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늠름한 중세시대 러시아 군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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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기병에게 밟히고 있다 |
초원에서 동슬라브인은 동쪽에서 온 유목 기마민족(몽골)과 마주쳤다. 유목민족들은 힘센 전사로서 복종을 거부할 경우 철저하게 파괴했다(1240년~1480년). 그러나 복종하여 같이 살게 될 경우에는 그들 역시 동방의 문화를 전해주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러시아인이 이윽고 초원의 주민들을 지배하고 그들과 뒤섞여 살게 되었다. 마침내 러시아는 남으로 중국을 압박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을 온통 독차지하여 미국 · 일본과도 접하게 되었다.
남쪽 방면으로는 18세기 이래 투르크와 거듭 전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조금씩 영토를 확장한 결과, 19세기 중반에는 투르크의 뒤편에 자리 잡고 있던 영국과도 싸움을 치르게 되었다. 영국과의 대결은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티베트에서 극동까지에 걸쳐 진행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 시대에도 강국들에 포위되어 있던 러시아는 이제 그 포위망을 부수고 거대한 북유라시아 제국이 되었으나, 그 결과 서쪽, 남쪽, 동쪽으로 더 힘이 센 세계열강들을 마주하기에 이르렀다.
민족(족속)
러시아는 다민족 사회로 민족구성이 아주 복잡하다. 러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여러 민족들을 그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 후 효율적인 통치와 개발을 위해 곳곳에 많은 러시아인들을 이주시킴으로써 그 복잡성을 증폭시켰다. 소수민족 문제는 제정 러시아 시대 이래로 큰 골칫거리의 하나였다. 소련이 붕괴한 데도 그러한 민족문제의 심각함을 과소평가한 것이 큰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러시아 연방 공화국 내의 자치공화국만도 20개가 넘는다. 가장 비중이 큰 민족은 전 인구의 절반 정도인 1억 4,000만의 대러시아인과 4,200만의 우크라이나인, 1,000만 가까운 벨로루시인을 포괄하는 동슬라브 족이다. 총 인구의 70%를 차지하고 이들이 서로 협조하고 때로는 반목, 대립하면서 러시아사의 주역으로서 사실상 러시아를 이끌어왔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 정교의 종교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들 다음으로 많은 것은 19세기에 러시아에 편입된 투르크계의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들이다. 우즈베크인, 카자흐인, 투르크멘인, 키르기스인, 타지크인 등이 그들로서 총 인구의 10%를 차지한다. 이들 외에 자카프카스(카프카스 산맥 너머)의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타르 · 추바슈 · 바슈키르 등 남우랄과 시베리아 지방의 여러 민족도 이 계열에 속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다.
다음으로, 세계인종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다양한 민족들이 얽혀 살고 있는 카프카스 지방의 여러 민족이 있다. 그중 자카프카스의 그루지야인과 아르메니아인은 언어와 종교가 모두 크게 달라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인과 함께 민족분쟁의 화약고 같은 구실을 해왔다. 이밖에도 북카프카스의 다케스탄 민족군과 잉구슈 · 체첸 · 오세트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있다.
북서부에는 옛 소련 구성원 중 가장 독자성이 강한 세 민족,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 에스토니아인이 살고 있다. 생활수준도 가장 높고 가장 유럽적인 면모를 보이는 이 발트 지방의 세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키릴 자모 대신 라틴 문자를 사용하며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믿는다. 역사와 전통의 차이로 말미암아 소련 붕괴 후에도 독립국가공동체에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밖에 루마니아와의 접경지역에는 라틴계의 몰도바인이 살고 있고, 북서부와 시베리아 북부지방에 핀 우골계의 여러 민족이 있으며, 시베리아와 극동지방에는 몽골계 · 퉁구스계 · 구시베리아의 여러 민족이 살고 있다. 또 상당수의 독일인과 유태인이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연해주에 살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우리 한민족도 약 40만을 헤아린다.
언어
언어 역시 민족의 수만큼이나 다양하여, 문장어를 가진 언어만도 70개에 달한다. 옛 소련에서는 러시아어와 각 공화국의 주된 민족 언어가 공용어로 통용되었으며, 비러시아인들 중 둘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55%에 달했다.
따라서 러시아를 생각할 때 러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나, 그 나라가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러시아어로 교류하는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것과 아울러, 러시아인의 세계가 러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 밖으로까지 폭넓게 열려 있음을 알아두어야 한다.
러시아어는 슬라브어의 일족이지만, 그리스-로마어나 투르크어, 몽골어 혈통을 가진 단어들이 많다. 그리스-로마 계통의 단어가 많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 정교를 수용한 까닭이다.
종교(문화)
정교회의 의식은 아름답다. 전승에 따르면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선택한 것은 정교의 의식이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교는 교회의 의식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몸소 경험하는 것을 지향한다. 15세기에 러시아의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갖췄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된 이래로 러시아인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삶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같은 정교회이면서도 그루지야에는 독자적인 그루지야 정교회가 있고, 아르메니아에는 정교회와 뿌리가 같으나 많은 면에서 의식을 달리하는 아르메니아 교회가 있다. 그밖에 발트 3국인과 폴란드인 · 독일인은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믿는다.
제2의 종교는 이슬람으로 신자 수가 5,000만에 달한다. 신도 수로 보면 아랍 세계에 버금가는 규모다. 예전의 러시아 제국이나 그 후의 소련이나 모두 종교에 대해서는 관용을 보였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등지의 이슬람 전통은 크게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될 수 있었다. 이슬람교도 외에 불교를 믿는 몇몇 소수민족과 유태교도가 있다.
간략히 보는 러시아의 역사
1. 7세기 무렵까지, 오늘날 러시아의 땅은 온갖 민족들이 뒤섞여 교류와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슬라브인은 8세기경 이 땅으로 이주했으며, 볼가 강과 드네프르 강 일대에 정착해 살며 유목민들과 경쟁했다. 9세기에 이들은 뒤늦게 들어온 노르만 계통의 일파인 루스(Rus) 족(여기서 ‘러시아’라는 말이 나왔다)의 우두머리, 류리크(Ryurik)가 862년에 북쪽의 노브고로트에 나라를 세웠었다는 게 러시아의 건국 전설이다. 남쪽에서는 류리크의 친척인 올레크(Oleg)가 880년에 키예프를 세웠다. 키예프는 공국으로 성장하여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했으나, 11세기부터 차차 분열하며 쇠퇴했다. 그리고 13세기 초, 칭기즈칸(Chingiz Khan)의 손자인 바투(Batu)가 서방원정을 와서 키예프 공국을 쓰러트리면서 러시아는 약 240년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
2. 몽골의 지배 하에서 독립의 힘을 키웠던 나라는 모스크바 공국이었는데, ‘대왕’이라 불리게 되는 이반 3세(Ivan III) 시절에 마침내 몽골을 결정적으로 물리치게 된다(1480). 그는 비잔틴 황제의 조카딸과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였는데, 동로마 제국인 비잔틴(수도=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터키의 이스탄불)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1453년에 멸망한 후로는 모스크바가 콘스탄티노플을 계승하는 ‘제3의 로마’라는 주장을 하며 동방정교의 수장을 자처하고, 비잔틴의 ‘쌍두의 독수리’ 문장을 그대로 쓰는 등 권위를 더욱 높이려 했다. 그래서 그를 로마 황제(카이사르)의 칭호를 러시아식으로 읽은 ‘차르’라고 부르게도 되었다. 여러 공국을 병합하고 국력을 크게 키웠다.
그러나 모스크바 대공과 공국의 지배력은 완전하지 않았다. 대귀족들은 국가기구를 장악한 한편 세습된 대토지를 보유했으며, 서유럽의 봉건영주와 달리 왕에게서 봉토를 받고 충성 서약을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군주권에 도전할 소지가 충분했다. 병합된 옛 공국들도 명목상으로만 모스크바에 복종하는 경우가 많았고, 늘 반란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3. 이런 상황을 극복하여 명실상부한 차르 전제체제를 수립한 사람은 이반 3세의 손자인 이반 4세. 뇌제(Ivan IV, 1530.8.25 ~ 1584.3.18.)였다. (키예프 대공국이 몰락->모스크바 대공국이 전면에 대두-> 모스크바 중심의 대러시아인, 키예프 중심의 소러시아(우크라이나)인, 서쪽의 벨로루시인의 셋으로 갈라짐.
4.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이 힘을 길러 17세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를 병합하고, 그보다 조금 전 16세기 말엽부터 시베리아 진출을 시작하면서 대제국의 기반을 닦는다.
5.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대제 시대에 러시아 제국이 성립 발전. 당시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와 발트 지방까지를 아우르는 유럽 러시아와 아시아의 시베리아 지방을 지배했다. 이후 제국이 팽창하면서 핀란드와 폴란드, 카프카스 지방, 중앙아시아, 극동 연해주 지방을 제국의 깃발 아래 복속시켰다. 러시아 제국이 최대 판도를 이룬 것은 19세기 말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다.
6.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은 붕괴했다. 10월혁명 후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이 나라의 권력이 미치고 있던 영역은 매우 유동적이었다. 핀란드, 폴란드, 발트 3국은 곧바로 독립했다. 이윽고 내전이 소비에트 측의 승리로 끝을 맺은 후 1922년 러시아 공산당이 지도하는 4개 소비에트 공화국, 즉 러시아 · 벨로루시 · 우크라이나 · 자카프카스 연방의 대표들이 모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결성한다.
7. 이어 중앙아시아의 소비에트화, 극동 공화국의 병합 등으로 영토가 확대되고, 마지막으로 1940년 발트 3국의 병합, 루마니아령 베사라비야(몰도바)의 점령으로 소련은 15개 공화국의 연방이 되었다. 소련이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최대 판도에서 폴란드와 핀란드를 제외한 영토를 갖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계승자였다.
8. 그 후에 와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는 가운데 1991년 쿠데타와 대중봉기로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다. 먼저 발트 3국이 독립하여 연방에서 떨어져 나갔고, 나머지 11개국은 차례로 독립을 선언한 후 독립국가공동체(CIS)를 결성했다.
9. 현재 러시아 공화국의 영토는 17세기 전반 로마노프 왕조 초기의 모스크바 대공국이 지배하던 땅에다 동시베리아와 극동 연해주 지방을 더한 영역이다.
(이반뇌제 당시의 영토)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
1. 진출한 시기: 16~17세기이다. 1492년에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이후 16~17세기에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이 아메리카대륙을 대거 탐험하여 17세기가 되어 아메리카대륙의 대부분을 밝혀내고 영토를 확장한다.
러시아는 몽골의 압제에서 벗어난 15세기말 이후 시베리아에 진출하여 16~17세기에 시베리아를 대거 탐하여 17세기가 되어 시베리아의 대부분을 밝혀내고 영토를 확장한다.
2. 원주민의 저항: 사실, 시베리아를 정복한 것은 러시아에게 행운이었다. 러시아가 생겨나기 전까지 시베리아라는 곳은 나라를 이루지 않고 여러 부족들이 부족생활을 하면서 그 험한 땅에서 살아가는 그런 사회를 이루는 땅이었다. 몽골제국도 점령은 했으나 제대로 다스리기 힘든 험한 땅이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봤을 적에 유럽의 어떤 나라도 가까이에서 시도조차 못하는 실정. 지리적으로 제일 가깝고 유럽에 속하면서 신흥으로 발전하는 러시아에게 순서가 돌아왔다. 당시에 킵차크 한국(칸국) 같은 경우에는 신흥하는 러시아에 막혀있었고 내륙에 있는지라 러시아처럼 유럽의 신식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러시아는 스칸디나비아의 강호였던 스웨덴을 꺾고 데뷔한 신흥강국이다. 무기도 전술도 발달하지 못한 킵차크 한국이 러시아에게 더 이상 해볼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의 부족단위로 험한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을 정복하러 오는 정복자들을 맞이했다. 험한 자연에 침략자들이 못들어올 것만 믿고 있던 그들은 러시아의 강력한 무기에 이제 합병을 당하게 되었다.
3. 시베리아 점령 과정: 모스크바에서 드넓은 러시아의 대지를 가로질러 동으로 동으로 달려가면 높이 500m 전후의 낮은 산맥 하나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우랄 산맥이다. 16세기 중엽 이전의 러시아사의 무대는 거기까지였다. 산맥을 넘으면 시베리아(우랄 너머)의 대지가 펼쳐진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막한 벌판이다. 넓이로 치면 유럽 러시아의 두 배가 넘으나, 사람은 거의 살고 있지 않았다.
러시아제국이 중앙아시아 스텝으로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황제 이반 4세 시대로 ‘카잔제국’과 ‘아스트라 칸국’의 몽골족의 국가들을 차례로 멸망시킨 이후였다.
1579년 카자흐의 한 부대가 우랄 산맥을 넘었다. 그로부터 70년도 채 안돼 러시아인은 5,000㎞를 달려 동쪽 끝 태평양에 다다랐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실상 주인이 없던 땅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진출의 선봉대 역할을 맡은 것은 카자흐 부대였다. 카자흐란 러시아의 변경과 중앙아시아에 살던 기마전사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투르크계가 중심이었지만 15세기 중엽부터 지주와 관리의 압제에 못 이겨 많은 농민들이 변경지방으로 달아나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되면서 이들 러시아 도망 농민도 카자흐로 불리게 된다(현재의 카자흐스탄이 혼혈이 된 계기. 하지만 그나마 중앙아시아에서는 카자흐스탄이 돌궐족의 순수한 혈통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필자는 과거 유라시아를 흔들던 훈족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국가를 카자흐스탄으로 본다). 이들의 생계수단은 수렵 · 어로 · 약탈행위였다.
에르마크는 볼가 강을 항행하는 배를 습격하여 약탈하는 카자흐 부대의 우두머리였다. 러시아 귀족의 설득으로 러시아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 받은 예르마크는 천여 명의 카자흐 부대를 이끌고 시베리아 원정에 나섰다. 에르마크의 부대는 곳곳에서 원주민의 부대를 패배시키면서 영토를 점령해나갔다. 1582년 에르마크의 부대는 ‘시비르 한국’의 수도에서 타타르칸 큐축(Tatar Khan Küchük)의 군대를 성 밖으로 유인해낸 후 성 안을 급습하여 장악했다. 에르마크는 시비르 한국을 이반 4세에게 헌상하고 후한 상을 받았다.
그 후 이반 4세는 러시아 정규군을 보내 본격적으로 시베리아 진출에 나섰다. 러시아인들의 중앙아시아 지역 이민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처음에 시베리아로 갔다가 점차 몽골족 거주 지역으로 유입되어 6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하였다.
(=> 러시아의 최대영토)
에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사는 미국의 서부 개척사와 유사한 데가 많다. 드넓은 대지와 풍부한 자원, 개척자들의 출신과 그 정신, 개척의 파급효과 등등. 그러나 속도는 러시아가 훨씬 빨랐다. 1630년에는 벌써 레나 강 기슭의 야쿠츠크에 도달했고, 1639년에는 카자흐의 작은 부대가 태평양에 다다랐다. 1648년에는 또 다른 카자흐 집단이 5척의 배를 타고서 시베리아 북동부 끝을 돌아 베링 해협을 통과했다. 북미의 알래스카까지 진출한 것이다.
1648년에 캄챠카(Kamchatka)가 차례로 건설되었고, 1651년에는 이민 온 러시아인들이 몽골인의 영토 바이칼호 근처에 도시 이르쿠츠크(Irkutsk)를 세웠고 1666년에는 만주족의 영토인 아무르강 유역에 알바진(Albazin)을 건설하였다. 동쪽 끝에 이른 러시아인은 거기서 다시 남하하다가 아무르 강(흑룡강)에서 중국인민들과 충돌한다.
카자흐족이 시베리아를 정복하던 당시는 조선은 성리학 우월주의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극단적인 당쟁을 통해 망국의 길로 빠르게 흘러갔고, 세상은 이미 서양을 중심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도 서양의 물결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바로 천주교의 자생적 전파와 선교사의 도래이다. 계급과 예절을 논하던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가치관인 천주교를 박해할 수 밖에 없었다. 성리학이 무너지면 기득권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 정세는 이미 서양의 기술과 무력 속에 점령되고 있었다.
4. 만주족의 청나라와 국경선 대립
러시아인들이 오브강에 도달할 무렵,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부족 연합체인 만주제국, 즉 청나라(1639년 건설)의 세력이 중원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내몽골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흡수하는 계속적인 정책을 폈고, 특별히 중앙아시아 문제를 전담하기 위한 정부 기구를 두었다. 동부 및 남부의 몽골족에 대한 만주족의 지배권이 확립된 시기는 중원 통치를 확립시킨 때인 1644년이었다. 만주제국의 강희황제는 현재의 울란바토르(Ulan-bator)인 우르가(Urga)의 티베트 종교지도자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함으로써 기선을 잡아 그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몽골족은 1691년 공식적으로 만주제국에게 항복함으로 흡수되었다.
이렇듯 러시아제국과 만주제국이 동시에 스텝으로 확장하였기 때문에 두 세력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이들의 갈등은 16세기 후반 표면화되었는데, 양측의 문제를 협상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1689년 여름에 네르친스크(Nerchinsk)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중앙 및 북부스텝에 대한 양측의 영향력 행사 범위의 규정을 담고 있다. 이미 공식적으로 항복한 몽골족은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대부분 만주의 통치하에 들게 되었고, 몽골에 대한 만주의 통치는 1907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5. 시베리아로 진출한 목적
첫째. 부동항: 러시아는 오래전 부터 서유럽과의 무역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항구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다. 낙후된 러시아를 발전 시킬 수 있는 길은 서유럽과의 무역을 통해서만 가능했는데 겨울이 긴 러시아는 겨울 내내 항구가 얼어 무역을 하기 매우 어려웠기에 부동항을 얻기 위해서 서유럽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강대국 스웨덴이 있는 유럽 쪽에서는 영토확장에 한계가 분명했고 남진을 하고자 해도 오스트리아, 오스만투크르가 버티고 있어서 러시아가 진출할 수 있는 방향은 동쪽 뿐이었다. 러시아의 동방진출(시베리아 진출)은 부동항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시베리아 끝에 도달하여 태평양을 만난 러시아는 이제 남진하게 된다. 중국 (청나라) 북부 까지 진출해 결국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톡을 건설한다.
둘째. 모피: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 즉 돈 때문이었다.
러시아인들이 기후, 지형적인 어려움, 기아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동쪽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그 목적인 바로 모피 때문이었다. 특히 담비 모피는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기에 모피 몇 장만 있으면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움이 없었고 초고가일 때는 몇 장만 있으면 평생 먹고산다고 할 정도였기에 돈을 벌기 위해서 모험한 것이다.
러시아의 황제는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서 모피를 공출했기 때문에 시베리아는 러시아인들에게 노다지 개념이었다. 따라서 원주민들은 러시아인들로 부터 착취를 당했는데 모피를 가져 오라는 압박이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베리아에서 모피 사냥을 해야 하니 많은 원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피난을 가게 된다. 식민화된 시베리아에서는 담비가 멸종하면 다음 지역으로 가서 담비를 멸종시켰고 다시 다음 지역으로 이동을 계속하면서 담비들을 멸종 시켜 나간다. 그 끝에 도착한 곳이 지금의 연해주 지역이다. 캄차카 반도에 도착한 러시아인들을 수달 사냥을 해 거의 멸종까지 이르게 만든다. 모피는 그 가죽이 유럽과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어 멸종의 위기까지 간다.
(참고) 서유럽국가들이 진출한 신대륙에는 원주민이 많았고 문화가 구대륙과 달라 원주민의 저항이 강하여 그들에 대한 학살 등 탄압이 많았다. 러시아가 진출한 시베리아에는 원주민이 많지 않았고 비교적 온순한 종족이라 별 저항 없이 진출할 수 있었다. 수십을 헤아리는 원주민족들이 부족을 이루어 살고 있었으나 주민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시비르 한국과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저항도 거의 없었다.
러시아가 진출한 시베리아에서는 타 지역에서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죄수들의 강제노동만으로 시베리아개척을 하여 오늘날 시베리아의 주된 인종은 러시아계 백인에 불과하고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 이후 러시아 이외의 타 지역에서 새로 유입된 인종이나 민족은 없다.
이들의 시베리아 진출 과정은 앵글로색슨족의 아메리카 대륙 서부 개척과는 전혀 그 양상이 달랐다. 앵글로 색슨족의 개척이 그 곳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씨를 말렸던 것과는 달리, 러시아인들은 원주민을 차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러시아인들의 시베리아 진출은 군사력 혹은 정치적 힘에 의한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생업을 위해 이민가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러시아가 진출한 시베리아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냉대기후와 한대기후로 되어 있어 단순하고 대도시가 형성되지 않아 이르쿠츠크, 하바로프스크, 블라디스토크 등 시베리아의 큰 도시인구도 몇 십만 명에 불과하다. 러시아가 진출한 시베리아는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어 독립하지 않은 채 계속 러시아영토로 남아 있어 오늘날 러시아는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몽골족의 최대영토와 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