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미국의 독립선언문
미국독립혁명사론
독립혁명은 미국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과 가장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던 분야의 하나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기원과 성격을 둘러싸고 무수한 연구들을 통하여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어 왔다.
19세기에는 대체로 독립혁명을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찬양하는 아마추어 사가들에 의한 휘그적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들을 휘그학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휘그학파를 대표하는 George Bancroft에게 독립혁명은 본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식민지인들의 자유해방을 위한 싸움이었다. 다.
20세기 아메리카 실증사학의 독립혁명 연구는 제국학파와 진보학파의 두 견해로 양별할 수 있다.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그들은 휘그사관의 편협한 애국주의를 배격하면서 독립혁명의 과학적 연구를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실증적인 사료분석에 바탕을 둔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의도하였던 그들 가운데 먼저 제국학파는 영국 식민지정책의 객관적 분석에 주력한 반면 진보학파는 식민지내에 있어서의 사회경제적 계급대립의 구체적인 파악에 주력하였다. 제국학파는 19세기의 보수적 친영주의자의 계승자들로서 제국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국의 식민지정책은 결속과 번영을 위해 타당하고 효율적이었으며 공정하고 관대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독립혁명은 인간에게는 식민지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사회적 정치적 성향들이 있으며 이것이 본토와 다른 의회와 결합되므로써 발발했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한편 진보학파는 Becker, Beard, Arthur M.Schlesinger 등인데 이들은 제국학파와는 대조적으로 영미간의 헌정적 투쟁 대신 식민지 내부에 있어서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독립혁명을 식민지인들간의 계급투쟁이라 규정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독립혁명은 중,하층 민중이 권력을 탈취하고 사회를 개조하려 하였던 민주주의적 시민혁명이었다.
제국학파와 진보학파는 결정론적 단순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특히 진보학파의 비판하는 학파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전반에 독립혁명의 연구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신휘그-합의학파이다. 신휘그-합의학파에 의하면 미국사회는 이미 독립혁명 이전부터 비교적 등질적인 민주사회였다. 그래서 독립혁명은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를 위한 혁명운동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려는 정치적 헌정운동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독립혁명 연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독립혁명의 기원과 성격을 다각적으로 심층 분석하여 신휘그 내지 합의학파의 일면적 피상적 편파성을 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이 새로운 움직임은 신휘그 내지 합의학파로부터 파생하였다고 할 수 있는 사상학파와 진보학파의 전통을 강하게 이어 받은 신진보 혹은 사회경제학파라는 대조적인 두 학파의 양립 속에서 전개되었다.
사상학파는 하버드대학의 Bernard Baily과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하버드학파라고도 불리우는데 사상학파에 의하면 독립혁명 사상을 형성하였던 18세기 아메리카 정치문화의 원류는 종전의 사가들이 주장한 John Locke의 사회계약설적 국가이론이 아니라 베이런의 반정부파,포포크의 신해링턴주의자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된 18세기 영국의 반정부 야당세력의 고전적 공화주의 내지 공화사상이었다.
위스콘신 출신이 다수를 점했기 때문에 위스콘신학파라고 불리운 신진보 또는 신사회경제학파의 사가들에 의하면 식민지는 다양한 경제적 이익들과 사상적 신념들과 심리적 동기들을 포용하는 복합적 혼성체였다. 따라서 독립혁명은 혼성적 구성물의 잡다한 성분들이 다원적으로 상충하면서 낳은 긴장과 혼란속에서 전개된 정치,경제 그리고 사회 사상의 복합적 변화의 과정이었다. 사상학파가 사상이야말로 사회변동의 기본 동인이라 주장하면서 상층 엘리트들에 관심을 집중시킨 반면 신사회경제학파는 사상은 욕구의 합리화수단에 불과하다고 단정하면서 하층민의 행동과 사고에 촛점을 두었다.
사상학파와 신사회경제학파의 상극이 초래한 독립혁명사학의 곤경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가 1970년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18세기 영국사 분석에 사용되어 왔던 궁정파와 지방파의 개념을 독립혁명 시기 미국사 연구에 적용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포콕크등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다. 궁정파와 지방파의 개념을 미국사에 적용하는 연구자들을 1780년대의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의 대립으로 연결시켰다. 1787년의 헌법제정을 궁정파 세력의승리,그리고1790년대의 연방당(FederalistParty)과 민주공화당(Demographic-Republican Party)의 대립을 궁정파 세력에 대한 지방파 세력의 반격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미국독립이 확정된 1780년대와 헌법제정 후의 1790년대에 시도되고 있다. 독립혁명의 발발은 궁정파와 지방파 뿐만 아니라 여타 온갖 이익들과 이데올로기들의 상충과장에서 일어났던 것이므로 궁정파-지방파의 도식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데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혁명은 대내적으로 아메리카인들에게 정치적 독립을 가져다 주었지만,대내적으로도 아메리카 사회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처음에 영국에 대한 반항은 상인,대농장주 같은 상류 계급이 주도하였으나,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민,수공업 계급과 같은 대중의 역할이 커졌다. 대중은 전쟁에서 흘린 댓가를 요구하였으므로,사회는 평등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메리카 혁명은 대외적으로 독립을 얻으려는 독립 혁명과 대내적으로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국내 혁명이라는 2개의 혁명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http://rose0.kyungpook.ac.kr/~z971554/archiv/modern/intro.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