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이미드 필름
이영은
은색 레코드판 위를 무용수들이 뛰어다닌다
상처에도 투명해지는 흰 맨발을 하고
베이더라도 오래오래 웃을 수 있는 허파를 가지고
지빠귀가 잠시 앉았다 떠나간다
부러진 날개도 다시 자라나는 숲에서
스스로 깃털을 뽑아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아이들
마음에도 물웅덩이가 있다면
모두가 그곳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울타리의 밖에서 안으로
몰래몰래 뛰어들어오는 산양 무리
허물어져도 괜찮은 폭설을 이끌고 온다
빛 아래에서도 끝이 비치지 않던 절망
녹은 눈 아래로 드러나 있고
무용수들이 발끝으로 서서 턴을 돌 때
숲 안팎의 경계가 불확실한 음계로 읽힌다
문득 눈을 뜨면 발목이 부러져 있다
접질린 발목 위로 이상하리만큼
얇은 필름 한 장 떨어져 내린다
저편과 이편을 모두 이을 수 있을 만큼
기다란 필름이었고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이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처럼 읽히기 시작했을 때
무너지는 숲이 숲을 돕고 있다
ㅡ계간 《문학동네》(2022, 가을호), 2022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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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은 : 1998년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22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