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그리워 하는 맛이 있다.
삶이 어딘지 모르게 텁텁하다는 느낌이 들면 터어키 가파도키아에서 본 하늘처럼, 일본의 우동국물처럼 맑고 깨끗한 맛을 찾게 된다. 굳이 먹지 않고도 나를 신선한 세계로 이끌어갈 수만 있다면 기분 전환의 치유 능력을 가지는 셈이다. 어느날 깨끗한 맛을 찾아 콩자루에 콩을 모으듯 모아 보었다.
구김없이 놓여있는 백지 한 장에는 설레임이 있다. ,
금방 닦은 유리창에는 더럽히고 싶지않은 희망을 담는다.
60년대의 여학생 교복칼라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피어난다.
갓 다린 와이셔츠에는 수고로움에 대한 연민이 느껴진다.
가을볕에 마르고 있는 하얀 운동화,에는 눈부신 깨끗함에 견디기 힘든 아픔도 들어있다.
초봄의 목련꽃을 바라보면 나이들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오래묵은 가지에서 피어나는 기적같은 일이 나에게도 있을 것만 같다.
중부고속도로에서 만나는 조팝나무 꽃무리를 보고있으면 지난 겨울에 못내린 눈의 한이 내려앉은 것같다. ,
개포동에서 만나는 배꽃은 혼자 지키는 배밭이 부담스러워도 잊지않고 기억하는 사람들로하여
피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비 갠 다음날의 새벽길은 발자국도 직고싶지않게 순결함을 지키고 싶어진다. ,
밤의 박꽃은 내성적인 사람의 자기표현 같아서 좋다.
외숙모의 무명 앞치마에는 정결함이 배어있다.
무대 위에서 본 앙드레김의 백색의상에는 떨치지 못하는 결벽성이 깃들여 있어도 신선하다.
신부의 드레스에는 흠없는 출발이 포함되어 꿈으로 핀다. ,
돌돌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물에는 청정함의 노래가 들어있다.
빙어의 몸은 정직하다못해 부끄럽게 만든다. ,
빗자루 무늬가 아직 남아있는 산사의 뜰은 정갈하게 정리된 영혼의 뜰같아서 개운하다.
전철에서 만난 풀 먹인 스님의 옷에는 솔바람이 깃들고, 초록물이 들어보인다.
티벳의 하늘, 이과수 폭포의 신비경에는 하늘의 신선이 하강한것 같은 기분이 된다.,
아직도 텅비어 들꽃만 바람에 나부끼는 페루의 최후의 항쟁터는 텅빈 아름다움을 간직한다. ,
새교황님이 선출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에는 궁굼증과 희망이 담겨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는 깨고싶지않은 소망이 들어있다. ,
수녀님의 캡, 신부님의 로만 칼라에는 거룩한 기대감으로 도배된다.
마당에서 펄럭이는 아기 기저귀에는 깨끗한 사람의 손길이 닿아있다.
고급 레스토랑의 식탁보에는 맛에 몰두하라는 경고같아서 좋다. ,
아카시아꽃과 찔레꽃 향기에는 달콤한 행복이 깃들여져 있다. ,
솥뚜껑을 열었을 때 짜아 소리와 함께 드러나는 윤기 흐르는 쌀밥에는있는 행복을 확인시켜준다.
조붓한 입매에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이에는 정갈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들어있다.
마지막 헹군 삶은 행주에는 주부의 수고를 터는 행복이 들어있다.
밤에 만나는 벚꽃에는 수줍음과 멋이같이 들어있다. ,
금방 청소를 끝낸 운현궁의 뜰에는 눈물어린 역사의 한을 쓸어낸듯 아름답다.
임종을 앞에 둔 형제를 보는 마음엔느 비움의 깃들여져 있다.
새벽길에 듣는 미화원의 빗자루 소리에는 세상을 밝고 깨끗하게 여는 기운이 밴다.
외국 하늘에 펄럭이는 태극기에는 지고의 애국심이 들어있다. ,
구절판 요리의 맛에는 가미하지않은 순수한 맛이 깃들여져 있다.
금방 버무린 야채 샐러드의 맛에는 싱싱함이 묻어난다.
김이 오르는 백설기엔, 어린 맛이 깃들여져 있다,
산에서 먹는 생오이에는 향긋한 시원함이 뚝뚝 듣는다.
모시조개국, 재첩국에는 고유한 물맛이 스며있다.
가을에 먹는 신고배에는 가슴까지 다 씻어지는 듯한 묘한 단맛이 들어있다. ,
초봄에 먹는 제주 무우의 맛에는 유혹없는 단백함이 배어있다.
갓 벗겨놓은 참외는 금방먹고싶은 욕구르 불러일으킨다.
무 맑은 장국에 뜬 파에는 파랑색이 맛으로 보이게 한다.
양지머리를 삶은 국물에는 충만함고 따뜻함이 고향처럼 느끼게 한다. ,
오래 씹어 만나는 야채맛에는 제 고유한 야채 맛을 깨우쳐준다.
외국에서 돌아와 만나는 낙서없는 서울거리는 비교만족을 준다. ,
대청소한 아파트에서는 공동주택의 어두움을 벗겨준다. ,
전지를 마친 정원 풍경은 이발소에 다녀온 아버지 머리를 연상케 해준다. ,
진한 화장을 지우며 영혼을 맑히는 여인의 자태에서는 기도도량이 느껴진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서는 갈끔한 작가정신이 보인다.
마지막 손질을 끝내고 걸어둔 한복에는 입히고 싶은 설레임이 가득하다. ,
오래 참았다가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방울에는 안타까움이 더 깊이 느껴진다.
곰인형을 받아든 아기의 미소에는 작은 충만감이 들어있다. ,
외가마을에 핀 매화에는 세월을 가르쳐주는 시간표가 들어있다.
두통이 가라앉은 머리에는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
그 중에 제일은 눈감고 침묵 중에 만나는 고요이다. 가장큰 넉넉함이다.
맑고 깨끗한 맛은 감동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신선한 변화로 어둠을 밀어내기도 하며,
칙칙한 기운을 단방에 날리기도 하고 연상이 이어지며 웃음바다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뇌출혈로 편마비가 되어 몸은 불편해도 그들의 기억에 있는 갈래머리 여학생이나 하얀 교복칼라의 주인공들은 그들에게 웃음을 뿌려주고 지나간다. 얼굴이 빨개지며 가방을 받아안던 버스 안에서의 풍경을 떠올리며 한나절은 족히 웃는다. 녹말풀을 먹인 교복 칼라를 다리다가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나누다보면 다리미의 역사까지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말도 마, 다른 아이들 것은 하얀데 왜 내 것은 그렇게 누렇던지...”
“그 칼라 하나에 인생을 건 여학생들이었지. 인정받을 멋이 그것뿐이었으니까.”
“숯다리미로 다리다가 연탄 위에 다리미를 달구어 다리기도 하고 제네랄 전기다리미로 다리자니 천국이었지, 국산 말표 다리미로 다리다가 휴즈 나가는 날의 이중고는 말해 무엇해”
“교장선생님이 교복 칼라 깨끗하고 애프런 잘 입은 학생 찾아오라면 뽑혀나가는 것이 얼마나 좋아서 그 일에 신바람을 내었는지...”
“ 백목갈아 넣은 풀먹인 운동화를 신고 꺾이지 말라고 뻐쩡다리로 걸어가던 일은?”
“ 후라파들은 일부러 칼라에 풀기를 빼고 다니기도 했는데 몰라?”
“아, 서울에는 후라파 많기로 유명한 5대 극성 학교가 있었어”
이야기는 끊일 줄을 모른다. 천리길도 한걸음으로 시작되고 15층까지의 계단도 첫계단부터 밟아야 오를 수 있는 현실 속에서 기억 안으로 들어가면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 자유로워진다. 꿈꾸는 시간이 된다.
그리움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 깨끗하게 세척된 영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