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5일,
양원석 선생님, 김세진 선생님, 김종원 선생님과 더불어
김세진 선생님의 세 번째 책 "사회사업가의 책 읽기" 원고를 검토하다가,
"어떤 일이든 그 일을 구실로 당사자의 자주성과 지역사회의 공생성을 살려야 합니다."
이 문장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이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했습니다.
자주성을 살리는 것까지 (사업의 목적 또는 사회사업가의 의무로) 요구하는 게 부담스럽다 했습니다.
○
사회사업가는 맡은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으니,
특정 복지를 이루게 하는 것이요,
또한 더불어 살게 하는 것입니다.
자주케 하는 것까지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사업의 개념을 정의할 때도,
"당사자와 지역사회로 하여금 복지를 이루게 돕는 일이요 또한 더불어 살게 돕는 일입니다."
했습니다.
만약 자주케 하는 일이 사회사업가의 책무.본분 혹은 사회사업의 목표라 생각했다면,
사회사업 개념을 다르게 정의했을 겁니다.
자주케 하는 일까지 사회사업의 목표, 사회사업가의 책무로 본다면,
사회사업 개념을 지금과는 다르게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
복지를 이루게 돕는 일은 사회사업의 근近개념이요 말단 개념입니다.
더불어 살게 돕는 일, 이 일이 사회사업의 원 개념이요 근본 개념입니다.
복지심서 4쪽에도 이렇게 썼습니다.
"사회사업은 이웃 관계와 인정이 있는 사회,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사는 사회, 특히 약자와 친하게 공생하는 사회를 도모하는 사업이니, 사회사업의 道는 共生의 道요 親民의 道입니다.
사회사업가는 사람들이 친하게 사는 사회를 공작하는 사람, 親民社會工作員입니다. 사람들을 친하게 만드는 사업을 하는 사람, 親民事業家입니다. 사람들을 친하게 만드는 사람, 親民家입니다."
*
이런 점에서,
"어떤 일이든 그 일을 구실로 지역사회의 공생성을 살려야 합니다." 하면 편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그 일을 구실로 당사자의 자주성을 살려야 합니다." 하면 부담스럽습니다.
사회사업가이기에 어떤 일에서든 당사자의 자주성을 지키고 살리려 할 것입니다.
어떤 일로든 당사자의 자주성을 살릴 수 있겠고, 또한 어떤 일이든 당사자의 자주성을 살리는 구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일이든 '그 일을 구실로' 당사자의 자주성을 살려야 한다고,
자주성을 살리는 것까지 의무나 목표로 요구하는 게 부담스럽습니다.
* 자주성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특히 아동사업에 그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
복지요결의 관련 구절을 읽고 설명했습니다.
1.
먼저, 복지요결 33쪽.
복지를 이루는 데 당사자가 주체가 되는 것, 그 일에 당사자가 자주케 하는 것,
이는 사회사업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당사자의 자주성, 이는 지키고 살려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때로는 이 가치의 실현이 사회사업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당사자의 자주, 이것 자체를 사회사업의 이상이라 하기에는 어색하거나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사회사업 이상으로서는
약자와 공생하는 사회, 이렇게 공생 쪽에 더 마음이 갑니다.
2.
이어서 복지요결 37쪽.
요컨대
자립은 일부 복지사업의 목표이고,
자주는 모든 사회사업의 원칙입니다.
자립을 목표하는 사업에서도 자주성은 지키고 살려야 할 가치이며,
당사자의 자주는 그 절차.방식에서 지켜야 하는 원칙입니다.
* 이 문장의 각주도 다루었습니다.
"사회사업은 당사자와 지역사회로 하여금 자주.공생케 하는 일이요, 사회사업가는 (궁극적으로) 자주하는 당사자의 삶과 공생하는 지역사회 사람살이를 보려 합니다. 이런 점에서 자주는 목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3.
그리고 복지요결 40쪽 [사회사업의 이상]편에서
약자와 공생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사회사업가의 책무이며 사회사업의 이상임을 설명했습니다.
약자와 공생하는 사회는 "약자가 자주할 수 있는 터전"이라 했습니다.
공생하는 사회는 또한 행복, 정의, 평화의 토대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회사업의 목표|이상|책무를 한정하는 게 좋겠다 했습니다.
공생하는 사회 그 위에 자주, 행복, 정의, 평화 등 상위 목표를 설정할 수 있으나,
사회사업의 영역은 [공생]까지로 제한하는 게 좋겠다 했습니다.
자주, 행복, 정의, 평화가 중요하고
이러한 가치가 공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까지 사회사업의 목표나 책무로 삼기는 어렵다 했습니다.
4.
양원석 선생님은,
공생성은 자생의 조건이다, 자생을 위해서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하시고,
그러므로 자생을 사회사업의 목표|이상으로 삼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 양원석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생'이라는 용어는 '자주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종원 선생님은,
생태체계 관점에서 자주.자주성이 사회사업의 목표가 될 수 있다 했습니다.
당사자 체계와 환경 체계,
그 중 당사자 체계에 대한 목표로서 자주.자주성을 상정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습니다.
5.
저 또한 어떤 일을 하든 "당사자의 자주성"을 살리려 합니다.
특히 아동사업에서는 이것을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전에 쓴 글에, 자주성(인격) 세우는 것을 목표처럼 표현한 적이 있지 않은가 염려됩니다.
복지요결에서 "구실로"를 검색해 보니, 어떤 일을 구실로 인격이나 자주성을 살려야 한다고 표현한 구절은 없습니다.
복지요결에는 없지만, 카페에 혹 그렇게 표현한 글이 있는지 모릅니다.
복지요결에서도,
당사자의 자주성, 때로는 이 가치의 실현이 사회사업 목표가 되기도 한다 했고,
사회사업가는 자주하는 당사자의 삶을 보려 하니 이런 점에서 자주는 목표가 될 수도 있다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주성을 모든 사회사업 활동의 목표나 의무라 하기는 여전히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구실로 자주성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6.
복지요결에서 "구실로"를 검색해 보니,
어떤 일을 구실로 인격이나 자주성을 살려야 한다고 표현한 구절이 없습니다.
복지요결에서 "자주"나 "당사자의 삶"을 언급한 곳을 보니
이는 어떤 사업을 할 때,
복지를 이루는 그 일에서 당사자가 자주(선택.통제, 주체로 참여)하게 함으로써,
복지를 이루는 그 일이 당사자의 삶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반찬사업을 예로 들면, 반찬복지를 이루는 일을 당사자가 자주케 함으로써 즉, 반찬복지를 이루는 활동을 당사자가 선택.통제하고 당사자가 그 일에 주체로 참여함으로써, 반찬복지를 이루는 그 일이 당사자 그 사람의 삶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자주"나 "당사자의 삶"을 이렇게 당면 과업, 현재 활동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사회사업 목표.이상 또는 사회사업가의 본분.책무.사명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전 생애, 전 생활에 걸쳐 자주하는 것까지 간여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당사자를 종합대상자로 보지 않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지금 이 일에서 자주케 하면 향후 다른 일에서도 자주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지만, 과제로 여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일에서 자주케 함으로써 다른 때 다른 일까지 대처할 수 있는 항산적 바탕을 만들자 하지만, 사후의 자주까지 사업의 목적이나 의무로 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공생에 대하여는 다릅니다.
12쪽. 사회사업 개념도 공생,
40쪽. 사회사업 이상도 공생,
77쪽. 사회사업 본분도 공생이라 합니다.
사회사업은 한마디로 이 사회의 공생(특히 약자와의 공생)을 담당하는 사업이라 합니다.
사회사업가는 한마디로 이 사회의 공생을 담당하는 사람이라 합니다.
복지요결에서 보는 바,
당사자의 자주는, 복지를 이루는 일 그 절차와 방식에서 지켜야 하는 원칙이고,
당사자의 자주성은, 복지를 이루는 과정에서 지키고 살려야 할 가치입니다.
이 원칙과 가치를 지키는 것,
사회사업가의 책임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일 후에도, 언제 어떤 일에서든 당사자가 자주하길 바라기는 하지만,
거기까지 사회사업가의 책무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자주와 자주성이 그 때 그 일 그 과정의 원칙이요 가치임에 반해
공생과 공생성은, 그에서 더 나아갑니다. 사회사업의 이상, 사회사업의 본분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7.
자주케 하는 일, 이것까지 사회사업 목표 또는 사회사업가의 책무.본분으로 설정한다면
사회사업 개념을 수정하고 사회사업 이상도 다시 써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흔들면, 복지요결 전체를 다시 써야 할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은 감당키 어려워 보이지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여러분의 비판과 질정을 기다립니다.
8.
양원석 선생님의 반론,
김종원 선생님의 보론,
고맙습니다.
두 분의 말씀을 제 나름대로 수용하여
복지요결 37쪽의 각주를 다음과 같이 수정했습니다.
* 진하게 쓴 문장을 추가했습니다.
[자주|자주성]을 사회사업의 목표나 이상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사회사업은 당사자와 지역사회로 하여금 자주.공생케 하는 일이요, 사회사업가는 자주하는 당사자의 삶과 공생하는 지역사회 사람살이를 보려 합니다. 이런 점에서 자주는 목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단어의 뜻으로 보아도, 가치는 목표와 분리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사회사업 이상은 사회사업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생태체계 관점으로 보아도 당사자 체계의 자주성을 환경체계의 공생성과 똑같이 중요한 목표로 볼 수 있겠습니다.
첫댓글 '자주케 하는 일이 사회사업가의 책무.본분 혹은 사회사업의 목표'라 할 수 있는가?
평창에서 시골팀 합동연수를 할 때,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특정 프로그램이나 아동사업에서는 목표가 될 수도 있겠으나,
사회사업의 목표라고 하기는 부담스럽다.
정일형이 하는 어르신 사업의 목표로, '어르신의 자주성을 기른다'고 할 수 있을까?
특정 활동이나 과업에서 당사자가 그 일의 주체로 참여하여 자주토록 도울 수는 있으나,
사회사업의 목표나 사회사업가의 본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동사업을 구실로 당사자의 자주성과 지역사회의 공생성을 살린다.'
철암에서 아동사업의 목표로 자주성과 공생성을 오래 써 왔기에,
평창에서 선생님 말씀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게시판 글을 읽으니,
'당사자의 자주성'은 특정 분야나 과업으로서 목표가 될 수도 있겠으나,
사회사업의 목표나 이상, 사회사업가의 본분이라기는 부담스럽다는 말씀을 알겠습니다.
"당사자와 지역사회로 하여금 복지를 이루게 돕는 일이요 또한 더불어 살게 돕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회사업의 개념은, 사람다움과 사회다움을 궁구하여 정의했습니다.
사람다움-인격적 가치-자주성
사회다움-사회적 가치-공생성
[당사자와 지역사회로 '하여금' 복지를 이루게 돕는 일] = 자주성
[또한 더불어 살게 돕는 일] = 공생성
이렇게 보면, 자주성과 공생성은 동등한 수준의 목표로 보입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단 개념과 근본 개념으로 보면,
자주성과 공생성이 동등한 수준의 목표는 아니겠습니다.
아동사업에서 '당사자의 자주성'을 목표로 삼았고,
마땅하다고 보았지만,
특정 시기나 특정 프로그램에 한정한 것이지,
사회사업 전체로 확장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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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사회사업가로서 '지역사회의 공생성을 살린다', '더불어 살게 돕는다'는 기꺼우나
특정 활동이나 사업을 넘어서서, '당사자의 자주성을 살린다'고 하면,
지나치게 참견하는 것 같고, 부모 노릇, 선생 노릇 하는 듯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아동사업에서 '당사자의 자주성'을 목표로 삼지만,
특정 프로그램이나 활동에서 그러한 것이고,
나아가 아이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것이지,
사회사업의 목표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점도 있는 듯 합니다.
'자기주도적인 삶'은 교육자의 사명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러나, 지금, 철암에서 아동사업은
당사자의 자주성을 지역사회의 공생성과 함께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당사자가 변화하고 자주하는 것. 그 건 그 사람의 인생 살아가는 몫이겠지요. 그 사람이 지역사회내에서 잘 살아 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렇게 자신의 살림살이를 재구성하거나,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사회복지사가 해야할 역할 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충분히 자신의 삶의 선택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기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정신장애인을 만나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우리가 일으켜세워 걷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도움이 그 사람의 삶의 회복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요. 당사자가 자주 해야한다는 생각이 시작이 그들은 자주 할 수 없다는 것에서
출발한 거라고 한다면, 우리가 큰 오해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은 비록 삶을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 상황속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갑니다.(자주) 그 어려움을 풀어나가고 살아가는데, 우리가 이웃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끄럽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배움이 짧은 제가 두서없이 글을 썼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세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머리에서 돌아돌아....계속 빙빙거리는 의미입니다.
일하고 있는 현장에서 자주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냥...쓰고 있습니다.
사례관리를 할때 더더욱 자주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지역복지일을 할때 공생성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하지만 사회복지사의 책무로서의 자주성....
물리치료사가 환자를 케어할때 자주성을 목표로 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케어할때 자주성을 목표로 하여 완치를 하고자 합니다.
사회복지사가 클라이언트(지역주민, 시설장애인, 센터아동, 북한이탈주민)를 케어하기 위해 자주성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한다면....왠지....사회사업이 대상화되는 느낌이 듭니다.
2월말까지 복지생각 다듬는 것에 매진하려 합니다.
복지생각 다듬을 때 말씀하신 이 내용도 깊이 궁리하겠습니다.
다른 사업은 잘 모르겠으나 제가 하는 '아동사업'은
대상이 아이라는 이유로 준비, 진행 과정에서
'대상'으로만 머무르기 쉬운 면이 있습니다.
다만, 요즘은 '자주'가 목표라기보다
'자주'가 실천의 소중한 '원칙'으로 여기고 일합니다.
"자주하는 당사자의 삶, 공생하는 지역사회 사람살이 - 이렇게 자주.공생하는 인간.세상이 사회사업 이상입니다." - 복지심서 8쪽
이렇게 쓴 글을 발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주성 살리는 것을 사회사업의 목표로 여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단정 아님)
자주성을 (지키고) 살린다는 것은 돕는 과정에서 사회사업가가 지켜야 할 윤리이며, 자주성은 바로 그 윤리의 준거가 되는 "가치"입니다.
더 궁리해 보겠습니다.
현재는, "살린다"는 말이 불러오는 혼선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