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의 고객을 만나라… 환자 고충 이해하려 수술실까지 들어가
진짜 좋은 아이디어는, 하버드大 같은 곳이 아니라 무명의 작은 조직에서 오히려 많이…
R는 고객이 D는 우리가, 연구는 외부 전문가에 일임 9000명의 엔지니어들은 개발과…
중국에서 생산 안 하는 까닭, 세계 최고의 기술력 갖춘 4곳에서만 주요 부품 생산…
"아기 심장이 멈췄어요. 수술을 중단합시다!"
1950년대 중반 미국 미네소타대 부속 병원의 한 수술실. 병원이 정전(停電)돼 심장병 수술을 받던 신생아의 몸과 연결된 인공 심장박동기(pacemaker)의 전력 공급이 차단되자 아이가 돌연 사망했다. 의사들은 패닉에 빠졌다.
주치의 릴레하이(Lillehei) 박사는 머리를 쥐어 짰다. 이런 일의 재발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하던 그는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 병원 인근 의료기기 수리점을 운영하던 얼 바켄(Bakken)씨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내가 개발한 반영구적 수명의 초소형 배터리 기술을 결합하면 전력 중단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휴대용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두 사람이 협력해 개발한 휴대용 인공 심장박동기는 개발 4주 만에 해당 병원에 보급됐고 '내 기술과 남의 아이디어의 결합'에서 힌트를 얻은 바켄은 심장병, 고혈압, 당뇨 등 만성 질환을 치료하는 의료기기 회사 메드트로닉(Medtronic)을 창업했다. 65년이 지난 지금 메드트로닉은 어떤 회사가 됐을까? 직원 4만5000명에 매출 161억달러(약 18조원), 영업이익률 30%. 이 회사의 지난해 성적표다. 인공 심장박동기는 몸속에 넣는 제품으로 발전해 현재 매년 50만명이 시술받아 쓰고 있다.
메드트로닉의 성공 비결은 이 회사 강령의 하나로 못 박혔다. 의역하자면 '자체적으로 기술을 만들 뿐 아니라 남의 기술도 적극 도입하자'는 대목이다. 요즘 경영계의 화두인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개방형 혁신)이 창업의 동기가 되고, 회사의 DNA가 된 것이다.
"세상엔 숨어 있는 열정적인 아이디어가 많습니다. 사실 혁신은 우리끼리만 머리를 쥐어짜 '아하!' 하며 갑자기 발견하는 게 아닙니다. 평소에 생활 속에서 겪는 어려움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린 그런 측면에서 어느 업종보다 훨씬 앞서 간다고 생각해요."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메드트로닉 본사에서 만난 오마 이슈락(Ishrak·56) 회장은 기자에게 물었다. "삼성전자, 벨연구소, 미쓰비시. 이런 대기업들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그는 스스로 대답했다. "사내 연구개발실에서 낸 아이디어로 제품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외부 아이디어를 수혈해 제품을 개발하는 열린 혁신을 추구해요."
그가 말을 이어갔다. "혁신적인 신제품을 개발할 때 우리의 핵심 원칙은 '우리 머릿속에서 나온 제품 아이디어는 쓰지 말자'입니다. 무조건 외부 의사 등 전문가의 아이디어로만 99%를 만듭니다. 아이디어 제공자의 아이디어가 제품으로 출시될 때는 해당 제품 매출의 1~4%를 일정 기간 로열티로 지급하는 방법으로 보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회사들과 달리 'R&D(연구·개발)'에서 R(연구)보다 D(개발)를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연구·개발 예산은 주로 개발에 투입됩니다."
메드트로닉은 다양한 방식으로 열린 혁신을 추구하고 있다. 그 원칙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고객의 고객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이 회사의 1차 고객은 의사이지만 의사의 고객인 환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없다. 이슈락 회장은 "직원들이 의사보다 환자를 더 많이 만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우리 회사엔 의사보다 수술실에 더 많이 들어간 경력 있는 임상 전문가들이 수천명입니다. 결과적으로 환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됩니다."
둘째, 나에겐 없는 아이디어를 보유한 기업을 사들이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이 회사는 연간 이익의 50%를 주주들에게 돌려줬지만, 나머지 50%는 기업 인수·합병에 써왔다. 매년 10~15개의 회사를 인수·합병한다.
"우리는 일종의 벤처캐피털리스트이기도 합니다. 스위스의 심장혈관 전문 회사, 아일랜드의 척추회사…. 유망한 기업에 투자하고 이사회의 일원이 됩니다. 지속적으로 새 아이디어를 수혈받으면서 진짜 필요하면 아예 사는 것이죠."
이 회사는 2009년 스위스 로잔에서 벤처 인큐베이터 사업을 시작했다. 예비 창업자의 아이디어를 채택해 초창기 사업자금을 대주며 키우는 것이다. 그는 "인공심장 관련 치료 기기를 만드는 프로젝트 등 대여섯명의 창업자들을 아예 처음부터 직접 키우고 있다"고 했다.
셋째, 의료계의 위키피디아(Wikipedia)로 변신하는 것이다. 메드트로닉은 문턱 없이 지식을 나누는 위키피디아 모델을 벤치마킹한다고 했다. 2009년에 만든 '유레카(Eureka)'란 아이디어 수집 사이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전 세계 의사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접수하고 유망한 아이디어는 라이선싱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매년 접수되는 500~600개 아이디어 중 4~5개를 엄선해 제품을 개발한다.
이노센티브(Innocentive)라는 글로벌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 서비스 기업도 이용한다. "전 세계 170개국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회원인데, 기업들이 당면한 기술적 도전을 이곳에 올리면 회원들이 해결책을 제시하고 채택되면 1만~10만달러를 받죠. 저희는 시베리아·아프리카·중동 등 여러 지역의 전문가로부터 문제를 해결받고 있어요."

- ▲ 오마 이슈락 메드트로닉 회장
메드트로닉 본사는 미국 미니애폴리스 공항에서 북쪽으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전 세계 120개국의 270개 생산공장과 지사를 지휘하는 곳이다.
이슈락 회장은 면바지에 남방 차림이었다. 대부분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인 직원들은 로비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활발하게 토론하며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65년 된 글로벌 기업의 전통보다 갓 창업한 벤처기업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한국 기자가 온다고 해서 회사 정문 앞 여러 깃발이 꽂힌 곳에 태극기가 함께 걸려 있었다.
그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슈락 회장은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대학을 나온 뒤 필립스를 거쳐 GE 헬스케어 부문에서 2005년부터 6년간 CEO를 지냈다. 그러다 2011년 중순 메드트로닉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짜 좋은 아이디어는 하버드대에서 안 나온다

메드트로닉은 매년 50~60개의 제품을 출시한다. 매출 상위 제품에는 인공 심장 박동기에 이어 협심증 치료에 쓰이는 스텐트(stent), 이식형 제세동기(defibrillator)가 포함된다.
이 회사가 자랑하는 수치 중 하나는 최근 2년 사이에 출시된 신제품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83년 14%에서, 1989년 40%, 현재는 50%로 껑충 뛰었다는 점이다. 업의 특성상 제품 출시까지 평균 7년 소요되고, 정부 규제가 날로 강화되는 시장 상황을 고려한다면 의미 있는 성과로 받아들여진다. 이슈락 회장은 오픈 이노베이션에 쏟은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참고로 글로벌 제약회사 노바티스(Novartis)도 최근 5년간 출시한 신약의 매출액 비중이 28%(2011년 기준)인데, 그게 글로벌 제약업계 1등이다.
그는 "가장 좋은 아이디어는 하버드대 같은 유명한 조직에선 나오지 않더라"고 했다. 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조직에서 아이디어가 많이 나타났다고 했다.
"예컨대 지금 보편화한 척추의 인공 디스크 수술에 사용되는 인공 디스크는 독일 베를린의 작은 병원 정형외과 의사 생각이었어요. 과거 올림픽 체조선수였는데, 허리 디스크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뒤 의사가 돼 자기 병을 직접 고치겠다며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이스라엘·러시아·폴란드 같은 여러 지역에서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이 회사엔 모두 6개의 사업 부문이 있는데, 부문마다 세계 각지의 의사들로 구성된 고문단이 있다.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평가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제공한다. 그러나 이슈락 회장은 "그들(의사 고문단)에게만 의존하면 큰일 난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 세계 각지의 좋은 아이디어라면 다 돈을 주고 사옵니다. 예컨대 과거 미국 우주항공국(NASA)이 로켓에 쓸 얇은 절연재 물질을 개발했는데, 저희가 볼 때 매우 유연하고 생물학적인 물질이라서 환자 몸에 맞는다고 판단했어요. 결국 우리 제품에 그걸 도입했죠."
물론 개방형 혁신엔 리스크도 따른다. "모르는 사람과 거래하기 때문에 똑같은 아이디어를 경쟁 기업에도 제공할 수 있는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아이디어 제공자와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계약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또 자신의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으면 모욕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더군요. 아이디어를 안 쓰더라도 끝까지 상대를 존중해 줘야 해요. 또 로열티 등의 확실한 대가도 약속해야죠."
◇R(연구)은 하지 않고 D(개발)만 한다메드트로닉의 R&D 원칙은 'R(연구)는 외부 전문가에게 얻고 D(개발)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회사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그냥 아이디어가 와주기만 기다리는 것일까?
"아닙니다. 9000명의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은 기존에 나온 제품을 수정하고 개선해 출시하는 '내부 혁신'을 합니다. 기존 보유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키죠. 또 하나 중요한 건 품질 관리입니다. 의료기기는 아이폰과 다르거든요. 아이폰은 고장 나면 버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의료기기는 잘못 만들어 고장 나는 순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핵심 부품인 건전지·회로판·콘덴서 같은 것은 아웃소싱 하지 않고 직접 만드는 게 원칙이다. 티타늄 같은 제품 외관만 아웃소싱한다. "주요 부품은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곳 딱 4곳에서만 생산합니다. 푸에르토리코·아일랜드·싱가포르·스위스 로잔입니다. 고급 엔지니어가 많이 배출되는 곳입니다."
"왜 중국에서 생산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메드트로닉은 '값싼 노동력'이란 말을 가장 싫어한다"고 대답했다. "몸에 들어가는 물건을 만들기에 세상의 어떤 물건보다 섬세하고, 가장 완벽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그가 갑자기 책상에 놓인 타이레놀 알약 크기의 물체를 들었다. 1년 반 뒤에 출시될 최신 인공 심장 박동기다. 그는 "50년 전 손바닥만 한 크기였던 게 이렇게 작아졌지만 모든 기능이 다 담겼다"고 했다. "지금 저희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혁신은 몸속의 심장 박동을 스마트폰으로 보고 조절하는 거예요. 굳이 병원을 가지 않고도 내 심장 박동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지 나 스스로 알고 조절하는 거죠. 나중엔 굳이 심장에 꽂지 않고 피부 속에 넣기만 해도 된다면 좋을 겁니다. 그게 우리의 꿈입니다."

- ▲ 미국 멤피스에 있는 메드트로닉의 생체역학 검사 연구소에서 직원들이 의료 기기의 품질을 검사하고 있다./Bloomberg
◇고객의 고객에게 바로 가라
단순히 기업이 아이디어의 문호를 개방한다고 해서 개방형 혁신이 가능할까?
이슈락 회장은 "조직의 뿌리에서부터 최종 고객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쉽게 말해 1차 고객인 의사보다 의사의 고객이자 우리의 최종 고객인 환자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상 훈련을 받은 메드트로닉의 병원 영업 직원은 최소 1년에 한 번 수술실에 입회합니다. 물론 의사의 동의를 받고요. 몇몇 직원은 연간 수백 차례 들어가기도 해요. 환자의 생생한 고충과 어려움은 생생한 아이디어의 원천입니다." 매년 메드트로닉 본사에서 전 사원이 참여하는 가운데 메드트로닉 제품으로 인생이 바뀐 환자를 초청해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을 여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환자의 불만은 제품 개선의 지름길이다. 척수에 미세한 전류를 보내 통증을 완화하는 자세 감지 척수 자극기(SCS)가 한 사례다. 그는 "기존엔 환자들이 걷거나 앉는 등 자세를 바꿀 때마다 몸에 설치된 척수 신경 자극기를 스위치로 조절해야 했지만, 환자들이 불만을 토로해 환자의 움직임을 자동으로 인식하는 소프트웨어를 탑재해 개선했다"고 했다.
메드트로닉은 요즘 인도와 중국 같은 신흥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신흥시장 진출 전략의 모토 역시 '환자에게 바로 가라(go direct to patient)'이다.
"신흥시장에서 충분히 소비 여력이 있는 환자 가운데 우리 의료기기를 쓰는 잠재력 있는 환자는 고작 8%밖에 안 돼요. 달리 말하면 92%는 우리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돈이 있음에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비율을 선진국 수준인 25%로 높인다면 우리에게 큰 기회일 겁니다. 그 정도로 사업 기회가 많고, 시장 돌파 가능성이 충분한데도 왜 안 되고 있었을까요? 제가 보기에 환자들이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도와 중국에서 의사는 물론 환자까지 교육하고 필요한 장비를 공급하고 치료를 지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회사는 인도 전역의 병원 4곳에 검진 캠프를 설치하고 현지 의사들과 협력해 환자들에게 심장병과 당뇨 등에 대해 교육과 상담,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4만명을 진료해 이 중 4000명을 치료했고, 200명은 인공 심장 박동기를 몸에 이식해 줬다고 한다.
◇긍정의 힘을 쉬지 않고 퍼뜨려라헬스케어 산업은 신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일각에선 전망이 너무 부풀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의견에 대해 이슈락 회장은 "의료에 대한 니즈(needs)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미래를 낙관했다.
그는 "서구 사회의 인구구조는 고령화돼 가고 있고, 신흥시장에서는 고령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고품질 헬스케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게 더 중요해졌다. 그 의미는 헬스케어에 대한 니즈가 여전히 크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헬스케어 기업 CEO가 양보하면 안 되는 원칙이 무엇인가"란 마지막 질문에 그는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decisive)"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는 쉬지 않고 주위에 퍼트리는 '긍정의 힘'입니다. 또 연구개발비를 목숨처럼 생각해야 해요. 수십 년째 매출의 9% 이상을 연구개발에 쏟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