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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본, 제자의 길
마태복음 10:24-39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순교자주일이다.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 복음은 시대에 따라서 크고 작은 박해를 겪었다. 개신교회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중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다. 100년 먼저 들어온 가톨릭교회는 당시 조선왕조로부터 상상을 초월한 박해를 당하였다.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려다 겪은 수난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 여름 한국을 방문하여 8월 16일에 광화문 4거리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諡福) 미사’를 집전한다. 시복은 거룩한 삶을 살거나, 특히 순교자에 대해 교회가 공경할 분(복자)으로 교황이 선언하는 일을 말한다.
어제 오후에 하우현 성당을 시작으로 청계산을 등산하였다. 무더위에 등산이 귀찮게 느껴졌지만, 마침 순교자주일을 맞아 순교성지를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우현 성당은 색동교회에서 겨우 10여 분 거리에 있는 원터마을에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 지금은 길 가에 가깝지만 당시만 해도 워낙 깊은 숲속이어서, 일찍이 박해를 피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숨어들었던 곳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작다는 본당 앞에 ‘만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말미에 이렇게 적혀있다.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를 흘리지는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지금 우리 자신은 때를 잘 만나 순교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제 명대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님을 잘 믿고, 그 믿음대로 증언하며 살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영어로 마터(Martyr)는 순교자 또는 증인란 뜻이다. 헬라어 ‘마툴리아’에서 온 말인데 원래는 ‘증인’이란 의미였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몽마르뜨는 마르뜨의 산, 즉 순교자의 언덕이란 뜻이다. 초대 교회 교부 클레멘트는 “피 흘리기까지 증거 하는 사람이 순교자다. 순교자만이 증인이다”라고 하였다. 증인은 자기가 증거 하는 사람을 사랑하되, 어떠한 손해와 희생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는 피 흘림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성령강림과 함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
본문은 ‘제자들의 사명에 대한 말씀’(10장)을 묶은 것이다. 이에 앞서서 예수님의 산상설교(5-7장)와 메시아로서 행함(8-9장)이 기록되었다. 먼저 스승의 본을 보여주고 나서 제자의 길을 안내하는 방식이다. 12명의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선발되어, 직접 훈련을 받는 중이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모든 면에서 본보기가 된다. 그리고 모름지기 제자라면 스승의 말과 행동을 따라야 한다. 흔히 모범교사와 반면교사란 말이 있다. 모범교사는 그대로 따르면 되는 본보기이나, 반면교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부정적 모델이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기는 따라 배워야할 본보기와 모범교사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될 반면교사와 반보기는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님의 12제자를 대상으로 적성검사를 하였다고 한다. 성경에 나타난 기록에 따라 누가 제자로서 실력, 성품, 재능 등 가장 기본적인 능력을 지녔는가를 테스트 해 본 것이다. 단연 한 사람이 돋보였는데, 그는 가룟 유다였다고 한다. 그는 남들보다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고도, 오히려 자기 스승을 배신한 대표적인 반면교사가 되었다. 그의 약점은 스승의 본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교회사에서 제자들 중에 자타가 인정하는 가장 위대한 모범교사는 사도 바울이다. 그는 오늘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대한 사명과 특별한 권위로 받아들였다. 그런 특권의식 때문에 스승의 고난을 나누어 받는 일 역시 소중한 특권으로 여겼다. 바울의 태도는 진정한 제자의 길이었다.
2)
예수님은 이러한 특권의 길을 가는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신다.
첫째,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24)다고 하신다. 어떤 경우든 제자들은 스승이 겪을 고통보다 더 가혹한 시련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겪은 수난은 너무나 비참하고, 참혹하여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예수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은 십자가의 고통을 설명하는 일인데, 영화든 소설이든 공감할 만큼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제자인들 스승의 십자가를 비슷하게라도 따를 것인가?
첫 순교자인 스데반은 그 수난의 장면을 충실히 따르려고 하였다. 돌무더기를 맞은 스데반은 죽는 순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하였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라고 하였다. 죽음까지도 스승을 본받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스승의 본을 따른 스데반은 모든 순교자의 모범이 되었다.
둘째, 또한 예수님은 두려움 때문에 복음 전하는 일을 피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26).
한 마디로 ‘진리가 승리한다’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또 장차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신앙 때문에 수난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거나, 심지어 순교를 당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모든 진리가 낱낱이 밝혀질 날이 올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되, 아무 두려움 없이 담대히 전하라고 하신다.
셋째, 무엇보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세 번이나 반복하여 두려워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네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다 헤아리시는 분이시니 더욱 당당하라고 하신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28).
특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32).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신실한지,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번에 독일에서 2년 전에 색동교회를 방문했던 뢰트거 목사님을 만났다. 복흠교회 예배를 마치자마자 여러 사람이 뢰트거 목사님 어머니가 나를 초대한다고 전해주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길 건너편에 있는 어머니 댁을 찾아뵈었다. 거실에 탁자에는 8개의 십자가가 놓여있었다. 내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 십자가들을 모두 내게 주려고 나를 부른 것이다.
사연이 있었다. 십자가들은 10년 전에 돌아가신 남편 호르스트 뢰트거 씨가 평생 간직하던 십자가였다. 그는 젊어서 다른 독일 청년들처럼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으로 참전하였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전쟁에 임하면서 청년 호르스트는 평소에 매던 십자가를 계속 목에 매고 다녔다고 한다. 하나님이 전쟁을 주관하시니, 자신의 목숨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가 속한 독일군대는 쏘련을 침공하다가 패하여 많은 군인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포로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 그 중에서도 시베리아로 끌려가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이제 포로를 심사하여 분류하는 시간이 되었다. 쏘련군 장교가 호르스트의 목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그를 시베리아로 이송될 포로에서 제외시켰다.
호르스트 뢰트거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십자가가 자기를 살려 주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평생 십자가를 사랑하고, 간직하였다. 마틴의 어머니는, 내 남편은 십자가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건졌다는 기막힌 사실을 늘 증언하며, 평생 본이 될 만큼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독일군 포로 호르스트 뢰트거는 비록 파리 목숨 같은 신분이었지만 적군 앞에 서면서 자기의 십자가를 감추거나, 버리지 않았다. 당당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드러냈고,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러한 그의 신앙 증거가 쏘련군 앞에서도 통했다고 그는 분명히 믿었다. 그래서 마침내 목숨을 건졌다.
그 가족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세세하게 적어서 십자가 전시장에 진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남편의 모범, 아버지의 본보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원한다고 하는 말을 덧붙였다.
넷째, 예수님은 아주 과격한 표현을 통해 평화에 대한 소중함을 각성시키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
여기에서 검은 박해를 뜻하기도 하고, 분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숱한 분열과 갈등의 힘겨운 과정이 선행될 것이다. 집안 식구들끼리도 원수가 되는 험한 꼴을 보게 될지 모른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6).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거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제간에도 정치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있다. 부모 자식 간에도, 편이 갈리는 입장 차이가 있다. 그러니 당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종교가 다르고, 신앙이 다르며, 삶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다를 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심각한 대립이 있을까? 복음 때문에 일시적인 불화가 일어날 수 있다.
예수님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안일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다. 검을 준비할 만큼 긴장감을 갖고 노력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니 6.25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도록 이 땅에는 여전히 갈등과 대립이 끊임이 없다. 서로 전쟁 훈련이 계속되고, 전쟁의 위협은 갈수록 심각하다. 교회는 평화를 위해 수고해야한다.
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스승의 본을 따르라. 제자라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라. 우리가 붙잡아야 할 유일한 진리와 생명은 오직 예수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8).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고백할 때 ‘물고기’라는 암호를 사용하였다. 박해와 감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서로를 확인할 암호가 바로 물고기였다. 물고기를 말하면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헬라어로 물고기 ‘익투스’는 ‘이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조테르’란 다섯 단어의 이니셜 모음이다. 풀이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은 따르는 대표적인 제자들을 작은 물고기, ‘피스키쿨리’ 라고 불렀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로 여겼다. 지하묘지에 물고기 형상을 새긴 까닭은 고난과 박해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제자 됨을 부인하지 않으려는 다짐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르면서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순교자들은, 그리고 그들에게 신앙의 본보기를 배운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히 13:8)신 분임을 잘 알고 있다.
최근 어떤 공직후보자가 ‘하나님의 뜻’을 남발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크게 매도당하였다. 평소 하나님의 뜻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신앙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의 편에서 이해하며, 인생의 안전판으로만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얼마나 가볍고, 얄팍한가?
믿음의 선조들은 자신의 거룩한 믿음을 지키면서 이렇게 다짐한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2-13).
하나님의 뜻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믿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고난과 순교에 대한 무게감 없이 감히 하나님의 뜻을 말하기 부담스럽다. 예수님은 네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라고, 그 목숨은 내가 책임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결코 권력 앞에서 신앙을 굴복하거나, 왜곡하거나, 구걸하지 말고 당당하라고 하시지 않던가?
과연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는 제자인가? 그리스도의 제자 된 나는 변치 않는 ‘믿음의 푯대’(빌 3:14)를 지니고 사는가? 내 실패, 배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믿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가? 그 믿음에 흔들림이 없는가?
지금 우리 시대는 목숨을 걸고 순교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날마다 우리가 선택해야할 소소한 도전은 계속된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본을 따르고, 내 제자 됨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일은 순전히 내 몫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스승의 본을 사랑하는 제자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