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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 터키 2부 -ㅡ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드로아
환난 중에 승리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김규욱
1. 서언 --왜 하나님은 환난을 허락하시는가?
필자는 바울의 선교 여정을 따라 가면서 묻고 또 물었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것도 당신의 뜻을 가장 충직하게 수행하는 사도 바울에게 엄청난 환난과 시련을 허락하시는가?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바울의 선교 여정의 구체적인 열매가 된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탐사하면서 더욱 뚜렷해 졌다.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에 대한 서술과 약속은 하나 같이 “환난 속에서 받은 하나님의 약속들” 이었다. 우리 연약한 인생들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인가? 안락하고 평안한 환경, 문제없는 삶의 흐름, 고통과 고난이 면제된 삶, 수치와 비천함이 없는 명예로운 삶, 이런 유의 것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하나님없이 얻고자 하는 우상들이다. 한 마디로 자기영광(self-glorification)의 추구이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하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이라고 찬양했다. 우리 인생의 허망한 우상숭배 모습이다.
그렇다. 이것이 에누리 없이 드러나는 인생의 본래 모습이다. 아담 타락이후 인생은 예레미아 선지자가 절규하듯 밝히는 것처럼 인간 안에 내장된 죄의 문제는 비누로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다(렘 2:22). 구스인의 피부에 죄악이 붙박혀 있듯이(렘 13: 23), 금강석 끝 철필로 마음판에 새겨져 있어서(렘 17: 1) 도저히 스스로는 지울 수 없다. 즉 인간은 자기 죄악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이런 인생은 그냥 두면 스스로 멸망의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함몰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신실하신 맹세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유일한 의지처요 요새요 반석임을 광야 사십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배워 가게 하도록 작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난을 허락 하신 것이다. 환난 중에 인내의 열매가 생겨나고 그 안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신앙의 인간으로 탈바꿈 되는 연단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이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 즉 신앙인이 통과해가는 불풀무요 용광로인 것이다. 세상에 용광로를 통과하지 않고 찬란한 보석으로 탄생되는 법은 없다. 이 길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롬 5:1-4).
바울은 이 소망이 결코 부끄럽게 되지 않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가운데 부은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롬 5:5). 하나님이 인생을 향한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자신의 무궁한 영광, 즉 능력과 신실하신 사랑의 계시이며, 그것이 인간 편에서는 그를 알아가는 교육이 된다. 이런 하나님을 배워 가는 교육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인간으로 거듭난다.
탐사팀은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를 돌아보면서 환난 중에 그들을 두시되 불변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냄은 인간의 욕망적 소원과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늘 따라가는 땅의 생각을 훨씬 넘어 전혀 새로운 하늘의 길을 허락하신다(사 55:8-9).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요,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롬 11::33-36)!
2. 환난 중에도 승리를 약속받은 교회
1) 라오디게아 교회와 히에라볼리
탐사팀은 6일째(토)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날부터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탐사로 발걸음이 옮겨진 것이다. 새벽이면 모스크 사원에서 주문처럼 들리는 기도소리가 확성기로 들여와 이 곳이 이슬람 세계임을 실감했다. 이날 아침 탐사팀은 일곱 교회 가운데 첫 번째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터를 탐사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의 미지근함으로 인해 책망을 받았으며 이기는 자에게는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 같이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교회이다. 이곳은 완전히 폐허가 된 현장이었습니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자리였다. 그토록 로마의 무서운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갔었던 교회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의 엄정함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세우기도 하시고 무너지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적 심판”, 세계 역사는 이런 하나님의 엄정한 뜻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 누구가 막을 수 있는가! 역사의 물줄기를 한 손에 거머쥐고 도도하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작정하신 대로 촛대를 옮겨 버리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면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고 만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과 얼굴 가운데 “지금” 우리의 신앙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의 능력에 모든 것이 붙들려 있음을 역설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자리였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탐사한후 우리는 파묵깔레 라는 도시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성경의 이름으로는 히에라볼리이다. (이는 라오디게아 지역과 더불어 골로새 옆의 도시이다. 골로새서 4:13에 나온다.) 이곳은 온천으로 유명하며, 이곳에서 우리는 거대한 로마시대의 돌로 만들어진 원형 극장을 보았다. 이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2000년 전 당대 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규모의 극장이 있음은 가히 얼마나 로마 제국의 위세가 어떠한지를 짐작하게 하였다. 원형 극장에서는 연설, 연극, 그리고 음악회들의 문화 행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주변으로 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온천물을 각 곳으로 흘려보내는 수로가 놓여져 있었다.
2) 빌라델비아, 사데, 그리고 에베소 교회
우리는 7일째 되는 날 5시에 기상하여 새벽 6시에 주일 예배를 드린 후 아침 식사를 하고 계속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지역을 탐사했다. 빌라델피아 교회, 사데 교회,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일곱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 지역이 가장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원형 극장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셀수스 도서관의 웅장한 기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돌아보는데 거의 한 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에베소 도시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한다. 이곳이 바울에 의해 세워진 그 유명한 에베소 교회가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회상되는 에베소서는 참으로 새로운 의미를 전해주고 있었다. 거대한 원형 극장과 신전들로 가득 찼던 에베소 도시는 으리으리하며 장관이었을 것이다. 커다란 시장터와 욕망의 수렁인 유곽들, 수많은 도서가 비치된 셀수스 도서관의 찬란한 문화, 그런 웅장한 인간의 세속도시 가운데 바울은 외롭게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에 귀가 열린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워진 미미한 존재로 보이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 바울은 옥중에서 다시 그들에게 “영원한 교회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무너져도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구속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함을 에베소서는 증거하고 있다. 만물위에 존재하는 영원하고 신령한 교회, 바울의 옥중 증거는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에베소 교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 복음은 “성경의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그대로 변질없이 증거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순수한 복음을 듣고 있는 복을 받은 것이다.
이점에서 진리 기록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했다. 말과 글, 둘 다 중요한 진리 증거의 수단이되 “글을 통한 진리의 확정성과 영구성”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3) 서머나 , 두아디라, 그리고 버가모 교회
8일째 (월)
탐사팀은 시차 적응이 어느 정도 되면서 터키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서머나 교회로부터 여행은 계속되었다. 서머나 지역은 황제 숭배사상이 태동된 도시이며 그래서 박해가 심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에 초대 속사도중 한 사람인 폴리갑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프랑스 카톨릭 교회가 세운 기념 성당이었다. 제법 큰 성당이었고 안은 성상과 벽화들로 가득차 있었다. 의식과 이방종교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장소였다. 그들은 성경의 진리보다 전통이 중요하며 인간을 우상화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폴리갑이라는 이름을 팔아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기념 교회는 그런 방식이었다.
실상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참으로 진리의 길을 걸어 갔었고 마침내 화형으로 순교를 당한 믿음의 선진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예수를 저주하면 살려 준다고 하는 로마의 칼날 앞에서 그는 예수를 배반 할 수 없다고 하며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갔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 폴리갑의 위대성을 노래하거나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붙들어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아디라 교회와 버가모 교회 지역으로 탐사를 마치고 오는 길에 재래시장을 잠시 들러 보았다. 이곳도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시장의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며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삶의 고단함이 배여 있었다. 버스를 타고 아이발릭이라는 해변 도시의 숙소로 들어 왔다.
3. 로마의 존재 이유
필자는 일곱 교회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왜 하나님은 당대 교회를 강대한 로마제국의 치하에 두었는가 라는 질문에 이르렀다. 가는 곳 마다 우리는 당대 로마가 얼마나 강대한 제국이었느가를 유적들을 통해 확인 할수 있었다. 로마, 그것의 존재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이 번 탐사에서 반드시 해명해야 하는 중요한 숙제였다.
로마!! 그것은 참으로 거대한 제국이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로마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해답하기위해 다니엘서를 거론해야 한다. 다니엘에게 보여준 거대한 신상의 다리와 발에 해당하는 나라인 로마, 즉 예수님 오시기전 바벨론, 파사, 헬라로 이어지면서 최종적으로 철과 흙으로 만들어진 신상의 발과 다리는 세계역사 이래 가장 강대한 제국 로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뜨인 돌”이신 그리스도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너지고야 만다고 한 예언대로 로마는 역사 가운데 사라졌고, 지금 바윗돌과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유적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나라 외에는 이 세상에 어떤 강대한 제국도 영구하지 않음을 나뒹굴어 져 있는 신전의 바윗 덩어리들은 다음과 같이 웅변으로 말하고 있는 듯 하였다. “이 땅에 보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고야 만다는 것을 기억하라....”
로마, 그것은 오늘날 많은 연구가로 부터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 로마가 강성한 제국을 이룬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니 나나미에 의하면 로마는 좋은 통치의 원리를 “제도화”에 성공한 케이스라는 것이다. 로마의 법과 제도적 통치 원리는 모든 서구 제도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로마는 당대 헬라의 철학과 문화를 받아들임으로 “문화적 통합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은 모두 현상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강력한 로마제국의 존재이유를 세속적 관점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엉뚱한 곳에서 진정으로 찾을 수 있다. 우선 로마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정치권력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게도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통합력을 이루고 있어서 지중해 연안 일대를 지배했던 제국, 그 나라는 예수님 당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권력의 도구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작정대로 구속의 경륜을 이루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바울의 전도 여행을 가능하게 한 도로와 뱃길을 준비시켜 놓았다. 이곳 소아시아 터키 땅 바울의 여정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데 대개 버스로 달려 5-6시간 걸리는 곳이다. 바울은 이 넓은 지역들을 걸어 다니며 강도의 위협을 받으며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대 로마가 만들어 놓은 군사적 도로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마침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은 로마병정에 의해 묶여 뱃길로 로마에 까지 갈수 있게 된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은 로마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정한 뜻을 이루셨다.
요컨대, 로마는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위한 역사의 배경이자 도구였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 전파를 위한 역사의 환경이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 선포의 도구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로마의 진정한 존재 이유인 것이다.
4. 바울 선교의 전환점--드로아
드로아 탐사
그리스로 오기 전날 탐방 팀은 아이발릭이라는 도시에서 떠나 터키의 마지막 여행지인 드로아로 갔다. 드로아는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에 있어서 매우 의미심장한 곳이다. 뿐 만 아니라 이곳 드로아는 서구 정신사에서 매우 중요한 호머의 일리아드라는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호머의 일리아드는 드로아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기록되고 있다. (성경의 지명인 드로아는 일반적으로 트로이로 불리운다.)
드로아 지역은 워낙 오래된 지역이어서 유적의 흔적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기원적 13세기경이니까 지금부터 약 3300년 전의 도시이었다. 그리스군과 트로이군과의 전쟁에서 그리스 군이 만든 트로이 목마를 사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곳이다. 목마는 단지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유명한 아킬레스 장군도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드로아가 바울의 선교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선교의 방향을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주관한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 잘 아는 대로 2차 전도여행 중에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은 원래 아시아 방향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시고 헬라의 마게도니아로 방향을 틀어 놓으신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진행과 더불어 전개되어온 기독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만약 바울이 원래 소원대로 아시아 쪽으로 선교의 방향을 잡았다면 서양의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담겨 있다.
선교 지역까지도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통해 선교를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상적으로는 바울이라는 인간이 복음을 전하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작정하신 뜻대로 복음이 전파됨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시아 방향이 아니라 초대교회에 헬라를 통한 구라파 방향으로 복음이 전파되도록 작정해 놓으시고 그렇게 바울을 절대적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탐사 팀은 드로아를 거쳐 그리스로 가기위해 다시 이스탄불로 들어 왔다. 지난 9일 동안 탐사팀은 남한의 7배가 되는 터키 지역을 한바퀴(동쪽은 제외하고) 돌아 온 것이다.
5. 오늘, 하나님의 통치 안에...
초대 교회 일곱 교회의 탐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감사와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훼손되고 변질된 복음과 교회, 그러나 2000년 이라는 시간을 넘어 우리가 하나님 중심의 영원한 복음을 이 시대에 다시 들을 수 있음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평안한 가운데 소중한 복음을 들고 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대 교회 믿음의 선진들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켜 내었고 그 속에서 복음의 소중함을 확신했었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했다. 초대 일곱 교회 교회 탐사는 우리 모두들에게 충격적이고 새로운 도전이었다. 오늘 우리의 평안함이 고난의 길을 걸어갔던 믿음의 선진들의 수고와 고투를 생각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물질적 부요와 육신적 평안이 결코 좋은 것 만은 아님을 너무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진리가 없는 부요와 평안은 부패와 안주와 정신적 쇠퇴의 길을 의미할 뿐이다.
전능자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시되 광야 같은 삶의 현장에서 자기 백성들을 단련시키신다. 우상을 섬기는데 익숙해 있는 옛 사람의 소욕이 남아 있기에 하나님은 부단히 용광로 같은 광야에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인생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심 즉 그가 우리의 참 선지자요, 왕이요,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기에 제사직을 수행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 고난과 박해 속에서 소아시아 전역에 바울이 전했던 이 복음은 마침내 세월이 흐르면서 아시아 일곱 교회로 대변되는 아름다운 열매로 익어갔었다. 하나님은 초대 교회를 그렇게 세우시고 지키셨다. 그 복음의 물결이 약속대로 땅 끝을 향해 가는 중이다. 유럽과 미국을 지나 지금 아시아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그 안에 우리가 서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작정대로 역사를 주재하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를 그 역사의 무대로 부르시고 복된 교회의 멤버로 세워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 안에 서있는 신령한 교회, 그것이 하나님의 우주와 세계 통치의 핵심이다. 로마의 지배아래 있어 환난을 통과했으나 로마 제국을 손안에 넣고 주무르고 계시던 하나님은 그의 우주적 통치능력을 통해 일곱 교회를 보호하시고 다스리셨다. 지금도 그분은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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