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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경 시집 <장생포에서>, 푸른사상, 2019년 12월 30일
사회학적 상상력의 시 맹문재 1. 밀즈(Charles Wright Mills)는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개인의 문제가 사회 구조 및 역사 상황과 관계가 있다고 보고 상호작용을 탐구했다. 개인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론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가령 사회의 구조는 어떻고 구성 요소는 무엇이며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제는 무엇인지, 사회에서 우세한 사람들은 어떤 유형이고 앞으로는 어떤 사람들이 우세할 것인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본질적인 특징은 무엇이고 다른 시대와는 어떻게 다른지 등을 살핀 것이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개인의 상황을 하나의 관점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다른 관점으로까지 살펴본다. 따라서 사회학적 상상력은 “가장 개인과 관계가 없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된 변화로부터 인간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특징까지의 범위 및 서로간의 관계들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가 사회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이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등을 탐색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상황이 사회 구조 및 환경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식이나 정보 차원으로는 인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삶의 실제에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매우 복잡하고 전문화되어 있고 급변하기 때문에 한 개인이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간파할 만큼 지식을 갖추고 정보를 획득하고 시간적인 여유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고자 개인과 사회 및 역사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밀즈는 사회학자들이 거대담론에 매달려 사회 현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담론에 집중하기보다는 경험의 현실을 중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살펴봐야 하듯이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분을 살펴봐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결국 개인의 문제를 사회 전체의 문제와 연관해서 적극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황주경 시인의 작품들에 나타난 가족과 이웃 사랑, 노동 인식, 역사의식, 정치 참여는 이와 같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2. 아버지의 가계부는 세월이 가면서 점점 빛바랜 영광이 되어갔다 뒤란 궤짝에 버려져 잊혔던 놈을 꺼내 딱지로 만들었다 동무들과 어울려 팔이 빠지도록 딱지 치던 날 딱지 속에서 먼 고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풀어헤쳐 자세히 살펴보니 어린 새끼를 등에 업은 말향고래 한 마리 숨구멍으로 급하게 물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위태롭게 쪽배를 탄 아버지가 물귀신처럼 포효하며 푸른 파도 춤추는 바다 깊숙이 작살을 던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가계부는 한 마리 말향고래의 항해일지였다 ―「반구대 암각화」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에게 “아버지의 가계부는/세월이 가면서 점점 빛바랜 영광이 되어”가는 물건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뒤란 궤짝에 버려져/잊혔던 놈을 꺼내 딱지로 만들”어 가지고 놀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자는 “동무들과 어울려/팔이 빠지도록 딱지 치”다가 “딱지 속에서 먼 고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딱지”를 “풀어헤쳐 자세히 살펴보니/어린 새끼를 등에 업은 말향고래 한 마리/숨구멍으로 급하게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위태롭게 쪽배를 탄 아버지가 물귀신처럼 포효하며/푸른 파도 춤추는 바다 깊숙이/작살을 던지고 있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본 화자는 “아버지의 가계부는 한 마리 말향고래의 항해 일지”라고 말한다. “어린 새끼를 등에 업은 말향고래”나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작살을 던지는 “아버지”를 동일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작품의 제목을 “반구대 암각화”로 정한 것은 주목된다. 화자는 “가계부”를 쓰면서 온몸을 다해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인류적인 차원으로 이해한 것이다. “사회학적 상상력에 있어서 인류학적인 차원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인류학은 인간 사회 생활의 형태가 만화경처럼 얼마나 다양한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른 형태의 사회들을 우리가 사는 사회와 대비시켜 봄으로써 우리는 우리 행동의 특수한 유형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동에 있는 바위벽 그림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여러 시기에 걸쳐 제작되었다. 바다동물, 육지동물, 도구, 사람 등 300여 점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고래를 사냥하고 있는 그림이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선사시대의 인류가 고래를 사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는 인류문화의 기원을 알려주는 유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선사시대의 인류들이 사냥하는 모습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위대한지를 알려준다. 인간은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극복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삼계탕 한 그릇이 간편할 복날이다 식당 앞 긴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자식들이 모두 떠난 고향집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지금쯤 당신은 늙은 아내를 위해 마당에서 닭의 목을 비틀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자급자족의 풍습을 고집하고 있을 당신, 그런 당신이 나는 이 세상에 진 것 같아 싫었다 다른 집처럼 우리집도 일찍 도시로 나갔으면 나는 켄터키치킨의 묘한 양념맛에 길들여졌을 테고 뾰족한 도시의 부리에도 덜 쪼였을 것이라 원망했다 사상 최대의 무더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오늘, 삼계탕 한 그릇 먹기 위해 땀 뻘뻘 흘리며 줄 서서야 깨달았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나 역시 당신처럼 수렵의 본능에 충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늘 아래서 아이와 아내가 나의 손짓만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처럼」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삼계탕 한 그릇이 간편할 복날”에 “식당 앞 긴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자식들이 모두 떠난 고향집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지금쯤 당신은 늙은 아내를 위해/마당에서 닭의 목을 비틀고 있을 것이다”. 화자는 “오늘도 자급자족의 풍습을 고집하고 있을 당신, 그런 당신”을 “이 세상에 진 것 같아 싫”어했다. “다른 집처럼 우리집도 일찍 도시로 나갔으면” “켄터키치킨의 묘한 양념맛에 길들여졌을 테고/뾰족한 도시의 부리에도 덜 쪼였을 것이라”고 원망해온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사상 최대의 무더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오늘,/삼계탕 한 그릇 먹기 위해 땀 뻘뻘 흘리며 줄 서서야 깨”닫는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자신 역시 “당신처럼 수렵의 본능에 충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와 같은 면은 “그늘 아래서 아이와 아내가 나의 손짓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서 여실하다. 결국 화자는 자신의 “수렵” 생활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임을 알게 된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자신의 핏속에 흐르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파도처럼 출렁이던 청춘 울산 막노동판에 스며들어 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휴일, 긴급 정비 중인 유조선에 올라 철야 작업으로 기름 범벅이 되던 날, 나의 큰 꿈 품은 고래 한 마리 어디론가 사라지고 검은 파도에 일렁이는 내 얼굴 기름인지 눈물인지 닦아내던 밤바다 다시 그 바다에 서보니 어쩌면 그 고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저리도 푸른 포물선을 그리며 더 넓은 바다를 원고지로 시를 썼을 수도 있었겠다 ―「장생포에서」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파도처럼 출렁이던 청춘”의 나이에 “울산 막노동판에 스며들어/돈 좀 더 벌어보겠다”는 다짐으로 노동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던 “휴일, 긴급 정비 중인 유조선에 올라 철야 작업으로 기름 범벅이 되던 날,” 자신의 “큰 꿈 품은 고래 한 마리 어디론가 사라지고/검은 파도에 일렁이는” 한 노동자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기름인지/눈물인지/닦아내던 밤바다”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 것이다. 그 결과 생의 꿈으로 삼고 찾던 “고래 한 마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삶의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지만 화자는 자신의 삶을 후회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자신이 희망한 “고래”를 획득하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왔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다시 그 바다에 서보니/어쩌면 그 고래, 사라진 것이 아니라/저리도 푸른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넓은 바다를 원고지로 시를 썼을 수도 있었겠”다고 자신의 길을 긍정하는 것이다. 결국 화자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통해 한 노동자의 사회적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3. “삼촌, 일로 오이소! 싱싱한 놈으로 잘해 줄게” 방어진 활어 센터 순자네 아지매 그녀는 분명 나를 보고 호객 중인데 어라, 저 손에 쥔 회칼 좀 보소 쓰윽 쓱쓱, 맹인 검객처럼 저 혼자 무채 썰듯 오징어를 쓰는 중이나니 오징어 한 마리에 일백여 번의 칼질, 너비 오차 제로 그녀도 처음에는 손가락을 회 쓸 듯했다는데 저 차가운 동해에 신랑 잃은 사연이나 하나뿐인 딸내미 꿋꿋하게 키워낸 억척이 춤추는 저 칼날 속에 숨겨져 있었나니 성난 파도 같은 모진 운명 칼 하나 들고 담담히 맞서다 보니 어느새 칼과 몸이 하나가 되었으리라 번뇌와 망상조차 단칼에 쳐낸 적 없이 하루하루를 맥없이 사는 나는 신들린 듯한 저 칼을 바라보며 밭 매는데 인이 배겨 허리마저 호미처럼 굽은 내 어머니를 생각하나니 ―「심검당(尋劍堂)」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삼촌, 일로 오이소! 싱싱한 놈으로 잘해 줄게”라며 호객 행위를 하는 “방어진 활어 센터 순자네 아지매”를 자랑스레 소개한다. 화자가 주목하는 것은 “순자네 아지매”의 호객 행동이 아니라 “어라, 저 손에 쥔 회칼 좀 보소”라고 한데서 볼 수 있듯이 그녀의 “회칼”이다. 그녀는 “쓰윽 쓱쓱, 맹인 검객처럼/저 혼자 무채 썰듯 오징어를 쓰는 중”인데, “오징어 한 마리에 일백여 번의 칼질, 너비 오차 제로”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도 처음에는 손가락을 회 쓸 듯했”을 정도로 칼질이 어설펐다. 그렇지만 그녀는 모진 결심을 하고 매달려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차가운 동해에 신랑 잃은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뿐인 딸내미 꿋꿋하게 키워”내기 위해 그녀는 칼을 갈았다. 그녀의 “억척이/춤추는 저 칼날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화자는 “성난 파도 같은 모진 운명/칼 하나 들고 담담히 맞서다 보니/어느새 칼과 몸이 하나가” 된 그녀의 모습에서 “번뇌와 망상조차 단칼에 쳐낸 적 없이/하루하루를 맥없이 사는” 자신을 반성한다. 그리고 “신들린 듯한 저 칼을 바라보며/밭 매는데 인이 배겨 허리마저 호미처럼 굽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온몸을 다해 살아온 “순자네 아지매”와 “어머니”의 삶을 숭고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위의 작품의 제목을 “심검당(尋劍堂)”으로 정한 것은 이해된다. “심검당”은 사찰에서 선실(禪室) 또는 강원(講院)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붙이는 이름이다. 승려들이 좌선하는 처소로 사용되는데, ‘지혜의 칼을 찾는 곳’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화자는 한평생 회칼을 쓴 “순자 아지매”나 한평생 밭을 맨 “어머니”의 삶이 좌선에 정진하는 승려들 못지않게 위대하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들의 삶의 터전을 “심검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속인들이 살아가려고 욕망하는 모습과 종교인들이 마음을 비우고 좌선하는 모습은 서로 상반되지만, 삶 자체에 헌신하고 있기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오토바이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다리를 걷어붙인 청년 하나가 빨간약을 바르고 있다 스패너를 든 가게 사장이 다 고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말하자, 청년 왈 배달이 밀려 큰일이라며 성화를 부린다 나는 오지랖 넓게 가던 길을 멈추고 “배달이 뭔 대수냐? 빨리 병원부터 가시라”고 말하려는데 청년의 휴대폰이 울린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곧 도착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휴대폰에 대고 쩔쩔매는 청년의 정강이로 빨간약 서너 줄이 길게 흘러내리고 수시로 회사를 때려치운다는 내 입이 부끄러워 나오려던 말을 삼키고 가든 길을 재촉한다 오토바이 한 대 내 옆을 휙 지나간다 ―「퀵서비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오토바이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다리를 걷어붙인 청년 하나가 빨간약을 바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 청년은 “스패너를 든 가게 사장이/다 고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말하자” “배달이 밀려 큰일이라며 성화를 부”리고 있다. 화자는 “오지랖 넓게 가던 길을 멈추고/“배달이 뭔 대수냐? 빨리 병원부터 가시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때 “청년의 휴대폰이 울”렸다. 청년은 “죄송합니다. 사모님, 곧 도착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휴대폰에 대고 쩔쩔”맸다. “퀵서비스”(quick service)는 오토바이 등을 이용해 당일 배송을 목적으로 소화물을 수집 및 배달하는 노동 활동이다. 그렇지만 온라인을 기반으로 거래되는 플랫폼 노동자들처럼 퀵서비스 노동자들의 처우는 열악하기만 하다.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하지만 사업주 중심으로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휴식을 제대로 갖지 못한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기도 한다. 또한 근로계약을 맺지 않아 노동법에 규정된 노동자의 지위와 권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 4대 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등 사회의 안전으로부터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작품의 화자는 “휴대폰에 대고 쩔쩔매는 청년의 정강이로/빨간약 서너 줄이 길게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며 “수시로 회사를 때려치운다는 내 입이 부끄러워/나오려던 말을 삼키고 가든 길을 재촉한다”. 그 청년보다 자신의 노동 조건이 좋기 때문에 상대적인 안정감 내지 만족감을 가졌다기보다는 청년이 처한 노동 환경을 새롭게 확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노동자의 열악한 형편을 사회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살펴보며 그 극복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4. 학창시절 전교 몇 등 하던 친구 녀석 시험 칠 때마다 대담하게 커닝을 했었는데 녀석이 말벌처럼 웅크려 책을 뒤적이면 교실은 꿀벌의 날갯짓 같은 아이들의 한숨 소리가 윙윙거렸다 그 속에는 모른 척 신문만 훑고 있는 감독 선생님에 대한 원망과 배경이 남다른 녀석에 대한 시기심과 두려움이 들어 있었는데 나는 이명처럼 왕왕거리는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 대충 찍고 엎드려 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어느 날 잠을 깨보니 지천명이 코앞이다 녀석은 여전히 말벌의 문양 같은 황금 배지를 달고 뉴스나 인터넷 속에서 으스대고 아이들은 그때처럼 숨어서 와글와글 댓글을 달고 나는 백지 답안 같은 막걸릿잔 앞에서 꾸벅꾸벅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말벌」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학창시절 전교 몇 등 하던 친구 녀석”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시험 칠 때마다 대담하게 커닝을 했었”다. “녀석이 말벌처럼 웅크려 책을 뒤적이면/교실은 꿀벌의 날갯짓 같은 아이들의 한숨 소리가 윙윙거렸”고, “그 속에는 모른 척 신문만 훑고 있는 감독 선생님에 대한 원망과/배경이 남다른 녀석에 대한 시기심과 두려움이 들어 있었”다. 화자는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항하지 못하고 “이명처럼 왕왕거리는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대충 찍고 엎드려 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작품의 화자는 “어느 날 잠을 깨보니 지천명이 코앞이”라는 사실에 놀랐는데, “녀석은 여전히 말벌의 문양 같은 황금 배지를 달고/뉴스나 인터넷 속에서 으스대고/아이들은 그때처럼 숨어서 와글와글 댓글을 달고” 있기에 더욱 놀랐다. 화자 역시 “백지 답안 같은 막걸릿잔 앞에서/꾸벅꾸벅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화자는 “세상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단언한다. 시대가 지났는데도 불평등한 사회의 계급이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화자는 불평등한 계급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고 있는 “말벌”을 고발하면서 사회의 계급 모순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를 모색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로 계급을 정의했다. 근대 산업 사회 이전에는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과 그 토지에 자신의 노동력을 쏟아야 하는 사람들 간의 계급이 존재했고, 근대 산업 사회 이후에는 공장이나 기계 등을 소유한 사람들과 그것들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 간의 계급이 존재했다. 귀족 및 양반과 농노 및 노비의 계급으로부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구성이 바뀐 것이다. 어느 시대나 계급에 의한 착취가 존재했는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되는 착취와 그것으로 인한 불평등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자본가는 점점 부를 축적하는데 반해 노동자는 빈곤으로 말미암아 상대적 박탈감이 심화되는 면을 주시한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는 세금 제도를 통해 자본가 계급이 부를 취득하는 데 제한하고, 복지 제도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교육 제도를 통해 노동자에게 계급 향상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그 결과 근대 산업사회 이전의 농노나 노비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계급간의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소수의 대지주, 금융 자본가, 산업 자본가 등이 토지와 주식과 채권을 절대적으로 소유해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최하층 계급에 속하는 실업자, 환자, 장애인 등은 극빈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의 구성원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은 필요하다. 어둠 앞 촛불을 들고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박근혜 탄핵이라 외쳤네요 쓸개 빠진 사람처럼 울산에서 서울까지 을에서 갑이 된 듯 가장자리에서 중심이 된 듯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네요 장군은 동상이 되어서도 두 눈 부릅뜨고 빌딩 저 너머 적들을 지키시고 우리의 적은 항상 차벽 너머 저 안에 있었다며 장군께 억울하지도 않으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네요 그해 봄을 몽땅 안고 아이들이 바다로 질 때도 물대포에 사람이 죽어 나가떨어질 때도 저 안은 꽃단장 잔치판을 벌였다고 반주에 취해 횡설수설, 자정 넘어 새벽이 되어서도 장군은 눈 하나 깜짝 않으시는데 졸음에 전의를 상실한 채 나는 그만 장군의 갑옷자락에서 꿀잠에 들고 말았네요 ―「촛불연가」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어둠 앞 촛불을 들고/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박근혜 탄핵이라 외쳤”다. “쓸개 빠진 사람처럼 울산에서 서울까지/을에서 갑이 된 듯/가장자리에서 중심이 된 듯/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비록 “졸음에 전의를 상실한 채” “장군의 갑옷자락에서/꿀잠에 들”기도 했지만 촛불 집회에 참여함으로써 국민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이다.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4월 29일까지 국민에 의해 진행된 스물세 차례의 촛불 집회는 우리 사회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은 탄핵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에 의한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국민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권을 되찾았고 민주주의 가치를 바로 세운 것이다. 위의 작품에서 화자가 “촛불 집회”를 “연가”의 대상으로 부른 것은 의미가 크다. 그 어떤 계급도 “촛불”을 사랑하며 노래 부르는 민중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연가”는 감염성이 강해 또 다른 “연가”를 부르기에 한 개인은 개별화되어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개인을 넘어 전체와 연대하고, 자신의 이익과 함께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고, 고립된 세계 인식을 극복하고 공동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도로 전문화된 자본주의 계급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던 민중들은 주체성을 회복하고 모순된 상황에 맞서게 된다. 따라서 위의 작품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추구로 볼 수 있다. 개인의 상황과 전체의 상황 관계를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통해 미래의 상황을 전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가능성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학은 현재의 사회적 삶의 형태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열려 있는 ‘가능한 미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회학적인 상상력의 추구는 단순히 사태가 어찌 되었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사태가 어찌 될 수 있는가까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거나 감상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화자가 청계천에 세워진 전태일 열사의 흉상 앞에서 “그대의 거룩한 불도장 내 손바닥에 아로새”기며 “딱 한 번뿐일지라도 거룩한 불꽃으로 살고 싶다”(「딱성냥」)고 다짐한 것이 그 모습이다. 전태일 열사가 1970년 11월 13일 열악한 노동 조건에 항거해 분신한 것을 계기로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듯이 불평등한 계급에 억압당하던 노동자들이 깨어난 역사를 화자는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저것은 이 세상에서/가장 높고/가장 낮고/(중략)/가장 절망적이고/가장 희망적이”(「철탑 1- 2013년 8월 현대차희망버스 현장에서」)라고 고공 농성장인 철탑을 노래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2012년 10월 17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조합원이 현대차 불법 파견 인정 등을 요구하며 현대자동차 공장 인근의 고압 송전탑에 올라가 장기간 농성에 돌입하자 전국에서 현대차희망버스를 조직해 울산으로 응원하러 온 역사를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제주 4·3평화공원의 “돌에 새겨진/두 아이의 이름//4세 김관주, 2세 김관주”(「유채꽃 멀미」)를 숙연하게 부르는 것도 그러하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항쟁의 과정에서 희생된 민중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사이다 같은 여름휴가를 얻어/광주 5․18묘지”(「화려한 휴가」)를 찾아간 것도 마찬가지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지역 시민들이 요구한 민주화 운동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 등 476명의 승객을 태운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전복되어 침몰한 세월호 참사를 다룬 작품들이 새롭게 읽힌다. “세월호 같은 슬픈 이별을 다시는 없게 해달라는,/아이들의 바람을 아직 알아듣질 못하지”(「꽃편지 1」), “해마다 4월이면 나는 창가 벚꽃으로 내려와/야외 교실을 차리는 저 아이들 때문에/안절부절못한다”(「꽃편지 2」), “그대 아닌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나를/그대 절대 용서 마라”(「그대 나를 용서 마라」), “파도여 부디 이 엄마의 눈물을 전하여 다오”(「아침밥상-고 황지현 양의 명복을 빌며」)라고 역사적 사건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시단에는 시가 사회학적 상상력을 추구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시는 사회학적 상상력과 상관없는 것이라거나, 시가 사회학적 상상력을 추구하면 예술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이 상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의 작품이 실존 상황이나 역사 상황을 담아내지 못했을 때 그 한계가 더욱 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생명력이 강한 작품일수록 사회학적 상상력이 크다는 것은 진리에 가깝다. 사회학적 상상력을 추구하는 시인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깊게 인식함으로써 보다 주체적이고 역사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孟文在 |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