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
최용현(수필가)
홍콩무협영화의 주인공을 쭉 거슬러 올라가 보면 90년대 이연걸, 80년대 성룡, 70년대 이소룡, 60년대는 왕우라는 계보가 나온다. 이연걸 성룡 이소룡이 맨주먹으로 천하를 호령한 격투기의 고수라면 왕우는 칼 한 자루로 강호를 평정한 검객이다.
왕우(王羽), 오십이 넘은 사람이라면 아마 호리호리한 체격에 갸름하고 곱상하게 생긴 이 배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원래 상하이대학의 수구선수였다. 수구를 하다가 상대선수와 싸워 징계를 받고 쉬고 있던 중, 쇼브라더스사의 전속배우 모집광고를 보고 응시를 했다. 3천여 명의 지원자 중에서 왕우와, 후일 그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한 명의 무협스타 로례(羅烈)가 선발되었다. 장철 감독은 그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홍콩무협영화에 빠져 왕우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게 되었다. 그가 나오는 영화가 오면 무조건 보러 갔다. 중학교 때는 하굣길에 읍내 극장에서, 고등학교 때는 부산 변두리의 허름한 극장에서 혼자 숨죽이며 보았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중학교 2학년 때 보았는데, 지금까지 본 홍콩무협영화들 중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앉은 자리에서 내리 두 번 보고 나오느라 컴컴한 밤길에 이십 리나 되는 집까지 혼자 자전거를 타고 오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외팔이’ 3부작이 DVD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구입신청을 했다. 택배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중학교 때 본 영화 장면들의 편린(片鱗)을 떠올리며 실로 오랜만에 왕우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가던 때의 그 짜릿하고 설레는 흥분을 맛보았다. 택배가 오자마자 꺼내 컴퓨터에 넣었다.
무림고수 제여봉(전풍 扮)은 악당고수 장비신마의 하수인이 숨겨들고 온 마취제에 취해 정신을 잃는다. 이때 제여봉의 하인 방성이 나서서 용감하게 악당들을 물리치지만 자신은 치명상을 입는다.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 방강을 제자로 받아줄 것을 제여봉에게 부탁하고 숨을 거둔다.
세월이 흘러 방강(왕우 扮)은 훤칠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제여봉의 외동딸로 무예를 연마하는 제패는 방강을 좋아하면서도 늘 투정을 부린다. 눈이 오는 숲에서 방강과 맨손으로 결투를 하다 넘어진 제패는 갑자기 칼을 뽑아 휘두르고,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던 방강의 오른팔이 잘려나가 하얀 눈 위에 떨어진다.
방강은 피범벅이 된 어깨를 감싸 쥐고 눈 내리는 숲 속을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그리고 어느 다리 위에서 정신을 잃고 아래로 거꾸러진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제여봉이 딸 제패와 두 제자를 대동하고 그를 찾아 나서지만 방강의 행방은 알 길이 없고….
방강은 산 속에서 혼자 사는 낭자 소만(초교 扮)에 의해 발견되어 그녀의 헌신적인 간호로 건강을 회복한다. 오른팔이 없는 방강이 삶의 의욕을 잃고 괴로워하자, 소만은 무예고수였던 부친이 남긴 무술도법을 건네준다. 방강은 장검(長劍)이 왼손도법에 맞지 않자 부친 방성의 유품인 부러진 칼로 도법을 연마한다. 그리고 마침내 고수의 경지에 오른다.
한편, 오래 전에 제여봉에게 패해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칼을 갈던 장비신마는 새로운 금도쇄 도법을 개발하여 제여봉 사문(師門)을 일망타진하려 하고 있었다. 이는 왼손에 잡은 장검으로 상대의 칼을 막고 오른손에 잡은 단검으로 상대의 복부를 찌르는 도법인데, 이미 제여봉의 제자 몇 명이 이 검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목숨을 잃었다.
제여봉의 55세 생일을 맞아 스무 명 남짓한 그의 제자들이 모여들자, 장비신마와 그의 하수인들이 쳐들어왔다. 제여봉의 제자들이 나서지만 모두 그 도법에 목숨을 잃게 되고 수장(首將)들끼리 맞붙은 대결에서 제여봉마저 장비신마에게 패해 부상을 입고 쓰러져, 사문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를 맞는다.
이때, 방강은 장비신마에게 당하여 목숨을 잃게 된 사형에게서 금도쇄 도법에 대해서 듣고 사부를 구하러 찾아온다. 그리고 장비신마와 처절한 사투를 벌인 끝에 승리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고 사부의 은혜에 보답한 뒤 소만과 함께 강호를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주인공이 오른팔을 잃은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와신상담 끝에 무림고수로 성장하여 의를 지키고 악을 응징한다는 평범한 줄거리지만,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는 탄탄한 짜임새, 서정적인 화폭을 연상시키는 돋보이는 영상미, 그리고 무예고수들의 현란한 검술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영화는 홍콩영화사상 초유의 빅 히트작으로 쇼브라더스사와 장철 감독에게 100만 달러이상을 벌어다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아울러 왕우를 1960년대 최고의 무협스타로 만들어주었고, 수많은 컬트(cult)팬을 낳으며 아시아 전역에 검술영화 붐을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나는 왕우가 나오는 영화를 빠짐없이 다 보았다. ‘돌아온 외팔이’ ‘대협객’ ‘심야의 결투’ ‘신도(神刀)’ ‘용호의 결투’ ‘단장의 검’ ‘흑백도’ ‘외팔이와 맹협’…. 그 시절이 없었다면 감히 스스로 영화광이라고 자처할 수도 없었거니와, 지금 이런 영화에세이를 쓸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장철 감독의 연출작 중 아주 드물게도 주인공이 죽지 않는다. 어쨌거나, 무림 최고의 검객이 강호를 떠나 농사만 짓고 살도록 가만히 놔둘 리가 있겠는가. 결국 2년 후에 다시 방강이 여덟 명의 도왕(刀王)과 유혈이 낭자하도록 칼춤을 벌이는 속편 ‘돌아온 외팔이’가 만들어졌다.
내가 대학생이 된 1970년대 초에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가 연이어 개봉되었고, 이때가 바로 홍콩검술영화의 조종(弔鐘)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내게는 홍콩무협영화의 아우라(aura)가 사라져 버린, 아울러 왕우에게 흠뻑 빠져서 보낸 내 소년시절도 끝이 난 순간이었다. 이소룡을 앞세운 권격(拳擊)영화가 선풍적인 붐을 일으켰고, ‘아뵤-’ 하며 쌍절곤을 휘두르는 그의 광팬이 엄청나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홍콩검술영화의 전성기, 그 가슴 떨리던 열광의 시대는 오래 전에 막을 내렸지만 아직도 내 뇌리 속에는 제1세대 홍콩스타인 왕우에게 심취했던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스라이 흘러가버린 그리운 소년시절과 함께….*