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기쁨과 위로를 얻기 위해 여기에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외딴 곳이라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으면 저절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어떤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주님께 식사 대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님께서 이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렇게 계속되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부족해 보이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이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주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많이 소유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으며, 어떤 장소에 있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가가 제일 중요한 사실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십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기적을 소망하라. 그러나 기적에 의존하지 마라(탈무드).
부모님의 사랑
저는 강아지 3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 세 마리가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저를 보면 꼬리를 신나게 흔들면서 다가오는 강아지들의 모습이 정말로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예쁜 강아지들이 때로는 짐이 되기도 합니다. 어디 외출을 하게 될 때, 꽤 긴 기간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때에는 밥 주는 것, 산책 시키는 것 등으로 인해 신경이 보통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는 저의 짐이 됩니다.
바로 이 순간, 부모님의 사랑을 헤아리게 됩니다. 저 때문에 어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맛있는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애쓰셨던 그 모든 모습들, 어쩌면 저 또한 부모님께 큰 짐이었구나 싶습니다.
이 사랑을 보지 못하고 늘 당연하게 여겼던 철부지 때문의 모습을 반성합니다. 지금이라도 그 사랑을 갚아야 하는데 어느 순간 부모님이 너무 늙으셨습니다. 그래서 더 죄송한 마음입니다.
간절한 마음·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자 협조자들인 사도들의 존재가 유난히 부각되고 있습니다. 난감한 현재 상황을 최초로 스승님께 보고한 사람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오 복음 14장 15절)
또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스승님께,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을 정확하게 알려드린 사람들 역시 사도들이었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오 복음 14장 17절)
뿐만 아니라 스승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신 후, 그것들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준 사람들 역시 사도들이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오 복음 14장 19절)
동시에 군중들의 식사가 모든 끝난 후 돌아다니면서 남은 조각을 모아들인 사람들 역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남은 조각을 한 군데 모아 보니 총 12광주리였습니다. 이는 곧 12사도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오 복으 14장 20절)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날의 사도들이(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매개자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백성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거나 갈라지게 하는 존재가 되어서 참으로 곤란합니다.
사제들은 백성에게 주님의 뜻을 알려주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백성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들은 대신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청하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사목자는 매일 주님께서 건네시는 생명의 빵, 즉 말씀을 정성껏 봉독하고 공부합니다. 진지하게 묵상하고 풀이하여, 백성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사제는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도 나누어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지상의 빵·물질적인 빵도 골고루 분배해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누가 너무 많은 빵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들을 잘 설득해서 내어놓게 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 못 가진 이들이 어디 있는지 잘 살펴보고, 그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보살펴야겠습니다.
사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 자세 하나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바처럼, 주님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께 간절히 청할 때,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사제들은 우리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힘만 믿는 사도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은총과 기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부족한 존재임을 파악한 사제들, 주님의 권능을 굳게 믿는 사목자들, 나는 그저 나약한 한 피조물이요, 중재자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겸손한 봉사자의 삶에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총의 기적이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외딴 곳, 생각이 끼어들지 않는 곳
전삼용 요셉 신부님
‘테니스의 내면 게임’의 저자 골웨이는 하버드대에서 수십 년간 테니스 코치로 일하면서 신기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학생들에게 “자세가 틀렸어”, “그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해야 돼” 등의 잔소리를 많이 할수록 실수도 더 많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 자신이 내뱉는 잔소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컨대 ‘오늘은 왜 잘 안 되는 거지?’, ‘또 실수했네’, ‘팔의 각도가 틀린 것 같아’,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등 자신을 비판하는 잔소리가 많아져도 역시 실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테니스를 하다가 공이 라켓 한가운데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지요. ‘공이 잘 안 맞는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그럼 공이 더 안 맞게 됩니다. 뭘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공이 라켓의 어느 부분에 떨어지는지만 그냥 관찰해보세요. 그럼 공이 저절로 라켓의 한가운데에 맞게 됩니다. 공이 라켓에 맞는 순간 낮게 날아오는지, 높게 날아오는지, 평행하게 날아오는지 주의를 기울여 관찰합니다. 뭔가를 바꾸려 하지 말고 오로지 공이 어떻게 날아오는지만 관찰하세요. 공을 잘 쳐야겠다는 생각을 멈춰야 해요. 생각이 시야를 가리는 겁니다.’”
[참조: ‘왓칭 2: 텅 빈 공간이 부리는 요술’, 김상운, 정신세계사]
운동을 하다보면 운동은 상대편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자신과 싸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가 일부러 나의 감정을 자극하는 때도 있는데 그때 화를 내거나 어떻게 보복해야 하는지 생각하다가는 제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나의 능력을 방해하는 장본인이 바로 나 자신임을 알 때 운동실력도 향상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운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는 모든 능력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저와 같은 경우는 강론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 이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강론을 쓰려고 하는데 잡생각이 많이 들면 몇 시간을 앉아있어도 강론이 쓰이지 않습니다. 강의를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튀어나와 모든 것을 망치는 때도 있습니다.그래서 강론을 쓰건, 강의를 하건 반드시 먼저 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뿌옇게 흐려진 흙탕물과 같은 정신을 가라앉혀 머리를 맑게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주님이 보입니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보이거나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강론을 쓰거나 강의를 하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도 강론이 안 써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도할 때, 온갖 잡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집중을 하려고 해도 수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연출되고 그 장면들을 쫓아버리느라 기도시간을 다 소비해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머리가 아주 비어버린 것처럼 컴컴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으로 채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면 강론도 잘 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외딴 곳’으로 가십니다. 외딴 곳이란 잡생각이 끼어들 수 없는 곳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임을 당하고 나서 마음이 혼란하실 텐데도 예수님은 당신을 쫓아 외딴 곳으로 함께 들어온 이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먹이십니다. 제자들은 감히 그들을 먹일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감사와 찬미만 남는 곳이 ‘외딴 곳’이고 그 외딴 곳에 머물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또한 그런 고요함 가운데로 초대할 수 있고 하늘의 양식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면 내가 먼저 평화스러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만 외딴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까지도 외딴 곳에 머물 줄 알아야합니다. 마음은 평화라는 외딴 곳으로 향하고 정신은 잡념이 사라져 감사만 남는 곳으로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외딴 곳에 머물 줄 알아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양식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왓칭 2’에서 김상운 저자의 지인이 항상 위통을 앓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김상운 저자는 식사할 때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라고만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이었기에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항상 TV로 뉴스를 보았고 또 동시에 신문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TV와 신문을 번갈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식사 할 때는 식사만 하게 되었고, 그러자 점점 위통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신을 혼란시키는 매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저도 유튜브를 한참 보다가 기도하러 가면 그런 장면들만 머릿속에서 맴돌다 기도가 끝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에게 줄 것도 없어집니다.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외딴 곳’에서 이루어졌음을 잊지 말고,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주님과 감사만 있는 외딴 곳에 머물 줄 아는 연습을 자주 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기껏해야 한 가족이 먹을 만한 적은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셨고 그것을 군중과 함께 나누심을 통해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에 때로는 신세한탄과 더불어 불평과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일수록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자가 말하길 자신이 싫어하는 인간상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타인의 실패를 기뻐하는 자이며, 둘째는 남을 헐뜯는 자이고, 셋째는 용기는 있으나 예의가 없는 자이며, 넷째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 곧 감사할 줄 모르는 자라고 하는 데 이 네 가지 인간상 중에서 가장 싫은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은 하느님께서 정성껏 만들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삶의 순간들에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도 기쁘게 기적의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빵의 기적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페이스 북’을 열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분들을 여기 저기서 쉽게 만난다. 그 중 하나로 ‘민들레 국수집’ 서영남 대표를 만난다. 그는 거리의 사람들을 VIP라고 부른다. 누구고 그들이 찾아오면 국수가 아닌 정성스런 한식과 양식을 준비하여 풍성하게 대접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군중을 가엾게 보신다. 병자들을 고쳐 주신다. 그러다 때가 이르면 배가 고푼 군중을 헤아리신다. 당신을 따르는 무리가 장정만도 5천명에 이른다. 예수님은 무조건 그들을 풀밭에 앉게 하신다. 양을 치는 목자의 일상을 본다. 제자들은 빵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 내어 놓았다. 그리고 이 음식을 축복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이르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이 되고 장정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모았다. 우리는 이를 ‘빵의 기적’이라 부른다.
‘민들레 국수집’은 수많은 거리의 사람이 날마다 배고품을 해결하려고 북적인다. 이들 VIP들은 누구도 예외없이 양질의 음식을 배불리 먹는다. 날마다 식자재의 기적이 일어난다. 아침이면 익명의 천사들이 문 앞에 가져다 놓은 식자재들로 넘쳐난다. 누군가가 먹을 거리를 하나 둘 가져다 놓고 갔기 때문이다. 각자가 가져다 놓는 것은 빵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 분량이지만 하늘을 우러러 감사제를 드린 익명의 사람들은 식자재들을 문앞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민들레 국수집’ 봉사자들은 음식을 만들기 바빠지고 사랑을 담아 나눈다. 수많은 VIP들은 편안한 식탁에 앉아 배불리 먹는 기적을 대한다. 우리는 이를 ‘빵의 기적’이라 부른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14,19-20)
열대야
열대야는 넘어야할 더위이다. 벼가 이삭이 베고 벼이삭이 페고 벼꽃이 피어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더워야 한다. 8월15일, 더울 때 김장배추씨를 밭에 뿌린다. 그래야 벼꽃은 곧 풍요로운 가을을 준비할 것이고, 심겨질 배추는 또 가을을 준비할 것이다.
교회는 내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낸다. 부활을 준비하기엔 수난과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 수난과 죽음을 견뎌내야 부활이 온다. 그 견뎌냄의 동력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이다. 이는 믿음에서 피어난 신앙에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값진 선물이다. 이것이 있어야 신앙으로 견뎌낸다.
생명이 된다는 것, 엄동과 폭염이다. 아이 더워, 아이 춰, 그 속에 피어날 생명은 이미 ‘거룩한 변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수난과 죽음을 견뎌 낼 수 있다. 생명에서 꽃이 있음은 열매를 예견한다. 여름에 핀 꽃은 더욱 강렬하고 아름답다. 죽음을 견디고 피어난 꽃이기 때문이다.
빵의 기적
곽승룡 비오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
오늘날 이 기적은 종종 사회학적인 설명으로 주석이 된다. 이탈리아 밀라노 가톨릭대학교 총장은 종종 다음과 같은 말로 이 기적이야기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기적으로 굶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했다면, 우리도 많이 배고파서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고... 우리가 많이 소유하고 있고, 그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 바오로 6세 역시 이 주제에 관해 자주 돌아보곤 하였다. 발전된 나라들의 사람들은 배고픔과 영양이 좋지 않아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이와 같은 부분들과 비교한다면 진리의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쉽지 않은 해결책에 대한 문제이지만 이 때문에 우리가 무감각하게 변하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나병환자들을 위한 사도인, 라울 폴레로(Raoul Follereau)가 말하기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최고의 선물은 또 다른 가난한 자들이며, 고통당하는 자를 이해하고 도와주는데 일치된 자들이다.
세계 한센병의 날과 폴레로
프랑스 출신의 폴레로(Raoul Follereau, 1903-1977)는 17세에 『The book of love』라는 자신의 첫 저서를 발행했습니다. 전공은 철학과 법이었으나 이 때부터 작가와 시인, 언론인으로서의 생애를 시작했습니다. 22세에는 평생을 함께 한 아내와 결혼하였습니다.
폴레로는 1936년에 아르헨티나 신문사의 요청으로 북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지역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성자인 푸코(Charles de Foucauld, 1858-1916)의 사망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푸코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는 한센병 환자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이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접한 경험은 그에게 평생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자극을 주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한센병 환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여론을 환기시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1942년에 기금을 모아서 아이보리코스트의 아드조페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센터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는 환자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환자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친구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그의 호소력 강한 글과 행동은 한센병에 대한 사회의 태도에 충격을 줄 정도로 강한 것이었습니다.
1946년에는 역시 한센병 환자들을 도와주는 것을 목적으로 단체(Order of Charity)를 조직했고, 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라울 폴레로 재단"이 되었습니다. 1947년에는 하루 동안 이기주의에 대항하는 파업을 하자는 운동을 했고, 1949년에는『원자폭탄 혹은 자비(Atomic Bomb or Charity)』를 15개국으로 출판하여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려라"는 캠페인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1954년에 그는 세계 한센병의 날(world leprosy day)을 제정했고, 지금까지도 매년 1월 마지막 일요일에 이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지는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같은 해에 미국과 소련 대통령에게 한센병 환자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폭탄 하나 제조에 해당하는 비용을 기부하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한센병 환자를 격리시키는 법에 대항하여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한 그는 1970년에 『The Book of Love』를 발행했으며 이 책은 35개국에서 1천만부나 판매되었습니다. 평생을 한센병 환자를 위해 살아 온 그는 1977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폴레로는 비록 프랑스인이었지만 유럽 여러 나라에는 그의 이름을 딴 재단이나 협회를 설립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물론 그가 생전에 한 운동을 지금도 전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식구로 보셨다는 행동실천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이야기.
남자만 오천 명이라면 아낙네들 아이들 다 합치면 만 명은 넘었겠죠.
그 빵과 구운 물고기 얼마나 많아야 됐겠어요. 믿을만한 이야깁니까?
이렇게 많은 군중에게 식사를 제공해본 성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인기문제나 선거운동이 아니라 걱정되어 그냥 제공했다는 거 아녜요.
먹는 입의 숫자를 식구라 하는데 이렇게 많은 이들을 식구로 봅니까?
인류를 하느님 아버지 식구로 보셨다는 결과로 밖에 해석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하늘 아버지 식구로 보셨다는 행동실천 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비록 잘 생기지는 못했지만
편안한 웃음 지을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세상 고통에 찌든 벗의 멍에를
벗겨줄 수 있습니다
비록 말솜씨는 번드르르 하지 않지만
어눌하나마 ‘힘 내!’ 라고
말해줄 수 있는 마음이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의 거창한 말보다
따스한 위로를 전할 수 있습니다
비록 아는 것이 없어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그저 묵묵히 들어줄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구석에 웅크린 외로운 이의
따뜻한 벗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먹을 것 입을 것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하지만
고통스런 얼굴 보듬으며
지친 어깨 감싸줄 수 있는 따스함에
감사하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어
죽음의 길을 걷는 벗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눈길 주지 않는
내 안에 담긴 자그마한 그 무엇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품에 안고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사람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처럼
섬김의 공동체, 섬김의 리더십, -여정, 중심, 기도, 섬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마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힘들고 분주한, 또 하느님의 은총이 가장 풍부한 놀랍고 신비스런 나라가 한국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일 분주하고 힘든 지도자 둘을 꼽는 다면 프란치스코 교황과 한국의 대통령처럼 생각됩니다. 정말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일상을 보면 사생활이 전무한 듯 보입니다. 새삼 공동체를 이끌어 가기가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 깨닫게 됩니다. 얼마전 5년 근무후 이임하게 된 덴마크 리만 대사의 인터뷰 기사를 요약한 대목입니다.
-그는 '2016년 촛불 혁명(2016 candlelight revolution)'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인파에 섞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목소리로 변화를 외치는 모습을 지켜봤다는 그는 "아무런 폭력 없이 한국의 성숙한 민주주의를 보여줬다"고 평가하면서 "아주 특별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역동성은 덴마크 사람들에게 큰 매력요소라고 한다. 사회의 변화 속도가 빠르고 구성원들의 적응력도 높다는 점, 특히 한국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는 음직임 역시 빠르고 역동적이라고 평가했다. 리만 대사는 "덴마크가 한국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긍정적인 요소도 풍부한 참으로 역동적인 대한민국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 이점에서 열린 나라 한국과 닫힌 나라 일본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참으로 민주화의 역사가 전무한 일본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은 찬란한 민주 혁명의 역사를 지닌 참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며 미래지향적 나라입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공동체의 모범이 교회공동체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말은 비단 교회뿐 아니라 이제 밖에서도 자주 회자되는 용어입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공동체와 리더십을 말한다면 섬김의 공동체, 섬김의 리더십일 것입니다.
예전 고 이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의, “서로 섬기십시오.”라는 모토와 더불어 아빠스에 선출되었을 때, “하느님의 심부름꾼 역할을 잘 하겠다”는 소감도 잊지 못합니다.
새삼 섬김의 수도 공동체의 리더인 지도자는 섬김의 사람, 주님 공동체의 심부름꾼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 역시 공동체의 중심에서 섬기는 분으로 자신의 신원을 정의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총아빠스의 다음 대목의 글에도 공감했습니다,
“수도원은 민주제도 아니고 군주제도 아닙니다. 수도원은 영적 공동체이고 장상의 권위는 다수의 단순한 사람들 뒤로 사라질 수 없습니다. 또한 장상은 결코 독재자처럼 행동해선 안됩니다.”
결국 섬김의 리더십을, 섬김의 영성을 말합니다. 여기에 반드시 겸비해야할 것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분도 성인 역시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하면서 무수히 강조하는 섬김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의 말씀에서 섬김의 리더십의 참 좋은 본보기를 만납니다.
바로 모세와 예수님이십니다. 땅위에서 모세처럼 겸손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느님이 극찬한 모세이며,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한 예수님이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뚜렷히 부각되는 교회공동체의 네가지 특징입니다. 1.섬김은 기본이고, 2.순례여정중의 공동체, 3.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4.기도의 공동체, 바로 영적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오늘 이런 영적 공동체의 중심에서 모세와 예수님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단연 돋보입니다. 무엇보다 두분은 섬김의 사람이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변덕스럽고 무지하고 불평 가득한 백성들과 하느님 사이의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유일한 구원의 출구는 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잠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한일간의 관계에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바로 오늘 민수가는 영혼과 육신의 싸움을 상징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광야생활보다는 안정되고 배부르던 이집트 노예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파도 자유로운 주인이 되어 살기보다는 배부른 노예, 하인으로 살아도 좋겠다는 이런 사고 역시 우리의 본능적 유혹이고 이를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학자의 글도 잠시 나눕니다.
“약탈적 왜구, ‘신왜구’로 거듭나- 아베의 ‘경제전쟁’은 그 연장선. 천여년 동안 왜구와의 전쟁을 치러온 민족으로서 우리는 이제 신왜구와의 또 다른 전쟁을 마주하는 중이다. 과거 임진왜란 때는 침략의 길을 열어주고 안내했던 우리 내부의 왜구가 있었고, 국권이 피탈되는 과정에서는 내부의 문을 열어준 일진회등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방식과 형식의 친일 내부 세력이 존재한다. 그래서 불필요한 싸움도 병행되는 중이다. 해양 세력 일본, 신왜구와의 싸움은 오늘날 남북이 공히 공유하는 현실이리라.”
참으로 골치덩어리는 내부의 적, 내부의 분열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혹자는 내년 4.15일 총선을 ‘한일전’, ‘4.15대첩’이 될 것이라 합니다. 한민족의 생존을 위해 자주정신과 일치단결, 외교, 무역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깨어 독립운동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생존 가능한 한민족같습니다. 천만다행으로 한민족에게는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프러스 알파로 더해 진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공동체 지도자는 우선적으로 영적인 사람, 기도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는 얼마나 적나라하고 실제적인지요. 흡사 배수진을 치고 목숨을 건 듯 하느님과 마지막 담판처럼 비장해 보이기도 합니다. 말그대로 ‘기도의 싸움’이요, ‘기도의 전사’인 모세입니다.
“제가 이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자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참으로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에 있는 모세인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결국 답은 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기도하면 선물이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짐입니다. 구원의 유일한 출구는 기도뿐입니다. 기도는 잘하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주어진 처지에서 이처럼 힘껏 솔직하게 최선을 다해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광야 여정중의 모세처럼 예수님 역시 외딴곳의 광야에서 곤경에 처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이 크나큰 시험대에 오른 순간입니다. 모세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의 고요하고 진지한 자세가 감동적입니다. 수천 군중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절망적 상황중에도 지극히 침착한 자세로 기도하십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이자 지성이면 감천이란 진리가 입증되는 순간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은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고,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합니다.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그대로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인생광야여정중의 교회공동체, 우리 수도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 친히 미사를 집전하시고 그의 제자들인 사제가 그 빵을 받아 형제들에게 나눠줍니다. 세계 곳곳에서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될 매일 24시간 계속되는 미사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하루하루 삶의 여정에, 또 공동체의 형성과 일치에, 매일 미사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미사의 중심에 섬김의 모범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자리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 순례여정중인 공동체, 주님 중심의 섬김의 기도공동체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친히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 모두 섬김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아멘.
빵의 기적과 성체의 신비 <마태 14, 13-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성경이나 불교의 시작하는 것 가운데 기적 이야기가 믿음을 주기 위해 자주 나옵니다. 이런 것은 “상징적이냐? 아니면 현실적이냐?”라는 면에서 보면 현실적이면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빵 기적은 앞으로의 성체성사를 미리 보여준 예표며 상징적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성체성사와 연결하여 믿음에 도움이 되게 하려면 기적의 문제를 조금 더 강조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는 옛날이야기며 현대적 의미가 없는가? 우리는 기적을 보고서야 믿음의 삶을 성장시킬 수밖에 없는가? 저는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내가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것은 현실적 기적이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살아서 먹고, 마시고, 보고, 숨 쉬고, 힘을 쓰며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하느님 은총의 힘으로 오늘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면 믿음이 더해집니다.
상담자에게 더욱 믿음을 강하게 가져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물리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지금 당신이 살아있기 위해 공기, 태양의 에너지, 물과 먹거리 등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인 하느님의 현존을 지금, 이 순간에 느끼게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어들이리라”하는 시편의 말처럼 씨를 뿌려도 성자의 원리를 주시지 않으면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 교회와 세상에 남겨준 것 중 가장 크고, 위대하고, 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입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다음 라틴어를 배우면서 빵을 앞에 놓고 “이는 내 몸이다.”라는 라틴어를 큰 글씨로 쓰고 그 종이쪽지를 사제가 될 때까지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이 말 한마디를 통해 순수한 빵이 하느님의 몸으로, 포도주가 하느님의 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어 하느님으로 살게 하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가장 크고, 위대하고, 아름답고, 이로써 하느님이 되는 기적을 미사 때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인 성체성사의 신비를 생각하면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도록 기도합니다. 지금은 비록 미사가 없어도 일상생활이 미사와 이어지는 성체성사의 신비 속에 살고 있습니다. 미사 시간에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와 생명을 체험하며 받아들이고 나누어 주게 됩니다. 부활의 신비가 믿음이 중심이면 성체성사의 신비는 삶의 중심입니다. 미사 때 그 크신 신비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참례합시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한 번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과 결혼하여 가장이 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자식을 낳으니까, 두려워지더라. 내가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구나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러자니 더 뛰게 되더라.” 가장이 되어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가장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날 아버지들에게 존경을 드리고 또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원치 않게 가장이 된 미망인들과 소년소녀 가장에게 주님 사랑이 더욱더 충만하게 내려지기를 간구합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원치 않게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 자신이 짊어지기에는 과도한 짐을 지고 백성들을 이끌어 가야만 하는 모세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이 씨족끼리 저마다 제 천막 어귀에 앉아 우는 소리를 들었다. 주님께서 대단히 진노하셨다. 모세에게도 그것이 언짢았다. 그래서 모세가 주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민수 11,10-15)
사람이 자신이 처한 처지를 보면서 자기 스스로의 삶을 영위해 나가면서 부담스럽고 버겁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때 기억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가 처한 상황과 그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민하고 갈등하고 힘겨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황을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비춰주시고 그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을 믿고 청합니다. 주님, 저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헤아려주소서. 성령을 보내주시어 저희를 이끄시고 저희를 통해 주님의 거룩한 일을 이루소서. 아멘!
작은 봉헌을 통한 풍요로운 열매
김형진 메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 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던 군중의 굶주림을 알아채시고 가엾은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그분의 시선에서 착한 목자의 따뜻한 마음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는 청하기도 전에 우리의 바람을 아시고, 충만히 채워주시는 참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늘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처럼 느껴집니다. 그분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주님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그분께 나아가기가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약함과 죄스러움으로 절망하고 있는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시고 따스하게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이 작은 봉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비록 부족할지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봉헌한다면, 보잘것없는 빵과 포도주를 성찬례 안에서 당신의 살과 피로 변화시켜 생명의 양식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의 작은 봉헌을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복된 양식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양식과 자비'(마태오 14장 13~21)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양식과 자비'
한없이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군중들의 배고픔을 보시고 제자들을 통해 주린배를 채워주십니다.
배고플때 먹는 빵과 물고기는 더없이 좋은 양식이고 그것이 공짜라면 더욱 행운이요 감사한 상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굶주림에 하늘에서 내려주는 양식을 먹게 되었을때 춤추며 기뻐했지만 배가 불러지니 더 좋은것 더 맛난것을 원하고 불평쟁이가 됩니다.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맛이 있지만 배가 부르면 좋은것도 버리지 않나요?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려면 얼마만큼 채워줘야 가능할까요?
양식의 의미는 먹고 살만큼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욕구를 상대가 지속적으로 채워주는것은 못할짓이고 사람 버립니다.
살아갈 만큼 숨쉴만큼 주어지는것이 기본입니다.
그 이상으로 채워지는 모든것은 자비를 입는것이니 감사 또 감사하며 삽시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라." (마태 14, 16)Give them something to eat yourselves.(Mt 14, 16)
김웅태 신부님
+ 찬미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시길 빕니다.
무더위가 절정에 이른 것 같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오늘 복음(마태 14, 13~21)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 14, 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 따라왔는데, 저녁 때가 되어 외딴곳에서 그 많은 군중들의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제자들은 그 군중을 돌려보내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자고 예수님께 건의드렸습니다. (마태 14, 13~15)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내지 말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마태 13, 17)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져오게 하시고, 군중을 풀밭에 자리 잡게 하신 다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니, 군중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다고 합니다. 그리고 먹은 사람은 남자만도 5,000명가량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마태 14, 16~21)
이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레아 호수 북쪽지역에서 일어난 일로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 24, 16)라는 말씀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 해결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배고프다면 그 사실을 알리는 데에 자기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저쪽에 배가 고파 죽어가는 사람 있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얘기해주는 것도 그나마 그 배고픈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이어서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곧 다른 사람들이 좀 해결해 달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던 것이죠. 그것을 예수님께 드리니까 그것을 가지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어 빵의 기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변에 굶주린 사람을 보았을 때, 측은한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했듯이, 내가 가진 것,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그것이 한 끼 분량밖에 되지 않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을 내놓으면 그것들이 모여져서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먼저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가진 것을 내놓을 때, 다른 사람도 내놓게 되고,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며, 빵의 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생각하면서, 빵의 기적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는 마술같은 기적이 아니라, 자기 것을 내놓았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주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해 봅니다.
세상 곳곳에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나의 것을, 그것이 비록 작은 한끼 식사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내놓을 때, 기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나의 무엇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까?
• 나는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나는 무엇을 내놓겠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병영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모습에 머문다. 나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매일 일상을 찬미하고 살아가는가? 하느님께 매일매일 평범한 것을 찬미 감사한다면 매일의 삶이 기적이리라!
오늘 하루도 이런 기적을 보며 살아가고자 무더위의 들판으로 나간다! 하늘의 구름이 매일 나를 일으켜 세우듯이 땅에서 나오는 소출이 기적임을 알아듣는다!
우리 주님의 새로운 법
바르나바가 쓴 것으로 보는 편지에서(Cap. 2,6-10; 3,1. 3; 4,10-14: Funk 1,7-9. 13)
하느님께서는 강제로 구속하지 않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법에 속한 사람들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봉헌물을 바칠 수 있도록 옛 율법의 제사를 폐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데려 내올 때 내가 번제와 친교제를 바치라고 한 번이라도 시킨 일이 있더냐? 내가 명한 것은 ‘이웃을 거슬러 마음에 나쁜 생각을 꾸며 내지 말고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철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 아버지께서 이렇게 하실 때 가지고 계신 그 자비로우신 계획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옛 조상들처럼 곁길로 나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당신께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제사는 통회의 정신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는 당신이 창조하신 이의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찬미로다.” 형제들이여, 우리를 속이려 하는 마귀가 우리 안에 들어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 우리 자신의 구원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것에 대해 조상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왜 큰소리로 외치며 내 앞에서 단식하느냐? 주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을 고생시키는 그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 이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 주고 멍에를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는 것이다.”
우리는 온갖 허영을 피하고 악한 행위의 길을 극도로 싫어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을 확보라도 한 듯 자기 내부로 돌이켜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지 말고 함께 자주 모여 공동 선을 추구하십시오. 성서는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하는 자들아, 유식한 자로 자처하는 자들아,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우리는 도리어 영적인 사람이 되고 하느님을 위해 온전한 성전이 되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법이 우리의 기쁨이 되도록,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묵상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데 노력합시다.
주님은 “차별 없이 공정하게 세상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각자는 자신의 업적에 따라 받을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었다면 그 의로움이 그를 앞서갈 것이고 악한 사람이었다면 악행에 대한 책벌이 그를 앞서갈 것입니다. 악의 괴수가 우리를 사로잡아 하느님의 나라에서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우리 소명이 이미 실현이나 된 듯 죄의 상태에서 잠들려 하지 맙시다.
형제들이여, 다음과 같은 점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인들에게 그렇게도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이 있은 다음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배척당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같은 경우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연민과 신성
이종훈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이며 동지였으니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허망한 죽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무겁게 했을지 충분히 짐작한다. 그래서였을까,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으시고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배를 타고 홀로 외딴 곳으로 떠나셨다(마태 14,13).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고 그분이 도착할 곳에 미리 가 그분을 기다렸다. 그분을 맞은 것은 위로나 환영이 아니었다. 가난과 아픔에서 나오는 수많은 청원이었다.
그런데 그 만남은 예수님의 무겁고 어두운 마음이 연민으로 바뀌는 시간이었고, 하느님이 일하시게 되는 시작점이었다(마태 14,14).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 아드님은 땅에 계셨다. 예수님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섞지도 나누지도 말라고 교회는 가르치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도대체 참 사람이며 참 하느님이신 존재는 어떤 분이셨을까?
어떻게 병을 치유하셨는지 또 어떻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며 겪으셨을 육체적인 피로와 세례자 요한의 허망한 죽음으로 무겁고 어두워진 당신의 마음은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무겁지만 불쌍한 사람들을 만나자 생긴 당신의 연민은 알 듯 모를 듯하다.
연민,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닮은 인간의 마음이다. 사랑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연민으로 죄인들을 회복시켜 낙원으로 데려오신다. 어떻게 기적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하지 말고 그분의 신성은 그분의 인성 어디에 담겨 있는지 찾아보자. 가장 찾기 쉬운 곳은 역시 연민이다.
예수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창자를 끊는 것 같은 아픔이라서 불쌍한 이를 보면 도저히 못 본 척 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 아픔과 그를 도와주는 수고스러움이 싫어서 애써 못 본 척하니 주님의 인성 안에 담겨있는 신성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주님도 하셨으니 저도 할 수 있으리라 믿고 용기 내어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 뒤를 따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십자가를 잘 짊어져서 제 안에서 구원의 신비가 드러나게 도와주소서. 아멘.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평과 모세가 취한 태도를 들려줍니다. 주님께서는 약속된 땅을 향한 여정에 있는 당신 백성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들은 날마다 주님께서 주신 만나에 의지해야 하지만 이 만나는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울부짖는 백성의 불평은 현재의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 대한 한탄과 더 안전한 상태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입니다.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된 이런 상황에 부담과 위기를 느낀 모세도 주님께 불평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여 달라고 주님께 청할 만큼 실의에 차 있습니다. 이런 부담은 때때로 우리의 의욕까지 잃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엾은 군중을 보시고 빵을 늘리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군중은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모세가 취한 태도를 보여 줍니다. 사실 처음에 그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예수님께 제안하면서 모든 책임을 면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해결을 거부하십니다. 상황에 대한 책임을 맡으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없고 실제로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라도 군중과 함께 나누려는 뜻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를 본받지 않으시고, 불평하지도 않으시며, 다만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불평은 모든 해결 가능성을 막고 상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갑니다. 반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는, 온갖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기쁘게 극복하게 해 줍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배를 타고 가셨다. 이렇게 외딴 곳으로 물러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은 당신이 누구시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행동으로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리고자 하셨다. 그러나 군중은 그분을 끝까지 따라간다. 아마 예수님께 큰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그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교부들은 이 빵 다섯 개를 율법서 5권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예언서와 요한의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절) 하셨다. 빵과 물고기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사람들에게 눈을 하늘에 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빵이 나눠지지 않았다면, 그 빵은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사랑의 실천,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빵과 물고기만 주심으로써 그것을 누구나 똑같이 나누게 하신다.
빵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 그들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군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고 만족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군중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이 말씀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열두 사도에게 거룩한 권능이 넉넉하게 남겨졌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아야 했다.
옛날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역시 외딴 곳에서 음식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낌없이 주셨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너끈히 먹이신 것은 옛날의 기적과 같다. 그때 이스라엘은 필요한 만큼 그것을 먹었고, 지금은 빵조각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떼어 나눈 빵과 물고기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거둔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 빵은 이제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 자신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먹는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당장 육신의 욕구를 채워 줄 만나(제1독서), 적은 양으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신 예수님의 빵의 기적(복음), 그리고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에게 내리신 말씀이라는 양식(복음 환호송),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 성체(영성체송)까지 인간의 영육의 목숨을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모든 양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제1독서는 다소 험악한 분의기로 시작됩니다. 척박한 광야의 떠돌이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평은 진실보다 왜곡과 비약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이 생각나는구나!"(민수 11,5)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종으로 살았기에 당연히 대가 없이 "공짜로" 노동력을 착취 당했지요. 거기서 얻어 먹었던 음식은 노동을 위한 생존적 지급분이었을 뿐 그들의 미각이나 취향, 건강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그 모두를 "공짜로" 대접받아 누린 듯 과거를 각색하고 있습니다. 이 왜곡은 불평의 강도를 높이면서 자기 주장을 정당화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를 진실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고, 스스로의 빈곤감과 박탈감을 가중시킬 뿐이지요.
불평의 전염성이 얼마나 큰지 이미 불평은 씨족끼리 모여 우는 소리를 할 만큼 퍼졌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모세까지 하느님께 달려가 불평을 터뜨립니다.
"어찌하여 제가 당신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민수 11,11)
아, 그런데 슬프게도, 모세의 항변 안에도 왜곡이 끼어들었습니다. 본인이 주님께 가장 친밀한 친구 같은 존재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눈 밖에 나서"라고 단서를 붙인 것입니다. 홧김에, 너무 힘들어서 내뱉은 말임을 알긴 하지만, 모세 자신에게도 하느님께도 너무나 아플 표현입니다.
"저에게는 너무나도 무겁습니다."(민수 11,14)
모세에게 연민이 느껴집니다. 얼마나 벅차고 외로웠을지 감히 짐작이 갑니다. 하느님과 각별한 사이긴 했지만 그 역시 오롯한 인간일 뿐이니까요. 제발 죽여 달라는 애원도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뇌에 백 번 공감하면서도 이제는 되물릴 수 없이 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 자손들을 "짐"이라 부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복음도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언급하며 무겁게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마태 14,13)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이기도 하고, 신뢰하는 예언자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도반이기도 하고, 서로를 알아 봐 준 동지입니다. 그러니 그런 그의 죽음이 슬프셨을 것이고, 또 시시각각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예언자의 운명을 견인하는 듯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단 "외딴곳"을 향하십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과 마주해 사랑에 머무르며 위로와 힘을 받고 싶으셨을 것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께는 아버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녹록치 않게 됩니다.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그분을 따라나섰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마태 14,14)
예수님의 발목을 잡은 건 마음의 연민, 즉 연민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신 위로는 잠시 미뤄두시고 그들과 머물며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를 완성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모세가 애써 받아들인 소명의 의무감과 자기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동족의 일탈이 안타깝게도 그로 하여금 동족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게 한 것 같습니다. 반면 사랑, 자기를 버리는 지극한 사랑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 구원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으셨기에, 그분 눈에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군중이 짐이 아니라 가여운 어린 양, 도움이 필요한 작은 양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무거워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처럼)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불쌍히 보시며 먼저 해결책을 찾으십니다. 기꺼이 말입니다!
"스스로" 먹을 것을 찾게 하자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주라고 뚱딴지 같은 요구를 던지신 예수님. 그분은 "하늘을 우러러 찬미의 제사를"(마태 14,19) 드리시는 것으로 모든 인류의 필요를 하느님 발 앞에 펼쳐 놓으시고 아버지께서 직접 개입하시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지요. 그 빵은 곧 "군중"에게 전해져 그들을 배불리고 원기를 회복시킵니다.
스스로(군중)>너희(제자들)>예수님 손>하늘(아버지)로 이어지는 이 상승의 흐름은 다시 예수님>제자들>군중으로 이어지는 하강의 흐름을 타고 땅 위에 내립니다. 육적인 음식이 영혼을 배불릴 선물, 곧 은총으로 변모되는 과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 사가는, 오천명을 훨씬 넘는 군중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20)고 덧붙입니다. 이 몫, 완전한 숫자 열둘로 남겨진 이 몫은 바로 미래 세대인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화답송)
기름진 참밀, 바위틈의 석청은 최고의 음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살아있는 빵 진리이신 예수님, 바위이신 하느님께 맺힌 석꿀인 성자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살리고 위로하고 일으키는 진정한 빵이십니다. 말씀으로,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에서 광야살이로 지친 우리의 원기를 돋우고 생명을 수혈할 진정한 양식이십니다.
오늘 자식들 때문에 지쳐 힘들어하는 한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오늘 사업 때문에 지쳐 힘들어하는 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와 공동체의 수많은 문제들로 지쳐 힘들어하는 교황님과 교회의 장상들을 생각합니다.
오늘 영적인 양식을 배불리 먹이려 온갖 힘을 다 쏟아부어 지친 예수님같은 그런 착한 목자를 생각합니다.
모두 참 생명의 말씀이요 빵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원기를 회복하시도록 기도합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 14,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먹을 것과
나눌 것 사이에
배고픈 우리
이웃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은 많아도
나눌 것이 없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는
우리들 마음을
먼저 보게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실은 나누어야 할
주님의 것들입니다.
주님안에서는
빈곤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풍요로운 시작입니다.
먹이시고 입히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 가져가고
주님께
내어드려야 할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우리에게
올 수 없는 생명의
양식들입니다.
생명은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오늘도 생명을
나누어 주시고
생명을 배부르게
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생명의
본질로
초대합니다.
생명의 본질은
언제나 사랑과
나눔입니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우리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참된
신비임을 믿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한때 집안 살림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2004년 1월에 처음으로 갑곶성지를 시작할 때, 성지 일뿐 아니라 사제관 안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 그리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 등의 살림 역시 자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지의 일에 집중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제관 안에서의 생활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리를 전혀 해 본 적이 없다보니 인스턴트 음식만을 찾게 됩니다. 빨래와 청소는 계속 뒤로 미뤄지기만 합니다. 그래서 어쩌다 방문하신 신부님들께서는 하나같이 이렇게 말씀하시며 혀를 찼습니다.
“이게 사람 사는 곳이니? 돼지 굴이지.”
별 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어떠한 것도 쉬운 일은 없다.’ 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남의 일이 나의 일보다 훨씬 더 쉬워보지만, 이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모두가 쉽지 않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 삶이 어렵고 힘들다 해도 그리 억울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과 함께 결국 내 자신에 대한 존중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습니다. 심지어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찹니다.
이 기적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니까 어렵지 않을 거야.’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별 것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셨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는 말에 가져오라고 하신 뒤에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에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왜 쉽게 하실 수 있는 일을 어렵게 하셨을까요? 그 어떤 것도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쉽다고 무시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빵의 기적을 가져왔으며,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려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가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 어떤 것도 쉬운 일은 없습니다. 어떠한 일에서도 우리의 관심과 노력 그리고 주님께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 커다란 은총이 우리 곁에 자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때로는 손끝 하나, 따뜻이 안아 주는 포옹 한번이 모든 것을 녹일 수 있습니다(고도원).
부모님의 말, 그것의 진짜 의미
* 늦었구나. : 이제 좀 쉬거라.
* 조심해야지. : 얘야, 넌 엄마 아빠에게 소중한 존재란다.
* 급하게 운전하지 마라. : 우린 너 없이는 못산다.
* 숙제해라. : 많이 알아야 편하게 산다.
* 다 써버리진 말거라. : 항상 비상시를 대비해 아껴두어야 한다.
* 네 잠자리를 정리하렴. :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단다.
* 참 잘했다. : 네가 무척 자랑스럽다.
* 강아지 밥 줘라. :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네 몸처럼 돌봐라.
* 네 방 좀 치워라. : 자기를 책임 못 지면 평생 고생한다.
* 나올 때는 전등을 꺼야지. : 아낄 줄 알면 고생 면한다.
* 키가 쑥쑥 크는구나. : 집을 떠날 때가 가까워지고 있구나.
* 계획한 일은 끝내야지. : 너의 타고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라.
하지만, 절대 혼동 되지 않는 한 마디! “아빠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즉,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계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손끝에서 시작되어야 할 이 시대 기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직도 기이한 현상이나 특별한 기적이라면, ‘와!’하고 눈길이 쏠리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어디어디 가면 뭔가 대단한 은혜를 입는다하면, 그 어디든지 거리를 막론하고 장거리 여행을 시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큰 교회 행사만 개최되면 자연스레 초자연적인 뭔가를 기대하며 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위기에서 깨어날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그리고 사도들의 시대와 더불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불치병 환자들이 벌떡벌떡 일어서는 활발한 기적의 시대는 종료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늘만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을 낮춰 우리 일상 안으로 들어와야겠습니다. 뭔가 신비스럽고 대단한 기적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손끝에서 기적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들의 앞뒤 따지지 않는 용서, 우리들의 사심 없는 나눔, 우리들의 바보 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제 우리 손으로 직접 기적을 연출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빵의 기적의 첫 출발점은 가엾은 군중, 굶주린 백성, 결핍투성이의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마태오 복음 14장 14절)
오늘날 가톨릭교회 안에서 예수회, 프란치스코회와 더불어 전 세계 3대 수도회로 손꼽히는 단체가 살레시오회입니다. 돈 보스코의 직제자들인 살레시오 회원들은 현재 전 세계 130여 개국에 진출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녀들을 위한 살레시오 수녀님들의 숫자도 대단합니다. 돈 보스코의 정신과 영성에 매료된 수많은 단체들이 살레시오 가족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교육을 받은 동문들의 숫자는 바닷가 모래알처럼 많습니다.
마치도 기적 같은 거대한 살레시오 가족의 첫 출발점은 의외로 소박합니다. 이탈리아 토리노 시 외곽과 뒷골목을 정처 없이 떠돌던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돈 보스코의 측은지심이요 연민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옛날 수많은 군중들의 먹을거리를 걱정하던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오 복음 14장 16절)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다른 방법, 다른 사람 쳐다보지 말고 우리보고 직접 해결하라고 하시니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호주머니를 한번 탈탈 털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직접 팔을 걷어붙여야겠습니다. 남에게 미루지 말고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내 작은 나눔, 내 보잘 것 없는 기여, 내 손때 묻은 봉헌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걱정하지 말고, 작은 것 하나라도 일단 한번 예수님 앞에 내어놓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 작은 나눔을 기반으로 엄청난 사랑의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내 작은 기여요 나눔입니다.
믿음이 답答이자 약藥이다. -미사와 믿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민수기의 원래 히브리어 제목은 ‘광야에서(In the Wilderness)’입니다. 마태복음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도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광야여정이라 지칭하곤 합니다. 좌우간 오늘 민수기의 상황이나 복음의 상황 속에서의 사람들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아무리 세월은 흘러 문명은 진보되는 듯 해도 인간성은 그대로 인 듯 합니다. 말그대로 문명의 야만입니다. 여전히 현대판 계급제도와 노예제도는 맹위을 떨치고, 곳곳에서 여전히 자행되는 소위 ‘갑질’을 보면서 인간성에 실망하곤 합니다. 강자한테는 약하고 약자한테는 강한 비굴하고 야비한 모습들도 흔히 목격하곤 합니다.
민수기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세의 모습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대로 난민과 같습니다. 마음 속에 늘 빛나는 하느님 비전을, 하느님 믿음을 잃어 버려 추락했을 때 남는 것은 욕망뿐입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적나라한 식욕의 욕망입니다. 참으로 사는 것은 먹는 것이라 할 정도로 절박한 현실입니다.
하느님 비전을, 믿음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노예생활 때를 그리워하며 모세와 하느님께 불평하여 울부짖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모세의 하소연이 참 솔직하고 적나라합니다. 모세의 하소연의 기도가 너무 절실하고 절박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모세의 참 절박한 목숨을 내놓고 하는 기도입니다. 비전도, 믿음도 잃어버린, 도저히 대책없는 육적본능의 욕망만 잡초처럼 무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 진퇴양난의 절망적 상황에서의 모세의 기도입니다.
믿음이 답이자 약입니다.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도 위대한 지도자 모세 조차도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의 믿음에 많이 미달됐음을 봅니다. 민수기와 마태복음이 똑같은 광야의 환경이지만 분위기는 천지 차이입니다. 새 모세라 칭하는 예수님은 이렇게 모세처럼 울부짖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민수기의 백성들과는 달리 영육이 굶주리고 아팠던 복음의 백성들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구원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순교했지만 예수님을 통해 부활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후, 아마 그의 몫까지 살려는 결의를 굳히신 예수님 같습니다.
믿음과 믿음이 만나니 기적입니다. 가진 것 모두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눴을 때 기적의 발생입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에서 나온 간절한 기도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하느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감동한 모든 이들이 가진 것을 다 내놓고 나눴음이 분명하니 이 또한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서로간의 소통과 나눔이, 위로 하느님과의 소통과 나눔이 완전히 이뤄지니 풍요로운 구원의 일치의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셨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미사중 성찬례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민수기의 모세나 거칠기 짝이 없는 백성들과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의 복음 장면입니다. 모세에겐 미사가 없었고 예수님께는 미사가 있었던 것, 이것이 결정적 차이입니다.
믿음이 답이자 약입니다. 믿음을 잃었을 때 파생되는 온갖 육적욕망들입니다. 무지와 탐욕, 교만이 줄줄이 파생됩니다. 믿음의 약만이 마음의 병을 치유합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함께 가는 믿음이요, 기도중에 기도가,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미사입니다.
참으로 미사은총이 아니곤 광야의 백성들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민수기 모세의 광야백성들과 복음의 예수님의 광야 백성들과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여기 미사에 있음을 봅니다. 도대체 미사가 아니곤 광야의 하느님 백성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광야순례여정중의 믿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먹이시고, 하나되게 하심으로, 참 좋은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성공적 광야여정을 살게 하시며, 날로 당신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시편107.8-9). 아멘.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올려놓아야 또 올려놓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기아문제는 해결됩니다. 유엔난민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9억 2,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양결핍을 겪고 있고 매년 1천만 명이 기아 또는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결식아동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아무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긴지라,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하지만,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십니다. 제자들은 자기중심,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 곧 그들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곧 제자들은 그들에게 손해보려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진 것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곧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 없는 것처럼 말하고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것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 그것은 바로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 그것을 보는 눈은 바로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있는 것, 그것을 보는 눈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의 눈인 것입니다. 있는 분,그분이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지금 여기 있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보는 눈이 바로 지복의 눈이요 관상의 눈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집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실현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마태 14,20). 참으로,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차린 밥상이요, 변함없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너 주십니다. 이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아먹어야 할 일입니다. 이를 먹은 이들은 배부르겠지만, 먹지 않은 이들은 배고플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아무리 차고 넘쳐도 이를 받아먹지 않는다면 여전히 배고플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을 받아먹는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가지는 사랑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드리는 감사요, 전능하신 아버지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오로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이 선물의 밥상에서 기뻐하며 그 사랑을 드러내야할 일입니다. 아멘.
은총을 얻기 위한 준비, 감사의 봉헌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더 데레사가 처음으로 거대한 고아원을 켈커타에서 건립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의 일입니다.
전 세계 수많은 대중매체 기자들은 켈커타에서 벌어질 마더 데레사의 활약을 기대하며 여러 질문들을 해 댔습니다. 마침내 실질적인 사항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한 기자가 현재 재정 상황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수도복을 뒤적이더니 3실링을 꺼내 보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돈으로 천원도 안 되는 돈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인 이 3실링이 전부입니다.”
기자들은 농담 하는 줄 알고 진실을 추궁하였습니다.
“정말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저는 이 3실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서는 이것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 3실링으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에서 마더 데레사의 이 믿음을 대중매체로 접한 사람들의 후원으로 건물을 짓고도 많은 돈이 남게 되었습니다.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그들을 먹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농담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하느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위의 마더 데레사가 보여준 믿음이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다 그들은 아직도 인간적인 계산에 머물러 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보고합니다. 다윗도 스스로의 힘으로 골리앗을 쳐 이긴 줄 착각하고 나라가 안정적일 때 병적조사를 해서 하느님께 큰 벌을 받습니다. 신앙인에게 계산하며 산다는 것은 어쩌면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3실링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빵과 물고기를 하늘로 들어 올리며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의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바로 ‘믿음이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부족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자세’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버는 돈으로는 우리 가족 먹고 살기도 빡빡합니까? 참새도 먹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식들을 굶기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감사히 봉헌하면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남게 됩니다.
성당을 짓기 위해서, 적어도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봉사자들과 돈이 필요합니다. 봉사 활동을 하라고 부르면 “능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답니다.
물론 우리는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이것이 겸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의 능력을 수학적으로만 계산하려는 오늘 사도들과 같은 교만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왜 우리는 3실링을 보며 거대한 고아원을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돈으로 보지 못하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보며 2만 명을 능히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아직도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교만이 우리 안에 잠재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한 번은 마더 데레사가 미국에 있는 후원회 본부에 회의 차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에서는 현재 재정 상황이며 앞으로의 후원 계획에 대해 열띤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장시간 동안 그 논의에 지루해 하다가 각 사람들 앞에 놓인 물병을 보고 시중드는 사람에게 그 물 한 병에 얼마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 병에 3달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마더 데레사가 갑자기 일어나 한 마디 하였습니다.
“오늘부로 이 후원회는 해체합니다.”
후원회를 해체한다면 마더 데레사가 하는 사업에 큰 차질이 있을 것은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모든 것이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너무나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인간적인 교만으로 계산하는 삶을 넘어서서, 감사로이 찬미하고 봉헌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크기만큼 우리 안에 은총으로 채워집니다.
헤로데의 잔치와 외딴곳의 생명의 잔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안티파스의 왕궁에서 벌어진 화려한 잔치를 계기로 죽음을 맞습니다. 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십니다(14,13).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쾌락과 탐욕과 악으로 채워진 왕궁과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외딴곳’에서 천상잔치의 예표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많은 군중들은 권세와 재물의 집합체인 왕궁이 아니라 ‘외딴곳’에 계시는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들은 식민통치자의 지배가 아니라 병의 치유를 바란 것이지요. 그들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를 갈망하였고, 부당한 권력에 의한 비참함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회복을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까지 따라나선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14,14). 이처럼 치유와 해방, 그리고 인간화는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의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으로’ 사랑의 목마름이 있는 곳에 사랑을, 해방이 필요한 곳에 자유를 거저 주십니다.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도 이미 지나버렸고, 더구나 외딴곳이어서 군중들의 식사가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14,15) 하고 말씀드립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14,16) 하십니다. 인간은 생명을 품지 않고는 떠날 수 없는 생명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다며 난처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져오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제자들과 군중들의 참여로 영원한 생명의 잔치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주게 하십니다(14,19). 찬미에 이어 빵의 쪼갬과 나눔은 모두를 생명의 충만함으로 이끕니다.
오늘 복음의 빵의 기적은 최후의 만찬을 상기하도록 해주며, 영원한 생명의 잔치를 상징합니다. 이는 천상잔치의 예표라 할 수 있고 성체성사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이 잔치는 바로 앞 대목에 나오는(14,1-12) 헤로데의 잔치와 대비됩니다. '헤로데의 잔치'는 교만과 오만, 탐욕과 쾌락, 음모라는 음식이 차려지고 죽음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이 '외딴곳의 잔치'는 치유와 해방, 신뢰와 봉사, 그리고 찬미와 나눔의 음식이 차고 넘치며, 풍요로운 생명을 낳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내가 몸담고 있는 가정과 사회에는 늘 이런 ‘헤로데의 잔치’와 ‘외딴곳의 잔치’가 펼쳐집니다. 나는 어떤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몸은 교회에 두고, 마음을 하느님을 향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순간 헤로데의 잔치와 같은 상황에 나를 내맡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빵이 늘어난 기적적인 현상이나 외형 그 이상의 생명의 잔치의 의미를 깨달아 살아내도록 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원생명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생명인 빵을 쪼개고 나누는 잔치로 드러나야 함을 기억해야겠지요. 내가 사는 삶의 터가 헤로데의 잔치가 아닌 천상잔치가 되려면 교만과 탐욕과 쾌락을 버리고, 제자들처럼 기꺼이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연민의 증인이 되고, 다른 이를 위하여 ‘쪼개진 빵’이 되어, 더욱 정의롭고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의 건설을 위해 헌신하는 바로 그곳이 ‘외딴곳’의 풍요로운 잔치집이 되지 않을까요?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을 시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 이야기였습니다. 복음서는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것을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가 그대로 사실이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 기근을 해결해 주는 분으로 잘 모셨을 것입니다. 한두 사람이 먹을 식량으로 오천 명의 기근을 해결하였습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 보도라고 가정하면, 우리에게는 많은 의문들이 생깁니다. 복음서들 전체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은 기적적 무료 급식을 한 인물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친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인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반대로,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며 유혹하는 자의 말에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대답하셨습니다.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마태 6,25)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은 배부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지 않고,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사실 보도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는 더 있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입니다. 그곳에 과연 오천 명도 더 되는 사람이 운집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가? 외딴 곳이라고 말하면서 먹고 남은 것을 담은 열두 개의 광주리는 어디서 나왔는가? 현대적 음향 시설도 없고, 자동 배식 장치도 없는 시기에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배식할 수 있었나? 오늘의 이야기는 이런 의문들에 답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사셨던 인물이고,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그분에 대해 남긴 문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한 신앙의 문서들입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회상도 있고, 그분이 가르친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도 그들의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당신을 믿는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모세의 가르침을 중심축으로 한 문서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도 있고,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그들이 체험한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해 구약성서의 표현방식을 빌려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군중들을 헤쳐 보내어 각자가 자기 먹을 것을 마련하도록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의 모세와 같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 하느님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병자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열왕기(2열왕 4,42-44)에 따르면 그 옛날 엘리사 예언자는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의 사람들을 먹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엘리사보다 훨씬 더 큰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의 복음에서 빵은 4분의 1로 줄여서 다섯 개라고 말하고, 먹은 사람은 50배로 늘려서 오천 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가진 것을 나눕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병고와 굶주림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가엾이 여기며, 고치고 먹이는 은혜로운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각자가 자기 병을 걱정하고, 각자가 자기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웃을 가엾이 여깁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도 하느님이 베푸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나눕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살아 있는 생명이고 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면, 우리 주변에 굶주림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는 말은 나눔은 그렇게 풍요롭다는 뜻입니다.
물론 오늘의 복음에는 초기신앙공동체가 실천하던 성찬에 대한 기억도 들어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말은 신앙공동체가 성찬을 위해 사용하던 표현양식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에 있는 성찬, 곧 성체성사는 나눔의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가엾이 여기고, 베푸시는 분이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신앙인도 이웃을 가엾이 여기고, 이웃과 나눌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가 찾는 정의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할 수 있습니다. 받은 만큼 주고 준만큼 받아내는 것이 정의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정의로운 사회, 공평한 사회를 추구하면서, 그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의와 공평은 하느님을 기준으로 합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최후 심판의 이야기(마태 25,31-46)는 정의와 공평을 위한 하느님의 잣대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웃을 가엾이 여기고 축복하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인간이 지향하는 정의와 공평은 부족합니다. 인간이 제도적으로 공평하게 만들어서 정의로운 사회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지향한 공산주의가 얼마나 냉혹한 사회를 만들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엾이 여김을 모르는 냉혹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은 가엾이 여기며 나누는 따뜻한 숨결을 인간 생명 안에 불어넣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이야기는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 나누어서 모든 이를 풍요롭게 하는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성찬에 임하는 우리도 그렇게 가엾이 여기고 가진 것을 나누며 살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최원석
대프리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구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런말이 나온것 같습니다. 저도 대구 생활한지 만 2년이 되어가는데요 엄청 더워요.. 이 더위에 서로 불쾌지수도 높은데 서로를 배려하는 하루가되었으면 해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그 유명한 오병이어에 대한 기적을 봅니다. 오병이어 ...캘거터의 마더데레사 성녀등애서 연관이 되는 것이 있어요 .. 시작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때는 별것없어요..이것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의 처음 이야기 도입부터 동일한 뉴양스를 보이면서 시작이되었어요 .. 주님께서 당신을 찾아서 외딴곳으로 온 사람들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서 그들을 돌보아주십니다. 그리고 때는 저녁이 되어서 다들 식사를 해결해야될 시간이지요 현실적으로 볼때 이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손으로 어찌 해결하지? 하는 마음이 들어 이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 보냈다가 나중에 다시오라고 하면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말을 하지요 주님 저녁도 되었고 식사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오늘 온 사람들을 다 돌려보냈다가 다시오라고 하는 것이 어떨런지요 ? 현실적으로 볼때는 그것이 당연해 보였지요 ..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다른 이야기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그런데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은 물고기 두마리와 빵이 다섯개 고작 그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진것을 주님에게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그것을 나누어주게 하십니다. 옹절한 마음.. 나 이것 밖에 없는데 그런 마음.. 내것으로 무엇을 하겠어 하는 마음이 제자들의 마음이라면 주님은 그것이라도 ..내비록 가진것은 별것없으나 그것을 당신께서 쓰신다고 하시니 기쁘게 내어 놓겠습니다. 라는 마음을 주님은 원하신것이었지요 .. 닫힌 마음..시선이 나로 행하는 마음을 당신은 우리로 그리고 그들이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마음을 당신을 향한 마음으로 돌리시지요 ..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나누어지게 하십니다. 그것이 기적을 이루는 것이지요 .. 하느님의 것은 처음에는 별것 없어 보여요 ..처음에 저것이 무엇이 되겠어라는 의구심이 들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이 나신 나자렛에서 무엇이 되겠어? 라는 인간의 잣데 ..크고 화려한것에서 무엇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들의 신으로 생각하고 있지요 .. 그런데 크고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곳에서는 요한의 죽음과 같으 것이 나오지요 ..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권력과 재산 .. 명예에 집착하여서 그곳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 하지만 그 결과는 요한의 죽음으로 ..그곳에 나오는 것은 알게되지요 .. 인간의 힘에 의하여서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주님에 의하여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비록 가진것은 별것 없으나 그것이 주님에게 온전히 바친다면 그것을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더 귀하게 쓰여지고 결과는 창대하리라는 것을 보여주시지요 ..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것에 대하여서 상대와 비교하여서 원망하기 보다는 주신것에 감사하고 이것이 당신이 원하시는 바데로 쓰여지길 기도하는 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바 같습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먹었으면 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마태오.14,19-20)
김종오신부님
여자들과 아이들을 제외하고 남자만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이 먹기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너무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음식’을 앞에 두고 가장 먼저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렸습니다.
찬미와 감사는 부족하지만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 찬미와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우리의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우리가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가난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 드리는 찬미는 우리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지 못하면 찬미를 드리지 못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아무리 적어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태어났을 때 빈손으로 태어났음을 잊지 않는 가난한 마음은, 세상을 떠날 때도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가지기보다 끝없이 나누고 비우려는 열정이 더 큰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받아들이며 배우는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아무리 자신이 가난해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잊지 않습니다. 아무리 적게 가져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을 기억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기적입니다.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에게도 부족하지만 이미 가진 것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겸손한 마음이 나누는 하늘의 축제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계속 도와주려면, 돈을 많이 내는 신자들이 더 많아져야겠네요?” 하는 다소 부담 섞인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수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보면 합당한 말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 많은 신자들이 늘어나게 되면 부자들의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은 도움을 받으러 올 수는 있어도, 교회에 신자로서 오기에는 조금 낯설고 부담스럽게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십시일반으로 나누게 되면 가난한 이들도 들어와 함께할 수 있는 천주교회가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고픈 군중들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는 다 모아도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더 준비하지 못했느냐!’ 라든가, ‘빨리 집에 가서 장롱에 꼬부쳐둔 돈 꺼내서 먹을 것 사와라’ 또는 ‘빚내서 사와라!’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절) 하시며, 그냥 제자들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을 받으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19절)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의 결과로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20-21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그러면 얼마나 나눠야 하는가? 우리가 가진 것을 다 바쳐야 하는가? 교회는 자기 스스로 검소하게 살면서, 가난한 형제들과 나누며 살도록 안내합니다. 그런가 하면, 천주교회는 제도적으로 각 본당 단위의 교회 공동체가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비율을 본당 전체 예산의 10%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부자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가난한 교회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이들과 풍요하지 않은 이들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 때 비로소 우리 교회가 모든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며, 주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주 예수님께서 채워주시는 가난을 살아갑시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비록 잘 생기지는 못했지만
편안한 웃음 지을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세상 고통에 찌든 벗의 멍에를
벗겨줄 수 있습니다
비록 말솜씨는 번드르르 하지 않지만
어눌하나마 ‘힘 내!’ 라고
말해줄 수 있는 마음이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의 거창한 말보다
따스한 위로를 전할 수 있습니다
비록 아는 것이 없어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그저 묵묵히 들어줄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구석에 웅크린 외로운 이의
따뜻한 벗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먹을 것 입을 것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하지만
고통스런 얼굴 보듬으며
지친 어깨 감싸줄 수 있는 따스함에
감사하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어
죽음의 길을 걷는 벗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눈길 주지 않는
내 안에 담긴 자그마한 그 무엇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품에 안고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사람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처럼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 1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의
공동체안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모든 순간들이
놀라운 은총의
순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배고픈
우리에게 식사를
권하십니다.
모두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삶의 방향을
머물러 함께
해야할 예수님께로
향하게됩니다.
우리와
만나시기위해
빵과 물고기의
나눔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를 살게하시고
우리의 마음또한
살게 하시는 분은
다름아닌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이끄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버려진 것까지
의미있게 만드십니다.
매 순간이
사랑과 감사의
순간입니다.
허기진 우리에게
가장 진실한 사랑으로
먼저 다가오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가장 행복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와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정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기도와 삶은 하나입니다. 수도자는 물론이고 기도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주인공인 모세의 삶에서 하느님을, 기도를 뺀다면,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을, 기도를 뺀다면 무엇이 남을 까요? 완전 허무일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 더하기 나는 사랑의 충만이지만 하느님 빼기 나는 텅 빈 허무입니다.
진정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화답송 후렴처럼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여 인간을 정의하여 ‘기도하는 종교적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평범한 주제인 ‘기도와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삶에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기도입니다.
모세는 물론 예수님의 삶에 중심과 질서를 잡아 준 것은 기도였습니다. 공동체는 물론 개인의 중심에 자리잡은 기도소였습니다. 모세에게 하느님과 만나는 ‘만남의 장막’이 그 삶의 중심이었다면 예수님에게는 ‘외딴 곳’의 기도처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예수님은 밤마다, 때로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기도하기 위해 고요한 외딴 곳을 찾으셨습니다. 모세 역시 오늘 말씀에서 보다시피 만남의 장막에서 기탄없이 솔직하게 심중의 말을 털어 놓습니다.
기도소는 하느님과 만나 대화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휴식의 장소임을 깨닫습니다.
분주하고 힘든 일상에서 이런 눈에 보이는 가시적 중심의 기도처는 필수입니다. 이런 기도처가 삶의 중심에 자리잡을 때 삶의 질서도 저절로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둘째, 공동체와 유리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애당초 공동체와 하나된 공동체적 인간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만남의 장막’이자 ‘외딴 곳’의 기도처요, 우리의 이 거룩한 미사가 거행되는 ‘성전’입니다.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공동체 중심에서 하느님과 담판의 기도를 하며 예수님은 공동체의 중심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군중의 중심이 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우리의 거룩한 성체성사를 압축, 상징하고 있음은 다음 묘사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셨다.’
그대로 미사를 집전하시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똑같은 주님께서 지금 여기 공동체의 중심에서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새삼 외딴 곳에서의 ‘개인기도’와 공동체가 함께 미사를 드리는 ‘공동기도’가 조화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셋째, 기도에는 절대 지름길이 없고 비약도 없습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항구해야 합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워가면서 성장, 성숙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모세의 불같은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너무나 적나라하고 인간적인, 또 공감이 가고 위로가 되는 기도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하십니까?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이런 ‘기도하는 지도자’를 둔 이스라엘 자손 공동체는 행복합니다. 기도는 정직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모세의 기도처럼, 때로 이렇게 격렬하게 하소연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기도입니다.
그 믿음이 좋다는 모세가 이런 기도를 하니 하느님도 놀라셨을 것입니다. 이 또한 기도에서 통과해 가야 할 과정이요 모세의 믿음 부족을 반영합니다.
똑같은 광야의 역경 중에서 그 대처하는 모세의 모습이 복음의 예수님과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수많은 굶주린 군중을 대하면서도 예수님은 전혀 동요됨이 없이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 잡은 후 조용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일으키시어 모두를 배불리 먹이십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모세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의 자세가 하느님은 물론 군중을 감동시킨 결과의 기적임이 분명합니다.
애당초 좋은 믿음은 없습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워 성숙해 가는 믿음입니다. 모세 역시 이런 믿음 부족한 자신을 체험해 가면서 더욱 겸손한 믿음을 지니게 됐을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이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하느님이요, 예나 이제나 변함 없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모세와 예수님이 만난 하느님이라면 우리가 못 만날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또 기도를 잘하고 싶은 간절한 깨끗한 욕심은 얼마든 좋습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깊은 일치를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두려움
차풍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고기를 달라고 보채는 백성들을 혼자 감당하기엔 버거웠습니다.
모세는 끊임없이 요구하고 불평하면서 정작 서로는 돕거나 고통을 나누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더 가지려 싸우고, 불평과 불만으로 하루하루를 허비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삶에 지쳐 갔습니다.
남자만도 오천 명… 제자들은 모세와 같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도 모세처럼 하느님께 울부짖으며 원망 속에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어찌 우리가 먹이고 돌보겠습니까!
게다가 이들의 마음을 돌려 하느님께로 향하게 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전해 주는 일이 바로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마련해 주신 그 음식을, 다 함께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무리지어 앉게 하신 후 제자들을 시켜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먹이도록 하셨고, 남은 음식만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두려움은 용기로 변합니다.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민수 11,15)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때로는 내가 맡은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족 식솔들을 먹여살리는 일 또한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부모를 모시고 시집식구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며느리로서의 일도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책임자 일도 쉽지 않고 회사나 시설의 장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모세처럼 말하고 싶습니다.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그렇습니다.
무거우면 무겁다고 말해야 합니다.
혼자 무작정 낑낑대며 힘들어하고 짓눌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내가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면 하느님께 넋두리 하십시오.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그만 내려놓고 싶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가 도와주마~
내가 너와 함께할테니 힘내거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힘들고 지치고 괴로워도 화이팅입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받아들여야 할
우리 삶의 빈곤한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가난함을 주신 것은
나눔의 기쁨을
성체성사처럼
살게 하기위함입니다.
나눔은 우리의
복음입니다.
나눌 때
소중한
많은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눌 수 있기에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함조차
풍요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더 가난해질수록
더 간절해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가난함을
행복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내놓을 때
만나게 되는
참행복입니다.
자기자신을
먼저 주님께
내려놓는 것이
감사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를
깨닫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시간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비안네 사제처럼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처럼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많은 실패와
아픔을 통해
성장하는 것입니다.
깨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익숙한 것들을
떠나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나가야 할
호수 위도
의심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지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언제나 믿음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한 번도
물에 빠진 적이 없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의심 속에
빠져들지라도
다시 믿음으로
호수 위를 걷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흩어져 있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로 모아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는
우리들에게 당신 삶을 통해
말씀을 건네십니다.
사람의 길은
다시금 믿음의 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센 바람속일수록
주님을 더더욱 믿는
믿음의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요즘 날씨가 참 후덕 지근합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며칠 전에 저 역시 너무 더워서 함께 걷던 일행과 팥빙수를 먹기 위해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메뉴판을 보니 ‘옛날 팥빙수’라는 제목의 팥빙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팥빙수에는 여러 가지 과일이나 젤리, 아이스크림 등으로 꾸며서 아주 화려하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순수하게 팥과 떡 그리고 미숫가루로 만들어진 옛날 팥빙수가 먹고 싶어서 주문했습니다(사실 다른 것보다 2,000원 쌉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주문한 ‘옛날 팥빙수’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영 맛이 없습니다. 달달하지도 않고 그냥 얼음 덩어리만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일하는 직원에게 맛을 직접 보라면서 항의했습니다. 맛을 본 직원이 깜짝 놀랍니다. 그러면서 아르바이트 직원이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팥을 너무 적게 넣고 부드러운 맛을 내는 연유도 넣지 않은 것 같다는 변명과 함께 다시 해오겠다면서 문제의 ‘옛날 팥빙수’를 가지고 갔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제대로 된 ‘옛날 팥빙수’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맛있게 먹었지요.
연유를 넣지 않는다고 팥빙수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팥을 조금만 넣었다고 해서 팥빙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맛이 없을 뿐인 것이지요. 그러나 팥과 떡, 연유와 미숫가루 등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었을 때 맛있는 팥빙수를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어쩌면 이렇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세상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돕기도 하고, 또한 받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해야 할 몫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물론 내가 하지 않는다고 시간이 갑자기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만들고자 하셨던 멋진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이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듣고 보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이제 늦었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주라고 말씀하시지요.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제자들이 해야 할 몫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니 있는 그대로 내어 놓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배 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하시지 않습니다. 주님도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의 일을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일을 행할 때,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다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닌, 나의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대단한 모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헬렌켈러).
놀라운 주님의 말씀
저는 책을 두 번 읽지 않습니다. 다시 읽으면 좋은 책도 많지만, 처음 읽을 때의 새로움을 느끼기가 쉽지 않아서 굳이 책을 두 번 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성경은 몇 번을 읽어도 매번 새롭습니다.
저는 지금 13년째 인터넷에 매일의 묵상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묵상 글의 기본 토대가 되는 그날의 복음말씀은 3년을 주기로 똑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님께서는 3년만 열심히 강론 준비를 하면 걱정할 것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3년을 주기로 예전에 썼던 강론을 또 사용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저는 매번 다른 강론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강론에 약간의 비슷한 내용이 들어갈 수도 있지만, 매번 다른 각도에서 복음말씀을 바라볼 수 있기에 다른 강론을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매번 우리에게 새로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한 번 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긴 성경에 관해 쓴 책이 전 세계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수백만 권입니다. 이는 성경의 그 의미를 그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주석서와 성경 안내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 소홀히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주님의 말씀이기에 소홀히 하면 할수록 손해는 내 자신에게만 주어질 뿐입니다.
언제나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성경을 멀리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스로를 살리는 길은
작은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이
진정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사소한 것이 실상 사소한 것이 아니듯
모든 복음은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최상의 것이 됩니다.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감사할 때 좋은 것이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의 마음은 언제나 나누는 이들을
더욱 충만케합니다.
생명의 선물은 이렇듯
부족한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처럼
삶의 조각들을 모으니
감사아닌 것이 없습니다.
가장 좋은 믿음은 감사입니다.
우리를 가득차게 하는
감사의 조각들을 모으는
감사의 하루되십시오.
예수님의 행복 공식
이수환 신부님
빵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은 사람들의 표정은 어떨까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아, 배부르다.’ 하면서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행복한 모습입니다. 행복한 모습이 있기까지 그 과정을 한번 살펴봅시다.
먼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십니다. 저녁때가 되자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도를 드린 뒤 나누어 줍니다. ‘마음먹고 작은 것을 나눕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행복 공식이라고 합시다. 어디든지 적용되기 때문에 공식이라고 합니다. ‘이 작은 걸 줘서 될까?’, ‘이걸 주면 나를 뭐라고 할까?’ 이런 생각일랑 잠시 접어두고 그저 작은 것을 나눕시다. 마치 미사 때 받아모시는 성체처럼 말입니다. 그 작은 것을 통해 우린 영원한 생명을 얻고 행복하잖아요.
저는 이 예수님의 행복 공식을 어느 할머니한테서 배웠습니다. 주일 미사 후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당에 있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시다가 주머니를 뒤적뒤적하시더니 사탕 세 개를 주시는 겁니다. 저는 그걸 받고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신자들은 사제에게 무언가를 주실 때 참 많이 고민합니다. ‘이거 좋아하실까?’, ‘가격이 싼 건 아니가?’ 등등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을 나누었습니다. 공식에 딱 맞아떨어지죠? 그러면 행복한 제 모습도 그려집니까? 이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어느 사업가가 갑자기 중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 그는 오직 목숨만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하겠다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그는 마침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지요. 그는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수십 년 동안 일궈놓은 사업이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사업을 돌보던 사람이 잘못해서 사업이 망하게 된 것이지요. 수십 년간의 수고와 땀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을 보고 그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하겠다는 처음 마음은 완전히 잊어버렸지요. 대신 살아야 할까 죽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고 그는 그 친구에게 자신의 사업이 망했다며 원망 가득한 말을 쏟아 붓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절망적인 상황이라 살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습니다. 이에 묵묵히 듣고 있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보다는 내 조건이 더 불행한 것 같은데?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몇 년 전의 사고로 두 다리를 잘랐지. 그래서 비록 의족을 하고 있지만 생명을 보전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밝게 살아갈 수가 있네. 그런데 자네는 이미 건강을 되찾지 않았는가? 따라서 나보다 훨씬 더 상황이 좋은데 뭘 그렇게 불만이 많은가?”
친구의 말에 그는 몹시 부끄러웠지요. 두 팔도 두 다리도 온전하고, 건강도 회복되었는데 원망과 불평으로 시간을 보낸 것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용기를 내어 다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나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상황을 나쁘게 해석하는 습관이라고 합니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마음으로 그 상황을 더욱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길에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간 사람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서 작은 것을 통해서도 큰 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모두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저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을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배불리 먹이시는 큰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만 있으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가져왔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큰 기적을 일구어냈듯, 우리의 작은 정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바치는 우리의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정성 안에서 주님께서는 큰 기적을 일구어내십니다.
사랑, 그 허리 끊어지는 말(김정환).
단골손님(김미영, ‘좋은생각’ 중에서)
나는 할인 마트에서 일하는 판매 사원이다. 날마다 출퇴근을 반복하고 손님에게 햄을 파는, 그야말로 단순하고 따분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이런 내 일상에 미소짓게 하는 일이 있었다.
하루는 휠체어를 탄 여자 두 분이 오셨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미소 지으며 시식을 권했다. 두 분은 고개를 가누지 못하며 어렵게 햄을 맛보셨다. 그러고는 그 제품을 달라고 하셨다. 나는 제품을 휠체어 주머니에 넣고, 감사 인사를 했다.
며칠이 지나 두 분은 또 햄을 사 가셨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 내 단골손님이 된 어느 날이었다. 퇴근길에 그 두 분이 휠체어에 앉아 장사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힘겨워 보이기는 했지만, 분명 얼굴에는 여유와 행복이 묻어났다. 좌판에는 직접 만든 휴대전화 장식 줄과 열쇠고리, 그리고 예쁜 액세서리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친구 부부에게 선물할 휴대전화 장식 줄을 두 개 샀다. 그때 한 분이 힘겹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왜 아줌마가 파는 햄을 사는지 아세요?” 나는 “맛있으니까 사시겠죠.”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뒤이은 그분 말씀은 메마른 내 가슴을 너무나도 아프게 했다. “아줌마는 우리를 보통 사람하고 똑같이 대해 줘서예요!”
마트에 가면 장애인이라고 특별히 신경 써 주는 직원이 있고, 안됐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단다. 하지만 그분들이 바라는 건 특별대우나 애처로운 눈빛이 아닌 일반인과 다름없는 시선으로 봐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느 하품한 것도 아닌데 눈가가 촉촉해져 왔다.
측은한 마음
최영균 신부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꿈꾸었던 동지가 독재 군주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 동지를 잃은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선교여행에서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하신 예수님은 요한을 잃은 슬픔에 홀로 있고 싶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을 더욱더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 길이 멀어도, 힘들더라도, 먹을 것이 없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정의를 보고 싶어 했고, 나자렛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참 생명에 대한 갈망이 이 사람들을 압도하여 어떠한 장애도 뛰어넘어 주님께 다가가게 합니다. 요한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은 뒤로한 채 당신을 찾아, 진리의 말씀을 찾아 온 사람들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셨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물을, 영원한 하늘의 빵을 갈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당신 자신보다 인간이 먼저였고, 그들의 행복이 당신의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행복함을 느껴보시겠습니까?
기적
이동훈 신부님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도 없다고 했다. 사람을 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어디 돈 뿐이랴?
지적장애인들의 생활 시설인 살레시오의 집에는 대건안드레아란 가족이 있다. 이 가족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암기력이 남달리 뛰어나다. 텔레비전에서 보고 들은 일기예보며, 연속극 장면을 잘도 기억하여 목소리도 그럴듯하게 흉내를 낸다. 미사경문도 줄줄 외우고 동작도 잘 따라 해 일명 ‘보좌신부’로 통하기도 한다.
언젠가 시설 직원들에게 대안생리대에 대한 강의를 해주기 위해 몇 분의 손님이 오셨다. 잠깐 여유가 있어 내가 시설 주변 안내를 하는 차에 마당에서 일명 그 보좌신부를 만났다. 그에게 손님들을 3층 다락방 성당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고 잠깐 내 일을 보았다. 성당으로 올라간 손님들은 금방 내려오지 않았다. 기도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참 후에 내려온 이들의 눈에는 금방 닦은 눈물자국이 보였고,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기도를 하며 참회를 많이 했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손님들은 차를 마시며 눈물의 의미를 고백했다.
안내하던 가족이 성당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미사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놀라고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한참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미사 경문을 줄줄 외우는 한 장애인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이 보잘것없음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장애인들에게 봉사하러 오지만 사실 사람들은 오히려 장애인들한테 많이 배운다. 좋은 머리로 남을 속여 먹기도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린이 수준의 지적 능력밖에 지니지 못한 지적장애인들은, 세상은 그렇게 머리 쓰고 남을 속여 먹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알려준다. 사람을 살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어디 돈뿐이랴? 나의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을 때, 세상은 그 나눔으로 풍요로워진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측은지심의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람이 꽤 ‘괜찮은’ 한 연예인을 가까이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빡빡한 스케줄 가운데서도 마음이 얼마나 착하고 관대한지 깜짝 놀랐습니다. 정기적인 출연을 소화하기에도 벅찰텐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각종 자선바자회, 음악회, 자원봉사활동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시간이 허락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하러 간다는 말에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또 얼굴이 알려지다 보니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은 듯 했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시간, 여유 있는 휴식시간은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든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니 아는 채 하니, 당연히 행동에 제약이 따르겠지요. 속상할 때도 많답니다. 동물구경 하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 것들’도 예의 없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댄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늘 환한 미소를 달고 다니니 대단했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친절하게 대하고 웃어주는 등 일일이 ‘제대로’ 응대하는 모습이 보기 정말 좋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공생활이 본격화되면서 예수님 역시 여유 있는 개인적인 삶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마다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군중들은 어떻게 해서라고 예수님 가까이 자리 잡기 위해서 목숨 걸고 경쟁했습니다. 군중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 손 한번 잡아보려고 난리였습니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치유를 원하면 치유를, 구마를 원하면 구마를, 안수를 원하면 안수를, 먹을 것이 필요하면 먹을 것을, 재미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렇게 반복하셨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되는 강행군 속에 예수님의 심신은 지쳐만 갔습니다. 거의 탈진 상태에 도달한 예수님께서는 ‘이러다가 큰 일 나겠다.’ 싶어 억지로라도 휴식시간 찾으십니다.
잠시 틈이 나자 예수님께서는 ‘잽싸게’ 군중들을 따돌리십니다. 군중들을 피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십니다. 한숨을 돌린 예수님께서는 ‘이제야 조금 쉬게 되었구나.’ 하셨는데, 결코 그게 아니었습니다.
호수 반대편으로 배가 가까워지면서 육지를 바라본 예수님께서는 ‘어쩔 수 없구나.’하고 포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호수 건너편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군중들이 모여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잠시 휴식을 취하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다는 낌새를 즉시 알아차린 군중들이 선수를 친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로를 따라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호수를 직선으로 건너가는 시간보다 육로를 따라 호수를 돌아오는 시간이 훨씬 길텐데...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에 앞서 도착해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시던 동안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간절한 소망 한 가지 이루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온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측은지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파김치가 된 예수님이셨지만, 그 측은한 군중들 앞에서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목활동을 다시 시작하십니다. 병자를 치유시키십니다. 마귀를 쫒아내십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해 쓰러질 지경인 사람들을 위해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측은지심의 하느님입니다. 당신 백성의 고초를 결코 외면할 수 없으신 연민의 하느님이십니다. 병고에 시달리고 죽어가는 형제의 슬픔 앞에 함께 눈물 흘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측은지심을 우리가 지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나날이 피로와 스트레스로 힘겨운 나날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가엾은 우리 이웃들에게 다가서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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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해 주신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더 데레사가 처음으로 거대한 고아원을 켈커타에서 건립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의 일입니다.
전 세계 수많은 대중매체 기자들은 켈커타에서 벌어질 마더 데레사의 활약을 기대하며 여러 질문들을 해 댔습니다. 마침내 실질적인 사항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한 기자가 현재 재정 상황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수도복을 뒤적이더니 3실링을 꺼내 보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돈으로 천원도 안 되는 돈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인 이 3실링이 전부입니다.”
기자들은 농담 하는 줄 알고 진실을 추궁하였습니다.
“정말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저는 이 3실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이것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 3실링으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에서 마더 데레사의 이 믿음을 대중매체로 접한 사람들의 후원으로 건물을 짓고도 많은 돈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더 데레사는 많은 후원으로 소외된 이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그들을 먹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농담을 한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받아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천 명을 먹이라고 하실 때 그들의 능력으로 먹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작은 교만들이 남아 있어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5명도 먹이기 힘든 정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지 모릅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내 힘으로는 온전히 가정을 이끌어 갈 수도 없고 배우자나 자녀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내가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는 내가 가진 것이 이것밖에 되지 않으니 주님께서 해 주십사고 청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제 주일 강론을 수원 모 성당에서 했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그 기적을 체험한 아버지와 아들 신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 사제관에 들르게 되었고 우연처럼 그 아버님을 만나 듣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 주라고 들려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사람들은 강론을 듣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박수는 저에게 그것들을 일깨워주신 주님께 돌아가야 합당합니다. 저 개인으로는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지만 주님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봉사 활동을 하라고 부르면 “능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우리는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이것이 겸손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나의 능력으로만 하려는 오늘 사도들과 같은 교만입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시면 능력과 시간까지 다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겐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주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한 번은 마더 데레사가 미국에 있는 후원회 본부에 회의 차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에서는 현재 재정 상황이며 앞으로의 후원 계획에 대해 열띤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장시간 동안 그 논의에 지루해 하다가 각 사람들 앞에 놓인 물병을 보고 시중드는 사람에게 그 물 한 병에 얼마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 병에 3달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마더 데레사가 갑자기 일어나 한 마디 하였습니다.
“오늘부로 이 후원회는 해체합니다.”
후원회를 해체한다면 마더 데레사가 하는 사업에 큰 차질이 있을 것은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모든 것이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너무나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신다는 이 믿음에 도달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사랑은 기적이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라자로의 죽음 때문에 눈물 흘리신 것과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 흘리심에 대해서 묵상한 적은 있지만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린 적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진정 저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헤아리시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는 주님 마음 헤아리지 않아도 되는 듯이 살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물러가십니다.
심란하시기 때문이었을까요?
생각의 정리,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을까요?
기운과 맥이 빠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복음에서 아무 언급이 없는 것처럼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그저 다음 발걸음을 떼신 것뿐일까요?
어제, 새 사제의 첫 미사가 제가 하는 형제회에서 있었습니다.
그 형제의 서품 성구가 “아빠, 아버지”였습니다.
이 성구를 선택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면서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남자, 아버지는 정말 불쌍합니다.
남자는 강해야 하고 그래서 울어서는 안 됩니다.
아프고 힘든 것을 토로하지도 못하고 이해받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밉보였다가는 자식들은 다 엄마 편이니 집안에서 완전히 외톨입니다.
우리는 이런 아버지 상, 이런 하느님 상, 이런 예수님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에 닿아도 데지 않고, 누가 죽어도 끄덕 않는, 감정 없는 냉혈한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예수님은 불감증이 아닙니다.
그 어떤 여성보다도 감성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스침에도 소리를 내는 비파와 같은 분이십니다.
요한의 죽음에 마음 심란하시고 기운이 빠지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외 딴 곳으로 물러가셨지만 사람들을 피할 수는 없으셨습니다.
배를 타고 가신 분을 사람들은 육로로 기어코 따라 왔습니다.
이렇게 기를 쓰고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고 또 다시 심금이 울립니다.
이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드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죽음에 마음 아파할 겨를이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2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저의 형제는 여섯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저의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어린 자식을 여섯이나 남기고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 버리시니 살아야겠다는 마음 때문인지 어머니 병이 나셨다고 합니다.
남편의 죽었어도, 한 번도 밖의 일을 한 적이 없어도, 이제 자식들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것이 기적처럼 어머니 병을 낫게 하고 힘을 내게 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기적입니다.
요한의 죽음으로 예수님도 마음 아프고 기진하셨어도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시자 다시 마음을 추스르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동력(同力)을 구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당신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도 당신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당신의 일에 동참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남자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어떤 노신사의 구두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그 남자는 실례를 무릅쓰고 노신사에게 다가가 그 구두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신사는 자신의 구두가 ‘악어 구두’임을 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악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악어라는 것이 아마존 정글의 늪지대에 사는 매우 위험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이 악어 구두를 꼭 갖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하고는 여행자금을 마련하여 아마존에 가기로 했습니다. 남자는 수주일 후에 아마존 정글에 도착했고 며칠 밤낮을 헤매다 결국은 악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 악어다” 생전 처음 보는 악어는 매우 살벌하고 괴상하게 생겼지만 그는 그 악어와 한판 싸움을 벌였습니다. 몇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그는 악어를 잡고야 말았습니다. 사투 끝에 얻은 귀중한 승리였습니다. 이제 그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죽은 악어를 뒤집어엎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맙소사! 이놈은 구두를 안 신었잖아! 어떤 놈이 구두를 신은 거야?”
이 이야기는 우리의 착각과 무지를 나타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붕어빵에는 붕어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어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의 무지를 흉 볼 수밖에 없겠지요.
주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도 생기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이 세상을 더욱 더 힘차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늘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켜주시는 주님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건너편에 먼저 가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맞바람과 함께 파도로 인해서 건너편에 가지 못하지요. 이렇게 고생 중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하지만 그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했던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다!”를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치고,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우리들 마음에 모시지 않는다면, 마치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듯이 우리들도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우리들 마음에 모셨을 때에만이 우리들이 원하는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주님께서 바로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유령이다’하면서 도망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 그 노력을 어떻게 하는지 이 새벽에 함께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십니까?
프로답게 만드는 성실함(‘행복한 동행’ 중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이 열두 살 때 연주를 위해 이스라엘에 갔을 때 일이다.
사라와 그녀의 어머니는 주최 측이 제공한 저택에 묵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유명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도 함께 묵고 있었다. 사라와 어머니는 저택 안을 거닐다가 마침 저녁 공연을 위해 콘서트홀로 떠나려는 로스트로포비치를 만날 수 있었다. 두 음악가는 서로를 알아보고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서둘러 콘서트홀로 떠나려 했지만 사라의 어머니는 저녁 공연이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했다. 정중한 초대에 로스트로포비치는 응했지만 식사 시간 내내 어딘가 초조하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치를 살피던 사라의 어머니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갑자기 손님이 찾아와 오늘 해야 할 연습을 못했더니 마음이 불편하군요.”
그는 일흔 살을 앞둔 관록의 첼리스트였다. 로스트로포비치가 그날 저녁 연주할 곡은 그가 수백 번 연습하고 이미 수십 번 무대에 올라 연주한 곡이었을 텐데도 노연주자는 하루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초조할 만큼 연주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어린 사라는 연주자의 첫째가는 요소가 성실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 사라는 연습은 물론 무슨 일이 있어도 연주 일정을 지키는 성실함을 철저히 고수해 왔다. 연주 전날 발등에 물건이 떨어져 뼈가 부러졌을 때에도 감각이 둔해질까 봐 약도 안 먹고 무대에 오를 정도로 철저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연주 일정을 갑자기 취소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20년 동안 딱 한 번, 외할머니 장례식 때요. 연주를 앞두고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지만 취소를 한 적은 없어요. 한 번 그러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까요. 연주자에겐 자기 단련이 제일 중요하죠.”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나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제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나누라는 요청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형제 자매들로부터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울려나오는 주님의 음성을 통해 매일 매일 요청을 받습니다.
아는 것이 없는데 알려주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서 알려주라고 하십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없는데 모든 일에 나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서 나서라고 하십니다.
말 주변이 없는데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서 말하라고 하십니다.
너그럽지 못한데 너그러운 척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너그러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서 너그러우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올라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서 분노를 삭이고 웃음으로 감싸안으라고 하십니다.
인간이기에 마음으로 끌리는 형제 자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씩 "어찌하오리까?"라는 탄식이 절로 납니다.
수천명의 군중 앞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야속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주님, 어찌하오리까?"라는 제자들의 탄식이 남의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가 주어라."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제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가진 것이 있어야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있지 않느냐?"
"너를 주면 되지 않느냐?"
우문현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를 주면 됩니다. 제가 가진 무엇을 주려고,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애써 찾은 제가 바보였습니다. 저를 주면 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내어주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나누기 보다 내어주지 못할 그럴싸한 이유를 찾았기 때문에 나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를 준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의 숙제를 묵상의 결과로 받아 안습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물음일 것입니다. 그래도 새삼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기에 기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나'를 나누고 내어주어야 한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요 며칠 동안 조금은 머리가 복잡했었는데, 이제 조금씩 맑게 개이는 느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한 수도자가 강둑에 앉아서 묵상을 시작하려는 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전갈 한 마리가 강가 바위틈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비가 많이 내린 뒤라 강물이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전갈은 금방이라도 쓸려 내려갈 것 같았지요.
수도자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강가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전갈을 집어 올려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갈은 수도자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독이 든 침을 쏘았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위험하니 그만 두시지요. 독으로 찌르는 것이 전갈의 본성인 걸 모르십니까?”
바로 이 말에 수도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알지요. 하지만 생명을 구하는 것이 저의 본성입니다. 전갈이 제 본성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여 어찌 내가 나의 본성을 바꾸겠습니까?”
이 수도자의 모습이 어쩌면 예수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따라서 그 폭력성을 생각하면서 인간과 거리를 두고 싶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셨지요.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행동을 전혀 멈추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본성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좋은 말씀으로 늦게까지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얼마나 피곤하실까요? 제자들도 피곤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런 말로써 예수님께 ‘이제 좀 쉽시다.’라는 표현을 하지요.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본성 상 그냥 보내지 못하시지요. 그래서 또 다시 사랑의 실천을 하십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빵의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이런 사랑의 본성을 간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예수님의 본성을 나의 본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나요? 혹시 예수님의 본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의 본성을 닮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사랑 실천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오천 명 가량 되는 엄청난 군중들을 배불리 먹게 하는 기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이 모습은 우리 역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커다란 열매를 맺는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도저히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일들이 가능해 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런 기적을 잘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대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사랑, 보상을 바라는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기적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성을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본성을 닮은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이 세상은 많은 기적으로 충만해지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성을 나의 본성으로 만들도록 노력합시다.
꼭 필요한 사람(여운학, '나에게 보내는 희망편지' 중에서)
큰 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쳐보십시오.
나는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라고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하여
세상에 사랑을 주기 위하여
세상에 나눔을 주기 위하여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울까요?
빵의 기적
서현승 신부님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어떻게 그 큰 코끼리를 작은 냉장고에 넣을까’
골몰하다가, 이런 답변을 듣고는 황당함을 느끼게 됩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꼭 이런 식으로 전개됩니다. 읽을 때마다 허전함을 느끼는 이유는,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가장 크게 호기심을 가질 만한 부분에 대한 설명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즉 어떻게 빵이 많아졌을까?
그 양이 얼마만큼 되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또 어떻게 나누어주었을까?
그러나 복음서의 이야기는 ‘빵을 나누어주었다’는 부분에서 훌쩍 건너뛰어 ‘다 먹고 남은 후에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결론 부분에 즉시 도달합니다. 아마도 복음사가는 우리가 엉뚱한 데 신경 쓰지 않도록 하려고 이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가 크게 비교됩니다.
제자들은 계산을 한 후 빵 다섯 개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기도하지도 않고, 빵을 나누어 주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을 먹이는 일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계산을 하지 않고,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냥 나누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을 먹이는 일을 하느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서 다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믿고, 기도하고, 시작하면 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박혜원
언젠가 사람들을 따라 집회에 간 적이 있다. 치유은사의 기적을 보려고, 그야말로 따라서 갔다. 예수님 당시에 기적을 보려고 몰려든 구경꾼들처럼 말이다.
시골 교회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모두 아픈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소문을 듣고 단순히 기적을 확인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고, 요행을 바라며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초청된 장로님이 손을 얹고 기도를 드리자 십년이 넘게 자리에 누워 있던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서 걸었고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나도 고개를 빼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놀란 눈으로 구경했다. 때맞추어 교회에서 준비한 떡이 돌아가고 사람들은 마치 잔칫날 모인 사람들처럼 와글와글 떡을 나누며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사건의 중심에 있지 않고 주변을 서성이며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위에 치유의 은혜가 베풀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날의 흥분과 감격은 금방 가라앉아 버리고 나는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것은 그 시골 교회 목사님의 눈빛이었다. 강사 장로님이 말씀을 전할 때에도 그 내용에는 무지한 사람들, 찬송을 부를 때에도 자기 자신들에게 더 관심이 많아 떠들어대는 무리들…. 그들을 바라보는 목사님의 부드러운 눈빛이 오래도록 내 가슴에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그분이 주시는 기쁨을 나누게 하려고 그들을 돌보던 젊은 목사님의 눈빛은 2천여년 전 빈들의 무리를 바라보던 그분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하느님의 감동과 기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벽부터 잠깨어 노래하는 매미들, 자연 만물도 자신을 지으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생명과 빛, 희망을 주는 말이나 글이 좋습니다.
이래서 시편 성무일도가 그리도 좋은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생명과 빛으로, 희망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도 우리 삶을 통해 전달되는 생명과 빛이요 희망입니다.
믿음이 좋아 하느님께 가까이 이를수록 긍정적 낙관적 삶이 되고 생명과 빛, 희망이 넘칩니다만, 믿음 약해 가면서 하느님께 멀어질수록 삶은 부정적 비관적이 되고, 허무의 그 자리에 죽음과 어둠, 절망이 자리 잡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 그 곤궁한 중에도 생명과 빛, 희망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모습, 추호도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 얼마나 고무적이고 위로가 되는지요!
바로 예수님의 삶의 자세, 기도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절망은 없다’는 진리와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중들, 사람 눈으로 보면 다분히 절망적 상황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전부를 봉헌했을 때, 주님은 이들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렸고 이어 기적이 일어나 모두 배불리 먹었다 합니다.
예수님의 이 천진무구(天眞無垢)한 기도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가진 먹을 것을 다 내놓게 했고, 이어 하느님을 감동시켰음이 분명합니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의 감동은 자연히 하느님의 감동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감동에 따른 기적입니다.
모든 것을 내놓는 감동의 행위에 따른 하느님 기적의 축복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
결코 1독서의 거짓 예언자 하난야처럼 처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그대로 성체성사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미사 중 우리가 간절히 바치는 ‘주님의 기도’와 더불어 나의 마음 모두를 봉헌할 때, 주님은 당신 평화와 생명의 빵을 선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빵의 기적을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의 은총이 오늘도 우리를 생명과 빛, 희망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더욱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강영구 신부님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이르셨다.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리 가져오너라.”하시고는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셨다. (마태14,16-19)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은 대자대비하신 분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들의 배고픔을 나의 배고픔으로 여기시는 자비지심慈悲之心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게 합니다.
나눔은 대자비심大慈悲心의 발로입니다.
나누면 풍요로워집니다. 나누면 부자가 됩니다. 나누면 행복해집니다. 나누면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나누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열두 광주리나 흘러넘치게 됩니다.
고통과 슬픔은 나누면 작아집니다. 그리고 기쁨과 행복으로 바뀝니다.
사랑과 행복과 기쁨은 나누면 무한히 커집니다. 그리고 함께 행복 속에 잠기게 됩니다.
량量의 많고 적음, 질質의 좋고 나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무엇이든 움켜쥐거나 독차지 하면 썩게 됩니다.
움켜쥐고 있는 손도 썩고 마음과 영혼까지도 함께 썩습니다.
빵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아도 나누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독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은 탐욕으로 썩게 되고,
배고픈 사람의 가슴은 원망과 증오로 가득 차게 됩니다.
행복과 기쁨도 혼자서 차지하고 즐기면 이웃의 원망과 미움을 사게 됩니다.
고통과 슬픔을 혼자 가지면 그 속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대자대비하신 당신은 나눔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의 많고 적음에, 크기의 크고 작음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인색하고 옹졸한 가슴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우리도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나누어 기적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一明).
저는 어제 한 통의 E-Mail을 받은 뒤, 하루 종일 우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E-Mail은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 자매님의 안 좋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지요. 사실 그 자매님께서는 얼마 전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 많은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저는 그 기도 부탁에 대해서 “네, 기도할께요.”라고 응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응답을 하고서도 저는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화살기도 몇 차례, 그리고 그분을 위한 지향을 갖고 묵주기도 몇 꾸러미 바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전에는 누군가 기도를 부탁하면 ‘기도수첩’이라는 것도 만들어서 기도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위해서 나름대로 기도해드렸는데, 요즘은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수첩’을 작성하지도 않는 것은 물론, 부탁을 받을 때만 잠시 기도하고 말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 자매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뒤, 제 마음은 너무나 좋지 않았습니다. 마치 제가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처럼, 죄책감까지 생기더군요. 물론 하느님의 뜻을 우리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하느님의 뜻을 움직일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로써 노력해야 하는데, 저는 그 기도를 충실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바쁘다는 이유로, 이정도면 된다면 안일한 마음으로 기도의 의무를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도만큼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로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주님, 제가 저의 전 재산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따라서 저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한다고 주님께서 혹 하실까요? 아니면, “주님 저의 소원만 들어주시면, 이렇게 높은 지위를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주님께서 감동을 받으셔서 우리들의 소원을 재빨리 들어주실까요?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 기도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중요한 기도를 얼마나 소홀히 했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더러 물을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즉, 정말로 물 위를 걷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자, 무서운 마음이 들었고 곧바로 물속에 빠지게 되지요. 그가 물속에 빠지게 된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께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있는지요? 혹시 베드로처럼 기적을 체험하는 순간에도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요? 또한 저처럼 그 앞에서는 열심히 기도하겠다고 하면서도, 바쁘다고 그 기도를 소홀히 했었던 것은 아닌가요?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물위를 걷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뿐입니다.
나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시다.
오늘이라는 말은
"오늘"이란 말은 싱그러운 꽃처럼 풋풋하고 생동감을 안겨줍니다.
마치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마시는 한 모금의 시원한 샘물 같은 신선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고.
오늘 할 일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하루를 설계하는 사람의 모습은 한 송이 꽃보다 더 아름답고 싱그럽습니다.
그 사람의 가슴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오늘 또한 어제와 같고 내일 또한 오늘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미련이나 바램은 어디로 가고 매일 매일에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오늘"은 결코 살아 있는 시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처럼 쓸쓸한 여운만이 그림자 처럼 붙박여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오늘’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미래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아무리 고달프고 괴로운 일들로 발목을 잡는다 해도.
그 사슬에 매여 결코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지혜와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요.
오늘이 나를 외면하고 자꾸만 멀리 멀리 달아나려 해도 그 "오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밝은 내일이란 그림의 떡과 같고.
또 그런 사람에게 오늘이란 시간은 희망의 눈길을 보내지 않습니다.
사무엘 존슨은 “짧은 인생은 시간의 낭비에 의해서 더욱 짧아진다"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시간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늘 새로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늘 공평하게 찾아오는 삶의 원칙이 바로.. "오늘" 이니까요.
제자들의 시비지심과 예수님의 측은지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래아에서 자신의 공적 생활을 시작하신(마태 4,12) 예수께서 오늘은 그의 죽음소식을 접하시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 아마 요한의 죽음을 애도(哀悼)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육로를 통해 몰려들었다. 예수께서 계신 곳은 어디든지 이렇게 사람들로 붐빈다. 예수를 찾는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마음이 심란했을 터인데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고 그들의 모든 청을 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그들을 향한 측은한 마음이 드셨기 때문이다. 타인의 어렵고 가엾은 처지에 대한 측은한 마음은 ‘사람다운 사람’의 가장 기본 태도이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맹자(孟子, BC. 372-289?)도 이미 사람이 타고난 착한 본성의 발로를 사단(四端)으로 보았다. 사단은 군자(君子)가 행해야 한다는 네 가지 품성인 사덕(四德)에 해당하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을 말한다. 사단은 곧 인(仁)에서 우러나는 가엽고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우러나는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는 남을 공경하고 겸손히 사양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우러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가릴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맹자가 정리한 사단의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한층 돋보이는 대목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데려오고 스스로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시자 때는 저녁이 되었다. 동시에 제자들에겐 끼니걱정이 함께 엄습하였다. 제자들은 그나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에 군중을 해산시켜 끼니를 각자가 해결하도록 할 참이었다. 시비지심의 발로인가? 그러나 제자들의 시비지심보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앞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절)는 것이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뿐, 자기들이 먹기에도 부족한데,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아찔하고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예수께 청하여 사람들을 헤쳐 물리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조족지혈(鳥足之血)도 안 되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란 말인가?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마태오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다. 4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2-44; 마태 14,13-21; 루가 9,12-17; 요한 6,1-15)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8,1-9; 마태 15,32-39)의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알다시피 오천 명의 기적은 4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으나, 사천 명의 기적은 마르코와 마태오만 전하고 있다. 물론 마르코복음이 구전(口傳)이나 예수어록의 원전(原典)에 제일 충실했을 것이고, 마태오와 루가복음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다소 수정을 가하였으나, 요한복음은 원전의 기적사화를 토대로 완전히 독창적인 신학을 펼치고 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4,12-18-35) 중 비유설교(13장)와 공동체설교(18장) 사이에 등장하는 주된 모티브는 ‘빵’이다. 적어도 마태오복음 14,13에서 16,12절까지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사상이 바로 ‘빵’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은 우선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14,13-16)으로 시작하여, 그 가운데 사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15,31-39)을 삽입하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 두 가지 빵의 기적에 대한 의미해석(16,9-12)으로 마무리 된다.
복음이 전해주는 빵의 기적은 다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특성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많은 기적들을 체험하였다. 자신들의 평범한 이론과 습관들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예수님은 마치 평범한 일처럼, 그냥 우리가 늘 생각하고 행하는 패턴처럼 여기신다. 가진 것이 많건 적건 간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사가가 단순한 빵의 기적을 가지고 생명의 빵(성체성사신학)을 구상하거나(요한 6장), 마르코복음에는 없는 ‘여자와 어린아이들’(21절)을 끌어들여 누구나 참여하는 미사성제를 마태오복음사가가 구상하든지 간에, 오늘 예수님의 복음(福音)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간에, 있는 것으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것이다. 모자라는 것은 예수께서 스스로 채워 주실 것이다. 오늘은 빵의 기적으로 모자람을 채워 주셨지만 머지않아 자신의 몸을 내어놓는 죽음과 부활의 기적으로 모자람을 채워 주실 것이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의 죽음소식을 접하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는 빵의 모티브를 통하여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서서히 예고하시려는 것이다.(마태 16,13 이하)
사회적 사랑의 책무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십니다. 그것은 죽음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일 사랑의 죽음을 준비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문을 듣고 그곳까지 따라나선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물러가신 것도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도 다 우리 모두에 대한 사랑의 책임 때문이었습니다. 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잠시 거리를 두고 싶으셨으나 따라나선 군중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일고 즉시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랑의 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심리학자 스턴버그(Robert J. Sternberg)는 사랑의 삼각형 이론에서 친밀감, 열정, 헌신 또는 책임감을 사랑의 세 요소로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으로 표현되는 한없는 애정, 죽기까지 목숨 바쳐 실행한 열정,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람이든 차별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헌신과 책임 있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외딴곳까지 찾아 나선 군중의 배고픔을 헤아리고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14,15) 하고 말씀드립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16) 하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허기진 군중에 대한 애정이 있긴 했으나 그들에게는 끝까지 헌신하고 책임을 지으려는 태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책임을 예수님께 떠넘깁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가장 간편하고 쉬운 방법을 제안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끝까지 함께하려는 사랑이 아니기에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어 난감해하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가져오라 하시어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십니다. 그러자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제자들과 함께 사랑을 완성시켜 나가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것은 바로 성체의 신비가 말해주는 사회적 사랑의 책무입니다. 우리는 우주 안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종교, 언어, 피부색, 성격, 지식, 재물의 소유, 사회적 지위 등 다양함에 상관없이 모두가 다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두의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겠지요.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사회적 사랑이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형제자매를 향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우선하는 사랑입니다.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병자들과 나병 환자들, 그리고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 때 기뻐하는”(성 프란치스코, 비인준칙 9,2) 사랑이 성체 신비의 절정입니다.
성찬례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형제자매를 향한 하느님 연민의 증인이 되고, 다른 이를 위하여 ‘쪼개진 빵’이 되어, 더욱 정의롭고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오늘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16) 하시는 예수님의 요청에 책임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자비의 선교사 성(聖) 알폰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알폰소의 어린 시절은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였습니다. 그는 요즘도 큰 도시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규모면에서 세계적인 대도시였던 나폴리의 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머리까지 비상해서 16세 나이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젊고 유능한 불패(不敗)의 변호사로서 세간에 이름을 날리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는데, 한번은 자신이 맡은 한 사건이 사소한 실수로 패소하는 쓰라림을 체험합니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세상의 쓴맛을 본 후 허망해하고 있던 차 그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이제부터 세상을 떠나 나를 따라오라.’ 그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세속 변호사의 길을 접고 주님의 변호사로 탈바꿈합니다.
1726년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된 알폰소는 우연히 나폴리의 뒷골목,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나폴리 인구 100명당 1명이 사제 신분을 지니고 있어 사제 과잉 현상이 있었답니다. 수많은 사제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대도시의 뒷골목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제들이 안락한 대도시에서 부자들과 어울리는 동안 그는 도시의 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이면 법학, 신학이면 신학, 학문에 있어서 큰 성취를 이룬 그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끝에 서 있던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강론은 단순했으나 기도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저술은 깊은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썼습니다.
알폰소는 당시 교회 전반을 좌지우지하던 얀세니즘과 반성직주의에 맞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찾아갈 때 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안심하십시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계십니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후 죄질이 안 좋다고 여겨지면 사죄경을 낭독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고해소 안에서 항상 너그럽고 관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고해사제 알폰소를 통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극단적 경건주의로 인해 훼손된 고해성사의 원래 가치를 복원시켰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고해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알폰소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화들을 보면 성인의 고개가 똑바로 서있지 않고 약간 삐딱합니다. 대체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그분의 한 평생은 참으로 혹독했더군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71세 되던 해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류머티즘에 걸려 목이 심하게 굽어버렸습니다. 후에 각도가 조금 완화가 되기는 했지만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굽은 목 때문에 턱이 가슴을 눌러 항상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한 평생은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힘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도회 설립자로서 이런 저런 고민꺼리가 많았던 그는 만성 두통에 시달렸는데, 그럼에도 집필을 계속했습니다. 얼마나 두통이 심했으면 왼손으로는 차가운 대리석 조각으로 두통부위를 마사지하며 오른 손으로 글을 쓸 정도였습니다.
대성인이자 교회박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폰소도 우리가 겪는 이상의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다는 것, 수시로 와 닿는 깊은 상처에 속수무책이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너무 클 때는 만사 제쳐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욱 성모님께 매달리면서 그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탁월한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성모님께서도 많은 중재와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했습니다. 그는 자주 성모님과 깊이 통교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성모님의 각별한 보살핌에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제게 일어난 모든 좋은 일들, 저의 회개와 성소 여정,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은총들은 모두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당신은 제가 모든 것 위에 어머니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시고 또 원하십니다. 제가 항상 언제 어디서나 당신에 대해 가르치며 당신의 아름답고 은혜로운 신심을 모든 영혼 안에 심고자하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분들을 만나면 열이면 열 대부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미사에 참석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일이 바쁘면 당연히 미사에 참석할 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이러한 상황을 한 번 상상하게 됩니다. 서로 사귀고 있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한동안 연락을 끊고서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해, 일 때문에 너무 바빴어.”
이러면 어떨까요? 과연 이 연인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길까요? 연락을 전혀 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뜻일 것입니다.
“미안해. 당신보다 일이 더 중요해서 당신한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어.”
그리고 그 안에는 이런 뜻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미안해.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주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사랑이 식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만남을 계속 가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저 막연한 의무감만을 가지고서 주님을 가끔 만날 뿐입니다.
사랑은 만남이 아닐까요? 만나지 않으면 점점 더 멀어지는 것처럼, 주님 역시 계속 만나지 않는다면 점점 더 멀어져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만나려고 노력하다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께서 주시는 큰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를 타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도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기를 쓰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그 수가 자그마치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이었습니다. 저도 각종 행사를 해봐서 잘 아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이라면 정말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그것도 교통이 불편하고 각종 방송장비도 없는 시절에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특별한 표징을 보고 싶어서 온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에 큰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행적에서 보여주는 주님의 사랑은 어렵고 힘든 지금의 삶을 모두 이겨내고도 남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쫓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을 잊어버리는 순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 될 수밖에 없으며, 어렵고 힘든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기쁨은 절망의 절벽에서도 꽃처럼 피어날 수 있다(앤 모르 린드버그).
매력
1924년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앞두고 엔드류 어빙과 함께 정상 600미터 아래에서 실종된 조지 말로리는 에베레스트원정을 떠나기 전, 필라델피아의 한 강연에서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어느 부인이 이런 질문을 던졌지요.
“당신은 왜 위험하고 힘들며 죽을 지도 모르는 산에 갑니가?”
그는 아주 간단히 이렇게 말합니다.
“Because it is there.”(산이 그곳에 있으니 오른다.)
바로 정상이 있기 때문에 도전 의욕을 갖게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산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바다를 떠올려봅니다. 바다는 반대로 정상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다의 매력도 대단합니다. 그래서 여름 피서 철을 보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어제 뉴스를 보니 부산의 해운대는 ‘물 반, 사람 반’ 이었다고 합니다. 바다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산과 달리 정상이 없어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상이 있는 것도 매력, 없는 것도 매력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이런 매력적인 곳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님의 매력은 어떤 것 같습니까? 주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 덩어리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 우리의 매력도 커지지 않을까요? 그런 주님을 쫓는 우리, 그 과정 안에서 분명 우리의 매력도 커지게 될 것입니다.
평정심平靜心의 믿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가 성인 축일을 지낼 때마다 늘 확인하는 것은 생몰연대입니다.
어김없이 죽지 않고 영원한 육신 생명을 유지하며 사는 성인은 한 분도 없습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엄중한 진리를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성인들의 생몰生沒연대를 확인하며 성인들의 산 햇수와 제 나이를 비교해 보며 제 삶을 점검해 보곤 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알퐁소는 무려 그 옛날에 91세까지 장수하셨다니 참 경이驚異롭습니다.
이렇게 장수하시면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살아갈수록 힘들고 느슨해져 성덕도 빛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퐁소 성인은 나폴리 근처에 있는 고티의 교구장 주교로 일하다가 다시 그가 세운 ‘지극히 거룩한 구족주회’ 수도회로 돌아가 91세 나이로 선종하셨다 합니다.
성 알퐁소 성인과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인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인공 예레미야와 예수님에 대한 묵상하던 중, 문득 떠오는 ‘평정심平靜心이 도道다’라는 말에 착안하여 강론 제목을 '평정심의 믿음'이라 정했습니다.
얼마전 어느 형제집을 방문했을 때 응접실에 걸려있던 액자의 글도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류부쟁선水流不爭先”
앞서기를 다투지 않고 더불어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순리에 따른 삶을 강조하는 노자의 말씀입니다.
이 글을 좌우명으로 삼아가는 형제의 호칭이 ‘산타 박’이라 하여 그 호칭의 어원을 지인에게 물었더니 산타클로스를 줄여 성性인 ‘박’에다가 ‘산타’를 붙여 그렇게 부른다는 것입니다.
산타클로스 복장도 마련했고 성탄절에는 산타복을 입고 선물을 마련하여 불우한 이웃들의 공동체를 방문한다는 이야기가 참 훈훈했고 신선했습니다.
수류부쟁선의 영성을 살아가는 참 넉넉한 '산타 박' 형제였습니다.
하느님 섭리에 따른 수류부쟁선의 영성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순탄대로의 삶에서가 아닌 산전수전山戰水戰의 험난한 삶 속에서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두 주인공, 예수님과 예레미야의 삶이 그러합니다.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자연스럽기가 수류부쟁선의 삶의 자세요 평정심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고자 외딴곳에 물러나셨지만 곤궁한 이웃의 필요에 담담히 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측은지심의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요 이런 연민의 사랑을 지녔기에 수류부쟁선의 평정심임을 깨닫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정성을 다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모습이 그대로 평정심의 절정이요 진인사 대천명의 믿음의 자세입니다.
그대로 정성을 다해 미사드리는 장면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기적입니다.
광야의 기적이 상징하는 바 바로 광야세상에서의 헤아릴 수 없는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이 직접 기적을 베푸셨던, 군중들이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하여 가진 것을 다 내놓고 나누었던, 어느 경우든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하느님의 감동에 자연스럽게 뒤따른 군중들의 감동임이 분명합니다.
평정심의 자세로 하면 예레미야도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평정심임을 깨닫습니다.
듣기 좋은 달콤한 말만하는 거짓 예언자 하난야와의 설전 중에도 감정에 휘말려 흥분하지 않고 평정심을 발휘하여 침착하게 대응하는 예레미야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평정심의 비밀임을 깨닫습니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너를 땅위에서 치워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예레미야의 예언적 선고대로 하난야는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으니 참으로 비참한 죽음입니다.
‘호랑이 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
모두 지극한 평정심의 믿음을 보여주는 말마디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언제 어디서든 평정심平靜心의 믿음으로 수류부쟁선水流不爭先의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8월의 첫날입니다. 여름의 뜨거운 더위를 견디어내야만 가을의 알찬 결실이 있습니다. 조금 덥고,피곤하더라도 이겨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한 나라입니다. 황량한 들판에 파란 싹이 돋아나는 봄, 뜨거운 열정의 여름, 풍요로운 결실의 가을, 침묵과 충전의 겨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은 여정을 거치는 것 같습니다. 보호를 받아야 하고, 배워야 하는 유년시절이 있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젊은 시절이 있습니다.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중년시절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은퇴하여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노년시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삶의 흐름입니다. 거부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부산행’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킨다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바이러스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감염되는지,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바이러스보다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이기심, 욕망, 두려움, 공포, 분노,미움’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한 것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굶주림 때문에, 질병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이러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무관심, 이기심, 욕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이웃의 아픔을 보듬어 준다면 해결 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주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주시는 분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비로운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커다란 수익을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루어진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향한 사랑만이 가득합니다.
둘째는 줄 수 있는 사람, 가진 사람만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줄 수 없는 사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함께 만나십니다. ‘병자들, 이방인, 죄인, 여인, 가난한 이’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십니다.
셋째는 끝가지 믿어주십니다. 사기꾼은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약하고, 죄를 범하는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십니다.
넷째는 끊임없이 넘치는 사랑을 주십니다. 사기꾼은 우리의 주머니에 있는 것을 가져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이들은 배불리 먹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십니다.
단순히 빵을 배불리 먹었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더욱 뜨거워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빵을 많게 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릴 때, 우리들 또한 주님처럼 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한 조각의 빵을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점차 깊어지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신앙에서 달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는 신앙에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하난야,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전삼용 요셉 신부님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주재 일본 총영사가 동경에 보고한 정기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진주만에 거하는 미해군 전함의 동태가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비밀 내용을 탐지한 연방수사국(FBI)은 정부 당국에 긴급히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진주만 근처를 배회하는 일본 어선들은 스파이선이므로 경계 요함.’
그러나 정부 당국은 이 긴급 보고서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냥 흘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계속된 경계 전보가 들어왔지만 평화롭기만 한 진주만은 그런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주말이라 부대의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날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8일 아침 공습이 시작할 때까지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나마 휴일이라 레이더 조종을 연습하던 한 훈련병이 우연히 태평양 쪽에서 수많은 비행물체가 날아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병사는 재빠르게 상부에 보고하였지만 “그건 아마 새 떼일 것이다. 신경쓰지 마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훈련병을 무시한 것입니다. 훈련병은 또다시 “아닙니다. 분명히 비행기들입니다”라고 보고를 하였지만, “그렇다면 아군의 연습기들일 것이다. 귀찮게 자꾸 보고하지 마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때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초대형 군함 ‘애리조나호’는 단 10분 만에 격추되어 물속에 가라앉았고 그 속에 타고 있던 1300여명의 미 해군 수병들도 그 배와 함께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그 배는 지금까지 건져내지 않고 그냥 수장시켜 두고 있습니다.
누구는 경고하고 누구는 무시합니다. 무시하는 쪽이 경고하는 쪽보다 더 큰 사랑을 받습니다. 오늘 독서도 이와 똑 같은 상황을 보여줍니다. 오직 예레미야 예언자만이 목에 멍에를 메고 모든 백성이 이렇게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그 예언의 반대자도 있습니다. 바로 하난야입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목에 건 멍에를 벗겨 부수며 하느님께서 2년 안에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이렇게 부수어 버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당연히 백성들은 예레미야보다는 하난야의 말을 듣게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폐망하고 왕은 눈을 뽑히고 백성은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유산을 가로챈 형에게 자기에게도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던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재물을 섬기지 마라. 아니, 나를 섬기려면 재물은 미워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예수님은 가라앉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잘 살 것인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오직 멸망해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것밖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그렇게밖에 강론을 쓸 수 없는데, 어떤 분들은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으나 그러면 누가 천주교에 남아있겠느냐고, 결국엔 신부님을 아무도 안 좋아할 것이라고, 그래서 믿고 기도하면 성공하게 해 주는 개신교 쪽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물론 개신교라고 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십자가의 길만이 구원이라고 외치는 목사님들도 적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목소리가 묻힐 뿐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주님께서 이 세상에 그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적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바다에 가라앉는 맷돌처럼 망하게 될 것이고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에 희망을 둔 이들만 당신이 구하러 오신 것입니다. 언제 노아의 홍수 때 이 세상에 머무는 몇 명을 구해주시려고 하셨습니까? 다만 몇 명이라도 당신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에서 방주를 만드느라고 바보가 되는 이들만 구해주시고 이 세상은 멸망시키셨습니다. 종말도 똑 같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7,26 참조). 또 언제 모세가 이집트 땅에 들어가 파라오를 몰아내고 그 안에서 유토피아를 세우려고 했습니까?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듯이, 예수님도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해서 끌고 나오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빨리 털어버리고 나오라고 권고하십니다.
“떠나라, 떠나라, 거기에서 나와라. 부정한 것에 손대지 마라. 그 가운데에서 나와라, 몸을 정결하게 하여라, 주님의 기물들을 나르는 자들아.”(이사 52,11)
이 세상은 바빌론이고 마지막 때에 바다에 던져질 것입니다. 탕녀 바빌론에게서 나오라고 성경 맨 마지막까지 이렇게 주님께서 외치십니다.
“내 백성아, 그 여자에게서 나와라. 그리하여 그 여자의 죄악에 동참하지 말고 그 여자가 당하는 재앙을 입지 마라.”(묵시 18,4)
이 세상의 멸망을 외치던 예레미야는 이 세상에서 갖은 박해를 받고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잘 살게 해 주실 것이라고 백성을 위로하며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만든” 하난야는 이 세상에서 영화를 입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은 예레미야를 살리시고 하난야를 죽이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어떤 예언자가 이 세상에서 존경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내 백성아, 이 세상에서 나와라!”라고 외치는 주님의 목소리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하느님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로 이어진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아무 것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아무도움도 받을 필요가 없이 넉넉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고 더군다나 하느님의 은혜가 없이는 존재조차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물질, 지식, 재능, 시간뿐 아니라 동안에 축적한 무엇인가가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도록 쓰임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관리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지구상의 드러난 기아문제가 해결된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수가 25년 전보다 2억 명 이상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세계식량계획(WFP)은 '2015 세계 식량 불안정 상황' 보고서에서 "전세계에서 건강한 삶을 영위할 만큼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인구가 7억9천500만 명"이라고 밝혔습니다. 전체 인구에서 기아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1990년 23.3%에서 현재 12.9%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매년 1천만 명이 기아 또는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결식아동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어린이 보육문제, 무상급식문제로 아직도 시끄러운 것이 정말 아이들을 위해서 고민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베푼다는 시혜의 개념보다 서로 나누는 것에 마음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에 앞서 영적으로 충만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감사할 있다면 더 큰 감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주면 줄수록 더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깊이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똥도 쌓아 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된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기적의 시작점
최재도 신부님
예수님은 당신께 다가온 군중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생각이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호소하는 의미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밖에 없다며 가져왔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그때서야 군중을 자리에 앉게 하십니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군중에게 모두 나누어 줍니다. 그러자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모두가 빵을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빵을 뻥튀기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요 ? 우리는 빵이 불어난 상황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께서 그 기적을 행하실 수 있게 한 근원적 동력에 대해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기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는 어디에서 났습니까 ?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서에는 그것을 준 이가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을 준 사람은 바로 아이였습니다. 안드레아 사도가 아이한테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예수님께 가져다줍니다. 아이는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식량 전체를 희생해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어린이의 작은 희생이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시작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작은 희생이면 충분함을 아시고 군중을 자리 잡게 하고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 작은 것을 나눈다고 뭐가 되겠어 ?’ 라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 절대로 작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작은 것에서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그 작은 것을 그저 하느님 앞에 내놓고서 예수님처럼 ‘감사’ 를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는 하느님 몫입니다.
2002년 7월에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동네 부인이 아침에 음식 찌꺼기를 버리기 위해 하수구에 가까이 갔을 때 그 안에서 어린아이 신음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부인은 곧바로 119 구조대에 연락을 했고, 그 안에 빠진 4세 된 남자아이를 무려 47시간 만에 극적으로 건져냈지요.
이틀 전에 아이를 잃었다고 미아신고까지 하고 아이를 기다리던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사람들까지 감격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가 하수구 속에서 만 이틀 동안 어떻게 견뎠을까요? 그 더러운 하수구 물에 빠져 있었는데도 건강하게 살아났으니 기적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했지요.
그런데 우리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수구보다 어쩌면 더 더러운 곳이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들이 안고 있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세상을 더럽게 만들면서 우리들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우리들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질까요? 아닙니다. 앞서 그 아이가 신음소리를 냈기에 부인이 들어 신고를 할 수 있던 것처럼, 우리의 소리를 통해서만이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들처럼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뛰어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그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르는 군중들이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가지 않자, 제자들이 말합니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 이 땅에 소외받아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지요. 그러한 그들을 주님께서는 차마 내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이르십니다.
이렇게 배려해주시고, 이렇게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들으실 수 있는 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능력이라면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실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나눔을 통해서 큰 기적을 일구어 내시지요.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울려 퍼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나눔을 통해 큰 기적을 일구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주님의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것. 그 놀라운 광경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신나지 않습니까?
위대함을 흉내 내지 마라.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기꺼이 받아들여라(사무엘 콜리).
IQ와 MQ의 한판 승부(김승희, ‘행복한 동행’ 중에서)
작은 벤처기업을 어엿한 중소기업으로 성장시킨 대표를 인터뷰할 때였다. 이야기 중에 대표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휴~ 직원들 때문에 고민이 많아요. 회사가 성장궤도에 올라 기분이 좋다가도 직원들을 보면 자꾸 답답해져요.” “왜 그러시는데요?” “기자 양반은 사람을 많이 만나니까 알 것도 같은데, 하나만 물어 봅시다! 만약 당신이 대표라면, 머리 좋은 직원과 일하겠어요? 인간성 좋은 직원과 일하겠어요?”
대표의 사정은 이랬다. 당장 경영 실적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직원들을 학력과 사내시험 위주로 선발했다. 시험 내용은 암기력, 추리력, 논리력 등 IQ 테스트와 다름 없었다. 하지만 수재들을 뽑았다며 기뻐한 것도 잠시, 도무지 융합이 안 되고 다툼과 문제만 빈번해 대표는 골머리를 앓았다. 고민을 듣던 중에 한 경영 컨설턴트가 떠올라 상담을 권했고, 얼마 뒤 대표는 고민을 해결했다며 연락을 해왔다. “IQ가 빼어난 수재들은 동료들과의 협력이 많이 부족했어요. IQ만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인간성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지요. 인간성이 훌륭한 인재가 업무 현장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더군요. 이제 우리 회사는 MQ 테스트를 합니다.”
대표가 말한 MQ는 마인드 퀄리티(Mind Quality), 바로 인간력이다. MQ는 매사에 의욕을 보이며 배우려는 자세, 이해가 될 때까지 끈기 있게 조사하고 계획한 것을 신속하게 실천하려는 행동력,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대인 관계 능력, 남의 험담과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정직성, 자신의 잘못과 실패를 인정하는 솔직함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직장에서 일할 때도 명석한 두뇌뿐 아니라 일에 몰두하는 자세와 생활 태도 등 인간성 중심의 올곧은 마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IQ와 MQ의 대결에서는 MQ가 승리했다. 대표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나의 엉뚱했던 답이 고민 해결에 적잖은 자극이 되었다며 웃었다. 엉뚱한 대답이 뭐냐고? “만약 제가 사장이라면 잘 통하는 직원을 뽑을 것 같은데요. 여우랑은 살아도 곰이랑은 못산다잖아요! 직장도 제2의 집인데, 안 통하면 같이 못살죠! 하하.”
펭귄의 생존 전략
김희준 신부님
남극 지방의 겨울철 혹한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생물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특히 펭귄의 월동 지혜는 감동스럽기까지 합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펭귄 무리는 극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강풍을 피하기 위해서지요. 극점에 도달한 펭귄 무리는 서로 몸을맞대고 촘촘히 포개 앉아 원을 만듭니다. 그런 상태로 춥고 캄캄한 겨울을 보냅니다.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가혹한 추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체온을 나눔으로써 상대방의 체온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펭귄의 생존 전략인 셈입니다.
남극에서 펭귄들이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의 배고픔을 채워 주신 그 현장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내어줌으로써 생명을 보존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게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특별히 예수님이 ‘쉰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셨다고 전함으로써 그 해결 방법이 공동체와 무관하지 않음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펭귄처럼 혼자가 아닌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것을 내어줌으로써 힘겹고 메마른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해 나가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부자와 가난한 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
만족한 삶과 불만인 삶.
이 두 가지를 가르는 것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나의 평가라는 뜻으로 우리는 흔히 물 반잔의 비유를 들지요.
물이 반 잔 있습니다.
물 반잔은 우리의 바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 물 반잔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반잔이나 남았다고 하면 만족하고 행복할 것이요, 반잔밖에 없다고 하면 불만이고 불행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라는 표현을 씁니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나”된다고 하셨을 것입니다.
재산을 불리고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가진 것 다 잃고 쪽박마저 깨는 사람도 있습니다.
쪽박을 차는 사람은 작은 것을 무시하고 소홀히 합니다.
그래서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줄줄 새듯 돈이 줄줄 새고 맙니다.
손으로 모래를 퍼 담을 때 손가락이 벌어지지 않게 신경 써야지 손가락이 조금이라도 벌어지면 모래는 다 새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작은 것은 소홀히 하여 흘려버리고는 허황되기는 이를 데 없어 한꺼번에 떼돈 벌 생각만 합니다.
그러나 재산을 불리고 부자 되는 사람은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고 소중히 여깁니다.
그것을 성실히 모으고 종자돈 삼아 부자가 됩니다.
작은 것 안에서 무한히 큰 희망을 보고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부자는 그런 눈을 가진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작은 것에 실망하고 그래서 작은 것에서 아무런 희망과 미래를 보지 못하지만 부자는 겨자씨가 큰 나무 될 것이라는 희망과 미래를 봅니다.
세상 부자의 이치가 이러한데 하느님 나라의 부자의 이치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없는 데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부자 하느님께서 작은 것이라 하여 못하실 것이 없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더욱이 사랑이신 하느님이시기에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라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보다 더 작은 것을 가지고도 더 큰 일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