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는 김담희 - 유토피아
유토피아는 행복한 곳일까? ’유토피아‘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유토피아는 ’유(U-)‘와 ’토피아(-topia)‘로 나뉘는데 ’토피아‘는 그리스어에서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이고, 앞에 ’유(U)’가 붙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 된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는 ‘에우토포스(Eu-topos)’이기도 하다고 했는데 ‘에우(Eu-)’는 ‘좋다’라는 의미로 에우토포스는 ‘좋은 곳’이 된다. 두 가지 의미를 담으면, 유토피아는 행복한 곳이지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유토피아를 읽기 전, <고전 콘서트>를 읽고 내가 평소 생각했던 ‘사회의 이상향‘, ’행복한 곳‘과는 다른 느낌이 들어서 ’유토피아인들은 과연 행복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고전 콘서트를 읽으며 느낀 유토피아는 공동체의 이상향을 위해서 개인의 쾌락과 자유는 한정적인, 오히려 답답한 곳이었다. 그런 의문을 가지고 유토피아를 읽으니 더 흥미롭게 생각을 확장하며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유토피아에는 많은 에피소드와 주장들이 나오는데, 그걸 곧이곧대로 이해하면 유토피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고전 콘서트를 읽은 덕에 그런 내용을 분별할 수 있었다.
유토피아는 공동체가 우선으로 생각된다. 공동체를 위해서 예외없이 일을 하고, 여가시간 조차 교육에 사용한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부자와 거지, 빈부격차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은 옷, 음식, 교육, 주택, 의료 등의 자원과 생필품을 부족함 없이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옷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6시간 노동은 필수다. 여행을 가서도 그 곳에서 노동을 해야 하고 허락을 받아야만 마을을 여행 할 수 있다. 집은 모두 비슷하게 생겼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으며, 따라서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집의 구성원이 너무 많으면 부족한 다른 집으로 보내기도 한다.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집도 10년마다 바꾸고 도시와 시골을 번갈아가게 된다.
이런 모습은 탐욕과 쾌락을 중요시하는 현재 사회의 시선으로 봤을 때, 사회의 이상향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만약 인간에게 탐욕과 쾌락이 없는 상태에서는 유토피아가 아주 좋은 사회의 이상향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태초의 상황이 아니니 인간은 결국 욕망과 쾌락을 찾게 되고, 그런 곳은 절대로 ’유토피아‘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유토피아 인들에게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유토피아 인들은 모든 유형의 쾌락을 행복과 동일시하지는 않고, 행복을 ’모두가 도덕적 선에 의해 본능적으로 이끌리게 되는 ’최고 선‘의 상태’라고 정의한다. 결국 ‘유토피아는 행복한 곳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우리와는 다른 기준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기 애매하다고 생각하지만, 유토피아의 사람들은 그것이 본인들이 누려온 행복일 것이다.
만약 유토피아에 갈 수 있다면 그곳에서 하나 되어 살 수는 없겠지만, 한번 여행을 가보고 싶다. 책으로 이해한 유토피아는 한정적이고 잘못 이해한 부분도 분명 있을테니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 또, 불가능하긴 하지만, 유토피아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복이 무엇인지, 유토피아에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지 질문하고 싶다.
나누는 김하랑 - 유토피아
과연 행복하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일상속에서 자잘한 행복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지만 어떨때는 불행하고,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기도한다. 사람은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데, 오늘 읽은 책인 유토피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두 같은 시간을 일하고, 돈을 받으며, 심지어 입을 옷까지 평등하게 분배되어있고 누구 하나 가난하고 부자인 사람 없이 똑같다.
그렇다면 평등하면 행복할까? 유토피아에서는 모두가 다 평등하며 똑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욕심이 있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싶어하는 소유욕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더 많이 벌고 누구는 적게벌고, 사는 것도 모두 다른데, 그러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 물론 계속해서 행복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때때로 행복할 수 있다. 또한 작은것에도 말이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유토피아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가지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유토피아는 모두가 똑같이 일하고, 같은 돈을 받으며 욕심없이 살아갈 수 있어도 나는 힘들고 불행을 겪다 한번에 긍정적인 일과 행복해 진다면 그것이 더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공의 이익을 보장하고 양극화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 방안은 우리가 배워도 좋을 점 같다고 생각한다.
유토피아는 개인보다 집단을 위한 의무를 강조하고있다. 또한 사람의 인원 수까지 제한하는 것을 보며 유토피아에서 살면 정말 로봇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고있는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자아실현을 할 수 있기에 꿈을 꾸고 각자의 목표를 정하며 살 수 있지만 공산주의에서는 이러한게 제한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공산주의가 나은 것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가 더 나은 것 같기도하다. 그래도 나는 꿈을 꾸고 자신의 노력을 인정해주는 이 사회가 조금은 더 나은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리게 될 수 있게 되어 좋은 책인 것 같다.
연구하는 정재훈 - 햄릿
햄릿은 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숙부를 죽일 기회를 날려버렸을까? 햄릿은 아버지를 독살시킨 숙부인 클로디어스를 죽여달라는 아버지 유령의 말에 정말 치밀하고 정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심지어 유령의 말이 거짓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아버지를 죽였을 때처럼 독살로 사람을 죽이는 연극을 만들어 직접 클로디어스에게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렇게 클로디어스가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며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찾아 직접 죽일 기회를 얻었지만,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죽이지 못한다. 게다가 클로디어스와는 상관없는 그의 연인인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클로디어스로 오인해 죽였다. 결국, 그는 유령의 말을 따라 클로디어스를 죽인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그의 연인부터 친구, 직위까지 모두 포기한 채로 그 순간만을 노렸다. 하지만 죽이지 않았던 이유라면 그에게 아직 숙부, 왕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그랬을 거로 생각한다. 만약 햄릿이 아버지의 복수를 절실하게 원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면 햄릿은 망설임 없이 그를 죽였을 것이다. 또한, 유령의 말이라 한들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알게 되면 무조건 믿을 거로 생각한다. 결국, 끝에서는 그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햄릿 자신도 죽게 되며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마무리한다. 나는 햄릿의 이야기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 될 충분한 기회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주인공인 햄릿에게는 비극적인 일들만 일어나며 시작된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 유령을 만나 복수를 꾸미며 연인, 친구를 모두 잃으며 햄릿 자체가 비극이었다. 하지만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는 햄릿의 인생이 비극으로 마무리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한순간의 판단이 전혀 다른 결말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슬기로운 민시은 - 총균쇠
왜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화물’을 만들지 못했는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뉴기니 섬에서 그가 얄리라는 정치가와 나눈 대화에서 시작한다. 얄리는 어째서 백인들은 문자와 철기를 가진 산업사회를 발달시켰으나 흑인들은 그러지 못했는지를 묻는다.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인류의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왜 그런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백인들이 조금 더 고차원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문명 사회를 발달시켜왔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 대륙에 걸친 기술적, 정치적 차이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소망하는 민시야 - 어린왕자
왜 어른이 될수록 어린 왕자 같은 상상력을 잃을까? 많은 학생은 상상력과 순수함을 점점 잃어가고 공부 때문에 학원과 숙제에 시간 쫓긴다. 가끔 미술 시간에 주제 없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학생들은 태블릿을 사용해 여러 그림을 검색한다. 나만의 생각을 표현하고 생각하는 게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나 또한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다. 어렸을 때는 표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고민이었다면, 현재는 무엇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 든다. 왜 크면 클수록 순수함과 상상력을 잃는 것일까?
그 이유는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보다는 공부를, 어린아이다운 순수함보다는 어른스러움을 추구한다. 하지만 인간의 발전은 다 상상력과 순수함에서 왔기 때문에 상상력과 순수함은 꼭 필요한 존재이다.
두 번째 이유는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더 빠르게, 짧게 가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짧은 영상들과 짧은 문구만 읽는다. 그래서 발명 대회 같은 생각해야 되는 것을 귀찮아 한다. 많은 사람이 점점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린 왕자 같은 상상력과 순수함은 인간을 발전시킨 중요한 요소이다.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준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생각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다. 어린아이 같은 상상력과 순수함으로 질문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은 많은 도움을 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어린 왕자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왕자처럼 순수함을 가지고 질문하며 살아간다면 분명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