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전서 8장
광주강의 8-3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든 잡수세요.” 하는 뜻입니다. 가려서 먹지 말고, 종교 자체를 무시한 채 자유롭게 먹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습니다. 그 종교적 풍습에 따라 어떤 음식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세요. 절에 가서도 산채 비빔밥 주면 감사하게 먹으세요.
이것은 복음 외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완전히 무시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8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는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한테는 더 이상 종교라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게 된 이유는 기준의 관습, 전통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사람한테는 굉장히 무서워요. 왜 무서운가 하면 관습, 전통이 사람을 먹여 살립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 됩니다. 관습이나 전통을 버리게 되면 그 사회에서 추방됩니다. 그래서 전통이나 관습은 생존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만약, 어떤 회사에서 관행적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는데, 어떤 신입 사원(기독교 신자)이 와서 “과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그 회사에서 쫓겨나지요. “그게 틀린 줄 알지만 관행이야. 네가 관행을 무시해!”
검사들이 폭탄주를 마시는데, 어떤 검사가 “나는 안 마십니다.” 하고 거부한다면, 그 검사는 출세는 이제 끝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조직사회에서 왕따 당하고 외톨이로 지내야 합니다. 서로 필요한 정보가 소통되어야 하는데 그 사람에게는 차단되고, 이렇게 되면 그는 무능력자가 되고 결국은 퇴출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압력은 기존의 종교가 깔려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종교에 눌려있는 사람을 주께서 교회란 이름으로 건지시기 때문에 교회는 기존 종교로부터 이미 탈피했다는 어떤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무엇이든 감사함으로 먹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음식으로부터 자유함, 이것이 기존 종교로부터 벗어난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술은 어떻게 됩니까?’
성경 전체를 봐서 술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케 합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술 마시는 사람의 개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데 술은 인위적으로 정신을 혼미케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조건을 걸지요. ‘정신을 혼미케 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시면 어떻습니까?’
잠언에 보면 아예 술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경에 보면, 술을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술을 드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취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러면 맥주는 되고, 소주는 안 되는가? 몇 병까지 마시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 체질에 따라 조금만 마셔도 취하는 사람이 있고, 많이 마셔도 안 취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충만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술을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은 쾌락을 좋아한다는 말씀이 있어요. 관심사가 술을 좋아하고 그것을 즐기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해석합니다.
모든 음식은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다는 말에서 ‘감사함으로’가 무슨 뜻인가 하면, 음식 자체에 탐닉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없는데 주시면 감사하지요. 그런데 있는데 주시면 감사가 적어지고, ‘또 먹어야 되나’ 이렇게 나오지요.
요즘 얘들 밥 먹일 때, 어른들이 따라다니며 먹입니다. 아이들은 과자봉지 들고 있고, 엄마는 숟가락 들고 따라다니면서 밥 먹이려고 합니다. 이런 아이가 밥을 감사함으로 먹겠습니까?
‘감사함으로’라는 말은, 고마운 마음으로 먹는 것인데, ‘나는 먹을 자격도 없고, 원래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는데 주께서 이렇게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라는 심정으로 먹는 것이지, 음식을 탐닉하거나 미식가가 되어서 가려 먹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결론은 ‘하나님은 한 분 뿐이니까 더 이상 걱정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해서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아도 ‘너는 이미 구원 받았어. 그러니까 이제는 세상 일에 대해 좀 가볍게 생각해! 종교, 음식문제 이런 것에 대해 좀 탈피해!’ 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은 분식, 김밥, 만두, 자장면, 짬뽕, 탕수육 이런 것입니다. ‘미세한 맛’ 보다도 그냥 한 끼 때우면 그것으로 족해요. 그러면 되지 무엇 때문에 음식에 탐닉합니까?
8장 10-12절부터 봅시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 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어떤 음식이든 마음대로 먹는데 ?중에 약한 양심을 가진 이가 있어요. 이번 수련회 주제가 ‘양심’인데, 성경에 보면, “약한 양심”이라고 되어 있어요. 로마서에 보면, “약한 믿음”으로 되어 있어요.
약한 믿음이란 세상 풍습에서 아직도 탈피하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약한 양???의하면 의로움과 죄를 스스로 판정하고 있어요. ‘내가 절에서 나온 음식을 먹을 수 있나?’ 하면서 거절하지요. 저는 지금도 절에서 나온 음식은 먹기 싫어요. 그리고 통일교에서 나오는 ‘맥콜’이런 것을 의도적으로 사는 것은 싫어요. 그러나 예수님이나 바울 같으면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사람은 누구든지 습관이 있어서 찜찜할 때는 안 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 사람을 다루셔야 하는데, 주위에서 너무 자유의 범람을 인하여 그 사람들이 상처받게 되면 그것은 주님께서 다루는 방식과 다른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너는 고기도 못 먹는데 나는 먹는다. 너는 절에서 주는 음식 못 먹지만 나는 맛있게 먹는다.”고 하면서 상대를 조롱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상대를 구원하는 좋은 방식은 아니고, 주께서 연약한 자를 다르시는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만약 주께서 약한 양심에 있는 사람을 다루실 때는 사업을 망하게 한다든지, 자식이 병들게 한다든지 이런 방식을 쓰지 음식으로 약 올리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술 먹는 사람 술 끊으라 한다고 예수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술 마시는 사람에게 술 끊으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 자유를 근거로 한 인간적인 방식입니다. 술 먹는 사람 술 끊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방식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우리가 금방지게 그 사람 앞에서 우리의 자유를 자랑한다고 해서 좋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형제를 네 마음대로 혼란케 하지 말라. 이들은 주님이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9장에도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9장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교인들이 사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교인들이 사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교인들 생각하는 것 하고, 교인이 사도를 생각하는 것하고 핀트가 안 맞는다는 이야기를 9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사도를 생각할 때는 ‘목자 상, 사도 상’이 딱 구축되어 있어요. 이분은 권위자이기 때문에 세속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우리가 지급하는 생활비로 살아야 하고, 반드시 결혼도 해야 되고, 등등 기존 인간들의 생각에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를 총 동원해서 사도는 이러 이러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사도는 그렇지 않아요. ‘나도 그런 권한이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것이 진짜 사도의 자유의 진 면목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교인들에게 자유가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고, 교인들은 사도의 형식에 바울이 좀 맞춰달라고 요구합니다. “너무 자유롭게 행동하지 말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도 요건에 좀 맞춰주세요.” 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굳이 교인들이 요구하는 ‘사도 상’으로 자신이 따라주지 않고, 사도의 자유로운 모습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것은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복음이 뭐냐?
16절을 봅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이것이 바로 복음 전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교인들이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왜 모르는가 하면, 교인들은 교회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중심입니다. 사도는 주님과 한 통속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교회를 어떻게 잘 운영해 볼까 하는 생각에 치중하고 있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사도와는 전혀 다른 예상 밖의 사도가 등장하니까 우리 교회에 맞는 사도가 되어 달라고 역으로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사도는, ‘얘들아, 그것이 아니야! 그것은 주님이 원하는 교회가 아니야!’ 하고 나오지요.
교인들은 교회만 생각했지 복음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제가 [지옥의 하나님]을 쓴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 책에 보면, 교회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요. 있어도 없어져야 해요. 없다가도 있게 되고, 있다가도 없어지고. 교회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은 교회를 붙들지 말고 복음을 붙들란 말입니다. 복음을 붙드는 것이 바로 생명의 교회입니다.
교회가 요구하는 그런 사도가 되면, 이것은 교회가 최우선적이고, 교회가 최종적이 되어요. 복음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목사를 구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복음만 쳐다보고 그냥 사는 사람’ 그리니까, 교회가 어떤 사람을 요구하는가에 전혀 신경 안 쓰고, ‘복음을 안 전하면 제가 화를 당합니다.’ 라는 사람을 초빙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목사가 있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6장으로 돌아가서 “내 몸은 내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있어야 밥 먹고 살기 때문에, 그리고 목사인 나의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에.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이 다루시는 그런 식으로 믿는 목사도 있지만, 그 목사는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기 때문에 그렇지, 본 모습은 항상 내가 목사로서 처신 잘해서 살겠다는 그런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를 왜 만듭니까? 안 만들면 되지. 안 만드는데 복음 때문에 모이게 되면 교회예요. [지옥의 하나님]을 제대로 읽어보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의 이 이야기가가 꼭 나와야 될 이유가 그 당시 교회가 사도의 진정한 자유의 복음을 모르고, 교회되기 위한 교회로 나갔기 때문에 사도가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당신들이 복음 전한다고 인정해서 내가 복음 전하고, 당신들이 복음 안 전한다고 해서 내가 멈추고,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나는 사도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매인 사람이다.’는 것이지요.
‘복음 안 전하면 여러분들이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께서 내게 화를 내시고, 따라서 나는 아내를 둘 권리도 있고, 봉급을 받을 권리도 있지만 봉급 안 받겠습니다. 그리고 아내도 없습니다. 왜? 나는 복음이 위주지 여러분들이 원하는 목사의 틀에 맞추는 그런 목사가 아닙니다.’ 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이것을 두 자로 ‘자유’라고 합니다.
이런 목사를 못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주께서 만나게 해 주십니다. 모든 교회는 주님이 알아서 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어느 날부터 복음도 싫고, 성경도 싫고, 복음 전하는 것도 싫고, 이런 생각이 들면 자진해서 그 교회를 사직할 수 있는 목사. 이런 목사를 뽑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복음 잘 전하는가?’로 뽑지 마시고, 복음 전하기 싫거든 금방이라도 사직서 쓸 수 있는 목사를 뽑으시면 100% 정답입니다.
이런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나 안 전할 때나 누구에게 매인 사람인가 하면 주님께 매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 매여 있기에 복음 전하기 싫으면 안 전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만 전하도록 하시면 그만 두어야지요. 주님께 매여 있기에 복음을 전하기 싫으면 안 전하면 되지만 목사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아! 다른 사람이 준비되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10년을 전했다. 20년을 목회했다. 이런 것이 소용없습니다. 그 다음 주일 설교하기 싫고, 그래서 설교 준비도 대충하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만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9장 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뭐가 상이라고요?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 다 전하는 것이 상입니다. 보통 받는 것이 상이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던져주고 전하는 것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았기에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26-2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두려워한다고 해서 지옥 간다는 뜻이 아니고, 그 정도로 ‘나는 복음 때문에 살지 당신들 때문에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에게 말합니까? 지금 교인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복음 외에 다른 소리 하거든 제발 날 쫓아내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살도록. 여러분이 날 쫓아냄으로 내가 살게.
사도 바울은 ‘내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이런 말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 하겠습니까?
바라기는, 여러분들도 이정도로 주님께 매인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광주 강의 9-1(2005. 9. 23) 이근호 목사
첫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라는 성경이 나오게 된 것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 책(편지)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대할 때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이 본문을 우리가 함부로 해석할 수 없고, 막 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이 먼저 있었고, 그 뒤에 이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기 때문에(하나님의 계시가 나왔기 때문에) 고린도전서를 이해하려면 십자가 사건을 거쳐서 본문을 이해해야 됩니다.
만약 십자가 사건을 거치지 않고 고린도전서에 다가서게 되면 결국 그 말씀을 행함으로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성경을 율법적으로 보는 윤리, 도덕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행동 강령에 해당되는 책이 되고 맙니다.
지금 대다수의 한국 교회가 십자가가 빠진 상태에서 고린도전서를 접근하는데 이렇게 되면 결국은 교회 내에서 누가 이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많이 실천해 왔는가 하는 경쟁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교회 갈 때, 그 교회가 자기를 사랑해 주고 아껴주고 관심 가져주고 하면 사람은 그 집단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어디 가서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대우를 받고 가치를 인정받을 때 사는 보람을 느끼며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아라는 주체는 더욱더 포기를 못하고 강화되고 자아가 자기 생각의 전부를 점령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아가 강력해지고 크게 느껴지고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십자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본인이 가졌던 그러한 자의식 이었습니다. 그러했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남으로 말미암아 “내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였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고린도전서도 없었고, 후서도 없었고, 로마서도 없었습니다. 그냥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믿음으로 은혜롭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 자체가 바로 자기 속에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엄청난 죄가 자기 주체를 통해서 발산된다는 사실을 예수님 만난 후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한 후에 나온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린도전서를 보기 전에 십자가 사건을 경유해서 본문을 봐야 바른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십자가 사건은,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우리?대신해서 하나님께 저주 받음으로써 우리 죄를 남김없이 다 처리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란 우리 죄를 전부다 가져가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다 처리함을 받아서 정죄함이 없이 이제는 죄 없고 의롭게 되었다고 인정받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제가 좀 전에 이야기했듯이 고린도전서는 이 십자가 사건의 바탕 위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자체가 십자가 사건을 대변해 주고 있는 글인데 이렇게 고린도전서를 보게 되면 이 안에서 뭐가 나올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죄가 나오겠지요.
십자가 사건이 있고 난 후에 고린도전서가 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우리 죄를 전부다 몽땅 가져가서 처리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의 어떠한 죄를 가져갔는지를 모르지요. 모르는데 고린도전서를 비롯한 십자가 사건 이후에 나온 성경을 통해서 “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 이러한 죄를 다 가져가셨구나.” 하는 것을 밝혀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볼 때는 이러한 죄까지 있었구나 하는 것을 더욱더 많이 알게, 넓게 알게 되어 감사하다는 취지로 이 성경을 봐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잘남이라든지, 자신의 주체가 강화된다든지 하는 생각은 싹 가시고 이러한 죄까지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처리하셨구나 하는 주님에 대한 감사가 매 구절구절 읽을 때마다 나오게 되겠지요.
주님께서 하신 모든 공로에 대해서 오직 그분께만 영광 돌리고, 찬양하는 그러한 참다운 성도의 모습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이야기했고, 그것이 고린도전서, 로마서 전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죄인인가,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십자가 사건의 내막이 이런 성경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고린도전서 8, 9, 10장을 공부할 텐데, 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 사건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할 것은,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은 사건입니다. 이것은 성경 곳곳에 나오는데 두 군데만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27:46절에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구절과 로마서 8: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데(버리시는데), 내어 주실 때에 그냥 예수님만 오신 것이 아니고 은사라는 것이 동반해서 아드님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은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버림받았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지요.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일 이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이런 은사를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그 은사 속에 우리가 함께 놓여있기 때문에 그 은사를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버림받음 속에 계속 놓여 있어서 평생을 두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그러한 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죄,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계속 거두당하는 신세가 되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만이 하나님께 은사를 받아 구원 받은 자가 된다는 이러한 놀라운 방정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엘리베이터를 하나 그린다면 이 엘리베이터는 위에서 아래로 계속 떨어집니다. 이렇게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떨어지게 하는 힘(이 엘리베이터 안에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은 위에서 밀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엘리베이터 제일 밑바닥에서 나옵니다.
이 엘리베이터 제일 밑바닥에는 뭐가 있느냐 하는 그 문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이 어디까지 버림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빌립보서 2장에 나옵니다. 6-8절 말씀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는데 어디까지 낮추느냐 하면,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종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더불어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고 계속 추락을 하고 있는 성도가 어디 까지 떨어져야 되는가 하면, 십자가가 무엇이냐 하는데 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떨어져야 합니다.
그 떨어져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고, 그 죄에 대해서 우리가 아직도 몰라요. 그런데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보게 되면 ‘아, 이런 이런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에 대한 거부가 우리에게서 계속 나오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러한 죄로 인하여 정말 주님의 마지막까지 낮추었던 십자가 까지 하나님의 저주를 실감하게 마련입니다.
사람 속에 십자가 사건이 유발하게 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용서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용서가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 배격하는 그런 욕구 같은 것이 우리 속에서 계속 나옵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 다릅니다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말씀에 대해서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유발했습니다.
이러한 죄성은 마하슬루 라는 심리학자에 의하면 사람의 욕망을 10단계로 나누었어요. 제일 낮은 단계가 뭐냐 하면, ‘생존유지의 욕구’라고 해서 이것은 그의 짐승과 같은 수준인데, 배고프면 먹고 싶어 하고, 잠이 오면 잠자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말릴 수 없다는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인데, 자신의 욕구를 자기의 정신이나 이성으로 저지할 수가 없어요. 이처럼 인간은 자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욕망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마하슬루의 욕구 중 제일 끝의 욕구가 뭐냐 하면, ‘자아실현의 욕구’인데,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말 榴酉?하면, 신처럼 자아가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것인데,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자아가 누구인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정도 실현되어야 자아가 실현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아실현의 욕구’라는 것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지 못해요.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주님과 함께 타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그 십자가 죽음까지 우리가 가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어느 정도의 죄가 우리에게서 계속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도대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죄의 전부가 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도무지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죄를 계속 안다는 것은, 그런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버림받게 하신 그 은사가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 작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과거에는 우리가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점점 더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서 터져 나오는 죄를 볼 때에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도 안 되고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릴 때는 모르는데, 20대 30대 가면 갈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만 철저히 챙기는 이기적인 인간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 고린도전서를 대하면서 이런 말씀을 우리 내부에서 계속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게 되지요.
방금 제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십자가까지 계속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죄 때문에 버림받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 말고 또 한 가지 요소는 ‘구원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계속 버림 받게 되면 그러면 그것으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계속 주님과 함께 버림받는 가운데 엘리베이터 안에 지금 우리가 버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있는가 하면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양이 되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과 함께 엮어진 그 관계 자체가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세상 교회에서는 구원을 시간관계를 생각해서 ‘몇 년 전에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 그러면 앞으로 내가 50년 더 산다면 그 사이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행동에 나서야 그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데--
제가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의 행위는 욕망에서 나왔고 그 욕망에서 나온 행위는 어떤 것을 해도 다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관해서는 행위로 구원 받는 행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이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은 십자가 안에서 당겨지는 그 은사에 의해서 자신의 행위는 성경 말씀으로 비춰 볼 때 전부 죄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모든 행위는 죄가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행위가 아니고, 그런 행동을 하는 내 곁에 목자 되신 주님이 함께 있다는 이 자체가 믿어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믿어지게 되면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버림받는 가운데서도 그 상태는 구원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 행함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죄뿐이고, 그렇게 말씀으로 죄를 깨닫게 만드는 그 능력은 바로 십자가에서 당겨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 죄를 다 가져가서 대신 처리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은사로 주어진 이상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죄가 계속 발각되면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나를 위한 것밖에 되지 않는데, 그렇게 나를 위해 행동하는 그 옆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이 자체가 이것은 행함 관계가 아니고 놀라운 은사에 의한 믿음의 관계지요. 그러니까 이점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나올 것이 뭐냐, 감사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죄고, 이런 행동 하고 있는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는 것을 확증시켜 주는 것으로 삼으니까 더욱더 십자가의 피에 대해서 감사와 고마움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지요.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자기 욕망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가져간 죄를 깊이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 은혜에 대해서 고마움과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주님의 이름이 약속대로 벌이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일관된 약속 성취에 의해서 주어진 사랑인 것을 알고 우리 이름이나 노력, 공로조차 주님께 넘기게 되지요.
이것은 믿음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믿음이나 감사 같은 것은 결과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우리의 의도적인 행위와는 상관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행위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행위에 의해 나온 열매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인데 주님의 포도나무 때문에 생기는 그 열매. 이것은 우리 행함의 차원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엮여져 있다는, 얽혀 있다는, 연결되어 있다는 하나의 증거물로서 열매로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가 우리가 앞으로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면서 계속 나오기를 바랍니다.
------------------------------
--------------------------------------------
왜 독자적 노선이 성화론이냐 하면 만약 독자적으로 하지 않고 주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천국 간다면 이것은 인간 성화론이 아니고 누구의 성화론이냐 하면 함께 계신 성령님의 성화론입니다.
내가 만약 [비타 500] 뚜껑을 따는 이것이 힘든 것인데 했다면, 이 영광은 누가에게 돌아갑니까? “야, 그 어려운 것을 했으니까 하신 분이 누구지요? 아이쿠 목사님이 하셨습니까?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되면 내가 거룩하고 내가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나 성화론에서 내가 훌륭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훌륭하셔서 인도한다, 성경께서 [비타 500]의 뚜껑을 땄다고 한다면 그 영광은 성령께서 받잖아요. 그러면 누가 거룩한 분입니까? 성령님이 거룩하지요. 그러면 이것은 개인의 성화론이 아니고 성령님의 성화론이 되니까 성화론 자체가 있을 수 없지요. 이러나저러나 성화론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이 [복음의 회복]이란 책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가 성화론을 말하는 것은 내 잘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로 된 것을 말한다.”고 하거든요. 주의 은혜로 한 것이라면 하나님 성화론이지 인간 성화론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성화될 필요 없어요. 원래 거룩한 분이예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성화론을 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만약 본인이 스스로 자기 머리를 깎았으면 “참, 머리 예쁘게 잘 깎으셨네요.”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지만, 대신 누가 깎아 주었다면 머리 깎인 사람한테 “훌륭하게 머리 깎았네요.” 이런 소리 하면 안 되지요.
우리는 머리 깎이는 입장에 있고 모든 영광은 목자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교인)는 이런 꼴입니다.
교 인: 하나님 정말 훌륭하십니다.
하나님: 나는 원래부터 훌륭했어.
교 인: 하나님은 갈수록 더 훌륭하십니다.
하나님: 이놈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처음부터 완벽했어.
하나님이 어디 점진적으로 성화됩니까? 하나님이 부족하고 모자란 분이었는데 차츰 좋아져서 온전한 하나님이 되었습니까?
이러나저러나 성화론을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이들이 성화론을 고집하는 것은, “잘난 목사 나를 본받아서, 내 행위의 근처에라도 와야 천국을 꿈꿀 수 있다. 시킨 대로 해라.” 하고 자신에게 종속시키려고 하는 짓입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 유지를 위해 돈이 필요하고,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일군들이 필요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이것도 모르고 순진해서, “나는 언제 성화되어서 우리 훌륭한 목사님처럼 되어 복을 받을까?” 하면서 시키는 대로 따라 해요.
이렇게 간단한 논리도 모르잖아요.
구원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행함은 빠집니다. 꼭 행함을 거론하려면 목자의 행함, 예수님의 행함 때문에 구원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함이 어떤 행함이냐 하면 요한복음 6장 37-38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 다시 살리는 이것”(39절)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뭐가 나옵니까? 목자다운 행위가 나올 것 아닙니까? 그 행위가 나밖에 모르는 행위를 덮치는데 이 내 행위에 예수님의 행위가 덮쳐오는 이 관계를 구원관계라고 합니다. 이런 관계에 있을 때 구원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나를 품어서, 이것을 “예수 안”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될 때 이것이 구원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인간 행위에서 구원을 찾으려면 그것은 반칙입니다.
구원 문제를 거론하려거든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겠습니까?” 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이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행하셨는데 그것을 내가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이렇게 되면 또 다시 인간의 행함이 들어오게 됩니다. 내 밖에서는 예수님이 행하고, 내 안에는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렇게 되면 내가 받아들이는 행위가 첨가되어야 구원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구원론이 인식론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이 인식론은 10분 쉬었다가 계속 해 봅시다.
광주강의 9-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식론에 대해서 철학하는 사람은 알지만 일반인들은 잘 몰라요.
인식론이란 ‘외부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지 간에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아무리 진리라고 해도 내 쪽에서 진리가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진리고, 만물의 척도는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경계를 넘어서까지 진리가 되려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이게 꼭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만약 여기서 10명이 모였다면 하나님께서 10명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낼 때 진짜 하나님이라면 10명 모두 동일한 하나님관이 나와야 되고, 하나님 상이 나와야 될 텐데 각 사람에게 물어보면 다 달라요.
그렇다면 한 사람당 한 하나님(각자 다른 하나님)이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교회 유지나 교회 대표자가 믿는 하나님을 덩달아 같이 믿다가 그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면 본래 자기의 하나님으로 돌아서는 이런 식이 됩니다. 塑?인간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분명히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고쳐놓고,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생각은 접어 두시고 진짜 하나님을 그대로 받아들여야합니다.’ 할 수 있는 어떤 장치, 인식하는 인식론적 장치를 따로 마련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주장들을 하게 됩니다.
이런 주장들을 하게 된 것은 교회 단합에 대해서, 교회가 하나 되기를 위하여 힘쓰는 사람에게 이런 욕구, 불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이런 것은 말짱 소용없는 짓입니다. 인식론은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은 다 다르지 않아요. 똑같아요. 어떤 점에서 똑같은가 하면 자기 밖에 모른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전부다 아담의 속성을 입어서 자기 밖에 모르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십자가라는 것의 두 가지 내용을 생각했지요.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다 들어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키는 인간들은 어떤 의도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느냐 하면, 인간들이 갖고 있던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뭔지는 제가 지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하여튼 간에 인간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뭔가 공통점이 있어요. 그 공통점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살해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그대로 로마서 8장의 은사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말은,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그 무엇이든 인간의 어떤 요소가 예수님을 “너는 필요 없어. 너는 죽어야 마땅해” 라고 몰아냈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이 십자가에서 발각이 되겠지요.
이렇게 되면 인식론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내가 어떤 장치를 하면 주님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라는 말을 할 필요 없이, 어떤 인간도 계속 하나님을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말도 수상해요.
인간 속에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배척”입니다. 주님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배척하는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어떤 식으로 배척했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을 배척했지요. 예수님 오신 후에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밀치고 배척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로마서 7장에 잘 나와 있는데, 어떤 내용인가 하면, 주께서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예, 탐내지 않겠습니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고, ‘탐 좀 내면 어떤데, 탐내는 게 뭐가 나쁜데?’ 이렇게 나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면, ‘부모 공경하면 좋지만 바쁜데 어떻게 공경해?’ 이렇게 반발을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명령하시면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그 재미, 거부하는 재미. 몰래 먹는 사과가 맛이 있다고 잠언에 나오지요. 사과 그냥 먹으면 그렇게 맛있는 것은 아닌데 숨겨놓고 몰래 먹으면 맛이 있어요.
자꾸 뭔가 내부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 배격하고 싶은 요소가 말씀이 와 닿는 순간 그때그때 마다 생기는 거예요. 평소에는 점잖게 있다가 뭔가를 하지 말라고 하면 재미삼아 그 명령을 어기고 위반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 있는 줄 아시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그 말씀에 대해서 싫어하고 배척한다는 것이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설교를 들어야 하고 강의를 들어야 하는가 하면, 말씀을 안 들으면 자신이 점잖은 사람이 되요.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교회를 안 나오시면 됩니다. 제가 오랜만에 좋은 말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는 순간부터 자신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 욕망만 추구하고 살고 있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지요. 평소에는 이런 마음을 감추지요.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경원했는가를 말씀이 와 부닥치는 순간 알게 됩니다.
새댁과 화장실은 멀리 있는 것이 좋다고 하지요.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세요. 예수님도 멀리 있을수록 좋은 분. 이렇게 예수님을 멀리 두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우리 마음자리에 예수님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봅시다. 이렇게 되어야 이해가 됩니다.
8장 1절에 “우상의 재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사도바울 당신이 뭔데 나를 간섭하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너나 잘해’ 이런 식의 마음이 발생하지요.
2절에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했으면,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이렇게 나오고.
3절에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고 하면, ‘이건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네’ 이렇게 나오지요.
4절에 “그러므로 우상의 재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뭐냐 하면, 우상이 없잖아요. 우상은 예초부터 없었고 신은 오직 하나님뿐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이 성립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상은 없지요? 그렇다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법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것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땅에 있는 사람들과 섞일 때, 어떻게 섞였느냐 하면 이런 식은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그게 없는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해. 하늘나라 말씀처럼 살아.’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인식과 그들의 문화를 그대로 다 가져옵니다. 다 가져와서 전부?파 헤쳐 호작질(손장난)을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사람들이 나누지 못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아내가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지라고 하지요. 어떤 사람이 제게 메일을 보내서 묻기를 심히 걱정스러운 투로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나누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어요. 그 사람의 심정은 이해가 가요. 그런데 이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를 못했어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들이 이혼하면 갈라집니까? 힘센 강호동이 이 둘을 붙여 놓았는데 힘 약한 내가 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은 묻기를 ‘이혼하면 떨어지잖아요.’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이혼해서 떨어진다면 하나님이 참 어설프게 붙여놓으신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붙여 놓으신 것을 떼어 내지 못한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과 너희들이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는 논리와 구조에 그대로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서 ‘이러이러하니까 너희들은 엉터리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들면, “맹세한 것은 지키라”는 말씀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맹세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그런데 지킬 수 있나요? 사실 인간은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이 말씀은 맹세해놓고 못 지킨다고 두려워 떨 것이 아니라, 인간은 맹세해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도했다고 무엇이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TV가 고장이 나서 잘 안 나온다고 칩시다. 그런데 기도를 하고 다시 켜보니까 나왔어요. 그래서 기도 응답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오게 하셔서 나온 것뿐입니다. 내가 기도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과거의 모든 일을 이끌어주셔서 지금에 이른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현재는 감사하지 않고 “주님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많이 주시옵소서.” 이렇게 자꾸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기도하니까 마귀가 좋아해서 계속 더 많은 것들을 기도하게 하고 그런 것들에 빠져들도록 유혹합니다.
따라서 우상은 분명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현재 인간들이 매일같이 자기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징크스’라고 합니다. 혹은 ‘터부’라고 합니다. ‘나는 손톱 깎으니까 그날 일이 잘 안 되더라. 아침 첫 손님으로 여자가 오니까 그날 장사가 잘 안 되더라.’ 이렇게 스스로 자신이 법을 만들고 그러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한 분으로 다 주신 것인데 그 한 분을 누가 배격합니까? 우리가 배격하고, 내가 원하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신을 대신 만들고 그 신에게 매달리며 기도해서 스스로 위안과 평안을 느낍니다.
이렇게 자신이 의지하고 싶은 것은 만들고 그것에 기대를 거는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은 없는데 우리가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예들아 없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는 그래도 만들고 싶습니다.” 이렇게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8장 이해됩니까?
우상은 없는데 사람들은 우상의 재물을 안 먹으면 내 신앙이 더 수준 높은 것으로 생각해요.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우상은 없기에 우상 재물을 자유롭게 먹으면서 자기 신앙을 자랑하고. 이렇게 되니까 우상 재물을 먹는 것을 보면서 연약한 자가 낙심을 하게 만들고.
하나님은 아예 우상은 없다고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없는 우상을 누가 만들어 내는가를 지적합니다. 이렇게 없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 내부의 죄성이 아직도 자기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내는 있으나 마나, 돈도 있으나 마나, 우리 목숨도 있으나 마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해봐야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들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우리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들려도 우리는 듣지 않지요.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함?있어서 우리를 십자가까지 인도하시는 그분께서 가끔은 내 계획, 내 야망이 의미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고 하여금 행복하게 만듭니다. ‘주신 것도 다 감사하지 못하면서 뭘 더 달라고 요구하는가.’ 이런 행위 자체가 오히려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얘가 우는데 감사의 마음이 있던가요? 오늘 대구에서 광주행 버스를 타고 오는데 뒤에 앉은 얘가 얼마나 울고 난리를 치는지 엄마가 미안해서 쩔쩔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얘를 보면서 감사의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안 나지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키운 아이는 남들에게 사랑받고 훌륭하다는 소리 들어야 하고, 이런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나는 훌륭한 엄마인데, 그 모든 것이 다 깨지니까 어떻게 감사의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인간은 자기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기도를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결국 우상숭배에 해당됩니다. 울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 울음을 그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 차가 목적지까지 가는데 4시간 걸렸는데 4시간 밖에 울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지요. 만약 그 차가 7시간 간다면 7시간 울었을지 누가 압니까? 그러니까 7시간 울지 않고 4시간만 운 것에 대해 감사해야지요.
얘가 울고 난리를 치는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가 나온다면 그것은 주님의 기적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혹시 그런 이상한 일이 발생하거든 주님의 기적인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짜증날 인인데 감사의 마음이 생기거든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8장 6-7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그러니까 교회 가운데 우상 섬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자가 있거든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 감사하란 말입니다. 그것을 나무라지 말고.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모든 것을 그분이 하시니까 이런 일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하게 했으니까 그것마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즉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까지도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9장을 봅시다.
4-5절에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권”이 뭡니까? 권리를 말하는데, 사도들에게도 형제들로부터 대접받고, 아내의 도움을 받고 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도와 비교했을 때 바울은 뭔가 다른 것이 있어요. 아내가 없어요. 그런데 이 아내를 갖는 것을 권리로 말하고 있는데, 다른 대접받는 권리와 같이 한 가지의 권리로 보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아내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물건 취급하듯 느껴질 수가 있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는, 우리가 이것을 나쁘다, 좋다 하기 전에 이 현재의 풍습과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들어와서 그것을 헤집고 다 부숴버립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
그러니까 고고한 문화가지고 비천한 문화를 나무라는 식이 아니고, 낮고 천한 것과 같이 합세를 해요. 사실 여자를 갖는 것이 무슨 권리입니까? 반대로 여자가 남자 가질 권리는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21세기 현재 우리들의 인식이고, 그 당시에는 여자는 남자가 불러주기만을 바라는 그러한 문화였습니다. 이런 문화를 나쁘다고 하지 않고, 그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바탕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에 수건을 써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21세기에는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이런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성경을 해석하면 어떤 것은 해석이 되는데 어떤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남지요.
성경을 보면서 그 당시의 상황에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은 오해를 했어요. 즉 하나님이 주신 문화가 따로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따라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를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1세기 문화이든 21세기 문화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문화를 인정한 것이 아니고 그 문화를 사용해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문화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가를. 9장 1절에 보면,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라고 했지요.
이 말씀은 어떤 특정 시대, 특정 문화에서 벗어난 자유가 아니고 앞으로 닥쳐올 어떤 문화에 대해서도 성도는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아내를 가질 때, 옵션이 마감이 되지요. “야, 사도답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도이기에 아내를 주셨구나. 하나님은 역시 사도정도의 사람은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었어.’ 라는 인식을 나쁘다고 보지 마시고, ‘사도가 아내 가지는 것이 정당해. 하지만 나의 자유는 얼마나 놀랍기에 정당한 권리마저 나는 초월했다.’ 이것이 자유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강대상에서 설교를 할 때는 양복을 입어야 해.’ 라고 말할 때, “틀렸어”라고 말하면 안 돼요. 교인 중 자신들은 어떤 복장을 해도 상관없는데 설교하는 목사는 양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억지로 자기 자유를 내세워 자유로운 복장을 고집하지 말고 연약한 자를 위해 더워도 양복을 입어야 합니다.
제가 옛날 박사교회 있을 때, 에어컨도 없이 여름에 설교를 하는데 성도들은 반팔 옷도 입고 가벼운 여름 복장을 하고 앉아 있었지만 저는 양복입고 땀을 흘리며 설교를 했습니다. 그럴 때, ‘왜 더운데 양복을 입고 설교해. 더우면 반팔 셔츠를 입으면 되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틀렸다는 말입니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수건 쓸 필요 없다. 이런 생각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에 쓴 사람에게 시험거리가 된단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유란 것은, 그냥 인정해 줍니다. 당신들이 어떤 문화를 가졌던 내가 인정한다. 아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만 나는 아내 없다. 너희들 보기에는 사도로서의 결격사유로 보이겠지만 내가 억지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결혼할 기회도 없었고, 특별히 같이 살고 싶은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냥 지내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또 사도바울은 생활비를 안 받았어요. 9장 7절에 보면,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9절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목사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은 목사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기 위해 목사를 먹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상당히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고, 상당히 기분 좋은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수혜자가 누구며, 피해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리 들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기분 좋으냐 나쁘냐를 초월하자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를 ‘자유’로 봐 달라는 것입니다. 아이쿠, 아까?내 돈 나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왕 쓸 돈 복음 전하는 자를 위해 쓰자. 나를 위해 돈 쓰는 것이 정당합니다. 자녀를 위해 쓰고, 가족을 위해 쓰고. 그러나 복음을 위해 쓰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자유라는 마음이 안 드느냐는 말입니다.
마치 내가 자?緞?자비량해서 복음 전하듯이, 너희들도 너희의 돈을 복음을 위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있지 아니한가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결국 정기적인 어떤 법이나 규칙에 얽매이는 것은 성도로써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얽매이지 아니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것도 아닙니다.
15절에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지상의 자유는 법의 구속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음을 말하지만, 사도가 말하는 자유는 너무나도 철두철미하게 얽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목숨마저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얽매여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지어다.
복음 전해야할 사명이 나에게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누가 생활비를 주니 안 주니 핑계되지 말고 자비량으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복음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복음 외의 다른 것들에는 너무나 자유롭지요. 너무 철저히 복음 위주이기 때문에 너무나 자유로운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무엇이 현실인지 몰라요. 무엇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현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 십자가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십자가?2순위 아니 3순위도 안 돼요. 그래놓고 자기가 만든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봅니다. 내가 진급해서 뭐가 되고, 내 아들이 공부해서 명문대 입학하고 이런 것들을 현실로 생각합니다.
진짜 현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 십자가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에 관심을 두는 자는 지옥 간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현실로 보는 사도바울이 미쳤다고 세상 법에 얽매입니까? 이런 너무도 선명한 현실이 있는데 엉뚱한 세상 규칙이나 관습 이런 것에 얽매여 복음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이것은 남이 알아준다고 전하고, 남이 싫어한다고 안 전하고 할 그런 문제가 아니지요. 목숨이 날아간다 할지라도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강력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현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이것은 바로 현실의 싸움입니다. 무엇이 현실인가? 하는.
그리고 이런 소명을 받은 자는 날마다 주님의 지시가 내려집니다. 그 지시 내용은 [주기도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라고 우기며 나오는 것은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가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뇌물을 주고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이번 거래를 성사시키라고 했다면, 혼자 기도하면서 이런 상상을 합니다. 나는 성도이기에 뇌물을 줄 수는 없어. 그래서 뇌물은 주지 않고 정당하게 찾아가서 설명을 하고 거래를 성사시켜야지. 하나님이 은총을 주셔서 이렇게 되면 상사도 나를 참 성도로 인정하고 다음부터는 뇌물 줘서 거래 성사시키라는 명령을 다시는 하지 않겠지.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 아니지요. 현실은 뇌물을 주기 싫은데 뇌물을 주고, 술도 같이 마시고 하면서 마음이 괴롭고 아프고, 그렇지만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해야 되고, 그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별로 거리끼는 마음도 없고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역시 나는 죄인이구 이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참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뇌물 줘서 거래 성사시키라는 직장 상사를 마귀라고 보지 마시고, 나를 인간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상황에서 감사가 나오고 찬양을 드릴 수가 있지요.
성경 해석 굉장히 쉽지요.
그동안 어려웠던 것은, 이 말씀 지켜서 내가 착한사람 되려고 하니까 성경 말씀이 어려운 거예요. 이처럼 내가 훌륭한 사람 되려는 생각에서 성경을 보면 어려운데, 이왕 버린 몸, 내 죄가 어느 정도인지 가볼 때까지 가보자. 나도 내가 어느 정도 악한 자인지 몰라.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면 참으로 말씀이 쉽게 깨달아 져요.
9장 19절 봅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이 대목은 정말 중요합니다. 교회가 이 구절을 몰라서 온갖 문제가 다 발생합니다.
제게 이런 말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목사님, 저 사람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서로 서로 다 저한테 고자질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사람보다 더 못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제일 정점에 이근호가 있고, 그 밑에 또 누가 있고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피라미드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제일 밑에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위에는 예수님이 계시지요. 사도바울의 생각은, 예수님께서 믿음을 주고 복음을 줬다면 심지어 복음을 안다는 나조차도 그 주신 복음과 믿음에 대해서 터치할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는 없고, 다만 어떤 사람은 5% 있고, 어떤 사람은 10% 있다면, 내가 5% 도와주면 그만이고, 10% 있다면 10% 도와주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 그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한 것이 누구입니까? 우상이 아닌 한 분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이 만약에 예수 잘 믿다가 화가 난다고 소주를 병체 마시고 교회 와서 행패를 부릴 때, 다른 사람이 “목사님, 보세요. 저 사람 복음도 없고 믿음도 모르니까 저런 행동하잖아요. 교회에서 쫓아냅시다.” 고 할 때, 목사는 “이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 분이 저런 행동을 보인 것은 우리 전부에게 뭔가 하나님께서 한 수 가르치시려고(너희들이 어떻게 나오는가 한 수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조용히 찾아가서 왜 술을 마시고 난리를 피웠는지 들어보고 그러면 됩니다.
이 분이 이런 일 후에 스스로 교회 안 나오면 어쩔 수 없고, 또 스스로 교회 찾아 나오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00교회 문제에 있어서 자칫하면 그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너는 신앙이 높고 대단히 많이 알고 우리는 그래 병신이다.’ 라고 오해를 할 소지가 있어요. 오해하는 것이야 본인의 자유니까 오해를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데, 다만 ‘그런 오해는 정당해’ 라고 나올 필요는 없어요.
내가 당신들에게 한 것은 오해를 하든 말든 나는 당신들을 돋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지 너는 못나고 나는 잘나고 그런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이게 바로 사도바울의 정신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정신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십자가에서 나왔습니다. 바울이 잘난 것이 없어요. 하지만 자신에게 은사가 주어졌는데 이것은 남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기꺼이 종이 될 수 있는 그 자유.
10분간만 쉽시다.
광주강의 9-3
9장 17-18절을 봅시다.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상이 무엇이냐?’고 물었기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술어부분에는 상은 이것이고, 이런 것이고 라는 말이 붙어 나옵니다. 그럼 뭐가 상입니까? ‘값없이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면 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복음 전하게 된 것 자체가 상이예요.
그러니까 복음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복음 전한다는 것은 이미 상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심정이 바?이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음 외에는 몰라요. 그에게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복음 모르면 지옥이고, 복음 알면 영생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후에 바울이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난 후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이런 바울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조롱했지요. 이런 평가에 대해 바울도 자신이 ‘미쳤다’고 긍정했습니다. ‘그래, 나는 복음에 미쳤다.’ 라고.
24-75절을 봅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 대목은 교회 다니는 사람마다 헌신예배 때 목사들이 와서 하도 엉터리로 설교를 해서 쇠뇌가 되어(잘못 해석한 것에 물이 들어서) 제가 지금 이 부분을 해석하기가 겁이나요. 다 바꿔야 합니다.
이 구절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유롭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자유가 뭐냐? 이것이 바로 ‘상’입니다. 마지막 때 면류관이 뭐냐 하면 이 ‘자유’인데, 만약 자유를 모른다면 하나님께 버려진 자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버림이 아니라 진짜 지옥 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유로우면 복음을 위해서 마음껏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여기에 얽매이고, 저기에 얽매이고 이렇게 되면 달음박질이 안 되잖아요. 달리기를 하는데 목표가 정해졌으면 그 방향을 향해 달려가면 그만인데, 옆에서 “고구마 먹고 가라, 밤 삶아 놓았는데 먹고 달려라, 목마른데 음료수 한 잔 마시고 가라” 이런 소리에 현혹되면 상 받을 수 없겠지요.
신앙인의 자유는 철저히 복음에 얽매인 것이기 때문에 복음 아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다른 것은 안 믿는다는 것을 전해한 믿음입니다. 아버지도 믿고 친구도 믿고 예수도 믿는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지요. ‘나는 아버지도 안 믿고 엄마도 안 믿고 세상도 안 믿고 오직 예수만 믿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내용물이 담겨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방금 이야기한 이 자유로움 자체도 결국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너는 너 자신 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제가 열심히 목이 쉬도록 강의를 했는데 나중에 “목사님, 그것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걱정하는 분이 계신데, 이런 분이 없도록 사전에 조치하면서 강의를 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주께서 십자가 질 때 우리 죄를 다 가져가셨는데 그 죄가 어떤 것인가 하면, 바로 이런 말씀 앞에서 느끼는 우리의 감정(못 지키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는 이런 것)이 죄가 되어 그것마저도 십자가에서 다 해결을 했습니다.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씻어주셨기에 사도바울이 누리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것도 우리가 누리고 싶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누리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주님은 이런 차원에서 우리에게 적용시키고, 우리는 이 말씀 반대편으로 도망가고. 우리는 매일 도망치고 주님은 따라오시고. 우리가 아무리 도망쳐도 주님은 끝까지 따라오십니다.
10장에 들어가 봅시다.
1-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다 같은”이란 말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집단 구원’인데, “다 같은 것”을 먹었지요. 그런데 이것을 놀랍게도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라는 것은 “너 세례 받았나?” “나 세례 안 받았다.”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세례는 몇 명이 세례 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세례 주시더냐 하는 점이 중요하거든요.
세례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같이 세례 받은 거예요. 왜냐하면 동일한 한 분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다 같이 받은 것입니다.
세례를 받게 되면 ‘다 같이’가 적용 되요. 그래서 여기에는 나와 타인이 비교나 경쟁할 필요조차 없는 그런 위치와 신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쓸데없이 옆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왜? 신령한 것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것을 다같이 동일하게(신령한 음료를) 마셨기 때문에 차이가 없고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분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다 같은 법칙이 적용되지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비로소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지요.
본문에서 광야 이야기가 나오는데,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세례를 받아놓고 모세에게 달라 들었어요. 이게 바로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까? 예수님께 세례를 받았지요. 예수님께 세례 받아놓고 누구한테 대듭니까? 노골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반항하지는 않지만, 환경이 왜 이렇습니까? 왜 저란 사람을 만나게 하셨습니까? 하면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주님을 원망하더란 말이지요. 이런 식의 태도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0절 봅시다.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여러분은 주님께 원망 안 했습니까? 매일같?원망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멸망당해야 하겠네요? 당연히 멸망당해야지요. 이처럼 ‘멸망당해야 마땅하다’고 느끼는 것은, 멸망당할 자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런데 멸망 안 당할 사람에게는 ‘내가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예수纛?그 공로를 깨닫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은 남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성경이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원망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라.’ 이렇게 입으로 천번 만번 외워보세요. 순간적으로 원망이 발생하는데.
야고보서에 보면 마귀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어떻게 된 셈인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인이 없어요. 시시하게 보는 겁니다. 가룟 유다보다 더 못한 신앙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죽느냐 사느냐가 심각한 문제였는데, 요즘 교인들은 예수님이 죽어도 별로 심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어디에서 떠느냐 하면 아이 성적 떨어지면 떱니다.
결국 이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면 ‘나는 처음부터 구원될 자격도 없는 자인데도 주께서 구원 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나는 구원 될 자격도 없네. 그러면 나는 구원과 상관없네. 내 마음대로 살다가 지옥 갈란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잠시 잠깐이라도 십자가 은혜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없이, ‘원망하면 멸망한다고. 그럼 교회 때려치우자. 교회 가니까 원망하지 말라고 하고, 아무리 원망 안 하려고 해도 원망은 나오고 나는 안 되겠다.’ 라고 하면서 떠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사도바울 같은 고백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9:27)
감사가 없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늘 감사하라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고, 순간순간 감사가 찾아옵니다.
12절에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실 앉아도 조심해야 됩니다. 선자만 조심하는 것이 아니고, 넘어진 자도 조심해야 합니다.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완전한 시험은 뭡니까? 아까처럼 원망하는 사람. 광야에서 원망했던 사람은 완전한 멸망이지만, 성도는 이런 줄 알면서도 가끔은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요. 목자가 양인 나에게 붙어서 날마다 잔소리하고 있다는 것을 현실감 있게 느끼게 하는 그 순간이 왔을 때 그것이 바로 원망하는 시험이게 이기고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강의를 하면 어떤 사람은 시험을 벗어날 길을 찾느라고 난리를 피웁니다. ‘주여, 벌써 3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시험에서 못 벗어났습니다. 내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이 사람은 시험에서 벗어나면 괜찮은 사람이 된다고 여겨요. 이렇게 되면 스스로 자신이 죄인 안 되려고 발버둥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주께서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면 죄인인줄 아세요. 목욕탕에 갔으면 탕에 몸을 푹 담가야지 뜨겁다고 발만 살짝 넣었다가 빼지 말고, 사람 죽으라고 뜨거운 물을 넣어 두었겠는가 하면서 좀 참고 몸을 담그면 그 가운데서 따뜻함을 느끼면서 시원함을 느낀단 말이지요.
시험에서 벗어나려면 죄인이 죄 없는 척 하면 안 돼요. ‘할 수 없다. 나는 이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하면서 푹 잠기면 주께서 이런 죄까지 사전에 미리 다 가져가신 십자가의 은총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행함의 차원이 아니고, 이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 주께서 벗어날 길을 주시는구나 하고 믿어라’는 것입니다. 이러나저러나 행함은 주님 앞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이 있는 이상은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고 가치 없는 것이기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14절에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우상은 없잖아요. 그런데 무슨 우상 숭배의 법이 나옵니까? 그것은 뭐냐? 아무리 이야기해도 인간은 우상을 만들어서 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망만 하는 죄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를 비참하게 다루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그것조차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낮아질 때 우리는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어떤 시험? 내가 훌륭하다는 시험. 내가 잘났다는 시험. 이런 것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은 자신을 쓰레기 취급했겠습니까.
21절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이것은 그 당시의 문화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적 풍토의 조상숭배 문화가 있지요. 제사지내고, 추도식도 하고.
제가 이번에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면서 500여명 이상의 많은 손님을 접대 했습니다. 예전에는 상주들을 보면서 여러 사람들과 절하고 하면 얼마나 허리가 아프겠나 생각했는데, 실제로 절해보니까 하나도 안 아파요. 왜? 오는 사람마다 돈 들고 오니까, 오는 사람마다 3만원 혹은 5만원 내는데, 절 한번 하고 그 돈 챙기는데 왜 허리가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망자를 위해 절을 해요. 천주교 신자들도 절을 하는데, 세 번 절하는데 두 번은 완전히 절하고 마지막 한 번은 반 절을 합니다. 무슨 예법이 그런 것이 있는지? 원래 기독교인은 죽은 사람에게 절을 안 하잖아요.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절을 해요. 절을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천주교 신자들은 이런 미신이 퍼져있어요. 뭐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사흘 동안은 귀신이 안 돌아가고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미신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예수님 죽고 난후 바로 부활한 것이 아니고 사흘 동안 있다 가셨기에 사람이 죽으면 사흘은 죽은 것이 아니고 머물러 있기 때문에 절을 해도 괜찮다는 그런 천주교 내의 미신이 있어요.
그런데 남들이 다 절을 할 때에 뻣뻣이 서서 절 안 하는 사람 있습니까? 3일인지 4일인지 영혼이 머물고 그런 것은 모르고 남들이 절을 하니까 흉내라도 같이 내야 분위기가 살잖아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가 뭔지 모르지만 남들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성입니다. 이렇게 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약해요. 그래서 이 말씀의 성취는 누구의 소관입니까? 우리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면서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적용시켜서 이 말씀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야, 내가 진짜 귀신과 교제했구나. 다시는 안 해야지” 물론 이렇게 다짐을 해도 또 하겠지만, 어찌했건 그 순간만큼은 ‘이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거야’ 라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오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있는데, 그 때 고린도전서 10장 21절을 주께서 엘리베이터 타고 옆에서 심어주셨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이 살아계심은 죽은 문자의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목사가 백날 이야기해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찾아오시면 한 순간에 그 말씀에 사로잡혀 ‘내가 스스로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며 안간힘을 쓰는 것이 다 무의미하구나. 이제 그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맡겨야겠구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이 있지요. ‘어디에 가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염려하지 말라. 성령께서 그 때 필요한 말씀을 너에게 하도록 하실 것이다.’
25절에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 말은 요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음식을 놓고 따지면서 먹고 말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8-29절에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여기 재미있는 말이,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라고 했지요.
타인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식하면 되지, 타인을 의식해서 잘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타인을 약 올리게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옷을 하나 사 입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제가 새 옷을 입은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본인은 행동이 갑자기 조심스러워 집니다. 옷은 좋은 것 입었는데 행동이 잘못되면 욕을 먹을까봐 자기가 스스로 자기 자존심 때문에 행동을 조심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 2시간 지났는데, 새 옷 입은 것을 남들이 모르면 그 때는 ‘예라 모르겠다. 내 마음대로 행동하자.’ 이렇게 됩니다.
그처럼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남을 의식한다는 자체가 위선적인 행동이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편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되지요.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혼자서 괜히 복잡하게 계산을 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어요. 특히 부부사이에 그런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술 먹고 놀다가 집에 늦게 귀가하면서 아내가 틀림없이 화를 낼 텐데 어떻게 적당히 거짓말을 해서 화를 면할까 생각하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고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만들어서 몇 번 외우고 해서 집에 들어갔는데 아내는 잠들어 있어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도 아내는 아무 말이 없어요. 그래서 괜히 걱정이 되서 ‘어제 내게 늦게 왔는데’ 하면서 스스로 이실직고 하는데, 아내는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어서 남편이 늦게 온 것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우리는 자꾸 환상을 만들어내는데, 환상은 없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이 하신 작품만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 타인의 모든 것이 하나님 작품인데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하게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시장에 있는 모든 음식은 감사함으로 받아먹으면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먹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어떤 일도 감사할 것뿐인데, 사실 원망이 생기지요. 하지만 감사하도록 하시고 시험을 이기고 피할 길을 주시는 것은 누구의 몫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서 때를 따라 십자가 은혜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이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실 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조금만 더하고 진짜 마치겠습니다.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쳤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지금 자기밖에 모르는데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는 우리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라는 말씀을 줘야 우리가 내 자신을 위해 먹고 마시는 죄인이란 사실을 알지요.
주여 죄송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영광 위해 살았는데, 하나님 영광 위해 살라니 한 번도 그런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죄인인줄 깨닫게 되고, 이렇게 깨달을 때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구원을 얻게 하라’는 것은, 내가 전도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현재 있는 구원이 각자 갖고 있는 욕심 때문에 가려져 있거든요. 가려져 있을 때 위를 보고, 우리의 행동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세례 받게 하고 믿음을 주셨는가를 다시 한번 환기시켜서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관심 기울이며 살라는 것입求?
오늘 8, 9, 10장 강의를 정리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결국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 사도바울처럼 예수님 만나고 난 뒤부터는 모든 것이 예수님 홀로 다 하신 일인데, 우리가 평소에 살다보니 위의 세계, 넓은 세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 없는데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성령을 받고 한 세례를 받고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다시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자기의 토대와 뿌리에 대해서) 계기가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당신들의 정체는 바로 이것입니다. 아멘. 내가 왜 진작 못 깨달았지. 모든 것이 다 우상이고 모든 것이 감사할 거리인데 내가 왜 원망했지. 이렇게 나올 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셔서 성경말씀대로 성취시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울의 취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세상 사람들은 궁금해 하지도 않고 되는대로 삽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나는 내 밖에 모르는 고집쟁이고 완고한 사람이고 욕심쟁이지만 이런 가운데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심을, 죄를 다 청산해 주심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보니 너무 감사합니다. 그동안 지은 죄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큰 죄가 있지만 은혜가 죄보다 더 큰 것을 또한 깨닫게 해 주시니 이것도 감사합니다. 사나 죽으나,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 위해 사는 저희들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치겠습니다.
광주강의 10-1 (05. 10. 21) 이근호 목사
지금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하고 있지요?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복습해 보겠습니다. 이 고린도전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는 이 창조된 것이 멸망당합니다. 처음에는 창조하시고 마지막에는 창조한 것을 파멸시키는데, 멸망시키면서 겹치기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말은 새 인간이 있다는 것이 보장됩니다.
여러분, 집이 큽니까, 사람이 큽니까? 크기는 집에 크지요. 사람이 집 안에 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집을 부셔버릴 수가 있지요. 아무리 집에 커도 사람이 파괴할 수 있으니까 누가 더 셉니까? 사람이 더 세지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하늘이 옛 하늘이고,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이 옛 땅인데, 옛 하늘과 옛 땅이 무너져야 될 이유는 처음 만든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데, 이것은 어떤 조건 하에 새 하늘과 새 땅이냐 하면, 새로운 인간, 江?없는 새로운 인간이 나타날 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한 가지 던지겠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인간이 누구입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이 없어져야 할 이유는, 지금 인간 자체에서 죄가 나오기 때문에 옛 하늘과 옛 땅이 죄로 말미암아 무너져야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오는데 그것은 새 인간이 살기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인간이 누구입니까?
여기 새 인간이 누구냐 하면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믿어도 죄 짓기 때문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습니다. 일반 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 살기에 적합한 곳이에요. 이것을 두 자로 “영광”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찬란한 영광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집이니까요.
예수님의 집에 우리는 그냥 양자로 들어가는 거예요. 완벽한 인간은 예수님 밖에 없고, 그 완벽한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든 세계가 새 하늘과 새 땅인데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 때는 우리의 의견을 듣지 않습니다. 누구의 의견만 듣습니까? 예수님의 의견만 듣고 만들어요. 우리는 그 영광스러움과 영생을 그냥 누릴 뿐이지요. 누리는데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값없이’라고 했어요.
믿음은 선물로 받지요? 이 때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만약 천국을 만들면서 우리에게 의견을 묻는다면 각 사람의 천국이 다 다르겠지요. 어떤 집에는 꽃꽂이가 잘 되어 있어야 하고, 어떤 집은 골프장이 꼭 있어야 하고, 사람마다 요구조건이 다 달라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재미있는 것이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요구하는 것은 다 달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참 바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사람 요구도 들어야 하고, 저 사람 소원도 들어줘야 하고, 만약이 두 가정의 요구사항이 서로 충돌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기독교 국가가 축구 경기를 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편에 손을 들어줘야 합니까? 정답은 둘 다 편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두 집사님이 서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두 집사님 중 어느 분의 편을 들어줍니까? 둘 다 안 들어줍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뜻대로만 응답할 뿐이지 인간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해 주지를 않습니다.
요한 1서 5장 14절에 보면,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어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주의 뜻대로 구할 때만 다 이뤄집니다. 그리고 요한 1서 2장 14절에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은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지고 기도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세요.
그러면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기도하세요. ‘하나님, 예수님이 주신 뜻이 저희 가정, 저의 신체를 통해 이뤄지게 하옵소서.’ 이것을 간단히 줄이면, ‘하나님의 뜻이 저에게 이뤄지게 하옵소서.’ 이것이 기도의 내용입니다. 주기도문에도 나오지요?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됩니다. 주의 뜻대로 되는 것을 당연하고 다행스럽게 여겨야지, 내 뜻대로 안 되고 주의 뜻대로 되는 것에 대해 하는 수 없이 수용하는 식으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기에서 “주의 뜻이 뭡니까?”라고 묻을 수 있는데, 이것이 이번 시간에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주의 뜻은 이미 결정 났고, 드러났습니다. 새삼스럽게 주의 뜻 알겠다고 번민할 필요 없습니다.
만약 주의 뜻을 인간에게 맡긴다면 주의 뜻이 허황한 뜻이 됩니다. 사람은 아침에 눈만 뜨면 허황한 몽상가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들을 이것저것 뭉쳐서 그것이 주의 뜻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오늘 어떤 귀인이 오셔서 나에게 돈 100억을 주면 좋겠다는 망상을 했습니다. 이런 것은 누구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망상이 주의 뜻과 점차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행윕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가 상상하고 예상한대로 되도록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기다려도 돈 100억 주는 귀인이 나타나지 않아요. 대신 빚쟁이가 찾아와서 돈 갚으라고 독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신이 아침에 상상한 100억 주는 사람에 대한 망상은 깨어지겠지요. 깨어지면 아침에 자신이 상상했던 것은 주의 뜻이 아니고, 내 욕심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나이 30된 과년한 딸이 있는데 A라는 혼처 자리와 B라는 혼처 자리가 나타났습니다. A는 의사인데 키가 작고, B는 변호사인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이런 경우 A를 사위 삼을까 B를 할까 고심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다가 A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A가 결혼 후에 혼수를 조금 가져왔다고 딸을 구타하고 난리를 쳤습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은 뭘 후회하는가 하면, 그 때 A를 사위 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던 것이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이었다는 사실이 시집가고 나서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어떤 것을 잡아서 ‘이것은 틀림없는 주의 뜻이야’ 하고 잡을 것이 있겠습니까? 사실은 잡을 것이 없습니다. 뭔가를 결정한 후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것도 내 욕심이었구나 하는 사실이 밝혀지고, 처음 결정할 당시와 상황이 바뀌게 되면 그것도 나의 욕망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몽상과 상상으로 영글어 낸 자기 뜻을 주의 뜻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실은 평생을 보냅니다.
만약 위와 같은 분이 평생 주의 뜻을 모른다면 나중에 나이 들어 임종을 맞이할 때, ‘얘야 하나님의 뜻 다 소용없더라. 내가 솔직히 말하는데 지나고 보니까 내 뜻을 가지고 목사가 주의 뜻이라고 우기니까 하나님 뜻인 줄 알았는데 다 내 뜻이지 하나님 뜻은 없다. 내가 60년 믿었지만 다 헛것이다.’ 라고 후회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미래가 뻔히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것은 내 확신이야, 이것은 반드시 되는 거야” 이런 것으로 주의 뜻을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러분이 주의할 것은 교회에서 예배당 짓는다, 교육관 짓는다 할 때, 부흥사들이 와서 “5천 만원, 1억 헌금하세요. 주의 뜻입니다.” 하는데 이것 주의 뜻 아닙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형편을 고려해서 적당한 금액을 정하고 흥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뭘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받아서 축복하시는 분이 아니고, 값없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고,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 살기에 좋은 곳인데, 우리는 그냥 신부의 신분으로 그냥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만 가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신부의 웨딩드레스도 신랑 예수님이 맞춰줍니다. 우리가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다만 ‘저에게 신랑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라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이런 마음이 기름 준비하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돈 받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흥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10만원 더 쓰면 축복할 텐데, 10만원 덜 써서 저주하겠다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인간들이 조작한 하나님입니다.
구약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가짜 하나님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자 말라.”고 했어요. 가짜 신은 인간이 조작한 것이고, 진짜 신은 약속 안에서 얼굴을 살짝 내미시는 그런 분이 바로 진짜 하나님입니다.
옷을 통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어요. 옷 속에 주먹을 넣어 밀면 뭔가 뚝 튀어나오지요. 옷 속에 주먹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이라는 옷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옷이 뭐냐? 예수님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님 찾지 마세요.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숨어 있습니다. 어려운 말로 은폐되어 있다고 하지요.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숨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을 비켜서 우회해서 하나님 찾을 생각 하지 마세요.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성자 따로 있고 성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자 예수님 안에 성부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시 설명 드립니다. 옷인데 안에서 주먹을 내미니까 옷이 뚝 불어져 나왔잖아요.
사람들은 예수님 말고 하나님 찾는데 귀신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일본에는 15만 가지 종교가 있다고 해요. 그 중 하나가 ‘옴 진리교’가 있고, ‘남묘호렌게교’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요. 자기들이 신을 찾으면 그것이 신이 되는 거예요. 상점에서 물건 고르듯이 내가 원하는 신을 내가 고르겠다는데 누가 간섭하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방 민족들이 자기가 아쉬워서 천당 가겠다고 만들어낸 조작된 신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누가 요청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직접 없는 이스라엘을 만들어 놓고 찾아오신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구약 시절에는 피 있는 제사를 통해 나타나시고, 신약 시대에는 피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십니다.
저도 목사지만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기독교 이거 사기 아니야? 신이 어디 있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냔 말이야.’ 이렇게 하나님이 없다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오히려 내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고 주눅 들지 않고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냥 사회 나가서 돈 벌고, 밥 먹고 살다가 늙어 죽으면 그만이지 내가 구태여 하나님을 아쉬워하며 찾고, 예수를 부르고 할 필요가 있는가? 누가 하나님 보았나요, 예수님 봤어요? 천국은 봤습니까? 아무도 안 본 천국을 인간이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에 지어낸 가짜 나라일 수도 있단 말이지요. 인간의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환상을 통해 나타나고, 그리고 그것을 계속 소망하면서 ‘있을 것이다. 있을 거야.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스스로 자신에게 채면을 걸어서 없는 하나님을 있다고 우길 수 있다는 말이지요.
帑窄?어떤 때는, 성경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예수도 없고 이런 것이 없는 것이 우리를 마음껏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잔소리 듣기 싫다. 제발 날 건드리지 마라. 예수든 하나님이든 날 건드리면 난 싫다.’ 때로는 아무도 날 간섭하지 않고 가만 내버려둔다면 종교 이상으로 우리 심령을 편한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도 해 본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안 되게 하는 사건이 있어요. 그것이 뭔가 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고 부활입니다. 이 사실은 빼도 박도 못합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적의 흉탄에 맞은 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 지시고 나에게 영생 주시기 위해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기도를 100번 해서 단 1회도 응답 안 된다 할지라도, 내가 사업을 해서 몽땅 다 망해도 변함없는 사건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린 사건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씀을 해요.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을 확실한 사건, 십자가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내 죄를 씻었고, 약속대로 3일 만에 부활하시므로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11장 23-24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주께서 잡히시던 밤” 그 밤에 있었던 그 약속, 이것을 계약이라고도 하는데 그 계약 혹은 약속을 계속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피를 흘렸는데, ‘이것은 너희를 살리기 위한 내 몸이고, 너희를 용서하는 내 피다.’라는 그 사실을 마지막 재림 때까지 계속 증거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모여서 밥 먹고 노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주님께서 호출하셔서 모이게 되었고, 호출하신 근거는 주님이 대신 십자가 지셨다는 그 사실, 그 흘리신 피가 죄 많은 나를 씻어주시고 주님이 사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해 주는 그 능력이 십자가의 효과로서 우리에게 넘쳐난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 모인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구원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이 사실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다양한 사건이 있더라도 십자가 사건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말고 밖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그렇다면 주의 뜻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뜻이 아닌 것은 십자가 외의 모든 것이지요. 내 가정이 화목하고, 사업 잘되고, 교회 부흥하는 것 이런 것 전부 다 주의 뜻이 아니지요. 이런 것들은 내 욕심이 만들어낸 환상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내 욕망을 주의 뜻이라고 우기면서 “주여, 주여!” 부르면서 금식하고 철야하고 합니다. 주의 뜻 아닌 것을 가지고서 주의 뜻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고 ‘시위’ 혹은 ‘대모’라고 합니다.
주의 뜻이 뭐라고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효력이 나타나서 우리는 그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랑과 신부 사이에는 십자가만 인정하고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돈도 안 받고, 우리의 정성도 안 받고, 우리의 선행도 받지 않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께서 자기의 피와 자기의 살을 신부인 우리에게 주셨어요.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신랑이 준 것을 가지고 커플링처럼 고이 간직하시고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만든 정성, 내가 만든 헌금, 내 열심 이런 것 들고 가지 마시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들고 가지 마세요. 이런 것 안 받습니다.
사람이 교회에다 업적을 쌓으면 이 업적을 평생 포기 못합니다. 교회 꽃꽂이만 해도 아이들이 꽃꽂이를 만지고 하면 굉장히 화를 냅니다. 사람이 뭔가 업적을 남기게 되면 그 업적과 떨어지지 않고 평생을 그 업적과 동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업적을 건드리면 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서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랑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 또 우리교회 교인들은 봉사도 안 하고, 헌금을 잘 안 합니다. 잘 못 가르친 것이 아니고 많은 것을 가르친 것 중에서 자기 손해날 것은 다 빼버리고 유익한 것만 챙기니까 그렇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주문했는데, 주문하지 않은 반찬도 같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교회 올 때 자기만 구원 받는 줄 알았는데 자신처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구원 받은 많은 형제들이 있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그 형제들을 무시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너무 약삭빨라 자기 챙길 것만 챙기고 끝나면 ‘목사님, 고맙습니다.’하고 가버립니다.
이것이 11장에 들어가면 잘 못 되었다는 것이 나오는데, 제가 여기서 서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은 자기가 우리에게 준 것을 받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은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은 죄인의 뜻이고 나의 뜻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가지고 구원이 되니 마니 측정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세요. 십자가는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닌데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생각하면 인생사에서 어떤 실패가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성공이지 실패가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실패란 개념 자체가 더 이상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분명하다면 우리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 확실하다면,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성도라는 뜻입니다. 성도 아닌 사람은 절대로 믿지 못합니다. 성도이기에 예수님 지신 십자가는 내 죄를 대신해서 지신 십자가고, 이미 영생 얻기로 확정된 사람이기에 세상이 믿지 못하는 부활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뭘 안 갔다 받쳐도 이미 구원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교회이고, 이 교회(고린도교회)에 누가 지금 와 있습니까? 사도지요. 이 사도가 전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열정? 행함? 아니면 돈? 무엇을 전하겠습니까? 사도가 전하는 유일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네가 십자가를 아느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 해석은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끝나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이 성경 해석 외에는 다른 성경 해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간에 인간을 집어넣으면 ‘받쳐야 복 받지’ 이렇게 되는데 이러면 큰 일 납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에서 주님께로 가는 노선에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어요. 만약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면 어느 정도 열심히 해야 구원 받습니까? 1년에 전도 100명 하면 됩니까? 아니면 1,000명 하면 됩니까? 헌금은 얼마나 해야 합니까? 기도는 몇 시간 해야 합니까?
인간의 노력을 거론하면 다 엉터리입니다. 주님으로 시작해서 주님으로 끝나야지 중간에 우리들이 끼어들 자??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끼어들어 구원 받게 되면 중간에 죄가 섞이기 때문에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끝부분에 보면 마지막 때 장로들이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서 도로 주님께 반납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주께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면류관을 반납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모두 주의 뜻대로 되었기 때문에 오직 주께만 영광이 돌아가야 합당하다는 것이지요.
‘주의 뜻대로 된 것에 대해서 내가 왜 공적을 가져가야 합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뜻에서 면류관을 반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미리 합시다. 천국 가서 하기 이전에 지금부터 미리 합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이 이런 반론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출발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성경에 보면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지 않느냐? 그러니 이런 명령들을 순종해야지 십자가만 믿고 계명을 불순종하면 지옥에 떨어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징계 받고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나만 손해지.’라고.
그런데 이게 틀린 생각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살피면서 왜 잘못된 생각인가를 확인해 봅시다.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여기 마지막 부분에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는 명령이 나오지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은 이 명령 안에서 능력이 나와요. 성경은 성령님이 쓰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님이 명령하신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성령님이 명령할 때 그 명령에 도달된 사람은 그 명령대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을 어떤 분은 이해가 될 것이고 어떤 분은 이해가 잘 안 될 것인데, 제가 만약 부모고 4살 난 어린 아이가 있다면, 성경공부 시간에 아이가 울고 있다면 엄마가 아이를 향해 인상을 쓰면서 “뚝”(울음을 그치라는 뜻으로)하고 소리를 치지요. 이렇게 되면 아이는 순간적으로 놀라면서 뚝 울음을 그쳐요. 이것은 엄마의 능력이 명령과 함께 섞여서 아이에게 전달된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가 돈이 너무 아쉬워서 돈을 달라고 주님께 떼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성령이 임해서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다.’는 말씀이 깨달아지니 갑자기 기쁨이 오면서 돈을 생각하는 마음이 뚝 그칩니다. 이것이 몇 초 동안만 지속될 뿐이지만. 약 5초. 이 5초가 지나고 나면 다시 돈 타령을 하겠지만.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란 생각이 들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 존중하는 생각이 들 때 그 사람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대할 때 교과서처럼 지켜야 한다고 생각이 들면 보지마시고, 이 말씀이 살아있어서 말씀 그 자체가 존재입니다. ‘빛이 있어라’고 하시면 즉시 빛이 생겨요. 말씀하므로 써 존재케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시면 나오게 되지 ‘아이고 나는 안 나가렵니다.’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4:12)고 하셨는데, 지금도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파고들고 활동하는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21세기 지금도 믿는 자 속에 말씀이 살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활동해야 신자에요.
그러면 구원 문제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지요. 내가 말씀 지키려고 안 해도 되지요? 주께서 수시로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니까 그 때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그 은혜를 증명하면 되요.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했는데 이것이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하라, --되라.’는 명령은 어떤 존재자가 될 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 존재자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처럼 되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되게 하시지요.
바울처럼 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3-4절에 보면,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자가 머리 기르는 것은 당연한데 머리 기르는 이유는 무엇을 쓰는 것을 대신한다고 했지요. 여기서 어떤 존재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면,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존재자가 되어야 해요. 야, 이것 어렵습니다.
제가 어떤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남편이 자신의 머리가 그리스도인 것을 인정하지 않거든 그 남편한테 복종하지 말라’고. 성경 말씀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고 했는데 그 남편이 어떤 남편이냐 하면, 자기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남편에 한합니다. 자신의 머리가 없고 자신이 최고인줄 아는 남편에게 복종하면 그리스도라는 통로가 도중에 이탈되어버려요. 이렇게 되면 그 여자는 남편 섬기면서 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머리가 도대체 뭔가?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하는데 머리가 뭔가를 알기 위해서 다시 한 번 3절을 보겠습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머리가 뭐냐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 가야 머리가 뭔가가 밝혀져요.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의 머리다.”라고 우기는 남자에게 가면 안 되고, 예수님께 가야, 그리고 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사이가 어떤 사이인가를 알 때 이게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머리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몸이 되십니다. 痔?없이는 머리가 머리 구실을 못하고, 몸은 머리 없이는 온전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 때 아버지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간단하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뭐냐 하면,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머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때 머리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섬기는 남편은 어떤 남편입니까? “주여, 주의 뜻이 저에게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할 때, 이때 이 남편을 존중하고 복종해도 아내로서는 손해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남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이런 남편이 있더라도 이런 남편에게 복종할 여자가 또 없어요.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은 5분이 되었던 5초가 되었던 수시로 되게 해요. 아무도 인간 자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성경께서 잠시 잠깐이지만 되게 하지요.
성경 말씀을 대할 때 여러분들이 ‘야, 이 말씀은 지킬 수 있겠네.’ 이렇게 생각하시면 그것은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길 때 어떤 능력으로 한 줄 아세요? 성령님의 능력으로 했습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성령 받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공생애에 돌입합니다.
예수님도 그런데 하물며 죄인 주제에 자신의 능력으로 남편을 하늘같이,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자기 몸을 주심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끔 [순애보]에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가 나오지요.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지쳐 쓰러져 돌이 되었다는 눈물나는 전설, 이런 것을 보면서 정말 지독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성경을 보면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집착입니다. 지독한 자기 집착이지요.
사람은 뭔가에 공을 들이면 포기를 못합니다. 공을 준만큼 포기를 못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아내는 점점 위험스러운 아내가 됩니다. 점점 감시자가 되요.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빼앗고 남자는 여자의 몸을 빼앗는다.’는 되도 않은 말이 있습니다만, 사랑을 하게 되면 감시망이 점점 더 좁혀지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자기 지배 하에 두고 싶습니다. 이것을 편집증이라고 합니다.
지독한 사랑, 집착 이런 것을 가지고 윤리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지독한 사랑이 지독한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사랑 = 절대 악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기주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게서 나간 사랑을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을 용납 못하지요. 내가 이만큼 정성 드렸는데 어찌했든 넌 내 정성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독한 자식 사랑은 자식을 망친다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에는 자녀가 성장했으면 부모의 품을 떠나가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떠나 저희끼리 가정을 만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품에 끼고 있으면서 본전 뽑을 생각하지 말고 --
제 나이쯤 되어서 사람들을 만나면 부모 치매 안 걸린 사람 만나면 복도 많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치매에 걸리면 가족들이 감당하기 힘듭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짜증나는 것도 현실이에요. 우리가 이 말씀대로 못삽니다. 이것도 현실이에요. 그런데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도 현실이에요. 가끔은 이 말씀이 생각나는 것도 현실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완벽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가끔 주어지는 십자가 생각과 성령의 도우심이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것이 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이고 이 성령의 인도 때문에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은 머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된 남편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끔은 예수님을 머리로 생각하도록 성령께서 말씀대로 이루십니다. 그리고 성도된 아내는 가끔은 남편을 주님처럼 복종해야 한다는 그런 의식이 들도록 성령께서 해 주십니다.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모든 것을 성령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1장 앞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라’가 아니고, ‘되라’는 이야기지요. 우상숭배하지 말고, 술 먹지 말고 --하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어떤 존재인줄 아느냐? 너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고 있는 하나의 그러한 환경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부터 먼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7-8절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 말씀 보면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 골치 아프다. 이것도 지켜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각각 자기 위치를 통해서 예수님의 머리됨을 주님께 고백하도록 성령님께서 이렇게 일하신다는 하나의 통보입니다.
“예비군 훈련 나왔습니다.” 동사무소 직원이 통보 나오듯이, 우리는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 삶속에 침투해서 ‘너의 머리는 그리스도야. 그리스도를 머리로 생각해야 돼.’하는 통보가 우리에게 날아오는 것입니다.
5분 쉬었다 계속하겠습니다.
광주 강의 10-2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은, 우리가 ‘주의 뜻이다’고 한 것이 사실은 우리가 조작한 ‘자신의 뜻’이고, 주의 뜻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뭐가 ‘주의 뜻’이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잡히시든 날 밤에 우리에게 뭔가 하나님께서 넘겨주셨고, 그 넘겨주신 것에 따라서 지옥이냐 천국이냐 결판 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11장 28-29절을 한 번 봅시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지요?
보통 “죄”라는 것은 윤리, 도덕적인 기준에 의해 죄를 말합니다. 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나쁜 짓을 하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 29절에서는 그렇게 본 것이 아니고, 죄의 기준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게 해 주신 떡과 잔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셨다면 그것은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죄는 우리 몸에서 피어나고 쏟아나지요? 예수님도 ‘네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네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하셨지요.
고린도전서 11장 29절에 보니까, 우리 몸에서 나오는 것이 죄의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몸과 뭔가 죄악된 것이 있기에 우리 몸 밖에 있는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해서 안 좋은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지요.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안 마신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기가 죽을 죄인이 아니라고 느껴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내일 사형이 집행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사형수가 된 것은 부모 탓이고 사회 탓이지 나는 그렇게 악한 놈은 아니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거부합니다.
교회 와서 ‘교회 오면 하나님 계시고 나에게 복을 준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 온 사람 같으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분변치 않고 먹을 가능성 농후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교회 안 다녀도 잘 난 사람인데, 좀 더 잘나기 위해서 교회 왔기에 예수님 시키는 대로 하겠지만 그 살과 피가 전적으로 내 죄를 씻기 위함이란 사실에는 온전히 동의하기 힘들겠지요? 이것이 바로 분변치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안 믿고 안 마신다면, 세상을 어떻게 살든, 인생을 어떤 목적으로 살든 나는 사람 취급 안 하겠다는 단호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안 마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자기가 잘났다는 사람입니다. 못나도 자신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예수님은 지금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 들고 오셨는데, 우리는 환자복을 안 입어요. 반대로 자신의 업적과 자랑거리를 가지고 나와요.
자신이 왜 죄인이냐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안 믿지요.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뭐가 못나서, 내가 뭐가 부족해서 나보고 죄인이라고 하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성경은 ‘네가 살과 피를 전혀 의지하지 않고 살과 피를 대하면 죄를 먹고 마시는 최종적은 죄가 된다.’ 이렇게 말씀하지요.
이만큼 교회는 십자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남기신 것 외에는 일체 받지를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주의 확증된 뜻이지 내 머릿속에 날마다 떠오르는 것은 나의 뜻이지 주의 뜻이 아닙니다.
이제 12장 봅시다.
1절에 보면 “신령한 것”이 나오지요. 이것은 영적인 것인데, 영적인 것이 있다는 말은 성령을 통해서만 영적인 것이 생기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는 육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영적인 영역도 있고 육적인 영역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세상을 바라볼 때, 영적으로 바라봅니까, 육적인 것을 현실로 봅니까? 오직 육적인 것만 현실로 보지요. 영적인 것은 추상적이고 착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육적인 것만 진짜 현실로 보입니다.
육적인 것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하면 나의 신체에서 나오는데, 인간 신체에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어요.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식욕, 수면욕, 성욕 이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욕망, 남들로부터 칭찬 듣고 싶은 욕망, 그리고는 자신이 신이고 싶은 마음 등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육적인 것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현실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동의합니다. ‘그래 이것이 전부야. 교회고 뭐고 내가 배고프면 다 소용없고, 아무리 교회가 복을 준다고 해도 내가 사람들에게 미움 받으면 죽고 싶다.’ 이것이 바로 육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자연스럽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적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자연스럽다’고 하면 선으로 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성령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러움을 바로 육으로 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상은 영과 육 둘로 되어 있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만 있는 것은 비 현실적인 것입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요새 교회에서 ‘새 생명 운동’이 유행하고 있고, 교인들을 ‘해탈’ 시키려고 목사가 힘쓰고 있는데 이런 것이 참 위험해요. ‘나는 이제 초보를 버리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다.’ 라고 하면서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을 아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자들에게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기도하면 떡반죽 그릇이 채워집니까? 또 물고기 아가리를 벌리면 거기에서 돈이 나옵니까? 당신이 바다를 갈라지게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혼자 도를 닦아도 홍해 바다가 갈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움직임 자체가 자연이 같이 동조해서 우주자체가 예수님께 순복해요. 그러나 이근호가 아무리 도를 닦아도 자연이 협조 안 합니다. 우리는 도를 닦아도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자꾸 더 높은 상태, 더 성화된 모습을 자꾸 요구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도를 닦아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신령하다”는 말을, 세상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나, ‘모든 것을 통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진짜 신령한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에 대해서 갈구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12장 31절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지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사모하면 안 돼요. 예언하는 능력을 사모하면 안 됩니다.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는 것을 사모하면 안 돼요. 사랑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모해야 됩니다.
13장 끝부분에도 나오지요. ‘보고 싶어요. 우리주님!’ 이런 심정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빨리 주님을 만나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21C에 하려고하니까 제가 쑥스럽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 맞습니까? 실제로 그러했다면 우리는 그분을 보고 싶어 해야 돼요. 내가 옥에 갇혔는데 어떤 분이 이름도 안 밝히고 매일 내게 사식을 넣어주었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고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만나보기를 사모하겠지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뭔가 당기는 능력, 흡인력 같은 것. 나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이끌고 있고, 보살피고 있다고 느끼는 것.
사랑이 있을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사랑의 은사가 오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용기지 사랑이 아니에요. 아무리 큰 용기를 가져도 두려움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잠시 용기가 두려움을 이길지 모르지만 언제 그 용기가 사라질까 두려운 것입니다.
두려움은 내가 만든 나의 능력에 계속 기대를 걸 때는 평생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모하는 대상으로 바뀌어버리면 그 순간 자기 생각은 날아가 버리지요. 사랑은 ‘흐물흐물해 진다’고 했지요. 사랑은 내 생각이 흐물흐물해 지는 것이라고.
사랑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구를?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점차 나의 생각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헌금은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헌금한 돈 외에 나머지 돈도 내 돈 아니라고 느낄 때 당신은 비로소 헌금을 한 순간입니다.”
만약 헌금을 하고 나머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돈이 내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헌금’이 아니고 ‘기부금’을 낸 것입니다. 여기에는 ‘헌금 조금 했다고 더 내라고 하면 어찌하나’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교인들이 자유롭게 헌금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평소에 5만원 하다가 오랜만에 10만원 하게 되면 목사들이 다음에 그보다 적게 내면 ‘마귀에게 시험 들었다’고 공격할까봐 두려워해요. 믿음이 성장하려면 10만원에서 다음에는 15만원 해야 성장하는 것인데 5만원으로 줄어버리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법 조항을 들어서 저주 받을 짓을 한다고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헌금을 하고 싶어도 다음을 생각하면 두려워서 제대로 못해요.
우리교회는 누가 헌금을 했는지 안 했는지 저는 몰라요. 제게 알리지도 말라고 해요. 혹시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설교를 했는데 어떤 분이 ‘목사님이 내 들으라고 한 설교다.’ 이렇게 나올까봐 내 책임을 회피하려고 저는 애초에 누가 헌금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릅니다. 그냥 주는 월급만 챙기지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누가 빚내서 뭘 하는지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사랑이란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헌금을 하든, 기도를 하든, 전도를 하든 이 모든 것이 어서 주님과 내가 상봉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게 되거든 사랑으로서 은사를 받은 것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선물로 받은 사랑이기 때문에 선물 준 사람께 다가가고 싶은 것입니다.
13장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어요. 그 이유는 믿음, 소망은 그 주체에서 내가 발생되지만 사랑은 주신 분, 원천자가 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은 내 쪽에서 발생되는 것이지만(물론 주께서 주셔서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랑은 저쪽에서 발생되어 당겨오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은 사랑이 주신 열매에 해당 됩니다. 그래서 제일은(원천은, 원 토대는, 원 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누구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내 사랑을 알아달라는 것이고, 진짜 사랑은 누가 보고 싶은 거예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어린 아이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라고. 이런 질문 가끔 받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대상에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전할 때도 목사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전하면 그것이 설교입니다.
누구를 지독하게 사모하게 되면 사모하는 대상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부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 중에 남편이 TV에 나오는 여자 탤런트가 예쁘다고 칭찬을 하게 되면 아내는 삐치고 화를 냅니다. ‘그렇게 그 여자가 좋으면 같이 살아라.’ 이렇게 나오지요. 아내는 평소 남편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늘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남편은 아내 사랑하는 것은 기본이고, 추가해서 탤런트도 괜찮다고 했는데 아내는 그런 것도 기분 나빠해요. 들레즈 철학에 의하면 남편과 아내가 지층구조가 달라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요.
사랑이란 것은 사모하는 자가 있으면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왜 성경 말씀 지키기가 어렵습니까?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등등 수많은 율법이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면 다 이루는 것인데 뭐가 어렵습니까?
사모하는 이는 없고 말씀대로 지켜야 복 받는다고 하니까 교회 와서도 죽을 맛이에요. 세상이 좋은데 성경 말씀에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니까 복 받기 위해서 참아야 한다고 하면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니 괴롭지요.
사랑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 정말 보고 싶습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아무것도 어려운 것이 없어요. 정말 보고 싶습니다. 마라나타 -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런 심정으로 주님 복음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 돕는다고 헌금하고, 그들을 위해서 봉사해주고, 낙심한 사람 찾아가서 위로하고 이런 것이 바로 주님을 보고 싶어 하는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제가 12장을 건너 뛰어 13장을 했는데 이렇게 해 놓고 12장에 들어가야 12장 해석이 되지 그렇지 않고서는 12장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12장 해석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행해야 구원 받는다’는 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펠라기우스 주의인데 이렇게 되면 큰 일 납니다.
12장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제 이 말씀이 좀 이해가 되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 그대로 고백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지요? 이 말씀을 그대로 고백했다고 해서 성령 받은 사람 아니지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해요. 애인이 있어야 돼요. 사모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모하는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예수를 저주해라’ 이게 가능합니까? 그분이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신 분인데 내가 왜 저주를 합니까? “그분은 나의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겠지요.
이것은 불교신자 앞에서도, 불신자 앞에서도 그런 고백을 해야 할 자리라면 당연히 고백하겠지요.
마태복음 10장 32-33절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게 되면 크게 보입니다. 예수님이 크게 보이면 상대적으로 나는 작게 보입니다. 내가 작게 보이고 주님이 크게 보일 때 주님 주신 손도 크게 보입니다. 이 손을 ‘은사’라고 합니다. 이 손은 주님의 몸에 달려 있지요. 머리되시는 주님의 몸에서 나온 이것이 크게 보여요.
만약 내가 크게 보이면 주님이 작게 보입니다. 주님의 손도 조그마하게 보이겠지요. 내가 크니까 내가 내민 손이 크게 보이지요. 교회에서 내가 충성하고 봉사한 것이 크게 보이고, 주님이 주신 은혜는 작게 보이지요. 이렇게 되니까 ‘하나님, 내게 언제 은사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것이 뭐가 있어요?’하고 불만을 가집니다.
은사를 안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너무 비대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님 주신 은사는 보이지를 않아요. 너무 작아요.
거지 나사로, 창기, 강도, 문둥병자, 소경, 귀신들린 자를 보세요. 이런 사람들을 주님이 구원 하셨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누가 크게 보이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찬송가 405장) - 주님이 크게 보입니다. 이 때 나는 작게 보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떻게 일하십니까?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하는 쪽으로 일하시겠지요?
이렇게 해 놓고 12장 3절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하시지요.
성령께서 얼마나 일을 정확하게 하시는지 몰라요.
요한복음 16장 8-10절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기에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만, 장차 어떤 보혜사가 오는데, 보혜사라는 것은 assist 도움자가 오십니다. 이분은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 의해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일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책망해서 - 책망하면 우리는 작아지고 주님은 크게 높아지면 주님을 사모하고 소망할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요.
그러니까 ‘은사’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주님으로 크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주신 그 기능을 ‘은사’라고 보시면 정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봉사하면 봉사한 값을 하고, 자기 부인은커녕 자기 업적이 있으면 그 업적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그런 은사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이런 것들을 부추기지요.
은사는 받지 않았고, 천당은 가고 싶고 이런 상태에서 가짜 은사를 남발시키는데, 가짜 은사는 교육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방언도 훈련하면 되고. 이렇게 훈련해서, ‘은사 받았으니까 감사하라’고 하면서 교회에 헌금하기를 유도하지요.
은사라는 것은 주님이 크게 보일 때, 내가 내 육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보다 獵纛?복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 때 헌금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은사인데, 진짜 은사로 한 헌금은 집에 있는 돈도 모두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느끼고 이렇게 될 때 헌금한 돈이 은사로 헌금한 것이 됩니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렙돈을 연보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부자 되기 위해 연보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연보를 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의 발에 뿌린 것도 예수님을 사모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유행가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바로 이런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오래 가지를 않지요. 잠시 후면 다시 내가 커지고 은사는 날아가고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줘서 ‘너는 나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재확인 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작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져도 괜찮구나. 지금 죽어도 괜찮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정에 부모가 예수 믿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기도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부모님이 주님께 돌아올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게 되면 부모님의 존재도 예수님의 은사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님도 주님의 품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작아지지요. 내가 부모님을 믿게 하려고 하면 나는 크게 되고 주님은 작게 됩니다. 여기에는 내 능력이 개입되고, 내 소망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낙심하게 됩니다. 결국은 부모님을 두고 주님을 원망하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나는 주님 품안에 작게 있습니다. 크신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왜 부모님을 주셨는가? 내가 전도할 대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지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라고 했지요. 제가 부모님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교인이나 다른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5절) 이런 것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나오지요. 나오게 되면 그분들이 믿든 안 믿든 간에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런 엄청난 귀한 전도의 일을 시켰다는 자체가 이 사람한테는 흐뭇하지요. ‘왜 내 말이 안 먹이 들어가나’ 하는 불평이 아니라, ‘내가 거룩한 주의 일에 동참했구나.’하는 기쁨을 맛봅니다.
불신자 부모가 있을 때 가슴 아프지만, 그러나 그런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주님이 보시고 주께서 더 가슴 아파하신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항상 내가 사모하는 주님에 의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란 것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은사란 뭐라고요? 은사는 예수님의 손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큰 손이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를 하게 하면, 우리는 그런 일을 하게 된 것만 해도 황송스럽고 고맙지요. 그래서 교회에서 은사에 따라 일하면 불평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이런 분이 있습니다. 11시 예배인데 9시 20분경에 오시는 분이 계세요. 이렇게 일찍 오셔서 예배당 청소 다시 다 하고, 복도, 화장실 다 청소합니다. 심지어는 남자분인데 여자 화장실까지 깨끗하게 다 합니다.
12장 1절에 보면 “신령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예, 신령한 것이 있습니다.’하고. 그러나 막상 교회에서 봉사할 일이 생기면 ‘내가 미쳤나. 그 일을 내게 왜 해’하면서 다 떠나버리고 혼자 달랑 남았는데 그 사람마저 가 버린다면 이들 모두가 다 ‘육적인’ 사람입니다.
문둥병 10명이 예수님께 고침 받고난 뒤에 9명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고 1명만 돌아왔어요. 9명은 병 낳고 지옥가고, 1명은 병도 낳고 천당 가고. 왜, 이 사람은 예수님께 값없이 받은 사랑을 감사하고 그 예수님이 보고 싶고 사모해서 다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구원이란 뭐냐, ‘누가 나를 보고 싶어 하느냐’ 그것 찾기입니다. 교회에서 힘든 일시키고, 가정에서 힘든 일시키면서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런 가운데서 누가 진정 나를 보고 싶어 하느냐’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영적이란 것입니다.
5분 쉽시다.
광주 강의 10-3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을 정리해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확실하다면 현재 우리가 예수 믿고 있는 것이 없는 하나님을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구원하는 근거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데, 구원을 위해 살과 피 외에 다른 것은 여기에 끼어들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의 행함, 종교적 열정 이런 것을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제공하신 십자가의 살과 피로 영생을 확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들어온 것이 되는데, 영적인 세계가 되면 육만 현실이 아니고 영도 현실인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이 커지면 육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육이 커지면 영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외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시간에는, 그렇다면 이렇게 육적인 우리가 어떻게 구원이 확실하게 보장 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11장에서 조금 언급했는데 그것이 바로 ‘머리’입니다.
머리가 뭐냐? 머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섬기는 그 관계가 머리라고 했습니다. 이럴 때 나오는 현상이 뭐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머리를 머리로 제대로 섬길 때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이 인간의 자력으로 나옵니까? 절대로 안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성령에 의해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게 이뤄지게 하옵소서.’
그러나 우리같이 육적이고, 아무리 아버지의 뜻이 중요하다고 해도 돌아서면 광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고, 우리 대통령은 노무현이고 이것이 현실이지 이것 외의 현실은 없다고 하는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염려하지만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12장 13절을 봅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자’ 이런 차이는 육적 현실이지요? 육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 현실 맞습니다. 그리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것은 육입니까, 영의 세계입니까? 이것은 영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영의 세계를 원한다고 직업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런 모습은 아니지요? 직업을 가지세요. 의사를 하든지 판사를 하든지 백수가 되든지 원하는 일을 하세요. 그러나 운전사가 복 받았다고 판사 되는 것 아니고, 운전사는 운전사인체로 구원 받습니다. 파출부가 성령 받았다고 그 집 주인 되는 것이 아니고, 파출부는 파출부대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파출부냐, 주인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았는가를 묻습니다. 네가 영적인 사람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돼요. 직업 바꾼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교 갈 생각하지 마세요. 복음 아는 사람이 신학교 가면 학점 못 받아요. 왜? 신학교는 육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확인합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지요. 확인하는 방법은 21절에 나옵니다. 몸은 하나이기 때문에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육적이고 세상적인 차별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교회에 아침 9시부터 나와서 봉사하는 사람이 대단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거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 다 합니다. 물론 저나 다른 교인들은 걱정을 해요. 저분이 저렇게 일찍 와서 봉사하다가 다른 교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낙심해서 교회 안 나올까봐.
저희교회 성도들은 보통 11시 10분에 교회 나옵니다. 처음 저희교회 오시는 분은 10시 30분에 나와요. 일찍 와서 예배 준비도 하고 한다고. 그러다가 다른 교인들이 일찍 안 나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11시 정각에 나옵니다. 그러다가 시간 맞춰 나온다고 하다가 중간에 사소한 일이 생기고 해서 결국은 11시 10분에 나오게 됩니다.
왜 나는 허드렛일을 하느냐? 이런 생각 자체가 육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차별화 의식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차별한다는 것도 나쁘지만 차별을 느끼는 것도 나쁜 것입니다. 차별화를 의식하는 본인도 나빠요.
주님은 차별 없이 성령을 주셨건만(주님은 직업을 보지 않고 그냥 성령 주셨건만), 성령 받은 자들은 누가 더 좋은 성령이냐 차별화를 시켰다는 것은(나는 성령 받았는데 왜 내 직업은 여전히 천한 것입니까? 하고 따진다는 것은) 여전히 육적인 사람입니다.
이럴 경우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성경 말씀대로 하십니다. 나중 온 자가 먼저 온 자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초신자가 일찍 교회 와서 예배당 청소하고, 화장실 청소 하고 남들은 더럽고 귀찮다고 꺼리는 일을 혼자 즐겁게 주님 사모하는 마음으로 찬송하면서 봉사를 하지요. 주께서 이런 식으로 일하십니다. 이 초신자도 두 달 정도 다니면 기존 교인처럼 됩니다.
그 다음에 또 새로운 교인이 와서 기존 성도를 부끄럽게 만들고, 그 사람이 도 몇 개월 후에 기존 교인처럼 되고, 또 새 사람이 오고 ---
그래서 직분 제도가 문제가 있어요. 직분 제도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으면 그 직분을 반납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모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차별화를 느끼지 않을 경우에는 일단 주님을 사모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는 발인데 너는 눈이구나. 너는 내보다 낫다. 이런 차별 없이, 발이면 발, 눈이면 눈, 다 필요해서 주께서 주셨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런 마음이 사라지면 그 직분자는 직분을 반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직분 반납하는 사람이 없어요. 목사부터 아무도 내 놓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직분 내 놓으라고 할 수 없어요. 잘못하면 직분 내 놓은 것으로 ‘겸손한 자’라고 또 그것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분은 자기고 있으되 직분 없을 때처럼 겸손하게 살라고 권면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늘 목사님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내 교회는 없다는 생각으로 강단에 서 달라.’ 고 당부를 합니다. 내 소유의 교회는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지금 강단에 서는 것은 이번만 설교해 달라고 교인들이 요청한 것이라 여기고 설교 끝나면 떠난다는 생각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 교회를 잘 꾸려서 이끌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교회를 소유한 것이 되고, 여기서부터 자기 업적이 피어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사모되는 것이 아니고 내 교회가 사모의 대상이 되면서 점점 악마의 하수인이 됩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모하면 교회에서 나가라고 해도 “예”하고 미련 없이 짐을 챙깁니다.
대구 00교회에서 목사 한 분은 추천해달라고 제게 요청을 했어요. 전임 목사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처음 교회 개척할 때 그 목사가 몇 천만원 돈을 내 놓았어요. 그리고 그 돈 일부로 땅을 샀어요. 그런데 땅 값이 갑자기 올랐어요. 그렇게 되니까 목사가 땅 값 오른 것만큼은 자기가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이미 교회 헌금한 것은 내 놓을 수 없다고 하니까 목사가 소송을 제기했어요. 만약 그 땅 값이 내렸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목사가 내린 만큼 채워 넣겠습니까?
여기 계신 목사님들은 투자한 돈도 없고, 내 놓을 돈도 없고 마음 편하지요?
그래서 제가 그런 사람을 목사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교회라고 생각한 교인들이 문제라고 했어요.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해서, 제가 “일단 노회 탈퇴하고, 복음 아는 목사 부르세요.” 하니까 그것도 못해요. 노회 탈퇴하면 이단 되는 줄 알고 겁이 나서. 그래서 그들이 내 놓은 의견은 같은 교단에 소속된 복음 아는 목사 왔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것이 고린도전서 12, 13장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어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교회가 있고 거기에서 생활비가 나온다는 것을 현실로 생각해요. 그것은 육인데, 이것을 현실의 전부로 생각해요. 영은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이 영이에요. 주님만 사모하는데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면 그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나가면 그것이 영인데, 영을 현실로 안 보고 예초부터 ‘내 교회다. 돈 내 놔라.’ 이것만 현실로 본 거예요.
어떤 분은 ‘목사가 그럴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해요. 목사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려고 목사 된 거예요. 예수님 사모해서 목사 된 것이 아니고, 목사 직분으로 밥 먹고 살려고 목사 된 거예요.
그런 인간들이 고린도전서 12장을 가르쳤다면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여러분, 은사 받았는데 왜 안 섬깁니까? 시간 받치고 돈 받치고 다 드리세요.” 분명히 이런 식으로 설교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은사 받은 사람이고, 은사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다.’ ‘가르치는 사람을 배나 존경하라고 했으니 목사인 나를 섬기세요.’ 이런 설교 했을 것입니다.
제가 좀 전에 말씀 드렸지요. ‘어떤 사람을 볼 때 그냥 보지 말고 영적으로 보라’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 그 남편이 예수님을 머리로 생각하는 남편만 복종하라.’고
제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부담을 주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차별화가 여러분에게 더 부담을 줍니다. 현실적인 차별화. 왜 나는 이 모양, 이 골이냐 하는 현실적 차별화를 느끼는 것이 주님의 사랑을 감소시키고, 사랑을 무색케 하고, 주님은 자기 피까지 내 놓았는데 우리는 그 피 받고는 ‘흥 이까짓 피’ 하면서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하고 나옵니다.
주님은 자기 생명을 버렸는데 그 생명은 뒷전이고 자기 인생 책임지라고 대드는 식이란 말이지요.
대구에서 교회사 강의 하면서 ‘다빈치 코드’ 이야기했어요.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는데 그 딸 이름이 ‘사라’입니다. 이 딸을 12살 될 때까지 이집트에서 키우다가 그 후 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이사해서 어떤 왕족과 결혼해서 프랑크 왕족의 가문으로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졌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어디 있습니까? ‘사라’라는 딸에게 이어졌고, 프랑크 왕족으로 계속 이어지겠지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은 쉬워요. 이 왕조를 믿으면 예수님 피를 믿는 것이 돼요. 그들에게 예수님의 피가 이어지고 있으니까.
이 엄청난 비밀이 너무 중요하니까 교회가 핍박해서 소멸되었는데, 최고의 비밀 조직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사실을 알고 ‘모나리자’를 그렸는데, 이 여자가 웃고 있지요. 그 웃음의 의미가 ‘나는 비밀을 다 알고 있지. 교회는 가짜고 예수님은 결혼에서 딸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이른 차원에서 웃고 있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12제자의 ‘최후의 만찬?그림에서 예수님의 옆에 있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 내용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가 하면, 이런 이야기는 영적이 아니지요. 육적이잖아요. 인간들에게는 육만이 현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이 아시고 십자가에서 죽는 현실, 육적인 현실 속에 복음을 감춰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의 육신이 죽은 그 자체가 영적인 것입니다. 해탈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죽음 자체에 비밀이 있어요. 그분이 죽으신 그 효능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저의 책 [히브리서의 혼2]가 곧 출판되는데, 책 제목을 출판사에서는 ‘건방진 인간’으로 정하자고 했어요. 이것이 설교 제목 가운데 있는데, 저는 그 제목 말고 ‘보이지 않는 용서’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지요.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용서합니다.
그런데 세상 교회들은 자꾸 보이는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보이는 축복은 육적이에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밖에 안 됩니다. 이것은 악마가 준 것이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닌데,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용서하지 보이는 축복이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용서에 기대를 걸고 가는 것이 신앙이 아닌가 해서 저는 ‘보이지 않는 용서’라는 제목을 원했는데 채택이 될지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건방진 인간’이란 제목은 너무 건방져 보이잖아요?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모든 각양 좋은 물품들은 큰 성 바벨론에 다 모입니다. 그런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각양 좋은 것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왕따 당하지요. 그런데21장에 보면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확실하거든 영적인 세계가 분명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이 영적 세계는 세상이 주는 차별화를 초월해야 합니다. ‘너는 잘났는데 나는 이게 뭐냐?’ 이러지 말고, 이런 의식 없이 예수님이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그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분을 보는 것처럼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입니다.
우리나라 유행가 가사의 80%가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TV 드라마도 80% 이상이 사랑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즘은 ‘출생에 비밀’이 왜 그리 많은지? 이런 것이 과연 사랑이냐? 이것은 다 육적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이것이 사랑입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 이것이 누구의 속성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아버지께 가졌던 그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온유했고,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했고, 질투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고향이 하늘나라 인데. 세상 것이 뭐가 부럽다고 ‘아버지 세상 것 왜 안 주십니까?’ 그런 질투심을 왜 가지겠습니까?
예수님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예수님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예수님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
방금 제가 ‘사랑’의 자리에 전부다 ‘예수님’을 넣었지요? 왜냐 하면, 사랑이란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다가 예수님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10절의 “온전한 것”이 뭡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강의의 핵심이 뭔가 물으신다면 ‘예수님을 사모하세요. 이게 또 하나의 확실한 현실입니다.’ 뭘 보고 믿을까요? ‘십자가에 누가 죽으셨는가를 보고 믿으세요. 어떤 사나이가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피 흘리신 예수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자신을 작게 생각하고, 우리 처지를 작게 생각하고, 그런 처지 가운데 차별 없이 값없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은혜가 크게 보이는 그런 생활로 일관할 수 있는 남은 생애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http:/crossvillag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