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꾸 문제가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그에 따른 감정의 에스컬레이션 더 심해지는 것 같은데, -_-; 좀 머리를 식히면서 생각을 해보자구요. 그런 의미에서 따로 글을 써봅니다. 리플들 뒤섞이는 것을 보니 분명히 두 분 께서 실시간 혈전을 벌인 흔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말이죠.. -.-;;;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 늘 존중받을 대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보편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개념으로써 "인명"이라는 것은 사실, 비교적 근대에 와서 전적으로 '발명'된 것이니까요. 물론, 어느 시대의 어느 사람들에게도 나 이외의 다른 개체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라는 관념이 어느정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람이 나와 같은 인간이든 아니든과는 별개의 사실로써 그 사람에 합당한 대우를 그 시대의 기준에 따라 했으며, 그 '합당함'/'합리성'의 기준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을 전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현대사 게시판이었나에서 외계인에 대한 재미있는 글들이 올라왔었지요? 우리랑 전혀 다른 존재가 과연 사고의 흐름에 있어서 우리와 얼마만큼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까.. 라고 말이지요. 어찌보면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와 대단히 비슷한 동시에 우리와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공의 차이가 만들어낸 같은 세계에서의 '외계인'이죠.
아즈텍인들의 경우에는 그 양상이 더욱 복잡해집니다.
그들의 문화와 문명수준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질문명의 척도로써 봤을 때에는 석기시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특히 모든 문화권에 존재했음에도 어느 시대 이후에는 더 이상 존속하지 않았던 인신공양과 식인의 풍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하나의 시대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시대의 단편인 동시에 지리적으로도 서양과 서구 사이의 바다로 인해 단절된 존재이고, 문화나 종교적으로는 두말할 나위 없이 '기상천외' 그 자체입니다.
즉,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근세'의 역사를 기준으로 따질 때 그들은 그 흐름에 유리되었거나 그 흐름과 전혀 상관없이 흘러가는 고유의 시대관념 및 정신관념들을 가지고 있었고, 아즈텍에있어서의 불행은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함께 이질적인 두 시간의 단편들(유럽이라는 '근세', 아즈텍이라는 '석기시대'(이렇게 규정짓는 것은 좀 무리한 감은 있지만요 -.-;;))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만나 서로 이해나 융화의 과정을 거치기 전에 일방적으로 파괴와 흡수의 과정을 거쳐 '세계사' 아래 귀속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중적인 것입니다.
아즈텍과 서유럽문명의 접촉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상반된 이해의 방식 사이에서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모든 인간들은 서유럽에서 파생된 사고방식과 개념들을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말인즉슨, 우리가 동양인이든 뭐든간에 우리가 세계의 역사(서유럽이 최종적으로 '이끌어온' 역사)내에 통합된 이상 한국인인 우리 또한 사실 근본적으로는 서구문명의 자식들 (사생아? -.-;;) 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특히 민주주의와 인권의 개념은 계몽주의 시대에서 직접 유래된 것이고 서구철학 및 서구적 사고방식의 색채를 아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설사 그것이 서구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인 면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모든 인간의 목숨은 소중하다는 관념은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당위성에 비쳐봐도 그것은 너무나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죠. 그러나, 근래의 자유 및 평등의 개념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또 다른 유산은 절대적 도그마에 대한 대항과 거부의 정신, 그리고 서로 다르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와 '똘레랑스'의 정신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려받은 그 두가지 개념들이 서로 모순되는 현상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는거죠. 인명을 경시하는 외부존재를 대면하게 되었을 때 과연 우리는;
1) 인권과 휴머니즘을 중시하여 그 외부존재를 매도해야 하느냐?
2) 아니면, 상대성 및 똘레랑스의 원리에 입각하여 그 비인간적 행위들 까지도 인정을 해야 하느냐?
이런 갈들에 빠져든다는 겁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맑스가 얘기했죠 - "인류는 항상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만 취급한다..." 라구요.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어딘가에 우리가 간과한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1)번의 입장도, 2)번의 입장도 그 상대를 '우리의 입장'에서 판단한 결과라는 겁니다. 상대를 있는 그래도 받아들여서 판단하는게 아니라, 상반되는 두 입장이 모두 우리의 기준에서 판단한 겁니다. 물론, 판단의 주체가 우리들인 만큼 어느정도 우리의 '해석'이 들어갈 수 밖에 없지만, 정말로 객관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한다면 1)과 2)의 두 가정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가 하면;
* "1) 인권과 휴머니즘을 중시하여 그 외부존재를 매도해야 한다"
이 입장은 일단 기본적으로, 인권과 휴머니즘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우리의 가치기준을 투영한 결과입니다. 그러한 개념이 나온 것은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상기해야겠죠. 일단 이러한 가치판단이 뭔가 꺼림직하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 "2) 상대성 및 똘레랑스의 원리에 입각하여 그 비인간적 행위들 까지도 인정을 해야 한다"
문제는 바로 위의 2번 입장입니다. 2번 입장대로 하면 왠지 꺼림직합니다. 1번의 입장이 편협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느끼기는 쉬운데, 2번의 입장을 대안으로 받아들이자니 이것 참 곤란하다는거죠. 그런데, 그러한 곤란함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2번의 입장 또한 1번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잣대로 판단한 또다른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1번의 태도를 거부하면서도 2번의 태도를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즈텍인들의 행위가 변명할 여지없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입니다. 즉, 2번의 입장 조차도 나름대로 '휴머니즘'개념이 개입된 가치판단이며, 그에 따라 아무리 상대적으로 아즈텍인들을 평가하고 싶어도 이미 나름대로 '그래도 그들은 비인간적이야...'하는 가치판단을 먼저 내려놓았기 때문에 갈등과 모순이 생긴다는 겁니다.
휴머니즘이나 인권의 개념의 바깥에서 생각을 한다는 것이 곧 그것들을 내다버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착각하지 맙시다. 저 또한 근대세계의 자식이고 자유와 평등과 박애, 그리고 인명의 소중함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즈텍인들과 저는 별개의 존재이고, 그 별개의 존재에게 내 행동을 통제하는 행동원칙을 개입시켜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겁니다. 그들과 저 사이에는 500년 쯤 되는 시간의 차이가 있고, 지리의 차이가 있으며, 그 500년 전에는 아즈텍은 물론이고 서양에서조차 '인권'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즉,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과연 어디까지 적용되느냐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아즈텍인들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신이 생활하는 원칙들을 잠시 모두 잊고, 그들의 모습 그 자체를 연상하여 상상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비로서 객관적 이해의 길이 열리는 겁니다.
아즈텍인들에게 있어서 희생제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살육이나 야만을 위한 폭력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세계가 멸망하지 않고 계속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지속되는 장엄한 제사이자 축제였습니다. 그들의 삶을 규제하는 거대한 원칙이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포장해봤자 그 야만성이 덜어지느냐... 하는 질문은 참기로 합시다. 왜냐하면, 지금 시대 사는 우리도 별반 다를게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우리는 법률과 관료주의라는 '거대한 원칙'을 신봉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부터 관료제와 법률의 통제 아래 태어나, 한낱 숫자가 새겨진 카드 쪼가리로 자신의 존재를 '등록'하는 주민등록증을 얻고, 법률이 우리를 통제하고 규제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원칙들이 깨어질 때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자기가 아는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공포감을 맛보게 됩니다. 교통법을 어기거나, 형사법을 어기거나, 데모에 나가서 처음으로 짱돌이나 화염병을 던지거나, 하지 말라는 짓을 하거나 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감은 "지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원칙에서 벗어나고 있다"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의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힘'에 사로잡혀 사는 노예들입니다. 우리에겐 피와 살육이 없다 뿐이지, 그 세계에서 태어나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세상을 규정하는 원칙이 있었듯, 아즈텍인들에게 그들의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은 신들의 힘이었고 그 신들의 힘이 사라지지 않고 자기 백성들이 계속 번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희생과 살육의 제의를 도맡는 것이 그들의 왕의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그 치하의 신민들에게 있어서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하고, 형식적인 '전쟁'을 통해 잡혀온 포로들의 숭고한 희생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계속 존속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전기와 진화론과 인권을 믿듯) 그들에게는 믿음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의 목숨은 중요하다 - 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인권 개념입니다. 아즈텍인들에게 있어서 인권은 - 누군가는 죽어야 햇님이 떠오른다 였습니다. 바이킹들이나 게르만인들에게 있어서 '인간다움'은 전사로써 살육과 폭력 속에 살면서도 그들이 믿는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용맹하다 싸우게 죽는 것이었듯이 말입니다. 즉,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생각은 어느 시대의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지만, 어떻게 살아가는게 인간다운 것인가에 대해서는 시대마다 모두 기준이 다르다는 겁니다.
아즈텍인들은, 그들 스스로 믿기에는 자신들이 비인간적이나 잔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죠.
그들 내부에서 그 삶의 방식에 대한 회의가 있었는지, 누군가가 변화나 '혁명'을 시도한 적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그 오랜 희생제의의 역사 중에서 혹시 누구 한 사람 쯤은 '정말로 사람이 안죽으면 햇님이 안떠오를까?'라고 생각했는지 또한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처럼, 아즈텍인들은 매일 제의가 열리면서 누군가의 신선한 피가 흘러 태양이 다시한번 떠오르고 세상이 평화롭게 돌아가는 것을 전혀 이상하거나 잔인하거나 비인간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때 그 사람들에겐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 뿐입니다.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정답은,
1) 그들은 비인간적이거나 야만적이지도 않았고
2) 지금 내가 내 개인적인 기준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와는 별개로 아즈텍인들은 특별히 자신들의 삶이 잔혹하다거나 가혹하다거나 비극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3) 따라서, 그들의 희생제의는 그들의 당연한 문화의 일부였을 뿐이다
...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날 이 새대에 사는 개인으로써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죠. 안 그럴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나, 내가 느끼는 거부감과 그 사실을 인식하는 태도는 별개의 것으로 의식적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생각하기에는 야만적인 것 같기는 한데, 아즈텍인들에게는 그게 문화의 일부였다'라는 복합적인 답변이 불가능한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두 가지 생각은 병존할 수 있는거에요.
여담이지만,
서로 같은 보편적인 '시대'에 살지 않았던 시절 - 세계 각국의 '시계'가 다른 분과 초를 가리키고 있던 시절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가는 실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또한 그런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말에 한반도를 찾아온 페리 제독이, 별다른 위생시설이나 흙바닥 깔린 집에서 살면서, 태형과 매질을 통해 처벌을 하고, 국가가 신봉하는 기본윤리방침에 어긋나는 천주교를 믿는다고 해서 집단으로 목을 베어 죽이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까요? 아직 휴지도 없던 시절, 뒷간에서 대충 볼일을 보고 짚새기로 비벼 딲는 것을 보면서는 뭐라고 생각했을까요?
서양인들이 자신의 기준으로 삼는 '시대'와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던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 당시에 야만국이었던 겁니까?
제국주의적 야욕이든 뭐든간에, 어쨌든 식인풍습과 부족전쟁을 멈추게 하고 관료제를 도입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대로 사람들이 살아가게 만들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화는 야만국을 비야만국으로 만들어준건가요? 그 식민지 인들은 적어도 '야만'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은 고마워 해야 하는걸까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근대화에 뒤져있던 조선이라는 '야만국'을 식민지 상태로나마 어쨌든 근대로 이끌어준 일본은 그런 공로는 있는걸까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아즈텍인들은 그런 식으로 '멸망'당해야 했을까요? 보다 지속적이면서도 호의적인 교류를 통해,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스스로 희생제의를 멈추고 인명의 소중함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는 없었을까요? 신의 이름 아래 그 문명을 정복하고, 앞으로 수백년 간 그 땅을 제물로 삼아 노략질한 서구인들에겐 적어도 그 '야만'을 멈추게 한 공로만큼은 있는걸까요?
이런 문제는 현대까지도 숱하게 이어집니다.
원리주의적인 샤리아 법을 따르면서 여성을 억압하는(우리가 보기에는) 이슬람인들의 문화를 과연 다른 국가가 끼어들어 고쳐줘야 하는 걸까요? 그들 국가를 인권위에 제소하고, 오랜 세월 동안 모두가 당연하게 믿으면서 살아온 생활의 원칙과 신조를 '야만적이다'라고 규정하는 우리 외국인들을 이슬람인들이 부노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이해못할 일일까요? (부시 아저씨는 전혀 이해 못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아즈텍인들에게 야만인이라고 외친다면
조선인들에게 야만인이라고 외쳤던 일본인들이나 서양인들에게
어떻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자.. 전 그게 난감할 뿐입니다.
보편과 특수의 투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첫댓글 스페인 치하 시기 원주민은 '모든 인간에게는 그들 나름의 가치가 있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가치, 여자에게는 여자의 가치. 그러나 불쌍한 우리들은 옥수수 한줌의 가치도 없다' 라고 했지요. 뭐, 산채로 피라미드 위에서 가슴이 따이는 것과, 옥수수 한줌의 대접도 못받고 죽어라 일하는 것 중 어느쪽이 인간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만약 이 말을 한 원주민이 중미가 아니라 남미 원주민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명쾌한 해답이네요. '당연함' 이라는 절대적인 관념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시킨다면, 그들의 관념 또한, 지금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왜?' 라는 질문이나 가치평가 따위는 필요없게 되는 법이죠.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어떠한 문화가 완전이 쓸모없고 무가치한것이라 해도 그 문화를 따르고 숭상하는 사람들이 있는한 그것이 무가치 하다고 말하는 것 또한 무가치 한 일이라고 하지요(어째말이 좀;; 꼬이는군요) 하여튼간;; 음 뭐랄까 이런 원리론적인 얘기는 좀 어렵군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보편과 특수의 투쟁이라...
ps.게임의신동님에 대해서는 뭔가 운영자 선에서 경고 조치가 필요한거 아닙니까? 늘상 보이는게 비난의 수준도 못되는 리플이나 본문의 주제와 하등상관 없는 리플에 시비성말투. 불리하면 꼬릿말 은근슬쩍 지우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들이 한두번이 아는듯 합니다만.
동감합니다;;저도 이곳에서 오래전부터 눈팅을 해왔지만 신동님의 말투는 여전히 똑같은 수준이더군요;;;
보수적 기질이 강한 사람일수록 애매모호함에 대해 특히 못견뎌 한다고 합니다. 어떤식으로든 자신의 기준에 맞게 분석을 하고 정의를 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대개 모든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길 좋아합니다. 선과 악 흑과 백 등 모든 만물이 순도 100% 일거라 확신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조지 부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시의 세계관은 선과 악, 아군과 적군, 우리와 타자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부시에게 있어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모호한 상태, 아군도 적군도 아닌 중립적인 상태란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용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ㅎㅎㅎㅎ
동감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수학적 메커니즘으로 100% 판단되는 대상들만 존재하고 곳입니까? 모순과 모호함, 역시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구성요소들입니다. 허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것에 못 견뎌하고 괴로한다는 겁니다. 대상과 현상에 대해 편집증적인 자세로 논리적, 합리적 분석을 끝마쳐야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것인
양 비로소 잠자리에 드는 것이죠. 모호한 대상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인도의 성인인 크리슈나무르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자꾸 분석과 판단을 내리려 하십니까? 사물과 현상이 우주에 존재하는 그대로 음미하고 받아들이십시오." 설사 어떤 대상이
자신의 지성과 가치기준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성이 지배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판단하려는 개개인 역시 완전한 존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그 분석과 판단의 결과물 역시 오류와 모호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호한 대상에 대하여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는 우선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거는 지난일이니까 그들 특유의 문화라고 치고 만약 저일이 지금일어나거나 또는 저 풍습에서 영향받은 잔혹행위가 지금 일어나면 그건 말립시다...정치가도 아닌데 왠 절충...
그렇긴 하지만 아즈텍인의 경우 희생제물로 바쳐질 이가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이 아닌 타부족 출신의 포로같이 선택의 자유없이 강제적으로 죽어야 했다는 점이 꺼림직하게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