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륜동 장면(張勉) 가옥 - 등록문화재 357호
▲ 장면 가옥 외경 |
명륜동에 자리한 장면 가옥(장면총리 가옥)은 서울에 서려있는 현대사의 주요 현장이다. 바로
제1,2공화국 시절 정치/외교가로 활동했던 장면(장면 총리, 장면 박사라고 많이 불림)이 살던
집으로 속세(俗世)의 때가 조금씩 묻어가던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4.19와 한 덩어리로 국사
관련 시험에 단골로 등장했던 귀찮은 인물이다. 그나마 다행은 외우기가 참 쉬운 이름이었다
는 것인데 그것도 외우기 어렵다면 대중음식의 하나인 짜장면(자장면)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
란 식으로 외우면 연상도 쉽게 된다.
이 집은 장면이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에 지은 것으로 건축가 김정희가 한옥과 양옥의
장점을 뽑아서 지은 개량 한옥의 일종이다. 1930~40년대 서울 중산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가옥 손질을 거쳐 2012년 12월 실외가 우선 개방되었다.
이후 건물 내부를 손질하고 장면의 유물 중 괜찮은 것을 선별하여 2013년 4월 19일, 사랑채와
안채 내부가 장면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날짜를 4월 19일로 잡은 것은
이승
만의 자유당(自由黨)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4.19혁명과 장면의 정치개혁
의지
를 기리고자 함이다. |
▲ 활짝 열린 장면 가옥 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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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가옥 등록문화재 필증 |
▲ 장면의 흉상(胸像) |
돌로 1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다진 장면 가옥은 안채(92.56㎡)를 중심으로 사랑
채(56.2㎡), 경호원실(9.92㎡), 수행원실(6.61㎡) 등 4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위관료
까지 지낸 사람이라 집이 클 줄 알았더만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하여 썩은 내가 진동
하는 권력층과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에 비해 거부감도 별로 없고 정감도 많이 간다. <같은 시
대를 누볐던 자유당의 우두머리 이기붕(李起鵬)의 집은 저택급이었음>
가옥을 둘러싼 담장은 남쪽과 서쪽은 하얀 피부, 동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담장
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가옥 서쪽에는 키다리 아파트가 자리해 가옥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
쪽에는 혜화로가 나있다.
가옥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문은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개방시간에 한해
문짝 하나를 열어둔다. 문 높이는 담장만큼 낮으며 문 우측 기둥에는 주소가 쓰인 패가 있고,
좌측 기둥에는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옛 주인 장면의 이름 2자가 한자로 쓰여 있어 혹 문
을 두드리면(초인종은 없음) 그 장면이 스르륵 달려나와 우리를 맞이해 줄 것 같은 기분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담장이 집 안채를 가리며 길을 막아서는데 여기서 가족과 친척, 친분이
두터운 사람은 왼쪽, 언론기자와 기타 손님은 오른쪽으로 갔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랑채에
딸린 대기실이 나오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옆칸에 있는 응접실에서 장면을 접견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조그만 경호원동과 앞마당으로 이어진다. 경호원동은 장면의 경호원
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3㎡ 정도의 좁은 지하가 있다. 현재는 이
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머물고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2012년에 조성된 장면의 흉상이 서 있고
좌측에는 장면이 심었다는 높이 7~8m의 작은 나무 1그루가 주인이 가고 없는 집뜨락에 조촐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장면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운석 장면(雲石 張勉. 1899~1966)
장면은 옥산(玉山) 장씨로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에서 장기빈(張箕彬)의 맏아들로 태
어났다. 장기빈은 왜정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관리로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8살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배웠고, 1917년 수원
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생대의 전신)를 졸업,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으
로 마쳤다.
이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카톨릭대 문과에 들어가 1925년에 졸업을
했으며, 로마교황청에서 열린 '한국79위 순교복자 시복식(諡福式)'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국
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고, 1936년 그곳의
교장이 되었다. 또한 계성학교의 교장까지 겸임해 1945년까지 교육계에서 일했고, 천주교청년
회연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 등을 출간했다.
1946년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했으며, 우익의 일
원이 되어 좌익세력과 싸웠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동을 벌이기
도 했다.
1948년 서울 종로 을(乙)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
라는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 특사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했고 귀국 길에 미
국 맨해튼대학에 들려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가 되어 2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고, 6.25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설득
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귀국했으나 바로 이듬해 물러났
으며, 야당의 일원이 되어 이승만/이기붕의 자유당 독재정권과 싸우기 시작했다.
1955년 신익희(申翼熙), 조병옥과 민주당을 결성해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대선 때 신익
희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이 부통령(副統領) 후보로 나가 정권 교체를 노렸다. 이때 자유당은
8년 이상이나 대통령을 해먹은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야망이 쓸데없이 컸던 이기붕이 부통
령 후보로 나섰다.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열심히 유세를 벌이던 신익희는 호남으로 내려가던 중, 열차 안에서
돌연 급사를 하면서 정권교체의 꿈은 물 건너갔다. 다행히 신익희 사망에 따른 동정표로 장면
이 이기붕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당 정치깡패인 최훈과 김상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
히 경상으로 그쳤으며, 1957년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9년 민주당 최
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대선 때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유세 도중 위암으로 사망해 정권교체의 기
회를 잃었으며 장면은 또다시 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로 이기
붕이 억지로 당선되자 뿔이 단단히 난 민중들이 봉기하여 마산과 대구에서 독재정권/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서울에서 4.19가 터지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은 길거리에 나앉게 된
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의 민주당은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실시했고, 장면은 제5
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이끌게 되었다. 허나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내려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욕심과 이해관계에 얽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민주당의 구파가 떨어져나가 신민당을
창당했고, 그렇게 1년을 소비하다가 1961년 5.16으로 장면 내각은 모두 털리고 만다.
5.16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장면을 연금시켰고,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
루시켜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5년간 집에 틀어박혀 신앙생활
에 몰두하다가 1966년 6월 4일, 간염으로 67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
葬)으로 거행되었으며, 경기도 포천 카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은 미국 대사로 2년 가량 외국에 나가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집에서 살았다. 그
러니 거의 27년 동안 살았던 셈이다. 집 구석구석 장면의 손때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
가 심은 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해 주인의 빈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꽤 옛날 인물
처럼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다. 그가 사망하고 12년 뒤에
내가 이 세상에 억지로 나왔고 부모 세대들은 장면의 모습과 이름 2자를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 경호원동과 나무 1그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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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마당에 있는 작두펌프(우물펌프)
▼ 안채 동쪽에 자리한 장식용 장독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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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넓지 않은 앞마당에는 소나무 1그루와 작두펌프가 있다. 작두펌프는 우물펌프, 옛날펌프
, 무쇠펌프, 작두샘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1980년대까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기구
였다.
이 기구는 장면과 그의 가솔(家率)들, 경호원들이 쓰던 것으로 지하에 관정(管井)을 묻고 지
하수를 끌어올리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정신줄을 놓은 펌
프를 깨우고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
▲ 장면 가옥 안채 (장면기념관) |
남쪽을 바라보고 선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장면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장면기념관의 중
심으로 거실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건너방이 자리해 있고, 안방 북쪽에
는 부엌, 건너방 북쪽에는 욕실이 있다. 대청마루 북쪽과 남쪽에는 미닫이문을 냈으며, 2013
년 4월 19일 금지된 집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대청마루 남쪽 미닫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실내화가 넉넉히 준비되어 있어 신발
을 벗고 그것으로 갈아신으면 된다. 대청마루와 안방, 건너방에는 장면의 체취가 서린 온갖
문서와 사진,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서 같은 경우 상당수가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장면 외에도 그의 부인 김옥윤이 쓰던 유품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정치인 가족의 생활상
을 아련히 알려준다. |
▲ 안채 대청마루 (오른쪽이 사랑방, 북쪽이 부엌)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사랑방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건너방
▲ 1948년 9월 6일에 발급된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복제품) |
이 여권은 1948년 '유엔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부여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
초의 외교관 여권이다. 그러니 눈여겨 보기 바란다.(복제품이란 것은 함정) 그는 대한민국 최
초의 외교관이기도 하며, 미국과 프랑스 등의 입국사증이 찍혀 있다. |
▲ 유엔총회 연설문(복제품)과 바티칸 교황청 훈장 (오른쪽) |
유엔총회 연설문은 1949년 12월 7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영
어 연설문의 한글 번역본이다. (장면이 직접 썼음) 연설 직후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
로 한국 독립 승인이 통과되었다. (반대한 쓰레기들은 주로 공산주의 국가임) |
▲ 영어로 쓰인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 (복제품)
유엔에서 찬성 48표를 얻어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은 그 순간을 기록한 문서로
미국 국무부 고문 달레스의 친필 사인이 담겨져 있다.
▲ 바티칸 교황청에서 선사한 훈장 (진품임)
1951년 5월 22일 국무총리 재직 중에 교황청에서 선물로 준 훈장이다.
▲ 재외국인등록증 (복제품)
장면의 50대 사진이 담긴 문서로 주미국대사 재직시(1949년 10월 16일)에 발급
받은 것이다. 양력 대신 단기(檀紀)를 쓰고 있는 점이 무척 이채롭다.
(1960년대 초까지 단기를 많이 썼음)
▲ 주미대사 신임장 (복제품)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대한민국 주미특명 전권대사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제정한 신임장(信任狀)이다. 이 문서에도 단기가 쓰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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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이 사용했던 영문 타자기 (진품임)
2년 동안 주미 대사를 지냈을 때 이용했던 타
자기이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있지만 그 시절
에는 정말 불이 날 정도로 바쁘게 뛰었다. |
▲ 장면이 번역했던 천주교 서적들 (진품)
왼쪽은 제임스 기본스가 1876년에 저술한
'교부들의 신앙'으로 장면이 1944년에
번역판을 내놓았다. |
▲ 장면이 사용했던 기도서와 십자가 목걸이 (진품)
1921년 성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한 후 얻은 것으로 장면은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기도서 위에 있는 십자가 목걸이 역시 그가 기도를
할 때 쓰던 것이다. |
▲ 장면이 썼던 실크모자 (오른쪽에 실크모자를 쓴 장면의 사진이 있음) |
장면이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 때 썼던 모자이다. 그저 말로만 듣고 바보상자에서
만 보았던 그 실크모자를 여기서 처음 그 실물을 접하니 모자가 은근 멋있어 보인다. 나도 한
번 써보고 싶은데 어째 안될까? |
▲ 무늬만 남은 안채 부엌 |
안채 부엌은 전통 부엌 양식에 서양식이 더해진 형태로 타일을 깐 아궁이와 부엌 벽, 그리고
그릇과 음식을 씻는 일종의 싱크대까지 갖추고 있다.
장면과 그의 가솔, 경호원들은 이 부엌에서 만들어진 밥과 온갖 음식의 힘으로 혼란했던 20세
기 중반을 살아갔다. 허나 장면 가족이 집을 떠난 이후, 현역에서 물러나 이제는 그 껍데기만
남은 채, 모락모락 밥 연기와 국 연기를 뿜어내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 장면이 부통령 당선 기념으로 받은 놋그릇(왼쪽)과 바깥 활동 때
늘 가지고 다녔던 동그란 도시락통 (오른쪽)
▲ 장면이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했던 그 비싼 신선로(神仙爐)
장면 일가의 넉넉했던 형편을 보여준다.
▲ 장면, 김옥윤 부부의 약력과 기도문이 담긴 카드와
김옥윤이 사용했던 옥비녀와 옥반지
▲ 김옥윤이 사용했던 안경과 반짇고리, 그리고 이쁜 꽃신
바느질을 하는 김옥윤의 사진도 같이 있다. 조그만 꽃신에서는 그의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가 불어오는 듯 하다.
▲ 장면이 쓰던 돋보기와 명함, 그의 싸인, 손목시계, 만년필, 수표책
▲ 장면의 조촐한 쉼터, 안락의자와 거북선 마크 베게 |
거북선이 그려진 노란색 베게는 그가 애용했던 물건으로 안락의자와 함께 그의 숙면을 인도해
주었다. 국정(國政)으로 늘 잠이 부족했던 그에게 저 의자와 베게는 소중한 쉼터였으리라. |
▲ 3대가 다 모인 장면의 가족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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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뒤쪽에 자리한 비좁은 수행원동 |
▲ 수수하게 보이는 안채 뒤쪽 |
▲ 눈으로 햐얀 지붕을 이루고 있는 장면 가옥 사랑채 |
앞마당 동쪽에 자리한 사랑채는 사랑방, 응접실, 대기실로 이루어져있다. 사랑채는 장면이 손
님을 접대하거나 민주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회의나 다과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던 그
의 공무(公務) 공간으로 현재는 그의 유품과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내부 관람 가능) |
▲ 1956년 부통령 선거 때 쓰인 장면 포스터와 약력 |
그 당시 민주당 구호는 이랬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보자', 그에 대응하는 자
유당 떨거지들의 구호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사탕발림에 속지 말자'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장면이 이기붕
을 여유있게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런데로 체면은 세웠다. |
▲ 장면이 4대 부통령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답신 (복제품)
▲ 1956년 장면을 저격했던 최훈과 김상붕이 장면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 (복제품) |
장면은 1956년 자유당에서 사주한 최훈과 김상붕의 총격을 받아서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들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그들의 감형을 주선하여 사형만은 면하게
했다. 이에 최훈은 1964년 7월 27일 장면에게 1통의 봉함 엽서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
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은 4.19가 일어난 그해 10월, 관대하신
은
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이며 살아온
불초 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
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장면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저격범까지 관용의 정신을 베풀어 살려주는 등, 그의 넉넉한 마음
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범인(凡人)은 감히 따라하기 어려운 그 넓은 마음을 말이다. 물론 정
치적인 다른 이유도 조금은 섞여 있겠지. (자세한 것은 당사자만 알 뿐임) |
▲ 왼쪽은 1960년 8월 27일 민의원에서 열린 제2공화국 국무총리 취임사에서
장면이 발표한 6개항의 시정 방침을 밝힌 시정 연설문 (복제품)
오른쪽은 5.16쿠데타 이후 나온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서 (복제품)
▲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응접실 (왼쪽 에어컨은 2012년 이후에
설치됨)
▲ 장면이 주로 머물렀던 사랑채 사랑방 (이불장, 가구 등이 있음)
▲ 1999년 8월 13일, 장면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복제품)
▲ 자신의 일대기를 직접 저술한 친필 연보 (복제품)
어린 시절부터 1965년까지 자신의 일생을 친필로 정리한 일기이다. 자신의 가족과
국내에서의 행적은 물론 자신이 직접 겪은 국제 정세도 소상히 기재해 놓았다.
▲ 한자로 쓰인 자신의 좌우명(왼쪽, 복제품), 장면이 서거한지 8달 뒤
(1967년 2월)에 발간된 그의 기고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 장면 가옥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대학로를 따라 2분 정도 걸으면 혜화동로터리이다.
여기서 정면으로 길을 건너 혜화동우체국을 끼고 북쪽으로 난 2차선 도로(혜화로)를 3분 정
도 가면 길 왼쪽에 장면 가옥이 있다.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혜화초교에서 내리면 길 건너로 장면 가옥이 보인다.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까지) /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36-1 (혜화로5길 53, 장면박사 기념관 ☎
070-8239-
1063)
* 장면박사 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 문과 복도로 이어진 사랑채 내부 |
첫댓글 완전 글, 재밌습니다.~~^^ 장면이 419로 국민이 피로 찾아온 민주화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이해관계에 얽혀 516으로 허사가 되었다는 부분은 참으로 뼈아픕니다. 1979년지나 1980년도 그렇지만 1987년 삼김씨가 서로 양보안하는 것 보고 정말 젊은이들이 피로 얻는 민주화가 이렇게 퇴보하는 구나 참 뼈아픈 역사였지요,, 송시열의 생애를 보니 그시절 비교적 장수한 분이라 눈길을 끕니다. 신사임당이 아들없는 친정어머니를 두고 30대에 서울로 시집살이 하러가면서 대관령에서 어머니를 그렸다는데, 실제 신사임당은 48세 죽었는데 친정엄마는 딸보다 18년 더 살아 90세까지 살았더라구요.. 오죽헌가서 알게됨^^,,
신사임당 모친이 꽤 오래살았군여. 90년이나.. 송시열 같은 경우 너무 쓸데없이 오래살았죠. 아마 사약을 받지 않았다면 90년 이상은 거뜬히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 댓글 금지 된 것 아니죠? 조회수는 굉장히 고정 독자가 있는 것 같은데,, 댓글은 잘 안다시는 것 같습니다. 상당히 공들여 쓴 글이라 감사드리며 제 댓글이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회수의 상당수는 외부검색 수요입니다. (외부검색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글 읽기가 가능하나, 댓글은 까페 회원 외에는 안됨) 현재 침체에 빠진 까페 특성상 까페 자체 수요는 10%도 안될듯 합니다.
@도봉산고양이 아 그랬군요~~^^ 이 글이 네이버 블러그에 동시에 올리는 것 같은데 여기에서 읽기에도 잘 편집되서 여기가 원본같기도 합니다... 주로 산을 가시니까 글이 청량한 기분을 줍니다... / 장수했다 싶으면 지난 세대는 80대인데 지금은 90대가 좀 많아지는 게 현실입니다. 과거한국에는 경노사상이 있었으니 오죽헌같이 좋은 집을 물려받는 신사임당 어머니(용인이씨)는 정말 호강 오래했을지도 모르고,, 아님 노환을 앓았을 수도 있고,,, 아무튼 노비가 있던 시대였으니 양반가 장수는 지금보다는 대우를 받았을 것 같아요... 제가 노년기에 관심이 많답니다.^^
@에스프리 네이버블로그는 좀 시차를 두고 올리고 있습니다. 네이버보다는 다음 쪽이 좀 괜찮죠. (네이버는 태그가 잘 안먹힘)
@도봉산고양이 그럼 다음, 여기가 가장 먼저 원문이 올라오는 곳이예요? 그것은 몰랐네요^^
@에스프리 원문은 다음블로그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순서대로 여기저기 올리고 있지여.
@도봉산고양이 아. 다음도 블러그가 있군요..
잘 봤습니다
근대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보게 하는 글이네요 다양한 사진 까지~
끊임없는 열정에 찬사를 보냅니다~^^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