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의 성각
Written By Pathos
Episode 2 - Anti Neverland
It must always be borne in mind.
Your eyes saw my unformed body. All the days ordained for me were written in your book before one of them came to be.
* * *
나는 비겁한 존재.
그들이 죽은 까닭을 알고는 싶었으나, 복수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니, 어차피 나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다. 자기 합리화라고 욕을 해도 좋다. 당장 내 목구멍으로 밀어 넘길 만한 빵 한 조각을 구하기에도 녹록치 않은 세상.
그러나 솔직히 나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단지 아닌 척, 열심히 눌러 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을 테니까. 벌레보다 못할 하찮은 내 목숨 줄이 나를 끊임없이 옭아맸다. 어떠한 길을 가도, 어떠한 생각을 하고 번뇌해도, 나는 결국 비겁한 존재에 지나지 않으니까.
숙명. 이것은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다.
* * *
목전의 죽음을 무성의한 무덤으로 덮어둔 채 나는 돌아섰다. 아이들의 피 끓는 비명소리가 내 귓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겨우 그것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리면서, 그러나 나는 분명했던 목적의식이 흐릿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와 복수. 이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좋을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우스운 일. 대체 나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나 있을까. 백보 양보하여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내게는 그 무엇 하나 해결할만한 힘이 없었다.
이래저래 혼란이 가중되는 와중에도 내 다리는 쉼 없이 무턱대고 걸음을 옮겼다. 어느 샌가 눈앞에는 소위 그 환각의 숲이 다시금 나를 향해 아귀를 벌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무지개의 궤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복수하고 싶은가.”
숲의 초입(初入)에 아무 생각 없이 다리를 밀어 넣으려고 할 때,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걸려왔다. 햇발에 미간을 좁히며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예의 그 사내가 한 손에 장검 하나를 꼬나든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와 다름없는 진지한 표정. 그리고 그것에서 나왔을 뜬금없는 그의 질문은, 반면에 마치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이미 그 가능성을 재고 있던 내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결국 나는 선택하지 못한 채 우선은 복수를 향한 길로 내닫는 수밖에 없는 걸까. 나는 사내를 가만히 응시하며 피식,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가 우습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복수라… 그것 좋지요. 그런데 제가 대체 이런 꼬락서니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심하게 비꼰 어투임을 물론 알고 있었다. 사내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런 사내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음을 상기하고 있는 만큼 나 역시 그것이 예의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내 스스로 선택하지 못함에 대한 치기어린 마지막 반항이었다. 그래, 나는 비겁한 존재. 그러나 사내도 이것을 이미 알고 있겠지. 아니, 그의 표정과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미 나를 이해하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건 자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생각이 있다면 날 따라와라. 자세한 것은 가면서 천천히 설명해주도록 할 테니까.”
환각의 숲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이어진 사내의 설명은, 확실히 내게 분노의 확장과, 복수의 가능성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 머릿속엔 온통 그것만이 자리했다.
에렌과 이리스를 죽인 것은 이 곳, 환각의 숲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성주로서, 그의 끔찍한 살해 방식은 다시 생각해도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었지만, 그것을 행한 까닭은 더욱더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첩자로 보낸 수하에 의하면, 그 성주는 예전부터 아이들을 혐오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뭔가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지만, 아무쪼록 자기 자식들도 낳는 족족 잔인하게 난자했을 정도라고 하지. 하지만, 그러다보니 문제가 생겼다.”
“인력난, 입니까.”
“그래. 때마침 흑사병까지 한 번 돌고난 뒤라,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갖가지 노역에 동원시켰지. 그 과정에 네 친구들도 엮이게 된 것이고.”
“…….”
그 뒤로 이어지는 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라는 생각에 쓴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당연한 인과의 법칙인 마냥 도적은 들끓는 법. 사내도 그런 무리의 하나로써, 이 근처에 자리를 잡고 수장(首長)의 명령에 따라 성주의 성을 털 것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성주의 반격에 의해 모조리 잡히고, 사내는 가까스로 홀로 최근 탈출에 성공하여 근방의 거처를 향해 가는 도중 쓰러진 나를 발견하여,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어쨌든 결국 성주는 건장한 청년들을 얻었고, 그에 따라 눈엣 가시 같던 아이들이 필요 없어졌기에,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렇다면 그 환각은, 내가 굳이 경험하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일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죄책감을 덜어내는 정도일 뿐, 복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사내가 일개 도적질이나 하는 무리의 하나라는 사실도 아무래도 좋았다. 내 목숨을 살려준 것에 대한 동정의 표가 아니다. 어차피 작금에 있어서 선과 악을 논할 정반합에 이르는 존재가 있던가. 가당치도 않은 소리. 뭐, 그렇게 따지면 성주도 죄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지만, 나는 그를 악으로써 처단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역시 상관이 없는 문제다.
“자, 저곳이다.”
사내가 가리킨 곳에는 그런대로 수비를 하기엔 적절한, 목재로 이루어진 요새(要塞)가 하나 자릴 잡고 있었다. 사방의 수목이 불규칙하게 둘러쳐져 있는 것을 보니, 요새가 위치하고 있는 곳도 원래는 숲의 한가운데였음이 분명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나무를 베어 지금의 요새를 축조한 것이겠지.
요새 앞에 다가서자 문지기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사내를 알아보고, 손에 쥐고 있던 창(槍)을 비켜들며 사내와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 나를 그냥 통과시키는 걸 보니, 이미 연락을 넣어뒀었나 보군요.”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장이 자네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 어째서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자네가 환각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한번 찾아와서 보더니 그러더군.”
대체 그 우두머리라는 작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을 털어놓는 사내가 야속할 따름이었다. 만약 내가 복수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거절했으면 어떡하려고 했을까. 하지만 지금껏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별로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은 없었기에 나는 그런 생각은 곧 접은 채 잠자코 사내를 따랐다.
“그나저나, 그래도 도적단의 우두머리인데 그렇게 함부로 말을 놔도 되는 건가요?”
"나는 그래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다."
그 말을 끝으로, 사내와 나는 꽤나 커다란 문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역시 문 앞에는 문지기가 하나 있었는데, 사내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내 옆으로 비켜서며 문을 열어주었다.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안 쪽으로, 사람 하나가 기다란 탁자 끝자락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새파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를 보며, 나는 잠깐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일개 도적단이라지만, 그래도 수장 자리를 맡기에는 그의 머리 색깔만큼이나 젊어 보였다. 많이 잡아봐야 이십 대 중반. 그러나 그런 것을 제대로 가늠해볼 틈도 없이,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몰아붙여왔다.
“시간이 별로 없다. 네가 치러야 할 시험을 일러 줄 테니 그대로 신속하게 따르도록. 참고로 이의제기 따위는 받지 않겠다.”
“그, 그게 무슨….”
“이의제기는 받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이안, 그만 녀석을 데리고 나가라.”
갑작스런 상황에 나는 난색을 표했지만, 곧 방안으로 들어온 아까의 그 문지기에 의해 제대로 항변 한번 하지 못하고 밖으로 끌려 나갔다.
“이 봐, 대장은 자기 말에 쓸데없이 대꾸하는 거 무지 싫어한다고.”
그 말을 시작으로 그는 내가 치러야 할 시험에 대해 일방적으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시험의 주요 골자는 대화였는데, 대체 무엇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며 일러주질 않았다. 그리고 겉보기엔 단순해도 꽤나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친절하게 덧붙이며, 그는 나를 끌고 요새 밖으로 나섰다.
“북쪽으로 숲을 가로질러 가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만나게 될 거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새까만 숲 속으로 들어서며, 나는 워낙 경황이 없었던 지금까지의 일을 정리하느라 머릿속이 한데 뒤엉켰다. 대체 사내도 그렇고, 대장이라는 녀석도 그렇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 게다가 난데없이 시험이라니. 마지못해 발을 떼면서도, 나는 시험에 대해 갈등했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하고 막무가내로 떠밀린 것에 화가 나기도 해서 이대로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채 그런 결심을 해보기도 전에,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좋아, 거기에 그대로 서도록.”
“누, 누구야!”
문득 들려온 소리에 나는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아직도 예전의 공포가 내 몸에 배어 있었다. 그에 따라 나는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펴봤지만, 사람이라곤 전혀 눈에 띄질 않아 금세 당혹감에 젖어들었다.
“그렇게 당황할 것 없다. 나는 바로 네 녀석 앞에 있으니까.”
목소리에 따라 앞을 자세히 보니, 가지각색의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진홍색의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위화감이 느껴져서 나는 그것이 말을 한 것임을 곧 깨달았다.
“필시 시험을 치르러 온 것이겠지? 내가 불러 세우지 않았으면 멍청하게 날 밟고 지나갔을 테지만 말이다.”
대체 어디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꽃이 말을 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늑대 따위가 아닌, 고작 꽃 한 송이었기 때문에 얕잡아 생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설마 이안이라는 녀석은 기껏 이것 때문에 대상을 알려주지 않은 건가. 뭐, 따지고 올라가다보면 대장이란 작자가 시킨 일이겠지만, 어쨌든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봐, 그런 경박한 웃음 따위 그만 내뱉고,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해라. 그 자식과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내 말에 토 달면 네 녀석 발아래 있는 놈들처럼 될 테니까. 그러니 주의하도록.”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발밑이 뭔가 물컹한 것이 느낌이 이상했다. 조심스럽게 눈을 아래로 내리 깔자 바스락거리는 낙엽 아래로, 뭔가 검붉은 것이 보였다.
“이게 뭐지?”
“별로 자세히 보지 않는 게 건강에 좋다.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니까. 아, 설마 겨우 꽃 따위가 어떻게 했냐고 따질까봐 미리 대답해두는데, 이 숲 전체는 내 지배권 안에 있다. 즉, 이 숲 안에선 내 마음대로 뭐든지 가능하단 소리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녀석을 보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붉은 핏덩이를 분명히 확인했음에도, 그러나 나는 두려움 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녀석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팔랑거리는 꽃잎은, 내게 전혀 위압감을 안겨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팔랑거림과 녀석의 어투가 너무나 잘 맞아떨어져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녀석에겐 아마 상당히 실례가 되는 감상이겠지만.
“자, 그럼 첫 번째 질문이다.”
하지만 역시 검붉은 핏덩이와 말하는 꽃은 실존하는 것. 나는 그 사실을 재빨리 인지하고 녀석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마른 침이 내 목구멍을 비집고 넘어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너는 자유의 존재를 믿는가.”
자유. 난세에 있어서 그것은 어떠한 의미로는 극에 치달을 정도의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뭐, 그래도 있는 건 있는 거니까.
“믿는다.”
“흐음, 그래? 그럼 그 까닭은?”
까닭을 묻는 녀석의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머릿속에서는 정리가 되지만 막상 입으로 뱉어내려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빨리 대답해라. 고깃덩어리가 되고 싶지 않으면.”
녀석의 재촉에 나는 본의 아니게 조급함을 느꼈다. 얼핏 발아래 고깃덩어리의 촉감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녀석의 실체는 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가장 얕잡아보기 쉬운 이미지야 말로, 반전이 일어났을 때 감당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가까스로 그럴듯한 대답을 만들어냈다.
“… 내가 이곳에 온 것도 내 스스로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대답에서 반은 진실이요, 나머지 반은 거짓이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결국 그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도 어느 정도 있음은 명백한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책임 속에 의지가 개입되어있음을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의지라? 뭐, 좋다. 그럼 다음 질문이다. 너는 신의 존재를 믿는가.”
신이라. 이것 역시 존재 유무의 대한 대답은 쉽지만, 녀석은 분명히 그 까닭도 물어올 것이 분명했다. 무신론의 증명. 단순히 내 의견을 묻는 선에서 그친다고 해도, 나는 그것마저도 제대로 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일단 주어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해야 했기에,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믿지 않는다.”
“그렇군. 네 녀석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그 까닭을 물어볼 줄 알았던 모양인데,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뭐, 네 녀석 전에는 물어봤었지만 다들 대답이 삼류 소피스트 수준이라서 포기했으니까.”
녀석의 그 말에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여전히 자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유를 들어보기도 전에 나를 삼류 취급 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집을 부리는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런 형편없는 녀석에게만큼은 밀리고 싶지 않으니까.
“왜, 억울한가? 그러나 신은 엄연히 존재한다. 따라서 네가 아무리 날고 기는 반박을 해도 소용없어.”
녀석이야말로 시건방지게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있자, 나는 결국 부아가 치밀었다. 이딴 녀석을 귀엽네, 뭐네 하는 생각까지 했다니. 어이가 없어 되레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지만, 그 외에 것마저 참아내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 신이 존재한다고? 네 녀석은 진리라도 꿰뚫고 있다는 말이냐?
그럼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따위로 살아야하지?”
“말대답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젠장,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수준 운운하면서 네 녀석이야말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짓은 그만 관둬라.”
거칠게 쏟아낸 뒤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녀석을 한껏 째렸다. 곧 닥쳐올 죽음의 수반물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미쳤는지는 몰라도 될 대로 되라는 생각만이 내 전신을 한껏 휘감아 올렸다.
“웃기는 녀석이로군. 잘 들어라. 이 시험은 밤에 피는 야생화로서의 가능성을 재기 위한 것. 네 녀석은 앞으로 자유의지와 운명 사이에서 교착의 길을 걸으며 방황하게 될 것이다.”
“개소리 말고 죽이려면 죽여라.”
“네 녀석이야말로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네 그 잘나신 머릿속은 네 녀석이 이곳에 오기 한참 전부터 이미 꿰뚫고 있었다.”
꿰뚫고 있었다는 녀석의 말에 나는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머리를 굴려가며 대답을 한 것을,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니.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를 가지고 논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꿰뚫고 있었다고? 어이가 없군. 그럼 굳이 시간낭비 하면서 내게 대답을 요구한 건 뭐지?”
“그건 네 녀석 스스로 돌아가서 잘 생각해 봐라. 질문 자체가 의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시험은 통과했으니 그만 돌아가도록.”
“돌아가라니,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건가.”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한다.”
분명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한 주제에, 시험에 통과했다는 녀석의 말은 대체 통과 기준이 어떻게 되먹은 것인지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시험을 치러야 하는 까닭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사실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시험이 끝났다면 뭐든 물어봐도 상관없겠지.
“알았다. 다만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
“거 참, 귀찮은 녀석이군. 좋다, 물어봐라.”
“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너란 존재는 대체 뭐지? 어떻게 그리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 마냥 말할 수 있는 거냐.”
궁금했다. 너무나 궁금해서 녀석의 비웃는 소리가 내 귀를 파먹을 것을 각오하면서, 나는 질문을 던졌다. 최근 들어 내게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도저히 이 세계가 갖추고 있던 체계 안에서는 벌어질 수 없을 일들이, 그러나 분명히 일어나고 있었다. 환각의 숲도,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지껄이고 있는 꽃에 대한 이야기도 나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실의 끝이 변명이든 거짓이든 궤변이 되던 간에, 일단은 무조건 듣고 싶었다. 녀석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동안 억눌러왔던 수많은 궁금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 한낱 꽃 한 송이가 분명 뭔가를 알고 있다고 제멋대로 판단해 버린 것일까.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수긍과 부정과 진실의 문제는 그 다음의 일로 미뤄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을 테니까. 곧 들려오기 시작한 녀석만의 진실을 담았을 목소리에 내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Return, question, and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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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h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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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간다. //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